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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estantism

16세기초 북유럽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교파.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가 되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종교전쟁을 거친 이후,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전세계에 다양한 형태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개신교 운동의 역사

개신교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는 말이 처음 쓰이게 된 것은 1529년 슈파이어 의회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계열의 독일 제후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함께 3년 전 마르틴 루터의 추종자들에게 허락하였던 관용정책의 대부분을 무효화하였다. 1529년 4월 19일에는 독일의 14개 자유도시와 6명의 루터파 제후들이 대표가 된 이 결정에 대한 항의서가 발표되었다. 이 항의서는 자신들이 그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결정이 자신들을 구속할 수 없으며 하느님에 대한 복종과 황제에 대한 복종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하느님에 대한 복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온 그리스도교를 포괄하는 공의회나 전독일민족의 총회를 개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항의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이름은 항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에 의해 채택되었고 점차 종교개혁의 교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독일의 종교개혁 신봉자들은 복음파(Evangelicals)라는 이름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uenots)라는 이름을 선호하였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루터(1483경~1546)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울리히츠 빙글리(1484~1531)의 제자들, 나중에는 장 칼뱅(1509~64)의 제자들도 일컫게 되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추종자들, 특히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추종자들은 개혁파(Reformed)라는 이름을 더 좋아했다.

16세기만 해도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주로 종교개혁시대에 나타난 2개의 큰 사상, 즉 루터파 및 개혁파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나 17세기초 잉글랜드에서는 영국국교도들이 비정통으로 간주한 사람들, 곧 침례교도들이나 퀘이커교도들과 대비되는 '정통 프로테스탄트'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인임을 주장하나 가톨릭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단 동방교회는 제외), 즉 침례교도, 퀘이커교도, 가톨릭 성향의 영국국교도 모두를 포괄하는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썼다. 유니테리언파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이같이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700년 이전이었다. 예를 들어 1689년의 영국 관용조례는 '영국국교회를 반대하는 폐하의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의 의무를 면제하는 조례'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조례는 잉글랜드에서 '정통 국교반대자'로 알려진 견해들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였을 뿐, 유니테리언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18세기 내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여전히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논거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 당시의 사전들을 대표하는 새뮤얼 존슨의 사전(1755)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를 "종교개혁 초기에 로마 교회의 오류에 항거한 사람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세 후기 교회의 상황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중세 후기 세계 내의 오랜 발전과 수많은 소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를 개관하기는 쉽지 않다. 가톨릭 사가(史家)들은 16세기의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이전에 또한 그들과 전혀 무관하게 얼마나 많은 개혁이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반면, 프로테스탄트 사가들은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밝히기 위해 중세 후기 교회를 극히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아, 결국 종교개혁을 타락한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과 같은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 새 시대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15세기에 변화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전기(前期) 종교개혁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개신교의 선구자가 아니었으며, 후에 나타난 종교개혁 때문에 그들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건들은 '전기 종교개혁'적인 사건들이 아니었으며, 그 나름의 정체성(正體性)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로부터 북으로 독일·프랑스·영국 전역에 걸쳐 15세기 교회 내부에 개혁의 발전과 소요가 있었다는 데 대해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보여왔다. 이와 같은 개혁과 소요의 일부는 교황·성직자·수사(修士)·수녀 등의 권력남용을 겨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1484~92 재위)가 바티칸에서 자신의 사생아들의 결혼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해서 그를 증오하였다. 그들은 또한 타락했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를 멸시하였다. 대중은 교황이 엄청난 재원을 끌어들여 사치스러운 건물들을 짓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하였다. 교황에 대한 혐오감은 민족주의 정신이 고개를 들면서 더욱 커졌다. 독일·프랑스·영국 정치에 오랫동안 개입하였던 교황들은 각국의 전제군주들이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자 권력약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군주들은 교황과, 대부분의 경우 지역 교회의 성직자 대표들에 대해 이 새로운 권력을 주장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고개를 든 이때에 중세 로마 가톨릭주의의 맥락 안에 완전히 남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데 참여하였던 새 세대의 신학자들이 나타났다. 오컴의 윌리엄(1349? 죽음)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안에서 종교개혁자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수도회가 대부분 포기했던 청빈의 이상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의 일부로서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이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황권과 제국이 상호 독립적이지만 서로 관계가 있는 정부 혹은 영역으로 보았다. 교회가 이단의 위험에 처할 경우, 평신도들은(제후와 평민 모두)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힘써야 하므로 당면한 개혁에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의 권력과 중세 교회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던 이와 유사한 투쟁에 가담하였다. 위클리프 역시 민족의식을 교회개혁에 이용하였다. 그의 도구는 성서의 도덕률이었다. 위클리프는 이의 번역을 추진하였으며 1380년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모두 이 번역본을 볼 수 있도록 조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의 귀중한 영적 권위는 계속 인정하였다.

보헤미아에서는 프라하대학의 강사가 되었던 얀 후스가 바로 이 대학을 사치에 물든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기지로 삼았다. 그 역시 민족감정을 이용하였으며 교황은 세속의 칼을 사용할 권한이 없다고 논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대담한 고발 때문에 결국 그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도덕적 반발과 민족감정을 결합시킨 경건 이외에,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도 중세 후기 교회에 나타난 또 하나 소요의 징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렌초 발라(1407~57)가 자신의 정교한 역사탐구 기술을 이용하여 교황에게 막대한 권력과 넓은 관할지역을 준 문서들이 상당수가 위조임을 폭로하였다. 독일에서는 요하네스 로이힐린(1455~1522)이 성서에 쓰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연구하였으며, 학자들이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69~1536)가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방대한 지식과 풍자적인 필봉을 통하여 교회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자기 만족에 빠진 중세 후기 교회를 뒤흔든 또 하나의 요인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327/28 죽음)나 요한 타울러(1361 죽음)의 정신을 통해 꽃핀 신비주의였다. 심오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교회의 제의와 관행들 대부분을 도외시하고 하느님에게 직접 접근하고자 했고 또한 그것을 주장한 추종자들을 얻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 헌신주의자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으며, 그들의 저술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고위층 사람들을 공격하였지만, 평민들의 가톨릭주의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헌신이 미신적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희생시킨다고 보았다. 순례자들이 성자의 유골을 모신 사당을 찾고 교구민들이 성자의 유골을 경외하는 관례들은 일종의 이교(異敎)가 그리스도교로 치장하고 침투한 것으로 여겼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평민들로 하여금 사실상 구원을 팔아먹고 있었던 교회에 착취당하도록 만들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는 그러한 개혁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할 수 없었고 그것을 수용할 수도 없었다.

