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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원시시대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한국의 역사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이다.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屈浦里), 평양특별시 상원군 검은모루,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全谷里),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石壯里) 등이 있다. 아직 공인된 확실한 연대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그 시초는 약 5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그늘 또는 강가에 집을 지었고 사냥과 식물채집을 하며 살아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협동이 필요하여 공동체생활을 영위하기도 했다. 1만여 년 전에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에 따라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사냥 대상물도 큰 짐승이 사라지고 작은 짐승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만들어 쓰게 되었고 또 잔석기를 나무에 파 홈에 꽂아서 낫이나 작살처럼 모듬연장을 만들어 쓰게 되었다. 이 시기를 중석기시대라고 하는데 경상남도 상노대도(上老大島)의 조개더미의 최하층 유적, 홍천 하화계리유적 등이 그 예이다.

신석기시대

BC 6000년(또는 BC 8000년이라고도 함)경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토기이다. 이들은 주로 물가에 움집[竪穴住居]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했고,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초기 농경단체로 들어간 곳도 있다. 황해남도 봉산군 지탑리(智塔里), 서울특별시 암사동(岩寺洞), 부산광역시 동삼동(東三洞) 같은 유적이 대표적이다. 무덤은 씨족공동묘가 널리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아직 문자를 사용하지 않던 시기여서 이 시대의 연구는 고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시대의 발굴 성과가 불충분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부모가 어린 자녀 2~3명을 거느리고 사는 핵가족들이 모여 한 촌락을 이루고 사회생활을 해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촌락의 주민은 모두 혈연을 같이하는 씨족이었으며, 그 조상을 동물 같은 자연물이라고 믿은 토템 씨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씨족사회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중대한 일들을 씨족회의에서 결정했다. 씨족장은 씨족 전체의 의사에 어긋나는 잘못이 있으면 물러나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씨족 전체의 생존과 관계되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같은 중요한 생산활동은 공동으로 했으며, 종교적 의식도 그와 같았다. 종교적 신앙은 우주의 만물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애니미즘에 근거한 무격신앙(巫覡信仰)이 지배적이었다. 주술사인 무격은 악신을 물리치고 선신을 맞아 씨족의 행복을 가져오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믿었다. 이같은 생활을 한 씨족이 신석기시대의 기본적인 사회단위였으나, 여러 씨족이 연결하여 부족이라는 보다 큰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부족사회의 구성 원칙은 씨족과 같아서 씨족장들의 회의에서 부족 전체의 일을 결정하고, 부족을 대표하는 부족장을 선거에 의해 선출했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의 사회는 한마디로 공동체적 원리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역사의 주인공은 씨족 또는 부족의 전체 구성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읍국가와 전제주의사회의 성립

성읍국가와 연맹왕국시대

BC 10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면서 비파형동검 및 한국식동검과 다뉴세문경으로 대표되는 청동기가 사용되었고, 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변해갔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조·수수·보리뿐만 아니라 벼농사도 시작되어 생산력이 크게 성장했다. 주거는 움집이지만 깊이가 얕아져서 지상가옥에 가까워지고, 무덤으로는 고인돌무덤[支石墓]이나 돌널무덤[石棺墓]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에 근거해보면, 청동기시대에는 신석기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권력자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검이나 청동거울 같은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권력을 상징하는 것들이고, 거대한 고인돌에 묻힌 인물도 권력자일 것이다. 아마도 부족장의 전통을 이은 이들 권력자는 씨족이나 부족 내부에서 특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밖으로 다른 씨족이나 부족을 무력으로 정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장악한 지배자들은 토성을 쌓거나 목책을 두르고 그 안에 거주하면서 성 밖에 사는 일반 씨족원이나 부족원들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기 국가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초기 국가를 성읍국가라고 부른다.

