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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

I. INTRODUCTION

II. The gospel tradition

SOURCES

Non-Christian sources.

Christian sources.

The Pauline Letters.

The Gospels.

TIMES AND ENVIRONMENT

Political conditions.

Religious conditions.

The Pharisees.

The Sadducees.

The scribes.

The Zealots.

The Essenes.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The birth and family.

The birth of Jesus.

The family of Jesus.

The ministry.

The role of John the Baptist.

The beginning of the ministry.

The calling of the disciples.

The Galilean period.

THE MESSAGE OF JESUS

The Kingdom of God.

The will of God.

THE SUFFERINGS AND DEATH OF JESUS IN JERUSALEM

THE STORY OF JESUS AND FAITH IN JESUS

I. 서론

 

II. 복음 전승

 

자료

비기독교 자료들.

기독교 자료들.

바울의 편지들.

복음서.

시대와 주변 세계

정치적 상황.

종교적 상황.

바리새 파.

사두개 파.

율법학자들.

열심당.

에세네 파.

예수의 삶과 사역

탄생과 가족.

예수의 생.

예수의 가족.

사역.

세례요한의 역할.

사역의 시작.

제자들을 부름.

갈릴리 시기.

예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

예수 이야기와 예수에 대한 신앙

III. The picture of Christ in the early church: The Apostles' Creed

 

PREEXISTENCE

Jesus Christ.

God's only son.

The Lord.

INCARNATION AND HUMILIATION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GLORIFICATI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II.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상( 사도신경)

선재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

성육신과 겸허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그는 지옥에 내려가시며.

영화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IV. The dogma of Christ in the ancient councils

 

THE COUNCILS OF NICAEA AND CONSTANTINOPLE

Early heresies.

Nicaea.

Constantinople.

THE COUNCILS OF EPHESUS AND CHALCEDON

The parties.

The settlement at Chalcedon.

IV. 고대 공의회의 그리스도 교리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초기의 이단들.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당파들.

칼케돈 공의회의 해결.

V. The interpretation of Christ in Western faith and thought

 

DOCTRINES OF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The medieval development.

The Reformation and classical Protestantism.

THE DEBATE OVER CHRISTOLOGY IN MODERN CHRISTIAN THOUGHT

Origins of the debate.

The 19th century.

The 20th century.

V. 서방 신앙과 사상에서의 그리스도 해석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

중세의 발전.

종교개혁과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그리스도론 논쟁

논쟁의 기원들.

19 세기.

20 세기.

VI. Bibliography

Times and environment: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The message of Jesus:

The sufferings and death of Jesus:

The story of Jesus and faith in Jesus: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예수의 생애와 사역

The birth and family.

탄생과 가족

The birth of Jesus.
예수의 탄생
The course of Jesus' life and the geographic setting of his ministry can only be given in rough outline. The details are surrounded by many uncertainties. The period within which his ministry and death occurred may, however, be narrowed down with considerable accuracy on the basis of a synchronistic dating of the appearance of John the Baptist in the 15th year of Tiberius (Luke 3:1)--i.e., AD 28/29--which is confirmed by nonbiblical sources. But the year and place of Jesus' birth are uncertain. Mark and John say nothing about them. The only sources for them are the widely divergent birth and childhood legends in Matthew 1 and 2, where Jesus' birth and early lot are set in the time of Herod I and the change of regime (4 BC), and the narrative of Luke 2, which links Jesus' birth with the first registration in Judaea under the emperor Augustus (AD 6). There is also historical evidence of a census carried out about 8 BC. With all of this in mind, many sources estimate the year of birth as 7-6 BC. (The use of BC [before Christ] and AD [Anno Domini, or "in the year of the Lord"] was not common until the Middle Ages.) (see also Index: infancy narrative) 예수의 생애와 그가 활동한 지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단지 윤곽만 파악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들은 많은 의혹들로 싸여 있다. 그러나 그의 사역과 죽음의 기간은 티베리우스 15년(누가 3 : 1), 즉 AD 28~29년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상당히 정확하게 활동시기를 추정할 수 있으며, 비성서적 자료들도 이것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예수 탄생 시기와 장소는 불확실하다. 마가 복음과 요한 복음은 이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는다. [마태의 복음서] 1·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초기시절이 헤로데 1세 때와 정권의 교체기(BC 4)였고, [누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AD 6) 있었던 유대의 첫번째 인구조사와 연결시킨다. 또한 BC 8년경에 행해진 인구조사에 대한 역사적 증거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많은 자료는 탄생 연도를 BC 7~6년으로 추정한다(BC와 AD의 사용은 중세까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음). 
The tradition of Bethlehem as the place of Jesus' birth has its source in all probability in the Old Testament conception of the Messiah as a descendant of David. Early Christianity took this view from the beginning. "Son of David" is found in many texts (e.g., Mark 10:48) alongside other titles of Jesus. Its original political and national sense was abandoned, even though it is still recognizable in the acclamation of the people (Mark 11:10). The theological motif of Jesus' Davidic descent, however, did not necessarily involve the idea that he was born in Bethlehem, David's hometown. That is the case only in Matthew 2 and Luke 2. The accounts differ in that, in Matthew, Bethlehem is thought of as the parents' original place of residence, which they soon change to Nazareth because of the dangers threatening their child (e.g., the flight to Egypt), whereas in the Lucan story Jesus' parents really live in Nazareth but stay in Bethlehem temporarily because they are obliged to register at the Davidic family's place of origin. Both traditions are to be judged as legendary variations of the theological theme of Jesus' messiahship, even though each in its own way assigns to his birth a place in history. The extent to which these texts are marked by theological motifs, above all by the thought that Jesus as Messiah fulfills the promises of the Old Testament and the hope of Israel and the world, is shown by the numerous quotations woven into the stories.  예수의 탄생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전승은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구약성서]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런 시각을 취했다. "다윗의 아들"은 예수의 다른 명칭들과 함께 많은 원전들(예: 마가 10:48)에서 발견된다. 비록 아직도 사람들(마가 11:10)의 환호속에서 인정되고 있지만, 명칭의 원래적인 정치적 민족적 개념은 없어졌다.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그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마태복음 2장 및 누가복음 2장에 한할 뿐이다. [마태의 복음서] 2장에서 베들레헴은 부모가 본래 살던 곳이었으며 그들은 자녀들을 위협하는 위험 때문에 이집트를 갔다가 나자렛으로 옮긴다. 그에 반해 [누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부모가 실제로 나자렛에 살았으나 예수를 다윗 가족 출생지의 호적에 올리기 위해 잠시 베들레헴에 머문 것으로 나타난다. 두 전승이 각각 고유한 방식대로 그가 탄생한 장소를 역사상에서 지정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아성이라는 신학적 주제의 전설적 변형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런 원문들이 신학적인 주제를 띠게 되는 범위는, 무엇보다도 메시야로서의 예수가 구약성서의 약속들과 이스라엘과 세상의 희망을 성취한다는 사상에 의해서, 이야기들 안에 엮여지는 수많은 인용들로서 증명된다.
The widely differing genealogies in Matthew 1 and Luke 3 also belong in the context of the doctrine of the Davidic descent of the Messiah (Christ). They are the only New Testament evidences for genealogical reflection about Jesus' messiahship. The two texts, however, cannot be harmonized. They show that originally a unified tradition about Jesus' ancestors did not exist and that attempts to portray his messiahship genealogically were first undertaken in Jewish Christian circles with use of the Septuagint (Greek translation) text of the Old Testament. Both texts have to be eliminated as historical sources. They are nevertheless important for the development of Christology (doctrines on the nature of Christ), because they reveal the difficulty of reconciling the genealogical proof of Jesus' Davidic descent with the relatively late idea of his virgin birth.  [마태의 복음서] 1장과 [누가의 복음서] 3장의 상당히 다른 계보들에서 메시아(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교리를 내포한다.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계보적 사고를 위한 유일한 [신약성서]의 증거이다. 그러나 두 본문은 조화될 수 없다. 그들은 본래 예수의 선조들에 대한 일치된 전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메시아성을 계보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구약성서]의 70인역(그리스어 번역)을 사용하여 유대 그리스도인 집단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본문들은 역사적인 자료들로서는 무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교리)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동정녀 탄생이라는 후기의 사상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계보적 증명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This last tradition, too, is recorded in only two stories--in Luke 1 and Matthew 1--and was originally quite unconnected with the frequently found motif of Jesus' divine Sonship. Paul, John, and the rest of the New Testament writers are not acquainted with the idea. Also, it has left no traces in the rest of the Synoptic tradition, not even in the story of Jesus' birth (Luke 2:1-10), where Joseph and Mary appear as his natural parents. In Matthew 1 Jesus' miraculous birth is presupposed, and in Luke 1 it is explained more closely. This tradition is not to be traced back directly to the idea, widely held in classical antiquity, of heroes and great men who derived from the union of a deity with a human woman. In other words, Jesus is not characterized as a demigod here. What underlies this tradition is, rather, the concept of the creative power of God and his Spirit, which is known from Hellenistic Judaism. This theological, not biological, motif has been applied to Jesus and, with the greatest probability, only secondarily combined with the Greek version of the messianic promise of Isa. 7:14 (in the Septuagint the Hebrew word 'alma--i.e., "young woman"--is translated as "virgin"), and in this way the Christian story came about. According to a very old, reliable tradition, the village of Nazareth--which lay in the Galilean hill country, had a Jewish population, and was untouched by the influence of the Hellenistic cities--was the hometown, and then certainly also the birthplace, of the "Nazarene" (Mark 1:24; 10:47; 14:67; 16:6).  동정녀 탄생 전승도 역시 오직 두 자료(마태 1, 누가 1)에만 기록되었으며, 본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것도 아니었다. 바울, 요한 및 나머지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 생각에 친숙하지 않다. 또한, 이런 생각은 공관 복음서의 나머지 전승들에서도 흔적을 찿을 수 없으며, 요셉과 마리아가 그의 자연적인 부모로 나타나는 심지어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마태의 복음서] 1장에서 예수의 기적적 탄생이 언급되고 [누가의 복음서] 1장에서는 더 자세히 설명된다.  이 전승은 신과 인간 여자와의 결합으로서 탄생하는 영웅들이나 위대한 사람에 관한 고대의 이야기에서 널리 믿어지던 사상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여기서 반신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 전승에 깔려 있는 것은 , 차라리, 하느님과 성령의 창조적 능력이며, 이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로부터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이 아니라, 신학적 동기가, 예수에게 적용되었고, 명백하게도, 이제 이차적으로 [이사야] 7장 14절(70인역에서 히브리 단어 alma, 즉 '젊은 여인'이 '처녀'로 번역됨)의 메시아 약속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과 연합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기독교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매우 오래된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나자렛 마을은, 언덕이 많은 갈릴리의 시골에 있으며, 유대인이 많은 곳이며 그리스의 도시들의 영향을 입지 않은 곳으로, 예수의 고향이었으며, 그리하여 명백하게 "나사렛 사람"의 출생지였다.(마가 1 : 24, 10 : 47, 14 : 67, 16 : 6).
The family of Jesus.
예수의 가족