독일·스위스·프랑스의 종교개혁

루터의 역할

루터는 이전의 개혁자들이 교회의 생활을 공격하였다면 자신은 교회의 교의를 공격하였고 이 점이 서로를 구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 이전의 개혁자들은 성직자들의 죄를 공공연히 비난하였지만, 그는 구원에 대한 스콜라 신학의 도식에 환멸을 느꼈다. 스콜라 신학은 사람들이 고백과 고해성사에 의한 사면을 통해 죄를 하나하나 지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할 수도 없고 심지어 인지(認知)할 수도 없음을 발견했으며 그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상처 딱지를 떼어냄으로써 천연두를 치유하려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성 전체가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반면, 교회는 인간이 병들어 있기는 하나 각 개인의 선행으로 악행을 보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가에 대해 지극히 솔직하였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는 심판자 그리스도가 칼로 나무를 베듯이 저주받은 자를 지옥으로 가도록 선고하리라는 생각은 그를 공포로 가득채웠다. 그는 수도원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산 이상의 공덕(功德)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수사가 되었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죄많은 난쟁이와 같은 자신이 하느님의 가차없는 정의와 위엄 앞에 설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없었다. 끊임없이 고해실에 의존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그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의 근본적인 죄성(罪性)을 깨닫게 하였을 뿐이다. 그후 그는 인간을 그토록 약하게 만들어놓은 다음 스스로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인간을 저주하는 신의 선의(善意)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구원은〈시편〉 연구를 통해서 왔다. 그는〈시편〉22장이 특별한 것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시편〉22장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한 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구절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바로 그때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죄많은 인간과 일치시켰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었던 심판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버림받은 그리스도가 되었다. 거기서 하느님의 진노와 하느님의 은혜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였고, 하느님은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표어가 된 신앙의인론(信仰義認論)의 교의였다.

루터는 1517년 모든 성인의 날에 95개조를 내걸었다. 여기서 그는 3가지 주요논점들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재정 오용에 관한 것으로, 그는 만일 교황이 독일 민중의 빈곤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치는 양들의 피와 가죽으로 성 베드로 성당을 짓지 않고 재 속에 그냥 두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교의적 오용이었다. 예를 들면, 교황은 연옥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있더라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가없이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종교적 오용을 공격한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보물은 복음이므로 성인들의 공로를 기리는 보물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인데, 교황권이 루터의 입장을 이단으로 선고하였을 때 루터는 이에 맞서 교황들의 무류성과 공의회들의 결정을 부정하고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선언하였다.

루터는 여러 지역에서 후원을 받았다. 이미 널리 확산되어 있었던 자유주의적인 가톨릭의 복음중심적 개혁은 성직자들의 축첩, 부당한 재물 취득, 성직 겸임(한 사람이 영국·독일·프랑스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몇 개의 성직을 차지하는 행위) 등의 도덕적 오용을 바로잡으려 했고, 성자와 그 유물에 대한 숭배, 종교적 순례 등과 연관된 대중의 미신을 조롱하였다. 개혁운동의 대표자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이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 10세가 교황직의 종교적 측면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루터는 급속히 분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1520년까지 루터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연기하였다. 교황권의 세속화가 루터를 구해준 셈이다. 그리고 루터는 세속화된 교황권을 무너뜨렸다.

1520년 여름 그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선언문 일부를 공표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을 향한 연설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은 루터가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던 황제를 포함한 독일의 지배계급에게 사도의 청빈과 소박함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하자고 호소하였다. 교회 개혁을 위해 시민 권력을 향해 외친 이 호소는 황제들이 부적격한 교황들을 폐위하고 대체시켰던 중세 초기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권이 불과 400년의 연륜을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 재위)의 교회개혁이 교회에게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가장 저열한 사제도 가장 훌륭한 왕보다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을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교회가 행정 영역에 간섭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인 행정장관들을 포함해 모든 신자들이 다 사제라는 교의를 가지고 이에 대처하였다. 평신도는 직업상 교구 사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누구나 사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통치자는 그 자신이 사제이기 때문에 비록 교회가 그를 영적으로 파문하더라도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가들은 교황권을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이 교의에 동의를 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일시에서는 중세기 종파들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사(聖事)를 다루는 또다른 1편의 논문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를 썼다. 이 제목은 성사가 교회에 포로로 잡혀 있음을 시사한다. 루터는 성사의 수효를 7개에서 2개로 줄였다. 7개의 성사는 성세성사(세례)·성체성사(성만찬)·고해성사·견진성사·신품성사·혼인성사·병자성사였다. 루터는 성사를 그리스도가 제정한 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오직 세례와 성만찬만이 엄격하게 성사로 인정되었고 고해는 고백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루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성만찬에서 사제의 기원 때 빵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형된다고 주장하는 화체설(化體說)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실제로 임재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물체와 "함께, 그 안에, 그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곳에 있다면 왜 특별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여 하느님이 말씀의 선포와 성사의 거행을 자기계시의 두 방식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신자들의 눈이 열린다.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교황에게 굴복하기는커녕 교회법 사본 1부와 그의 굴복을 요구한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즉각 파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후견자였던 작센의 제후인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공정한 자기변호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의회로 끌려갔으며 자신의 책들을 부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만일 그가 성사를 다룬 책을 부인하였다면, 다른 논점들은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의 정당성을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책들에서 펼친 교설들 가운데 일부라도 부인하는지, 또 오랫동안 전해온 가톨릭 교설들을 감히 거부한 그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루터는 우쭐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또 악의를 가지지도 않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나는 성서와 명석한 이성에 의해 유죄평결을 받지 않는 한(물론 저는 교황과 공의회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만) 나의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가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어느 것도 철회할 수도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그후 황제는 루터를 황제의 금령 아래 두었고 공식적인 파문칙서가 공표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곧 루터를 은신처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채에서 1년 동안 은신하였다. 이 강요된 은둔 기간에 그는 〈신약성서〉 전체를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토착적이면서 날카롭고 힘찬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의 독일어는 관용구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번역본의 반포만큼 그의 가르침에 대중이 추종하도록 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납득을 하지 못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자들은 루터의 역설에, 자신의 성서 해석이 옳다는 루터의 확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사람이 한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주하는 폭군으로 만드는 예정론을 루터가 수용한 것에 대해서 주춤하였다. 독일 민족운동이 붕괴되자 루터의 측근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개신교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다. 이 개신교의 형태들은 전체적으로 '종교개혁 좌파'나 '급진적 종교개혁'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어떤 용어로도 명확한 분류는 가능하지 않다.

가장 급진적인 스위스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울리히 츠빙글리였다. 그는 음악을 비롯한 여러 감성적 효과들을 종교의식에서 추방하였으며, 주의 만찬을 기념적·선언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칼뱅의 역할

개신교의 또 하나의 형태는 칼뱅주의로, 이는 프랑스인 장 칼뱅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인문학과 법학 교육을 받았으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전향한 결과 프랑스를 떠나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젤에서 27세의 나이로 〈기독교 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초판을 발표하였다. 계속 이 책은 증보되어 수세기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의인(義認 justification)과 성서의 유일 권위에 대해서는 루터와 근본적으로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스위스 급진파와 루터파 견해의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은 보편적이며 부활한 주와의 진정한 합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칼뱅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회중의 시편 찬송을 좋아했는데, 바로 이 점은 프랑스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와 신대륙 장로교의 특징이 되었다. 예술에 관해서는 성인들의 상(像)과 십자가상(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십자가는 허용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칼뱅주의가 종교의식에서 음악과 예술에 소원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된다. 루터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도피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은 반면 칼뱅은 하느님의 심판의 공포를 보다 고요하게 명상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심판은 선택받을 자들에게는 닥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일생 내내 신앙과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그러나 칼뱅은 근사치에 가깝고 입수가능한 시금석들을 갖고 있었다. 칼뱅은 지극히 내적이고 또 무행인 거듭남의 경험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후에 칼뱅주의는 원래 칼뱅의 입장에서 벗어나 선택의 표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했다. 칼뱅에게는 3가지의 시금석이 있었다. 첫째는 신앙고백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츠빙글리와 견해가 같다. 둘째는 엄격하게 훈련된 그리스도교적 품행이며, 이것은 재세례파와 같은 견해이다. 셋째는 성례전에 대한 사랑이다. 유아세례는 반복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가 말한 성례전은 주의 만찬을 의미한다. 칼뱅은 어떤 사람이 이 3가지 시금석을 갖추었다면, 그는 선민(選民)임이 분명하므로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은 주로 헨리 8세의 정치적 의지에 의해 영국에 퍼졌다. 그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곤경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1534년 그 자신이 국교회 수장(首長)이라고 선언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성격과 지위, 로마 가톨릭과의 경쟁이 정치적인 쟁점이었던 300여 년 동안 보다 근본적인 발전은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 일어났다. 청교도 혹은 분리주의자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와 비국교도들은 장로교 및 회중교회 형태의 교회 조직과 예배를 발전시키고 이를 확립하였다.

