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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Religious Education

종교교육 (宗敎敎育)

 

개요

종교교육(宗敎敎育), religious education

영적·제의적·도덕적 교훈과 예배의식을 가르치는 교육.

종교가 특수한 문화를 형성한 곳(예를 들면 인도 문화의 힌두교)에서는 종교교육이 건강한 문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같은 보편적인 종교 전승들은 문화간 가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와 공존하는 문화에서는 종교교육이 주로 특정 종교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개인 발달에 대한 종교교육의 중요성은 현대 사회에서도 많이 논의되고 있으나, 지난 날 대부분의 사회에서 종교교육이 기본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해왔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종교교육은 도덕성·제의·세계관·신화·종교체험 등과 관련되어 있고, 사회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거룩한 것에 대한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일체의 교육이 종교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사냥이나 식목 같은 기술을 학습하는 것조차도 종교적 함의를 지닌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구별되는 전통 사회에서는 종교적 목적이 교육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 공동체 내부의 기능 분화도 종교교육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문가들은 종교교육의 내용과 기술을 개발하고, 입문자들을 준비시키며 신자들을 교육시키는 실제 과정을 도맡는 등 종교교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대개 승려들만이 교육을 전담한다. 이에 반해 유대교에서는 비사제 집단(랍비들)이 발전하여 토라에 대한 연구·주석·교육 등의 주된 기능을 담당했다.

종교교육의 유형

거룩한 문서의 연구에 중점을 두는 종교교육

종교교육의 여러 체계는 1차적으로 거룩한 문서들의 암기나 연구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면 인도의 바다 전승(베다에서 파생된 이름)에서 문서 연구는 매우 중시되었으며, 서구의 문서 전승도 히브리 성서(〈구약성서〉)를 내놓은 고대 이스라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히브리 성서는 2,000년 이상 유대교 교육의 핵심 내용을 이루어왔다. 그리스도교는 히브리 성서에 〈신약성서〉를 추가했으며, 이렇게 해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성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종교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실제로 성서가 종교교육의 거의 유일한 내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코란 Qu'ran〉('거룩한 문서'라는 뜻)이 종교교육의 핵심적 내용이 되어왔다.

거룩한 문서에 대한 연구는 주해·요약·선전·교육 등을 위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유대교 전승은 히브리 성서에 〈탈무드〉(토라, 즉 율법에 대한 주석)를 추가하여 유대교 교육의 내용·방법·목표에 관한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발전한 신조와 고백은 신앙을 요약하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초기 그리스도교는 개종자의 종교교육을 위해 교재(교리문답)를 사용했다. 이슬람교에서는 이른바 순나(sunnah)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예언자 마호메드와 그 추종자들의 언행에 관한 권위있는 전승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슬람교 학교에서는 〈코란〉과 함께 이 전승들을 배우고 토론했다.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사람들은 기억에 의존해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문화를 전달했다. 구전(口傳)은 거룩한 문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서 암기는 특정 형태의 종교교육에서 가장 기초적인 일이었으며, 대개 경건과 학습의 징표로 간주되어 칭송을 받았다.

신학적 주제에 중점을 두는 종교교육

문서에 바탕을 둔 대부분의 전승들은 분석적인 연구와 토의를 암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논리적 단계로 평가해왔다. 이같은 분석으로 인해 문서 해석의 특수한 방법과 학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종교교육은 신학적 주제에 대한 토의에 초점을 맞추었던 중세 유럽의 여러 학파에서 현학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이 학파들은 변증법적 방법을 사용했다. 서로 대립되는 관점을 제시하는 이 방법은 논리를 정교하게 활용하고 권위(특히 성서의 권위)에 최종적으로 호소하여 진리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심오한 종교철학적 문제들을 사심 없이 토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종교교육은 힌두교 우파니샤드(BC 10~5세기에 작성된 경전)에 분명히 나타난다.

'저급 학문'에서 '고급 학문'으로 진보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종교교육

다른 문화의 사유 형식과 교육 양식을 접하면서 종교 전승들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 전승들이 표방하는 목적을 다른 문화의 교육 이념과 방법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 생겨났다. 중국에서 불교는 토착화된 문화 양식에 적응하고자 했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철학과 종교의식에 적응하고자 했다. 이같은 적응 과정의 한 예로 2~3세기 이집트에서 활동한 그리스도교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파는 '저급 학문'(수학·음악·생물학·철학 등)에서 '고급 학문'(신학)으로 진보하는 일종의 종교교육을 발전시켰는데, 고급 학문은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문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체험에 중점을 두는 종교교육

문서를 중시하는 대부분의 종교교육은 그리스도, 하느님,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의 합일, 미망·유한성 등으로부터의 구원, 깨달음 등과 같은 몇 가지 유형의 체험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종교교육의 몇몇 전승은 체험을 직접적으로 강조하고 거룩한 문서들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선불교(축자적으로는 '명상 불교'라는 뜻)일 것이다. 선불교에서 올바른 명상은 표피적인 현실로부터 점점 더 거리를 두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에 몰입하면서 진행된다. 이같은 명상(zazen)은 선문답(禪問答 koan)에 의해 촉진된다. 스승(roshi : '존경하는 선생'이라는 뜻)은 아무것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체험을 강조하는 몇몇 전승은 체험의 단계들을 설명한다. 이 단계들 가운데 일부는 준비·정화·계시·합일 등의 신비주의 단계처럼 개념적 지식 수준보다는 심리학적 상태에 더 가깝다. 여러 종교 전승은 특히 종교적 지식을 얻기 위해 금식 등의 특정한 신체적 단련을 요구한다. 베다교도들의 소마(soma)나 일부 아메리카 인디언 집단의 페요테(peyote) 같은 화학물질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미리 규정된 행동 과정을 통해 종교 지식을 얻으려는 또다른 시도라 할 것이다. 개인적 체험의 진보를 강조하는 전승에서는 스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명인을 중심으로 체험의 공식화와 제도화가 나타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얻고자 하는 체험은 그 본성상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스승이 그 체험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는 숙련된 산파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와 제의에 중점을 두는 종교교육