Four of Jesus' brothers and several sisters are mentioned in Mark 6 (though their identification as full-blooded siblings, half brothers and half sisters, or cousins has been long debated). All his relatives' names testify to the purely Jewish character of the family: his mother's name was Mary (Miriam), his father's Joseph, and his "brothers' " James (Jacob), Joseph, Judas, and Simon (names of Old Testament patriarchs). The same is true of the name Jesus. In the Septuagint it is the customary Greek form for the common Hebrew name Joshua--i.e., "Yahweh helps." It is also mentioned in Mark 6 that Jesus or his father (there are variant textual versions) was a carpenter. There are several not unimportant pieces of information preserved about the later history of the family. Of his father, who probably died early, little is mentioned. His mother, brothers, and sisters did not join his movement at first but, rather, disapproved of his behaviour (Mark 3:31-35). Mary is, however, mentioned as a member of the Christian Church after his death (Acts 1:14). The same is true of his brother James, whom Paul names among the witnesses of the Resurrection (I Cor. 15:7) and who was the leader of the Jerusalem Church after Peter (Galatians, Acts). The author of the Letter of James has taken a brother's name for himself, as did the author of the Letter of Jude in respect to another brother. According to a later nonbiblical account (in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Eusebius, a 4th-century historian of the church), grandchildren of Jude (who otherwise remains unknown), who were living in Galilee, were summoned by the emperor Domitian as "descendants of David," but then released as representing no political danger. (see also Index: "Ecclesiastical History,"

예수의 가족으로는 형제 4명과 몇 명의 누이가 [마가의 복음서] 6장에서 언급된다(본문에는 교리적 동기를 드러내기 위해 그들을 이복형제나 사촌들로 만들 근거가 없음). 가족의 이름은 어머니 마리아(미리암), 아버지 요셉과 형제들은 야고보(야곱)·요셉·유다·시몬(구약 족장의 이름들)이다. 예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70인 역 성서에서 예수의 이름은 히브리 이름인 요수아, 즉 '여호와가 도우신다'의 그리스어 형태이다. [마가의 복음서] 6장에서 예수 혹은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다고 언급한다. 가족의 이후 역사에 대한 몇 개의 단편적인 정보가 있는데, 아마 일찍 죽은 것 같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누이들은 처음에는 그의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마가 3 : 31~35). 그러나 마리아는 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으로 언급된다(사도 1 : 14). 그의 형제 야고보는 베드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유다의 편지]의 저자가 다른 형제의 이름을 존경하여 이름을 취했던 것처럼, [야고보의 편지] 저자도 야고보의 이름을 취했다. 4세기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따르면, 갈릴리에 살고 있었던 유다의 손자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윗의 자손들'이라는 이유로 소환되었으나 정치적인 위험이 없으므로 석방되었다.

Jesus most likely grew up in the piety that was cultivated in the home and in the synagogue (including Bible study, obedience to the Law, prayer, and expectation of the final coming of the Messiah) and also took part in pilgrimages to Jerusalem. From these scattered reports it is possible to gain some information about Jesus' background and theological education. The latter also comes to light in his teaching and in the frequently attested honorific form of address "rabbi" (teacher), which, in the language of the time, was not yet confined to members of the trained and ordained profession of the scribes. Nothing is precisely known, however, about Jesus' youth and inner development. What is known is contained in the sole narrative in Luke 2:40-52 (the boy Jesus in the Temple) and the legendary apocryphal gospels, which, after the manner of legend, sought to illumine the obscurity of Jesus' childhood.  예수는 대체적으로 , 성서 공부, 율법에 대한 순종, 기도, 메시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한 기대 등을 포함하여, 가정과 회당에서 양육되었으며 예루살렘의 순례에 참가하는 등의 경건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듯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보고들에 의하면 예수의 배경과 신학적 교육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후자는 그의 가르침과 '랍비'(선생)라는 명예로운 이름에서 밝혀지는데, 그 시대에 랍비라는 칭호는 훈련되어 임명된 율법학자라는 직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초기생활과 내적 발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알려진 것은 [누가의 복음서] 2장 40~52절(성전에서의 소년 예수)에 유일한 설화가 간직되어 있고, 위경들이 전설의 형식으로 예수의 어린시절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The ministry.

