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i.com Homepage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Philosophy 

철학 - 지혜의 탐구

의례 (儀禮)

가례 (家禮)

 

전통사회에서 가정의 행위규범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주자가 지은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뜻하는 말.

이 말은 본래 〈주례 周禮〉의 가종인(家宗人) 조목에 보이는데, 조빙(朝聘)이나 회맹(會盟)과 같은 집단 사이의 행위규범이나, 조회(朝會)나 군례(軍禮)와 같은 집단의 공식적인 행위규범, 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나 향사례(鄕射禮)와 같은 민간집단의 행위규범에 비해, 한 가족이나 그 구성원의 행위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행위규범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유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대부 계층의 행위규범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가례의 내용이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삶의 중요한 마디들을 대상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행위규범을 담고 있다. 관례는 성인의 상징인 관을 쓰는 것으로 일종의 성인식(成人式)이다. 대체로 남자는 20세에 관례를 행하며, 여자는 15세에 계례(禮)를 행하지만, 혼인을 하게 되면 이 나이가 되기 전에 관례와 계례를 거행한다. 그 절차는 3종류의 모자를 씌워주는 삼가례(三加禮)를 거행하며, 이때 성인으로서 책임을 지도록 자(字)를 지어준다.

혼례는 이성(異姓)의 남녀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는 절차인 동시에, 서로 다른 가정이 인척의 관계를 맺는 의식이다. 이를 통해 남녀는 정식 부부로 인정되며, 함께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며 후손을 잇는 책임을 공유하게 된다. 그 절차는 전통적으로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을 육례(六禮)라 하였으나, 후세에 와서는 납채와 친영 대신 초례(醮禮)와 우례(于禮)를 넣기도 한다. 또 혼인 뒤에 시집에 와서 시부모를 뵈는 현구고(見舅姑)와 사당에 인사하는 고묘(告廟)의 절차가 있다. 상례는 돌아간 사람을 보내는 절차인 동시에 남은 사람의 슬픔과 아픔을 표현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충격과 상실을 주는 죽음에 대하여 치르는 상례는 인정(人情)을 중시하는 유학의 규범 가운데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그 절차와 과정도 복잡하고 시간상으로도 오랜 기간 지속된다. 그 절차는 임종(臨終)의 초상(初喪)으로부터 소생을 비는 고복(皐復)·발상(發喪)·입주상(立主喪)·소렴(小斂)·대렴(大斂)·성복(成服)·영상(靈床)·조문(弔問)·발인(發靷)·성분(成墳)의 절차를 거치며, 상례를 마친 뒤에도 우제(虞祭)·졸곡(卒哭)·소상(小祥)·대상(大祥)·담제(祭)·길제(吉祭) 등의 제사로 이어진다. 제례는 돌아간 조상의 은혜를 기리고 보답하기 위한 의식절차이다. 이는 사시(四時)에 지내는 시제(時祭), 기일에 지내는 기제(忌祭), 묘소에서 지내는 묘제(墓祭)와 속절(俗節)에 지내는 제사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기제인데, 그 절차는 기일 전에 재계(齋戒)를 하고, 강신(降神)·참신(參神)·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유식(侑食)·합문(闔門)·계문(啓門)·진다(進茶)·사신(辭神)·음복(飮福)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관혼상제의 가례는 절차와 과정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 근본적인 목적은 그 절차를 통해 명분을 높이고, 그들의 삶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자존의식을 갖게 하는 동시에 가족 상호간의 애정과 공경을 돈독히 하는 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주자는 이를 가례서(家禮序)에서 '근명분숭애경'(謹名分崇愛敬)이라 하였다. 이 가례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주자학의 유입과 맥을 같이하며, 조선왕조에 들어와 본격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율곡은 〈격몽요결〉에서 특히 제사와 장례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르라고 하였지만, 〈주자가례〉 자체가 세목에 있어서는 불충분한 점이 많이 있고, 또 예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 〈주자가례〉에 대한 수정과 보충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유계(兪棨)의 〈가례원류 家禮源流〉,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 家禮輯覽〉, 이재(李縡)의 〈사례편람 四禮便覽〉, 정중기(鄭重器)의 〈가례집요 家禮輯要〉, 박문호(朴文鎬)의 〈사례집의 四禮輯儀〉 등이 있고, 〈주자가례〉를 번역한 신식(申湜)의 〈가례언해 家禮諺解〉가 있다.

 

관혼상제 (冠婚喪祭)

 

관례·혼례·상례·제례를 이르는 말.

인간이 사는 데 관혼상제는 빠질 수 없는 일들이며, 유교에 입각한 통치질서가 완강했던 조선시대의 관혼상제는 단순한 의례 이상의 것이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는 예(禮)를 본으로 삼았다. 사례(四禮)에 관한 많은 논란이 항시 있어왔으며, 조선시대 이재(李縡)의 〈사례편람 四禮便覽〉이 발간된 이래 200여 년 동안 법전 저술도 많이 나왔다.

관례는 청소년이 머리에 관을 쓰고 성년이 되는 의식으로 주로 양반계층에서 행해졌고 일반 백성들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여자의 관례는 계례(禮)라 했고 대개 혼례식의 일환으로 혼례 직전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혼례는 결혼식을 말하며 의혼(議婚)·납채(納采)·납폐(納幣)·친영(親迎)으로 구분된다. 의혼은 결혼을 의논하는 절차이며, 납채는 사주 또는 사성(四姓)을 보내는 일이며, 납폐는 신랑집에서 신부집에게 혼인을 허락한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예물을 보내는 절차이고, 친영은 신랑이 처가로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의례이다. 상례는 장례식인데, 유언, 임종, 시신을 바로잡는 수시(收屍),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 머리를 풀고 곡을 하여 초상을 발표하는 발상(發喪), 상을 치르는 장본인들인 상제(喪制)와 옷차림새인 복인(服人), 사람을 뽑아 상례 일을 보게 하는 호상(護喪), 고인을 섬기는 전(奠)과 상식(上食), 부음을 돌리는 부고(訃告), 시신에 입힐 수의(壽衣), 상을 당하고 처음 지내는 제사인 설전(設奠)·반함(飯含)·혼백(魂魄)·염(殮) 등의 절차를 말한다. 조상을 기리는 제례는 크게 시제(時祭)·차례(茶禮)·묘제(墓祭) 등으로 나뉜다.

 

관례 (冠禮)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기 위해 갓을 씌우는 의식.

여자의 경우는 계례(澧)라고 부른다. 관례를 치르기 전에는 청소년이었으나 일단 관례를 치른 후에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성인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관례는 보통 15~20세 전후에 행해지는데, 이때는 관례를 받는 자의 정신과 육체가 성숙된 시기이다.

관례의 절차는 먼저 음식을 갖추어 진설(陳設)을 마련하고 관복을 준비한다. 이른 아침 일가친척과 어른들을 초청해 손님을 모시는데, 덕망있고 귀감이 될 만한 손님들이 얼굴과 손을 닦고 나서 의식을 진행한다. 성인이 될 청년이 의관과 신발을 갖추고 뜰에 나와 단정히 앉으면 정성껏 머리를 빗기고 나서 머리에 관을 씌운다. 그뒤 조삼(早衫)을 입히고, 혁대를 띠우고, 신을 신긴다. 손님은 관을 씌우면서 "좋은 날을 받아 처음으로 어른의 옷을 입히니, 너는 어린 마음을 버리고 어른의 덕을 잘 따르면 상서로운 일이 있어 큰 복을 받으리라"는 식의 축복을 내린다. 여자의 경우는 어머니가 주관하여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것으로 끝난다. 이상과 같은 관례는 남자가 일단 성년기에 이르면 상중(喪中)을 피해 가장을 비롯한 친척이 참석하여 장로(長老)의 인도로 가관착복(加冠着服)의 형태로 행해진다. 예(禮)가 끝나면 자(字)가 수여되고 사당에 고한 뒤 참석자들에게 절을 한다. 이후로는 성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여자의 경우는 대개 혼사를 앞두고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례는 갑오경장 이후 신문화 가 들어오면서 사라졌다.→ 관혼상제

 

혼례 (婚禮)

 

혼인을 할 때의 의례(儀禮).