예배의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한 영국 청교도는 경건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과 동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경건주의는 수많은 종파들과 운동이 생겨나게 했으며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의 종교', 곧 하느님의 은혜를 신자들이 마음으로 느낌으로써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결국 형제단(Unitas Fratrum) 또는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로 불리는 경건주의 집단은 영국 사람 존 웨슬리에게 영감을 주어 감리교 운동을 창시하게 하였다. 이 감리교 운동은 복음주의로 알려진 보다 일반적인 현상의 주요표현이었다.

옥스퍼드의 링컨 칼리지 학생시절에 웨슬리는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생단체를 결성하였고, 선교를 위해 그루지야를 여행했으며, 모라비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경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일생을 영국에서 복음주의적 설교를 하는 데 바쳤다. 그는 분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교구체계는 자유로운 복음설교와 평신도 설교자에 관한 웨슬리의 계획을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1744년 웨슬리는 제1차 설교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감리교협회의 치리기관인 연례 대회가 되었고, 1784년에는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감리교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가 조금은 소홀히 여기는 감정과 양심을 중시하였다. 감리교 운동은 은혜의 교의에 새롭고도 헌신적인 자극을 주었으며, 한때 경건주의에서 나타났으나 17세기 중반 이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을 때 일시적으로 쇠퇴한 바 있던 도덕적 진지함을 중시하는 전통에 합리성을 부여하였다. 1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은 가장 위대한 찬송가 작사가들, 즉 필립 도드리지(1702~51)와 찰스 웨슬리(1707~88)를 낳았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유산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서구사회의 역사와 그 안에서 발전한 개신교 운동의 역사를 변화시켰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규정한 미국 헌법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었던 자유로운 교회가입의 정신, 유럽에서 끊임없이 도래한 이민자들의 종교적 혼합, 영국에서 지배했던 '교회와 왕'의 동맹에 대한 반작용, 계몽주의의 세속 정신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과 더불어 세속의 국가이념은 수많은 유럽 자유주의자들, 특히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반성직주의자들의 이상이 되었다. 미국의 유형은 나폴레옹의 유형보다 유럽 개신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국교화된 개신교 교회에 익숙했던 독일·스칸디나비아·네덜란드·스위스·영국·스코틀랜드의 세속국가들에서는 한동안 국교 폐지의 강력한 요구가 없었다. 이 모든 나라에서 독립교회 혹은 비국교도 교회의 교인들은 19세기 동안 완전한 관용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국가가 아닌 곳에서는 19세기 동안 국가와 국교회 사이의 형식적 연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외가 있다면, 영국국교회가 소수파로 존재하였던 아일랜드(1871)와 웨일스(1914~19)뿐이었다. 그러나 국교회는 최소한 외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로 영국·스코틀랜드·스칸디나비아 등 3국에 남아 있었다.

재통합을 위한 운동

종교개혁 이후 재통합을 향한 가장 중요한 법령이 제정된 것은 19세기초였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국가들은 한 교파 이상을 허용하면서 서서히 만인에 대한 관용 쪽으로 움직여 그들이 훌륭한 시민인 한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한편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특히 새로운 합리주의 학파, 혹은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주의 학파의 지도자들은 개신교도들을 서로 분리시켜온 교리들이 그들이 동의한 진리보다 중요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개신교 팽창의 시대

이런 형태로 세속국가는 개신교(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팽창과 다양성을 지원한 셈이지만 동시에 모든 교회들과 긴급한 새 문제들을 놓고 대결하게 되었다. 헌법으로 국가와 종교를 분리시킨 미국의 유형은 과거의 회중교회 전통과 계몽주의의 이념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 의도가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유형은 보다 역사가 깊은 유럽 교회들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래로 국가와 교회가 동맹관계에 있었던 개신교 국가들에서 그 효과는 이중적으로 나타났다. 첫째, 국가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파들에 대해 더욱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둘째, 국가교회는 모든 형태의 국가 통제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해 더 강력한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루터교가 지배적인 독일에서는 19세기 중반에 독립을 향한 강력한 운동이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의 복음파 운동은 목회자들을 교구에 임명하는 것과 관련하여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안을 왕실과 정부가 거부하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스코틀랜드 교회는 토머스 찰머(1780~1847)의 지도 아래 국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독립교회를 창설하였다(1843). 이 두 교단은(1929년 최종적으로 재통합될 때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속 유지되었다. 스위스에서는 개혁파 신학자 알렉상드르로돌프 비네(1797~1847)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위해서 압력을 가했으며 1845년 자유교회(Free Church)를 창설하였다.

세계에서 미국 개신교 영향력의 향상

16세기 이래 개신교 정치권력의 두 중심은 독일과 영국이었다.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독일이 통일되고 영국이 세계적인 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19세기에는 개신교의 정치적 역량이 종교개혁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했다. 그러나 1860년경 제3의 세력이 미국에서 출현하였다. 1820년 이후 미국의 개척 상황은 다양한 개신교 세력을 확장시켰고, 1832년 부흥운동집단들로부터 형성된 그리스도의 제자회와 같은 교파들이 등장하였다. 이와 때를 맞추어 개신교 교파들은 미국의 경계를 넘어서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미국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로마 가톨릭교도였으며, 따라서 한동안 미국에서 가장 큰 단일 교파는 로마 가톨릭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지도력과 문화의 기조는 앵글로색슨적·자유주의적·개신교적인 것으로 유지되었다. 대체로 루터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독일인들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미국 루터교가 확장되었으며 마침내 루터교의 본산지인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닌, 루터교적 생활과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터교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유럽의 경건주의 집단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미국의 루터파 교회는 독일 교회보다 더 보수적인 신학과 계율을 갖게 되었다. 미국 그리스도교의 부흥운동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으며, 개인적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개념이 미국적인 생활방식에 깊이 침투하게 하였다.

선교의 확산

독일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세력, 미국 세력의 증가, 유럽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오랫동안의 평화 등으로 인해 개신교 교회들은 가장 위대한 팽창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새로 생겨나는 도시들에서 개신교 교회들은 전례없는 규모로 사회봉사를 전개하였다. 병원, 고아원, 금주운동, 노인보호, 젊은이들과 성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확대, 교회학교, 도시 빈민지역에서 청소년 및 성인 클럽 운영, 19세기 새로운 도시생활이 필요로 하는 무수한 조직체들의 설립이 그것이다. 개신교 교회들은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 개신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함으로써 남아프리카에서는 반투족이 주로 개신교 교인들의 동맹체가 되었다. 인도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신생 인도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힘을 끊임없이 증가시켰다. 중국의 그리스도교는 항구도시와 17세기 로마 가톨릭 선교의 잔류자들에게 국한되어 있었으나, 영국이나 미국의 재정 지원과 중국내지선교회 설립의 재정 지원을 받았던 다양한 복음파 집단들은 중국 내지(內地) 깊숙히 들어가 회중을 만들었다. 일본은 1630년 이래 그리스도교에 대해 폐쇄적이었으나, 1859년 재개방 이후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일본 그리스도 교회들을 창설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중앙·남아메리카에 개신교를 소개하였다. 주요한 개신교 교파들(루터교·장로교·성공회·회중교회·침례교·감리교)은 모두 세계적 규모의 단체로 발전하였으며, 자신들의 조직체를 여러 나라의 극히 새로운 요구들을 충족시키도록 조정하는 데 상당한 긴장을 겪었다.