성읍국가로서 가장 건국이 빠른 것이 고조선이었는데, 그 왕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고 했다. 작은 성읍국가에 지나지 않던 고조선은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성장하여 랴오허 강[遼河]과 대동강 유역에 걸치는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주위의 여러 성읍국가들을 정복하거나 그들과 연맹하여 연맹왕국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며, BC 4세기경에는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중국의 연(燕)을 칠 계획을 하기도 했다. 고조선에 이어 쑹화 강[松花江] 유역에는 부여(夫餘), 압록강 중류 지역에는 예맥(濊貊), 동해안의 함흥평야에는 옥저(沃沮), 한강 이남지역에는 진국(辰國) 등의 여러 연맹왕국이 형성되었다. 고조선은 위만(衛滿)에 의해 망하게 되는데(BC 194~180), 위만조선도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침략으로 망해(BC 108) 그 영토 안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4군은 낙랑군(樂浪郡)을 제외하고 모두 곧 없어졌다. 이무렵에는 쑹화 강 유역에 부여,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 동해안지역에 옥저와 동예(東濊), 한강 이남지역에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卞韓)의 삼한이 있었다. 연맹왕국에서 최고의 정치적 지배자는 왕이었다. 그러나 왕의 권한은 제한된 것이어서, 부여에서는 흉년이 되었을 때 그 책임을 왕에게 물어서 내쫓기도 하고 또는 죽이기도 했다. 삼한에서도 진왕(辰王)은 여러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인 신지(臣智)에 의하여 선거된 것 같다. 따라서 국가의 권력은 부족장의 후예인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중앙집권화가 진전되어서 성읍국가의 지배자는 대가(大加)가 되어 왕 밑의 귀족으로 변신을 했지만, 옛 전통이 남아 있어서 대가들도 왕과 마찬가지로 가신(家臣)을 거느렸다. 이들은 많은 노비를 소유했는데, 100여 명을 순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촌락의 농민이 주된 생산 담당자였으므로 이 시대를 노예사회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삼국시대

연맹왕국시대의 특징은 한 국가에서도 왕실이 교체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에서는 연나부(那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왕실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 해씨(解氏)로부터 고씨(高氏)로 바뀐 것 같다. 백제에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그런 징조가 엿보이며, 신라에서는 박(朴)·석(昔)·김(金) 세 성의 왕위교체가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왕실은 고정되기에 이르는데, 고구려에서는 태조왕(53~146경 재위), 백제에서는 고이왕(234~286 재위), 신라에서는 내물마립간(350~402 재위) 때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왕실이 고정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도 정비되었다. 그 표현이 율령의 반포인데, 고구려에서는 373년(소수림왕 3)에, 백제의 경우는 기록이 없으나 신라에서는 520년(법흥왕 7)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가체제의 정비를 토대로 하여 크게 대외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광개토왕(391~413 재위), 백제의 근초고왕(346~375 재위), 신라의 진흥왕(540~576 재위)이 그러한 정복군주들이었다. 그결과 연맹왕국시대의 여러 왕국은 정리되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정립하는 시대가 되었다. 낙동강 유역에 가야가 있었으나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신라에 병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연맹왕국시대에 비교해서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서 국왕의 시조를 국조(國祖)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이 국왕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의 실권은 귀족들에게 있었는데, 국가의 중요한 일은 귀족들의 회의체에서 결정했다. 이러한 귀족회의에 고구려에서는 제5관등 이상이 모였다고 하며, 국무총리격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이 선거했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에서는 재상을 투표에 의해 선거한 것으로 해석되는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가장 명백한 귀족회의의 예는 신라의 화백(和白)이다. 화백은 귀족 출신의 대등(大等)으로 구성되고 상대등(上大等)을 의장으로 하는 회의체로서 왕위의 계승, 대외적인 선전포고, 불교의 수용 같은 종교적 문제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다. 