 
전통 혼례
한국은 예로부터 혼인을 가족의 결합으로서 중요시해왔기 때문에 혼인의 의례가 매우 신중하고도 복잡하다. 한국의 혼례 풍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상례(喪禮)에서도 불교식이 많았던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화혼례(花婚禮)가 널리 치러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조오례의〉 등의 기록을 보면 지금의 혼례 풍습이 맨 처음 행해진 때는 조선 초기로, 초기에는 양반 사대부들만 행했으며 서민들에게까지 전래된 것은 조선 후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의혼(議婚)

양가가 중매인을 통해 서로 의사를 조절하고, 대례(大禮)를 거행하기 전을 의혼이라 한다. ① 납채(納采):중매인을 통해 말을 전하고 신랑측 혼주(婚主)가 예서의 서식에 따라 편지를 보낸다. ② 연길(涓吉):신랑집에 택일 단자를 보낸다. ③ 송복(送服):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것을 뜻한다. ④ 납폐(納幣):납폐서와 폐백(幣帛)을 신부집에 보내는 의식을 말하며 함보내기라고도 한다.

    대례(大禮)

의혼의 절차를 거쳐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행하는 모든 의례를 말한다. ① 초행(醮行):신랑과 그 일행이 신부집에 가는 것을 말한다. ② 전안지례(奠雁之禮):신랑이 신부의 혼주에게 기러기를 전하는 의례를 말한다. ③ 교배지례(交拜之禮):신랑과 신부가 대례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절하는 의례이다. ④ 합근지례(合之禮):신랑과 신부가 대례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술잔을 나누는 의식이다. ⑤ 신방(新房):신랑과 신부가 각각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신랑은 옷을 갈아입고 큰상을 받은 후 저녁에는 신방을 꾸민다. ⑥ 동상례(東床禮):점심 때를 전후하여 신부집에 모인 사람들이 신랑다루기를 한다.

    후례(後禮)

혼례의 중심인 대례가 끝나면 신부가 신랑집에 오는 의식과 신랑집에 와서 하는 의례가 남는다. ① 우귀(于歸):신부가 신랑집에 오는 것을 우귀 또는 신행(新行)이라고 한다. ② 현구례(見舅禮):신부가 시부모와 시가 사람들에게 절하는 것으로, 폐백이라고도 한다. ③ 근친(覲親):신부가 시집에 와서 생활하다가 처음으로 친정에 가는 것을 말한다.

 

상례 (喪禮)

 

상중에 행하는 모든 의례.

 
유학자 고 인암 박효수옹의 장례중 곡을 하고 있는 ...
상례란 육신을 떠난 영혼이 무사히 영(靈)의 세계로 귀환하는 데 필요한 의식절차를 갖춤으로써 그 영혼을 전송하고 영혼의 음조(陰助)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례는 다른 예(禮)에 비해서 그 변화의 폭이 적어 장기간 지속되고 가장 정중하고 엄숙하게 진행되며 사회마다 개념과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회·계층에 따라 유교식·불교식·그리스도교식·무속이 혼합된 상례절차가 관행되어왔으며, 이들 상례는 서로 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중에서 오늘날에도 가장 보편적 관행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유교식 상례이다.

한국에서는 초기 불교의 성행으로 불교적인 의식이 행해졌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성행으로 유교적인 상례가 일반화되었다. 유교식 상례는 대체로 주희(朱熹)가 쓴 〈가례 家禮〉를 주로 하여 시의(時宜)와 가풍(家風)에 따라 행해졌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방식은 〈예서 禮書〉에 나와 있는 규정을 상당히 생략하거나 달리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또 죽은 사람의 연령과 지위에 따라서도 내용을 달리한다. 즉 어린이나 혼인 전의 사망, 기혼자의 사망은 그 의례의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민간에서는 청·장년의 사망을 흉상이라 하고, 노년의 사망을 길상이라 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한편 상례를 흉례(凶禮), 제례를 길례(吉禮)라 하여 상·제례를 구분한다.

〈예서〉에는 보통 상례를 초종례(初終禮)로부터 대소상(大小祥)을 거쳐 길제(吉祭)에 이르기까지 19절차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에는 많이 생략되어 10여 개의 절차로 관행되고 있다. 실제 민간에서 관행되고 있는 유교식 상례의 절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종(初終):처음 운명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종(終)이란 세상을 하직했다는 뜻이다. 초종례로는 임종에 대한 준비, 초혼(招魂) 의례, 시체거두기[收屍], 사자상 차리기, 발상, 호상, 부고발송 등에 관한 내용이 있다. 죽을 때가 가까우면 정침(正寢)으로 모신다.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임종(臨終)·종신(終身)이라 한다. 예부터 "종신 자식이 진짜 자식이다"라고 하여 임종을 지켜보지 않으면 큰 불효로 여겼다. 운명을 하면 머리와 손발을 주물러 편 다음 양손과 발끝이 일자로 되게 백지나 헝겊으로 묶는데 이를 수시 혹은 천시(遷屍)라 한다. 죽은 사람의 집에서는 아궁이를 막기도 하는데, 이는 고양이가 아궁이로 들어가면 시체가 일어난다는 속신 때문이다. 초혼은 죽은 사람의 바지나 저고리를 가지고 지붕 혹은 마당에 나가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주소·관직명·성명 등을 부르고 "복(腹)·복·복" 3번 외친다. 초혼이란 인애(仁愛)를 다하는 길이며, 북쪽을 향해 부르는 것은 나간 혼이 다시 소생하기를 북쪽에 있는 신에게 비는 것으로 이를 고복(皐復)이라고도 한다. 사자상이라 하여 문 밖에는 메 3그릇, 짚신 3켤레, 동전 3닢을 담아놓는데 이는 죽음의 3사자를 위해서이다. 수시·초혼의 절차가 끝나면 자식과 아내는 머리를 풀어 슬피 울며 주상(主喪)을 세운다. 상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므로 주위 사람들이 상사(喪事)를 분담한다. 오늘날에는 친족이나 친지 중에서 예에 밝은 사람을 호상으로 정해 상사를 관장하게 하여 부고발송 등 상중의 제반 일을 처리하도록 하고 있다.

② 습렴(襲斂):습은 시신의 옷을 벗기고 향물이나 쑥 삶은 물로 시신을 씻기는 것을 말한다. 시자는 솜에 향물을 찍어 시신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씻긴 후 남자의 얼굴에는 분을 발라주고, 여자에게는 연지·곤지를 찍고서 "새장가 간다, 새시집 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빠진 머리카락과 조금씩 깎아낸 손톱·발톱은 준비한 조발낭(爪髮囊)에 나누어 넣는다. 이 조발낭은 대렴(大殮)시 이불 속에 넣거나 관 속에 넣는다. 이어서 옷을 입힌 후 반함(飯含)을 한다. 반함은 죽은 사람의 입 속에 구슬[無孔株] 혹은 엽전이나 쌀을 물려주는 것이다. 주상이 버드나무 수저로 불린 흰 쌀을 떠서 "천석이요", "이천석이요","삼천석이요" 하면서 입에 넣는데 이것은 저승 가는 길에 양식으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소렴(小殮)은 시체를 절차에 따라 의금(衣衾)으로 싸는 예식으로 습을 한 이튿날에 한다. 대렴(大殮)은 시체를 입관하는 절차로서 소렴 다음날 하나 오늘날에는 소렴에 이어 바로 행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이어 명정(銘旌)을 세우고 영좌(靈座)를 세워 조석으로 전(奠)을 올리면서 곡을 한다. 성복(成腹)은 상제들이 상복을 입는 절차로서 대렴 다음날 하나 요즈음은 대렴에 바로 이어 입는다. 상복은 보통 친계 후손인 8촌까지의 범위에서 입는데 죽은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오복제'를 따른다. 성복을 하고 나면 성복제라 하여 의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조문객을 맞는다.

