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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

I. INTRODUCTION

II. The gospel tradition

SOURCES

Non-Christian sources.

Christian sources.

The Pauline Letters.

The Gospels.

TIMES AND ENVIRONMENT

Political conditions.

Religious conditions.

The Pharisees.

The Sadducees.

The scribes.

The Zealots.

The Essenes.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The birth and family.

The birth of Jesus.

The family of Jesus.

The ministry.

The role of John the Baptist.

The beginning of the ministry.

The calling of the disciples.

The Galilean period.

THE MESSAGE OF JESUS

The Kingdom of God.

The will of God.

THE SUFFERINGS AND DEATH OF JESUS IN JERUSALEM

THE STORY OF JESUS AND FAITH IN JESUS

I. 서론

 

II. 복음 전승

 

자료

비기독교 자료들.

기독교 자료들.

바울의 편지들.

복음서.

시대와 주변 세계

정치적 상황.

종교적 상황.

바리새 파.

사두개 파.

율법학자들.

열심당.

에세네 파.

예수의 삶과 사역

탄생과 가족.

예수의 생.

예수의 가족.

사역.

세례요한의 역할.

사역의 시작.

제자들을 부름.

갈릴리 시기.

예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

예수 이야기와 예수에 대한 신앙

III. The picture of Christ in the early church: The Apostles' Creed

 

PREEXISTENCE

Jesus Christ.

God's only son.

The Lord.

INCARNATION AND HUMILIATION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GLORIFICATI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II.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상( 사도신경)

선재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

성육신과 겸허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그는 지옥에 내려가시며.

영화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IV. The dogma of Christ in the ancient councils

 

THE COUNCILS OF NICAEA AND CONSTANTINOPLE

Early heresies.

Nicaea.

Constantinople.

THE COUNCILS OF EPHESUS AND CHALCEDON

The parties.

The settlement at Chalcedon.

IV. 고대 공의회의 그리스도 교리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초기의 이단들.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당파들.

칼케돈 공의회의 해결.

V. The interpretation of Christ in Western faith and thought

 

DOCTRINES OF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The medieval development.

The Reformation and classical Protestantism.

THE DEBATE OVER CHRISTOLOGY IN MODERN CHRISTIAN THOUGHT

Origins of the debate.

The 19th century.

The 20th century.

V. 서방 신앙과 사상에서의 그리스도 해석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

중세의 발전.

종교개혁과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그리스도론 논쟁

논쟁의 기원들.

19 세기.

20 세기.

VI. Bibliography

Times and environment: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The message of Jesus:

The sufferings and death of Jesus:

The story of Jesus and faith in Jesus:

The dogma of Christ in the ancient councils

고대 공의회의 그리스도 교리

The main lines of orthodox Christian teaching about the person of Christ were set by the New Testament and the ancient creeds. But what was present there in a germinal form became a clear statement of Christian doctrine when it was formulated as dogma. In one way or another, the first four ecumenical councils were all concerned with the formulation of the dogma regarding the person of Christ--his relation to the Father, and the relat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him. (see also Index: Roman Catholicism)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주된 노선은 [신약성서]와 고대 신조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초기 형태의 것이 교리로서 정식화되었을 때 명백한 그리스도교 신조의 선언으로 되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처음 4번의 전 그리스도교 공의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 즉 그와 성부와의 관계, 신성과 인성의 관계의 정식화에 관심을 기울였다.(참고: 로마 카톨릭) 

Such a formulation became necessary because teachings arose within the Christian community that seemed to threaten what the church believed and confessed about Christ. Both the dogma and the heretical teachings against which the dogma was directed are therefore part of the history of Jesus Christ.

그러한 정식화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 믿고 고백하던 것을 위협하는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 생겼기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리와 이에 대항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부분이다.

THE COUNCILS OF NICAEA AND CONSTANTINOPLE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Early heresies.

초기 이단들

 From the outset, Christianity has had to contend with those who misinterpreted the person and mission of Jesus. Both the New Testament and the early confessions of the church referred and replied to such misinterpretations. As the Christian movement gained adherents from the non-Jewish world, it had to explain Christ in the face of new challenges. (see also Index: heresy)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인격과 사명을 오해하는 자들과 싸워야 했다. [신약성서]와 교회의 초기 신앙고백은 그러한 오해를 지적하고 그것에 응답했다. 비유대 세계로부터 지지자들을 모은 그리스도 운동인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를 설명해야만 했다. 
These misinterpretations touched both the question of his humanity and the matter of his deity. A concern to safeguard the true humanity of Jesus led some early Christians to teach that Jesus of Nazareth, an ordinary man, was adopted as the Son of God in the moment of his baptism or after his Resurrection; this heresy was called adoptionism. Gnostics and others wanted to protect him against involvement in the world of matter, which they regarded as essentially evil, and therefore taught that he had only an apparent, not a real body; they were called docetists. Most of the struggle over the person of Christ, however, dealt with the question of his relation to the Father. Some early views were so intent upon asserting his identity with the Father that the distinction of his person was lost and he became merely a manifestation of the one God. Because of this idea of Christ as a "mode" of divine self-manifestation, proponents of this view were dubbed "modalists"; from an early supporter of the view it was called "Sabellianism." Other interpretations of the person of Christ in relation to God went to the opposite extreme. They insisted so strenuously upon the distinctness of his person from that of the Father that they subordinated him to the Father. Many early exponents of the doctrine of the Logos were also subordinationists, so that the Logos idea itself became suspect in some quarters. What was needed was a framework of concepts with which to articulate the doctrine of Christ's oneness with the Father and yet distinctness from the Father, and thus to answer the question (Adolf von Harnack): "Is the Divinity which has appeared on earth and reunited men with god identical with that supreme Divinity which governs heaven and earth, or is it a demigod?" (see also Index: Dynamic Monarchianism, Docetism, Modalistic Monarchianism)   이러한 오해는 그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의 참 인성을 보호하려는 관심에서 일부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보통 사람인 나자렛 예수가 세례의 순간에, 또는 부활 이후에 하느님의 양자로 채택되었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양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본래 악한 것으로 여겨졌던 물질세계와의 관계에서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를 가현적이고 실제가 아닌 몸만을 가졌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가현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은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다루었다. 어떤 초기 견해들은 성부와의 동일성을 너무 의도적으로 주장하여 위격의 구별이 상실되었고, 그는 단순히 하느님의 한 현시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자기 현시의 '양태'로 보기 때문에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양태론자'라고 불리거나 초기 주창자의 이름을 따서 '사벨리우스주의자'라고 불렸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다른 해석들은 극단적인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매우 강력하게 성부와 그의 위격을 구분하여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켰다. 로고스 교리의 초기 대표자들은 종속론자들이어서 로고스 개념 자체가 어떤 분파에서는 의심스럽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성부와의 하나됨과 성부로부터의 구별에 대한 교리를 정교하게 표현할 개념의 틀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하느님과 재연합시켰던 신은 하늘과 땅을 주관하는 최고 신과 동일한가? 혹은 그는 반신인가?"라는 질문(아돌프 폰 하르나크)에 대답해야만 했다.