이러한 귀족회의의 존재를 통해 당시의 사회가 귀족연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족회의의 참가 자격은 귀족신분 중에서도 고위 귀족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짜여져서 특권층이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령 고구려에서는 고추가(古鄒加)라는 존칭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왕족인 계루부와 왕비족인 절노부(絶奴部)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백제에는 8성대족이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 중요한 관직은 왕족인 부여씨(扶餘氏)와 왕비족인 진씨(眞氏)나 해씨(解氏)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신라에서는 골품제라고 하는 엄격한 신분제가 있어서, 성골과 진골의 2골(骨)과 6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6두품이 있어서 모두 8등급의 신분층이 갈라져 있었다. 성골은 김씨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최고의 골품이었으나 뒤에는 소멸되었다. 진골도 왕족이지만 왕이 될 자격이 없다가, 성골이 소멸된 뒤에는 왕위에 올랐다. 6두품·5두품·4두품은 일반귀족이고, 3두품 이하는 일반 평민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골품에 따라서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 이같이 살펴보면 화백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골품도 진골에 한정되어 있었던 듯하다. 즉 신라는 진골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귀족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이같이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가 형성되면서, 그 문화도 과거와는 달리 발전했다. 우선 각기 그 나라의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는데, 고구려의 〈유기〉,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 등이 그것이다. 또한 불교를 수용하여 중앙집권국가의 왕권 강화를 정당화하고, 아울러 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정당화하는 정신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서 백제의 미륵사(彌勒寺)나 신라의 황룡사(皇龍寺)와 같은 거대한 사찰과 미륵반가상 등 아름다운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또 국왕과 귀족을 위한 대규모 무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이나 벽화고분이 특히 유명하며, 백제의 무령왕릉(武寧王陵)과 같은 벽돌무덤[塼築墳], 신라의 천마총(天馬塚) 같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등이 대표적이다.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말기에 동양의 국제정세는 돌궐·고구려·백제·일본으로 연결되는 남북세력과 신라와 수(隋)·당(唐)으로 연결되는 동서세력의 대립양상을 보였다. 이 양 진영을 대표하여 크게 싸운 것은 고구려와 수·당이었다. 한편 백제와 신라도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백제에 밀린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먼저 백제를 멸하고 이어 고구려를 멸한 후 간섭이 심한 당도 축출하고 드디어 반도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676). 한편 고구려 유민의 일부는 대조영(大祚榮)의 지도하에 쑹화 강 유역에 발해를 세움으로써 남북국시대가 되었다. 남북국시대의 특징은 왕권이 강화되어 전제주의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신라에 있어서는 왕위의 장자상속제(長子相續制)가 확고하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국왕의 명을 받아 행정을 집행하는 집사부(執事部)가 정치의 핵심적인 기구가 되고, 이에 따라서 화백회의는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국왕 직속의 9서당(九誓幢)이 가장 강력한 부대가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귀족적 특권이 허락된 식읍·녹읍이 폐지되고 현직관료에게 조(租)의 수취만을 허락하는 관료전과 일정량의 곡물을 지급되었다. 한편 사상적으로는 절대세계를 추구하는 화엄종(華嚴宗)이 전해져서 전제주의를 뒷받침했다. 또 미술에 있어서는 불국사(佛國寺)나 석굴암(石窟庵)으로 대표되는 통일과 조화를 이상으로 하는 미술품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 또한 그러한 사회적 풍조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전제주의의 발전으로 사회적인 분화가 촉진되는 한편, 평민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지위가 하락하게 되었다. 그결과 하층민 사회에는 염세적인 경향이 대두하여 단순한 염불(念佛)만으로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이 유행하게 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을 지배족으로, 말갈의 원주민을 피지배족으로 하는 국가였다.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발해는 전제주의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는 달리 당의 제도를 도입하여 3성6부의 정연한 정치기구를 정비했는데, 당의 상서성(尙書省)에 해당하는 정당성(政堂省)의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이 최고의 관직이 되었다. 당과는 달리 이렇게 왕과 친근한 관계에 있는 정당성의 우위는 그 정치가 전제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귀족사회의 전개

