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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종교 탐방

보은집회 (報恩集會)

1893년(고종 30)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기치로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열린 동학집회.

이 집회를 전기로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은 사회개혁과 반외세투쟁으로 전개된다.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2월의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성과없이 끝나고 동학에 대한 지방 관아의 탄압이 계속되자, 3월 10일 교주 최제우의 제례를 위해 간부들이 모인 청산군 포전리 김연국의 집에서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동학교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집결시키는 통유문을 보냈다. 이때 통문을 발함과 동시에 각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자를 골라 각 포(包)의 대접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포명을 주어 교구의 구분과 연락을 원활히 하도록 했다. 장내리는 이해초부터 교주가 대도소를 두고 주재함에 따라 각 처의 교도들이 찾아오게 되어 잘 알려진 장소였고, 관헌의 지목과 추적에 쫓긴 교도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일단 집결 지시가 떨어지자, 동학교도들은 매일 각처에서 각각 수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며칠 만에 수만 명에 달했다. 각처에서 온 핵심 간부들은 교주와 함께 주요방침을 의논하여 결정했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장내리뿐 아니라 전라도의 금구(金溝)·원평(院坪)에도 집결했다. 원평집회는 교단의 지도가 있던 장내리의 세력보다 더 급진적인 세력으로서 전봉준 등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보은취회에 참여한 남접과 연합하여 보은취회를 종교적인 성격에서 정치적인 성격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3월 11일 보은 관아에 붙인 격문은 종교문제를 떠나 왜양(倭洋)과 맞서려는 자세가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보은군수는 우선 조정에 그 실상을 알린 뒤 향리를 시켜 동학 지도자들을 만나게 하고 자신도 직접 가서 자세한 사정을 조사했다. 장내리는 집들이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서 흩어져 잤다. 돌성 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쳤는데, 이러한 종교의식은 각지에서 모인 교도들을 단결시켰다. 또 관군이 와서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각 조직은 군사편제처럼 움직였으며, 북산과 남산에 깃발을 꽂고 40~50명이 지켰다. 집결한 교도의 수는 기록마다 다른데, 1명당 돈 1푼씩 걷어서 모두 230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000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양식은 각기 직접 며칠분씩 가지고 와서 해결하기도 했고 또 교단에서 식량조달을 책임진 사람들이 준비하기도 했다.

보은 관아와 감영 그리고 정부에서는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으로 하여금 보은에 관군을 주둔시키게 하는 한편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와 선무사로 임명하여 수습하게 했다. 어윤중은 동학교도들의 대표와 만나 척양왜척 항목을 중심으로 집회의 의도에 대해서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외세배척의 주장을 고종에게 상달하겠다고 약속하고 해산을 종용했다. 고종도 윤음을 거듭 내려 해산을 명했다. 이와 함께 장위영 군대 600명이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3월 30일 청주에 도착했다. 동학교단의 지도부가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해산을 결정하자, 동학교도들은 4월 2일 장내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20일간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지쳐 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했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 방면을 향해 떠났다.→ 교조신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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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