③ 치장(治葬):시신을 매장하기까지의 절차로서 장지와 장일을 정해 구덩이를 파고, 신주(神主)를 만든다. 〈예기〉에 의하면 황제는 7개월, 제후는 5개월, 대부는 3개월, 선비는 1개월 만에 장례를 지낸다고 했으나 지금은 3일장이 일반적이다. 천구(遷柩)는 영구를 사당에 옮겨 고하고 다시 영구를 안채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관행에 있어서는 천구의 절차는 거의 행하지 않는다. 발인날이 되면 영구를 옮겨 상여에 싣는다. 관을 방에서 들고 나올때 방 네 귀퉁이에 시신의 머리를 맞추고 나오기도 하고, 쪽박이나 바가지를 엎어놓고 깨뜨리면서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잡귀를 쫓는 의미이다. 영구가 떠나기 전 견전제(遣奠祭)를 지내고 상여가 장지를 향해 떠나는데 이를 발인(發靷)이라 한다. 상여가 출발하여 죽은 사람의 친구집이나 다리를 지날 때는 상여를 멈추게 하고 노제를 지낸다. 급묘(及墓)는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매장하기까지의 절차를 말한다. 하관시 시신의 가슴 위에 현훈(玄)으로 폐백을 드린다. 현(검은색)은 하늘을, 훈(붉은색)은 땅을 상징하는데, 이는 별천지를 뜻하는 것이다.

④ 흉제(凶祭):치장이 끝나고 혼백을 상청에 모시고 거행하는 우제(虞祭)로부터 소상(小喪)·대상(大喪)·담제(譚祭)·길제(吉祭)가 끝날 때까지의 각종 제례를 말한다. 반곡(反哭)은 상주가 평토제나 성분제를 마치고 신주나 혼백을 모시고 반혼(返魂)하는 절차이다. 반혼하면 우제를 지낸다. 우제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매장한 후 그의 혼이 방황할 것을 우려해 위안하는 의식이다. 졸곡은 때 없이 하는 곡을 폐지한다는 뜻으로 이때부터는 조석으로만 곡을 하며, 삼우를 지낸 후 3개월 만에 강일을 가려 지낸다.

소상은 사망 후 1주년이 되는 날에 지낸다. 그리고 15개월 만에 담제를 지낸다. 이로부터 조석곡은 폐하지만 삭망일에는 곡을 한다. 대상은 사망 후 25개월이 되는 기일에 지낸다. 3년상이라 부르는 것은 초상에서 탈상까지 3년에 걸치기 때문이다. 담제는 대상 후 1개월이 지난 다음달에 지내는 제사이다. 이는 3년상을 무사히 마쳤으므로 자손들의 마음이 담담하고 평안하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담제까지 마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상례를 다한 것이니 완전히 탈상한다. 담제 후부터는 일반인이 되었다 하여 길제를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별세해서 담제까지 마치면 옛 상례가 4대 봉사(封祀)이므로 5대 할아버지부터는 묘사로 옮겨지는 제사가 된다.

 

 

제례 (祭禮)

 

신명을 받들어 복을 빌고자 하는 의례.

 
정초에 차례 지내는 모습(국립민속박물관)
예부터 동양에서는 천지(天地)·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하여 풍사(風師)·우사(雨師)·사직(社稷)·산악(山岳)·강천(江川), 그리고 선왕(先王)·선조(先祖)를 대상으로 제사를 지내왔다. 전국의 이름난 산천에는 해마다 국가에서 직접 제사를 올렸으며, 풍수설(風水說)이 강해진 뒤로는 더욱 산천을 중시하여 제를 올렸다. 지금은 제사라 하면 단지 선조에 대한 의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하면 선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가옥에서 필수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례는 사후세계의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제사는 사람이 죽어도 혼백은 남아 있으므로 살아 있을 때처럼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조상숭배사상의 유교적 가치관에서 발전해왔다. 〈예서 禮書〉에 따른 한국의 보편적인 제례는 사당제(祠堂祭)·사시제(四時祭)·이제(爾祭)·기일제(忌日祭)·묘제(墓祭)의 5가지가 있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례의 종류는 음력 매월 초하루나 보름 또는 조상의 생일 등에 낮에 간단히 지냈으며, 명절에만 지내는 것으로 바뀐 차례(茶禮), 매년 사망한 날 닭이 울기 전 제주의 집에서 지내는 기제(忌祭), 매년 시월 상달 문중이 모여서 시제답(時祭畓) 비용으로 함께 지내는 시제(時祭)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시제는 묘사로 구분하기도 하며, 차례는 성묘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가묘 (家廟)

 

민간에서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

효를 중심적인 덕목으로 보는 유학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의미를 갖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것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춘추좌씨전〉에 "나라의 중대한 일은 제사와 전쟁이었다"라고 한 말에서 나타나듯이, 제사는 국가의 중대사로서 그 조상을 모시는 사당인 종묘(宗廟)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제사하는 사직(社稷)과 함께 국가를 상징하는 개념으로까지 쓰였던 것이다. 종묘가 집단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가묘는 바로 한 가족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계승을 효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보는 유학에서, 가묘는 단순히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그 가족생명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가족생명 자체를 상징하는 신성소(神聖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묘는 제사장소 이외에 가족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모임의 장소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혼인이나 과거급제와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사실을 보고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기능을 가진 가묘는 집단생명을 상징하는 종묘의 기능과 대비될 수 있는 것인데, 이 점은 그 구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처하는 곳의 동쪽 정결한 곳에 사당을 짓고 내부에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감실을 두며, 중앙에 향로와 향합을 둔다. 다만 종묘에는 시조를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중앙에 두는 데 비해, 가묘에는 대체로 부모에서 고조부까지 4대만을 제사하며, 대가 바뀌면 차례로 그 조상의 위패를 철거한다.

가묘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주자(朱子)가 〈가례 家禮〉를 지으면서 반드시 가묘를 두고 조상을 제사하도록 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다. 가묘제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주자학의 유입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정몽주는 〈주자가례〉와 함께 이 가묘제도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사대부는 물론 점차 일반인에게까지 확대 시행되었다. 다만 초기에 일반인은 물론 사대부의 경우도 반드시 고조부까지 4대를 봉사한 것은 아니었고, 부모나 조부모만을 봉사하던 것이 점차 확대되어 고조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점은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의 부록 '사당도'(祠堂圖)에 증조부까지 3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초기에는 군주에 한정되었던 4대 봉사가 일반에까지 확대된 것은, 가족사이의 애정은 상하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애정은 적어도 4대까지는 지속되었다가 사라진다는 친진(親盡)의 논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제물 (祭物)

제사에 쓰이는 음식.