고려시대

통일신라 후기인 신라 하대(下代) 사회는 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 하나는 진골귀족 내부에 분열이 생겨 왕위쟁탈전이 치열해진 것이다. 또 하나는 6두품세력이 사회적으로 성장하여 유교의 이념에 입각한 정치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다음으로는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강력하게 등장한 일이다. 호족들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스스로 성주(城主)·장군(將軍)이라고 칭하면서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반독립적인 상태로까지 되었다. 이들 호족은 밖으로 크게 해상무역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張保皐)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사상적으로는 선종(禪宗)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입각해서 그들의 세력을 뒷받침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달리던 농민들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도 또 하나의 큰 변화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은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궁예(弓裔)의 후고구려가 일어나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 후삼국은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王建)의 고려에 의해서 재통일되었는데, 이 시기에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에 합류해왔다.

신라는 수적으로 극히 소수인 진골귀족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회였고, 통일 후에는 전제왕권에 의하여 지배되는 극히 폐쇄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의 6두품 출신과 지방호족 출신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이 크게 확대된 셈이다. 이에 따라서 관리의 등용에는 과거(科擧)와 같은 시험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호족의 후예인 향리 출신 이상의 사회층이 과거를 통하여 등용되었을 뿐이다. 또 일단 등용이 되면 음서(蔭敍)에 의해 그 신분이 세습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경제적으로는 전시과(田柴科)에 의하여 지급되는 과전(科田)보다는 공음전(功蔭田) 같은 사유지적 성격의 토지가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선호되었다. 그리고 이들 귀족의 정치적 의견은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이 모이는 재신회의에서 반영되었다. 이들 귀족의 자제들은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최충(崔)의 문헌공도(文憲公徒)를 위시한 12공도의 사학(私學)에서 배웠는데, 이 사학은 문벌 중심의 교육기관인 셈이다. 불교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지양하는 천태종(天台宗)이 국가의 뒷받침 아래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개창한 것은 왕자인 의천(義天)이었다. 그리고 귀족들의 사치를 반영하는 미술품들 중에서는 청자가 가장 유명했다.

고려의 귀족사회는 문반 중심의 귀족사회였다. 이에 무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드디어는 무인정권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최충헌(崔忠獻) 이후 4대에 걸친 최씨정권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서 귀족사회의 지배기반은 더욱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자극을 받은 농민과 노비들의 반란이 크게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문신들은 패관문학(稗官文學) 속에 도피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불교계에서는 문신적인 교종의 기성권위에 대항하여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과의 조화를 꾀하는 조계종(曹溪宗)이 지눌(知訥)에 의하여 비롯되었다. 무인정권시대에 고려는 몽골의 침입이라는 대외적인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강화(江華)로 천도하여 40여 년 간 이에 대항한 결과 국가의 독립을 보장받으며 강화조약을 맺었으나 정치·경제·대외관계 등에서 간섭을 받았다. 또 몽골을 배경으로 등장한 권문세족들이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여 농장과 노비가 증가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이들은 불교행사를 지원함으로써 현세적인 영달을 기원하는 공덕사상의 신봉자들이었다. 이와 대립적인 위치에서 과거시험을 통해서 진출한 사대부들은 도덕적인 청렴을 강조하며 권문세족을 비판했다. 그러한 사상적 근거로서 우주의 근본인 이(理)의 발로로서의 인간의 근본인 성(性)의 선함을 주장하는 성리학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대부의 의견을 반영하여 안으로는 권문세족을 억압하고 밖으로는 몽골의 간섭을 배격하는 정책을 쓴 것이 공민왕(恭愍王)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패하고 결국은 고려왕조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조선왕조가 개국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한 사대부세력의 뒷받침을 받아서 성공한 개국이었다. 그런데 대체로 향리 출신인 이들 사대부는 고려시대의 귀족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고려의 귀족들은 수도인 개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지방으로 낙향을 하면 귀족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귀족관료로 죄를 지으면 귀족의 특권을 박탈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귀향죄(歸鄕罪)를 적용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지방에 정착해 사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이같이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은 또 한 차례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시대의 귀족은 고려의 관례대로 양반이라고 했으므로, 조선 양반사회의 특징은 우선 이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반들이 수적으로 증대했다는 것은 관직을 바라는 후보자 수가 증가했음을 뜻했다. 그러므로 부조(父祖)의 공덕으로 관직을 수여하는 음서제도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과거시험이 관리로 등용되는 중요한 길이 되었다. 그러므로 양반들은 귀족보다는 관료적 성격을 더 많이 지니게 되었다. 정치기구에 있어서도 의정부(議政府)라는 회의기관보다는 실제로 행정을 분담하는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조(六曹)가 더 중요했다. 이 기관들은 국왕에게 직계(直啓)하여 행정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반관료에게 지급하는 과전은 경기도지역에 한정되었고, 전국의 토지는 공전으로 편입시킨 관계로 양반관료들의 토지에 대한 지배권도 제한되었다.

양반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사회적 제도를 마련했다. 가령 혼인은 양반가문 사이에서만 배타적으로 행해졌다. 신분이 낮은 가문과의 혼인에 의한 소생은 양반신분이 갖는 특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개 신분이 천한 것이 상례인 첩의 소생인 서얼들이 문과(文科)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결과였다. 또 지방적인 차별대우가 있어서 평안도나 함경도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관리로 등용되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문화적으로는 성리학에 근거한 도덕국가의 건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도덕적인 요구는 위로는 국왕이라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아래로는 농민에게까지도 요구되어 향약제도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세종이 민중을 계몽하려는 뜻이 들어 있었다.