대부분의 종교 전승에서 신화와 제의는 평신도들에게 중요한 교육적 기능을 갖는다.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 신화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산문체 기사(記事)들이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한 실재의 체험을 전달하고 촉발한다. 제의에서는 음악·춤·그림·조각·건축 등이 활용되는데, 이 표현형태들은 공식 교육의 보조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종교교육은 교육적으로 고안된 상징에 크게 의지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는 죽음과 재탄생, 씻음과 정화의 이미지를 시사하고, 세례 때 사용되는 물은 생명(음료수), 영원한 생명의 물, 생명을 내려주는 비 등을 함축한다. 이같은 상징을 활용하는 종교교육은 개인적 체험을 확대함으로써 전승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문맹인들이 공통적으로 시행하는 통과의식들 가운데 성인의식(입문의식과 연계되는 경우가 흔함)은 말과 몸짓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결합시킨다. 의식은 매우 극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평상시에 겪어보지 못한 시련이 포함되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같은 체험을 통과하면서 청년들(또는 처녀들)은 대체로 거룩한 힘과 관련되어 있는 제의와 가르침을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 전승을 특징짓는 절기와 축일은 일반적으로 기념적 성격과 교육적 성격을 모두 띠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남서부의 주니 인디언 부족이 지키는 연례 겨울 축제(chalako)는 부족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극적으로 전달하는 정교한 축제이다. 유대교 유월절에서는 제의와 가르침이 함께 어우러져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게 한다. 이때 어린이들은 감각(특히 미각)과 지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일어난 결정적 사건(BC 13세기에 일어난 출애급 사건)을 회상하고 그것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킨다.

세계 종교에서 이루어진 종교교육의 발전

문맹인들의 종교

문맹인들은 생존과 관련된 모든 활동이 신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믿었다. 또한 모든 교육은 어떤 식으로든 신과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종교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세계관은 신화와 제의 등을 통해 전달되었으며, 집단생존에 필수적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원시종교들의 면모는 흔히 다산의식(多産儀式)과 관련되어 있는 창조 제의와 절기들이다. 이 극적이고 다채로운 의식들을 통해 종교문화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재연된다. 이 의식들은 종교적 가치와 교육적 가치를 모두 갖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 의식들을 관찰하거나 이에 참여하며, 그들 나름의 놀이 활동을 통해 성인들의 종교 활동을 모방한다. 절기는 개인의 생존과 종교 의식의 바탕을 이루는 죽음 및 재생의 자연적 순환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도록 자연의 변화들을 활용하거나 그것들과 연계되는 경우가 많다. 통과의식들도 교육적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면 입문의식은 집단의 종교적 비밀을 드러낸다. 성물(聖物)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을 때, 입문자들은 이 지식을 제공한 신들과 문화적 영웅들의 업적과 수고에 대해 듣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성물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가르치는 동시에, 모범을 보인 영웅들을 선행의 모델로 내세우고, 반(反)영웅들을 피해야 할 행동의 실례로 묘사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아르넘 랜드의 아보리긴족이 시행하는 입문의식은 W. L. 워너의 〈검은 문명 A Black Civilization〉(1964)에 묘사된 바와 같이, 원시적 상황에서 교육에 활용된 기법을 잘 보여준다. 입문자들은 동물을 모방한 춤을 관람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그 의미를 설명해준다. 입문자들은 성스러운 나팔을 불기도 한다. 입문의식이 끝날 때 젊은이들은 할례를 받는다. 상처를 불로 지지는 동안 그들은 음란과 간음을 피하라는 교육을 받고 항상 진리를 말하라는 엄중한 훈계를 듣는다.

원시인들에서는 입문의식이 대개 등급화되어 있다. 부족의 청년들은 '수풀 속의 학교'에 모여서 보다 높은 수준의 비밀스러운 지식에 점차 입문한다. 그들은 강의나 대화식 암기법에 따라 정규 교육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부족이나 씨족의 한 성원이 한 학생을 특별히 책임진다. '현자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앉은 자리'에서 전설을 전달하거나 잠언을 낭송하면서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도덕적 측면을 집단적으로 교육하기도 한다.

고대 민족과 문명의 여러 종교

이집트·메소포타미아·아스텍·마야 문명에서 종교는 정치와 구별되지 않았다. 의식(儀式)은 자연과 사회의 우주적 질서를 지속시키는 일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부족단위의 의식은 감명 깊은 교육적 유산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갱신을 위해 연례적으로 거행되었던 신년 축제에서는 창조 신화가 낭송되었고, 혼돈에 맞서 우주적 질서와 다시 한번 합일됨을 강조하면서 왕이 재임명되었다. 이집트의 이른바 계승 신비극은 왕권의 양위를 나타내기 위해 거행되었다. 이 문화들은 농업 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된 산물들이다. 이 유형에서 왕은 농경·우주·국가의 정치적 생존을 단일한 기능으로 결합함으로써 문명의 본질적 측면을 구현한 화신으로 등장한다. 효과적인 교육적 전달은 이 문명을 존속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했다. 교육은 대개 사제들에 의해 실시되었고, 학교는 성전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바빌로니아 성전 학교에서 청소년들은 복잡한 설형문자의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상급 학생들은 신화, 점성술, 제의와 마술, 그밖의 종교 지식 등 사제 학문의 고급 학과목을 이수했다. 세속 관리직을 수행하도록 선발된 학생들도 흔히 성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집트에서 사제들의 아들은 책의 집이나 신을 모신 '생명의 집'(성전)의 학교에 입학했다. 귀족과 왕가의 아들도 이 학교에 입학하여 그들의 특수한 직무에 따르는 종교적 의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배웠다. 초급 수준의 소년들은 하급관리가 되는 데 필요한 읽기와 쓰기 과목을 교육받았다. 이보다 더 낮은 수준의 '상업학교들'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도덕적 교훈과 국가의 종교적 운명에 대해 철저히 가르쳤다.

