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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철학 - 지혜의 탐구

향약 (鄕約)

 
개요

조선시대의 향촌규약이나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를 일컫는 말.

'일향(一鄕)의 약속(約束)'을 줄인 말로 중국 남송의 주희가 정리한 향약 또는 그를 바탕으로 향촌사회의 사정에 따라 내용을 바꾼 것을 가리킨다. 향약은 사족 중심의 자치규범이기도 하며 유교가치관에 기초를 둔 4강목을 통해 구체적인 행위규범을 설정하여 공동체적으로 강제 규제하는 향촌통제조직이기도 했다. 그러한 향약은 소농경영을 기초로 하는 봉건경제구조가 유지되고 상하의 신분제적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를 이루고, 그러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인간을 형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보급

본래 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인 1076년에 여대충(呂大忠)·대방(大防)·대균(大鈞)·대림(大臨) 4형제에 의해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서 시행했다고 한다. 〈소학〉에도 간략히 소개된 그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의 4강령으로 되어 있으며, 이를 '남전여씨향약' 또는 줄여서 '여씨향약'이라고 한다. 이것을 주희가 남송사회의 현실을 참고하여 이른바 '주자증손여씨향약'으로 만들고 '월단집회독약지례'(月旦集會讀約之禮)를 덧붙였다. 이것 역시 그대로 '여씨향약' 또는 '주자향약'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자대전〉·〈소학〉에 실려 주자학의 수용과 함께 우리나라에 소개된 향약은 일찍부터 사족들 사이에 행해졌다. 1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김문발(金文發)·이선제(李先齊)·정극인(丁克仁)·강응정(姜應貞)과 같은 인물들이 향약을 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약의 시행 초기에는 향약을 조직체보다는 〈소학〉과 같은 일종의 수신규범으로 간주했다. 아울러 향촌에 존재하고 있던 동린지계(洞隣之契)·향촌결계(鄕村結契)·향도(香徒) 등의 조직체를 향약과 혼동하기도 했다. 때로는 향약을 향음주례로 이해하기도 했다.

향약이 중앙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517년(중종 12)부터였고, 사림파에 의해 전국적인 실시 논의가 제기됨으로서 더욱 확대·보급되었다. 향약실시를 주장한 시기에 따라서 내용이나 인식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사림파의 향약시행은 궁극적으로 주자학적 가치관에 입각한 향촌사회의 신분질서확립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실천으로 현경제구조를 유지하여 지주로써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사림파에 있어서 향약의 실시는 도학(道學)의 구현이라는 정치이념의 실현이며 향촌사회에서의 주도권 장악과 정치세력기반의 조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약 2년에 걸쳐 전개된 향약시행 논의는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해 정지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향약의 문제점들이 거론되고 미약하나마 향약을 조직체로 이해하기도 했으며, 경성향약의 시행 주장에서처럼 향약시행을 위해 별개의 시행기구를 조직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뒤 1543년(중종 38)에 김인후(金麟厚)가 공식으로 향약시행을 요청했고, 1546(명종 1), 1571년(선조 4)에도 시행을 주장하는 요청이 있다가 1573년부터 본격적인 시행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이이(李珥)의 '선양민후교화'(先養民後敎化)를 내세운 향약 시행중지 주장이 받아들여져 향약의 전국시행은 정지되었다. 중종과 선조 연간의 논의 과정을 보면, 향약이 유교가치관의 실현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공감을 하면서도 정치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문제로 지적되었다.

향약이 전국적으로 하나의 기구를 통해 실시되지는 않았으나 사림파가 화를 입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개별적으로 실시되었다. 주로 재지사족(在地士族)에 의해 시행된 향약의 성격 및 기능은 시행 주체인 사족층의 향촌에서의 지배권 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향약시행의 대체적인 경향은 초기 사족 중심의 향약으로부터 점차 상하가 함께하는 향약으로 옮겨갔으며, 규모도 대규모보다는 촌락의 생활권을 기준으로 하는 동약으로 옮겨갔다. 물론 조선 후기 향촌 내에서 사족들의 자치권이 약한 경우 수령이 주도하는 향약도 많아졌으며, 자치적 기구보다는 군현의 부세채납기구가 되기도 했다. 조직의 형태도 사창(社倉)과 결합한다거나 학교조직과 겹쳐서 짜여지기도 했다. 한편 향약의 형태나 대상지역 역시 다양하게 나타나서 지역제한을 두지 않는 것도 있으며 군현단위에서 점차 동단위의 동약이 등장했다. 구성원에 있어서 사족만이 참여한 것도 있으며 상하가 함께한 것도 있었다. 이러한 향약을 시행주체에 따라 사족향약·수령향약·상하동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시행단위에 따라 주현향약·동약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 후기 동약은 동계·동규(洞規)·이사계(里社契) 등으로 불렸다.

