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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한국 천주교

 

 

서학(西學)·서교(西敎)·천주학(天主學) 등으로 불리다가 천주교 또는 가톨릭으로 정착되었다.

창설배경

한국에 천주교가 창설된 배경으로 대외적인 것과 대내적인 것 2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대외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결과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조선의 학자들이 천주교를 서학의 일부로서 접하게 되었다.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식을 얻는 한편,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조선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設〉에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天主實義〉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1631년 진주사(陳奏使)로 베이징[北京]에 갔던 정두원(鄭斗源)과 1644년 소현세자(昭縣世子) 일행은 귀국하면서 서양의 과학기구와 서적을 가져왔고, 이익(李瀷)과 그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 등은 천주교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갖고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를 했다. 이리하여 이미 17세기 초엽부터 조선의 지식인들 특히 남인(南人) 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지식의 차원에서 탐구하게 되었다. 둘째, 대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사회변동과 문화변동이 크게 일어남으로 인해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반발과 아울러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계속되는 기근과 전염병 등 자연재해와 세도정치의 부패로 백성들의 생활이 극히 어려워졌다. 이에 기존의 성리학적 사상체계에 대한 반발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천주교 서적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져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되었다. 그결과 조선 후기 사회는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서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차차 지식의 차원을 넘어 실천의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서학을 신앙운동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권철신(權哲身)·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전(丁若銓) 등으로 경기도 광주군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서 교리연구회를 갖는 등 천주교 교리를 연구·실천했다. 이벽은 북경에 가게 된 이승훈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했고, 이에 이승훈은 1784년 봄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이벽·권일신(權日身)· 김범우(金範禹) 등 자신의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함께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에서 종교집회를 열어 최초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탄생했으며 이것이 한국 천주교 교회의 창설이다.

박해시대

1785년 봄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가진 집회가 발각되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다. 양반들은 석방되고,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곤장을 쳐 귀향 보내졌고 귀양지에서 죽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사에 나타나는 첫 순교자가 되었다. 풀려난 양반들은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1786년에는 신부들을 선임해서 고해성사도 듣고 미사도 집전하는 등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실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교리서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조상제사도 교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발견하고, 1789년에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로 문의한 결과 천주교인들은 가성직 제도와 조상제사를 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상제사의 거부는 전통적 유교사회에 대한 거역으로 인정되어 1791년 권상연(權商然)과 윤지충(尹持忠)의 순교를 초래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을 일으켰다(辛亥迫害).

1794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첫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1795년 체포령이 내린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윤유일·최인길·지황 등이 순교했다(乙卯迫害). 주 신부의 입국 당시 약 4,000명에 불과하던 입교자 수가 주 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1800년에는 1만 명으로 늘었고, 정약종(丁若鍾)은 우리말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를 펴내기도 했다.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기존의 신분제에 도전을 가하는 천주교의 비약적 발전은 집권양반층을 자극하여 1801년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실시되고,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었고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순교하였다. 황사영의 백서(帛書)사건도 이때 일어난 일이다. 죽음을 면한 신자들은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에게 선교사의 지속적 파견을 호소하면서 교회 재건에 힘썼다. 그결과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조선교구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1836년부터는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39년 다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 당시 선교사인 모방·샤스땅·앵베르 모두 희생되었고 교회 지도자들도 상당수 순교했다.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와 신도 9명이 순교했다. 1860년에 일어난 경신박해(庚申迫害)에도 불구하고 다시 천주교가 성행하자 1866년 흥선 대원군은 대규모의 박해를 단행하였고, 이 병인박해(丙寅迫害)에서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모두 8,00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기에 이른다.

천주교의 성장

개항 이후 조선은 구미 열강들과의 조약을 체결하면서 격동기를 맞이한다. 천주교는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는다. 첫 단계는 신앙의 자유가 묵인된 단계로서 대략 1882년부터로 추정된다. 1882년 서울에 한한(漢韓)학교를 세운데 이어 1885년에는 지방에도 학교를 세우고 고아원·양로원·시약소(施藥所) 등 사회복지시설도 설치하였다. 또한 이때를 전후하여 서울의 종현(지금의 명동) 본당을 비롯해서 여러 지역에 본당이 건설되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서 선교사들의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두번째 단계는 신앙의 자유가 공인된 단계로서 1895년부터로 추정할 수 있다. 1895년 고종은 조선 교구장 뮈텔(한국 이름은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병인박해 이래 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된 일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앞으로 교회와 국가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것을 제의했다. 같은 해 대규모의 사면령을 통해 1866년에 순교한 양반들의 복권도 이루어졌다. 그후 1899년 뮈텔 주교와 내부(內部) 지방국 사이에 체결한 교민조약(敎民條約)은 한국인의 신앙의 자유를 법률적으로 보장했으며, 1904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체결한 선교조약은 교민조약의 내용을 더욱 보강했다.

개화기의 천주교는 교육과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1906년 경향신문의 발간을 들 수 있다. 교육운동에 있어서는 초기에 초등교육 분야에 치중하다가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중등교육기관도 운영했다.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며 독립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범교회적이지는 못했다. 일제의 종교 탄압은 갈수록 심해져서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사범교육기관인 숭신(崇信)학교도 폐교되었다. 그후 소위 '포교규칙'은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종교교육까지 금지시켰고, 1920년대에 와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 아래서도 교회는 발전을 계속하여 교구의 수가 9개로 증가했고 새로운 선교단체가 들어오기도 했다. 1942년에는 노기남(盧基南) 주교가 서울 교구장을 맡게 되어(1902~84) 한국인으로는 첫 교구장이 되었다.

해방 후의 천주교

8·15해방은 천주교의 발전에도 밝은 전망을 가져다 주었으나, 남북 분단은 북한 교회의 전멸을 초래했다. 남한에서는 일제시대에 폐간되었던 〈경향신문〉·〈가톨릭청년〉·〈경향잡지〉 등이 속간되고, 여러 천주교 교육기관이 개편되고 활성화되었다. 분단 이후 남한의 천주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신자 수가 1962년에는 약 53만 명으로 증가했다. 1962년 한국 천주교는 교계제도 면에서 선교지역의 교구였던 것이 독립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고, 1968년에 서울 대교구의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1922~) 한국 천주교는 제도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추기경의 서임으로 한국 천주교는 전세계 천주교의 주요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 참여의 폭이 넓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한국 천주교는 고조된 사회참여 의식 속에서 교회 쇄신운동에 힘써 1970년대에 시작된 정의구현운동이 일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부터 한국 천주교의 쇄신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으며, 1984년 5월에는 한국의 순교자 103인이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에 오르게 되고, 1988년에는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91년 12월 31일 현재 한국 천주교는 292만 명의 신도가 있고, 교구 수는 15개이며, 이중 서울·대구·광주는 대교구로 설정되어 있다.

梁承愛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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