제수(祭需)라고도 부른다. 제물은 제사형태에 따라 다른데, 조상을 모시는 제사, 마을 당산제, 무당의 무속의례 등에 쓰이는 제물이 각각 다르다. 조상을 모시는 제물차림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강화된 〈주자가례〉의 엄한 법도에 의해 예법상으로 정해져 있다. 유교의식에 의한 기본 제수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① 메 : 백반, ② 탕 : 육탕·생선탕·굴탕·대합탕·두부탕, ③ 좌반(左飯) : 미역·콩잎·어·육 등, ④ 숙채(熟菜) : 무나물·콩나물·숙주나물 등, ⑤ 침채(沈菜) : 동치미, ⑥ 포(脯) : 북어·건대구포·건상어포·오징어포·육포 등, ⑦ 저채(菹菜) : 생김치, ⑧ 어물 : 생선, ⑨ 육물 : 간회·천엽·육회 등, ⑩ 혜(醯) : 식혜, ⑪ 적 (炙) : 육·생선 등, ⑫ 병(餠) : 떡, ⑬ 조과(造果) : 육화·엽과(葉果) 등, ⑭ 과실 : 밤·대추·곶감·배·은행 등, ⑮ 청장(淸醬) : 간장, 주 : 술 등이다.

제수의 진설은 대개 좌포우혜(左脯右醯)·홍동백서(紅東白西)·생동숙서(生東熟西)·어동육서(魚東肉西)·두동미서(頭東尾西) 등의 원칙을 지킨다. 순서는 수저와 술잔, 메·탕을 신위 앞에 놓고 앞줄에서부터 차례로 놓는다. 주자가례의 〈제찬도 祭饌圖〉에서는 앞줄에 과일을 놓고, 2번째 줄에 포·소채, 3번째 줄에 국수·육물·적·어물·떡, 4번째 줄에 메·찬·수저·국을 놓았다. 이이의 〈격몽요결 擊蒙要訣〉에서는 한 분을 모실 경우 앞줄에는 밤·대추·곶감·배·은행, 2번째 줄에는 자반·포·나물·간장·식혜·김치, 3번째 줄에는 탕, 4번째 줄에는 국수·육물·적·어물·떡, 5번째 줄에는 수저와 메·잔·국·촛불을 놓았다. 제사가 끝나면 반드시 음복을 곁들이는데 이는 조상의 음덕으로 수명장수하리라는 소박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마을공동체의 신을 모시는 동제에서의 제물은 유교식 제물과는 달리 무속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정갈한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고 제물준비에 들어간다. 마을 공동 갹출로 제수비용을 마련하여 장에 나가 물건을 준비하는데 반드시 몇 가지 금기(禁忌)가 있다. 물건을 사는 동안에 말을 해서는 안되고 물건 값을 깎아서도 안 되며 최상품의 제수로 준비한다. 제물은 당우물[堂井]의 신성한 물로 정갈하게 씻어, 제관의 집이나 당집에 가서 혼자 준비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을 화주나 도가라고도 부른다. 제물은 신앙의 대상에 따라 다양하다. 대개 윗당은 소식(素食)으로 간단하게 메를 짓고, 술을 준비한다. 아랫당은 풍성하게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통돼지나 통소를 잡아 고기를 준비하고 삼색실과와 떡·전·어물 등을 올린다. 당제의 원형이 남아 있는 마을에서는 고기를 날로 쓰는 경우가 많다. 마을굿의 절정은 음복에 있다. 굿이 끝난 뒤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고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음복을 하며 공동체의식을 갖는다. 무당굿의 제물은 신격의 위상에 따라 다르다. 유교식 제사와는 달리 무속에서는 탕을 쓰지 않으며 떡·전·고기·어물 등을 모두 쓴다. 조상신이 잘 먹는 떡과 대감신이 먹는 떡을 구분하는 등 신에 따라 즐기는 음식이 따로 준비된다. 예를 들면 백설기는 칠성이 좋아하는 떡이 되며 내림굿에서는 방망이떡을 준비하는 식이다. 무속에서 제물의 의미는 신의 영검을 받기 위해 정성껏 차려 올리는 데 있다. 굿에서 쓰인 떡들은 복떡이라 하여 그 자리에서 팔기도 한다. 이 역시 음복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상 (祭床)

제사 때 제물을 차린 상을 말함.

제상을 차리는 법도는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하여 엄히 지켜졌다. 제상(祭床)과 제상(祭狀) 2가지가 있다. 제상(祭床)은 일반적 의미의 제사 상차림을 말한다. 이는 대청이나 방의 정면에 병풍을 치고 돗자리를 깔며 교의를 놓고 그 앞에 놓는다. 앞에는 향상(香床)을 놓고 그 위에 향로·향합·모사그릇·촛대를 놓는다. 과일을 맨 앞줄에 놓고, 포·혜·소채·청장·침채 등을 그 다음줄에 놓는다. 다음에 시접과 찬반·초반을 맨 앞 안쪽에 놓는데, 시접은 서쪽에, 초반은 동쪽, 그리고 찬반은 가운데 놓는다. 제상 진설은 대개 홍동백서(紅東白西)·생동숙서(生東熟西)·어동육서(魚東肉西)·두동미서(頭東尾西) 등의 원칙을 지킨다. 제상(祭狀)은 다른 상과는 달리 상판이 크고 다리가 대단히 높다. 고려말에 중국식 유교의례의 수용과 더불어 중국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반적인 상(床)이 아니라 상(狀)이 씌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예서인 〈국조상례보편 國朝喪禮補編〉에서 제상을 대탁(大卓)이라 했으니, 중국식의 높은 상을 의미했다. 도성에서 멀어지거나 중앙에서 떨어진 향촌사회 말단으로 내려갈수록 상의 높이가 차츰 낮아졌다. 농촌보다는 해안지역의 상이 더욱 낮아졌으니, 관의 입김이 약화된 곳에서부터 낮은 상이 쓰여졌음을 알려준다. 오늘날은 모두 낮은 일반 제상(祭床)을 쓰고 있다.→ 제물

 

기제사 (忌祭祀)

 

매년 고인이 사망한 날 닭이 울기 전 제주(祭主)의 집에서 지내는 제사.

음식차림[陳設]은 동이 틀 때 일찍 일어나 채소·실과·술·반찬으로 한다. 어동육서(魚東肉西:어물은 동쪽, 육류는 서쪽)·좌포우혜(左脯右醯: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두동미서(頭東尾西:생선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조율이시(棗栗梨枾:동쪽부터 대추·밤·배·감의 순서) 등이 원칙이나 지역과 가문에 따라 다르다. 진설은 수저와 잔반(술잔·메탕)을 신위(神位) 앞에 놓고 앞줄부터 차례로 놓아간다. 제사에 있어 합설(合設:두 양주를 함께 모시는 일) 또는 단설(單設:한 분만 모시는 일)에 따라서도 차림이 다르다. 제1열에는 갱반작잔(羹飯酌盞), 제2열에는 어육찬면(魚肉饌), 제3열에는 소채포혜(蔬菜脯醯), 제4열에는 과실을 배열한다. 평소 조상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도 있으나 계절에 따라 시절음식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먼저 날이 밝으면 옷을 갈아입는 제복을 행한다. 옷차림에도 매우 까다로운 법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처지에 맞춰 입는다. 그 다음 사당에 나아가 신주를 받들어 모시는데 사당이 없는 경우에는 간단히 지방(紙榜)을 사용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영정을 중시하여 걸어둔 사진 액자를 떼어다가 제상에 세우는 경우도 있다. 제사지내는 곳은 대청마루가 원칙이나 안방에서도 모신다. 이 점은 주택구조와도 관련이 있으며 사는 형편에 따라 다르다. 시간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자시(子時)로 되어 있다. 관행으로는 대부분 밤 12시를 전후해 지내나 가정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제사절차는 다음과 같다. 신위(神位)께서 강림하여 음식을 들라는 청을 하는 강신(降神),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參祀者)가 절을 하는 첨신(添神), 처음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초헌(初獻), 축문을 읽는 독축(讀祝), 2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亞獻),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終獻), 제주가 다시 신위 앞에 나아가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첨작(添酌), 메그릇의 뚜껑을 열어놓고 수저를 꽂는 계반삽시(棨飯揷匙), 참사자 일동이 방에서 나와 문을 닫는 합문(闔門), 문을 다시 여는 개문(開門), 숭늉을 국과 바꾸어 올리고 읍을 하는 헌다(獻茶), 숭늉그릇에 놓인 수저를 거두고 메그릇에 뚜껑을 덮는 철시복판(撤匙覆板), 그리고 사신(辭神)과 철상(撤床), 음복으로 끝을 낸다. 음복은 모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고인의 옛일을 생각하는 자리이므로, 이웃을 모셔다 대접하기도 하고 음식을 돌리기도 한다.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기'라는 말은 2 가지 뜻이 있는데 음복의 풍성함과 준비의 어려움을 모두 말해준다. 기제를 지낼 때 후손들은 가무잡기를 금하고 정갈해야 한다.

