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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탐방

조병갑 (趙秉甲)

조선 말기의 탐관(貪官).

본관은 양주(楊州).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이다.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을 거쳐 1892년(고종 29) 4월 고부군수가 되었다. 부임한 이래 갖가지 명목으로 탐학비행(貪虐非行)을 저질렀다. 농민에게 면세(免稅)를 약속하고 황무지의 개간을 허가해주고는 추수기에 강제로 세를 징수했고, 부민(富民)을 붙잡아들여 불효(不孝)·불목(不睦)·음행(淫行)·잡기(雜技)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 2만여 냥을 빼앗았으며, 대동미를 쌀 대신에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이 나쁜 쌀을 사서 중앙에 상납하고 차액을 착복했다. 또한 세곡을 운송하는 전운소(轉運所)에서 추가로 쌀을 강징(强徵)하고 부족미(不足米) 명색으로도 더 거두었고, 묵은 땅을 개간하여 면세가 되어야 할 땅에서 도조(賭租)와 시초(柴草)를 거두었으며, 태인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1,000여 냥을 거두었다. 특히 고부읍 북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에 축조되어 고부군과 태인현의 농민들이 수리(水利)의 혜택을 받고 있던 만석보(萬石洑)가 파손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농민들을 동원하여 구보(舊洑) 밑에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그해 가을에 신보 이용에 따르는 수세(水稅)를 1마지기에 상등논은 쌀 2말, 하등논은 쌀 1말씩 농민들로부터 거두어 700여 석을 사취했다. 이러한 탐학이 계속되자 농민들은 1893년 11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동학접주인 전봉준(全琫準)을 찾아가 진정서를 부탁했다. 11월 15일 전봉준이 농민 40여 명과 함께 조병갑에게 진정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하고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근명령을 받음으로써 이 봉기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조병갑을 이어 고부군수로 발령받은 자들이 계속 다른 곳으로 재발령되거나, 병으로 오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임명되었다. 그해 1월 11일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그는 전부사(前府使) 정모(鄭某)의 집에 숨어 있다가 옷을 바꿔입고 정읍을 거쳐 전주로 도망쳐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농민항쟁을 보고했다. 김문현은 조병갑의 탐학으로 민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그의 죄상을 취조해야 된다고 정부에 건의했는데, 그러자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압송하여 치죄(治罪)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 고부민란이 계기가 되어 갑오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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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