운영과 기능

향약은 규약문(規約文)·선악적(善惡籍)·참여자명부·독약법(讀約法)으로 구성되는데, 향약에 따라서는 선악적이나 독약법이 따로 없기도 했다. 독약법 안에는 향음주례가 따르기도 한다. 약문은 대체로 강목형(綱目型)과 조목형(條目型:절목형)으로 나타나며, 강목형이라도 그 아래에 절을 두어 상세히 풀어 설명하기도 한다. 상하동약인 경우에 대개는 같은 약문 안에 양반과 하인에 관한 별도의 규정이 실리지만, 향약에 따라서 하인약조를 별도로 규정하기도 했다. 구성원 역시 향약의 성격에 따라 다양했다. 향약에 따라서는 가입을 자의로 받기도 했는데, 약문으로 보아 향약가입이 개인 의사에 맡겨진 것처럼 보이지만 향촌민이 농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강제나 다름없다고 판단되는 향약도 있었다.

향약의 우두머리는 대상범위 또는 성격에 따라 명칭이 달라 도약정(장)·부약정(장)·유사·직월·사화·색장 등으로 불렸다. 최고 의결 또는 자문기구로는 존위(尊位)·존자를 두거나 약중사류회의를 두어 운영했다. 집회는 매월, 격월, 3개월마다, 또는 봄·가을로 열렸으며, 집회장소는 조용한 곳, 서원, 향사당 등이 이용되었다. 상하동약인 경우에 운영을 이원화하여 신분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향약의 경제적 토대는 향약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체로 약원(約員)에게 규정에 따른 일정액을 거두고 상사와 같은 일이 있을 때는 별도로 더 거두어서 충당했다. 금액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거두었고, 그 혜택도 신분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향약이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상호노동력의 제공으로 그치는 것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기존의 노동력 단위인 향도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며, 향도의 기능을 가진 상두꾼을 별도로 인정하여 향약과 함께 운영하는 것도 볼 수 있다.

향약 시행 이전에도 금란계(金蘭契)·사마계(司馬契)·동도회(同道會) 등의 계회(契會)가 있었지만, 재지사족층은 유향소를 세워 유교이념을 확산시키고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향약의 수용과 함께 여러 형태의 계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점차 중소지주로 성장하여 가문을 형성하고 족보를 만들며, 묘위전(墓位田)을 마련하고 족계(族契)·족약(族約)을 구성했는데, 이는 혼반형성 또는 학연이 배경이 되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사족에 따라서 향약을 단순한 수신규범(身修規範)으로 생각할 뿐, 구체적인 향촌민에 대한 통제기구로서의 인식은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유교에서 내세우는 가장 이상적인 통치방식은 교화인데 이 주체는 유자(儒者)인 사족이었다. 유자 스스로 덕과 예를 갖추도록 노력하고 일반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수신규범으로서의 향약 시행은 가장 원형적인 통치행위이기도 하다. 향약이 농민통제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사족들만을 구성원으로 하는 향약이 꾸준히 시행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개별적으로 사족이 주도하여 실시한 향약은 이른바 교화라는 향촌 안의 이데올로기 보급·확산이 중심되는 기능이었다. 향약문을 익히도록 하여 주자학적 질서의 구체적인 규범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주전호제와 사회신분제를 축으로 하는 사회체제 유지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향약 중에는 일정한 한계 안의 재판권, 상벌·처벌의 장악과 농업용수로의 이용, 공동소유 산림의 용익(用益), 신전개간 등을 규정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향약이 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농업생산의 부분적인 사항을 통제하고 상호부조를 통해 농업재생산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으나, 향약이 공동체 그 자체는 아니었다.

