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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 敎, )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종교로서, 하느님의 임재를 인간행위와 역사에서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이다. 유대교는 광의로는 아브라함·이사악·야곱 등 족장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00여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뜻하며, 협의로는 BC 5세기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여 년 동안 믿어온 신앙체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협의의 유대교 통사만을 다룬다.

 

유대교 재건 시대(BC 538~333)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패망하는 과정에서 엘리트 유대인들은 3차례에 걸쳐(BC 597, 587, 582) 신바빌로니아로 끌려가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칙령을 내려, 신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성전재건을 명했다(에즈 1:2~4, 6:3~5). 세스바쌀과 그의 조카 즈루빠벨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동족들을 데리고 귀향해서 성전재건에 진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 귀향하지 않고 눌러 살던 유대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귀향자들은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즈루빠벨은 다리우스 황제의 지원을 받아 BC 515년 3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레위인·평신도 가릴 것 없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신앙생활이 위태롭게 되었다(〈이스라엘의 역사 A History of Israel〉). 페르시아 황제 아르닥사싸 1세(BC 464~424 재위)의 술 시중을 들던 유대인 느헤미야가 BC 444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BC 437년 12월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쳤다(요세푸스의 〈유대교사〉). BC 433년 느헤미야는 총독 임기를 마치고 궁정으로 돌아갔다가 1~2년 후 다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고 혼종혼(混宗婚)을 금했다(느헤 13).

BC 428년을 전후하여(〈이스라엘의 역사〉) 느헤미야에 이어 제사장이며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느헤 8).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종혼을 모두 파기하여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다(에즈 9:2, 10:2~43). 유대인들은 에즈라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기로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 가운데서 사위를 맞이하거나 며느리를 보지 않을 것,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이 안식일에 곡식이나 그 무엇을 팔러 오더라도 사지 않을 것,……7년마다 땅의 소출을 거두어 들이지 않을 것, 남에게 빚준 것이 있으면 없애버릴 것, 우리 하느님의 성전행사를 위하여 해마다 1/3세겔씩 바칠 것,……우리 밭에서 나는 햇곡식과 처음 딴 과일은 해마다 야훼의 성전에 바칠 것, 법에 있는 대로 맏아들과 처음 난 가축, 곧 갓난 송아지나 새끼양을 우리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들에게 바칠 것"(느헤 10:31~37) 등이며 또한 십일조를 바치기로 다짐했다(느헤 10:38~39).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으나 모세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AD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림으로써 성전제사가 아주 사라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재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2의 모세로 일컫기도 한다. 유대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신관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하느님을 마치 다른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 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성서를 아람어로 번역한 타르굼에 따르면 에덴 동산을 거니신 분은 하느님이 아니고 그분의 말씀(멤라)이었다고 한다(창세 3:8). '하느님은 삼키는 불'이라는 표현을 '말씀은 삼키는 불'이라고 고쳤다(신명 4:24). 초월적인 하느님을 너무도 경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신명(神名) '야훼'를 입에 담지 못하고 '야훼'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로 읽었다. 그밖에도 하느님 야훼를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들이 발달했는데 '이름'(마태 6:9), '하늘'(마태 5:34), '전능'(마태 26:64), '셰키나'(現存) 같은 것들이다.

선민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다(마태 5:46~47, 6:7, 18:17, 사도 2:23).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따라서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율법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제도·성전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5경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수 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바빌론 유수 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해석했다(느헤 9). 이렇게 해서 미드라시 문헌(성서 주석)이 생겨났다. 율법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그리스 시대(BC 332~63)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BC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다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BC 198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대제사장 야손(BC 175~172 재임)과 메넬라우스(BC 162 죽음)가 헬레니즘 전파에 앞장섰다. 마침내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 금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하게 박해를 가했다. 이에 마카베오,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는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164년 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I마카 4:36~40). 이를 기념하여 유대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하스모네 가문 중심의 독립전쟁이 차츰 승리하여 마침내 하스몬 왕조(BC 142~63)가 수립되었다.