조상숭배란 죽은 사람이 아직도 그들이 사는 집단의 성원으로 살아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생긴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마치 조상이 자기 앞에 계시듯 성심을 다하여 올린다. 예로부터 조상을 영접하는 제사는 엄숙하고 까다로운 절차에 따라 행해져야 후손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여 예서(禮書)에 근거한 제사를 실천하려 했다.

 

  • 참고문헌 (가례)
    • 한국중세예사상연구 : 이범직, 일조각, 1991
    • 조선중기의 예설과 예서 : 고영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15, 1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 21 : 고영진, 서울대학교 국사학회, 1989
    • 조선초기의 예학 〈역사교육〉 40 : 이범직, 역사교육연구회, 1986
    • 조선초기 오례의 운영 〈애산학보〉 4 : 이범직, 애산학회, 1986
    • 조선초기 주자가례의 이해과정 〈한국사론〉 8 : 지두환, 서울대학교 국사학회, 1982
    • 주자가례의 형성과정 〈인문과학〉 45 : 황원구,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81
    • 이조예학의 형성과정 〈동방학지〉 6 : 황원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63

     

동제 (洞祭) 

 

개요

마을의 수호·안녕·풍요를 위해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민간의례의 하나.

역사

일반적으로 동제의 원형으로는 고대사회의 제천의례가 거론되고 있다. 즉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실린 군취가무(群聚歌舞)의 고대적 제천의례를 근현대 동제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제는 고려말·조선초의 본격적인 자연 마을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의 생산력 발전에 따른 자연마을의 형성 및 그에 따른 마을 단위 의례의 변화에서 오늘날 동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전통적으로 사불(祀佛)행사였던 향도(香徒)조직 및 그 의례의 변화이다. 향도는 본래 고려시대의 거군적(擧郡的)인 사불행사였으나 고려말·조선초에 이르면 보다 소규모의 마을단위 조직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다. 이중 매향(埋香)의례를 이 조직이 수행했다는 사실이 매향비(埋香碑)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매향의례는 향나무를 묻어 미륵과 만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희망하는 한편 마을의 안녕을 빌던 일종의 동제였다.

향도는 공동체 수호신앙조직이었으나 조선초 이래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지배계층에 의해 음사(淫祀)로 지탄받는 한편, 조선 중기 향약의 보급과 더불어 재지사족(在地士族) 중심의 동제에 편입되는 등 심한 변질을 겪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촌락 분화가 보편화되고 자연 마을 중심의 운영구조가 정착되면서 상민 중심의 공동제의가 다시 자리잡게 되었다. 현재 볼 수 있는 동제는 이같은 역사적 변모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동제에 유교적 제사의 내용이나 형식이 심층에까지 침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이나 근래의 동제에 대한 현지조사보고를 통해 시기·명칭·동신(洞神)·신당(神堂)·절차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동제는 대개의 경우 정월, 특히 대보름에 지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때로는 2월이나 5월, 10월 등에 지내기도 하나 많지 않다. 5월에 지내는 경우는 주로 밭농사지역인 강원도 등 동북부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10월 상달에 지내는 경우는 추수 후라는 시기로 비추어볼 때 고대부터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명칭

명칭은 '동제'가 압도적이고, 그외에 동신제·산신제·산제·서낭제·당제·당산제·부군당·용왕제 등으로도 불린다. 동제는 유교식 제사가 도입된 이후 많이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산신제·서낭제·당제·용왕제 등이 보다 고형(古形)을 간직한 명칭이다. 당제는 특히 영남과 호남에서, 부군당은 주로 서울 및 인근 지역에서 많이 쓰이는 명칭이다. 또한 이들은 많은 경우 '굿'으로도 불려지는데, 이는 엄숙한 유교식 제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에 의해 일종의 공동체적 축제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많은 경우 동제는 단순한 유교식 제사로 끝나지 않고 동민이 모두 참여하는 대동굿으로 진행된다. 일제강점기 이래 최근까지도 동제를 '부락제'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조선의 풍습을 미신으로 또는 소비적인 형태로 격하시키려는 일제의 의도적인 명칭 조작이었다. 한편 동제의 명칭은 대개의 경우 그 마을에서 공동으로 모시는 봉신(奉神)의 명칭에서 유래하며 '산신'이 가장 대표적인 동신이다. 또 서낭신은 고대로부터의 적석(積石) 풍습과 연결되지만,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되어 조선초 전국적으로 장려되었던 성황제(城隍祭)로 변모된 다음 조선 중기 이후 다시 민간신앙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신 중에서 특이한 경우로는 임경업·최영·단종·남이·공민왕 등 인물신이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자신들의 억압받는 삶을 동일시한 민중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영남지역에서는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入鄕)시조인 골맥이를 동신으로 모신다.

신당은 신목(神木)·돌무더기·당집·굴당(窟堂)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자연상태 그대로의 신목이다. 이는 고대로부터의 거목숭배와 연결된다. 또 신목 밑에 돌제단을 마련한 경우도 많으며, 때로는 솟대·돌무더기·서낭당과 더불어 위치하기도 한다. 서낭당은 강원도를 비롯한 산간지방에 흔한데, 돌로 신당을 꾸미고 그 안에 제단을 마련하기도 한다. 당집은 짚으로 만든 것이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고형(古形)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초가나 기와집이며, 최근에는 슬라브나 시멘트로 지은 경우도 많다. 당집 안에는 대개 동신을 상징하는 신상(神像)이나 위패가 모셔진다. 고형으로는 신체(神體)를 상징하는 방울·쇠말 등이 모셔지는 경우도 있다.