사역

The role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의 역할
The Gospel accounts of the appearance and activity of John the Baptist and of Jesus' Baptism at his hands first establish a historically safe basis for knowledge of Jesus' life and work. Significantly, the oldest Gospel writer calls these event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Mark 1:1), indicating that his would be a message about Christ, not a description of the contemporary background for Jesus' life. The Baptist is, therefore, represented exclusively from the Christian point of view. His place in the Christian history of salvation is that of a forerunner or pioneer; or he is a witness to Jesus, as i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But the tradition has nevertheless preserved unchallengeable information about John, especially in Q. Josephus characterizes him as a mere moral teacher and his Baptism as merely ritual washing. In reality, however, he made his appearance in the desert as a prophet of the imminent Last Judgment, calling all without exception to repentance in the eleventh hour, and baptized those who were ready to repent, in order to prepare them for the baptism of fire of the mightier one coming from heaven and to preserve them from his annihilating wrath (Matt. 3:7ff. and Luke 3:7ff.). His dress and diet as an ascetic nomad and, above all, the location of his ministry (the Judaean desert and the Jordan steppes), far away from the institutions and places of traditional religion and secularity, illustrate the earnestness of his eschatological preaching and his attack on all conventional piety; but they also correspond to the old prophetic promise that God would encounter his people in the Last Days, as he did once before, in the desert. Historically, all these features may not be understood immediately in Christian perspective; i.e., as pointing to Jesus as the Messiah. The tradition of the Gospels visibly and increasingly interpreted the history of the Baptist in retrospect, and not least for the reason that there still existed for a considerable time alongside the disciples of Jesus a rival body of disciples of the Baptist.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동, 그에게 예수가 세례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역사적 근거이다. 특히, 가장 오래된 복음서 저자는 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가 1 : 1)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동시대적 배경의 서술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묘사된다. 그리스도교 구원 역사에서 그의 위치는 선구자 혹은 개척자이거나 [요한의 복음서]에서처럼 예수의 증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승은 요한에 대한 확실한, 특별히 Q에 있어서, 정보를 보존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그를 단순히 도덕 교사로, 그의 세례를 단순한 의식적 씻음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회개하라고 하면서 임박한 마지막 심판의 예언자로 광야에 등장했고, 소멸시키는 진노(마태 3 : 7~, 누가 3 : 7~)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더 전능하신 분의 불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도록 회개하려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금욕적 유목민 같은 옷, 음식, 제도, 전통적 종교장소, 세속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의 활동장소(유대 광야와 요르단 스텝 지역)는 종말론적 설교의 열정과 인습적 경건에 대한 그의 공격을 예시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마지막 날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만난다는 오래된 예언자의 약속과 일치한다. 역사적으로 이 모든 모습은 메시아로서 예수에 초점을 맞추는 그리스도교인의 시각에서는 즉각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복음서들의 전승은 세례 요한의 역사를 소급하여 해석했으며, 이런 해석은 예수의 제자들 옆에 이에 필적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무리들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해서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That Jesus was baptized by John, as all the Gospels record, indicates that in all probability Jesus initially belonged to John's movement. The account of Jesus' Baptism is styled in the Gospels as an "epiphany (or manifestation) story" and deals with Jesus' installation at this time as Messiah (Mark 1:9-11). The announcement of the Kingdom of God by John and his call to repentance retained decisive significance for Jesus. His high estimate of the Baptist emerges unambiguously from the fact that he placed John above the prophets and called him the greatest among men (Matt. 11:7-11). He saw the signs of the approaching Kingdom of God in the work of the Baptist as in his own work, and he recognized the authority given John as being from heaven (Mark 11:27-33). These words carry all the more weight historically, because the tendency of the context here is to proclaim Jesus as the Messiah and to place the Baptist, as the lesser, in Jesus' service. It is significant that John himself is nowhere attacked in the Synoptic texts, nor is he designated as a follower of Jesus. Wherever polemic can be recognized in the Gospels (especially in John), it is always directed against the false belief, doubtlessly held by the (later) Baptist disciples, that John was the promised Messiah. The extent to which the close connection between Jesus and John occupied the theological reflection, apologetics, and imagination of the Christian Church is shown by several passages and, above all, by the cycle of legends in the introduction to Luke (chapter 1). Regardless of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Jesus and John the Baptist, especially in their prophetic announcement of the approaching Kingdom of God and their call to repentance (cf. Matt. 3:2; 4:17), there are also radical differences.  예수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가 처음에는 요한의 운동에 속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가 세례받은 내용은 복음서에서 '에피파니(현현) 이야기'로 유형화되었고, 이것을 예수가 메시아로 임명되는 것으로 다룬다(마가 1 : 9~11). 요한에 의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에로의 부름은 예수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요한을 예언자들 위에 놓았으며 그를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불렀다(마태 11 : 7~ 11). 그는 자신의 사역에서처럼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를 보았고,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했다(마가 11 : 27~33). 이 말들은 역사적으로 한층 더한 무게를 지닌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맥의 경향은 예수를 메시아로 선언하며 세례 요한을 예수를 섬기는 더 낮은 자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한 자신은 공관 복음서들의 어느 곳에서도 공격당하지 않으며, 예수의 추종자라고 지칭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복음서에서 반론이 있을 만한 곳(특히 요한 복음에서)에는 언제나, 의심할 여지 없이 후대의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서 제기될 수 있는, 요한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거짓된 믿음을 향해서 집중되었다.  예수와 요한의 밀접한 관계가 차지한 신학적인 고찰, 변증론 및 기독교 교회의 구상의 정도는, 여러 구절들에서 밝혀지는데, 무엇보다도, 누가복음 1장의 서문에서 전승으로 나타난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와 회개에로의 부름(마태 3 : 2, 4 : 17 참조)에서 예수와 세례 요한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The beginning of the ministry.
사역의 시작
At the latest, after the Baptist's imprisonment (as the Synoptics state), possibly even earlier (according to John), Jesus began as a grown man (Luke 3:23) an independent public ministry, but in the villages of his Galilean homeland and--sporadically--in the neighbouring countryside, rather than in the wilderness, as did John. The real area of his ministry was the district on the northwest bank of the Lake of Gennesaret (or Sea of Galilee; the towns of Beth-saida, Chorazin, and Capernaum). The change of scene is significant in itself. Jesus did not call the people into the desert. He sought men in their settlements and took part in their ordinary life, and not as an ascetic, like John the Baptist (Matt. 11:18). He worked among them as a wandering preacher (Matt. 8:20) and charismatic miracle worker, without, however, baptizing like John. But the image he presents is nonetheless highly peculiar. He taught not only in the synagogues but likewise in the open air, on the shore of the lake, and on the road. There also were strange people in the group surrounding him: women, children, and many who were viewed as godless or unclean. Further, the manner of his teaching is surprising. He did not derive it from the Holy Scriptures, although he was familiar with them, esteemed them, and appealed to them here and there. Instead, he constantly presented the reality of God and the validity of his will in an immediate way and made them comprehensible to his hearers without using the established structure of sacred texts and traditions and without presupposing a conventional, religious point of view. His metaphors, parables, and proverb-like utterances were not used to explain traditional teachings of biblical theology but, instead, appealed directly to the everyday experience and the understanding of his hearers, and they are therefore characterized by a unique self-evidence and a disarming simplicity.  마침내, 세례 요한의 투옥 이후(공관 복음서에서 언급하듯이), 아마도 훨씬 이전에(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성인(누가 3 : 23)으로서, 광야보다는 갈릴리 고향 마을들에서(간헐적으로는 이웃 마을들에서) 독립적인 공적 사역을 시작했다. 그의 사역의 실제 영역은 겐네사렛 호수의 북서연안지역(또는 갈릴리 해, 베새다 마을들,·코라진·및 가버나움)이었다. 장소의 전환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었다. 예수는 백성들을 광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그들의 거주지에서 찾았고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참여했으며, 요한처럼 금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마태 11 : 18). 그는 유랑하는 설교자로서 그들 가운데서 일했고(마태 8 : 20), 카리스마적인 기적을 행했으나 요한처럼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준 이미지는 상당히 특이하다. 그는 회당에서뿐만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호숫가에서, 길에서 가르쳤다. 그를 둘러싼 무리에는 이상한 사람들(여인, 어린이, 불경건하거나 불결한 자로 여겨진 사람들)이 있었다. 더욱이 그의 가르치는 방식은 놀라웠다. 그는 성서를 잘 알고 존중했으며, 여기저기서 그것들에 호소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성서로부터 끌어낸 것이 아니다. 그대신 그는 하느님의 실재와 그의 뜻의 정당성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항상 제시했고, 거룩한 본문과 전승들의 기존 구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인습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의 전제없이 청중들을 이해시켰다. 그의 은유·비유·잠언은 성서신학의 전통적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신 일상 경험과 청중의 이해에 직접 호소했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고유한 분명함과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단순함이 특징이었다. 
This corresponds to the manner of his behaviour in his meetings with other people. The Gospels portray this in a large number of separate scenes. These persons vary considerably: pious and impious, rich and poor, respected and outcast, healthy and ill. In every encounter, Jesus' amazing sovereignty with which--free of all prejudices--he mastered the situation is made visible. He saw through his opponents' attempts to corner him in debate, disarmed their objections, saw the needs of the possessed and the sick who crowded around him, and associated with those who were avoided by others. Some of the scenes may only have been added or filled out in later popular tradition, but they clearly demonstrate the power with which Jesus helped people by word and deed, whether he grew passionately angry over the power of disease or over the pride and lovelessness of the "righteous" or whether he commanded the demons or blessed children and laid hands on the sick.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그의 행동 방식과 일치한다. 복음서들은 이것을 많은 분리된 장면에서 묘사한다. 이 사람들은 상당히 다양하다: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존경받는 자와 버려진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이 모든 만남에서, 선입견에서 떠나 상황을 지배하는 예수의 놀라운 위엄이 드러난다. 그는 논쟁에서 그를 어렵게 하려는 적대자들의 시도를 누그러뜨렸고, 그 주위에 모여든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자들과 함께했다. 이들 장면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오직 후대에 잘 알려진 전승에서 더해졌거나 채워졌지만, 그가 질병들의 권세나 "의로운 자들"의 교만과 사랑없음에 대해 참을 수 없이 분노하든지, 아니면 마귀들을 쫓아 내거나, 어린이들을 축복하거나, 아니면 병자에게 손을 얹든, 그것들은 분명히 예수가 말씀이나 행위로서 사람들을 도와 주었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The calling of the disciples.
제자들을 부름
According to the unanimous witness of the Synoptic Gospels, Jesus gave rise to a movement in Galilee and found numerous followers, although not without provoking rejection as well. This movement cannot yet be called a "church." (This concept first appears in the later tradition.) To spread his message and movement, he called on his disciples, for the sake of the approaching Kingdom of God, to resolutely surrender all ties of family and work (Mark 8:34ff.; Matt. 10:37ff.; Luke 14:26ff.) and to follow him and to become "fishers of men" (Mark 1:17; Luke 5:10). Many of his words are of extreme sharpness and do not conceal how difficult the disciples' road will be (Luke 14:25-33). But, at the same time, the patent immediacy of Jesus' sovereign power comes to light in these texts. In the scenes mentioned, it is Jesus who makes the decision. He calls, appoints, and selects particular men, without regard to their origin and previous training. There are fishermen (Andrew, Peter, James, and John), a tax collector (Matthew), and Zealots (Simon and, perhaps, Judas Iscariot) among them, perhaps also a few craftsmen and peasants. Whether it was a circle of 12 disciples from the start is questionable and under debate. It is clear, however, that he commissioned and authorized his disciples to preach and to drive out demons (Mark 3:14). Some of these disciples are well noted in the Synoptic tradition (e.g., Peter and Judas Iscariot). I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others come into the foreground, including some from among the followers of the Baptist. Of others, only their names are known (e.g., Thaddaeus). A characteristic of these companions of Jesus is that their discipleship is not, as with the rabbis, a transitional stage that ends with their "training." None of them moves up after sufficient study to the status of "master" (Matt. 23:8). Even if accounts of the calling of disciples have, in general, been styled in the later tradition as examples of what it means to be a Christian and individual scenes have been added to the original stock of stories, the recollection of incidents that occurred during Jesus' ministry in Galilee is doubtlessly preserved in the texts.  공관복음서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물론 비난이 없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이 운동은 아직은 '교회'라고 불려질 수는 없다(이 개념은 후기 전승에서 처음으로 나타남). 그의 말씀과 운동을 확장하기 위해 그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가족과 생업의 모든 끈을 결연히 포기하고(마태 10 : 37~, 마가 8 : 34~, 누가 14 : 26~), 그를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마가 1 : 17, 누가 5 : 10)가 되려는 그의 제자들을 불렀다. 그의 말씀들은 극단적으로 날카로우며 제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숨기지 않는다(누가 14 : 25~33). 그는 출신과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부르며 임명하고, 특별한 사람들로 선택한다. 그들 중에는 어부들(안드레아·베드로·야고보·요한)·세리(마태)·열심당원(시몬과 가리옷 유다)·농부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12명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제자들을 임명하고 설교하며 귀신을 내쫓는(마가 3 : 14) 권위를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제자훈련은 랍비들처럼 '훈련'과 함께 끝나는 과도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 중 누구도 충분한 공부 후에 '스승'(마태 23 : 8)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제자들을 부르는 내용들이 일반적으로 후기의 전승에서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로 유형화되었고, 개별적인 장면들이 이야기의 본 줄기에 첨가되었을지라도 갈릴리에서 예수가 사역하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회상은 분명히 본문들에 보존되어 있다.
The Galilean period.
갈릴리 기간
The loose and often differing order of the individual scenes only entitles scholars to speak of a rather ambiguous Galilean period of Jesus' activity: they cannot say with certainty how long it lasted. Because the Synoptic Gospels mention only one trip of Jesus to Judaea and Jerusalem, with the Passion following it, the impression is created that the period lasted no longer than one year. Editorial and theological considerations have, without question, also played a part in this presentation (e.g., Jesus' activity in Galilee and his sufferings in Jerusalem). Scholars offer several good reasons, however, to support the assumption that the Synoptic outline still deserves to be preferred to the widely differing one in John. In the latter, Jesus is in Jerusalem for three celebrations of the Passover (John 2:13-23; 6:4; 11:55), as well as for one Sukkot (Feast of Tabernacles; John 7:2) and one Hanukka (Feast of Dedication; John 10:22). This involves a period of more than two full years. It is doubtful, however, that John is based on an independent tradition, because the indications of time referred to serve the Evangelist as a means of changing the scene of Jesus' ministry between Jerusalem and Galilee. (The centre here is Jerusalem.) 갈릴리 기간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되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유대와 예루살렘에 가서 수난을 당한 오직 1차례의 여행만을 언급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1년을 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활동과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수난으로 나누는 편집적 측면과 신학적인 의도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몇 가지 이유들로 학자들은 공관복음서의 구성이 [요한의 복음서]의 구성보다 더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3번의 유월절 절기를 지냈으며(요한 2 : 13~23, 6 : 4, 11 : 55), 1번의 수코트(초막절, 요한 7 : 2)와 1번의 하누카(봉헌절, 요한 10 : 22)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만 2년을 넘는 기간이다. 그러나 요한이 독립된 전승에 근거하여 기록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의 시간 지적은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서 예수의 사역 장면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여기서 중심지는 예루살렘임).

THE MESSAGE OF JESUS

예수의 말씀

The Kingdom of God.