고대 멕시코에서는 2가지 유형의 기관에서 체계적인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국가의 종교 기능에 필수불가결했다. 칼메칵(calmecac) 학교에서는 사제가 되는 데 필수적인 과목들을 교육했다. 건축가 조르주 밸랑(1901~45)에 따르면, 어린 소년들은 이 학교에서 "가냘픈 다리와 얼굴을 용설란 가시로 찢고, 금식과 참회로 야윈 몸을 하고, 단조로운 자기부정으로 흐릿해진 눈을 뜬 채" 앉아서 제의용 찬송가의 시구들을 불렀다고 한다. 젊은이들에게 세속적인 실무 학과들을 가르치는 텔포크찰리(telpochchali : '젊은이들의 집'이라는 뜻) 학교도 칼메칵 학교 못지 않게 엄격했다. 젊은이들은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의 제의적 전투에 대비했다. 이 제의적 전투의 목적은 태양신이 정해진 궤도에 따라 계속 회전하는 데 필요한 피의 희생제의를 위해 제물을 잡는 것이었다. 다른 학교들은 여자들을 교육시켜 여사제로 만들었다.

상형문자 알파벳 체계와 쓰기법이 위에서 말한 고대문명에 소개되면서 종교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문서의 필사와 암기는 교육의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제의와 신앙은 표준화되어 구전 이외의 방법을 통해 전달되었고, 문화적 지혜는 더 확실하게 보존되었다. 신성국가는 기술과 종교를 결합시킨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세속화의 씨를 뿌리기도 했다. 계급과 카스트의 구별은 각 개인이 받는 교육의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공식 교육은 전문가들을 훈련시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데 점점 더 치중했다. 사제 계급이 점차 지식인화되면서 사변적이고 신학적인 성찰이 그들의 공동관심사가 되었고, 평민들은 낡은 형태의 종교를 답습했다. 사제왕이 거행하는 거대한 우주 제의는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는 제의라기보다는 바라보기만 하는 장관에 지나지 않았다.

동양의 종교교육

    힌두교

전통적인 힌두교 교육의 목표는 2가지이다. 하나는 현세에서 의무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트만(Atman : '개인의 영')과 브라만(Brahman : '우주의 영')의 정체를 깨달아 현세의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스승(guru)은 이 2가지 목표를 달성하도록 짜여진 전통적인 교육제도의 핵이다. 적절한 종교교육이 얼마나 중시되었는가는 힌두교 정통 교리에서 '학생'이라는 범주가 인생의 4가지 단계 가운데 첫 단계라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머지 3단계는 가장(家長)의 단계, 숲속의 은둔 단계, 종교적 출가 단계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첫번째 학생 단계는 '중생'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모든 힌두교도들이 거쳐야 할 단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힌두교도들'은 종교 공동체에 입문할 수 있는 3가지 상층계급, 즉 카스트(브라만[사제]·크샤트리아[전사]·바이샤[상인]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도의 베다 교육은 주로 브라만 계급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인도 사회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브라만 계급의 극소수에게만 실시되었던 것 같다.

베다 교육의 기준에 따르면, 브라만 소년은 8세에 학생 단계에 입문한다. 입문의식은 소년의 '중생'을 상징한다. 입문자는 가사(架裟)를 받아 평생 입고 다닌다. 머리카락은 특정한 양식에 따라 자른다. 그를 위해 선택된 스승은 공식적으로 그의 복지에 책임을 지며, 소년은 제의와 서원을 통해 그 스승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전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입문의식은 성인의식이 아니다. 다만 성인의 역할을 맡기 위해 준비하는 공부 단계에 받아들여진 것뿐이다. 소녀들이 공식적인 베다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심지어 금지당할 때도 있었다.

학생의 중요한 의무는 베다를 연구하고 스승을 섬기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었다. 스승은 거룩한 문서들과 진리를 입으로 전한다. 이러한 학습 상황에서 스승은 집중적이고 간결하고 때로는 암호 같은 어구들을 고안하여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보여주는 극치가 거룩한 한 마디 음절어인 옴(Om)이며, 이것은 자체 내에 의미의 세계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학생들은 스승이 전달하는 음(音)을 모방하고, 명상을 통해 보다 심오한 진리를 터득한다. 공부는 스승의 지도 아래 미리 규정된 특정한 제의를 수행하는 데 부수되는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은 그 직책의 신성함과 중요성에 부응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승을 섬긴다. 이리하여 거듭 태어난 학생은 자신의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하여 신을 깨닫고 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아타르바베다(Atharvabeda)의 한 책은 이같은 브라만 훈련법에 우주적 중요성을 부여한다. 스승 전승은 가장 지속적이고 영향력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장 흔하게 실시되는 방법은 스승 한 사람과 제자 몇 사람이 스승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배우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학인(學人)들이 집단을 이루어 서로 배우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들은 아슈람(ashram : '영적인 은거' 또는 '지적인 은거'라는 뜻의 asrama에서 유래)에서처럼 사회로부터 은둔하거나 무리를 지어 천하를 주유한다. 학생과 스승의 밀접한 관계는 인도 수도원 전통에서 유지되고 있다.