19세기 개신교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

19세기(그리고 그 이후)에 교회 비판은 2가지였다. 하나는 사회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知的)인 것이다. 급속한 도시성장과 공업발전은 종교생활과 소원한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였고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특히 유럽에서), 교회는 노동계급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사회질서의 보루라고 주장하였다. 초기 형태의 사회주의의 일부는 무신론적이거나 최소한 이신론적이었으며, 교권과 왕권 사이의 동맹을 의심하는 만큼 독립교회들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1818~83)와 같은 사회·경제 사상가들은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며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만족해서는 안되는 데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만족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한 응답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그리스도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하였다. 그들은(적어도 이론적으로) 노동자들이 사회적·경제적 정의를 누릴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노동자들을 위해 더 많은 정의를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들을 향해 양심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견해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관점과 이념은 정치적·신학적인 면에서 서로 크게 달랐다. 베를린의 왕실 설교자였던 아돌프 슈퇴커(1835~1909)는 반유대인적인 급진적 정치가였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소설가였던 찰스 킹슬리(1819~75)는 노동계급을 깊이 동정하고 이해했던 온정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인물은 프레더릭 데니슨 모리스(1805~72)였다. 그는 1853년 추방당할 때까지 런던 킹스 칼리지의 신학자였으며, 그후 런던의 목회자로 있다가, 말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 도덕철학 교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소수의 성공회 신학자들의 지적인 지도력 못지않게 노동자들의 종교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한 것은 개신교급진파, 특히 침례교와 원시감리교였다. 어떤 경우에는 이들의 노력으로 사회주의 정당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 실제로 사회주의 정당에 표를 던지지 않더라도 복지국가로 이끌어가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설득하였고,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더 많이 의식하도록 교육하였다. 미국에서 사회복음은 19세기말에 교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회복음의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는 침례교회 월터 라우셴부쉬(1861~1918)였다.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고 자신의 이름에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많은 정당들이 나타난 데 반해,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모든 정당들이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세속적임을 표방한 정당들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세기의 개신교

개신교의 흐름

1914~18년의 전쟁은 유럽이 자신의 문명에 대해 품고 있었던 이미 쇠잔해진 자기만족의 환상을 깨뜨렸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교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약화시켰다.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한 정부가 1917년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그리스도 교권 세계에는 새로운 부정적 압력이 가해졌으며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노동계급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개신교 교회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 하였다.

1933~45년 동안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은 유럽을 볼셰비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 때문에 나치는 초기에 많은 독일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멸이 그 뒤를 이었다. 1933년 가을부터 교회문제(특히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교회에서 직책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아리안 조항)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고자 한 교인들과 마르틴 니묄러의 지도 아래서 교회문제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지 않으려던 교인들 사이에 당파적 분열이 일어났다. 국가의 보조를 받는 남부(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루터교 교회들의 지원에 힘입어 니묄러 그룹은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형성할 수 있었다. 고백교회가 1934년 5~6월에 바르멘 노회(老會)를 소집하면서 교단의 분열은 분명해졌다. 한동안 고백교회는 독일 전역에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교회성 장관 한스 케를 휘하에 공리공론적인 성격이 적었던 교회 정부를 수립하자 고백교회는 이 정부에 협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교회 정부는 나치 정부가 강제로 세운 것이므로 협력할 수 없다는 니묄러파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바트 왼하우젠 노회(1936. 2)에서 고백교회는 다시 분열되었으며 다시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그후 특히 극단적 나치주의자들이 히틀러 정권의 완전한 통제를 확고히 하였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교회들은 점증하는 압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말기에 일부지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주교 테오필 부름은 나치 정권의 비인간적 행위에 저항한 지도자였다. 하인리히 그뤼버 목사는 체포될 때까지 유대인들을 피난시키고 보호하는 뷔로 그뤼버(Büro Grüber)를 운영하였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 특히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군대는 동유럽을 장악하였으며 독일은 분단되었고 이 지역의 모든 교회들은 억압을 받았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발트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에서 소개(疏開)되거나 추방당했다. 루터교 공동체들은 그곳에 남아 있었으나 스탈린 통치하에서 특히 심한 박해를 받았다.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의 루터교도들과 헝가리의 개혁파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덜 받았지만, 그 수효는 크게 줄었다. 신학자 요제프 흐로마트카의 지도를 받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개신교도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 개신교도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더 많은 대화를 지속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신교에 가장 큰 손실은 독일 분단이었다.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예전에 독일어권이었고 대부분 루터교가 성했던 넓은 지역이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독일인 약 800만 명이 추방당했다. 1945년에 구성된 동독(독일민주공화국)정부는 비텐베르크와 개신교의 고향이 되는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였다. 동독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이 대부분 개신교도들(70%)인 주민들을 통치한 유일한 국가였다. 한동안 루터 교회는 동독과 서독 사이의 주요연결고리였다. 루터 교회의 연례모임인 '교회의 날'(Kirchentag)은 잃어버린 독일 통일의 유일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으로써 동독 교회들은 고립되었다. 자금·교육·교회건축 등과 관련된 정부의 압력, 민족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형태의 청년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개신교도들은 용감하게 활동하였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1967년 10월 31일 종교개혁 450주년 기념식은 개신교 교회가 수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1917년의 혁명 이전만 해도 철저한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는 혁명 이후 40년 동안 침례교 공동체들이 성장하였다. 침례교 조직의 유연성과 단순성은 대처하기 어려운 법적 조건 아래서도 적절히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침례교 공동체들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몇 년 동안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60년 이후 다시 예전과 같은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물질적 손실과 1947년 이후 영국의 종말은 과거 영국이 지배하던 지역들의 개신교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더 이상 해외 교회들에 과거와 똑같은 규모로 자금과 인적 자원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교회 정부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에서는 영국의 지위가 변화됨으로써 그동안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던 지도력의 변화과정이 촉진되었다. 부족한 재정 및 인력자원의 일부는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보충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더 이상 유럽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과거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비롯된 조급함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지도되는 이른바 젊은 교회들이 세계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점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기술발전 시대의 세속화 추세는 낡은 유럽 교회들을 공격하였으며, 젊은 교회들이 목회활동을 펼치는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개신교, 이를테면 서남아프리카나 나미비아의 루터교와 남아프리카의 성공회를 비롯해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오순절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손실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지역의 개종자와 인구 성장은 개신교 교회의 범위와 기질을 변화시켰고 그 규모도 증가하였다.

