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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불교 (佛敎, Buddhism)

개요

BC 6세기말에서 4세기초경 동북인도에서 창시된 종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로서 전아시아인들의 정신적·사상적·문화적·사회적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왔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서양세계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rtha)라는 한 역사적 인물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수행을 통해 '부처'(Buddha 佛陀), 즉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이다.

기원과 역사

원시불교

   불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

불교가 출현한 때인 BC 6세기경에는 당시 인도의 기성종교였던 브라만교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BC 1500년경부터 인도 서북부를 침공하여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아리아인들은 4성 계급(vara) 제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구축했다. 브라만교는 4계급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사제계급인 브라만(Brhmaa)들에 의해 형성된 종교·윤리·문화 전통으로서, 베다라는 성전에 근거한 다신(多神) 신앙을 지닌 종교였다. 여기서는 신과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의례를 중요시했으며 4계급이 각각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했다.

브라만교는 주로 인도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BC 6~7세기에는 갠지스 강의 중류와 하류를 따라 인구이동이 생기면서 북인도의 중부와 동부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지역에는 풍부한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가 생겨나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종래의 부족국가 대신 코살라와 마가다 같은 강력한 군주국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브라만들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도시의 세속적 분위기는 보다 합리적인 형태의 새로운 종교를 요구하게 되었다. 종래의 번잡한 제사의례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제사행위의 대가로서 사후에 천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관념에도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인 〈우파니샤드 Upanishad〉 사상에도 이미 나타났다. 인간은 '유한한 행위'(業 karma)로서는 도저히 영원한 세계를 얻을 수 없고 끊임없이 윤회(sasra)의 세계에서 생과 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과 더불어 인간의 참자아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아는 신비적 지식(jñna)을 통한 해탈이 강조되었다.

그런가 하면 브라만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베다나 브라만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사행위와 내세를 거부하는 자유사상과 새로운 종교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사문(沙門 ramaa)이라 불렸는데 그들은 출가자(出家者)들로서 걸식생활을 하면서 숲속에서 고행과 명상을 통해 인생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해결방식을 제시했다. 주위에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모여들어 그로써 하나의 출가 공동체(sagha)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는 철저한 유물론자·숙명론자·도덕부정론자들도 있었으며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니간타 나타푸타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그들과 같은 사문으로서 인생고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해탈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석가모니의 생애

석가모니의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達多 Siddhrtha)로서 고타마는 그의 성씨였다. 석가(釋迦 kya)족 출신의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 혹은 간단히 석존(釋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족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BC 560년경(460년경으로 보는 설도 있음)에 이 왕국의 정반왕(淨飯王 uddhodana)과 마야 부인(摩耶夫人 Mahmy)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까지 두었으나 인생고의 문제를 깊이 자각한 후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유행사문(遊行沙門)으로서 마가다 국에 가서 여러 출가 사문들을 만나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깊은 선정(禪定 dhyna)에 드는 체험을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했다.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서 떠났고, 그는 홀로 숲으로 가서 이른바 보리수(菩提樹:나중에 붙인 이름으로 avattha라는 무화과 나무의 일종)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체험을 하는 중에 깨달음(菩提 bodhi)을 얻어 부처,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석존의 성불체험이었고 불교가 시작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오랫동안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지냈으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法 dharma)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석존은 제일 먼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고행을 하던 걸식승 다섯 비구를 찾아 그들에게 고행이나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따라 수행할 것을 말하고 '4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8가지 바른 길'(八正道)에 대한 설법을 하여 그들을 제자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시작이었다.

석존은 마가다 국에서 교화활동을 하면서 사리불(舍利佛 riputra)·목건련(目連 Maudgalyyana)·가섭(迦葉 kyapa) 등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수달다(須達多 Sudatta)와 같은 부유한 상인들도 있었고,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Bimbisra)도 있었는데, 빔비사라는 석존이 머물 수 있도록 죽원(竹園)을 보시(布施)하기도 했다. 한편 석존은 고향인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하여 부모와 재회하고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으며, 그의 종형제 데바닷타(提婆達多 Devadatta)와 아난다(阿難陀 nanda)도 그의 출가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석가모니의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 고타미(Mahprjpt Gautam)도 수차례의 간청 끝에 출가의 허락을 받아 첫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그후 많은 여자들이 출가하여 비구니 승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석존은 35세 때 성도(成道)한 후 입적하기까지 45년 동안 주로 마가다 국과 코살라 국을 중심으로 중인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했다. 80세에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에 병을 얻어 반열반(般涅槃), 즉 육신을 떠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죽음을 앞두고 석존은 승가의 앞날을 염려하여 많은 유언을 남겼다. 석존은 자신이 죽은 뒤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와 법(dharma)을 의지하여 수행할 것을 가르쳤으며 자신이 남긴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권했다. 〈대반열반경 大般涅槃經 Mah- parinibbna-sutta〉에 의하면 석존의 사후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골(遺骨 arra)은 중인도의 8부족들에 의해 분배되어 각기 사리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것은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어느 정도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교설

석존의 교설은 그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와 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존은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pa)·수(受 vedan)·상(想 sa)·행(行 saskra)·식(識 vijñ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석존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석존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서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irva)이라고 부른다. 석존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현세에서 열반을 실현한 여래(如來 Tathgata)가 사후에 존재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석존은 이에 대하여 가부를 논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그가 대답을 거부한(無記) 것으로 전해지는 14가지 사변적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석존은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석존은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석존은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

    초기 수도공동체

석존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출가 사문들은 승가라는 수도공동체를 형성했다. 승가는 석가모니 부처와 그가 설한 법과 더불어 이른바 불교의 3보(三寶)를 이룬다. 석존을 따르는 출가 사문들은 석자(釋子), 즉 정신적인 의미에서 석존의 아들들이라 불렸으며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성문(聲聞)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누구나 원하면 출가해서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승가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이고 개방된 사회였다. 다만 승가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신체적 결함을 지닌 자나 범법자들은 승가에 들어올 수 없었다.

석존은 출가 수행자들의 자기완성과 공동생활을 위해 그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제정해 주었다. (戒)란 도덕적 규범들로서 수행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율(律)은 출가 수행자들이 공동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들을 말한다. 계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5계로서 살생·도둑질·거짓말·간음·음주를 금하는 것이며, 이 5계는 출가승들은 물론이요 일반 재가신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도덕적 규범이다. 출가승들이 지켜야 하는 계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서 남자 출가승으로서 수계식을 거친 비구승인 경우 구족계(具足戒)라고 불리는 227계(또는 250계)를 지켜야 하며, 비구니의 경우는 311계, 그리고 20세 이하의 출가 사문인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의 경우에는 10계가 있었다.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는 승가를 구성하는 4부류의 출가자들이었으며, 사미니의 경우는 18세가 되면 정학녀(正學女)가 되어 2년 동안 더 수행한 후 비구니가 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학녀를 별도의 그룹으로 보면 승가는 5중(五衆)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석존은 계율들을 일시에 체계적으로 설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제정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규정이 늘어나고 공동체 생활 자체가 제도화됨에 따라 계율도 체계화된 것이다. 본래 석존과 그의 제자들은 일정한 주처 없이 유행하면서 걸식을 하고 야숙을 하거나 나무 밑에서 잠을 자는 등 비교적 극기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부유한 재가신자들이 주처를 제공함에 따라 점차로 정착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인도의 계절상 여름의 장마철이 오면 유행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본의아니게 생명체들을 해칠 우려도 있기 때문에 우기 동안은 수행자들이 한 곳에 모여 우안거(雨安居 vara)를 보내야만 했으며 이것이 관습화되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유행을 포기하고 비하라(vihra 精舍)에 거주하면서 수행하는 정주공동체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정주승가는 일정한 지역적 경계(sm)를 지니고 있었으며 한 경계 내에 있는 수도승들은 공동체의 회의나 행사에 반드시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 정주 승가를 구성하는 최소 인원은 4명이었으며 구족계를 주고 비구가 되게 하는 수계식(授戒式)을 행하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한 10명의 비구가 필요했다.

승가의 생활은 금욕적인 삶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좌선을 하며 식사는 1일 1식으로 오후식은 금지되었다. 수도승들은 재가자들이 기부한 승가의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사유물로서는 3종의 가사의(袈裟衣), 1개의 밥그릇(食鉢)과 좌구(坐具) 등 6물(六物)뿐이었다. 원시 승가가 행하는 의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포살(布薩)이라는 의례로서 한 경계 내에 있는 수도승들이 1개월에 2회씩 모여 구족계를 어기지 않고 지켰는지를 점검하면서 자신들의 생활을 성찰해 보는 의식이었다. 수도승들은 한 곳에 모여 구족계를 설한 계경(戒經 Prtimoka-stra)을 공동으로 암송하면서 계를 범했는지의 여부를 조목조목 점검하고 범한 경우에는 고백을 해야 했으며,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이나 제재를 받게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는 바라이(波羅夷) 죄로서 살인(斷人命)·도둑질(盜)·성행위(淫)·거짓으로 수행의 완성을 주장하는 죄(大妄言)를 범하면 승가로부터 영구히 추방당했다. 우안거가 끝날 때는 참여했던 모든 수행자들이 모여 자자(自恣)라는 안거 해산의식을 가지며 재가자들이 지어주는 새 옷 3벌을 받는 의식도 행해졌다. 정주승가는 마을로부터 그리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도승들이 걸식을 하러 가기에 불편이 없었으며 재가신도들도 수시로 방문해 승려들의 설법을 들을 수 있었다.

승가의 목적은 세속과의 단절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수행을 돕기 위한 환경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 출가승들은 자유로이 환속할 수 있었으며 승가 내에는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수행 경력이 많은 비구의 지도를 따라 수도생활을 영위했으며 모든 중요한 일들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중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상과 같은 승가의 전통은 수천 년 간 이어져와서 오늘날도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재가불교

석존의 가르침은 주로 출가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재가신자들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석존은 45년간의 긴 교화활동을 통해 수많은 재가신자들의 귀의를 받았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설법을 베풀어주었다. 출가자들에게 베푼 설법이 사성제나 팔정도와 같이 주로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면 재가신자들을 위한 설법은 대체로 도덕적 삶을 통해 내세에 좋은 과보를 얻도록 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할 계로서 석존은 5계를 가르쳤으며 주술이나 점복 등을 금하고, 동물의 희생을 수반하는 제사를 금했으며, 베다 성전의 권위나 혈통에 의한 브라만 계급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재가신자들에게 증오는 또 하나의 증오를 일으키며 증오와 원한은 결코 또다른 증오와 원한에 의해 해결될 수 없음을 가르쳤다. 세상에서 아무리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무상하고 덧없는 것이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가 하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고용인, 출가자와 재가신자 간에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베풀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재가신자를 위해 석존은 상행위에 있어 지켜야 할 신용과 근면성을 강조했으며 재산증식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부의 축적은 오히려 권장했다.