하느님의 나라

 Jesus announced the approaching Kingdom of God and therefore called people to repentance. The first two Gospels have set this at the beginning in a programmatic saying as a summary of his preaching and have thus characterized the central and dominant theme of his mission as a whole (Mark 1:15; Matt. 4:17). Thus, the Kingdom of God, or Kingdom of Heaven (a Jewish circumlocution for God preferred by Matthew), does not just denote a final chapter of his "system of doctrine" (a concept that cannot be applied to Jesus, in any case). The underlying Jewish word (malkhuta) means God's kingship, and not primarily his domain. This meaning prevails in the New Testament texts. But Kingdom of God or Heaven is also used in a spatial sense ("Enter . . ."). The burning expectation of the Kingdom of God was widely spread in contemporary Judaism in manifold form, based on the Old Testament faith in the God of the fathers, the Creator and Lord of the world, who had chosen Israel to be his people. But with this faith there had united itself the contradictory experience that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world was ungodly, that Satanic powers reigned in it, and that God's kingship would only manifest itself in the future. In wide circles, this expectation had the form of a national, political hope in the Davidic Messiah, though it had expanded this hope in apocalyptic speculation to a universal expectation. In each case it was directed toward the Last Days. Likewise, in Jesus' message, the expression Kingdom of God has a purely eschatological--i.e., future--sense and means an event suddenly breaking into this world from the outside, through which the time of this present world is ended and overcome.  예수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처음 두 복음서들은 이것을 그의 설교의 요약으로 첫부분에 놓았고, 그의 선교의 중심이며 지배적인 주제로 규정했다(마태 4 : 17, 마가 1 : 15).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마태가 선호했던 하느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완곡한 표현)는 그의 '교리 체계'(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의 끝부분이 아니다. 기초가 되는 유대 단어(말쿠타)는 하느님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의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신약성서] 본문들에 퍼져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는 공간적 의미('……에 들어간다')로도 쓰인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기대는 조상들의 하느님,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세상의 창조자, 주님에 대한 [구약성서]의 믿음에 기초하여 다양한 형태로 동시대의 유대교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믿음에 현재 세상의 상태는 사탄의 권세가 통치하여 사악하다는 것과 하느님의 왕권은 단지 미래에 나타난다는 모순된 경험이 연합되었다. 많은 집단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묵시적 사변 속에 우주적 기대로 확장되었지만, 다윗적 메시아, 즉 민족의 정치적 대망의 형태를 지니기도 했다. 각 경우에 그것은 마지막 날과 연관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표현은 순수하게 종말론적, 즉 미래의 의미를 가지며, 현재 세상의 시대가 끝나고 극복되는, 외부로부터 이 세상에로 갑자기 침투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These traditional motifs of the end of the world, the Last Judgment, and the new world of God are not lacking in the sayings of Jesus preserved in the Gospel tradition. Thus, Jesus has not by any means changed the Kingdom of Heaven into a purely religious experience of the individual human soul or given the Jewish eschatological expectation the sense of an evolutionary process immanent in the world or of a goal attainable by human effort. Some of his parables have given rise to such misunderstanding (e.g., the stories of the seed and harvest, the leaven, and the mustard seed). In such cases, the modern thought of an organic process has been wrongly introduced into the texts. People of classical and biblical times, however, heard in them connotations of the surprising and the miraculous. The Kingdom of God, thus, is not yet here. Hence the prayer, "Thy kingdom come!" (Matt. 6:10; Luke 11:2), and the tenses, for example, in Jesus' Beatitudes and predictions of woe (Luke 6:21-26). The poor, the hungry, and the weeping are not yet in heaven. The petitions of the Lord's Prayer presuppose the deeply distressing circumstance that God's name and will are abused, that his Kingdom is not yet come, and that men are threatened by the temptation to fall away.  세상의 종말, 마지막 심판,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주제들은 복음서 전승에 보존된 예수의 말씀들에 꼭 들어 있다. 예수는 결코 하늘나라를 개인적 인간 영혼의 순수한 종교적인 체험으로 바꾸지 않았고, 유대적 종말론적 기대를 세계 내적인 진화적 과정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목표로 보지 않았다. 그의 몇 비유들은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예를 들어 씨앗과 추수, 누룩, 겨자씨의 비유). 그러한 경우에서 유기적 과정이라는 근대적 사고가 본문들에 잘못 도입되었다. 그러나 성서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움과 기적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여기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마태 6 : 10, 누가 11 : 2)라고 기도한다. 예수의 팔복과 재난 예언(누가 6 : 21~26)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와 애통하는 자는 아직 하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느님의 이름과 뜻이 악용되고, 그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고, 사람들은 파멸시키려는 시험에 의해 위협당하는 매우 곤궁한 상황을 전제한다.
In regard to Jesus' preaching, one cannot, therefore, speak of a realized eschatology--i.e., the Last Times are now here (according to the view of C.H. Dodd, a British biblical scholar)--but of an eschatology "in process of realizing itself" (according to the view of Joachim Jeremias, a German biblical scholar); for God's Kingdom is very close. It is on the threshold, already casts its light into the present world, and is seen in Jesus' own ministry through word and deed. In this, his message differs from the eschatology of his time and breaks through all of its conceptions. He neither shared nor encouraged the hope in a national messiah from the family of David, let alone proclaimed himself as such a messiah, nor did he support the efforts of the Zealots to accelerate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He also did not tolerate turning the Kingdom of God into the preserve of the pious adherents of the Law (Pharisees; Qumran sect), and he did not participate in the fantastic attempts of the apocalyptic visionaries of his time to calculate and thus depict in detail the end of the present world and the dawn of the new "aeon," or age (Luke 12:56). Nor did he undertake a direct continuation of the Baptist's preaching. (see also Index: apocalypticism) 예수의 설교에 따르면, 실현된 종말론(즉 "마지막 때가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영국 성서학자 C. H. 도드의 견해)이라기보다 '실현되는 과정 속에 있는' 종말론(독일 성서학자 요아힘 예레미아스의 견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매우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 세계에 빛을 던지고 말씀과 행위를 통한 예수 자신의 사역에서 보여진다. 이 점에서 그의 말씀은 그 시대의 종말론과 다르다. 그는 민족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거나 장려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메시아로 선언한 것은 더욱 아니었으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하려는 열심당의 노력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율법의 경건한 준수(바리새파, 쿰란 분파)로 환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현재 세계의 종말과 새 '에온' 혹은 시대의 여명(누가 12 : 56)을 자세히 묘사하려는 그 시대의 묵시적 공상가들의 환상적 시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계속하지도 않았다.
All the ideas and images in Jesus' preaching converge with united force in the one thought, namely, that God himself as Lord is at hand and already making his appearance, in order to establish his rule. Jesus did not want to introduce a new idea of God and develop a new theory about the end of the world. It would therefore be incorrect to understand his preaching in the Jewish apocalyptic sense of immediate expectancy, coming, as it were, to a boiling point. The proximity of the Kingdom of God actually means that God himself is at hand in a liberating attack upon the world and in a saving approach to those in bondage in the world; he is coming and yet is already present in the midst of the still-existing world. In Jesus' message, God is no longer the prisoner of his own majesty in a sacral sphere into which pious tradition had exiled him. He breaks forth in sovereign power as Father, Helper, and Liberator and is already now at work, as is indicated by Jesus' proclaiming of his nearness and by Jesus' actions in entering the field of battle himself, to erect the signs of God's victory over Satan: "But if it is by the finger of God that I cast out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Luke 11:20). For this reason, Jesus called out: the shift in the aeons is here; now is the hour of which the prophets' promises told (Matt. 11:5; Isa. 35:5). This "here and now" carries all the weight in Jesus' message: "Blessed are the eyes which see what you see! For I tell you that many prophets and kings desired to see what you see, and did not see it, and to hear what you hear, and did not hear it" (Luke 10:23-24). In answer to the Pharisees' question about when the Kingdom of God is coming, Jesus therefore said, "The Kingdom of God does not come in an observable way, nor will they say, 'Look, here it is!' or 'There!' For look,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r reach" (Luke 17:20-21; another translation: "in the midst of you"). 예수의 설교 안에 있는 모든 이념과 이미지는 하느님 자신이 그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매우 가까이 있고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하나의 사상으로 집약된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소개하거나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은 실제로는 하느님 자신이 세상을 해방하고 세상에 노예된 자들을 구원하려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오고 있으나,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에 이미 현존한다. 예수의 말씀에서 하느님은 더이상 신성한 영역 안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위엄의 포로가 아니다.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사탄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의 징조를 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아가는 예수의 행동에서 계시된 것처럼, 하느님은 아버지, 돕는 자, 해방자이며 지금 벌써 일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누가 11 : 20).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시대의 변화가 여기 있으며, 지금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시간이라고 외쳤다(이사 35 : 5, 마태 11 : 5). '여기 그리고 지금'은 예수의 말씀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The dominant feature of Jesus' preaching is the Heavenly Father's turning in mercy and love to the suffering, guilty, outcast, and to those who, according to the prejudices of the "pious," have no right to receive a share in the final salvation. Numerous parables described how God behaves toward them and shows himself as Lord and King (e.g., Luke 15; Matt. 18:23ff.; 20:1ff.). They all speak of God's action in images drawn from daily life, so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They belong to the uncontestedly oldest stock of the Jesus tradition. But Jesus did not only teach this, he practiced and illustrated it himself by his own behaviour and thereby offended the pious, who claimed the Kingdom of Heaven for themselves. 예수 설교의 중심적인 특성은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죄짓고 버려진 자들에게, 그리고 '경건한 자'의 선입견에 따르면 마지막 구원에서 가업을 받을 권리가 없는 자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비유가 어떻게 하느님이 그들에게 행하는지에 대해 썼고, 그를 주님과 왕으로 보여준다(마태 18 : 23~, 20 : 1~, 누가 15). 비유들은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이미지들로 하느님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명백히 예수 전승의 가장 오래된 줄기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이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했고, 그럼으로써 하늘나라는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경건한 자들을 성나게 했다.

In this message of the approaching Kingdom of God, Jesus' call to repentance is grounded. He called on all not to miss the hour of salvation (Luke 14:16ff.; 13:6ff.), to sacrifice everything for the Kingdom of God (Matt. 13:44ff.), and to receive it like a child (Mark 10:15), without the presumptuous and desperate conceit that one might win it and realize it by one's own works (Mark 4:26ff.; Matt. 13:24ff.). Jesus' summons to be wise, to be on the watch (Luke 16:1ff.; 12:35ff.; Mark 13:33ff.; Matt. 24:45ff.), and to surrender the fiction of one's own righteousness (Luke 18:10ff.) belongs here, too. In Jesus' preaching, repentance does not mean a prerequisite or precondition or even a penitent contemplation of oneself but, rather, a consequence of the proximity of the Kingdom of God (Matt. 4:17) and an opening of oneself for his future, a movement not backward, but forward. Jesus in this way binds future and present insolubly together. The apocalyptic's question about how much time still has to elapse before the new world of God is here is thus rendered meaningless. He who asks this only proves that he understands neither the future nor the present properly; namely, God's future as the salvation that is already dawning and one's own present in the light of the coming Kingdom of God. 