개신교의 종말이 예견되었던 세계 여러 지역들에서도 개신교는 놀랍게도 살아 남아 다시 등장하였다. 1948~49년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결정적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1951년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유럽인 선교사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중국 교회는 외부 지원 없이 홀로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 교회는 가혹한 억압에 시달렸으며,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이른바 문화혁명 시기에 더 심했다. 중국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수 없었고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기와 1980년대에 중국이 서방을 향해 부분적으로 다시 개방하고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하는 신중한 조치를 취하면서 중국 개신교도들과 서방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개신교도들과 그밖의 교파에 속한 그리스도교인들이 과거 20년 동안 가혹한 억압과 박해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계 교회들 가운데서 생동적인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형태의 개신교

20세기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운동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토대도 부분적으로 보수반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물론 이 운동들에 가담한 모든 구성원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진보적이고 왕성한 신앙표현은 보다 급진적인 외양을 띠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가운데 3가지 주요운동들은 보통 오순절운동·근본주의·복음주의라고 일컬어진다. 오순절운동은 개신교가 역사적 본거지인 유럽을 넘어서서 확산하는 데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순절운동

이 운동은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미국에서 웨슬리파 성결운동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901년 캔자스의 토피카와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 운동을 특징짓는 다양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운동의 핵심은 '방언'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억제없이 하는 말의 형태이다. 그들이 말하거나 노래하는 음절들은 남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첫 오순절 때의 예수의 제자들처럼 인식가능한 외국어로 말한다고 주장했고 거기서 이 운동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오순절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물의 세례를 넘어서는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방언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기도 하며 예언도 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다른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적적인 치유가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치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오순절운동은 '성서의 띠'인 남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농촌의 가난한 백인들이나 도시의 흑인들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하느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등 급속하게 성장한 교파들을 통하여 가장 가시적인 형태의 개신교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였으며, 점차 중간계층에게로 수용되었다. 1960년 이후 오순절운동은 성공회·루터교·장로교와 같은 그리스도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교회로 확산되었으며, 이 교회들에서 오순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운동을 '은사운동'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오순절운동은 카리브 연안, 남아메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지역에서는 수많은 예언 운동들이 분출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인들은 감성적 형태의 예배와 치유활동을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경우 오순절운동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이 지역국가들에서 민중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였다. 1세기 전 선교사들이 이룬 토대 위에 집을 지은 오순절운동가들은 일부 해방운동들과는 달리 반미적이거나 반유럽적인 경우가 거의 없었고 '피안'(彼岸)을 강조하여 정치를 회피하거나 보수적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정권들과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

2번째 주요운동인 근본주의는 19세기 후반 '전천년왕국설'(前千年王國說)과 성서무류성을 다소 합리주의적으로 변호한 사상을 서로 결합시켰다. 이 운동의 이름은 1910~15년 미국에서 발간된 〈근본주의자들〉이라는 소논문에서 따온 것이다. 근본주의는 미국에 있던 교파간의 분쟁 때 형식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919~20년에 공식인정을 받았다.

근본주의가 발흥하게 된 가장 분명한 원인은 성서의 고등 비평과 다윈의 진화론이 확산되어 보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들에 수용된 일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이 두 운동이 침례교와 장로교 북부 지회의 신학교와 사무국, 선교부, 설교단들을 전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근본주의의 대가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설을 부인하고〈창세기〉의 기사가 과학적이라고 옹호하였던 1925년 스코프스 재판은 침례교와 장로교 간의 교파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와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투쟁에서는 패배하였지만 그들의 성서학교와 라디오 프로그램, 출판사업은 살아 남았다. 1940년대 초반에 그들은 재결집하여 서로 경쟁력 있는 몇 개의 근본주의 조직체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체들은 추종자들을 얻었고, 남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사기도 드높아지면서 분명한 자기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수동적이던 정치적 태도를 버리고 개방적 참여로 특히 1980년과 1984년에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유세를 지원하여 방향을 바꾸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적 복음전도자 제리 폴웰이 창설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와 같은 집단들은 텔레비전 전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적 역량을 모아 낙태반대,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을 지원했으며, 이스라엘의 이상과 강력한 국방예산을 지지하였다.

복음주의

수십 년 동안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인물들의 목회와 〈크리스천 투데이〉 등의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이 집단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예수의 육체부활 등의 주요교리에서는 근본주의와 일치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서 무류설을 주장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은 점차 그것이 과연 성서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는 최선의 방법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근본주의가 강조하는 전천년왕국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다.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보다 온건했다. 그들은 그 본질상으로는 고전적인 형태의 근본주의자들과 같았지만 그 스타일은 달랐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에 대해 너무나도 부정적이고, 종파화되었으며 무례하고 남을 몰아세우며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942년 복음주의자들이 전국복음주의협의회를 세웠을 때, 그들은 그들이 중도파와 자유주의자들을 공격했던 것만큼 근본주의 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좋은 태도를 지닌 근본주의자들로 보기보다는 19세기 개신교의 주류를 유지하는 사람들로 보기를 더 좋아했다.

이를 위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점차 문화·사회·정치 세계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성서학교를 짓는 대신 자유로운 인문대학을 지원하였고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심지어 급진적인 정치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으며, 보수적인 개신교가 군국주의 및 자유 분방한 자본주의와 스스로를 지나치게 일치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또한 미국과 그밖의 여러 나라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경향을 띠고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톨릭 지도자들과 주류 개신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강단에 서는 것을 환영하였으며, 근본주의자들이 기피했던 여러 종파의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운동가들이 제3세계에서 동반자를 구했다면, 복음주의자들은 국제 운동들을 형성하고 많은 나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대회를 개최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들 자신의 교회에 칩거하는 데 반해, 수백만 복음주의자들은 주류를 이루는 교파들과 지속적인 연관을 맺으며 점차 완전한 주류를 이루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독특한 교리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하는 열정을 생동적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신교 내의 신학운동

개신교 신학 전통 안에는 모종의 반작용도 관찰된다. 이러한 반동은 부분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자유주의에 대해 전반적인 의문이 제기된 데서 비롯되었으며, 특히 후대의 발전과정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사회관을 정립하고자 했던 나치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인간이 스스로 경험하고 있다고 믿는 한계로 축소시키고, 객관적인 진리를 주관적인 감정으로 환원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가장 맹렬히 비판한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 운동의 최초 회원들, 전통 복음파, 성서의 무류한 말씀을 고수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근본주의자들로 지칭된 많은 사람 등을 포함한 모든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똑같은 이유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자유주의 진영 안에서도 반작용이 일어났다. 1918년부터 바젤의 카를 바르트와 취리히의 에밀 브루너는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모든 신학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지도하였다. 신정통주의라고 하는 이 신학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사유(思惟)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바르트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성서의 참된 지상권(至上權)을 재주창하고 종교개혁의 진정한 원리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에서 라인홀드 니부어는 사회와 인간에게 적용된 자유주의 그리스도교 철학만큼 이에 반대하는 것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옛 신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독일 마르부르크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미친 영향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는 〈신약성서〉의 핵심 진리를 드러내고 신앙에 대한 〈신약성서〉의 의의를 보다 완벽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를 시도하였다.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한 파울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들은 유럽의 사태 발전을 미국인들에게 해석해주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발언한 위대한 신학자들의 세대를 넘어서 지속되지 못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개신교 신학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비록 위르겐 몰트만 같은 몇몇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의 요소들을 취하여 이들을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혹은 '해방신학 ' 등 다양한 운동과 결합시키기는 하였지만, 이제 유럽은 새로운 신학운동의 주도권을 잃었고, 하느님이 억눌린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는 사실의 증언을 강조하는 제3세계 신학자들과 성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미국의 여성·흑인 신학자들은 과거의 강단신학에 내장되어 있었던 가부장주의·엘리트주의·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해방신학을 채택하고 있는 운동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운동들은 개신교 사상을 특수화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한 접근법은 문화적 상황들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는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신학, 여성신학·흑인신학을 등장시켰다. 이들 신학에서는 성서해석이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집단이 갖고 있는 '전이해'(preunderstanding)에 의해 착색된다고 생각되었다. 또 하나의 접근법은 '이야기 신학'에 초점을 맞추어 추상적인 신학에서 사람 중심의 구체적 이해로 나아가려는 노력이었다. 오순절운동과 근본주의의 발흥은 개신교 전반에 걸쳐 성령론과 종말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켰다.