재가신자들은 석존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佛)·법(法)·승(僧) 3보에 귀의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시했다. 재가신자들은 석존의 사후에 탑(塔 stpa)에 안치된 그의 유골 숭배를 통해 석존에 대한 신앙을 표시하는가 하면, 승가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켜줌으로써 승가에 대한 귀의를 표시했다. 석존 당시부터 부유한 장자들은 금전·토지·건물·숲·동산 등을 승가에 기증했으며, 이같은 행위를 통하여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내세를 위해 선근(善根)을 심고 공덕(功德 puya)을 쌓는다고 믿었다. 한편 출가승들은 재가신도들의 재시(財施)에 대하여 설법을 통한 법시(法施)를 베풀어주었다.

부파불교

    결집(結集)과 근본분열

석존의 생존시에 승가 내에 교리나 수행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승가의 화합은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높은 인격과 카리스마로 인해 승가의 절대적 귀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스로를 교단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러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종형제였던 데바닷타가 자신을 교단의 우두머리로 세워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석존은 사후 승가의 화합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 석존의 마지막 날들의 행적에 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석존은 사후 자신이 가르쳐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부촉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석존의 입적 후 그의 교설에 관한 상이한 이해와 전승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승가는 곧 석존의 교설내용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으며, 이를 위해 승가의 대표자들이 모여 이른바 결집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결집이란 석존의 가르침을 모인 사람들이 합송(合誦 sagt)하여 확인하는 행위로서 제1차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阿羅漢:수행을 완성한 자)들이 모여 가섭의 주재로 열렸다고 한다. 이때 석존의 교법은 그를 항시 가까이 모시고 있던 아난다에 의해 암송되었으며 율은 계율에 정통한 우파리에 의해 송출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들에 의해 송출된 법과 율이 지금의 팔리어 장경이나 한역 대장경에 들어 있는 형태의 경과 율의 내용을 완전히 갖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다만 그 근본적인 사상만이 간단한 단문이나 게송(偈頌) 형태로 읊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경과 율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내용이 확장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율·논(論)을 일컬어 삼장(三藏)이라 부르지만 그 가운데 논장을 구성하는 논서들은 경이나 율보다 훨씬 후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집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석존의 가르침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해석을 둘러싸고도 이론(異論)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불교가 지역적으로 중인도를 중심으로 해서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고 비구승의 수도 많아지게 됨에 따라 계율의 실천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팔리어 율장에 의하면 석존의 입적 후 100경에 야사(Yaa)라는 비구가 당시 상업적으로 번창하고 있던 도시 바이샬리에 갔다가 그 지방 비구들이 신자들로부터 금·은 등을 보시받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오히려 그들로부터 빈축을 사게 되자 그 지방 서쪽 지역에 있는 비구들에게 도움을 청한 결과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계율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비구들은 바이샬리 비구들이 행한 10개 사항(十事)을 심의하여 불법임을 판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율장이 전하는 바이나 실론의 사서 〈도사 (島史) Dpavasa〉에 의하면 그 회의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수많은 비구들이 따로 모여 대중부(大衆部)라는 파를 형성함으로써 승가는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그후 다시 양파로부터 일어난 분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근본분열이라 부른다. 바이샬리 비구회의는 십사의 심의가 목적이었지만 〈도사〉에 의하면 레바타(Revata)를 수좌로 한 700명의 장로들에 의해 다시 한번 석존의 계율에 대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2차 결집이라 부른다. 실론의 전승에 의하면, 아소카 왕 때 제3차 결집이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부파불교의 전개와 사상

실론의 〈도사〉에서는 근본분열이 있은 후 100년 동안 지말분열(支末分裂)이 일어나 대중부·상좌부로부터 18부파가 생겨 도합 20부파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모두 아소카 왕의 통치 이전이라고 하나 아소카 왕이 선교사들을 인도 각지에 파견한 일이나 당시 승가 내에 분쟁이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들로 보아 아소카 왕 때까지만 해도 승가는 비교적 단합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말분열은 아소카 왕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의 즉위(BC 270경) 전부터 이미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으나 왕의 지원 아래 더욱더 번창하게 되었다. 승가의 지말분열은 이와 같은 불교의 양적 팽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소카 왕은 즉위 8년이 지나 인도 동쪽의 칼링가라는 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참한 고통을 주게 된 것을 뉘우치고 독실한 불교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폭력에 의한 정복 대신 법에 의한 정복(dhammavijay)을 정치이념으로 추구했으며, 인도는 물론 실론·시리아·이집트·마케도니아 등의 국왕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불법을 전파했다. 그는 암벽이나 석주에 자신의 정책과 불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담은 칙령을 새겨서 당시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전하게 했다. 그는 불교 이외의 교단들도 지원했지만 특히 불교 승가에 많은 물질적 지원을 했으며, 석존의 유적지들을 참배하고 수많은 불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아소카 왕의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얼마 가지 않아 멸망했지만 불교의 역사를 통해 그는 불법에 의한 선정을 베푼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되어왔다. 근본분열 이후 18개의 지말분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정확히 알기는 매우 어려우나, 아소카 왕의 불교에 대한 지원 이후 승가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지역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석존의 교설 자체에 후세 사람들의 오해와 논란을 일으킬 만한 점들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원에 거주하는 수도승들 가운데는 불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석존이 설한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태도가 등장했으며 석존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갖가지 철학적 입장이 정립되게 되었다. 각 부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논서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논서들은 결국 논장(論藏)을 형성하게 되었다. 논을 뜻하는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말은 '다르마', 즉 석존의 교설을 분류·분석하는 연구를 뜻하는 말로서 논의 원초적 형태는 이미 경들 속에서 발견되고 있었으나 부파불교의 전개와 더불어 본격적인 논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석존의 교설 가운데 부파간의 철학적 견해 차이를 보이게 한 문제들은 주로 무아설(無我說)과 업보에 관한 문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dharma)의 수와 종류 및 본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불타관이었다. 석존은 인간존재 및 경험세계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제요소들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러한 제요소들 자체가 인간존재이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따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부파불교는 인간을 이렇게 분석적으로 보는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12처(處), 18계(界), 72법(法) 등 다양한 법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법이란 석존의 교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및 경험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 법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이론을 전개한 부파는 상좌부로부터 분리되어나온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간단히 有部라고 함)였다. 유부는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무상한 유위법(有爲法) 72법을 들고 있으며, 열반 등 조건에 따라 생기지 않는 영원한 법인 무위법(無爲法) 3법을 들고 있다. 유부에 의하면, 모든 법은 고유의 자상(自相)과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으며 과거·현재·미래 3세를 통하여 실체로서 항존한다고 한다(三世實有法體恒有). 제법의 작용은 현재세에 찰나적으로 생멸하지만 법의 본체는 3세에 걸쳐 항존한다는 이론으로서 모든 유위법의 무상함을 가르치는 석존의 설을 계승하면서도 우리가 범하는 업의 실재성을 어떤 형태로든 인정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야만 이미 지은 업이 초래하는 과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에 전개된 대승불교는 유부의 이와 같은 철학적 입장을 아공법유(我空法有), 즉 인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인간을 구성하는 법들은 실재한다는 이론으로 규정한다. 그런가 하면 논서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직 경에만 의지할 것을 주장하는 경량부(經量部)에서는 모든 법은 찰나에 생멸하는 것으로서 오직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법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모든 유위법의 무상성을 강조했다.