Nicaea.

니케아 공의회

That question forced itself upon the church through the teachings of Arius. He maintained that the Logos was the first of the creatures, called into being by God as the agent or instrument through which he was to make all things. Christ was thus less than God, but more than man; he was divine, but he was not God. To meet the challenge of Arianism, which threatened to split the church, the newly converted emperor Constantine convoked in 325 the first ecumenical council of the Christian church at Nicaea. The private opinions of the attending bishops were anything but unanimous, but the opinion that carried the day was that espoused by the young presbyter Athanasius, who later became bishop of Alexandria. The Council of Nicaea determined that Christ was "begotten, not made," that he was therefore not creature but creator. It also asserted that he was "of the same essence as the Father" (homoousios to patri). In this way it made clear its basic opposition to subordinationism, even though there could be, and were, quarrels about details. It was not equally clear how the position of Nicaea and of Athanasius differed from modalism. Athanasius asserted that it was not the Father nor the Holy Spirit, but only the Son that became incarnate as Jesus Christ. But in order to assert this, he needed a more adequate terminology concerning the persons in the Holy Trinity. So the settlement at Nicaea regarding the person of Christ made necessary a fuller clarif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nd that clarification in turn made possible a fuller statement of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see also Index: Nicene Creed)   위의 물음은 아리우스의 가르침들을 통해 교회에 제기되었다. 그는 로고스가 피조물 중에 처음이고, 하느님에 의해 대리자 또는 도구로 존재하게 되어, 하느님은 그를 통해 만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따라서 하느님보다 열등하고 사람보다는 우월하다. 그는 인간을 초월하지만 하느님은 아니었다.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위협하는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회심(回心)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했다. 참석한 주교들의 개인적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으나, 주된 의견은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 젊은 사제 아타나시우스가 주창한 것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만들어지지 않고 낳아졌으며' 따라서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였다고 결정했다. 또한 그는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 to patri)이라고 결정되었다.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종속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니케아 공의회와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양태론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한 것은 성부가 아니고 성령도 아니며 오직 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성삼위일체의 위격들에 대한 더 분명한 용어가 필요했으며, 그런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대해 더 명료한 진술이 가능하게 되었다.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Nicaea did not put an end to the controversies but only gave the parties a new rallying point. Doctrinal debate was complicated by the rivalry among bishops and theologians as well as by the intrusion of imperial politics that had begun at Nicaea. Out of the post-Nicene controversies came that fuller statement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which was needed to protect the Nicene formula against the charge of failing to distinguish adequately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Ratified at 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in 381, but since lost, that statement apparently made official the terminology developed by the supporters of Nicene orthodoxy in the middle of the 4th century: one divine essence, three divine persons (mia ousia, treis hypostaseis). The three persons, Father, Son, and Holy Spirit, were distinct from one another but were equal in their eternity and power. Now it was possible to teach, as Nicaea had, that Christ was "of the same essence as the Father" without arousing the suspicion of modalism. Although this doctrine seemed to make problematical the unity of God, it did provide an answer to the first of the two issues confronted by the church in its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the issue of Christ's relation to the Father. It now became necessary to clarify the second issue--the relat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within Christ.   니케아 공의회는 논쟁들을 종결지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쟁거리를 각 분파에게 주었다. 교리적 논쟁은 니케아에서 시작된 황제의 정치적 개입과 서로 숙적관계에 있는 주교 및 신학자들에 의해 복잡해졌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논쟁들로부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진술이 나왔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를 적절히 구별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난에 대해 니케아 신조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4세기 중반 니케아 정통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이 발전시킨 용어들을 명백히 공식화했다. 즉 하나의 본질, 3위격(mia ousia, treis hypostaseis)인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구별되지만 그들의 영원성과 능력에 있어서는 동등하다. 양태론이라는 의심을 야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했다. 이 교리로 하느님의 통일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서 교회가 직면했던 두 논제 중 처음 것, 즉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제공했으며, 2번째 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료화하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THE COUNCILS OF EPHESUS AND CHALCEDON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By excluding several extreme positions from the circle of orthodoxy, the formul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the 4th century determined the course of subsequent discussion about the person of Christ. It also provided the terminology for that discussion, since 5th-century theologians were able to describe the relation between the divine and the human Christ by analogy to the relation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in the Trinity. The term that was found to express this relation in Christ was "nature," physis. There were three divine persons in one divine essence; such was the outcome of the controversies in the 4th century. But there were also two natures, one of them divine and the other human, in the one person Jesus Christ. Over the relation between these two natures the theologians of the 5th century carried on their controversy. (see also Index: Chalcedon, Council of) The abstract questions with which they sometimes dealt in that controversy, some of them almost unintelligible to a modern mind, must not be permitted to obscure the fact that a basic issue of the Christian faith was at stake: how can Jesus Christ be said to partake of both identity with God and brotherhood with humanity?   여기서는 정통주의 집단들로부터 몇 개의 극단적인 입장들을 배제하고 4세기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명확하게 진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계속된 토론과정을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토론거리를 제공했는데, 왜냐하면 5세기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에서 성부·성자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인성과의 관계를 유비(類比)로써 서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는 '본성'(physis)이었다. 하나의 본질에는 3가지 위격이 있었다(4세기 논쟁의 결과였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하나는 신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두 본성이 있었다. 이 두 본성간의 관계에 대해 5세기 신학자들은 논쟁했다.