    불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뒤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깨우침을 헌신적으로 구하는 사람들, 즉 초기 승려들을 가르쳤다. 그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다른 금욕자들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 사람들은 승려가 될 성향이 없고 가정과 마을의 일상적인 일에 매몰되어 있던 평민들이었다. 불교교육사는 본질적으로 불교수도원제도 역사의 일부이다. 수도생활은 초기부터 자비, 청빈, 도덕적 규범을 동반했으며 이와 아울러 스승의 지도 아래 훈련과 배움에 정진했다. 명상과 연구는 불교 교육의 본질적인 방법이었다. 4체, 8정도, 다르마(dharma : '법')의 세목들로 알려진 원리는 반드시 연구해야 할 대상이었다. 부처의 말씀·이야기·전설들은 초기에 점차적으로 수집되어 경전이 되었다. 독경과 찬가는 깨달음을 얻은 창시자의 말씀과 그에 관한 말들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교의에 대한 논쟁과 토론은 수도승 교육의 중요한 측면이었던 것 같다.

불교의 주요 종파들 가운데 테라바다 소승불교는 팔리 경전(팔리어로 씌어진 종교 문서)을 권위의 유일한 원천으로 주장했다.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부처가 제시했다고 하는 고등 교리들을 담은 수트라스(sutras : '문서들'이라는 뜻)가 별도로 작성되었다. 이 문서들은 중국·티베트를 거쳐 불교를 수용한 한국·일본·베트남 등지에서 불교의 가르침과 예배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전들이 확정되자 학승들은 개종자들을 찾는 한편, 종교적 진리를 주석하고 방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의 학습 범위를 확대했다. 수도승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주석 작업이 벌어지면서 BC 6세기에는 승가대학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북인도의 날란다대학교였다. 7세기 중국 저술가의 기록에 의하면, 날란다대학교는 여러 불교 종파들에서 수천 명의 승려들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담하는 승려들의 지도 아래 연구하게 했다고 한다. 평신도들도 날란다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상가(sangha : 수도승 교단)는 테라바다 불교가 침투한 실론·미얀마·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문자 문화를 전달한 주체였다. 예를 들면 실론에서는 BC 3세기에 불교가 소개된 뒤, 특히 불교 문헌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 발달하여 나름의 역사적 전통을 형성했던 것 같다. 사원과 관계를 맺고 있던 학교들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울 때까지 유일한 교육기관이었음이 분명하다. 서구문화가 침투하기 이전의 몇 세기 동안만 해도 거의 모든 미얀마인들은 파고다 학교에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았다. 여승제도가 테라바다 불교의 한 측면이어서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지만, 소녀들은 정식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중국에서의 불교는 선진 문화와 만났다. 중국인 승려들은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가르쳤다. 중국인 승려들은 산스크리트 또는 팔리어 경전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도교로 알려진 고전적인 중국 마술종교 체계의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가 많았다. 대승불교와 도교가 혼합되면서 중국에서는 선불교('명상 불교')가 발전했다. 선불교는 철저히 경험주의적인 방법을 취한 까닭에 형이상학(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연구)과 이론, 추상적 초론을 삼갔으며, 1차적인 경험에 따른 직관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발전한 또 하나의 주요종파인 정토종은 우주적 구원을 강조하여 선불교의 교육 방법보다 전통적인 교육 방법을 활용했다. 학문과 경전 연구는 명상과 함께 높이 평가받았다. 유교가 중국의 서민생활에 주된 영향을 끼쳤던 8세기 동안(AD 3~10세기) 불교는 중국의 고급 문화를 지배했다. 몇몇 불교 사원은 주로 승려와 상층계급의 배움터가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불교는 중국에서 쇠퇴했고 수도승 교육의 질은 저하되었다.

중국의 영향이 한국과 일본에 퍼지면서 불교도 함께 전파되었다. 일본에서 발전된 불교는 중국의 불교와 유사했지만, 일본 불교는 그 나름의 성격을 발달시켰으며, 중국에서보다 일반교육 형태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마을의 절이 마을학교가 되고, 승려가 교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잘 훈련된 단순한 삶과 정직한 노동생활을 강조한 선불교는 일본의 무사계급(사무라이 계급)의 마음에 들어 무사들의 훈련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9세기경 불교는 티베트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여 왕의 후원 아래 방대한 경전이 산스크리트에서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이 티베트 경전은 불교 역사와 사상의 가장 중요한 보고(寶庫)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수세기 동안 불교 수도원(라마교 사원)들은 티베트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지난 1, 2세기 동안 불교의 종교교육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점증하는 세속화로 인해 여러 가지 도전을 받았으며, 이 시기에 불교 르네상스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북돋워준 인물은 팔리 경전협회를 창건한 T.W.R. 데이비스(1843~1922)와 미국의 신지학자 헨리 올콧 (1832~1907)이다. 특히 올콧은 실론·미얀마·인도에서 불교 문화와 교육을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상가는 교육적 책임을 한층 더 부여받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현대적인 사립학교와 대학교를 감독하고 공립학교의 종교교육을 감독하고 있다. 명상에 특히 중점을 두는 불교교육은 서구의 특정 집단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중국의 종교