한편 석존의 무아설은 윤회와 업보의 사상과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을 낳게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만약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모두 순간적이고 무상한 법들뿐이며 어떠한 항구한 것도 없다면 내가 지은 업은 어디에 존재하며 누구에 의해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무상한 제법을 하나로 묶어주며 인격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유부에서는 인간의 생명력의 중심인 명근(命根 jva)이라는 것을 실체로서 인정했으며 상좌부에서는 표면심과 구별되는 무의식적 잠재심으로서 유분심(有分心 bhavaga-citta) 혹은 유분식(有分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경량부는 종자(種子 bja)의 개념을 도입하여 심의 연속성을 설명하려 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과거 경험은 종자와 같은 잠재적 형태로 마음에 보존되어 있다가 이 종자들의 상속(相續)·전변(轉變)·차별(差別)에 의해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자들을 보존하고 있는 표현심의 배후에 지속적으로 미세한 인식작용을 하고 있는 일미온(一味蘊)이라는 것이 담겨져 있다고 하며 이러한 세의식(細意識)으로써 경량부는 행위주체의 연속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경량부의 이같은 이론은 대승불교의 유식(唯識) 사상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다. 그런가 하면 독자부(犢子部)와 정량부(正量部)는 푸드갈라(Pudgala)라는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 즉 오온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어떤 인아(人我)가 있어서 업보를 받는 주체가 되며 해탈하여 열반에 드는 주체가 된다고 한다. 또한 유부 등 여러 부파들은 중유(中有:또는 中陰)라 하여 사후에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어떤 중간적 존재를 인정하기도 했다. 건달바(乾婆)라 불리기도 하는 이 중유는 미세한 형태의 오온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리 상좌부는 그러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밖에도 대중부는 근본식(根本識), 화지부(化地部)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는 개념으로써 인간의 지속적 주체를 인정했다. 이 모든 개념들은 석존의 엄격한 무상·무아 사상의 철학적 수정이라고 볼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불법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불타관에 있어서도 새로운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석존의 사후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역사적 존재로서의 그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흐려지고 신자들 가운데는 그를 이상화시켜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석존은 외모에 있어서 위대한 인간(mahpurua)이 갖추어야 하는 32상(相), 80종호(種好)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10력(十力), 4무소외(四無所畏)와 같은 초월적 힘들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석존이 현세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은 결코 한 생애의 짧은 수행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전생에 수많은 삶을 거치면서 보살(菩薩)로서 한량 없는 공덕을 쌓았다는 생각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석존의 전생담(前生譚 Jtaka)들이 만들어졌다. 대중부에서는 석존을 전적으로 신격화하여 그를 완전히 초세간적(超世間的)인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일체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우며, 그의 몸과 위력과 수명은 한이 없으며, 그의 말은 모두 설법이고 한 찰나의 마음에 일체법을 안다. 지상에 나타난 그의 몸은 변화신(變化身)일 뿐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이전 보살이었을 때에도 청정한 몸으로 모태에 들어갔으며 모든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원하는 대로 악취(惡趣:낮은 형태의 존재)에 태어날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대중부는 다른 한편으로 중생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나 번뇌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뿐이라는 심본청정설(心本淸淨說)을 주장했다. 대중부의 관념들은 대승불교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부파불교시대에는 불교의 우주관도 체계화되었다.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세계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계로 구성되어 있다. 욕계는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머무는 세계로서 33천(天)들이 머무는 6욕천(六欲天)도 포함되어 있다. 색계는 욕계를 벗어난 신들이 머무는 곳이며 선정(禪定 dhyna)을 닦은 사람이 깨달음 없이 죽는 경우 태어나는 곳이다. 신체는 존재하지만 육체적 욕망은 없는 세계다. 무색계는 신체나 장소가 없는 정신적 세계로서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想處)의 4처가 있다.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有情 또는 衆生)는 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각기 지은 업에 따라 5가지 존재형태(五趣 gati), 즉 지옥·아귀·축생·인간·천(天)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다고 하며 여기에 아수라(阿修羅 asura)를 더하여 6취(六趣)를 말하는 학파도 있다. 한편 인간이 생사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도 체계화되어 이른바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로 정리되었다. 과거세의 무명(無明)·행(行)을 인(因)으로 하여 현재세의 과(果)인 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가 생기고 현재세의 애(愛)·취(取)·유(有)가 인(因)이 되어 미래세의 생(生)·노사(老死)가 과(果)로서 생기게 된다. 이것을 유부와 팔리 상좌부는 3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因果)라 부른다.

   삼장(三藏)의 구성

부파불교 논서들의 형성과 더불어 불교 경전은 경·율·논 등, 삼장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석존의 교설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수되다가 1세기경에 실론에서 처음으로 문자화되었다. 현존하는 삼장 가운데 석존의 교설을 가장 충실히 보존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팔리어로 전수된 상좌부의 삼장이다. 팔리어 경장은 경의 길이, 주제의 수에 따라 5부(nikya)로 나누어져 있다. 즉 장부(長部 Dghanikya) 34경, 중부(中部 Majjhima-nikya) 152경, 상응부(相應部 Sayutta-nikya) 2,872경, 증지부(增支部 Aguttara-nikya) 2,198경, 소부(小部 Khuddaka-nikya)의 5부 경전들이다. 소부는 유명한 〈법구경 法句經〉·〈수타니파타 Suttanipta〉, 석존의 전생의 행적을 담은 〈본생경 本生經 Jtaka〉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율장은 계경(戒經 Pimokkha-sutta), 즉 비구 221계를 해석하는 경분별(經分別), 승가 운영의 규칙(磨)을 다루고 있는 건도부(浦部), 부록과 같은 부수(附隨)로 구성되어 있다. 상좌부의 논장은 〈법집론 法集論〉·〈분별론 分別論〉·〈논사 論事〉·〈인시설론 人施說論〉·〈계설론 界說論〉·〈쌍대론 雙對論〉·〈발취론 發趣論〉의 7논서로 되어 있다. 상좌부에서는 이상의 삼장에 대하여 팔리어 주석서가 씌어졌으며 특히 5세기에 인도로부터 실론에 온 붓다고사(Buddhaghosa佛音 )의 주석서가 권위적이다. 상좌부 외에 유부 등 타 부파들도 각기 삼장을 전수한 것으로 생각되나 상좌부 삼장처럼 완벽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한역, 혹은 티베트어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한역 대장경 가운데 상좌부의 5부 경장에 해당되는 것이 아함경(阿含經)으로서 여러 부파에서 전수되던 것이 한역된 것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法藏部 전승, 413 한역)·중아함경(中阿含經:有部 전승, 398 한역)·잡아함경(雜阿含經:有部 전승, 443 한역)·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부파는 불명, 384 한역), 그리고 소부(小部)에 해당하는 〈법구경〉·〈본생경〉 등의 한역이 현존한다.

한편 한역 율장으로서는 유부의 사분율(四分律) 등 5종의 한역 율장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논장은 상좌부 외에 7논서로 된 유부의 것이 한역으로 거의 완벽하게 전해지고 있다. 7논서는 〈발지론 發智論〉·〈품유족론 品類足論〉·〈식신족론 識身足論〉·〈법온족론 法蘊足論〉·〈시설론 施說論〉이다. 상좌부와 유부 외에 다른 부파들도 논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극히 부분적인 한역 외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대두

대승불교(大乘佛敎 Mahyna)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승불교가 발생한 시대와 지역, 대승불교와 소승 부파불교와의 관계, 대승불교의 교단적 성격 등과 기본적인 문제들이 아직도 학자들의 연구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세기 후반에 쿠샤나국으로부터 후한(後漢)에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은 대승경전 중에서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수능엄경 首楞嚴經〉·〈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보적경 寶積經〉 등을 번역했다. 이로 보아 그당시 쿠샤나국에는 대승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경전들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대승불교의 발생은 적어도 1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날라다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대승불교의 운동을 전개한 자들은 종래의 불교를 '소승', 즉 '작은 수레'라 불러 그것이 출가승만을 위주로 한 편협한 불교임을 비난했다. 대승불교도들은 왕이나 부호의 지원 아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출가승들의 안일한 삶과, 신도들의 물질적 공양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들만의 정신적 평안만을 구하는 소극적·현세도피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할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대중적 불교를 제창했다. 더욱이 사원의 안정된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발달된 교학적(敎學的) 불교는 번거로운 이론적 논의를 일삼아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필요와 욕구로부터 점점 더 유리하게 되었다. 대승불교운동은 이러한 교단적 상황에 대한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각성에서 일어났다. 대승불교도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나섰다.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보살(菩薩)의 개념이다.

    보살의 길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 bodhisattva)의 약어이며, 보리살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로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有情), 혹은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자'라는 뜻이다.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새로운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대승은 소승의 이상인 아라한을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이기적인 존재로 배척한다. 보살은 자신의 구원에 앞서 남부터 구원한다는 자비의 원(願)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보살도는 재가자나 출가자를 막론하고 보리심을 발하고 자비의 원을 세운 자는 누구든지 다 실천할 수 있는 길이었다. 소승불교에서는 최고의 아라한 과(果)를 얻으려면 재가생활을 버리고 출가자로서 수도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보살은 원래 대승경전에 자주 나오는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 같은 재가자들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출가한 보살도 생겼으나 출가보살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250의 구족계를 받아 승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활동무대는 재가신도들이 많이 찾아오는 석존의 유골이나 유품을 봉안한 불탑이었다. 그들은 계(戒)는 지켰으나 승단생활을 지배하는 독자적인 율(律)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승불교에서는 보살이란 무엇보다도 석가모니 부처의 성불 이전의 존재를 의미했으며 그의 전생의 행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소승경전의 〈본생경〉은 바로 이러한 석가 보살의 전생에서의 수많은 이타적인 행위와 업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보살이란 어디까지나 석가모니 부처와 같이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불이든 보살이든 다 범부 불교도들은 바로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름아닌 석가모니 부처가 이룩했던 것과 같은 성불 그 자체였다. 아마도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담이나 전기 등에는 대승의 재가신자들이 추구하던 삶의 이상이 이미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승의 보살들이 닦아야 하는 수행방법도 자연히 소승과는 달라서 팔정도 대신 6바라밀(六波羅蜜), 즉 6개의 '완성'을 닦는다. 즉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이다. 6바라밀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보시의 개념이다. 보시란 소승불교에서는 주로 재가자들이 출가승들에게 행하는 물질적 공양을 의미했으나 대승불교는 그것을 보살들 자신이 실천해야 할 첫번째 항목으로 삼은 것이다. 다음에 유의할 것은 반야바라밀로서 대승에서 반야란 주로 제법의 '공', 즉 무실체성(無實體性)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혜를 바탕으로 해야만 남은 다섯 바라밀도 올바르게 닦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일찍부터 반야바라밀을 주제로 한 많은 경들을 산출한 것이다.

    불보살 신앙

대승불교의 또하나의 특징은 보살에 대한 신앙이다. 대승불교에 의하면 보살은 수없이 많이 있으며 이 세상뿐만 아니라 시방(十方) 세계의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을 구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돕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해탈이란 어디까지나 개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지 다른 것의 힘을 빌린 신앙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을 믿기 때문에 엄격한 정신적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신앙적 불교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문수보살(文殊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 등은 이러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대표적인 보살들이다.

대승불교는 불타관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보살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었듯이 부처의 개념도 일반화되어 시방 삼세에 수없이 많은 부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라 하면 무엇보다도 역사상의 석가모니 부처를 의미했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과거 7불 혹은 25불, 또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의 관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승에서처럼 불의 개념이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승에서 과거의 부처들은 모두 열반에 들어가 생사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 존재로 이해되는 반면에, 대승에서의 제불은 우주의 각방에서 보살과 함께 정토(淨土)를 이루며 거기서 활동하고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대승불교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불타관의 변화를 밑받침하기 위하여 부처의 3신설(三身說)을 전개했다. 즉 부처에게는 3가지 몸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첫째, 화신(化身) 혹은 응신(應身)으로서 중생의 교화를 위해 지상에 나타난 역사적인 부처를 의미한다. 둘째, 보신(報身)으로서 보살이 원을 발한 후 오랜 수행을 하여 그 결과로써 얻은 초자연적인 몸을 말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가장 좋은 예이다. 셋째, 법신(法身)으로서 모든 형태를 초월하여 모든 불의 근거가 되는 진여(眞如)의 깨달음 그 자체를 뜻한다.