한마디로 양반귀족이라고 하지만, 그 내부에는 세력 분열이 있었다. 경기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훈구귀족은 실제적인 학문에 능통하여 정치적으로는 행정관료직을 점유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넓은 농장의 소유자들이었다. 이에 대해서 지방의 독서인군은 중소지주층으로서 성리학의 도덕적 성격을 강조했다. 보통 사림(士林)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중앙무대로 진출하면서 훈구귀족과의 대립이 첨예화하여 사화(士禍)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들은 지방에 서원을 세워 이를 근거로 하여 그 지위를 유지해갔으며, 또 향약을 실시하여 지방 통제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중앙의 정치무대에서도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이 붕당(朋黨)을 결성하게 되고, 그것이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분당에서 비롯되는 당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시기에 양반들은 자기의 동족관계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어 족보를 많이 편찬했다. 또 동족관계에 따르는 상장제례(喪葬祭禮)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어 예학(禮學)이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적인 인간관계의 근본에는 도덕적인 성실성이 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성리학이었다. 이리하여 성리학은 조선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되었는데, 우주의 근본인 이(理), 즉 생명력을 존중하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사물의 법칙인 기(氣)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을 존중하는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이 생겼다.

조선시대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원칙으로 하는 우호정책을 써왔다. 그러나 16세기말에는 일본군이 침입하는 임진왜란이 있었고, 17세기초에는 청나라군이 침입해오는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 두 전쟁은 적지 않은 피해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서 조선왕조가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서인, 특히 노론의 장기집권으로 벌열정치가 행해지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탕평책에 뒤이어 외척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그이후 300년이나 계속되었으며, 또 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을 보면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어 지금까지 지방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법을 고쳐서 쌀로 바치게 했는데 이로 인해서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받은 쌀로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게 했는데, 물품의 조달은 공인(貢人)에게 부탁했다. 이에 따라서 공인은 비록 어용상인이지만 공인자본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인해 공인들은 필요한 물품을 수공업자에게서 조달함으로써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수공업은 대체로 상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인으로는 공인 이외에 사상(私商)이 성장하여 서울의 경강상인(京江商人), 개성의 송상(松商), 동래의 내상(萊商), 의주의 만상(灣商) 등이 유명했다. 이들은 국내에서뿐 아니라 해외무역에도 종사하여 많은 자본을 축적하여 특정상업을 독점하는 도고(都賈)로 성장했다. 또 농촌에서는 농업기술이 크게 발달했는데, 모판에 모를 심었다가 논에 옮겨심는 이앙법(移秧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서, 보리농사를 끝낸 뒤에 그 자리에 물을 끌어들여 논으로 만들어서 벼를 옮겨심음으로써 이모작(二毛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했고, 이에 저수지가 필요하게 되어 수리사업이 발전했다. 이러한 농업기술의 발달은 한 사람의 농부가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을 넓게 하여 광작(廣作)이 행해지고, 그결과 상업적 이윤을 얻는 부농(富農)이 발생했으며, 한편으로는 경작할 토지를 잃어 임노동자(賃勞動者)로 전락하는 농민도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세기에 이르러 농민들의 민란이 크게 일어났는데, 홍경래 난(洪景來亂)이나 진주민란(晉州民亂)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대세 속에서 학문적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나게 되었다. 실학에는 농촌의 분화작용을 방지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확보하게 하여 자영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경세치용학파(유형원·이익·정약용)와, 도시의 상공업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여 나라를 부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이용후생학파(박제가·박지원)가 있었다. 특히 후자는 일하지 않는 양반유학자를 비판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분업을 주장했으며, 그러기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북학파(北學派)라고 불렸다. 또 종교적으로는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南人) 학자들 사이에 천주교가 수용되고, 그뒤를 이어 도시의 중인(中人)이나 평민들 사이에서는 최제우(崔濟愚)가 제창한 동학이 크게 성행했는데, 동학은 인내천(人乃天)에 입각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장하고 아울러 때가 오면 새로운 사회가 열릴 것이라는 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술에 있어서도 비현실적인 자연이 아니라 실제의 자연을 그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정선)와 민간의 풍속을 제재로 하는 풍속화(風俗畵:김홍도·신윤복)가 유행하여 종래의 화풍을 혁신했다. 또 문학에서는 〈춘향전〉으로 대표되는 한글소설이 유행하여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판소리나 가면극 같은 평민을 상대로 하는 연희물도 널리 행해졌다.

