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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유근 (柳瑾)

1861(철종 12) 경기 용인~1921.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한말에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대종교 지도자로서 언론·교육사업에 종사했다. 본관은 진주. 호는 석농(石).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1894년 상경해 관직에 나갔으나 1년 만에 그만두었다. 독립협회가 창립되자 1897년경 이에 가입했고, 토론회를 지도하며 국민을 계몽하고 자유로운 논쟁을 통해 정부정책을 비판했다. 1898년(광무 2) 남궁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 大韓皇城新聞〉을 인수해, 그해 9월 5일 국한문혼용의 〈황성신문 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이를 통한 사회계몽에 힘썼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 간부 체포와 협회 해산 결정에 항의하는 만민공동회가 전개되자 간부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정부가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고 강제해산을 결정하자 약 40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뒤 석방되어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약하면서 애국정신의 고취에 힘썼고, 1902년 이후 휘문의숙의 숙감(塾監)·숙장(塾長)으로 교육사업에도 종사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을사조약과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했는데, 이 글을 쓴 장지연이 너무 격분해 끝을 맺지 못하자 그가 마무리했다. 이 사건으로 장지연이 일본경찰에 붙잡히고, 〈황성신문〉은 무기정간당했다. 1906년 2월 〈황성신문〉이 속간되자 그해 9월 총회에서 사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1910년 6월까지 신문발간의 책임을 맡았다.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했고, 대한자강회가 해산된 후에는 1907년 11월 장지연·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협회의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 등이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해 언론·출판·교육 부분에서 활동했고, 1909년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김교헌(金敎獻) 등이 단군교(檀君敎:뒤의 大倧敎)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했다. 1910년 최남선(崔南善)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조직에 참여, 장지연·김교헌과 함께 고전 간행에 힘을 기울였다. 1915년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 초대 교장을 지냈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물산장려계(朝鮮物産奬勵契)의 민족운동을 지도하다가 1917년 박중화(朴重華)·안재홍(安在鴻) 등 130여 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17년 대종교의 2대 교주 김교헌이 탄압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자, 서울 남도본사(南道本司)에서 강우(姜虞) 등의 간부진과 함께 교무를 전담했고, 이듬해에는 정교(正敎)의 지위에 올랐다. 1919년 4월에 개최된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석하고, 임시정부인 한성정부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간 때 양기탁과 함께 편집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란 논설을 썼다. 저서로 〈신정동국역사 新訂東國歷史〉·〈초등본국역사 初等本國歷史〉·〈신찬초등역사 新撰初等歷史〉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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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