향약의 변천

향약은 본질적으로 사족만이 참여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리단위로 시행한 향약인 동약은 임진왜란 이후 향촌사회의 복구과정에서 상하민이 함께 참여해서 구성된 것이다. 이는 사족이 종전의 족규(族規)·사족향약·노비동령(奴婢洞令) 등을 근거로 만들었다. 경작지의 황폐, 농업생산인구의 급격한 감소, 신분제적 질서의 해이 등으로 향촌사회의 통제가 어려워지자 상하동약을 구성한 것이다. 그것은 사족이 주도하는 향촌사회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하나였으며, 여전히 구성원에 대한 규제가 강력한 동약도 있었지만 완화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본질적으로 향약의 성격이 변모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사항에 대한 통제를 구체적으로 가했다. 또한 여전히 상하의 신분제적 질서가 유지되는 가운데 운영되었으며 동약은 실질적으로는 상하로 조직이 나뉘어 운영되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 여(閭) 조직이라든가 10인 작대와 같이 세분화되어 운영되기도 했다. 또한 삼리향약(三里鄕約)에서와 같이 상·중·하의 구분이 등장하기도 했다. 동약은 동단위의 자치조직체로, 어느 정도 자치성을 가질 수 있었으나 향촌 지배의 실질적인 운영을 고려하면 다른 기구와의 관련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동약이 설정한 규정을 준용하고 덕행이 뛰어난 자는 향소에 보고했으며 향소는 수령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17세기의 다양한 향약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수령향약이다. 수령향약은 대상지역이 군현이라는 점에서 '주현향약'이라고도 부르는데, 수령이 주도한 향약은 일찍이 이이가 시행한 '서원향약'이 있었지만 이 시기의 향약은 단순한 교화의 차원을 넘는 군현통치의 한 특징이었다. 조선국가 지배체제의 기본단위인 군현 통치에서 향약이 이용되어, 사족향약인 경우에도 향소 또는 수령에 의해 그 시행이 보장된 적도 있지만, 이 시기의 수령향약은 수령이 직접 주도하여 시행한 것이다. 수령의 군현통치 내용 가운데 하나가 교화인데, 교화는 행정체계에서 보면 관찰사-수령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군현에서는 학교를 교화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교화는 향청과 같은 재지세력 기구의 보완을 받아 실현되고 있었다. 아울러 교화의 주체인 사족들에 의해 시행되던 향약 역시 그러한 역할을 했다. 수령향약이 시행되던 17세기는 군현에 있어서 향소의 지위하락과 같은 재지세력이 약화되어, 향약을 시행할 때 다른 조직과 결합하든가 교화의 강조와 같은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따라서 17세기에 들어서 상하동약이 점차 확산·시행되면서 교화가 더욱 강조되었다. 일찍이 이이의 서원향약에서 소학의 학습 등을 강조했으나 17세기 수령향약에서는 그러한 범위를 넘어섰다. 향약이 수령에 의해 주도됨에 따라 향약에서의 처벌권 자체를 관에서 장악하는 등 직접적인 통제를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향약회에 필요한 물품을 관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수령향약은 재지세력에 대한 규제를 명기하고 있었다. 관부에 대한 재지사족의 간섭은 물론 이들에 의한 향촌민 침학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한 규제는 향리에게도 해당되고, 아울러 일반 향촌민의 결당까지 금했다.

영향

유교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향약의 시행은 농민들의 예속에도 영향을 미쳐 관혼상제에서 유교의례를 수용하게 했다. 향도를 대체하는 상호부조조직의 운용, 의례 준용 여부에 대한 상호감시 및 규제와 같은 것은 농민의 예속을 유교적인 것으로 변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러한 향약의 시행은 향약주도세력에 의한 향촌민에 대한 침학이라는 폐단이 있었고, 그것은 향촌민뿐만 아니라 관의 입장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체 운용의 경험은 이데올로기를 탈색한 계의 확산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약이 본래 교화의 실현체, 조직체라는 점에서 늘 관심을 끄는 것이었고 한말까지도 정부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려 했다. 때로는 주식회사의 설립 모체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그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자치 모델로 연구되기도 했다.

 

  • 참고문헌 (향약)
    • 조선후기 향약연구 : 향촌사회사연구회 편, 민음사, 1990
    • 조선조 향약연구 : 지교헌 외, 민속원, 1989
    • 향청연구 : 김용덕, 한국연구원, 1978
    • 조선초기 향촌지배체제연구 : 김무진,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 조선시대 계의 구조적 특성과 그 변동에 관한 연구 : 김필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조선전기 향약의 보급과 그 사회적 의미-16세기를 중심으로 〈한국의 사회와 문화〉 10 : 김필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 조선중기 사족층의 동향과 향약의 성격 〈한국사연구〉 55 : 김무진, 한국사연구회, 1986
    • 16, 17세기 향약의 기구와 성격 〈진단학보〉 58 : 한상권, 진단학회, 1984
    • 율곡향약의 사회적 성격 〈학림〉 5 : 김무진, 연세대학교 사학과, 1983
    •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 〈한국문화〉 4 : 이태진,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3
    • 향약의 성립과 시행과정 〈한국사론〉 8 : 차용걸, 국사편찬위원회, 1980
    • 우리나라 향약에 관한 연구 : 김명진,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79
    • 조선향약의 실시 경위 및 그 내용에 대한 고찰 〈인문과학〉 23 : 정형우,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70
    • 朝鮮鄕約敎化史の硏究 : 田花爲雄, 鳴鳳社,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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