민주사회로의 발전

개화기

한국의 역사는 사회적인 지배세력의 기반을 점점 확대시켜가는 방향에서 진전되어 왔는데,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문화와 접촉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서양의 새로운 문화가 접근해왔고, 이에 대하여 북학파들은 이미 널리 통상을 하여 신문명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인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일본과 통상을 하게 되면서 개화정책은 크게 진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화도조약이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강요에 의한 불평등조약이었던 데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개항과 더불어 밖으로부터의 식민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화기 이후 한국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서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개혁을 촉진함과 동시에, 밖으로부터의 압력을 배제하고 대외적인 자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게 된 셈이다.

개항 후에 조정에서는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紳士遊覽團)을 파견하여 각종 시설을 시찰하게 하고, 또 영선사(領選使)로 하여금 양반 출신 자제를 거느리고 청에 가서 신식무기의 제조법을 배우게 했다. 이어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고, 통리기무아문 아래 12사(司)를 두는 행정기구 개혁을 실시했다. 이러한 개화정책에 반발하여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유교를 지키고 외국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을 펼쳤다. 그리고 그같은 배타적인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임오군란(1882)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군이 출동하여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라 하여 납치해가고,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양 제국과의 통상조약을 맺도록 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일본을 모범으로 하는 개혁을 목표로 일어난 정변이 김옥균(金玉均) 등에 의한 갑신정변(1884)이다. 갑신정변은 젊은 양반 출신 개화파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으로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믿고 행한 이 개혁은 결국 청군의 출동으로 인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청·일 양군은 모두 철수했지만, 그 사이에 러시아의 세력이 침투해오고, 이에 대항하여 영국군의 거문도점령사건이 벌어져, 조선은 마치 열강의 세력각축장이 된 듯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영세중립국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개혁론자들이 외국세력과 결탁한 데 대하여 외국세력의 배척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은 개혁을 거부했다. 이런 속에서 자주적인 개혁을 수행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이것이 갑오농민전쟁이다(1894).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의 주장 아래 봉기하여 신분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일본의 침략을 배격할 것을 주장했다. 또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중심의 내각에서도 갑오개혁을 단행하여(1894) 신분제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했다. 비록 경제면 등에서는 일본의 영향이 있었으나 사회적인 개혁은 정부 자신에 의한 개혁이었다. 이러한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청과 일본의 군대가 출동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간섭이 심해져 민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일본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일으키자, 격분한 유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이에 대항했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본군에 포위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아관파천, 1896),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게 많은 이권을 빼앗겼다. 이런 상황속에서 전개된 것이 독립협회의 활동이다. 서재필에 의하여 189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는 첫째, 외국세력으로부터의 자주독립운동이었고, 둘째, 일반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하게 하고 국회를 개설하려는 민권운동이었고, 셋째, 교육·상공업·국방력을 강화하려는 자강운동이었다. 말하자면 개혁과 자주독립의 2가지 기본적인 과제를 올바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제시한 것이다. 고종은 이에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기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는 등의 새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경쟁 속에 말려들었는데, 러일전쟁(1904)에서 러시아를 이긴 일본은 다른 경쟁상대 없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길로 치닫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승인 없이 불법적으로 체결·처리된 을사조약(1905)에 의하여 외교권을 발탁당했으며 이어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 일제에게 합병되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반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국왕의 왕권 옹호를 위한 반항이 있었는데, 을사조약이 불법이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호소한 헤이그 밀사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양반관료들의 항거로는 민영환(閔泳煥) 등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또는 상소를 올려 항일을 호소하기도 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일본의 무력 아래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반항운동은 의병운동이었다. 을미사변에서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은 을사조약 뒤에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 등의 활동이 있었고, 군대가 해산된 뒤에는 군인들이 이에 합류하여 군대다운 조직과 무기를 갖고 반항했다. 전국의 의병 약 1만 명은 연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희생을 내고 점차 약화되다가 합병 뒤에는 해외로 가서 독립군으로 전환하여 항일전을 계속했다. 또 독립협회 이후 보안회(保安會)·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등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반항했다. 또 〈독립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 여러 신문을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항쟁을 했다. 한편 아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으로 각종 학교를 세워 교육열을 북돋웠다. 최초의 사립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1883) 이래 배재학당(培材學堂) 등 많은 사립학교가 서울과 지방에 세워졌으며, 노동자나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야학도 많이 세워졌다. 종교계에서도 기독교가 민족사상과 자유주의를 고취하며 크게 환영을 받았고, 대종교(大倧敎)가 단군신앙을 내세워 민족정신을 앙양했다. 한편 주시경(周時經) 등이 국어연구에, 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 등이 국사연구에 힘써 민족정신의 앙양에 이바지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육·해군 대장을 총독에 임명했으며,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의 언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리고 신민회(新民會)의 간부들을 총독암살음모라고 날조하여 체포했다(105인 사건). 이러한 살벌한 억압정책 아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약탈하고, 산업과 금융을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나라 안에서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해외에서는 국제적인 외교활동과 무장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민족자결주의가 세계를 풍미하자, 이 원칙에 의하여 한국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번져나갔다. 3·1운동은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불교의 한용운(韓龍雲) 등 주로 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종교기관과 교육기관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직업·성별·연령을 가리지 않은 온 국민의 운동이었다. 이것은 개화기 이후 성장해온 국민의 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일본의 무력에 의한 강압으로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상하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복고가 아니라 대의제의 원칙에 입각한 정치형태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부였고, 임시정부는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세계의 여론에 눌려 문화정치를 실시한다고 했으나, 이것은 기만적인 표면적 완화일 뿐 식민정책의 근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일본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에 의한 식량의 약탈, 군수공업에 필요한 광산자원의 약탈, 일본 완제품의 상품시장, 중공업에의 투자에 의한 중국침략의 병참기지화 등 일본의 필요에 응하는 모든 정책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한국의 인적·물적 자원의 강제동원을 위하여 일본어 사용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여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자본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농민은 영세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만주 등지로 이민했고, 노동자는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의 열악한 조건을 견뎌야 했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국산품 사용을 권장하는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이나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를 자주 일으켰다. 물산장려운동이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기업가 중심의 운동이라면,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농민과 노동자에 의한 것이었다. 후자는 1925년에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더욱 발전해갔다. 이리하여 민족운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6·10만세운동(1926)이 있은 다음해인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펼 필요를 느끼고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 때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한국이 당면한 모든 문제에 대하여 통일적인 민족적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측의 주장으로 해산되었다.