에큐메니컬 운동

이 운동은(비록 동방정교회가 곧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본래 개신교의 운동이었으며, 초기에는 개신교 사고가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주로 ① 세계 전역에 걸쳐 이루어진 교통수단의 발전과 인구이동으로 여러 교파들이 전례없이 뒤섞이게 된 점, ② 전통적인 교파들의 세계적 확산, ③ 미국 내 종교의 다양성과 이와 같은 다양성에서 비롯된 문제점, ④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교회들과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사가 아닌 유럽 역사의 사건에서 비롯된 장벽들에 대한 경멸 등에서 비롯되었다. 선교활동들은 항상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의 감리교 선교지도자 존 R. 모트는 선교여행을 통해 다양하고 전반적인 노력들을 단일한 조직으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선교를 향한 열정과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한 소망을 대표한 사람이었다. 1910년 에든버러 대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효시인 세계선교대회였다. 이 대회로부터 구체적인 생활태도와 사업문제를 다루는 협의회(스웨덴 루터교의 대주교 나단 죄더블롬이 지도)와,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적 차이를 호의적인 태도로 검토하는 신앙과 직제(職制) 협의회가 발기되었다. 초창기에 로마 가톨릭은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고 동방정교회도 서방 디아스포라 유배 이후에야 참여하였다. 나치 정권은 독일인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를 계속 허용하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새로운 분위기가 나타났고 194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식 결성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대부분의 자금과 상당부분의 추진력을 미국 사람들에게 의존했으나 본부는 제네바에 두었고 초대 총무인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행정가 W.A. 비서트 호프트의 지도 아래 이 운동이 성공하려면 분열된 유럽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함을 결코 잊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하도록 이끌었다. 1958년 요한네스 23세가 교황이 된 후 마침내 로마 가톨릭교도들도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규정들이 대부분 개신교도들에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규정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었으며, 16세기에 쌓여진 가장 높은 장벽을 낮출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던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신교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교의·예배·조직 : 종교 개혁자들과 그 후계자들의 공통된 원리와 관행

신앙의인(信仰義認)

개신교 지도자들은'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즉 신앙의인)는 개신교의 가르침이 개신교를 당시 로마 가톨릭과 구별해준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은 개신교 역사 전반에 걸쳐서 개신교의 핵심이 되어왔다. 교단들마다 약간의 변용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신앙의 핵심은 쉽게 분간할 수 있다.

개혁자들 눈에 새로운 상황은 자유의 상황이었다. 가톨릭교도들은 스스로 충분한 공로를 쌓고 선행을 하였는지, 또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회를 기쁘게 했는지를 두려워한 데 반해, 개혁자들의 견해는 신자들로 하여금 이 귀찮은 질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 죄와 죽음,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되었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였다거나 최소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지대한 노력을 했다는 믿음과 짝을 이루는 교만, 곧 사람을 노예화하는 교만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개혁자들에게 그들의 적인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항상 지적하는 심각한 문제를 남겨주었다. 즉, 의인(義認)과 자유에 대해 그렇게 가르친다면 선행을 강조하는 성서의 가르침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공관복음서(마태·마가·루가)에 따르면, 예수 자신은 언제나 사람들을 더 선하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바울로 조차도 이러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운동은 인간 존재를 공로와 선행의 필요성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선행에 대한 관심을 경솔히 취급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개신교 문헌들은 많다. 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사실상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선행은 하느님의 위로나 구원의 위로를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용서받은 마음에서 나오고 항상 의롭다 인정받는 사람의 삶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존재가 걸어가는 구원의 길이나 하느님에게 이르는 일종의 장애물 또는 도로 표시로 이용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모자람을 재고 그것을 심판한다. 복음을 통해 활동하는 은혜로운 하느님은 인간 존재를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을 주장하면서 평신도와 성직자가 평등함을 인정했지만, 그들이 평신도의 역할을 명확히 밝히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평신도들은 공중 예배에서 설교자가 될 수 없으며, 성사의 집행도 성직자들의 수중에 맡겨져 있다. 설교자가 성서해석에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함으로써 개신교도들은 평신도들의 완전한 참여를 희생시키고 목회자 안수를 받으려면 일정과목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정했다. 그렇지만 개신교도들의 이러한 견해는 중세 가톨릭과 비교해볼 때 평신도들의 신학적인 지위와 실제적인 지위를 크게 드높였다.

말씀의 권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가르침과 모든 신자가 곧 사제라는 가르침은 권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들은 누구도 은혜의 체계 안에서 위계질서를 독점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권위적인 체계가 무너짐으로써 개신교에는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개신교는 이를 서둘러 채워야 했다. 개신교 운동의 다양성과 다원주의는 여기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곧 무정부상태나 훈련부재를 선호했다는 뜻은 아니다. 개혁자들은 즉각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에서 행사되어야 할 권위의 범위를 정하는 일과 교회구축을 시작했다. 그들은 최종적인 권위가 하느님의 말씀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성서와 나란히 두는 경향이 있었다. 개신교 운동을 위해 권위의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필요는 성서에 관한 이해를 높였으며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재발견은 개신교 운동의 일차적인 동인(動因)으로 간주된다.

교회의 계속적인 개혁

개신교 교회는 교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규범이 되는 성서에 의해 심판받고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에 근거하며 교회 교부들과 공의회들을 비판적으로 긍정하고 전통적인 교회법의 법전들을 거부한다는 점, 그리고 계속 개혁의 원리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주의와는 크게 달랐다.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일단 종교개혁을 완수한 다음에는 그들의 지위와 규정을 위태롭게 하는 종교개혁의 확산을 거부하였지만, 거의 모든 개신교도들은,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고 언제나 계속적인 개혁을 필요로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생각을 강조해왔다.

개신교가 근대세계에 미친 영향

민족주의에 미친 영향

마침내 개신교는 북서 유럽과 영국, 아메리카 대륙 영어권에서 주류가 되는 신조가 되었다. 19세기의 거대한 개신교 선교운동을 통하여 개신교는 이 지역들로부터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개신교는 소수파로 존재했던 로마 가톨릭과 만났으며 이와 동시에 가톨릭이 주류인 남아메리카에도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개신교를 북대서양 국가들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국가들에서는 '독립'교회들이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이후의 개신교 자유교회들이 수세기 동안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가 근대 민족주의에 공헌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는 이미 종교개혁 시대에 해체되고 있다가 1806년에 최종적으로 붕괴된 신성 로마 제국의 종식을 주도함으로써 민족주의 세력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낡은 그리스도교 세계(corpus Christianum)는 생존할 수 없었고 개신교의 존재는 하나의 수장(首長) 아래 있는 국제적이고 초지역적인 통합된 그리스도교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문맹을 퇴치하고 각국어에 대한 존중을 확산시키고자 했던 개신교는 라틴어를 매개로 한 낡은 그리스도교의 언어적 유대를 없애고 나라마다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급진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현존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개신교도들은 자기의식에 도달한 각각의 새로운 국가들에게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제공할 때가 많았는데, 프로이센과 미국의 경우가 그 예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관심

20세기에는 지난 3세기 반의 세월에서보다 합의를 이루어내려는 노력이 많았다. 오늘날 에큐매니컬 운동은 철저하게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가톨릭을 망라한 외양을 띠고 있지만, 처음에는 교회의 선교가 경쟁과 분열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개신교 토대 위에서 탄생하였다. 널리 알려진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폭풍우에 휩싸인 양떼처럼 포위당하고 서로 엉켜 있었던 그들은 서로간의 교제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현대의 교통 및 통신 기술은 세계의 거리를 좁혔고 에큐메니컬 운동의 연합을 가능하게 했다. 신학의 재발견은 에큐메니컬 시대에 공동선언과 때로는 공동행동을 위해 개신교의 열정을 창출하여야한다는 새로운 인식과 융합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파적인 노선과 초교파적인 노선 모두에서 교파 연합과 공의회적 조직을 결성하게 하였다.