중국의 교육제도는 2,000년 동안 유교의 지배를 받았다. 유교는 그 창시 이래 공식적이고 교훈중심적이며 대중적인 교육을 강조해왔다. 이와는 달리,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는 공식교육을 중대한 잘못이라고 보았다. 공식교육은 구원의 유일한 원천인 자연상태로부터 사람들을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교는 단순하지만 역설적인 사상을 주장한 것을 제외하면 중국 교육에 거의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수도승 학교에서조차도 도교는 직관의 방법을 강조했다. 중국의 학교들에서는 도교 경전이 연구되기는 했지만 유교적 방법에 의거해 해석되었을 뿐이다. 유교 교육은 각 개인을 도덕적으로 훈련시켜 정의롭게 행하도록 하고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준비시켜 통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우주 전체와의 조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또한 합당한 행동을 가르치는 고전들은 그 기원이나, 천자(天子), 곧 황제를 통해 국가와 하늘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종교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일본의 종교

일본인들은 외래 문화를 쉽게 받아들여 이를 일본 특유의 체계로 탈바꿈시키는데,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례는 일본 종교사와 종교교육사일 것이다. 일본 종교의 기저에 있는 전통적인 신도(神道)는 일본 문화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체험의 원시적 형태인 신도는 이후의 모든 종교 체계에 그 흔적을 남겼다. 이 기저에 첨가된 것이 유교·도교·불교·그리스도교였으며, 서구의 세속 사상과 실천이었다. 이같은 절충적 융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도 진정한 의미의 통일(일본 특유의 신심)이 유지되었다. 그 과정은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가지 교육제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는 무사도(武士道)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의 메이지 유신이다. 무사도는 여러 종교적 요소와 기타 요소를 종합한 것이며, 사무라이 훈련에서 무예를 강조했다. 이 교육제도는 학습·신심·예의범절·군사기술·충성심·절제·이기심을 독특하게 결합시켰다. 메이지 교육은 신도 신화, 가미('神') 신앙, 유교의 가족윤리, 권위주의적 국가주의, 현대 교육 방법론을 융합시켜 국가에 대한 헌신을 주입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으로 신도는 공식적인 종교교육을 거의 또는 전혀 실시하지 않았다. 신도의 전수는 신자들이 가정·사원·지역 공동체의 제의에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이와는 달리 유교는 공식 교육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 : 1603~1867]에 유교 학문은 매우 광범위하게 발전했다. 전통적인 교과과정은 일본을 통해 속주들의 궁정에까지 확산되었다. 사원학교 또는 교구학교(terakoya)는 반(半)세속적인 공교육제도로 발전했다. 사제(승려, 신도, 사제, 유학자, 또는 무소속 사무라이)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은 희석된 사무라이 교육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특유의 필사법을 통해 도덕이 주입되었다. 학생들은 전통적인 수신 교과서들을 암기하고 그것을 그대로 베껴 또 1권의 수신 교과서를 만들어냈다. 1945년 신도의 황실 의식이 폐지되자 국립학교들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더이상 직접 주입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신도 신자들을 비롯하여 종교 집단들은 보다 심화된 자의식을 가지고 종교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은 서양식(특히 그리스도교) 종교교육 기관들과 경쟁을 벌였다. 어떤 종교 집단들은 나름대로의 학교제도를 설립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종교

한국의 경우는 조선시대까지 유교가 국교로 인정되었고, 학교교육도 유교경전에 대한 학습만이 아니라 성현들에 대한 제사의식 등을 통한 종교교육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교육은 곧 종교교육으로 이해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유교적인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교화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세속적인 교육과 구분하여 종교교육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근대의 문호개방과 더불어 서양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국내에 들어와서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종교교육과 함께 영어·지리·기초과학 등의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1900년대 초기에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설립되었던 사립학교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그리스도교계 학교들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한 후에는 식민통치의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위해 공립학교에서 일체의 종교교육 및 종교의식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학교교육에서 종교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8·15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었고, 특히 미국식 공립학교체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종교교육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국교는 인정하지 않으며, '교육법' 제5조에서도 국립 및 공립학교가 특정 종파를 위한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교육은 가정과 종교단체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학교 과정에서는 신학대학이나 신학과, 승과대학을 설립해 자유로운 종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서양의 종교

    유대교

히브리 성서는 종교교육을 되풀이해 강조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계명을 가르치고, 계명을 신실하게 낭송하며, 계명으로 전신갑주를 입고, 계명을 문설주에 새겨야 한다. 가정은 이 성스러운 의무를 수행해야 할 1차적인 장소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공동체가 전문적인 교사들에게 의뢰하여 가정 교육을 강화하고 심화시켰다. 레위인들은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불렸다(II 역대 35 : 3). 바빌론 포로기(BC 6~5세기) 이후에는 하느님의 가르침(토라)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특별한 자격을 갖춘 학자 집단('율법학자들')이 등장했다. 제2성전파괴(AD 70) 이후 이 문서 전승에 속하는 학자·교사(랍비)들은 유대교의 생존을 보장하고 오늘날까지 유대교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요하난 벤 자카이(1세기에 활동)의 지도 아래 팔레스타인 야브네(얌니아)에 있던 랍비 학교는 제2성전의 파괴 이후 유대인들의 종교적·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형(兄) 가말리엘(1세기에 활동)은 〈신약성서〉에서 바울로의 스승으로 언급된다. 아키바(1~2세기에 활동)는 미슈나(토라에 대한 주석서인 〈탈무드〉의 일부)에 구전 율법을 성문화하기 위해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세기 또는 5세기에 걸쳐 랍비 주석가들에 의해 발전된 구전 율법의 편찬은 AD 220년경 완료되었다. 그뒤 한동안 랍비들은 미슈나에 대해 상세한 토론을 벌였다. 미슈나는 질문과 대답의 방법을 집중적으로 활용한 작품으로서 그뒤 게마라(미슈나 주석)를 탄생시킨 모체였다. 미슈나와 게마라는 함께 모아져 〈팔레스타인 탈무드〉(400경)와 〈바빌로니아 탈무드〉(500경)로 편찬되었다. 그뒤 〈탈무드〉는 유대교 종교교육에서 으뜸가는 역할을 했다. 각각의 〈탈무드〉는 그당시의 주요 랍비 학교에서 만들어졌고, 랍비 학교들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기관들과 함께 유대교 안에서 주석과 실천의 권위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