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 안에 예수가 회개하라고 권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구원의 시간을 놓치지 말도록(누가 14 : 16~, 13 : 6~),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마태 13 : 44~), 어린아이처럼 영접하도록(마가 10 : 15), 자신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거나 자신의 공로로 실현할 수 있다는 자만을 가지지 않도록(마태 13 : 24~, 마가 4 : 26~) 모두에게 요청한다. 예수는 또한 지혜롭게 깨어 있고(마태 24 : 45~, 마가 13 : 33~, 누가 16 : 1~, 12 : 35~) '자기의' 허구를 포기하라고 요청한다. 예수의 설교에서 회개는 필수적인 것, 선결조건,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의 명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움의 결과(마태 4 : 17)이고 자신을 그의 미래에로 개방하는 것, 뒤로의 운동이 아니라 앞으로의 운동이다. 이렇게 예수는 미래와 현재를 떨어질 수 없게 함께 묶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 이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하는지 묻는 묵시적인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을 묻는 사람은 그가 미래도 현재(즉 이미 밝아오는 구원으로서의 하느님의 미래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빛 안에 있는 자신의 현재)도 적절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Jesus therefore rejected the demand that he produce "signs" as proof of the dawning of the time of salvation (Matt. 12:38ff.; Mark 8:11). He himself is to be viewed as the "sign," just as once Jonah, the prophet of repentance, was the only sign given to the people in Nineveh (Luke 11:29ff.). The sign is not identical with the thing signified, but it is a valid indication of it.  그러므로 예수는 구원의 때가 밝아오는 증거로서 '표적들'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마태 12 : 38~, 마가 8 : 11). 회개의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적이었듯(누가 11 : 29~) 예수 자신이 '표적'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표적은 의미 있는 일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정당한 지시이다.
According to the Synoptics, Jesus never made his "messiahship" the subject of his teaching or used it as legitimation for his message. It is significant that the "I am" sayings of John, which bear the stamp of Christology throughout, are not found in the Synoptic tradition. That does not in any way affect the fact that Jesus in a decisive way included his own person as eschatological prophet and charismatic miracle worker in the event of the Kingdom of God: "And blessed is he who takes no offense at me" (Matt. 11:6).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메시아성'을 가르침의 주제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그의 말씀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론의 특징을 가진 요한의 '나는……이다'라는 어투가 공관복음 전승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예수가 결정적인 방식으로 종말론적 예언자와 카리스마적인 기적행위자로서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결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The will of God.

하느님의 뜻

In Jesus' teaching, the nearness of God is itself viewed as a moving force. It creates, as it were, a field of force and challenges the whole person to obey the will of God unconditionally ("Let your loins be girded and your lamps burning"; Luke 12:35). As little as Jesus tolerated attempts at calculating the time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so much the more did he demand that men reckon with its coming. The relation between eschatology and ethics in Jesus' teaching, however, needs to be further clarified. His commandments nowhere have the character of prophetic sayings, and their content is not given an eschatological basis even where Jesus linked them with the promise of heavenly reward and, correspondingly, with the threat of damnation in the Last Judgment (e.g., Matt. 24:24ff.; Luke 19:11ff.). God's will is valid in itself, always and everywhere. For this reason, it is incorrect to characterize Jesus' demands as "interim ethics"; i.e., as exceptional emergency laws in the situation of the world that lies in the blaze of the cosmic catastrophes accompanying the shift of the aeons and the speedy dawn of the Kingdom of God (as did Albert Schweitzer, a great Alsatian theologian, medical missionary, and Nobel laureate). Jesus did not draw arguments for his ethical demands from the perishing order but, rather, from the existing world, the Old Testament commandments, the creation, and experiences known to everyone. Thus, he did not aim at forming a "holy remnant," which would escape the rejection awaiting others in the Last Judgment, on the basis of some kind of select monastic rule.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은 그 자체가 활동하는 힘으로 보인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게 하는 힘과 도전의 장이 된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지 그 시간을 계산하는 노력을 예수는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도록 요구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종말론과 윤리학의 관련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그의 계명들은 어디에서도 예언자적 말씀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수가 그것들을 하늘의 상급이나 마지막 심판 때의 저주와 연결시킬 때조차도 종말론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마태 24 : 24~, 누가 19 : 11~). 하느님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요구들을 '중간 윤리', 즉 하느님 나라의 신속한 도래와 시대의 변화를 동반하는 우주적 파국 가운데 놓여 있는 세계 상황에서 예외적인 율법들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는 그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논증을 소멸하는 질서로부터 끌어내지 않고, 오히려 현존하는 세계, [구약성서]의 계명들, 창조,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경험들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The certainty of God's nearness is, nevertheless, the open or concealed point of reference for Jesus' exposition of the will of God and explains his attitude to the Old Testament Law. Corresponding to the character of the Old Testament legal tradition, he refers to the will of God in single sayings and in comments in relation to individual commandments, and, it should be noted, he did not develop these into coherent "moral teaching." Rather, he took up quite different kinds of commandments as concrete examples, above all from the Decalogue and related texts, concerning one's behaviour toward one's fellow human beings (on murder and anger, adultery and divorce, oaths, retaliation, love for others; see Matt. 5:21ff.) and also ceremonial commandments (concerning the Sabbath, prayer, fasting, and defilement) and other cultic duties. Jesus always went to the root of these commandments, and he did not content himself with the mere letter of the Law but disclosed within the Law--sometimes even against the letter of the Law (Mark 10:1ff.)--the genuine will of God. Though Jesus respected the Law, it was no longer for him the only source of the knowledge of God's will and no longer the absolute intermediate authority that exclusively mediates people's relation to God. From this basis are to be understood both Jesus' exposition of the Law and also his criticism of all formalistic casuistry, which is for him only "human tradit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는 공개된 혹은 숨겨진 근거가 되며,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해준다. [구약성서]의 율법 전통의 특성에 상응하여 그는 단일한 말씀과 개인적 명령에 연관된 해석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들을 체계적인 '도덕적 가르침'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우 다른 종류의 계명들을 구체적인 예로, 즉 동료에 대한 행동(살인과 분노, 간음과 이혼, 맹세들, 보복,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의식적 계명(안식일·기도·금식·모독에 관하여), 다른 예식 의무를 설명했다. 예수는 항상 이 계명들의 근원으로 나아갔고,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율법 안에서 밝혔다. 예수가 율법을 존중했지만,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근원이 아니며,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중재하는 절대적인 권위도 아니었다.
Jesus thus brings about a confrontation between the reality of God, which is no longer disguised by holy letter and tradition, and the similarly undisguised reality of man. People also can no longer delude themselves into believing that their pious works would represent them before God and thus keep on piling them up, as it were, like the Pharisee (Luke 18:11ff.). What God wants from humanity is not something but humanity itself, unconditionally and undividedly. The classic passages for these thoughts are the antitheses of the Sermon on the Mount (Matt. 5:21-48). They sharpen God's demands to the utmost extreme and leave no room for merely legalistic behaviour. Their leitmotiv is: "Not only, but even. . . ." Even anger, the lustful look, the "legal" divorce, retaliation that keeps within the limits prescribed, and love that excludes the enemy are against God's will. 그래서 예수는 더이상 거룩한 문자와 전통에 위장되지 않는 하느님의 실재와 또한 유사하게 위장되지 않은 사람의 실재 사이에 대면하게 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경건한 일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과 바리새파와 같이(누가 18 : 11~) 그것들을 계속 쌓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을 더이상 속일 수 없다.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며 분열되지 않은 인간 자체이다. 이러한 사상에 대한 고전적 구절은 산상수훈(마태 5 : 21~48)과는 정반대이다. 하느님의 요구는 단순한 법률적 행동에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의 주요사상은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이다. 제정된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분노, 음탕한 눈, 법적 이혼, 보복, 원수를 배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
These extreme demands are meant not so much to be paradoxically overdemanding as, rather, liberating. Firstly, they are formulated in a way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They include numerous references to the natural, unperverted practices of people in their daily lives. Secondly, the demands do not describe an unattainable distant goal, which all human action must of necessity fail to meet. Rather, Jesus pointed again and again to what the heavenly Father has done, does, and will do with his children and to God's possibilities, which are unlimited, whereas a person might despair of his or her own limited possibilities and impotence (Mark 10:27). Jesus' sayings about faith (Mark 9:23ff.), prayer (Luke 11:1ff.; Matt. 6:1ff.), or worry (Matt. 6:25ff.) are examples of this. Wherever Jesus calls on people to decide for themselves for God, he bases the argument on the fact that God has already decided for humanity. The unlimited readiness to forgive that he calls for also has its motivation in the limitless mercy of God, which he demonstrates toward the guilty in unfathomable measure (Matt. 18:23ff.). Jesus draws his hearers into this relation to God and, therefore, does not engage in abstract reflections about whether his demands are capable of fulfillment. In this way, what a person loses is the characteristic of being able to attain meritorious achievements (Matt. 20:1ff.). On the other hand, Jesus certainly did not give up the thought of "reward." The reward, however, is not a material prize, although images of this kind are not lacking, but the confirmation and perfection of the relation to God (Matt. 25:14ff.). The idea that human beings could claim and charge payment from God is for Jesus completely excluded (Luke 17:10). 이러한 극단적 요구들은 역설적으로 과도한 요구들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해방을 의미한다. 첫째로, 이러한 요구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된다.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백성들의 자연적이고 왜곡되지 않은 실천이 포함된다. 둘째로, 그 요구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행했고 행하고 있고 행할 것과, 무제한적인 하느님의 가능성에 대해 거듭 지적한다. 믿음(마가 9 : 23~)·기도(마태 6 : 1~, 누가 11 : 1~)·염려(마태 6 : 25~)에 대한 예수의 말씀들은 이에 대한 예들이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결단하기를 요청하는 곳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벌써 결정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가 요구하는 무제한적인 용서의 동기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에게 보여준(마태 18 : 23~)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있다. 예수는 그의 요구들이 수행 가능한지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한편 예수는 '상급'에 대한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급이 물질적인 상은 아니고(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완성이다(마태 25 : 14~).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지불을 주장하고 청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예수에게는 전혀 없다(누가 17 : 10).
The nearness of God, the real God, also brings humanity, no longer graded and classified in traditional categories, into urgent and imperious proximity. How much Jesus was concerned with human beings is shown especially by his commandment of love, which he not only taught but also practiced to the point of offensiveness. In it is concentrated the "better righteousness" that he demands of his disciples (Matt. 5:20). Jesus has taken over the Old Testament dual commandment of love of God and one's neighbour (Deut. 6:5; Lev. 19:18), which is also in Judaism a summary of the whole Law. But it is characteristic of Jesus' preaching (1) that he consistently subordinated all other laws--e.g., the Sabbath commandment--to this highest critical standard (e.g., Mark 2:27; 3:4), and (2) that he extended and heightened love of one's neighbour to love of one's enemies (Luke 6:27ff.), and (3) that his commandment does not have the abstract ideal of a general philanthropy at its root. Rather, he directed his hearers into the situations--always eventful and concrete--where they encounter their enemy (Matt. 5:38ff.) and their fellows in need (Luke 10:25ff.). Behaviour toward one's fellow is so important for Jesus that it is all that is spoken of in many of his utterances, without any mention of the first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concerning behaviour toward God (e.g., Matt. 5:25ff.; 7:12; 19:16ff.). 가까이 있는 하느님은 더이상 인간을 전통적 범주로 등급을 매기거나 분류하지 않고, 긴급하고 피할 수 없는 지경으로 이끈다. 예수가 얼마나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가는 그의 사랑의 계명에서 보여지는데, 그는 그것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모욕받으면서도 실천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더 좋은 의'는 사랑이다(마태 5 : 20). 예수는 [구약성서]의 2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받아들였는데(레위 19 : 18, 신명 5),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모든 율법의 요약이다. 그러나 예수의 설교의 특징은 (1) 일관되게 모든 다른 율법(안식일 계명)을 가장 중요한 기준(마가 2 : 27, 3 : 4)에 종속시켰다는 것, (2) 이웃사랑을 원수사랑에로 확장하여 고양시켰다는 것(누가 6 : 27~), (3) 계명을 그 뿌리에서 일반적인 인류애에 대해 추상적인 관념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는 그의 청중들을--사건을 통해서 구체적으로--그들의 원수(마태 5:38-)와 어려움에 처한(누가 10:25-) 그들의 동료들을 맞이 하는 상황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처신은 예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여서 그가 행한 많은 말들의 모든 것을 구성하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관한 데카로그(십계명)의 제일 계명은 언급 조차 하지 않았다.(마태 5:25-; 7:12; 19:16-)
The distinction that modern moral philosophy makes between individual and social ethics has, in respect to Jesus' teaching, only limited application. To be sure, Jesus did not draw up a program for a new order for the world and the nations, he did not demand a more just distribution of property, did not fight against the differences existing between masters, slaves, and hired workers, and did not give any directives for a better administration of justice. The world he had before his eyes was the world as it was, within the horizon of Palestinian Jewish rural conditions, and not the world as it ought to be. His sayings, parables, and illustrations show how keenly he assessed everyday life and how clearly he described it in his graphic, vigorous way--not glorifying this world as an eternally valid, divinely willed order, and also not getting morally indignant about it. Rather, he calls on people to behave in this given world in conformity to the original will of God and his dawning Kingdom; e.g., to renounce the reign of mammon (Matt. 6:24; Luke 16:9ff.). Jesus did not, however, require a complete surrender of property from everyone. His followers were not to avail themselves of the legally regulated facilities for asserting one's own rights and were not to conform to the ways of customary behaviour in the world. The assertion that the world cannot be governed with the Sermon on the Mount is thus not to be denied. Jesus' sayings about retaliation and his commandment of love are not juristically practicable as they stand, because they can only serve as a guide for the one who has been wronged by someone else or who is required to divide his possessions with another person. Legislators and judges have to decide exclusively about the rights of others and must restrain evil for the sake of the general social order. But the truism about the impracticability of the Sermon on the Mount conceals the fact that Jesus' teaching contains strong impulses toward social criticism.  근대 도덕철학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구분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단지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확실히 예수는 세계와 민족의 새질서를 계획하지 않았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주인과 노예,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항해 싸우지도 않았고, 정의의 실행을 위해 어떤 지침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팔레스타인 유대 시골 상황, 즉 마땅히 되어야 할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었다. 그의 말씀·비유·교훈은 얼마나 그가 일상생활을 날카롭게 평가했으며 , 얼마나 명백하게 그것을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어진 세계에서 하느님 본래의 뜻과 그의 밝아오는 나라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마태 6 : 24, 누가 16 : 9~).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적으로 규정된 시설을 사용해서도 안 되었고, 세상의 관습적 행동양식을 따라서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산상수훈에 의해 다스려질 수는 없다는 주장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보복에 대한 예수의 말씀과 사랑의 계명은 있는 그대로 법적으로 실행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그의 재산을 나누어야 되는 사람을 안내하는 데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만 결정해야 하며 일반적 사회질서를 위해 악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실천 불가능성은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비평에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Jesus unmasks as hollow conventions many ostensibly valid standards, explaining the Law according to the norm of the commandment of love and applying it to concrete situations. For this reason he also resists egocentricity, not only of individuals but of entire religiously and socially privileged groups, and joins with discriminated-against people (e.g., heathens, Samaritans, tax collectors, and harlots). Thus, Jesus calls on people to live a life that corresponds to the proximity of God's Kingdom, although the validity and urgency of his commandments require no apocalyptic basis. The act of their proclamation, however, stands nonetheless close to Jesus' own mission (Luke 11:32ff.). Whether, and in what way, he expressed the fact of his mission by the use of Christological titles is not thereby decided. Jesus knew that he had been sent to the "lost sheep of the house of Israel" (Matt. 15:24; 9:36). His ministry, seen as a whole, was confined to the sphere of his own people. Only a few significant words and scenes point forward to the inclusion of non-Jews, in a new, eschatological people of God (Matt. 8:11ff.). Jesus, however, did not organize a mission to the heathen (Matt. 10:5ff.) nor a worldwide "church." The only saying of this kind, spoken to Peter (Matt. 16:17ff.), has been placed in the mouth of the earthly Jesus by the later church and clearly reflects its situation, doctrine, and discipline. But Jesus certainly did call into existence a movement in Galilee and allowed at least the narrower circle of his disciples, if not all of his followers, to share in his wanderings and ministry. Later tradition first identified the latter group alone with the Apostles (authorized emissaries), the circle of whom was, however, not originally restricted to that group (cf. I Cor. 15:5ff.). The number 12 symbolizes the 12 tribes of Israel. If Jesus appointed these disciples himself, he thereby demonstrated his eschatological claim on the whole of Israel. According to the saying in Matt. 19:28 and Luke 22:30, which was probably not formulated until later, he conferred on them the office of ruling and judging the perfected Israel of the new aeon. 