독립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하스모네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BC 160~143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제사장 직분까지 겸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이당시 이스라엘 종파의 성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 못지않게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이들은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파는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2번째로 쿰란 종파가 있다.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던 '의로운 스승'은 저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하바꾹 주석 8:8~13).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 때(BC 103~76)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성교와 사정에서 생기는 불결을 피하려고 수도자들은 독신생활을 했다. 3번째 종파는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들이 속한 사두가이파이다. 이들은 헬레니즘을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로마 식민정권과 결탁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했으며 오직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사도 23:6~8) 영혼불멸과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정결법·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지식인들은 이들을 '땅의 백성'(암 하레츠)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50만~70만 명쯤 되고, 해외에 이민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200만~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유대인들은 시리아·소아시아·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 많이 살았다. 서기 원년 무렵에 지중해 주민 중 10%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BC 5~4세기의 유대인 수에 비해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까닭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그 예로 BC 13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와 BC 103년 아리스토불로스가 팔레스타인 남부지역 이두매아 사람들과 북부지역 이두레아 사람들을 강제로 대거 입교시켰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BC 3~1세기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BC 1세기에 씌어진 〈아리스테아 편지 Letter of Aristeas〉에 따르면 역자 72명이 〈구약성서〉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했는데, 역문들을 비교해보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이 역문을 70인역이라 한다. BC 1세기에 마카베오 2~4서도 이집트에서 씌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론(BC 20경~AD 50)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 간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풀이했는데, 이 주석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씌어진 작품으로는 우선 쿰란 문헌을 꼽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작품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성서 전설 또는 성서 주석류로 〈욥 유언집〉·〈이사야 순교기〉·〈아담과 하와의 생애〉, 쿰란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토비트〉·〈수산나〉·〈벨과 뱀〉 등이 있고, 묵시문학으로는 〈다니엘〉·〈에녹〉·〈모세 승천기〉·〈시리아어 바룩〉·〈에스드라 4서〉·〈아브라함 묵시록〉 등이 있으며, 역사서로는 요세푸스(AD 38경~ 100 이후)가 쓴 〈유대 전쟁 Bellum Judaicum〉·〈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가 있다. 그밖에 요세푸스는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Josephus〉·〈아피온 논박 Contra Apionem〉을 썼다. 지혜문학류로는 시라크의 아들 예수가 BC 180년경에 쓴 〈집회서〉·〈12족장의 유언〉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마 시대(BC 63~AD 135)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를 로마 시대로 본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중요한 사건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또는 14)~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마르 12:13~17).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제1차 유대 독립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여 성전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이스라엘의 성지〉).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1차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 중심의 사두가이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전도서〉·〈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슈모네 에즈레, 아미다라고도 함)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비르카트 하 미님)에 나자렛 사람들(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그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제12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은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씌어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제2차 유대 독립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키레네·키프로스·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게 처형되었다.1952~61년에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예수와 그리스도교

에즈라 이후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27년경 예수가 출현하여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고 그에 대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는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게 능사가 아니고, 하느님과 이웃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돌아섬'을 강조했다. 이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예언자적 외침이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던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식민정권의 미움을 사서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예루살렘 북부 성곽 바깥 골고다에서 약 33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십자가에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를 처치했지만 하느님은 그를 정당화하여 그를 부활시켰다. 제자들은 수시로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고, 마침내 30년 오순절 예루살렘에 순례온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창교했다. 예수는 이단자가 아니라 예언자요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 동족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은 극히 적은 반면, 그리스도교 창교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방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몰렸다. 기성종교인 유대교와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 간의 결별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유대 독립전쟁(66 ~70) 때 유대계 그리스도교도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요르단 강 건너,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28㎞ 떨어진 펠라로 피신했다. 85년경 유대인들은 야브네에서 18조 기도문 중 제12조 기도문에 그리스도교도들을 단죄하는 구절을 덧붙였다. 115~117년 키레네 출신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와 제2차 유대 독립전쟁(132~135) 때, 바르 코크바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 그리스도교도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랍비 시대(1~18세기)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경~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경~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640경~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권)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슈)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주석은 너무도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솀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월 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년 6월 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년 2월 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월 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년 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년 9월 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현대 유대교(1750~)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결과 멘델스존(1729~86) 같은 계몽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딤 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끼리 다투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딤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헤르츨(1860~ 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열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 J.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 데 이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인티파다, 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예수관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야브네 시대(70~135) 이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히브리대학교 교수이며 시온주의자였던 J. 클라우스너(1874~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밸푸어 선언을 반대한 C. J.G. 몬테피오레(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 했다. 독일의 진보적 랍비 레오 베크(1873~1956)는 예수를 일컬어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의 보수적 랍비 밀턴 스타인벡(1903~50)은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했다. 비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한 마틴 부버(1878 ~1965)는 예수를 대형(大兄)이라고 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중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친교를 권하고 성서와 신학 공동 연구를 격려했다.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鄭良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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