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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신사참배 (神社參拜)

신사참배 (神社參拜)

일제 천황제(天皇制)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한 상징조작에서 나온 국민의식통제책.

특히 1930년대에 일제가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기만적인 내선일체(內鮮一體)·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실시하면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신사참배의 유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천황제 국가를 확립시킨 일본은 초기 신도(神道) 국교정책을 거쳐 1882년부터는 제사와 종교를 분리하는 국가신도 비종교정책을 추진했다. 즉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하에 전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종교로서 출발한 국가신도에서 종교적 색채를 제거하고 이를 전국민적인 보편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가신도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국가제사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을, 국민을 계도(啓導)하는 관료로서 국가기구 내에 포섭하고 이들이 종교로서 신도행사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국가신도의 모든 시설과 모든 국가신도 종사자들의 활동을 제사집행에 한정했다. 이는 1889년의 제국헌법에 의해 명문화되었다. 이에 따라 1890년 교육칙어가 공포되고, 1891년에는 교육칙어 낭독, 신사참배가 소학교의 행사로서 제도화되었다. 나아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신사의 통폐합, 제사의 획일화, 신직제도(神職制度)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국가통합이념으로서의 신사제도가 확립되어,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닌 국가의 정치원리, 국민통합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행사로 정착되었다.

한국에서의 신사참배 실시와 황민화정책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조선신사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일본경제는 그 탈출구로 대륙진출을 꾀하면서 1931년에는 만주를 침략했고,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감행했다. 이런 대륙침략정책이 추진되면서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 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또한 각 가정에 신붕(神棚) 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력히 추진하자,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1938년 2월 6일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장로교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달 이승만계의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일제에 구속된 윤치호(尹致昊) 등도 석방의 대가로 기독교를 통해 내선일체의 실시에 힘을 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 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 YMCA로의 통합, 조선감리교회의 일본감리교회로의 합동을 결의했다. 7월에는 신사참배에 협력한 각 교회와 단체들의 전국대회가 개최되었고, 9월 장로교 총회에서는 전국 23노회 중 17노회의 찬성으로 신사참배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의 적극 참여를 결의했다. 같은 달 감리교도 총리사 양주삼(梁柱三)의 명의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를 전후하여 기독교계열 각종 연합단체의 해산, 세계조직에서의 탈퇴, 조선기독교의 일본기독교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황민화정책과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학생들이 노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집단적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벌여, 9월 20일 학교가 무기휴교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이주원(李朱元),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등이 중심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신사참배에 굴복한 노회로부터의 탈퇴, 신노회 결성, 참배 불참자들간의 상호부조와 이들을 중심으로 가정예배와 기도회 확산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1940년 2월에는 각 지역의 참배반대 운동가들을 모아 신사참배불참운동자연합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6월부터 주기철 목사 등 운동관련자들을 대규모 검거하여 운동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비록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이나마 계속되었다.

  • 참고문헌 (신사참배)
    •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 최원규 편, 청아출판사, 1988
    •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 박경식, 청아출판사 편집부 역, 청아, 1986
    • 일제하의 사상탄압 : 임종국, 평화출판사, 1985
    • 월남개신교,천주교의 뿌리 - 해방 후 북한에서의 혁명과 기독교 〈역사비평〉 17 : 강인철, 역사비평사, 1992
    • 전시하 조선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교도의 저항 〈일제말기파시즘과 한국사회〉 : 한석희, 청아, 1988
    • 신사참배에 대한 조선기독교계의 대응양상연구 - 신념체계 분석을 중심으로 〈종교학연구〉 7 : 이진구,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88
    • 조선총독부의 신사보급 신사참배 강요 정책연구 〈한국사연구〉 58 : 손정목, 한국사연구회, 1987
    • 조선인 기독교인과 신사참배거부 〈복음과 세계〉 : 민경배, 1978. 2
    •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생태 〈기독교사상〉 : 민경배, 대한기독교서회, 1974. 8
    • 신사참배 결의전의 비화 〈기독교계〉 창간호 : 김두영,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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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