랍비의 교육활동과 가정의 교육활동은 회당에서 서로 융합되었다. 또한 회당은 AD 70년에 제2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교가 생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회당의 교육활동은 비교적 일찍부터 공식적인 지역공동체학교들에 의해 보완되었다. 어린이가 공교육에 입학하는 입학식은 장엄한 의식이 되었다. 입학식은 어린이의 나이가 비교적 어릴 때, 모세가 율법을 전수받은 일을 기념하는 축일인 샤부오트 날에 주로 거행되었다. 어린이는 특별한 복장을 하고 회당으로 와서 십계명 낭독을 들었다. 그뒤 교사들은 꿀을 바른 과자를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문자를 발음하면서 이 과자를 먹는데, 그것은 배움이 달콤한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종교교육은 정신을 집중해야 할 과업이 되었으며, 다양한 본문들에 대한 면밀한 공부와 암기를 강조했다. 토라를 학습했다는 공식적인 증명서는 어린이들이 13세 되는 해에 거행되는 바르 미츠바(Bar Mitzwa : 축자적으로는 '계명들의 아들'이라는 뜻) 의식 때 받았다. 공식적인 종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년들과 성인 남자들뿐이었다. 성인 여자가 토라를 배우는 학생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여성이 교육에서 맡는 1차적인 역할은 신실한 어머니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교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토라 자체를 위해 토라를 연찬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연구 생활은 경건한 유대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훌륭한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이 과정에 대한 랍비들의 지침이 회당과 부속학교들에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문을 배우는 아카데미(예시바)에도 부여되었다. 이 아카데미들은 탈무드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과 연구를 위한 중심지였다. 〈탈무드〉 토라라는 용어('토라 연구'라는 뜻)는 중세와 근대에 다양한 교육기관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유대인들이 게토로부터 해방되면서 유대교 종교교육에도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랜 기간 공고하게 확립되어 있던 '토라 연찬'이라는 원칙과 실제는 이미 체계화되어 유대교 공동체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었으므로,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세속화된 근대 세계의 사상과 실제가 소개되면 유대교의 기반이 무너지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보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유대교 신앙과 의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세속화의 잠식을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18세기 계몽주의의 위대한 유대교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과 같은 사람들이 이끌었던 개혁 유대교는 세속화된 세계의 지적·제도적 현실에 유대교 교육과 전반적인 유대교 세계관을 적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랍비들의 훈련을 위해 신학교들이 세워졌고, 이들 학교에서는 고대의 방법과 현대의 방법, 고대의 견해와 현대의 견해를 놓고 중용을 취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930, 1940년대에 나치가 유럽의 유대인 사회를 사실상 뿌리뽑은 이래로,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에서는 고대의 교육원칙과 실제들 가운데 많은 것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많은 랍비와 교육자들은 세속화된 서구 세계에서 히브리어와 유대교 유산을 가르치는 새롭고도 실현가능성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줄곧 노력하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와 파르시(Parsi)

조로아스터교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 가운데 5번째 의무는 '낮과 밤의 1/3을 신학교에 참석하여 성인들의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흔히 이들의 학교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선한 주'라는 뜻)에게 봉헌된 불이 있는 신전 구내에 있었고, 교사는 사제들이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거룩한 문서들에 대한 기계적 학습, 제의 훈련, 읽기와 쓰기법 전수, 준칙과 잠언을 이용한 도덕 교육 등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초급학교에서 시행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계급차별과 성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누렸다. 고등 교육은 주로 종교·의학·법학과 관련되어 있었다. 페르시아 서부에서 남자들은 군사적 종교교육 제도를 통해 이른바 '성전'(聖戰)에 대비했다. 교육제도로서의 조로아스터교는 최후의 조로아스터 왕조가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었던 AD 651년까지 국가의 요구와 뒤얽혀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뒤 파르시(인도에 정착한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도를 일컫는 용어)들은 서구의 세속 교육제도와 그들 나름의 전통 회복에 집요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리스도교

복음서들은 예수를 교사로 지칭할 때가 많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들은 대부분 신앙과 의식에 관한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헌 가운데 가장 체계적인 것은 1세기 후반의 디다케 문서(Didache : '12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주의 가르침')인데, 이것은 신자들과 개종자들을 위한 훈련 및 교육 교범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개발된 가장 중요한 교육 수단은 교리문답이다. 개종자들은 도덕과 교리에 대한 공식적인 교육과 전례 훈련을 통해 준비했다. 전례 훈련은 신자들의 미사에 앞서 드리는 초신자들의 미사에서 이루어졌다. 개종자들은 교육을 만족스럽게 이수하고 도덕적 성품이 확립되고 세례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훈련된 교리문답 교사들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경~394경)와 같은 탁월한 초기 교회의 사상가들이 준비한 특별한 교리문답 교재들을 사용했다. 공식적인 종교교육은 주로 성인 개종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어린이들을 위한 종교교육은 가정의 책무로 생각되었다.

교리문답 교육은 '교리문답학교들'에서 고도의 세련성을 갖게 되었다. 교리문답학교들은 2세기 후반 도시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에게서 발전한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전성기 때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후의 에데사) 학파는 서로 각축을 벌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플라톤주의의 옹호자로서 관념론을 강조하고 성서 주석에서 알레고리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는 데 반해, 안티오크 학파는 질료와 형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조점을 따르고 보다 축자적인 성서 주석의 입장을 따랐다. 교리문답학교들은 5~6세기에 쇠퇴했다. 중세교회에서 교육의 대상이었던 성례전의 초점은 세례에서 참회로 바뀌었고, 신앙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상징이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중세 교회는 문맹자들과 반(半)문맹자들에게 신앙을 전달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고대 전례의 화려한 장식, 축제와 축일의 정교화, 미술·건축·연극 등 예술을 활용했다.