제불과 보살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자연히 신자들 가운데는 그들을 형상화하여 숭배하려는 열망도 생기게 되어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제작되었다. 특별히 중인도의 마투라라는 곳과 서북인도의 간다라 지방은 이러한 불상제작의 중심지였다. 간다라 지방의 불상은 그리스의 신상에서 발견되는 우아함을 갖추고 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로부터 그 지방에 성행하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여 불보살의 숭배 이외에도 석존의 유골이나 유품을 봉안한 불탑의 참배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대승경권(大乘經卷)의 숭배도 행했다. 즉 보통의 재가신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진리를 담은 경권을 탑 안에 안치하고 숭배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권의 수지(受持)·독송(讀誦)·서사(書寫)의 행위도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은 공덕을 지닌 것으로 권장되었다. 대승불교는 또한 이상과 같은 각종 신앙적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공덕을 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넘겨준다는 소위 회향(廻向)의 실행도 강조했다. 이것은 물론 업의 법칙에 대한 엄격한 개인주의적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정신의 표현이다. 실로 대승불교는 종래의 불교에 비하면 훨씬 더 종교적으로 다채롭고 풍부하며, 대승의 종교세계는 소승불교처럼 외롭지 않은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대승경전들

① 〈>무량수경 (無量壽經) Sukhvatvyha-stra〉: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은 대승의 불보살 신앙 및 정토왕생(淨土往生) 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수많은 대승불교 신자들의 귀의처가 되어 왔다. '무량수'라는 말은 'Amityus'를 번역한 말로 '무한한 수명'이란 뜻이고, 〈대무량수경〉의 산스크리트 'Sukhvatvyha'라는 말은 '극락의 장엄'이라는 뜻이다. 〈무량수경〉의 내용은 법장(法藏 Dharmkara)이라는 보살이 중생을 위해 48개의 서원(誓願)을 세운 뒤 오랜 기간의 수행을 거쳐 성불하여 서방에 있는 극락세계(sukhvat)의 정토를 이루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8개의 서원으로서 이들은 장차 법장보살이 성취하고자 하는 정토의 모습과 중생들이 거기에 태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제18원은 중생이 지극한 신심으로 왕생을 원하여 10념(十念)만 발하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정토신앙은 보살의 자비와 공덕에 힘입어 이 혼탁한 세상에서 맞닥치는 고통·죄·유혹이 없는 안락한 곳에 왕생하여 거기서 성불하고자 하는 대승불교도들의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②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Prajñpramit) 계통의 경전들:반야 계통의 경에는 송(頌:32음절)의 수에 따라 길고 짧은 여러 개의 경들이 있다. 그중 제일 먼저 성립되었다고 간주되는 것은 〈팔천송반야 八千頌般若 Aashasrik〉(小品般若라고도 함)이며 이것이 확대되어 2만 5,000송의 〈대품반야경 大品般若經〉이 성립되었다. 그외 1만 8,000송, 10만 송으로 된 것도 있고 짧은 것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다경 Vajracchedikprajñpramit-stra〉·〈반야심경 Prajñpramithdaya-stra〉이 유명하다. 반야계통 경전의 주요사상은 공사상으로서 제법은 자성 없이 공하며 이것이 제법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승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에서 법을 실체시하는 경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대승불교 사상의 근본을 이룬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는 것이 반야(prajñ), 즉 지혜이며, 이러한 지혜에 입각하여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한다. 제법이 공하고 모든 현상적 차별들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으면 부처와 중생,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 세간과 출세간, 열반과 생사의 차별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부처의 설법도 설법이 아니라는 것을 반야경전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③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 Vimalakrtinirdea-stra〉(간단히 '유마경'이라고도 함):위와 같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유마경〉은 세속사회에의 적극적인 참여와 재가불교의 이상을 가르친다. 이 경의 주인공은 유마힐(Vimalakrti:'유마'라고도 함)이라는 거사로서 그는 지혜에 있어서 석존의 10대 제자들보다도 훨씬 뛰어나 그들을 무색하게 하며, 어디서나 자유자재로운 거침없는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실재는 모든 대립을 초월한 불이(不二 advayatva)의 절대 평등한 경지로서 불가사의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④ 〈>법화경 (法華經) Saddharmapuarka-stra〉:〈유마경〉이 아직도 대승의 이상을 소승에 대립시켜 논하고 있는 반면에, 〈법화경〉은 이러한 대립적 견해를 초월하여 불타의 여러 교설들은 결국 모두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성문(聲聞 rvaka), 연각(緣覺 Pratyekabuddha)·보살의 삼승(三乘)은 결국 일불승(一佛乘)에 귀결된다는 대승불교의 포용적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 일불승에 의하여 모든 중생은 성불하는 것이다. 불타관에 있어서도 〈법화경〉은 부처가 출생하여 출가하고 성불한 후 입적한 것은 단지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실은 부처의 수명은 불가수량(不可數量)이며 그의 성도는 무량겁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법화경〉은 이상과 같은 진리들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으며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경전이다. 불탑신앙과 경권신앙도 이 경에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⑤ 화엄 계통의 경전:〈화엄경 華嚴經〉에는 한역으로 40권본, 60권본, 80권본의 3종이 있으나 중국에서는 5세기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Buddhabhadra)에 의해 번역된 60권본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Mahvaipulya-buddha-avatasaka-stra〉이 가장 널리 사용되어왔다. 〈화엄경〉은 매우 방대한 문헌으로서 본래는 독립적으로 유통되던 여러 경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화엄경〉은 주요내용으로서 〈십지품 十地品〉에서 불의 정각에 도달하기 위해 10바라밀(十波羅蜜)을 닦아가는 보살의 수행을 10단계(十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음에 〈입법계품〉에서는 보살의 수행과 정을 선재(善財 Sudhana)동자의 구도기로서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법계'란 보살이 여래가 되기 위해 깨달아가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선재동자는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찾아다니며 설법을 듣고 마지막으로 미륵불(彌勒佛)을 만나서 법계를 증득(證得)한다. ⑥ 〈승만경 勝經〉:이 경의 주인공은 승만 부인으로서 〈유마경〉과 같이 재가불교의 대표적 경전으로서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담고 있다. 〈승만경〉은 법신(法身)이 번뇌에 감싸여 있을 때를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고 한다. 여래장은 고(苦)를 싫어하는 열반을 구하는 보리심으로서 중생의 본래의 마음을 가리킨다. ⑦ 〈열반경 涅槃經〉:이 경의 주제는 석존이 입적할 즈음에 이르러 열반에 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방편에 불과하며 사실 여래는 상주불변하는 법신이며 열반은 상(常)·낙(樂)·아(我)·정(淨)의 4바라밀(四波羅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사상을 〈열반경〉은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열반을 상·낙·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승불교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아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무아설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분명히 석존 본래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사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경〉은 대승의 법신사상과 불성론적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대담하게 열반을 '아'로 규정하고 있다.

    중관(中觀) 사상과 유식(唯識) 사상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소승불교의 번잡한 교리의 연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고 이에 반발하여 대중적인 종교운동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승불교도 자연히 철학적으로 자신을 정립하고 옹호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소승불교와 같이 많은 논(論)들을 쓰게 된 것이다. 대승의 논서들 중에서 제일 일찍 씌어진 것은 대승 최고의 논사로 추앙되어 오는 용수(龍樹 Ngrjuna)의 것들이다. 용수는 2~3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며 남인도 출신으로 불교의 여러 사상뿐만 아니라 외도(外道) 사상에도 조예가 있었다. 저서에서 그는 대승의 공사상에 입각하여 이에 어긋난 여러 실재론적 견해들을 논파하고 있다.

용수사상의 핵심은 그의 〈중론송 (中論頌) Mlamdhymika-krik〉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중론송〉의 '중'은 유와 무의 양극을 피하는 석존의 기본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法)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다. 그러나 공은 결코 무가 아니며, 다만 자성이 없이 조건적으로 생기(生起)하는 현상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공이란 비유(非有)·비무(非無)이며 중도인 것이다. 공은 연기(緣起)라는 제법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일단 제법의 실상이 공임을 알면, 그 법들이 아무 것도 아닌 무가 아니라 공한 그대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것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며 용수는 이것을 가명(假名)이라 부른다.

용수에 의하면 사람들이 세계의 실제 모습인 공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개념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사물들이 독립되고 고정된 본질을 갖고 실재하는 것처럼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은 일체의 개념들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용수는 일상적 언어나 관념의 타당성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다. 용수에 의하면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높고 낮은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이 2가지 관점에 따라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2제(二諦)가 성립된다고 한다. 진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야(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서 언어를 초월한 공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속제란 세상 사람들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는 세계로서 진리가 가리워진 모습을 말한다. 용수는 이러한 일상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공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언어의 사용과 철학적 사유는 속제의 단계에서, 가명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제를 떠나서는 진제를 깨달을 수 없다고 용수는 말한다. 석존의 모든 교설들은 주로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공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누구든지 진제를 깨닫기 이전까지는 속제의 방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중관철학과 대승불교의 양대 철학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유식사상이다. 유식사상은 중관철학의 진리에 대한 부정적 접근에 만족하지 않고 공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발전시켰다. 우리가 자성 없이 공한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보는 것은 결국 우리의 그릇된 인식(識)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유식철학은 우리의 인식활동을 떠난 사물의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식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인식활동만 존재한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 vijñapti-mtrat)의 철학이다. 유식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 식의 구조와 작용으로써 생사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이다. 유식철학은 〈해심밀경 解深密經 Sadhinirmocana-stra〉과 같은 유식경전에 근거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논서로 전개된 것은 4세기의 미륵(彌勒 Maitreyantha), 무착(無着 Asaga)과 그의 동생 세친(世親 Vasubandhu)에 의해서였다. 이들에 의해 수립된 철학은 요가의 실천을 통해 유식의 진리를 추구한다 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 혹은 유식학파라고 부른다.