The parties.

당파들

During the half century after 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several major points of emphasis developed in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characteristically, these are usually defined by the episcopal see that espoused them. There was a way of talking about Christ that was characteristic of the see at Alexandria. It stressed the divine character of all that Jesus Christ had been and done, but its enemies accused it of absorbing the humanity of Christ in his divinity. The mode of thought and language employed at Antioch, on the other hand, emphasized the true humanity of Christ; but its opponents maintained that in so doing it had split Christ into two persons, each of whom maintained his individual selfhood while they acted in concert with each other. Western theology was not as abstract as either of these alternatives. Its central emphasis was a practical concern for human salvation and for as irenic a settlement of the conflict as was possible without sacrificing that concern. Even more than in the 4th century, considerations of imperial politics were always involved in conciliar actions, together with the fear in countries like Egypt that Constantinople might come to dominate them. Thus a decision regarding the relation between the divine and the human in Christ could be simultaneously a decision regarding the political situation. Nevertheless, the settlements at which the councils of the 5th century arrived may be and are regarded as normative in the church long after their political setting has disappeared. (see also Index: Antioch, School of)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반세기 동안 몇 개의 주요강조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서 발전했다.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특징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대적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흡수시킨다고 비난했다. 한편 안티오크에서 사용한 사상과 언어 양식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은 안티오크 학파가 개별적인 성격을 주장하는 두 인격들로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서방신학은 이러한 두 대안들과 같이 추상적이지 않았다. 이 신학의 주된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실제적 관심에 있었으며, 이러한 관심을 희생하지 않고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4세기가 지나서도 황제는 항상 화해하는 행위에 참여했는데, 이집트를 비롯한 나라들은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결정은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결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 공의회의 결정은 그들의 정치적인 상황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교회의 규범으로 여겨졌다.

The conflict between Alexandria and Antioch came to a head when Nestorius, taking exception to the use of the title "Mother of God" or, more literally, "God-Bearer" (Theotokos) for the Virgin Mary, insisted that she was only "Christ-Bearer." In this insistence the Antiochian emphasis upo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two natures in Christ made itself heard throughout the church. The Alexandrian theologians responded by charging that Nestorius was dividing the person of Christ, which they represented as so completely united that, in the famous phrase of Cyril, there was "one nature of the Logos which became incarnate." By this he meant that there was only one nature, the divine, before the Incarnation, but that after the Incarnation there were two natures indissolubly joined in one person; Christ's human nature had never had an independent existence. There were times when Cyril appeared to be saying that there was "one nature of the incarnate Logos" even after the Incarnation, but his most precise formulations avoided this language. (see also Index: Nestorian)

The Council of Ephesus in 431 was one in a series of gatherings called to settle this conflict, some by one party and some by the other. The actual settlement was not accomplished, however, until the calling of the Council of Chalcedon in 451.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와의 갈등은 네스토리우스가 '하느님의 어머니' 혹은 더욱 문자적으로 '하느님을 낳은 자'(Theotokos)라는 명칭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녀는 오직 '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주장했을 때 시작되었다. 이러한 주장에서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구분한 안티오크 학파의 주장이 모든 교회로 흘러들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위격을 나누고 있다고 비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의 위격을 완전히 연합시켰는데, 그들의 입장은 키릴루스의 유명한 구절 '성육신한 로고스의 한 본성'으로 표현된다. 이 구절로 보아 키릴루스가 의미하는 바는 성육신 이전에는 오직 한 본성인 신성이 있었고, 성육신 이후에는 한 인격 안에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된 두 본성이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본성은 결코 독립된 실존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성육신 이후에도 '성육신한 로고스의 한 본성'이 있었다고 키릴루스가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지만 그는 정교한 표현으로 이 내용을 피했다. 431년의 에페소스 공의회는 각 계파에서 몇 사람씩 모여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러나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는 실제적인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The settlement at Chalcedon.

 

칼케돈 공의회의 해결

 

The basis of the settlement was the Western understanding of the two natures in Christ, as formulated in the Tome of Pope Leo I of Rome. Chalcedon declared: "We all unanimously teach . . . one and the same Son, our Lord Jesus Christ, perfect in deity and perfect in humanity . . . in two natures, without being mixed, transmuted, divided, or separated. The distinction between the natures is by no means done away with through the union, but rather the identity of each nature is preserved and concurs into one person and being." In this formula the valid emphases of both Alexandria and Antioch came to expression; both the unity of the person and the distinctness of the natures were affirmed. Therefore the decision of the Council of Chalcedon has been the basic statement of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for most of the church ever since. The western part of the church went on to give further attention to the doctrine of the work of Christ. In the eastern part of the church the Alexandrians and the Antiochians continued the controversies that had preceded Chalcedon, but they clashed now over the question of how to interpret Chalcedon. The controversy over the Monophysite and the Monothelite heresies was an effort to clarify the interpretation of Chalcedon, with the result that the extremes of the Alexandrian position were condemned just as the Nestorian extreme of the Antiochian had been. (see also Index: Eastern Orthodoxy)   해결의 기초는 로마의 교황 레오 1세의 교서에서 조문화되었듯이,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에 대한 서방의 이해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우리는 모두 일치하여 가르친다……하나이며, 동일한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 완전하고 인성도 완전하며……혼합되거나 변질되거나 나뉘거나 혹은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을 지니며, 본성들 사이의 구분은 결코 연합을 통해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존재로 협력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문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가 강조하는 것들이 표현되었는데, 인격의 통일성과 본성들의 구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그 이후 그리스도의 인격교리에 대한 기본적 진술이 되었다. 서방교회측은 그리스도의 사역교리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동방교회측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는 칼케돈 공의회 이전의 논쟁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칼케돈을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충돌했다. 단성론과 단의론에 대한 논쟁은 칼케돈의 해석을 명료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극단들은 안티오크 학파의 극단이 정죄되었듯이 정죄되었다.
Emerging from all this theological discussion was an interpretation of the person of Christ that affirmed both his oneness with God and his oneness with humanity while still maintaining the oneness of his person. Interestingly, the liturgies of the church had maintained this interpretation at a time when the theologians of the church were still struggling for clarity; and the final solution was a scientifically precise restatement of what had been present germinally in the liturgical piety of the church. In the formula of Chalcedon that solution finally found the framework of concepts and of vocabulary that it needed to become intellectually consistent. In one sense, therefore, what Chalcedon formulated was what Christians had been believing from the beginning; but in another sense it represented a development from the earlier stages of Christian thought.   이러한 모든 신학적 토론에서 나오는 것은 위격의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성과 인성과의 일치성을 확언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해석이었다. 흥미롭게도 교회의 전례는 교회의 신학자들이 진술의 명료화를 위해 싸우고 있었을 때 이 해석을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교회의 전례 초기부터 현존했었던 것에 대해 재진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조문화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처음부터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The interpretation of Christ in Western faith and thought