중세 초기의 공식적인 종교교육은 주로 수도원과 대성당 학교에서 실시되었다. 샤를마뉴(800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됨)와 그의 교육 보좌관 알비누스(732경~804경)의 지도하에 궁정학교 제도가 발전되어 8~9세기에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 학교에서 시행된 교육은 신앙의 초보지식에 관한 것이었지만 연구 주제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교리를 넘어서 어떤 경우에는 7대 교양과목(문법·수사학·변증법·대수·기하·천문학·음악 이론)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함했다. 스콜라주의(11~15세기에 꽃핀 서방 그리스도교 철학 체계)가 발전하고 대학교들이 등장하면서 비판적이고 체계적인 사유가 개화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재발견에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1224/25~74)의 뒤를 따라 신학을 모든 학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학문의 여왕'으로 격상시켰다.

16, 17세기 종교개혁의 특징은 그리스도교의 맥락에서 도덕 교육과 일반 교육을 모두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모든 사람이 믿음 안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스스로 성서를 지방어로 번역하고 교리문답서들을 마련하며, 예배와 교육을 촉진시키기 위해 음악을 널리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장 칼뱅(1509~64)도 모든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교리문답서 1권을 썼고, 학교의 설립을 장려했다. 이 두 사람의 추종자들은 가는 곳마다 종교 교육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초기 청교도(칼뱅파)들은 뉴잉글랜드에 정착한(1630) 지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대학(하버드)을 설립했고, 50가구 이상 되는 모든 지역공동체들이 공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가톨릭 종교개혁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교육의 발전은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1491~1556)와 그가 설립한 예수회(수도회)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고도로 훈련된 이 운동은 신앙과 교회를 위해 마음·몸·영혼 등 인간의 전인성을 다스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수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유례없는 종교교육 제도와 세속교육 제도를 발달시켰다.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교 교육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발전은 ① 국가의 지원이 있건 없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광범위한 교육 제도를 확립한 일, ② 모라비아교도, 독일 경건파, 퀘이커교도, 감리교도 같은 개신교 교단들이 머리 교육과 '마음 교육'을 강조한 일, ③ 특히 미국 개신교도들이 종교적 자극에 따라 교양학부를 설립한 일, ④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내에서 성직자 교육이 평신도 교육으로부터 점차 분리된 일, ⑤ 19~20세기에 대영제국과 미국에서 주일학교 운동이 전성기를 맞이한 일, ⑥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이 그리스도교 사상과 근대 세속 사상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 일, ⑦ 세속화된 서구 문화의 현실에 부응해서 그리스도교 교육의 방법과 내용을 조정하려고 노력한 일, ⑧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종교교육 운동이 존 듀이(1859~1952)의 교육 이론을 광범위하게 활용한 것 등이다.

    이슬람교

무하마드(7세기 이슬람교를 창시한 인물)는 '중국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교육을 받으라고 추종자들에게 엄명했다고 전해진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쟁 포로들로 하여금 이슬람교도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대가로 자유를 얻게 해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들은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이 2가지라고 보았다. 하나는 계시에 부응해서 각 사람을 도덕적으로 지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와 종교기관들을 운영할 수 있도록 문필 계급을 육성하는 것이다. 쿠타브(kuttab)는 이슬람 청년들을 위한 초급 교육기관으로 등장했다. 이 학교들이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기 위한 전형적인 필사(筆寫) 교과서로 사용한 것은 간결한 운문체와 산문체 준칙들이었다. 코란이 기록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란은 쿠타브 교육을 받는 저급 학년 학생들이 사용하는 유일한 교과서가 되었다. 일단 코란을 암기하고 읽기와 쓰기를 이수한 뒤에도(대부분 10세에 이를 마쳤음), 학생들은 15세까지 쿠타브 교육을 받았다. 이때 학생들이 공부한 교재로는 기본적인 하디스( ad th : 예언자 무하마드의 언행 전승)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합당한 행동을 위한 지침서로 암기되었다. 쿠타브 외에 고등학문을 배우는 학교에서는 자격시험을 거친 학생들이 고전 아랍어 문법과 어원학 지식을 습득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코란과 하디스(이 둘을 모두 암기해야 했음), 그리고 이와 관련된 문헌들을 보다 심오하게 이해했다. 또한 학생들은 피크(Fiqh : 계시와 관습의 권위에 근거한 이슬람교 판결문 양식)를 논리학과 수사학 대신 공부했다. 피크에 대한 지식은 촌락 수준의 행정에서도 필요불가결했으므로, 피크에 대한 공부는 사회 전반에 비교적 널리 퍼져 있었다.

모든 이슬람 사원은 여러 가지 용도의 학교로 활용되었다. 사람들은 사원 뜨락에서 전승과 율법에 대해 토론했다. 어떤 사람이 권위자로 인정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집단을 형성했으며, 이같은 상황은 어느 정도 공식화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흔히 존경받는 대가 밑에서 배우기 위해 먼 곳까지 여행했다. 많은 이슬람 사원들은 도서관을 지어 대중이 이를 활용할 수 있게 해 대중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도서관은 이슬람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10만 권 이상의 장서를 가진 도서관들도 많이 있었다. 공식적인 모슬렘 사원학교들은 공인받은 교사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기관들의 교육에서는 살라츠(salats : 매일 여러 번 드리는 기도)가 지켜졌고, 많은 경우 학교마다 이맘(imam : '지도자')이 있었다. 일부 학교는 통상적인 이슬람 사원과 똑같은 외양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금요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로 갔다.