예수는 사랑의 계명에 따라 율법을 설명하고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면서 표면적으로 정당한 기준을 속빈 관습이라고 폭로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특권집단의 자기중심성에 대항하고, 차별대우를 받는 자(이방인·사마리아인·세리·창녀)와 함께한다. 그의 계명의 정당성과 긴급성이 묵시적 근거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수는 백성들에게 근접한 하느님 나라에 상응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선포는 예수 자신의 선교와 밀접하다(누가 11 : 32~). 그가 그의 선교 사실을 그리스도론적 칭호들로써 표현했는지,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그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마태 9 : 36, 15 : 24). 전체적으로 그의 사역은 자신의 백성에게 한정되었다. 몇몇의 중요한 단어와 장면만이 하느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백성 안에 비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한다(마태 8 : 11~). 그러나 예수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조직하지 않았고(마태 10 : 5~), 보편적인 '교회'도 조직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고백한(마태 16 : 17~) 것은 후기 교회의 산물이며, 그 상황과 교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갈릴리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그의 추종자들 모두는 아니지만 그의 방랑과 사역을 함께할 제자집단을 만들었다. 후기 전승은 소수의 제자집단만을 사도들과 동일시했다(Ⅰ 고린 15 : 5~).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한다. 만약 예수가 이 제자들을 스스로 임명했다면, 그는 그것으로 전(全)이스라엘에 그의 종말론적 주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태의 복음서](19 : 28)·[누가의 복음서](22 : 30)에 의하면(그것은 후기까지 형성되지는 않았던 것 같음), 그는 그들에게 새 시대의 완전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재판하는 직임을 수여했다.

THE SUFFERINGS AND DEATH OF JESUS IN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