서방 신앙과 사상에서의 그리스도 해석

With the determination of the orthodox teaching of the church regarding the person of Christ, it still remained necessary to clarify the doctrine of the work of Christ. While it had been principally in the East that the discussion of the former question was carried on--though with important additions from the West, as we have seen--it was the Western Church that provided the most detailed answers to the question: granted that this is what Jesus Christ was, how are we to describe what it is that he did?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교리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남아 있었다. 토론이 주로 동방에서 진행되어왔던 반면, 질문에 대한 가장 상세한 대답을 제공한 곳은 서방교회였다.

 

DOCTRINES OF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

The medieval development.

중세의 발전

The most representative spokesman of the Western Church on this question, as on most others, was St. Augustine. His deep understanding of the meaning of human sin was matched by his detailed attention to the meaning of divine grace. Central to that attention was his emphasis upon the humanity of Jesus Christ as man's assurance of his salvation, an emphasis to which he gave voice in a variety of ways. The humanity of Christ showed how God elevated the humble; it was the link between the physical nature of human beings and the spiritual nature of God; it was the sacrifice which the human race offered to God; it was the foundation of a new humanity, recreated in Christ as the old humanity had been created in Adam--in these and other ways Augustine sought to describe the importance of the Incarnation for the redemption of man. By combining this stress upon the humanity of Christ as the Saviour with a doctrine of the Trinity that was orthodox but nevertheless highly creative and original, St. Augustine put his mark indelibly upon Western piety and theology, which, in Anselm and in the reformers, sought further for adequate language in which to describe God's deed of reconciliation in Jesus Christ. (see also Index: Middle Ages)   이 문제에 대한 서방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의미를 깊이 인식했으며, 신적 은총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느님이 어떻게 비천한 자를 높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과 하느님의 영적 본성의 연결이었고, 인류가 하느님에게 바친 희생이었다. 그것은 옛 인성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새로운 인성의 기반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방식들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구속을 위한 성육신의 중요성을 묘사하려고 했다.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런 강조를, 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결합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화해행위를 서술하기 위해 적절한 언어를 찾았던 안셀무스와 종교개혁자들의 서방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During the formative centuries of Christian dogma, there had been many ways of describing that reconciliation, most of them having some precedent in biblical speech. One of the most prominent pictures of the reconciliation was that connected with the biblical metaphor of ransom: Satan held the human race captive in its sin and corruptibility, and the death of Christ was the ransom paid to the Devil as the price for setting mankind free. A related metaphor was that of the victory of Christ: Christ entered into mortal combat with Satan for the human race, and the winner was to be lord; although the Crucifixion appeared to be Christ's capitulation to the enemy, his Resurrection broke the power of the Devil and gave the victory to Christ, granting to mankind gift of immortality. From the Old Testament and the Epistle to the Hebrews came the image of Christ as the sacrificial victim who was offered up to God as a means of stilling the divine anger. From the sacrament of penance came the idea, most fully developed by St. Anselm, that the death of Christ was a vicarious satisfaction rendered for mankind. Like the New Testament, the Church Fathers could admonish their hearers to learn from the death of Christ how to suffer patiently. They could also point to the suffering and death of Christ as the supreme illustration of how much God loves mankind. As in the New Testament, therefore, so in the tradition of the church there were many figures of speech to represent the miracle of the reunion between man and God effected in the God-man Christ Jesus.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형성되는 동안 화해를 서술하는 많은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성서적 말씀 속에 어떤 선례를 가지고 있었다. 화해에 대한 가장 뛰어난 묘사들 중 하나는 속죄에 대한 성서적 은유와 연결된 것이었다. 사탄은 인류를 그 죄와 타락성에서 포획하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가로 마귀에게 지불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사탄과의 죽음의 싸움으로 나아갔다.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그리스도가 적에게 항복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의 부활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에게 영원성을 가져다주었다. [구약성서]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하느님의 분노를 멈추게 하는 수단으로써 하느님에게 바친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가 나온다. 성 안셀무스의 사상에서 가장 잘 발전했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위해 주어진 대리만족이라는 사상이 나온다. 교부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고난을 참을 수 있는지를 배우라고 훈계한다. 그들은 또한 얼마나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최고의 예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와 같이 교회의 전통 안에도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하느님을 재연합시키는 기적을 표현하려는 많은 언어방식들이 있었다.