이슬람 사원학교의 이념은 니잠 알 물크가 바그다드에 국립 마드라사(이슬람대학교)의 문을 연 1066~67년에 더욱 촉진되었다. 얼마 뒤 이슬람 세계 전역에 이같은 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이 교육기관들의 본래 목적은 수니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표준화된 교육의 기초를 제공해서 그당시 영향력 있던 시아파가 종파의 교리를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 그결과 이 교육기관들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수적 성향을 띤 고등학문의 중심지로서 논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에 유사한 대학교들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근대 이슬람 교육기관 가운데 지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카이로에 있는 알아자르대학교이다. 970년 시아파 군주들이 설립한 이 대학교는 몽골족이 침입하여 이란과 이라크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등학문 중심지들을 파괴한 13세기 이후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에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슬람교는 끊임없이 교육과 이해를 새롭게 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공식적인 학교들과는 별도로 여러 가지 형태의 교육이 발달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수피 수도회(이슬람 신비주의 형제단)들이다. 그러나 이슬람 교육의 정점은 마드라사이다. 마드라사에서는 이슬람 지식체계와 전승체계가 조직·전파되고, 헬레니즘 문화의 주요요소들이 유지되어 유럽 등 비이슬람교 문화권에 전달되었다.

현대의 종교교육

오늘날 종교교육은 현대 과학, 테크놀러지, 대중문화, 현대 국가에서 나타나는 권력 집중의 심화 등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여러 차례의 정치혁명은 전통적인 종교교육의 기반을 완전히 허물었으며, 그 자리에 국가가 관리하는 제도를 세우게 했다. 종교 집단들은 이같은 상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었다. 독일에서는 국립학교에 대한 유화책을 썼고,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구학교에서는 독립된 학교 제도를 확립했으며, 국가의 통제가 매우 엄격한 소련과 중국에서는 망명이 줄을 이었다.

미국 혁명(1775~81)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초래했으며, 19세기 공립학교들은 공동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주된 역할을 맡았다. 그것은 과거에 제도교회가 맡았던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공립학교에서는 도덕적·시민적·종교적 목적을 위해 성서 읽기, 찬송가 부르기, 기도 등과 같은 관례들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관례들은 젊은이들에게 종교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던 종교 집단들에 의해 대체로 권장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이것이 쟁점으로 대두되자 미국 연방 대법원은 많은 판결을 내려 공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 학교가 기도회를 후원하는 것, 종교적 목적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공립학교에서의 종교의례 시행은 반대를 받았지만, 종교의 연구는 보호를 받았고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했다. 1980년대에는 교구학교에 대한 정부의 감독, 공립학교에서의 종교적 표현 등의 쟁점을 둘러싸고 공개적인 논쟁이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종교에 대한 연구는 미국의 일부 주립대학과 주립대학교에서 한 세대 이상 권장되었다. 종교 연구에 대한 권장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종교학교들(예를 들면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시작되어 최근에는 종교학부(예를 들면 샌타바버라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지속되었다. 이같은 발전은 종교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점점 더 강조한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양한 세계 종교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종교 자체의 본성과 기능을 분석하는 것이 그것이다. 공립학교에서도 종교에 대한 연구는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국에서 1944년 제정된 교육 조례는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실시하고 선발된 종교 집단이나 교사, 지방정부가 교과 내용을 승인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교과 내용을 살펴보면 다양한 종교 전승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 연구에 체계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대학과 대학교의 수효도 늘어가고 있다. 최근에 터키·인도·일본과 같은 나라의 국립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이 제외되거나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와는 달리 최근에 수립된 미얀마·스리랑카·이스라엘·파키스탄과 같은 나라에서는 국민적 정체성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배적인 종교 전승들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이러한 나라의 국립학교에서는 일종의 종교교육이나 종교에 관한 자치교육이 권장되었다. 전통적인 가르침과 현대적인 가르침, 전통적인 종교의식과 현대적인 종교의식을 융합하려는 노력도 기울어졌다.

종교교육에 대한 현대의 다양한 도전들에 대응하고자 종교 집단과 지도자들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일고 있다. 종교의 통제나 감독, 또는 2가지 모두를 받는 대학과 대학교를 지속적으로 설립하는 일(예를 들면 스리랑카의 불교대학교, 일본의 인터내셔널 크리스천 유니버시티), 신학 교육을 대학 교육과 보다 밀접하게 연관시키려고 노력하는 일, 국립학교에서 종교교육과 도덕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가변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일, 특히 일부 보수적인 종교 집단에서 종교의 후원을 받는 주간학교를 부활시키는 일, 현대 테크놀러지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전자 장치들을 활용해 복음전파와 교육을 실시하는 일, 서구에서 동양 스타일의 종교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일(예를 들면 선불교 명상 센터들과 수도원들) 등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R. S. Michaelsen G. C. Thomasson 글

 

참고문헌

    종교교육

  • 종교교육이론 : J. 실리, 강돈구 역, 서광사, 1992
  • 기독교교육의 이론과 실제 : 정웅섭, 대한기독교서회, 1991
  • 기독교교육사상 : 강희천,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 종교교육과 신학 : N. H. 톰슨, 손승희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0
  • 종교교육발달 : 가브리엘 모란, 사미자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88
  • 한국교육사상사연구 : 한기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
  • A History of Religious Education : Documents and Interpretations from the Judaeo-Christian Tradition : R. Ulich, 1968
  • A Reader's Guide to the Great Religions : C. J. Adams (ed.), 1965
  • The Contribution of the Arabs to Education : A. Totah,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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