세친은 〈유식이십론 唯識二十論〉에서 우리의 인식 활동을 꿈에 비유하면서 인식대상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인식은 식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논한다. 〈유식삼십송 唯識三十頌〉에서는 식의 전변(轉變)에 의해서 자아와 제법(諸法)의 실재성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식의 전변이란 식을 주관(見分 혹은 能取)과 객관(相分 혹은 所取)으로 구별하면서 8가지 모습(八識)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심층식으로 여기서 우리가 지은 업의 자취가 종자와 같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발현하여 자아의식의 제7식 말라식(末那識)과 안·이·비·설·신·의(意)의 6식으로써 지각되는 경험세계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세계는 식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식의 상분(相分)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분을 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부의 인식상태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작용 그 자체도 항상 생성소멸하는 의타적 존재로서 이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부르며, 이렇게 식의 본성을 깨닫고 나면 외계 사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데 이것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부른다. 이른바 유식의 삼성설(三性說)이다.

    인도 불교의 쇠퇴와 밀교

인도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 이후 500여 년 만에 다시 통일 왕조를 건설한 굽타 왕조(320~500경)에 들어오면서부터 힌두교의 부흥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굽타 왕조는 불교의 융성에 자극받아 대중적 신앙으로 기반을 넓히고 등장한 힌두교를 국교로 삼아 신전을 건설하는 등 힌두교를 널리 지원했다. 굽타 왕조의 안정된 정치체제 밑에 문학과 예술이 발달했으며 학문도 번창했다. 굽타 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지만 불교는 점차 힌두교의 세력에 밀리면서 힌두교적 요소를 섭취하거나 동화되기 시작했다. 7세기에 인도를 방문한 당(唐)나라의 현장(玄奬) 법사에 의하면 불교는 이미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불교 사원들은 황폐화되고 있었다. 특히 불교 내에서는 힌두교 밀교(密敎)의 영향을 받아 탄트라(Tantra)라는 밀의적 가르침을 담은 경전들이 성립되었으며 인도 불교는 전적으로 밀교화되다시피 했다. 밀교의 목적은 진언(眞言 혹은 陀羅尼)·만다라(曼茶羅)·수인(手印) 등을 사용하여 불보살과 수행자의 신비적 합일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밀교는 이와 같이 신(身)·구(口)·의(意) 3밀(三密)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몸속에서 성불을 체험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적으로 하며, 이같은 사상은 〈대일경 大日經〉이나 〈금강정경 金剛頂經〉과 같은 대승 경전들에 이미 나타나 있다. 중국·한국·일본에 전해진 밀교는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후기의 밀교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적 상징들을 사용하여 남녀의 성합(性合)을 깨달음을 이루는 최고의 수단으로 삼는 이른바 좌도(左道) 밀교적 성격이 강한 탄트라들을 산출했다. 이러한 탄트라들은 인도 불교의 최종단계에 산출된 문헌들로서 티베트 대장경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티베트 대장경의 탄트라는 소작(所作)·행(行)·유가(瑜伽)·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대일경〉은 행 탄트라, 〈금강정경〉은 유가 탄트라에 소속되어 있고 비밀집회(Guhyasamja)·헤바즈라(Hevajra)와 같은 본격적인 좌도밀교의 탄트라는 무상유가 탄트라에 속해 있다. 좌도밀교에서 말하는 성합이란 결코 육체적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행위로서 행해지는 것이다. 좌도밀교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진리를 구체적 의례를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열반(空 또는 般若)을 여성(yum)으로 상징하고 생사(方便 또는 慈悲)를 남성(yab)으로 상징하며 남녀의 성합은 이 둘이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세계를 자신의 몸으로 실현하기 위한 의례적인 행위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의례는 반드시 입문식(灌頂)을 거치고 스승의 엄격한 지도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계율을 무시한 좌도밀교의 파격적 행위는 힌두교의 성력(性力) 숭배적 밀교와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합되어버렸으며 불교는 이로써 자신들의 독자성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돌이키기 어려운 도덕적 타락과 쇠퇴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밀교적 형태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인도 불교는 이슬람교의 등장에 의해 제도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인도에서는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시아의 불교

동남아시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아소카 왕 치세 때였다. 실론의 사서들에 의하면 아소카 왕은 데바남피야 티사(BC 250~210) 왕 때 아들 마힌다를 전도승으로 실론에 보내 처음으로 불법을 전했다고 하며 그의 여동생 상가미타 비구니도 그후 실론에 왔다. 상가미타는 그때 석존의 성불지인 부다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실론에 전파된 불교는 상좌부 계통의 보수적인 일파로서 실론을 거점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 티사 정사를 지었으며 이것이 후에 실론 상좌부의 보수적 전통의 보루인 대사(大寺)가 되었다. 두타가마니(BC 101~77)의 치세 때에는 팔리어로 된 경전이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매년 5월에는 석가의 탄생·성도·입멸을 기념하는 베사크(Vesak) 축제도 시작되었다. 바타가마니 아파야(BC 43~17)의 치세 때에는 무외산사(無畏山寺)가 건립되었으며 이 사원은 그후 인도 불교의 여러 교파들과 교섭하는 가운데 대승불교도 받아들였다. 마하나마(409 ~431) 왕 때에는 인도에서 온 불음(佛音)이 팔리 경전 대부분의 주석서를 썼으며 상좌부계 불교의 체계적 강요서인 〈청정도론 淸淨道論〉을 저술하여 지금까지 상좌불교의 권위 있는 논서로 읽혀지고 있다.

실론의 불교 역사는 순탄하지만은 않아 여러 번 출가승들의 수계(授戒) 전통이 끊어질 정도로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미얀마(1065, 1475, 1801)로부터, 혹은 타이(1758)로부터 수계 전통을 이어 받았다. 16세기 포르투갈의 식민통치기(1505~1658)에 불교는 탄압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받기도 했다. 그후 영국의 통치하에서 사정은 좀 나아졌으나 여전히 선교사들의 탄압과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중흥운동도 일어났으며, 여기에는 헨리 올콧이라는 미국의 신지주의자나 영국의 불교학자요 팔리어 경전연구회(Pali Text Society)의 창시자인 리스 데이비즈 등의 역할도 컸다. 현재 실론 원주민으로서 대부분 불교 신자인 싱할리족과 인도 남부로부터 이주해온 힌두교 소수민족인 타밀족 사이에 심각한 인종대립과 종교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의 초기 불교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얀마의 사서들은 실론의 붓다고샤가 버마를 방문해 팔리어 경전 연구의 전통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11세기에 수립된 아나우라타 왕조(1043~1283) 때만 해도 소승과 대승이 공존했으며 아나우라타 왕(1044~77)은 대승을 몰아내고 상좌부로 승가를 통일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대승은 존속했으며 1287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많은 불교시설들이 파괴되었고 1752년에 새로운 통일왕조가 수립될 때까지 국토는 여러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기간에 대승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상좌부 불교만이 남게 되었다. 19세기에는 팔리어 연구가 성행했으며 경전들은 미얀마어로 번역되었다. 1880경 미얀마는 영국에 의해 인도에 병합되었으며 미얀마 독립운동에는 승려들의 역할이 컸다. 현재에도 미얀마에는 거의 마을마다 절이 있으며 승려는 자신들의 공부와 수행 외에 신도들을 위해 각종 의례를 베풀고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도들은 승려를 존경하며 승가를 위해 보시를 베풀고 공덕을 쌓는다. 미얀마인들은 청소년기에 반드시 1번 일시적으로나마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하는 관습이 있다. 마을의 불교는 토착적 신앙인 신령(nat) 숭배와 습합되어 있으며 세속적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는 신령들에게 기원한다.

이와 같은 사정은 대체로 타이·캄보디아·라오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이의 경우에도 옛날에는 대승불교가 행해지기도 했으나 람캄행 왕이 통일 왕조를 이룩하고 실론으로부터 고승을 초청하여 오늘날의 상좌부 타이 불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타이 문자도 만들었다. 라마 4세(1851~68) 때는 상좌부의 불교 정화를 위해 노력해 승가는 엄격한 계율 준수를 하는 정법파(正法派 Dhammayut)와 재래의 대중파(Mahanikai)로 분열되었다. 캄보디아·라오스 지역에는 자바르마 2세(820~869)에 의해 크메르 왕국이 수립되어 14, 15세기에 타이의 침입을 받기까지 약 750년간 번영했다. 자바르만 7세(1128~1225) 때 크메르 왕국은 가장 번성했으며 그는 대승불교의 신봉자로서 102개의 병원을 지었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와 같은 대사원도 크메르 왕조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서 지금도 그 거대한 유적을 남기고 있다.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상좌불교와 같이 병존하다가 15세기부터 타이 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불교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 가운데 베트남만이 중국의 영향 아래 지금까지 대승불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10세기부터 14세기말에 걸쳐 선불교(禪佛敎)가 성행했다. 현재 베트남의 불교신자들은 한문 경전을 베트남 음으로 독송하며 승려들은 독신으로 계율을 엄수한다. 베트남 불교는 교리적으로 선(禪)과 정토신앙이 융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불교 행사는 1주일간에 걸쳐 행해지는 불탄일(phat-dan) 축제이다. 승려들의 사회적 활동도 크다. 베트남에서는 중국에서와 같이 관리등용을 위한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시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고려시대의 승과(僧科) 제도와 비슷하다 하겠다.

이상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인구 대다수가 불교 신자이며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상좌부 불교가 거의 국교가 되다시피한 나라들이다. 전통적으로 이들 국가에서는 왕과 승가와 재가신도들이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불교적 사회질서를 형성해왔다. 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승가는 재가신자들을 정신적·도덕적으로 인도해주고 필요한 불교식 의례들을 수행해주는 반면 재가신자들은 승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보시를 통해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아간다.

중국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 후한시대였다. 당시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불교 승려들은 상인들을 따라 중앙 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코탄·소그디아·파르티아·쿠차 등)로부터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인들은 불상을 보면서 부처를 신으로 여겼으며 현세적 구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경전을 처음으로 한역한 사람은 파르티아인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람으로서 148년에 수도 뤄양[洛陽]에 와서 주로 선관(禪觀 dhyna)과 소승경전들을 번역했으며 비슷한 때에 지루가참(支婁迦讖)도 뤄양에 와서 대승경전인 〈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 등을 번역했다.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는 〈광찬반야경 光讚般若經〉·〈정법화경 正法華經〉 등 약 150부 300권을 번역하여 중국불교의 기초를 닦았다. 311년 장안이 북쪽 흉노족에게 정복당하자 한족들은 양쯔 강[揚子江] 이남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晉:317~419)을 세웠으며 많은 지성인들은 허탈감 속에서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불교의 이질적 세계관이 중국 지성인들 가운데 파고들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자연히 반야경전의 공(空) 사상을 노장의 무(無) 개념에 준해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경전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의도적으로 유교나 도가 사상의 술어들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경향을 격의(格義)라고 부른다.