Common to all these figures of speech was the desire to do two things simultaneously: to emphasize that the reunion was an act of God, and to safeguard the participation of man in that act. Some theories were so "objective" in their emphasis upon the divine initiative that man seemed to be almost a pawn in the transaction between God in Christ and the Devil. Other theories so "subjectively" concentrated their attention upon man's involvement and man's response that the full scope of the redemption could vanish from sight. It was in Anselm of Canterbury that Western Christendom found a theologian who could bring together elements from many theories into one doctrine of the Atonement, summarized in his book, Cur Deus homo? According to this doctrine, sin was a violation of the honour of God. God offered man life if he rendered satisfaction for that violation; but the longer man lived, the worse the situation became. Only a life that was truly human and yet had infinite worth would have been enough to give such a satisfaction to the violated honour of God on behalf of the entire human race. Such a life was that of Jesus Christ, whom the mercy of God sent as a means of satisfying the justice of God. Because he was true man, his life and death could be valid for men; because he was true God, his life and death could be valid for all men. By accepting the fruits of his life and death, mankind could receive the benefits of his satisfaction. With some relatively minor alterations, Anselm's doctrine of Atonement passed over into the theology of the Latin church, forming the basis of both Roman Catholic and orthodox Protestant ideas of the work of Christ. It owed its acceptance to many factors, not the least of them being the way it squared with the liturgy and art of the West. The crucifix has become the traditional symbol of Christ in the Western Church, reinforcing and being reinforced by the satisfaction theory of the Atonement.   이러한 모든 표현방식에 공통적인 것은, 재연합은 하느님의 행위였다는 것과 그 행위에 인간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론들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강조 때문에 너무 '객관적'이 되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과 마귀 사이의 거래에서 저당물로 보였다. 다른 이론들은 인간의 관련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너무 '주관적'으로 집중시켰기 때문에 구속의 전 영역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그의 책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에서 많은 이론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대속교리로 만들었는데, 이 교리에 따르면 죄는 하느님의 영예에 대한 침해였다. 인간이 그 침해에 대한 대가로 하느님을 만족하게 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인간이 오래 살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참 인간이며 완전한 가치를 가졌던 유일한 생명은 인류 전체를 위해 하느님의 침해된 영예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비의 하느님이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었다. 왜냐하면 참 인간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사람들에게 유효할 수 있었고, 참 신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와 죽음의 열매들을 수용함으로써 인류는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약간의 변형을 거친 안셀무스의 대속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정통 개신교 이념들의 기초를 형성하면서, 라틴 교회의 신학에 전승되었다. 십자가는 대속의 만족교리에 의해 강화되고 서방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 상징이 되었다.
Scholastic theology, therefore, did not modify traditional ways of speaking about either the person or the work of Christ as sharply as it did, for example, some of the ways the Church Fathers had spoken about the presence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in the Eucharist. The major contribution of the scholastic period to the Christian conception of Jesus Christ appears to lie in the way it managed to combine theological and mystical elements. Alongside the growth of Christological dogma and sometimes in apparent competition with it was the development of a view of Christ that sought personal union with him rather than accurate concepts about him. Such a view of Christ appeared occasionally in the writings of Augustine, but it was in men like Bernard of Clairvaux that it attained both its fullest expression and its most adequate harmonization with the dogmatic view. The relation between the divine and the human natures in Christ, as formulated in ancient dogma, provided the mystic with the ladder he needed to ascend through the man Jesus to the eternal Son of God, and through him to a mystical union with the Holy Trinity; this had been anticipated in the mystical theology of some of the Greek fathers. At the same time the dogma saved mysticism from the pantheistic excesses to which it might otherwise have gone; for the doctrine of the two natures meant that the humanity of the Lord was not an expendable element in Christian piety, mystical or not, but its indispensable presupposition and the continuing object of its adoration, in union with his deity. As a matter of fact, another contribution of the medieval development was the increased emphasis of St. Francis of Assisi and his followers upon the human life of Jesus. These brotherhoods cultivated a more practical and ethical version of mystical devotion, to be distinguished from speculative and contemplative mysticism. Their theme became the imitation of Christ in a life of humility and obedience. With it came a new appreciation of that true humanity of Christ which the dogma had indeed affirmed, but which theologians had been in danger of reducing to a mere dogmatic concept. As Henry Thode and others have suggested, this new appreciation is reflected in the way painters like Giotto began to portray Jesus, in contrast with their Western predecessors and especially with the stylized picture of Christ in Byzantine icon painting. (see also Index: scholasticism)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사역을 설명하는 전통적 방식들을 수정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에 스콜라 신학이 공헌한 것은 신학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를 결합시킨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는 때때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에게서 가장 완전한 표현과 교리적 견해의 충분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인간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며, 그를 통해 삼위일체와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데 필요했던 사다리를 신비주의자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것은 몇몇 그리스 교부들의 신비적 신학에서 예기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 교리는 신비주의가 과도한 범신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더불어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며 숭배의 지속적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중세의 공헌은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와 그 추종자들이 예수의 인간적 생애를 더욱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 형제단은 사변적이고 명상적인 신비주의로부터 구별되기 위해 실천적·윤리적인 신비적 헌신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주제는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산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의 참 인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인성을 단순한 교리적 개념으로 환원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 새로운 인식은 비잔틴 성상에서 유형화된 그리스도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조토 같은 화가들이 예수를 묘사하기 시작했던 방식에 반영되었다고 헨리 토드와 그밖의 몇몇 사람들은 주장했다.