절차

동제는 대개의 경우 대동회의·제의·대동놀이의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제일(祭日) 7일 전이나 보름 전에 마을의 청장년 전부가 모여 동제 준비에 관한 사항을 비롯하여 마을의 대소사에 대해 논의하는 대동회의를 연다. 이때는 전년의 마을 공동사안에 대해 결산하기도 하며 다가오는 해의 각종 공동 관심사에 대해 토론도 한다. 동제에 관해서는 제관의 선출, 제물 준비를 위한 기금 마련 등 동제 진행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 제관으로는 대개 제주·축관·집사 등이 선임되는데, 특히 제주의 경우 자신이나 집안에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선출한다. 제관이 선출되면 그때부터 마을 전체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신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쳐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특히 제관은 부정이 타지 않도록 각종 금기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영남이나 호남 지방의 경우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지신밟기를 하기도 한다. 제일 전에 마을에서 추렴한 공동기금으로 제물을 마련한다. 당일이 되면 제관들이 신당에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 대개의 경우 제물의 진설(陳設)·헌주(獻酒)·독축(讀祝)·소지(燒紙)·음복(飮福) 등 유교식 절차를 따른다. 제사를 끝낸 후 제물을 거두어 제주집으로 돌아와 마을 사람 전체가 함께 음복을 하며, 때로는 마을 공동사안에 대해 회의를 열기도 한다. 해안지방을 비롯하여 많은 지방에서 이러한 유교식 제사 후에 무당이 굿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제사나 굿이 끝난 후, 또는 그 다음날에는 대동놀이가 벌어진다. 대동놀이의 대표적인 예로는 줄다리기·풍물굿의 뒷굿·석전(石戰) 등이 있다. 이는 집단적 신명으로 마을 내의 갈등을 풀고 집단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영향

동제는 기본적으로 산신·농신(農神)·조상신 등 생산의 풍요나 재액의 방지 및 마을 수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신격에 대한 제사이다. 이는 고대로부터의 제천의례가 고려말 이후 마을단위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생산력의 발달과 마을공동체의 형성 등에 따라 좀더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능신(機能神)에 대한 제의로 변모된 것이다. 또한 동제는 단순한 제의로서만이 아니라 대동회의·지신밟기·대동굿 등을 통해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민중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 참고문헌 (동제)
    • 역사 속의 민중과 민속 : 한국역사민속학회 편, 이론과 실천, 1990
    • 한국의 향토신앙 : 장주근, 을유문화사, 1985
    • 한국농경세시연구 : 김택규, 영남대학교, 1985
    • 한국민간신앙연구 : 김태곤, 집문당, 1983
    •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 문화재관리국, 1974-83
    • 동제와 당굿-경기도 양주군의 사례를 중심으로 〈논총〉 17 : 이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1978
    • 朝鮮の部落祭 : 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37

 

오례 (五禮) 

 

전근대시대 국가에서 실시해야 할 것으로 규정한 5가지 의례.

가례(嘉禮)·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빈례(賓禮)를 말한다. 지배층이 집안에서 행해야 할 가례(家禮)의 4례(四禮 : 冠婚喪祭)와는 구별되었다. 이러한 예는 인간들의 사회관계와 정치질서를 규정한다는 의미가 있어 유교적 정치이념을 표방했던 중세시대에서는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오례는 그 원형이 중국의 경전인 〈주례 周禮〉에 있으나, 중국에서도 한대(漢代)에서 진(晉)을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 크게 강조되었다. 당은 개원례(開元禮)를 오례로 구성했고, 이 구조는 중국의 역대 왕조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고려·조선 왕조에서도 강조되었다. 고려 이전에도 오례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의례의 대부분을 생략했다고 한다. 그러나 산천 등에 지내는 제사가 대·중·소로 나누어져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제사에 관한 내용은 〈신당서〉의 길례와도 유사해 신라시대에도 오례와 유사한 의례가 존재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오례의 체계가 수용되고 정리된 것은 예종 때였다. 이후 유학의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최윤의(崔允儀)는 인종대에 〈고금상정례 古今詳定禮〉를 만들었다. 이 책은 고려 초기 이래의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와 고려왕실과 문반관료와의 정치권력구조 상황이 만들어낸 것으로, 이후 〈고려사〉 예지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례적 요소에 바탕을 두고 당에서 정리된 오례의 개념, 즉 왕실중심의 정치적 질서를 중시하는 예제(禮制)를 추구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오례에 대한 연구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배경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더구나 신국가건설에 따른 예제의 정비가 급박한 문제였다. 태종은 왕조의 기반을 확립하면서 오례의 운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라는 특별기구를 설립했다. 의례상정소에서 취급한 예제는 왕권의 위엄만을 수식하는 내용은 아니었으며, 〈주례〉를 정치권력기구의 구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세종대에는 오례운영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려고 그의 이념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그결과 〈세종실록〉에 〈오례〉가 실리게 되었으며, 세조대의 정치적 변동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결국 오례의 완성은 성종대에 이르러 〈경국대전〉과 함께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가 편찬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그후 조선왕조 예제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사회가 변화하면서 예제도 바뀌었다. 1744년(영조 20)의 〈국조속오례의〉·〈국조속오례의서례 國朝續五禮儀序例〉와 1751년의 〈국조속오례의보〉 등은 그런 요구를 반영하여 〈국조오례의〉를 첨삭·개정한 것들이다.

오례 중 고려의 길례는 천신(天神)·지신(地神)·인신(人神) 등에 관한 제례의이다. 이 제례는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나타난 신과의 대화를 제례로 재현한 것이며, 현실세계에서 국가권력의 실체가 제례를 통해 주인으로 나타나는 점을 반영한다. 따라서 고려 이전에 있던 종교적 내용에 준하는 모든 제례를 여기에 통합했다. 그리고 신라 대사·중사·소사의 산신제 모두가 길례에서 빠진 것은 신라적 제의를 거부하려는 정치적 의지로 이해된다. 길례의 주제자(主祭者)는 고려의 왕으로 고려왕실이 가지고 있던 정치권력의 권위와 대의명분이 강조되는 것이다. 길례의 항목은 원구(圓丘)·방택(方澤)·사직(社稷)·태묘(太廟)·적전(籍田)·선잠(先蠶)·문선왕묘(文宣王廟)·풍사(風師)·우사(雨師)·영성(靈星)·마조(馬祖)·선목(先牧)·뇌신(雷神)·마사(馬社)·마보(馬步)·사한(司寒)·제주현문선왕묘(諸州縣文宣王廟)·대부사서인제례(大夫士庶人祭禮)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조선이 들어서자 그 항목 중에서 원구제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기 때문에 폐지되었다.

고려의 흉례는 중국 당나라의 것과 비슷하게 항목이 설정되어 있다. 이 예제는 사망자의 애도를 위한 것인 동시에 왕권이나 국가체제 안에서의 사회질서라는 분명한 목적의지가 담겨진 오복제(五服制)와 여러 신하의 상제가 항목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국왕의 사망시 의례는 전부 빠졌다. 항목으로 국휼(國恤)·진위의(陳慰儀)·부태묘의(附太廟儀)·상국상(上國喪)·백관기가(百官忌暇)·제신상(諸臣喪)·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 등이 있다. 조선의 흉례는 태조의 승하를 계기로 시행되었는데, 그 요점은 중국왕실과 차등을 두고 내적으로 사대부의 의례와도 역시 차이를 두었다.

고려의 군례는 군대에 대한 예제로 군의 최고통치권자가 국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항목으로 견장출정의(遣將出征儀)·사천의(師遷儀)·구일월식의(救日月食儀)·동계대난의(冬季大儺儀) 등이었다. 여기서 군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강무(講武)·수전(狩田)·사례(射禮) 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은 태종대에 강무 등의 의례를 작성했으며, 취각령(吹角令)과 같이 긴급사태 발생시 군사의 명령체계 전달을 연습하는 항목이나 대사례(大射禮) 등을 보강했다. 〈국조오례의〉에는 군의 출정에 관한 사항을 모두 뺐다.

고려의 빈례는 원래 왕과 제후와의 만남을 위한 예제이다. 고려왕조에서는 국제관계의 예제가 반영되었다. 그런데 빈례항목은 매우 빈약해 총 5개이며, 그 중에서 3개항이 중국 명나라와의 관계이다. 이런 점은 〈고금상정례〉의 기사가 조선 초기에 남아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빈례의 특징은 명나라를 제외한 북조(北朝)와의 의전에서 고려왕이 사신과 대좌시 남면(南面)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위치를 유지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사대명분론에 입각해 운영하고, 그밖에 왜(倭) 등과는 교린관계로 처리했다.