Jesus' decision to go to Jerusalem is the turning point in his story. The events it set in motion soon came to have decisive significance for the faith of his followers. It is not coincidental that the Gospels narrate this period of his life in disproportionate breadth. Despite the many points of agreement among the Gospels, there also are considerable discrepancies within the tradition of the Passion. Thus, one cannot expect the tradition of the Passion to provide historically accurate reports, for it has been formed from the viewpoint of the church and its faith in Christ. The most important theological motifs in the narratives include the intention of presenting Jesus' sufferings and death as the fulfillment of God's will, the decision, in conformity with the words of the Old Testament Prophets and Psalms, to proclaim him as Messiah and Son of God, despite his brutal end. Nevertheless, important historical facts may be inferred from the texts.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예수의 결정은 그의 이야기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이 사건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의 많은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수난 전승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 따라서 수난 전승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관점과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천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려는 것이며, [구약성서] 예언자들과 [시편]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본문에서 끌어낼 수 있다.
Jesus probably went to Jerusalem with his disciples for the Passover in order to call the people of Israel gathered there to a final decision in view of the dawning Kingdom of God. He must have been aware of the heavy conflicts with the Jewish rulers that lay ahead of him. The story of the cleansing of the Temple, in particular, shows that Jesus did not avoid these conflicts. The later tradition, stylizing the story, gives as Jesus' sole motive for going to Jerusalem his desire to die there and to rise again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God (Mark 8:31; 9:31; 10:32ff.). The best clue for a reconstruction of the outward course of Jesus' Passion is given by his Crucifixion. It proves that he was condemned and executed under Roman law as a political rebel. All reports agree that he died on Friday (Mark 15:42; Matt. 27:62; Luke 23:54; John 19:31). They differ, however, in that, according to the Synoptics, this was the 15th of Nisan (March/April); i.e., the first day of the Passover. But, according to John, it was the previous day; i.e., the one on which the Passover lambs were slaughtered and on which the festival was begun in the evening (in accordance with the Jewish division of days) with a common meal. Thus, according to John, Jesus' last meal with the disciples was not itself a Passover meal but took place earlier. Each of these datings may be theologically motivated, whether it be that the Eucharist is to be represented as the Passover meal (Synoptics) or whether Jesus himself is to be shown as the true Passover lamb, who died at the hour when the lambs were slaughtered (John). Historically, the Johannine dating is to be preferred, and the 14th Nisan (April 7) is to be regarded as the day of Jesus' death. The question of the occasion for Jesus' execution and the role that the Jews played is thereby more difficult and more important. (see also Index: Last Supper) 예수는 아마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밝아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마지막 결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기 위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 그는 자신과 유대 통치자들과의 깊은 갈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성전정화 이야기는 예수가 이 갈등을 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유형화한 후기 전승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의 유일한 동기로 거기서 죽어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시 부활하려는 의도를 든다(마가 8 : 31, 9 : 31, 10 : 32~). 예수 수난의 외면적 과정을 구성하는 가장 좋은 실마리는 그의 십자가 처형이다. 그것은 그가 형을 선고받았고 정치적 반란자로서 로마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모든 기록은 그가 금요일에 죽었다는 데 일치한다(마태 27 : 62, 마가 15 : 42, 누가 23 : 54, 요한 19 : 31).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날은 니산 월(3/4월) 15일(유월절 첫째날)이었다. 그러나 요한에 따르면, 그것은 전날(유월절 양이 도살되고 축제가 시작되는 저녁)이었으며, 예수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는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고 그 이전의 것이었다. 이러한 날짜매김에는 각각 신학적 의도가 들어 있다. 즉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로 표현되어야 한다든지(공관복음서), 예수 자신은 양들이 도살되는 시간에 죽은 참 유월절 양으로 보여야 한다는(요한) 것 등이다. 역사적으로 요한의 날짜매김이 신빙성이 있으며, 니산 월 14일(4. 7)이 예수가 죽은 날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수의 처형의 시기와 그에 대한 유대인들이 가담한 역할에 대한 의문은 더욱 어려우며 중요하다.(참고: 주의 만찬)
The way the Gospels present the facts of the case, Jesus was actually condemned to death by the supreme Jewish tribunal (Mark 14:55ff.). Pilate, on the other hand, was convinced of Jesus' innocence and made vain attempts to release him but finally yielded to the Jews' pressure against his better judgment (Mark 15:22ff.). The historical reliability of this account has rightly been questioned. First, the Synoptic reports differ among themselves. According to Mark and Matthew, the Jewish supreme court had already gathered in the home of the High Priest after Jesus' arrest in the night of Holy Thursday to Friday and condemned him to death as a blasphemer at that point (Mark 14:64). Thereafter, they resolved to hand Jesus over to Pilate in a new session in the early morning (Mark 15:1). Luke knows of only one session and has the interrogation take place in the morning (Luke 22:66), but he says nothing about Jesus' condemnation (Luke 22:71). John deviates even more; here, only the high priests Annas and Caiaphas are involved in the interrogation of Jesus (John 18:13ff.). Secondly, with regard to all the Gospel accounts, the question arises, what earwitness can be supposed later to have given the disciples an exact report? Thirdly, the jurisdictional competency of the Jewish Sanhedrin is disputed. In the opinion of some scholars, the Jewish authorities were permitted to pronounce sentence of death and to carry it out by stoning in the case of serious religious offenses (blasphemy). In the opinion of others, though, this required the confirmation of the Roman procurator. Also, trials of this kind were not to be conducted during the period of the festival. 복음서들이 사건의 사실들을 제시하는 방식에 따르면, 예수는 실제로 최고 유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마가 14 : 55~). 한편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고 그를 석방하려는 헛된 노력들을 했으나 결국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마가 15 : 22~). 이 내용에 대한 역사적인 신빙성은 의심스럽다. 첫째, 마가와 마태에 따르면 유대 최고법정은 예수가 성 목요일 밤에서 금요일 사이에 체포된 후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렸으며 그에게 신성모독자로 사형선고를 내렸다(마가 14 : 64). 그후 그들은 또 한 차례 예수를 신문하여 빌라도에게 이른 아침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마가 15 : 1). 누가는 오직 한 차례의 신문만 기록하면서 아침에 했다고 전한다(누가 22 : 66). 그러나 그는 예수의 형선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누가 22 : 71).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가 예수의 신문에 관여한다(요한 18 : 13~). 둘째, 모든 복음서 내용에 대해서 어떤 증언이 제자들에게 정확한 보도를 주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셋째, 유대 산헤드린의 사법권이 논쟁이 된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유대 정부는 사형을 선언해야 하는 경우와 심각한 종교적 모독(신성모독)의 경우에 돌로 치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재판은 축제기간중에는 행해지지 않았다.
The strongest argument against the Synoptic presentation is, however, that it is styled throughout in a Christian, and not in a Jewish, way; i.e., on the basis of scriptural proof and the Christian confession to the messiahship and divine Sonship of Jesus. The High Priest's question, "Are you the Christ, the Son of the Blessed?" (Mark 14:61), is unthinkable from the viewpoint of Jewish premises, because Son of God was not a Jewish title for the Messiah. Thus, the account reflects the controversies of the later church with the Judaism of its day. 그러나 공관복음의 표현에 대한 가장 강한 반론은 그것이 유대적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방식(즉 성서적 증거와 예수의 메시아성 및 하느님의 아들됨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신앙고백의 근거)에서 유형화된다는 것이다. "네가 축복받은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마가 14 : 61)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은 유대적 관점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칭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유대주의를 지닌 후기 교회에 대한 논쟁을 반영한다. 
There also is in the Gospels a tendency to exonerate Pilate at the Jews' expense. His behaviour, however, does not match the picture that nonbiblical sources have handed down about him. But everything speaks for Jesus' having been arrested as a troublemaker, informally interrogated, and handed over to Pilate as the leader of a political revolt by the pro-Roman priestly and Sadducean members of the Sanhedrin, who were dominant in Jerusalem society in those days. The cleansing of the Temple and a prophetic, apocalyptic saying of Jesus (John 2:19; cf. Mark 14:58; Acts 6:14)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may thereby have played a role. It can hardly be assumed that each and all of the Pharisees, who were without political influence at that time, were involved in the plot. Nor are they mentioned as a separate group in the Passion narratives alongside the priests, elders, and scribes. 또한 복음서들은 유대인들을 희생하여 빌라도를 면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비성서적 자료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자료는 예수가 반란자로 체포되었고, 비공식적으로 신문당했으며, 그 당시에 예루살렘 사회에서 유력했던 산헤드린의 친로마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에 의해 정치적 반란의 지도자로 빌라도에게 넘겨졌다고 말한다. 성전정화와 성전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언적 묵시적 말씀(마가 14 : 58, 요한 2 : 19, 사도 6 : 14 참조)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던 바리새인들이 그 음모에 연관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수난 설화에서 제사장·장로·율법학자들과 같이 분리된 집단으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The other scenes in the Passion story do not need to be listed here separately. They relate more to the theological meaning of Jesus' Passion and are, to a large measure, formed in an edifying cultic manner, even though they refer to events that are certainly historical; e.g., Judas' betrayal, Jesus' last meal with his disciples, and Peter's denial of Jesus. The traces of an eyewitness account are perhaps still recognizable at certain points (Mark 14:52; 15:21).

The accounts differ in their presentation of Jesus' death, especially in their rendering of his last words. It is only in Mark and Matthew that Jesus dies crying out the prayer from Psalm 22: "My God, my God, why hast thou forsaken me?" The distinction between the repentant and the defiant thief is only found in Luke. Jesus' last words are given differently in Luke ("Father, into thy hands I commit my spirit!") and John ("It is finished"). Each of these accounts, as also the testimony of the Roman centurion ("Truly this man was the Son of God!"; Mark 15:39), gives expression to the significance of Jesus and his story.

 

수난 이야기에서 다른 장면들을 여기서 분리하여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예수 수난의 신학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상당히 교화적이고 예배의식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예수 죽음에 대한 성서의 표현들은(특히 그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데서) 서로 다르다. 예수가 [시편] 22편의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외치고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오직 [마태의 복음서]· [마가의 복음서]뿐이다. 회개하는 도둑과 반항하는 도둑 사이의 구별은 오직 [누가의 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이 [누가의 복음서]에서는 "아버지,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로,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다 이루었다"로 다르게 나타난다. 각각의 이 내용들은 로마 백부장의 증언, 즉 "진정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마가 15 : 39)처럼 예수와 그의 이야기에 대한 중요한 표현이다.

 