 

The Reformation and classical Protestantism.

종교개혁과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

The attitude of the reformers toward traditional conceptions of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was conservative. Insisting for both religious and political reasons that they were orthodox, they altered little in the Christological dogma. Martin Luther and John Calvin gave the dogma a new meaning when they related it to their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 Because of his interpretation of sin as the captivity of the will, Luther also revived the patristic metaphor of the Atonement as the victory of Christ; it is characteristic of him that he wrote hymns for both Christmas and Easter but not for Lent. The new attention to the Bible that came with the Reformation created interest in the earthly life of Jesus, while the Reformation idea of "grace alone" and of the sovereignty of God even in his grace made the deity of Christ a matter of continuing importance. (see also Index: Protestantism)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보수적이었다. 정통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그리스도론을 거의 변경시키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를 은총에 의한 의인교리와 관련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루터는 죄를 의지의 노예상태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승리로써의 대속이라는 교부적 은유를 재생시켰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대한 찬송들은 썼지만 사순절에 대한 찬송들은 쓰지 않았다. '오직 은총으로'와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종교개혁 이념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속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만들었지만,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예수의 지상 생애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In the ideas about the Lord's Supper set forth by Huldrych Zwingli, Luther thought he saw a threat to the orthodox doctrine of Christ, and he denounced those doctrines vehemently. As this controversy progressed, Luther interpreted the ancient dogma of the two natures to mean that the omnipresence of the divine nature was communicated to the human nature of Christ, and that therefore Christ as both God and man was present everywhere and at all times. Although he repudiated both Luther's and Zwingli's theories, Calvin was persuaded that the ancient Christological dogma was true to the biblical witness and he permitted no deviation from it. All this is evidence for the significance that "Jesus Christ, true God begotten of the Father from eternity, and also true man, born of the Virgin Mary," to use Luther's formula, had in the faith and theology of all the reformers. 루터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내세운 성찬에 대한 사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 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 그 교리를 격렬히 비난했다. 이 논쟁이 진전됨에 따라 루터는 신성의 편재성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통하고, 그러므로 신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에서나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해석했다.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이론을 거부했지만, 고대 그리스도론이 성서적 증언에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낳아진 참 하느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참 인간"이라는 루터의 구절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신학 안에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At one point the theology of the reformers did serve to bring together several facets of the biblical and the patristic descriptions of Jesus Christ. That was the doctrine of the threefold office of Christ, systematized by Calvin and developed more fully in Protestant orthodoxy: Christ as prophet, priest, and king. Each of these symbolized the fulfillment of the Old Testament and represented one aspect of the church's continuing life. Christ as prophet fulfilled and elevated the prophetic tradition of the Old Testament, while continuing to fulfill his prophetic office in the ministry of the Word. Christ as priest brought to an end the sacrificial system of the Old Testament by being both the priest and the victim, while he continues to function as intercessor with and for the church. Christ as king was the royal figure to whom the Old Testament had pointed, while exercising his rule among men now through those whom he has appointed. In each of the three, Protestants differed from one another according to their theological, ethical, or liturgical positions. But the threefold office enabled Protestant theology to take into account the complexity of the biblical and patristic pictures of Christ as no oversimplified theory was able to do, and it is probably the chief contribution of the reformers to the theological formulation of the doctrine of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서술의 몇몇 측면을 종합했는데, 그것은 칼뱅에 의해 체계화되고,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예언자·제사장·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로 발전했다. 이것들은 [구약성서]의 완성을 상징했고, 교회의 계속되는 삶의 한 측면을 표현했다.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말씀사역에서 그의 예언적 직능을 계속 수행하면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을 완성했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해 중재자로서 기능을 계속함과 동시에 제사장이면서 제물이 됨으로써 [구약성서]의 희생제를 종식시켰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가 임명한 자들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통치하는 분이었다. 개신교도들은 그들의 신학적·윤리적 또는 전례적 입장에 따라 서로를 구분했다. 그러나 삼중직을 통해 개신교 신학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론들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묘사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교리를 신학적으로 조문화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THE DEBATE OVER CHRISTOLOGY IN MODERN CHRISTIAN THOUGHT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그리스도론 논쟁

Few Protestant theologians in the middle of the 20th century were willing to endorse the ancient dogma of the two natures in Christ as unconditionally as the reformers had done, for between the Reformation and modern theology there intervened a debate over Christology that altered the perspective of most Protestant denominations and theologians. By the 20th century there was a wider gap between the theology of the reformers and that of many modern Protestants than there had been between the theology of the reformers and that of their Roman Catholic opponents.

20세기 중반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신학자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과 현대신학 사이에는 모든 개신교 교파와 신학자들의 시각을 변경시킨 그리스도론 논쟁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로마 가톨릭의 신학 사이의 간격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현대 개신교 신학 사이의 간격이 더 크다.

Origins of the debate.

논쟁의 기원들

The earliest criticism of orthodox dogma came in the age of the Reformation, not from the reformers but from the "left wing of the Reformation," from Michael Servetus (1511?-53) and the Socinians. This criticism was directed against the presence of nonbiblical concepts and terms in the dogma, and it was intent upon safeguarding the true humanity of Jesus as a moral example. There were many inconsistencies in this criticism, such as the willingness of Servetus to call Jesus "Son of God" and the Socinian custom of addressing prayer and worship to him. But it illustrates the tendency, which became more evident in the Enlightenment, to use the Reformation protest against Catholicism as a basis for a protest against orthodox dogma as well. While that tendency did not gain much support in the 16th century because of the orthodoxy of the reformers, later criticism of orthodox Christology was able to wield the "Protestant principle" against the dogma of the two natures on the grounds that this was a consistent application of what the reformers had done. Among the ranks of the Protestant laity, the hymnody and the catechetical instruction of the Protestant churches assured continuing support for the orthodox dogma. Indeed, the doctrine of Atonement by the vicarious satisfaction of Christ's death has seldom been expressed as amply as it was in the hymns and catechisms of both the Lutheran and the Reformed churches. During the period of Pietism in the Protestant churches, this loyalty to orthodox teaching was combined with a growing emphasis upon the humanity of Jesus, also expressed in the hymnody of the time. 종교개혁 시대에 정통교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비판은 '종교개혁의 좌파'인 미겔 세르베투스(1511~53)와 소키누스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 이 비판은 교리 안의 비성서적 개념과 단어에 대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도덕적 모범으로서 예수의 참 인성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부르려 했으며, 소키누스주의자들은 예수에게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등의 모순을 나타낸다. 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의 저항을 정통 교리에 대한 저항의 기초로 사용하려는 경향은 계몽주의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이 종교개혁자들의 정통주의 때문에 16세기에는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정통 그리스도론에 대한 후대의 비평은 종교개혁자들이 의도했던 것의 일관된 적용이라는 근거에서, 두 본성교리에 대항하여 '개신교 원리'를 사용할 수 있었다. 개신교 교회의 찬송가와 교리문답 교육은 정통주의 교리에 대한 계속적 지원을 보장했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리만족에 의한 대속교리가 루터 교회와 개혁교회의 찬송과 교리문답에서처럼 널리 충분하게 표현된 곳은 없다. 개신교 경건주의 시대에 이러한 정통주의 가르침은 예수의 인성에 대한 점증되는 강조와 결합되었고, 그 시대의 찬송가에 표현되었다.
When theologians began to criticize orthodox ideas of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therefore, they met with opposition from the common people. Albert Schweitzer dates the development of a critical attitude from the work of H.S. Reimarus (1694-1768), but Reimarus was representative of the way the Enlightenment treated the traditional view of Jesus. The books of the Bible were to be studied just as other books are, and the life of Jesus was to be drawn from them by critically sifting and weighing the evidence of the Gospels. The Enlightenment thus initiated the modern interest in the life of Jesus, with its detailed attention to the problem of the relative credibility of the Gospel records. It has been suggested by some historians that the principal target of Enlightenment criticism was not the dogma of the two natures but the doctrine of the vicarious Atonement. The leaders of Enlightenment thought did not make a sudden break with traditional ideas, but gave up belief in miracles, the Virgin Birth, the Resurrection, and the Second Advent only gradually. Their principal importance for the history of the doctrine of Christ consists in the fact that they made the historical study of the sources for the life of Jesus an indispensable element of any Christology.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정통주의 이념을 비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알베르 슈바이처는 H. S. 라이마루스(1694~1768)의 연구로부터 비평적 태도가 발전했다고 보지만, 라이마루스는 예수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다루었던 계몽주의 방식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성서의 책들은 다른 책들처럼 연구되어야 했고, 예수의 생애는 복음서들의 증언을 비평적으로 조사하고 숙고함으로써 그려져야 했다. 계몽주의는 복음서 기록들의 상대적 신뢰성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예수의 생애에 대한 현대적 관심을 처음으로 일깨웠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계몽주의 비평의 대상은 두 본성교리가 아니고 대리적 대속교리라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전통적 이념과의 관계를 단번에 끊지 않고, 기적,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에 대한 믿음을 서서히 포기했다. 그리스도교리사에서 그들의 중요성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자료에 대해 역사적 연구를 시도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론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다.