한편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독립군은 각처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는데, 그중에서도 1920년 홍범도(洪範圖) 등의 봉오동(鳳梧洞) 전투와 김좌진(金佐鎭)의 청산리(靑山里) 전투가 유명하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만주의 한국인 부락들을 습격하여 많은 인명을 학살하기도 했다(庚申慘變). 그후 독립군부대는 러시아 등 각지로 흩어졌고, 만주사변(1931) 이후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독립군의 행동도 어렵게 되어 반만중국군(反滿中國軍)과 연합하여 투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 임시정부 밑의 광복군에 통합되었는데, 광복군은 연합군과 협동하여 대일항쟁을 수행했다. 한편 김구(金九)의 애국단(愛國團)과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은 공포수단에 의한 항일투쟁을 기도하여, 훙커우 공원사건[虹口公園事件] 등이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고 키우려는 주시경의 제자들로 조직된 조선어학회의 노력이 있었다. 한편 독립운동의 정신적 뒷받침으로 역사 속에서 민족정신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박은식(朴殷植)·신채호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서 현실적인 사회개혁에 주안점을 둔 유물사관적인 연구도 있었고, 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중심으로 실증적인 연구에 주력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8·15해방과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은 38。를 경계로 하여 남북에 각기 진주함으로써 국토는 분단되고, 미·소의 냉전에 따라 분단은 더욱 고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한에서는 미군정하에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사이의 대립이 날카로워 정국은 어수선한 상태였으며,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서, 김구 등 임정요인들이 중국에서 귀국했으나 혼란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굳혀갔다. 그동안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남북협상 등이 진행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은 남북에 각기 대한민국(대통령 이승만)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주석 김일성)이 성립되어 분단 상태는 굳어졌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에 무력에 의한 통일을 목표로 남침해왔다(→ 6·25전쟁). 이 전란은 미군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UN)군이 출동하여 저지했으나,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가져왔으며, 상호불신이 가중되어 통일의 희망은 더욱 멀어졌다. 남북의 대립 속에서 남한에서는 이승만의 독재가 심각해지자 1960년 4·19의거가 일어나서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가 이끈 군인들의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끈질긴 민주화의 요구에 따라 1988년 제6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민주정치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1993년 비로소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독재정치가 해방 후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고, 정권은 김정일로 세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 참고문헌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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