THE STORY OF JESUS AND FAITH IN JESUS

예수 이야기와 예수에 대한 신앙

Did Jesus' violent death render his mission and story meaningless? In other words, did he enter definitively into the past as a failure and thus in this sense become the "historical" Jesus? For Pilate and the Romans, as for Jesus' Jewish opponents, there was no longer any problem. The decision had been taken. But Jesus' disciples were faced with this pressing question all the more. Their hopes were bitterly disappointed (Luke 24:13ff.). According to the unanimous witness of the New Testament texts, they did not find the answer themselves but were given it soon after Jesus' death through the Easter (Resurrection) appearances of Jesus (I Cor. 15:3ff.; etc.) and the experience of his Presence in the Spirit. The faith of early Christianity, with all of its practical and theological manifestations, grew out of this. This faith was not the preserve of a few enthusiasts or the personal opinion of individual Apostles. Wherever there were early Christian witnesses and communities, they were all united in believing and acknowledging the risen Lord (I Cor. 15:11). 예수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선교와 이야기를 무의미하게 했는가? 다시 말해 그는 실패하여 과거에 묻혔는가?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가 되었는가? 예수의 유대인 적대자들에게와 같이 빌라도와 로마인들에게는 더이상 아무 문제도 없었고 결정은 내려졌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고, 그들의 희망은 참담하게 어긋났다(누가 24 : 13~). [신약성서] 본문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대답은 예수가 죽은 이후 부활한 예수의 현현(Ⅰ 고린 15 : 3~)과 성령 안의 그에 대한 현존체험에서 주어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에 대한 모든 실천적·신학적 표명은 부활 체험으로부터 자랐다.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증언과 공동체가 있던 어디에서나 그들은 부활한 주님을 믿고 인식하는 데 연합했다(Ⅰ 고린 15 : 11).
The forms and ideas in which this faith found expression were various. According to the oldest view, Jesus' Resurrection meant his exaltation to divine lordship and was not necessarily connected with the tradition of the finding of the empty tomb, as the Gospels variously relate it. The theory of the resurrected one's having walked on earth for 40 days and only subsequently ascending into heaven is found only in Acts (1:3). Thus, there exists an undeniable tension between the unequivocal nature of the Easter message, on the one hand, and the equivocal nature of the Easter accounts and the historical problems connected with them, on the other. But the phenomenon of the whole Gospel tradition, rightly understood, is an expression of the faith in the living Christ without which neither a single word or deed of Jesus nor his Passion would have been handed down at all. The New Testament tradition does not aim at preserving the memory of Jesus as a figure of the past and telling only who Jesus was, but it wants to proclaim who Jesus is 이 믿음이 표현하는 형식과 이념은 다양하다. 가장 오래된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그가 신적 주권을 갖게 됨을 의미했고, 복음서에서 다양하게 연관시키듯이 빈 무덤 발견 전승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부활한 사람이 40일간 땅에서 걸어다녔고 그후 하늘에 올랐다는 이론은 오직 [사도행전]에서만 발견된다(1 : 3). 그래서 부활의 메시지의 분명한 성격과 부활 내용의 애매한 성격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문제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복음서 전승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다. 이것 없이는 예수의 단 하나의 말씀과 행동, 그의 수난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성서] 전승은 과거의 모습으로서의 예수의 기억을 보존하거나 단지 예수가 누구였는가를 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현재 누구인가를 선포하고자 한다.
It may seem surprising that the question of Jesus' awareness of being the Messiah has been scarcely discussed in this article, let alone been given a precise answer. Usually, decisive significance is assigned to this question. Many scholars believe that access to the historical Jesus is only to be gained through the fact that Jesus had such an awareness in association with particular titles, such as Son of God, Son of man, and Messiah. In just the same way, they believe that the rise of the early Christian faith can only be understood by the same means. In light of the fact that the Gospels portray Jesus as the Christ (Greek term for the Messiah) and that numerous other titles of a similar kind are also found in them, the importance of this question is not to be underestimated. But it must nevertheless be noted that the Gospels are interested in the fact that Jesus was and is the Messiah, but not in his "consciousness" and inner development in a modern sense. The stories of Jesus' Baptism, temptation, and Transfiguration, for example, are not reports of experiences. But the question of whether Jesus applied one or several of those titles to himself still needs to be examined carefully, for each of them implies thoughts and concepts that must be of considerable relevance for his preaching and ministry. On this question, the opinions of scholars diverge widely, but it is uncontested that Jesus related his mission and activity in a unique way to the dawn of the Kingdom of God. It is another--and doubtful--question, however, that he expressed this understanding of himself through any traditional title.  많은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이 예수의 메시아 의식, 즉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메시아' 같은 특수한 칭호와 연결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믿음도 오직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그리스어)로 묘사하며, 유사한 종류의 수많은 다른 칭호가 발견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질문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은 예수가 메시아였고 '지금도 메시아'라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그의 '의식'과 내적 발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예수의 세례·시험·형상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체험된 기록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에게 하나 또는 몇 개의 그러한 칭호들을 적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칭호들이 그의 설교와 사역에 상당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예수가 그의 선교와 활동을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의 여명에 연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자기 이해를 전통적 칭호를 통해 표현했다는 것은 다른(그리고 의심스러운) 문제이다.
Three observations are important for the discussion of these problems. First, in the incontestably authentic texts in the Synoptics, Jesus never makes his own status a special topic of his teaching or the recognition of his rank a condition of salvation. Second, it is not only presumed but--by means of a comparison of the parallel texts and their modification from one Gospel to the next--often capable of proof and, in other cases, requiring to be assumed that the faith of the later church has had a major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the Christological texts. A third observation is also not without its importance. Wherever in such texts Jesus talks about the Messiah and the Son of David, the Son of man, the Son of God, and the Lord, there is never any indication that he is using these titles in a completely new sense. The meaning they have, however, is no longer congruent with the ideas that Jesus' contemporary hearers must have connected with the titles, to the extent that they were not completely unknown to them. Because the historical Jesus indubitably wanted to be understood, the critical question necessarily arises about texts of this kind reflecting the views of the later church and its environment.  이 문제의 토론을 위해서는 3가지 관찰이 중요하다. 첫째, 공관복음의 반론이 없는 진정한 본문들에서, 예수는 결코 자신의 신분을 그의 가르침의 특수한 주제로 삼거나 그의 지위인식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둘째, 이것은 유사한 원문들과의 비교 및 복음서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수정에 의해서, 가정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들에서는 종종 증명이 가능함으로써, 후기 교회의 신앙이 그리스도론적 본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의 관측 또한 중요성이 없지 않다. 그러한 원문들에서 예수가 메시야와 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및 주님을 언급할 때면 언제나, 그가 이런 칭호를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닌 의미는 예수와 동시대의 청중들이 틀림없이 그 칭호들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들과 더 이상 부합되지 않으며, 그것들을 그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가 의혹의 여지 없이 이해되려면, 후대의 교회들의 시각과 그 환경을 반영하는 이런 종류의 원문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비판적인 의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Some of the traditional titles could not possibly have been used by Jesus with reference to himself. In those days his hearers could only have understood "Messiah" or "Son of David" in the political or national sense, which conflicted with Jesus' intentions. Also, the exclusive title "Son of God" must have been incomprehensible to the Jews of Palestine, although not to the later hearers of the Christian missionary preaching in the non-Jewish, Hellenistic world. The same applies to the expression "the (divine) Lord," which for Jews was reserved for God alone. Some scholars believe that Jesus understood himself to be the suffering servant of God, of whom Isaiah 53 speaks. But in the Gospels reference is hardly made to this important chapter. The sole passage (Mark 10:45) does not, at least in the form handed down, reproduce an authentic saying of the Lord but contains an interpretation of Jesus' death that goes back to the Greek-speaking Jewish Christian Church.  예수가 어떤 전통적 칭호들을 자신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당시 청중들은 오직 정치적 혹은 민족적 의미에서 메시아 또는 다윗의 자손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예수의 의도와 충돌한다. 또한 배타적 칭호인 하느님의 아들은 비유대교적인 헬레니즘 세계에서 설교하는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후기 청중들에게는 이해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결론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에게만 사용하는 (신적) '주'라는 표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가 자신을 일컬은,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한 문장(마가 10 : 45)만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 그리스도 교회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Thus, the problem is narrowed down to the question about Jesus' calling himself the "Son of man." This concept, which is frequently found in his statements about himself, is a title of sovereignty. It stems from Jewish apocalypticism and means not a normal human being but, rather, the mythical figure of the Judge of all the world, who will come on the clouds of heaven at the end of the days (Dan. 7:13ff.; etc.). An early group of Jesus' sayings (Mark 13:26; 14:62; Matt. 24:27) speaks of the Son of man in this eschatological, future sense and always in the third person, yet in some texts in such a way that Jesus does not explicitly identify himself with this Son of man (Mark 8:38; Luke 9:26; 12:8ff.). Two other groups of sayings speak of him quite differently. One speaks exclusively of his suffering, dying, and rising again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God (Mark 8:31; 9:31; 10:33ff.); the other, of his authoritative work and wanderings on earth (Mark 2:10-28; Matt. 8:20; 11:19), both without a view of the Last Judgment. No Jewish hearer of Jesus could have recognized the apocalyptic Son of man in these sayings. Loosed from the ideas traditionally linked with it, the concept has here been given completely new contents in a retrospective view of Jesus' ministry and end. Thus, both of these groups of sayings are only to be understoo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later church. Therefore, only some sayings of Jesus of the first group probably come into question as authentic ones. If Jesus spoke of the coming Son of man, those sayings prove he was speaking in the apocalyptic language and concepts of his day in order to express the promise that his disciples' loyalty to him will be recognized and confirmed in the Last Judgment. The relation of his earthly person to the figure of the coming Judge is not thereby made the subject of reflection. The Jesus tradition has gone through a process of modification, and the faith of the later church has made a major contribution to the formation of the tradition, whatever its precise extent may be.  그러면 이제는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문제로 좁혀진다. 이 개념은, 예수가 자신에 대한 스스로 하는 말 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데, 주권의 칭호이다. 이것은 유대 묵시사상에서 나오는데, 평범한 인간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 끝날에 구름을 타고 올(다니 7 : 13~) 세상 심판자의 신화적 모습을 의미한다. 예수의 초기 말씀(마태 24 : 27, 마가 13 : 26, 14 : 62)들은 사람의 아들을 종말론적·미래적 의미에서 항상 3인칭으로 말하지만, 어떤 본문들은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마가 8 : 38, 누가 9 : 26, 12 : 8~). 2개의 다른 말씀군(群)은 그를 완전히 다르게 말한다.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그의 수난·죽음·부활만을 말하며(마가 8 : 31, 9 : 31, 10 : 33~), 다른 하나는 땅에서의 권위있는 사역과 방랑에 대해 말한다(마태 8 : 20, 11 : 19, 마가 2 : 10~28). 둘 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유대인 청중은 이 말씀들에서 묵시적인 사람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사역과 죽음을 회고해볼 때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두 말씀군은 오직 후기 교회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초기 말씀군만이 아마도 진정한 것으로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앞으로 올 사람의 아들에 대해 말했다면, 그 말은 그에 대한 제자들의 충성이 마지막 심판 때 인정되고 확인될 것이라는 약속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묵시적 언어와 개념으로 말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상적 인격과 심판자의 모습과의 관계는 반성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 전승은 수정의 과정을 통해 없어졌고, 그 내용의 정확성은 차치하고라도, 후기 교회의 신앙이 전통의 형성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In the post-Easter message of salvation, the eschatological here and now belongs inseparably to Jesus' message of the Kingdom of God and was being realized in him. In the face of unbelief and doubt, the Gospels do not just offer an account of the history of Jesus as it transpired, but they interpret it as God's history with the world, as the decisive, redemptive, and ultimate act and word of God for the world. All titles of sovereignty that faith has assigned to Jesus express the fact that in him the turning point of the ages, the inauguration of salvation, and the nearness and presence of God have arrived. The special character of the Gospel tradition should therefore be understood in this sense. This tradition has not replaced the historical Jesus with a mythical Christ but has made explicit the Christology that was secretly implicit in Jesus' words, works, and way, although without titles of sovereignty and supernatural traits. The question appropriate to the Gospel tradition would, therefore, not be about what has happened to Jesus of Nazareth in the course of the development but, rather, why the first Christians held fast to him. To ask in this way and to accept the answer of the Gospels are matters for faith. It goes beyond the limits of historical research. 

구원에 대한 부활 이후의 말씀에서, 종말론적 '여기 그리고 지금'은 뗄 수 없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속하고 그 안에서 실현되어가고 있었다. 불신앙과 의심에 직면하여,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단지 일어났던 대로 제공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결정적·구속적·궁극적인 행위와 말씀으로, 세상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역사로 해석했다. 신앙으로 예수에게 부여된 주권에 대한 모든 칭호들은 시대의 전환점, 구원의 개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과 현존이 예수 안에서 도래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복음서 전승의 특별한 성격은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전승은 역사적 예수를 신화적 그리스도로 대치하지 않았고, 예수의 말씀·사역·방식(비록 주권과 초자연적 특성에 대한 칭호가 없지만)에서 비밀히 암시된 그리스도론을 명시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전승에 적합한 질문은 발전과정 속에서 나자렛 예수에게 무엇이 일어났었는가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왜 그를 확고히 붙잡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질문과 복음서들의 대답을 수용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며, 이것은 역사적 탐구의 한계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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