The 19th century.

19세기

Although the Enlightenment of the 18th century was the beginning of the break with orthodox teachings about Jesus Christ, it was only in the 19th century that this break attracted wide support among theologians and scholars in many parts of Christendom--even, for a while, among the Modernists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Two works of the 19th century were especially influential in their rejection of orthodox Christology. One was the Life of Jesus, first published in 1835 by David Friedrich Strauss; the other, bearing the same title, was first published by Ernest Renan in 1863. Strauss's work paid more attention to the growth of Christian ideas--he called them "myths"--about Jesus as the basis for the picture we have in the Gospels, while Renan attempted to account for Jesus' career by a study of his inner psychological life in relation to his environment. Both works achieved wide circulation and were translated into other languages, including English. They took up the Enlightenment contention that the sources for the life of Jesus were to be studied as other sources are, and what they constructed on the basis of the sources was a type of biography in the modern sense of the word. In addition to Strauss and Renan, the 19th century saw the publication of a plethora of books about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Each new hypothesis regarding the problem of the Synoptic Gospels implied a reconstruction of the life and message of Jesus. (see also Index: "Life of Jesus," ) 비록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주의 가르침을 단절하는 시작이었지만, 19세기에 와서는 많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신학자 및 학자, 한동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D. F.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1835)와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1863)는 정통 그리스도론에 대한 그들의 거부에 영향을 끼쳤다. 슈트라우스의 연구는 우리가 복음서들 안에 가지고 있는 상(像)의 기초인(그가 '신화들'이라 부르는)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반면 르낭은 상황과 연관된 예수의 내부적·심리적 삶을 연구하여 예수의 경력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두 책은 널리 읽혀졌고 영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를 위한 자료들이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연구되어야만 한다는 계몽주의의 주장을 따랐고, 그들이 제시한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 전기 형태였다. 슈트라우스, 르낭과 더불어 19세기에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책들이 과잉 출판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의 문제에 대한 각기 새로운 가설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의 재건을 함축했다.
The fundamental assumption for most of this work on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was a distinction between the "Jesus of history" and the "Christ of faith." Another favourite way of putting the distinction was to speak of the religion of Jesus in antithesis to the religion about Jesus. This implied that Jesus was a man like other men, but with a heightened awareness of the presence and power of God. Then the dogma of the church had mistaken this awareness for a metaphysical statement that Jesus was the Son of God and had thus distorted the original simplicity of his message. Some critics went so far as to question the very historicity of Jesus, but even those who did not go that far questioned the historicity of some of the sayings and deeds attributed to Jesus in the Gospels.  

In part this effort grew out of the general concern of 19th-century scholarsip with the problem of history, but it also reflected the religious and ethical assumptions of the theologians. Many of them were influenced by the moral theories of Kant in their estimate of what was permanent about the teachings of Jesus, and by the historical theories of Hegel in the way they related the original message of Jesus to the Christian interpretations of that message by later generations of Christians. The ideas of evolution and of natural causality associated with the science of the 19th century also played a part through the naturalistic explanations of the biblical miracles. And the historians of dogma, climaxing in Adolf von Harnack (1851-1931), used their demonstration of the dependence of ancient Christology upon non-Christian sources for its concepts and terminology to reinforce their claim that Christianity had to get back from the Christ of dogma to the "essence of Christianity" in the teachings of Jesus about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이러한 연구의 근본적 전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이었다. 또다른 구분방식은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대한 종교'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최상으로 인식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교회의 교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형이상학적 진술 때문에 이 인식을 오해했고, 그래서 그 말씀의 본래적 단순성을 왜곡시켰다. 어떤 비평학자들은 예수의 역사성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서들에서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역사성을 의문시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역사문제에 대한 19세기 학문의 일반적 관심으로부터 성장했지만, 또한 그것은 신학자들의 종교적·윤리적 전제들을 반영했다. 그들 중 다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불변적인 것인가를 평가하는 데서는 칸트의 도덕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예수의 본래 말씀을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그리스도교적 해석과 연관시키는 방법에서는 헤겔의 역사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세기 과학과 연관된 진화론과 자연적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들은 성서의 기적들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 ~1931) 등의 교리사가들은 그리스도교가 교리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본질, 즉 하느님의 아버지됨과 사람의 형제됨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그 개념과 용어에서 고대 그리스도론이 비그리스도교 자료에 의존되어 있다고 증명했다.

The 20th century.