그동안 교황 요한네스 23세(1881~1963)의 경우가 예시하는 바와 같은 로마 가톨릭의 개방은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들 사이에 친교와 일치를 가져왔다. 16세기의 적대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은 채 갈등관계에 있던 두 파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그들의 경계를 넘어서서 만남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의 가톨릭 성서 주석가들은 개신교가 은혜와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또한 개신교는 교회의 구성요소가 상호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가톨릭의 견해를 새로운 각도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개신교도들은 성서가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전통은 성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여 전통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에 새삼스러운 공감을 표하고 있다. 개신교도들과 동방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은 대체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세계교회협의회 같은 기구와 조직체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하반기에 이르러 개신교의 상속자들, 특히 철학적 신학자인 파울 틸리히는 '개신교 시대의 종언' 혹은 '개신교 이후' 시대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물론 그들 모두가 개신교의 일반적인 증언에 대한 신념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틸리히는 예언자적 비판의 '개신교 원리'가 교회생활을 참되게 표현하는 모든 것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며 세속의 참된 가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상가들은 개신교가 그 역사적 뿌리를 두는 유럽에서 문화를 지배하는 경향은 쇠퇴하고 있다고 믿었다.

개신교 신봉자들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줄곧, 그리고 계몽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그들의 사상 세계가 여러 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공업주의와 도시화가 발흥하였던 19세기에, 급변하는 세계는 전통적인 개신교에 의해 형성되었던 사회와 교회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편, 개신교의 영토에서 성장한 특정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개신교의 근본적인 신념들에 도전하였으며, 그중 일부는 스스로 '신을 죽인 사람들'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3명의 예를 들어 본다면, 경제이론가 카를 마르크스, 진화론자 찰스 다윈, 철학적 허무주의자 프리드리히 니체 등이다. 개신교 경험에 정통했던 이들은 이를 무기로 사용하여 그들의 견해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개신교는 탈식민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세계에서 '외국 선교'에 근거한 팽창을 도모할 수 있는가에 대해 불확실성에 빠져들었다. 비(非)그리스도교 종교들의 가치에 대한 현대적 평가로 인해 많은 개신교도들은 팽창 위주의 개신교로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을 멸절시키거나 배제하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이들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전체주의 세력들 특히 나치 독일은 개신교가 강조하는 내용 일부를 흡수하여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이를 변화시켰거나 억압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하였던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현대생활의 매력, 세속화, 신앙의 위기는 개신교를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만들었고 교인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현상은 19세기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나타났으며, 그 다음에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영국에서 나타났다. 그결과 스칸디나비아와 영국에서처럼 인구의 절대 다수가 개신교 공교회의 세례 교인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 극소수가 예배에 참석하거나 교회의 계율과 명령에 응답을 보일 뿐이었다. 교회 출석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지를 개신교의 재산으로 보는 사람들도 개신교의 교의가 더이상 신앙을 규정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과 연합하고 있다. 개신교의 분열은 더이상 서구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않으며, 개신교시대의 종언을 공표할 뿐이다.

한편 개신교는 서구 문화의 많은 요소들과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개신교의 영향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개신교는 주기적으로 밀물과 썰물, 재생과 쇠퇴를 경험해왔으며 지금은 보다 오랜 기간의 쇠퇴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서구적인 지방주의를 무심코 드러내 전반적인 흐름을 잘못 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개신교의 쇠퇴를 예견하게 하는 모든 현상에도 불구하고 다음 2가지 긍정적인 세력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형태의 개신교 세력이다. 오순절운동·복음주의·근본주의가 그것이다. 이 운동들의 선조들은 세상을 부정하고 종파적이며 은둔적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주변문화를 나름대로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형태로 일을 하고 있고 또 일을 시작하고 있다.

개신교의 쇠퇴를 보완하는 또 하나의 세력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개신교의 성장이다. 이 새로운 개신교 교회들의 일부는 주로 선교사들이 소개한 형태와 거의 무관한 토착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개신교의 판에 박힌 서구적 토대를 훨씬 뛰어넘는 증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J. C. Godbey 글 | 姜元敦 참조집필

한국의 개신교

한국 개신교는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수용되었다. 우선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K.F.A.귀츨라프, A. 윌리엄슨, R.J. 토머스와 같은 선교사들이 개신교의 한국선교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들의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성서의 번역과 배포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873년 개신교의 한국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에 왔던 J. 로스는 이응찬(李應贊)과 서상륜(徐相崙) 등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번역된 것을 시작으로 〈예수강셰일쳔 십칠년〉이 번역되었고, 1887에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인 〈예수셩교젼셔〉가 발간되었다. 이들 성서 번역자를 권서인(勸書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활동과 한글 성서를 통한 한국인들의 개신교 수용으로 인하여 1884년 봄에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松川:지금의 소래)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가고 있었다. 성서의 한글 번역에 공헌한 또다른 사람은 개화파 지식인인 이수정(李樹廷)이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883년 입교한 후, 성서 번역을 시작하여 1885년 요코하마[橫浜]에서 〈마가의 전복음셔언〉을 출간하였다. 바로 이〈마가의 복음서〉를 가지고 H.G. 언더우드는 H.G.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한국에 온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여 각기 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장로교의 경우 미국의 남장로회와 북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등 4개 선교부에서, 감리교의 경우 미국의 남감리회와 북감리회의 2개 선교부에서, 선교활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침례교는1889년, 성공회는 1891년, 안식교회는 1904년, 성결교는 1907년,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정책은 각각의 선교부 특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감리교는 주로 교육과 부녀사업에 치중하였으며, 장로교는 교회의 토착과 자립원칙의 선교정책을 수행했다. 장로교의 선교정책은 '네비어스 선교정책'(Nevius Method)으로 알려졌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자진전도(自進傳道 Self-Propagation)·자력운영(自力運營 Self-Support)·자주치리(自主治理 Self-Government) 등의 3대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구세군은 자선과 사회사업에 치중하였고, 침례교는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에 관심을 쏟았다. 교파에 따른 독특한 선교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몇 가지 공통점을 보이기도 하였다. 개신교 선교부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앞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에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한국의 개신교는 선교활동의 초기 단계에서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개신교가 천주교(天主敎)와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 천주교가 전교 초기부터 심한 교난(敎難)을 겪었음을 감안하여 처음부터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선교사들이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성장에 끼친 공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기록 속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언급되고 있는 수많은 전도인·권서인·전도부인 등 초기 개척자들의 영향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초기 개척자들에 의하여 그 기틀이 형성되어간 초기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과제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목표를 가지고 입교하였으며,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또한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과 1896년 9월 고종탄신일 축하예배 등을 통하여 왕실에 대한 충성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제는 한국 개신교를 침략의 걸림돌로 지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탄압을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국가의 비운에 직면한 한국 개신교는 물리적인 힘의 저항보다는 신앙적 차원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같은 해 1월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행한 사경회(査經會) 기간 중 절정에 달한 이 운동은 1903년 이후 계속되어 온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운동은 원산의 전계은(全啓殷), 정춘수(鄭春洙), R.A. 하디,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등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한국 개신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한국 개신교가 신앙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둘째, 한국 개신교의 공동체의식이 구체화되었다. 특히 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 간의 이해가 크게 증진되었다. 셋째, 부흥사경회를 통해 개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은 한국 개신교와 교인의 도덕성 회복에 기여하였다. 마지막으로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성서공부와 기도가 더욱 고양되어 이와 같은 운동은 교세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905년에는 321개였던 교회가 1907년에는 642개로 늘어났으며, 9,761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 또한 1만 8,964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대부흥운동이 끼친 부정적인 영향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운동이 끼친 가장 큰 역기능으로는 한국 개신교의 비정치화(非政治化)와 몰역사성의 문제로 당시 한민족의 아픔을 종교적 차원에서 희석시켰다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된 한국 개신교의 비정치화 경향과는 달리 일부 한국 개신교인들은 초기부터 계속되어온 민족운동의 전통을 지속시켜 나갔다. 이 시기의 한국 개신교의 민족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105인 사건'이었는데 이로 인해 윤치호(尹致昊)·이승훈(李昇薰) 등 개신교계와 신민회(新民會) 인사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시적으로 교세가 위축되기도 했지만, 많은 일반 개신교인이 고초를 겪으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교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개신교인의 민족의식 고양은 때로 무장투쟁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안중근(安重根)·이재명(李在明)·장인환(張仁煥)·안명근(安明根)·이동휘(李東輝)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개신교의 독립운동은 중국, 러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해외에서도 전개되었다.