고려의 가례는 가장 많은 의례를 나타내고 있으며, 왕실과 관료 사이, 중앙관료와 지방관료 사이에서 행하는 의전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주로 당서(唐書)에 나타난 황실중심의 권력구조와 왕자·신하와의 관계를 의전으로 소화했던 것을 모방하여 제정했다. 그러나 가례 끝에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넣은 것은 만민과 친해야 한다(親萬民)는 〈주례〉의 가례이념에 충실하면서도 고려의 전통을 존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가례에 향음주례(鄕飮酒禮)가 빠졌다는 사실은 고려에서 유교문화 수용의 범위가 왕실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항목은 책태후의(冊太后儀) 등 총 55개이다. 조선시대에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없어지고, 대신 향음주례·개성부급주현양로연의(開城府及州縣養老宴儀)·문무과영친의(文武科榮親儀) 등이 새로 편입되었다. 전반적으로 〈국조오례의〉에서 서례가 따로 편집되고 보다 상세한 의례운영을 위한 도설과 설명이 들어갔다.

  • 참고문헌(오례)
    • 한국 중세 예사상 연구 : 이범직, 일조각, 1991
    • 조선중기의 예설과 예서 : 고영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조선조 기호학파의 예학사상연구 - 송익필·김장생·송시열을 중심으로 : 배상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 16세기말 사례서의 성립과 예학의 발달 〈한국문화〉 12 : 고영진,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1
    • 15, 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 21 : 고영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9
    • 성리학시대의 예사상 〈한국사상대계 Ⅳ〉 : 윤사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4
    • 조선조 예사상의 연구 - 성리학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동양학〉 13 : 윤사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83
    • 조선초기 주자가례의 이해과정 〈한국사론〉 8 : 지두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2
    • 이조예학의 형성과정 〈동방학지〉 6 : 황원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63

 

제천의식 (祭天儀式)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하늘에 대한 숭배는 많은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하늘이 불접근성·무한성·영원성·창조성으로 신성(神聖)이 존재하는 곳 또는 신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천신에 대한 신앙은 보편적으로 존재했는데, 그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땅의 풍요를 보증했다고 믿었다. 천신은 세계창조를 끝마친 뒤 세상 일에서 떠나고, 고조선의 환인(桓因)처럼 아들이나 손자를 통해 인간들을 직접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광명신(光明神)·일신(日神)·월신(月神) 또는 바람·비·번개·천둥·운석(隕石)·무지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대개 천신을 주신(主神)으로 생각해 제천의식을 치렀다. 알타이족의 천신은 칸(Khan)이라고 불렀는데, 보편적 주권자로 이 신의 명령은 존중되었다. 그러나 이 신은 직접 통치하지 않고 지상에 신의 대리인 칸을 보내 통치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천(天)은 천상에 있다고 상상한 최고의 신이다. 은(殷)나라의 갑골문에 보이는 '제'(帝)는 후에 천(天)으로 불린 신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갑골문의 제는 비를 내리고 한해(旱害)를 일으키는 등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또 이 제는 왕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쳐 왕이 외국을 정벌할 때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때에는 제에게 물어 승인을 얻어야 했다. 때로 제는 왕에게 재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왕은 제의 의지에 따라 그 흥망이 결정되는 것으로 여겨져 후에 '천명사상'(天命思想)으로 이념화되었다. 황제는 지상 전체 인민의 의지인 천제의 명을 받아 천자로서 지상을 지배했으므로 천제(天祭)를 지내는 것은 그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그 제사는 원구(圓丘)·남교(南郊)·명당(明堂) 등에서 치러졌다.

우리 민족의 천신신앙과 제천의식은 고조선부터 조선말까지 우리의 정신에 흐르는 중요한 물줄기이며, 민족문화를 구성하는 주춧돌 성격을 지녔다. 우리나라에서 천신은 고대부터 지고신(至高神)으로서의 위치를 가졌으며,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면 하늘(또는 하느님)을 찾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식은 고대에는 부족사회의 전통에 따라 전승되다가 점차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국가의례로서 자리잡았다. 그러나 국가의례로서의 제천의식도 각 시대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고조선의 단군신화는 천신이 내려와 인간을 다스리는 건국신화의 형태를 보이는데, 여기서 천신이 내려온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의 신시(神市)는 천신이 정사를 보는 도읍이자 천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는 제단으로 파악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는 영고(迎鼓)라 하여 은정월(殷正月:12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고구려의 제천의식은 10월에 올리며 동맹(東盟)이라 불렀고, 동예는 10월에 무천제(舞天祭)를 지냈다. 특히 부여는 군사(軍事)가 있을 때에도 제사를 지내 소의 발굽뼈로 점을 쳐서 길흉을 가렸다고 한다. 또 삼한에서는 천군이라는 전문 사제를 두어 제천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 제천의식은 나라 전체의 큰 행사로 음주가무(飮酒歌舞)가 곁들여지는 성대한 행사였는데, 일종의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이러한 음주가무의 축제는 민족 공동체의 생활문화로서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계승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하늘뿐만 아니라 일월성신(日月星辰)·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악해독(山川嶽海瀆)·조상선현(祖上先賢) 등에도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많은 신 가운데 천신을 제일 우위에 두는 유일지고(唯一至高)의 천신신앙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와 같이 고조선 건국신화의 환인·환웅(桓雄)·단군(檀君)의 성격이나, 부여에서 군사가 있을 때 제천하며 점을 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천신이 인간사를 좌우하는 지고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 같다. 또 환웅이 인간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올 때 바람신·비신 등을 데리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천신은 농업신과 관계가 있으며, 고대 제천의식의 성격은 농제적(農祭的)인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격은 그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가뭄이 들거나 흉년이 들 때 국가적으로 제천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고대의 제천의식은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족이나 국가 전체의 중요한 의식이었고, 사회 성원들에게 공동체의식을 심어주는 기능을 했다.

고구려에서는 동맹 외에도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잡은 동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유리왕과 산상왕대에 교제(郊祭)에 쓸 희생인 돼지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고구려 초기에 희생을 바치는 제천의례를 정기적으로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대단(大壇) 또는 남단(南壇)을 쌓고 왕이 천지(天地)와 오제신(五帝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신라에서는 〈삼국사기〉에 시조묘와 신궁(神宮) 및 산천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나타나지만 제천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에는 일신과 월신이 있었는데, 이 신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뒤 갑자기 일광·월광이 사라지고 천지가 어두워져 이를 되살리기 위해 제천의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온 천신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그에 대한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보아 신라에도 제천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가야에도 구체적으로 제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시조인 수로왕 신화에 가야인들의 하늘숭배사상·노래·춤·주술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제천의식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고대의 건국신화는 그 시조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다스렸다는 천신사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전의 전통사상과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특히 전통적인 천신은 불교의 천신인 제석천(帝釋天)과 비슷하게 여겨져 이후 불교의식에서도 제석천 등의 천신에 관한 의식이 고려시대까지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고려의 제천의식은 중국의 한대를 거쳐 당·송대에 정비된 의례를 도입함으로써 매우 세련된 의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원구단(圓丘壇)에서의 제천행사가 성종 때부터 행해져 오제(五帝)와 호천상제(昊天上帝)에 대한 제사가 행해졌다. 고려시대의 국가적인 제사의 종류는 크게 원구단에서 제천하는 것, 사직에서 봄·가을로 제사하는 것, 태조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원구단에서 왕이 초봄에 천제를 드리는 것은 기곡제(祈穀祭)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예기〉에 의하면, 천자만이 제천의식을 행할 수 있고 제후는 경내(境內)의 산천에만 제사할 수 있었다. 고려가 천자의 예에 따라 제천을 행한 것은 고대 사회 이후의 고유한 제천전통과 중국에 대한 자주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단군숭배의식이 활발하게 일어나 황해도 구월산에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제사드렸다. 또 염주(鹽州:지금의 연백) 동쪽에 있는 전성(氈城)은 옛날에 제천하던 단(壇)으로 전해지며,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도 단군신앙과 연결되어 제천의례가 거행되었다. 특히 마니산의 참성단은 초제(醮祭)를 드림으로써 단군신앙과 도교신앙이 결합된 제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리학이 정착된 조선 초기에는 〈예기〉의 규정에 따른 제천의식폐지론이 대두했다. 즉 조선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표방하여 중화적 천하관을 받아들임에 따라 조선을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천자의 의례인 원구의 제천의례를 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므로 원구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천의례가 우리의 역사적 전통으로 기곡(祈穀)·기우(祈雨) 등 백성의 삶과 직결된 의례임을 알고 우리의 자주권을 강조하여 원구제도와 의례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원구제도와 제천의례의 폐지에 대한 찬반론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세종 때 〈오례의〉를 완성하면서 원구를 폐지하고 제천의례를 중단했으나, 세조는 의례의 제도와 절차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거쳐 다시 제천의례를 거행했다. 세조의 제천의례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뒤 자신의 왕위 정당성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의례적 실천이라는 정치적인 의미를 많이 띠고 있다. 따라서 자세한 고증 뒤에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성대하고 규모있게 회복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뒤 사림파의 정계진출과 함께 제천의례는 급격히 쇠퇴하여 실질적으로 소멸했다.