20세기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the most influential authorities on the New Testament were engaged in this quest for the essence of Christianity and for the Jesus of history. But that quest led in the early decades of the 20th century to a revolutionary conclusion regarding the teachings of Jesus, namely, that he had expected the end of the age to come shortly after his death and that his teachings as laid down in the Gospels were an "interim ethic," intended for the messianic community in the brief span of time still remaining before the end. The effort to apply those teachings in modern life was criticized as a dangerous modernization. This thesis of the "consistent eschatology" in Jesus' message was espoused by Johannes von Weiss (1863-1914) and gained wide circulation through the writings of Albert Schweitzer. 20세기초 [신약성서]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권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 관여했는데, 결국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즉 예수는 그의 죽음 이후 곧 도래할 시대의 종말을 기대했었고, 복음서에 있는 그의 가르침들은 종말 이전의 짧은 기간 동안 메시아 공동체를 위한 '중간 윤리'였다는 것이다. 현대생활에 이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위험한 현대화로 비판받았다. 예수의 말씀 안에 있는 '철저한 종말론'의 주제는 요하네스 폰 바이스(1863~1914)에 의해 주장되었고, 알베르 슈바이처의 저작들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다.
The years surrounding World War I also saw the development of a new theory regarding the composition of the Gospels. Because of its origin, this theory is usually called form criticism (German Formgeschichte). It stressed the forms of the Gospel narratives--parables, sayings, miracle stories, Passion accounts, etc.--as an indication of the oral tradition in the Christian community out of which the narratives came. While the attention of earlier scholars had been concentrated on the authenticity of Jesus' teachings as transmitted in the Gospels, this new theory was less confident of being able to separate the authentic from the later elements in the Gospel records, though various proponents of it did suggest criteria by which such a separation might be guided. The studies of form criticism made a life of Jesus in the old biographical sense impossible, just as consistent eschatology had declared impossible the codification of a universal ethic from the teachings of Jesus. Some adherents of form criticism espoused an extreme skepticism regarding any historical knowledge of Jesus' life at all, but the work of men like Martin Dibelius and even Rudolf Bultmann showed that such skepticism was not warranted by the conclusions of this study.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복음서들의 구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이 이론은 보통 양식비평(Formgeschichte)으로 불린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전전승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복음서 설화들의 양식(비유·말씀·기적이야기·수난내용)을 강조한다. 초기 학자들은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의 가르침의 진정성에 관심을 집중했지만, 이 새로운 이론으로 복음서 기록들의 후기적 요소들로부터 진정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비록 이 이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구분을 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했지만, 양식비평의 연구는 철저한 종말론이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보편적 윤리를 성문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전기적(傳記的) 의미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떤 양식비평의 지지자들은 예수 생애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가졌다. 그러나 마르틴 디벨리우스와 루돌프 불트만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회의주의를 수긍하지 않았다.
Influenced by these trends in New Testament study, Protestant theology by the middle of the 20th century was engaged in a reinterpretation of the Christology of the early church. Some Protestant churches continued to repeat the formulas of ancient dogma, but even there the critical study of the New Testament documents was beginning to call those formulas into question. The struggles of the evangelical churches in Germany under Adolf Hitler caused some theologians to realize anew the power of the ancient dogma of the person of Christ to sustain faith, and some of them were inclined to treat the dogma with less severity. But even they acknowledged that the formulation of that dogma in static categories of person, essence, and nature was inadequate to the biblical emphasis upon actions and events rather than upon states of being. Karl Barth for the Reformed tradition, Lionel Thornton for the Anglican tradition, and Karl Heim for the Lutheran tradition were instances of theologians trying to reinterpret classical Christology. While yielding nothing of their loyalty to the dogma of the church, Roman Catholic theologians like Karl Adam were also endeavouring to state that dogma in a form that was meaningful to modern men. The doctrine of the work of Christ was receiving less attention than the doctrine of Christ's person. In much of Protestantism, the concentration of the 19th century upon the teachings of Jesus had made it difficult to speak of more than the prophetic office. The priestly office received least attention of all; and, therefore, despite the support accorded to efforts like that of Gustaf Aulén to reinterpret the metaphor of the Atonement as Christ's victory over his enemies, Protestant theology in the middle of the 20th century was still searching for a doctrine of the Atonement to match its newly won insights into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신약성서] 연구에서 이러한 경향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초기교회의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어떤 개신교 교회들은 고대 교회의 신조들을 계속 답습했으나, [신약성서] 문헌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이 신조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개신교 교회들의 투쟁은 몇몇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고대 교리의 능력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했다. 그들 중 몇몇은 교리를 덜 엄격하게 다루려고 했지만 그들조차도 위격·본질·본성의 정태적 범주들로 그 교리들을 조문화하는 것은, 존재상태보다는 행위와 사건을 강조하는 성서적 사고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개혁교회 전통의 카를 바르트, 성공회 전통의 라이오넬 손턴, 루터교 전통의 카를 하임은 고전적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던 신학자들이다. 교회의 교리에 대한 지지를 전혀 포기하지 않으면서, 카를 아담 같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 교리를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형식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교리보다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19세기 많은 개신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함으로써 예언자적 직무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제사장적 직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속의 은유를 그의 대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재해석했던 구스타프 아울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새롭게 얻은 통찰력을 그리스도의 위격교리에 맞추기 위해 대속교리를 찾고 있었다.

In a curious way, therefore, the figure of Jesus Christ has become both a unitive and a divisive element in Christendom. All Christians are united in their loyalty to him, even though they express their loyalty in a variety of doctrinal and liturgical ways. But doctrine and liturgy also divide Christian communions from one another. It has not been the official statements about Christ that have differed widely among most communions. What has become a sharp point of division is the amount of historical and critical inquiry that is permitted where the person of Christ is involved. Despite their official statements and confessions, most Protestant denominations had indicated by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that they would tolerate such inquiry, differ though they did in prescribing how far it would be permitted to go. On the other hand, the exclusion of Modernism by the Roman Catholic Church in 1907-10 drew definite limits beyond which the theological use of the methods of critical inquiry was heretical. Within those limits, however, Roman Catholic biblical scholars were engaging in considerable critical literary study, at the same time that critical Protestant theologians were becoming more sympathetic to traditional Christological formulas.   

따라서 기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연합·분열되는 요소가 되어왔다. 모든 그리스도교도는 그들의 충성을 다양한 교리적·전례적 방식으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충성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식적 진술은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공동체를 분열시켰던 원인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연관된 역사적·비평적 탐구의 결과였다. 그들의 공식적 진술과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그런 탐구를 어느 한도까지 허락할 지는 각각 다르지만, 20세기 후반기에는 그런 탐구를 용납할 것을 시사했다. 다른 한편 1907~10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한 현대주의의 배척은 비판적 탐구방법을 신학적으로 사용할 때 이단이 되는 확실한 경계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로마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상당히 비평적인 문헌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비평적 개신교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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