화북지방에서는 서역 출신의 승려로서 주술에 능한 불도징(佛圖澄:232~348)이 눈부신 포교활동으로 많은 신자를 얻었으며 사찰들을 세웠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도안(道安:312~385)으로서 그는 반야경전을 강의했고 경전들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하는가 하면 외국 승려들을 초청하여 역경사업을 지원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여 중국 불교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의 제자 혜원(慧遠:334~416)은 유교와 도가사상에 정통했던 승려로서 여산(廬山)에 거하면서 동진 불교를 주도했다. 그는 아미타불을 명상하는 염불결사(念佛結社)를 시작했으며 〈사문불경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세속적 정치권력에 대한 승가의 독립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도안과 혜원의 불교 이해는 아직도 토착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구자(龜玆 Kucha)국으로부터 온 구마라집(鳩摩羅什 Kumrajva:334~413)의 역경활동에 의해 비로소 중국 승려들은 대승불교 철학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구마라집은 〈대품반야경〉·〈묘법연화경〉·〈아미타경〉·〈유마경〉·〈금강경〉, 용수의 〈중론〉·〈십이문론〉·〈대지도론〉 등을 포함하여 35부 254권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에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 그의 번역은 그 이전의 것들에 비해 사상적 내용의 전달이나 문체의 미려함에서 뛰어나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374~414)는 공사상을 천명하는 논서들을 지어 공에 대한 성숙한 중국적 이해를 보였고 도생(道生)은 대승 〈열반경〉 연구와 불성사상·돈오(頓悟) 사상으로 유명했다.

한편 구마라집 이후 인도 불교의 중요한 경전들의 번역은 계속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담무참(曇無讖:385~433)의 대승 〈열반경〉, 불타발타라(覺賢이라고도 함:359~429)의 〈화엄경〉,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394~468)의 〈능가경〉, 보리류지(菩提流支)의 〈십지경론〉, 진제(眞諦:Paramrtha 499~569)의 〈섭대승론 攝大乘論〉·〈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의 번역은 각각 중국 불교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북조시대(420~581)를 통해 북조에서는 융성하기는 했으나 남조에서처럼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심한 박해를 받는가 하면 대대적인 승가의 지원도 있어서 윈강[雲崗]의 석굴과 같은 거대한 불교유적을 남기고 있다. 남조에서는 왕실의 한결같은 지원 아래 불교가 번창했으며 특히 교학적 연구가 발달했다. 남북조시대는 아직도 인도 불교의 문헌들이 소개되고 있는 역경기로서 중국인들은 불교 전체를 파악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인도 불교의 주요경전과 논서들이 번역될 때마다 한 특정한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주석적 학파들이 성립되었다. 〈열반경〉을 연구하는 열반종, 〈십지경론〉을 연구하는 지론종, 〈섭대승론〉을 전공하는 섭론종, 〈중론〉·〈십이문론〉·〈백론〉에 기초한 삼론종 등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런가 하면 〈능가경〉의 연구와 전수를 주로 하는 능가종도 형성되어 초기 선 불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으며 정토신앙 계통의 〈무량수경〉·〈아미타경〉·〈관무량수경〉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중국 정토신앙의 전통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는 중국은 수(隋)에 의해 통일(589)되자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천태종(天台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등장하여 남북의 정치적·사회적 통합과 종교적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태종은 혜사(慧思)·혜문(慧文)을 거쳐 천태산의 지의(智:538~597)대사에 의해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所依) 경전으로 삼는 종파로서 당시 중국에 들어온 모든 주요 불교사상들을 석존의 설법 시기에 따라 다섯(五時)으로, 교설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8가지(八敎)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포괄적인 교상판석(敎相判釋:敎判이라고도 함)의 체계를 세웠다. 천태종은 또한 실천수행의 방법으로서 지관(止觀)의 명상법을 제시했다. 지(止)란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통일된 상태를 뜻하고, 관(觀)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사물의 실상을 보는 지혜의 훈련이다.

당조(唐朝)에는 인도의 날란다(Nland)사에서 유식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온 현장법사(596~664)가 유식사상을 종합하여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저술했으며 그의 제자 규기(窺基)는 그 주석서를 써서 중국 유식학파인 법상종(法相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현장은 귀국할 때 많은 불교전적을 가지고 와서 일생을 역경사업에 바쳤으며 그의 번역은 종전의 것에 비해 훨씬 더 정확한 것으로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법상종은 다분히 인도적인 교학적 종파로서 당 초기에는 선풍을 일으켰지만 곧 인기를 잃어버리고 화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에 자리를 내주었다. 화엄종은 천태종과 더불어 가장 포괄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했다. 〈화엄경〉의 진리를 최고의 가르침으로 간주하는 화엄종은 종래의 모든 불교사상을 5가지 가르침(五敎)으로 정리하는 교판체계를 제시했다. 두순(杜順)·지엄(智儼)을 거쳐 법장(法藏:643~712)에 의해 완성된 화엄사상은 징관(澄觀)·종밀(宗密)에 의해 계승·발전되다가 845년의 폐불(廢佛) 사건을 계기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화엄사상의 핵심은 법계(法界) 사상으로서 화엄은 사(事) 법계, 이(理) 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 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의 4종 법계를 말하고 있다. 이 법계사상은 천태의 관법과 마찬가지로 공(理)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서 현상계(事)와 진리가 불가분(色卽是空)이며 현상계의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연결되어 있음(事事無碍)을 말하고 있다.

천태·법상·화엄에 이르러 중국 불교는 실로 인도 불교를 능가할 만큼 정교하고 포괄적인 중국적 불교철학체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이전의 여러 학파들은 모두 거기에 흡수되어버렸다. 즉 삼론종은 천태종, 섭론종은 법상종, 지론종은 화엄종, 열반종은 천태·화엄종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천태·법상·화엄이 제아무리 정교한 논리로서 포괄적 사상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대중적 종파가 되기에는 너무 지적이고 추상적이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권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했으며 결국 중국의 문화적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실천적 성격이 강한 선(禪)불교와 대중적 성격이 강한 정토(淨土) 신앙뿐이었다. 정토종은 이미 언급한 정토 삼부경전을 바탕으로 하여 담란(曇鸞), 도작(道綽)을 이은 선도(善道:613~681)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중적 성격을 띤 사상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본래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의 서원에 정토 왕생(往生)의 조건으로 언급된 염불을 통해 정토에 태어난 후 성불할 수 있다는 신앙으로서 염불(念佛)이란 아미타불과 정토의 모습을 명상하는 관상(觀想) 염불을 뜻했다. 그러나 쉬운 수행(易行)을 강조하는 중국 정토신앙에서는 염불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稱名) 염불(南無阿彌陀佛)로 해석되었으며 이것을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정토왕생의 수행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정토신앙의 성립에는 6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법사상, 즉 불교가 정법(正法)·상법(像法) 시대를 지나 지금은 불타의 올바른 가르침과 수행이 모두 사라져버린 말법(末法)시대가 도래했다는 위기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

선불교는 문자 그대로 선정(禪定)의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로서 초기 선불교는 〈능가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불성(佛性) 사상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는 점진적인 수행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행전통은 5세기 말엽에 인도로부터 온 승려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홍인(弘忍:601~674)·신수(神秀:606~706) 대사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선불교를 인도적 선과는 다른 독특한 중국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점진적 수행(漸修) 사상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순간, 혹은 자기 마음의 본 바탕이 곧 불이라는(心卽佛) 것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성불한다는 돈오(頓悟) 사상이었다. 이와 같은 선사상의 일대 전환이 일어난 것은 홍인의 제자였던 혜능(慧能:638~713)과 그의 제자로 자처했던 신회(神會) 화상에 의해서였다. 그후로부터 선불교는 번뇌를 제거하여 마음을 닦아가는 행위(修)보다는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체험(悟)을 강조하는 이른바 남종선(南宗禪)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인도적 좌선이나 수행보다는 평범한 일상적 삶의 행위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중시하는 남종선의 추종자들은 수많은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으며, 그들의 설법과 선문답을 담은 어록(語錄)들을 발간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경전보다도 오히려 조사(祖師)들의 어록을 더 중시하게까지 되었다.

이와 같은 선불교의 근본정신을 잘 나타내주는 말은, 진리는 경전의 문자보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마음에 갑자기 와닿는 체험을 통해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성불한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구절들이다. 이러한 선사상의 배후에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여 직관적 지혜를 강조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을 찬양하는 중국의 도가적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선불교는 인도적 공사상, 불성사상과 노장철학이 한데 어우러진 원숙한 중국적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로 선불교는 당 중엽부터 시작하여 당말·송초에 이르기까지 중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켰으며 불교에 대항하여 사상적 재무장을 하고 나선 신유학사상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선도(善導) 이후 대중적 뿌리를 내린 정토신앙에도 선불교의 영향 아래 염불선이 유행했으며 선수행자들 가운데서도 염불과 정토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선정(禪定) 융합적 불교가 송대 이후 중국 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는 외래 종교로서 문화적 자긍심이 강한 중국인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불교를 비판하는 배불론이 항상 존재해왔다. 배불론자들의 주요논지는 불교가 자연스러운 인륜을 무시하고 효(孝)에 어긋난다는 것, 경제적 낭비와 손실을 초래하며 초세간적 성격으로 인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다는 것 등이었다. 당나라 말기부터 이러한 배불론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송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불교는 신유학에 사상적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고 그로부터 전반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정토신앙과 선불교는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왔으며 도교나 토착신앙과의 습합(習合)을 통해 불교는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종교로 유지되어왔다. 1930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약 73만 8,000명의 승려와 26만 7,000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는 전반적으로 역동성을 상실했으나 중국 대중들 사이에 꾸준히 종교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침체된 불교계를 사상적·제도적으로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변혁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1949년 이래 공산치하에서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전통불교는 심한 탄압을 받아 거의 명목상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일본