국가의례로서 제천의례가 다시 실시된 것은 1897년(고종 34)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광무개혁을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그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례로서 제천의례를 실시했다. 이때 제천의식을 행하기 위해 원구단을 서울 소공동 남별궁터에 쌓았는데, 1913년 총독부가 황궁우(皇穹宇)만 남겨두고 원구단을 헐어낸 뒤 철도 호텔(지금의 조선 호텔)을 지음으로써 제천의례가 중단되었다. 국가의례로서의 제천의식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했으나, 민간에서는 계속 그 뿌리를 간직해왔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한 종교적 염원으로서 환인·환웅·단군 등의 3신을 모시고 제천의식을 행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조직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신앙인 무속(巫俗)에서도 천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당들이 섬기는 신들을 보면, 천신·천왕신(天王神)·천신대감신(天神大監神)·제석신(帝釋神) 등은 천신계통의 신으로서 무신(巫神) 가운데 최고신이었다. 현재에는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고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과 강원도 태백산의 천제단 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국가의 태평과 국민의 안정, 민족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 참고문헌 (제천의식)
    • 한국사강좌 1 - 고대편 : 이기백·이기동 공저, 일조각, 1983
    • 한국고대의 제천의례 〈국사관논총〉 13 : 최광식,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제천의예의 역사적 고찰 〈대동문화연구〉 25 : 금장태, 성균관대학교, 1990
    • 한국고대의 종교전문가 〈광장〉 10 : 서영대, 1988
    • 다산 예학에서의 제천의례 문제 - 춘추고징을 중심으로 〈한국학〉 35 : 금장태, 중앙대학교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1986
    • 제천의식과 무:그 역사적 변천과 사회구조적 의미 〈제1회한국학국제학술회의 논문집〉 : 장윤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 위지동이전에 나타난 제천양식과 가무 〈대동문화연구〉 13 : 양재연,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9

주문공가례 (朱文公家禮)

 

중국 송나라 때 성리학자 주희(朱熹:1130~1200)가 일상생활의 예절에 관해 모아 기록한 책.

4권. 〈사고제요 四庫提要〉에는 〈가례〉라는 제목으로 5권과 부록 1권이 실려 있다. 이책은 주희의 장례식 때 참석한 조객에 의해 제시되었고, 내용이 주희의 말년에 제시했던 예설과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에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주문공문집〉에 〈가례서〉가 있고, 〈가례부록〉에 이 책을 다시 얻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음을 근거로 주희가 지은 책으로 보고 있다. 〈문집〉이나 〈어류 語類〉에 나타나는 내용으로 보아, 주희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한 후인 17, 18세부터 예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수집·정리하여 4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한 후 일부를 찬술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초년의 부친상과 중년의 모친상을 겪으면서 인정(人情)에 맞고 실제로 행하기 쉬운 예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그후에도 계속 수정하다가 만년에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10권으로 된 〈찬도집주문공가례 纂圖集注文公家禮〉, 7권으로 된 〈문공가례 文公家禮〉, 8권 또는 4권으로 된 〈주문공가례의절 朱文公家禮儀節〉, 〈가례〉 4·5·7권본 등의 판본이 전한다.

이와 같이 판본에 따라 차이점이 있으나 편차에는 큰 차이가 없다. 〈성리대전서 性理大全書〉에 실린 〈가례〉를 기준으로 편차목록을 살펴보면, 권1 가례도설 (家禮圖說), 권2 가례서 (家禮序)·통례 (通禮)·관례 (冠禮)·혼례 (昏禮), 권3 상례 (喪禮), 권4 상례· 제례 (祭禮)로 되어 있다. 권1의 〈가례도설〉은 주로 가묘(家廟)·사당(祠堂)·관리(冠履) 등에 관한 도설이 실려 있다. 권2 가운데 〈통례〉는 사당·심의제도(深衣制度)·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로서 사마광(司馬光)이 〈서의 書儀〉에서 다루었던 것과는 다르며, 〈관례〉는 관(冠)·계()의 2조목으로, 〈혼례〉는 의혼(議昏)·납채(納采)·납폐(納幣)·친영(親迎)·부견구고(婦見舅姑)·묘견(廟見)·서견부지부모(壻見婦之父母)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목에서 보듯이 혼례의 시간적인 경과에 따라 거기에 맞는 예법을 서술한 것이다. 권3·4의 〈상례〉는 초종(初終) 부터 성분(成墳)까지의 예로서 우제(虞祭) 및 거상잡의(居喪雜儀) 등에 필요한 모든 예법을 설명했다. 권4의 〈제례〉는 사시제(四時祭)·초조(初祖)·선조(先祖)·예()·기일(忌日)·묘제(墓祭)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사마광의 〈서의〉에 비해 전통적인 의례의 비중이 적고 속례(俗禮)와 주희의 독자적인 형식을 덧붙였으나, 편차나 협주에 인용되는 '사마온공왈'(司馬溫公曰)에서 보듯이 사마광의 설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말기 성리학의 수입과 함께 전래되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7세기 이후 예학의 흥기와 함께 사대부들의 의례로 정착되었으며, 여러 유학자들에 의해 주석서가 저술되기도 했다. 인종 때 김인후(金麟厚)의 〈가례고오 家禮攷誤〉, 명종 때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 奉先雜儀〉, 이황(李滉)의 〈퇴계상제례문답 退溪喪祭禮問答〉 등이 있으며, 이후에도 조선 말기까지 많은 예학서들이 발간되었다.

  • 참고문헌(주문공가례)
    • 한국중세예사상연구 : 이범직, 일조각, 1991
    • 조선중기의 예설과 예서 : 고영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15, 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 21 : 고영진, 국사편찬위원회, 1989
    • 성리학시대의 예사상 〈한국사상대계 4〉 : 윤사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4
    • 조선초기 주자가례의 이해과정 〈한국사론〉 8 : 지두환, 국사편찬위원회, 1982
    • 주자가례의 형성과정 〈인문과학〉 45 : 황원구, 연세대학교, 1981
    • 이조예학의 형성과정 〈동방학지〉 6 : 황원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63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Jesusi.com Homepage



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