한편 3·1운동을 계기로 다른 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3·1운동에 있어서 한국의 종교계가 차지했던 비중은 상당했다. 그중에서도 천도교와 그리스도교가 보다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 헌병대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말까지의 3·1운동 관계 피검자 1만 9,523명 가운데 2,297명이 천도교인이었으며. 3,426명이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교인의 참여 비율이 높았던 만큼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 또한 극심했다. 일제의 물리적 탄압이 교회의 양적인 피해와 기능의 마비를 가져왔다면, 일제의 회유책은 교회의 질적인 변화와 정신적 피해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3·1운동 이후 한국 개신교의 신앙형태는 크게 2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김익두(金益斗)·길선주·이용도(李龍道)와 같은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된 초월적·신비주의적 신앙형태와,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는 민족계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역량을 강화한다는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형태가 그것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사회참여 전통은 사회와 농촌운동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25년 장감연합협의회(長監聯合協議會)는 협의회 안에 사회부를 설치하여 사회운동에 착수했다. 농촌운동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29년 이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YMCA·YWCA의 연합으로 27개 지역에 농촌강습소가 개설되었다. 이밖에도 1923년 결성된 기독교여자절제회는 금주단연운동(禁酒斷煙運動)과 폐창운동(廢娼運動)을 벌였으며, 구세군은 자선사업을 벌였다. 1920년대 이후의 사회적 변화는 한국 개신교의 연합운동 필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의 사회대응 다변화를 가져와 교회 안에서 분파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교신(金敎臣)을 중심으로 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이용도를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 최태용(崔泰瑢)을 중심으로 한 복음교회 등이었다.

3·1운동 직후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표면적으로나마 완화된 정책을 보였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강압적 통치정책으로 선회했다. 일제의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은 한국 개신교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신사참배의 강요였다. 일제의 강압에 굴복한 한국 개신교는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의 형식이라는 명분 아래 각 교단별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교단적 차원의 이러한 굴복과는 달리 몇몇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벌였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한 상징적 인물로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있었다. 그가 시무한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결과 신학교가 폐쇄되고 수많은 교인들이 투옥되었으며, 50여 명의 교역자들이 순교했다. 일제통치 말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1942년 언더우드를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당했으며, 조선예수연합공의회가 해산당했다. 1940년에는 침례교가, 1943년에는 안식교와 성결교가 폐쇄되는 등 한국 개신교는 실질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마침내 한국 개신교는 1945년 7월 19일 일제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8·15해방 직후 한국 개신교는 일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교회의 재건을 도모했다.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은 6·25전쟁으로 다시금 위기에 직면했다. 민족분열의 위기상황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교회분열이라는 한계를 노출했다. 6·25전쟁중인 1951년 장로교의 고려파(高麗派)가, 1953년에는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감리교는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감독 선출을 둘러싸고 총리원파와 호헌파가 분립했다. 이와 같은 교회의 분열은 전통교회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켜 소종파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박태선(朴泰善)이 주도한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로 개칭)와 문선명(文善明)이 주도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 나운몽(羅運夢)의 용문산기도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의 분열과 소종파운동,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직면한 한국 개신교는 심각한 자기반성을 해야 했다. 한국 개신교는 분열극복의 신학을 정립하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벌였다. 에큐메니컬 운동, 즉 교회일치운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1966년 3월 8일 장로교의 초동교회(草洞敎會)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합동예배가 있었다. 1971년 부활절을 기하여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번역한 〈신약성서〉가 출간되었으며, 1977년 〈공동번역성서〉가 출간되었다. 교회일치운동은 신학교육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1964년 4월 연합기관의 성격을 띤 연합신학대학원이 연세대학교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일치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또 한번의 분열을 경험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용공성(容共性) 여부를 둘러싸고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교단의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合同)과 통합(統合)측으로 분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종파운동의 발생, 4·19혁명 이후의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경험한 한국 개신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참여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치제도의 경색화와 인위적인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불평등과 상대적 빈곤을 목도했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정당한 권위를 누리지 못하고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억압받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하여 민중신학(民衆神學)이 태동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일부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정교분리 이론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하면서 개인의 영혼구원에 보다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이는 한국 개신교에 처음부터 내재해온 보수성과 진보성이란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신학사상사에서 보수적 근본주의사상과 진보적 사회참여사상으로 나타났다. 한편 전통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을 시도해온 한국신학의 흐름은 종교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 개신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단의 양적 팽창을 들 수 있다. 교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갔으며, 교회의 규모도 대형화되었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대형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교회성장의 척도도 외적인 차원에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 개신교의 양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1960년 이후 산업화 과정 속에서 상실된 자아를 확인받으려는 대중들의 종교적 동기가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때때로 그릇된 축복관이 교회를 지배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의 축복이 마치 물질적인 풍요와 질병 치료로 대표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대형화와 외면화 경향에 반하여 교회의 참모습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는 교회가 본래 담당해야 하는 교육·구제·전도·선교·사회봉사의 사명을 자각하고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선교 1세기를 넘어선 한국 개신교는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고, 주체적인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야 하고, 세계기독교사의 전면에서 자신의 자리를 매겨야 할 것이다.→ 감리교, 개혁교회, 그리스도의 제자회,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교, 루터교, 모라비아 교회, 성공회, 유니테리언주의, 장로교, 침례교, 퀘이커교, 하느님의 교회, 하느님의 성회, 회중교회주의

鄭鎭弘 글

참고문헌

    개신교

개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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