일본불교는 한국과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중국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되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6세기초 백제를 통해서였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친밀한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552년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13) 백제 성왕(聖王)은 불상과 경전을 보내 불교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조정에는 새로운 종교를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왕실과 귀족들 간에 수용되었다. 특히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594년 삼보흥륭(三寶興隆)의 칙소를 내리고 17개조 헌법을 제정해서 불교의 국가적 숭앙을 촉구함으로써 일본 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에 의해 씨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의 보급은 또한 발달된 대륙문화의 수입을 뜻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도 여러 경전을 연구하여 〈유마경〉·〈승만경〉·〈법화경〉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건너간 한국 승려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혜총·혜자와 같이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 한국 승려들과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들에 의해 7세기 일본에는 삼론·〈성실론 成實論〉·〈구사론〉의 연구를 주로 하는 학파들이 각각 세워졌으며 중국의 법상종도 들어와서 강력한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84]에는 화엄종도 수입되어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즉 율종·구사종·성실종·삼론종·법상종·화엄종으로서 주로 학승들이 경전과 교리를 연구하며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통제된 국교적 성격을 띤 불교였으며 민간포교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율종·법상종·화엄종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을 형성했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특히 도다이 사[東大寺]를 본거지로 한 화엄종은 나라 시대의 불교를 대표하다시피 했다. 도다이 사에 안치된 대불(大佛)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은 나라 불교의 상징으로서 우주만물에 편재해 있는 법신불의 세계와 사사무애의 법계를 나타내고 있다.

교토[京都]로 수도를 옮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에는 중국으로부터 천태종과 진언종(眞言宗)이 들어와서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천태종은 사이초[最澄:767~822]에 의해 수입되었으며, 히에이 산[比叡山]에 자리를 잡고 대승 계단을 설치하고 나라를 위한 승려들의 훈련에 힘썼다. 사이초는 천태종뿐만 아니라 율·진언밀교·선 등도 들여왔기 때문에 일본 천태종은 매우 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신·구·의 3업을 통해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적으로 하는 진언종은 사이초와 함께 당에 갔던 구카이[空海:774~835]에 의해 도입되어 고야 산[高野山]에 자리를 잡았다. 진언종은 물론 성불을 목적으로 하나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기복적 성격이 강했으며 귀족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천태와 진언은 모두 현세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도(神道)와 습합된 형태로 공존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 가운데 말법사상이 유행했으며, 종래의 융합적 성격을 띤 불교를 배척하고 오로지 하나의 구원의 길만을 선택해서 따르려는 전수(專修)운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무사들이 지배하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에 들어오면서 더욱 강화되어 새로운 종파들이 출현했으며, 일본불교의 특이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이러한 전수 불교적 종파들을 남도육종이나 천태종과 진언종으로부터 구별하여 신불교(新佛敎)라 부르기도 한다. 전수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전수 염불을 주창한 호넨[法然:1132~1212]으로서,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으며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원조가 되었다. 호넨의 제자들 가운데는 염불의 행(行)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믿음(信)을 중시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대립이 발생한 가운데 믿음을 중시하는 신란[親鸞:1173~1263]의 출현과 함께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었다. 신란은 신(信)의 일념이 발생하는 순간 정토왕생이 결정되며, 염불은 단지 아미타불의 은총에 대한 보은의 행위일 뿐임을 강조했다. 그는 믿음도 염불의 행도 모두 아미타불의 회향(廻向)의 힘에 의한 것이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순수타력신앙을 강조했다. 따라서 계율의 준수도 필요없게 되었으며 신란과 그의 제자들은 자유로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정토진종은 일본불교의 최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또한 매우 투쟁적인 승려 니치렌[日蓮:1222~82]이 등장하여 니치렌 종[日蓮宗]을 개창했다. 그는 〈법화경〉 신앙을 고취했으며 염불을 모방하여 법화경의 이름을 부르는 창제행위(南無妙法蓮華經)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대중적인 신앙을 전파했다. 소카갓카이[創價學會] 등 전후 일본에 출현한 신흥 종교들은 니치렌 종 내지 법화신앙 계통에서 파생한 것들이 많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선불교의 종파들도 수입되었다. 에이사이[榮西1141~1215]는 임제종(臨濟宗), 그리고 도겐[道元:1200~53]은 조동종(曹洞宗)을 개창했다. 선불교와 함께 일본 중세에는 다도·서도·하이쿠[俳句:17음절의 짧은 시] 등이 유행했으며 선은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상의 가마쿠라 신불교의 지도자들은 모두 천태종에 몸담고 있던 승려들이었으나 기성 교단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켰던 것인데, 그들에 의해 수립된 종파들은 가마쿠라와 아시카가 시대[足利時代:1338~1573]를 통하여 급성장했고, 오늘날에는 천태종과 진언종을 누르고 일본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에는 그리스도교를 추방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서 보호했기 때문에 각 종파의 교단조직이 정비되고 교학도 다듬어졌으나 종교적 창의성과 역동성은 없었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가 되어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국수주의가 대두하면서, 신도(神道)와 불교를 분리시키고 불교를 배격하는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불교는 국교적 위치를 상실하고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메이지 정부의 명에 따라 승려들의 대처(帶妻)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유럽의 근대적 불교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 산스크리트·팔리어·티베트어 불전에 대한 연구와 불교사의 연구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일본불교는 전반적으로 종파적 성격이 매우 강하고 종파의 개조(開祖)에 대한 숭배가 성하며 계율준수의 전통이 사라져 승려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고 사찰들도 대다수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

티베트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7세기초 송첸감포 왕 때였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하지 않아 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파드마삼바바(蓮華生)가 인도로부터 밀교의 교의와 의례를 가지고 온 뒤 많은 이적을 행하여 티베트 승가를 형성하면서 불교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오래된 종파인 닝마파의 원조로 추앙받고 있다. 8세기말에는 인도 승려뿐만 아니라 중국 승려도 티베트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794년경에는 왕 앞에서 마하연(摩訶衍)이라는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선불교 계통의 중국 승려들과, 파드마삼바바를 초청한 적호(寂護 ntaraksita)에 의해 대표되는 인도 불교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후자가 승리했으며, 그로부터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의 지배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티베트에는 불교 이전부터 '본'이라는 샤머니즘적 토착 신앙이 있었으며 밀교의 신비적 주술 의례는 점복·예언·주술 등을 신봉하는 토착신앙과 잘 조화되어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밀교와 본 신앙이 합쳐진 티베트 특유의 불교를 라마교라 부르기도 한다. '라마'라는 말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9세기 렐파첸 왕 때에는 대대적인 체계적 역경사업이 추진되어 산스크리트 원어에 비교적 충실한 표준화된 티베트어 번역이 이루어졌다. 11세기에는 인도의 고승이나 혹은 인도 유학 티베트 승들에 의해 새로운 종파들이 성립되었다. 인도 벵골 지방으로부터 전통적 불교 사상과 밀교에 모두 정통한 승려 아티샤(982 ~1054)가 와서 티베트 불교를 중흥시켰으며, 그의 제자 돔은 카담파라는 종파를 창시했다. 티베트 승려 독미는 인도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사캬 사원을 창건했으며 사캬파의 주지들은 12, 13세기에 걸쳐 몽골의 지원하에 세속적 권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주지들은 결혼을 했으며 주지직은 세습되었다. 인도 날란다사의 나로파 밑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말파(1012~97)는 카귀파를 창시했다. 그의 후계자 밀라레파(1040~1123)는 티베트 최고의 시인이요 성자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다.

티베트 대장경은 14세기 부퇸(1290~1364)에 의해 수집·편찬되었으며 카귤과 텐귤 2부분으로 되어 있다. 카귤에는 율·경·탄트라가 들어 있으며, 텐귤에는 논서·주석서와 문법·의학·점성술 등에 관한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14세기의 티베트 불교는 매우 세속화되고 도덕적인 타락을 보임에 따라 총카파(1357~1419)에 의해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총카파는 당시 밀교의 극단적인 퇴폐적 측면을 개혁하고 승가에 엄격한 계율준수를 요구했다. 그는 밀교와 전통적인 대승과 소승을 균형 있게 취하도록 했다. 총카파에 의해 겔룩파라는 새로운 종파가 창시되었으며 그후 겔룩파는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조카이자 겔룩파의 제3대 지도자인 게뒨 둡파(1391~1475)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되었으며 첫번째 다라이 라마('큰 라마'라는 뜻)가 되었다. 그후로부터 다라이 라마가 죽으면 49일 후에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서 그의 후계자 물색이 시작된다. 다음 다라이 라마는 그 전 다라이 라마가 환생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제3대 다라이 라마(1543~88)는 몽골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제5대 다라이 라마(1617~82)는 몽골군의 도움으로 전 티베트를 정치적으로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현재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는 제14대 다라이 라마로서 티베트가 중국 공산화되기 1년 전인 1950년에 즉위했으나, 1959년 반(反) 중국 항거 때 인도로 망명하여 북인도에서 수만 명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라마교는 티베트 이외에도 몽골·시킴·부탄 등에도 퍼져 있다. (吉熙星 글)

한국

한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4세기말로서 당시 고구려·백제·>신라는 부족연맹체를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국가로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 종래의 씨족중심적 세계관과 종교관을 대체하는 보편적 윤리와 이념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의 불교는 372년(소수림왕 2)에 중국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승려와 더불어 불상과 경전을 보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왕은 태학(太學)을 세워 유학을 공부하게 했으며 율령을 반포해서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백제 때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晉)으로부터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와서 불법을 전했으며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417~ 458) 이미 불교가 들어왔으나 국가적 공인을 받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법흥왕에 의해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527). 삼국에 있어서 불교의 전래는 단순한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엄청난 문화적·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불교와 더불어 종래의 무속적 신령숭배와는 달리 불상으로 뚜렷하게 형상화된 숭배대상이 생겼으며 세속인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승려들과 승가공동체, 심오한 철학적 사상을 담은 경전들, 계율에 근거한 새로운 보편적 윤리관, 그리고 건축·공예·학문·서예 등 대륙의 문물이 함께 들어온 것이다. 승려들은 당시 가장 개명된 지식인들로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왕의 참모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했던 것이다.

삼국 가운데서 불교를 국가발전의 힘으로 삼아 급기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은 신라였다.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해서 중국 대륙과의 문화적 접촉에 가장 불리했던 신라였으나 일단 불교가 공인된 후 왕실은 불교를 적극 지원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법흥왕의 대를 이은 진흥왕은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했으며 스스로도 말년에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승가의 일원이 되었고 왕비도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것은 왕법과 불법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로서 국가 종교로서의 불교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법흥왕부터 시작하여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불교왕명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왕실은 백정(白淨:또는 淨飯)·마야·승만 등과 같은 불교이름들을 가족들의 이름으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스스로를 불법의 수호자로 과시했던 것이다. 국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진흥왕은 국가적 사찰인 황룡사를 지었으며 왕자들의 이름을 불교의 전설적인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지닌 보물인 금륜·동륜이라 지어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대에는 화랑제도도 창시되었는데 화랑도는 미륵신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삼국통일의 중추적 역할을 한 화랑 김유신을 따르는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는데 용화수는 미륵불이 출현할 때 그 밑에서 성불한다는 나무이름이다. 이는 말하자면 신라가 미륵불의 출현과 더불어 이루어질 정토와도 같다는 생각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불교적 애국심의 배후에는 원광(圓光)·자장(慈藏)과 같은 뛰어난 승려들이 있었다. 원광은 진평왕 22년(600)에 중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진평왕 31년(608)에 고구려가 신라 변경을 침범하니 왕의 요청으로 수나라에 군사적 도움을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한 일이 있으며, 신라의 청년들을 위해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주기도 했다. 전통적인 불교의 오계와는 달리 세속오계는 유교적 덕목인 충·효를 강조하며 임전무퇴(臨戰無退)와 같이 군사적 용맹을 강조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자장법사는 진골출신의 귀족으로서 636년 당에 유학하여 9년간 공부하고 귀국해 대국통(大國統)이라는, 승려들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통도사에 계단(戒壇)을 설치했으며 승려들로 하여금 계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그는 나라의 번영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신라 불교의 중심지였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려고 했다.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현세 구복적인 관심 속에서 불교를 숭상했으며 깊은 교리적 이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중요한 경전들을 배우고 돌아오는가 하면 어떤 승려들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僧郞)은 중국 삼론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혜관(慧灌)이라는 고구려 승은 일본으로 가서(635) 일본 삼론종의 창시자가 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는 삼론학이 특히 성했던 것 같다. 백제에서는 율학연구가 특히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승려 겸익(謙益)은 521년에 인도에 가서 소승의 논서와 율서를 많이 가지고 와 72부에 달하는 율에 관한 문헌들을 번역했다고 한다. 백제의 율학이 번성함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비구니들이 율학연구를 위해 백제에 오기도 했다(588). 당시 백제와 일본은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수한 것도 백제의 성왕이었다(522). 율학에 정통한 백제 승 혜총(慧聰)은 5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와 더불어 유명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스승이 되었다. 신라에도 원광·자장의 귀국과 더불어 7세기 전반부터 경전과 교학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삼국통일을 전후로 하여 활약했던 승려 의상(義湘:625~702)·원효(元曉:617~686)에 이르러 신라의 교학은 극치를 이루었다. 의상은 중국 화엄의 제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사상을 대성한 법장과 더불어 공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귀국하여 한국 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후 화엄종은 줄곧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저서로서 화엄사상의 핵심을 210글자를 도상(圖像)으로 배열하여 나타낸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가 유명하다.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만법유심(萬法唯心)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계기를 가진 뒤 중도에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교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당시에 알려졌던 거의 모든 중요한 경전들에 주석서를 쓰다시피 했으며 독특한 화쟁(和諍)의 논리로써 경전에 나타난 다양한 사상들을 조화시켰다. 그의 〈화엄경〉 주석서와 〈대승기신론〉 주석서는 특히 유명하며 중국 화엄학에까지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상 자체도 〈기신론〉에 의존하는 바 크다. 또한 〈금강삼매경 金剛三昧經〉에 대한 그의 연구는 높이 평가되어 인도 논사들의 저술처럼 '논'(論)의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원효는 교학뿐만 아니라 파계한 후 대중포교활동에도 힘썼다. 원효를 비롯한 많은 신라 승들은 정토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썼으며 정토신앙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신라시대 이래 정토신앙은 비록 한 독립된 종파를 이루지는 않았으나 미륵신앙과 더불어 대중적 신앙으로 널리 퍼졌다. 한편 원측(圓測)과 같은 신라승은 현장법사의 문하에서 유식학에 두각을 나타내어 법상종의 창시자 자은대사(慈恩大師) 규기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으며 그의 유식학은 도증(道證)·태현(太賢) 등에 의해 신라에 전해져 한국 법상종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는 8세기말부터 지배계급의 내분과 지방 호족들의 발호로 사회적 혼란기에 들어갔으며 불교계도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이무렵 중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선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한국 불교는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중국으로부터 선을 전수받고 돌아온 승려들은 대부분 화엄종 출신의 승려들이었으며 그들은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호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말기부터 고려초에 걸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세워졌으며 그 개창자들은 대부분 중국 남종선의 거봉인 마조도일(馬祖道一:707~786) 계통의 법맥을 전수받은 자들이었다. 교외별전·이심전심을 강조하는 그들의 과격한 선풍(禪風)은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교학적 종파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그후로부터 선과 교의 갈등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많은 사찰들을 세웠으며 선과 교를 모두 지원했다. 그가 후손을 위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는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고려조 대대로 불교와 왕실은 태조의 정책에 따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제4대 광종 때에는 과거제도의 도입과 함께 승려들을 위한 국가고시인 승과(僧科)도 설치되었으며, 승과를 통과한 선과 교의 승려들에게는 마치 관직과도 같이 각각 법계(法階)가 수여되었다. 승려들에 주어졌던 최고의 명예직은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서 국가종교로서의 고려불교의 위치를 잘 반영하는 제도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불교가 나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불교가 관료조직화되어 국가의 관장 아래 들어갔음을 뜻하기도 한다. 왕실과 귀족들의 물질적 지원을 받은 불교는 외적으로는 번창했으나 사상적·정신적으로는 창의성을 상실했으며 승가는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특히 선과 교의 대립은 종교적 갈등 못지 않게 교단적·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어 승가의 큰 문젯 거리가 되었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은 화엄종 승려였으나 중국으로부터 천태종을 재수입하여 고려 천태종을 개창했다. 그는 천태사상에 입각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창함으로써 교학 위주의 제종파들과 수행 위주의 선을 통합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선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 그의 통합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무렵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뭉치기 시작했으며 천태종은 조계종과 같이 하나의 선종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의천과는 달리 조계종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출현하여 선교의 융화에 힘씀과 동시에 선의 수행체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화엄에도 선과 같은 돈오(頓悟)의 길이 있음을 강조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제시했으며 돈오 후에는 반드시 점수(漸修)가 따라야 한다고 하여 수행의 방법으로서 정혜쌍수(定慧雙修) 혹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그는 선만의 독특한 길인 경절문(徑截門), 즉 조사들의 선문답인 화두(話頭) 혹은 공안(公案)의 명상을 통해 모든 언어와 생각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얻는 길을 제시했다. 지눌의 선은 수선사(修禪社:지금의 松廣寺)를 본거지로 하여 최씨 무신정권의 지원 아래 번창했으며, 지눌 이후 한국 불교는 선이 우위를 점하면서 교를 흡수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신유학을 숭상하는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불교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면서 배불정책이 펼쳐짐에 따라 불교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많은 승려들이 환속되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찰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종파들이 통폐합되는가 하면 승과제도마저 철폐되었다. 백성들의 자유로운 출가가 금지되었으며 심지어는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승가는 계속해서 자질있는 승려들을 배출하는 등 그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불교는 왕실의 여인들과 서민들의 계속적인 귀의를 받아왔다. 조선의 승려들 가운데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명종 때 승과가 일시 부활하자 응시하여 합격한 후 선종과 교종 모두를 총괄하는 판사(判事)로서 불교 중흥에 힘쓰다가 은퇴한 후 묘향산에 기거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시대의 명승들은 대부분 서산 문하에서 나와 조선 불교의 혜명을 이어갔다. 임진왜란을 맞아 휴정은 선조의 간청에 따라 승병을 모집하여 구국활동에 투신했으며, 그의 제자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 1610)은 승병 활동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과의 강화 외교에도 큰 공헌을 했다.

휴정 이후 한국불교는 결정적으로 선을 주로하고 교를 종으로 하는 불교, 혹은 교로 시작하여 선으로 들어가는 사교입선적(捨敎入禪的)인 불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17세기경에 형성된 승려들을 위한 강원(講院)의 교과과정뿐 아니라 강원과 선원(禪院)의 관계에도 나타나 있다. 강원의 교육 내용은 선과 교를 겸했는데, 그 교육과정은 선원에서의 수행을 위한 예비단계적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조선 후기부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국 불교의 전통이다.

조선 후기를 통하여 사찰들은 권세 있는 양반과 관리들의 착취대상이 되어 승려들은 각종 부역을 강요받았으며, 온갖 물건들을 절에서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승려들 가운데는 사찰의 살림과 운영을 맡은 사판승(事判僧)과 수도에만 전념하는 이판승(理判僧)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사찰에는 공부에 정진하는 승려와 절 살림을 운영하는 등 외호(外護)에 힘쓰는 승려 간의 구별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 불교는 조선 총독부의 사찰령에 의해 엄격한 통제하에 들어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에서 내린 불교에 대한 탄압적 조치들이 폐지됨에 따라 승려들은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승가는 친일세력과 한국 불교의 독립성 및 고유한 전통을 지키려는 승려들로 나누어져 갈등을 겪었으며, 일본 승려들의 영향 아래 결혼을 하는 대처승과 전통적인 비구승의 구별도 생기게 되어 해방을 맞은 승가에 분열의 큰 요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불교는 대처승 종단인 태고종과 한국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비구승 종단인 조계종의 양대 종단이 있으며, 그밖에 최근에 생긴 군소 종파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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