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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nfession

( 고백 )

by Leo Tolstoy





So I lived, abandoning myself to this insanity for another six years, till my marriage. During that time I went abroad. Life in Europe and my acquaintance with leading and learned Europeans* confirmed me yet more in the faith of striving after perfection in which I believed, for I found the same faith among them. That faith took with me the common form it assumes with the majority of educated people of our day. It was expressed by the word "progress". It then appeared to me that this word meant something. I did not as yet understand that, being tormented (like every vital man) by the question how it is best for me to live, in my answer, "Live in conformity with progress", I was like a man in a boat who when carried along by wind and waves should reply to what for him is the chief and only question, "whither to steer", by saying, "We are being carried somewhere".

그렇게 나는 살았다, 육년 동안 이런 정신이상에 내맡기면서, 내가 결혼할 때까지. 그 시절에 나는 외국에 갔다. 유럽의 생활과 지도적이며 박식한 유럽인들과의 만남은 내가 믿었던 완성을 추구하는 신앙에 더욱 확신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도 똑같은 신앙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신앙은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교육 받은 사람들이 취하게 되는 공통의 형식을 나와 함께 하였다. 그것은 “진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때 나에게는 이 단어가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살아 있는 사람처럼) 내가 사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고통 받을 때, 나의 대답은, “진보와 발맞추어 살라” 였다, 나는 마치 배를 탄 어떤 사람이 바람과 파도에 쓸려갈 때, 그에게 있어서 주된 그리고 유일한 질문인,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어딘가로 쓸려가고 있다.”라고 말함으로 답해야만 하는 것과 같았다..

I did not then notice this. Only occasionally -- not by reason but by instinct -- I revolted against this superstition so common in our day, by which people hide from themselves their lack of understanding of life....So, for instance, during my stay in Paris, the sight of an execution revealed to me the instability of my superstitious belief in progress. When I saw the head part from the body and how they thumped separately into the box, I understood, not with my mind but with my whole being, that no theory of the reasonableness of our present progress could justify this deed; and that though everybody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had held it to be necessary, on whatever theory, I knew it to be unnecessary and bad; and therefore the arbiter of what is good and evil is not what people say and do, nor is it progress, but it is my heart and I. Another instance of a realization that the superstitious belief in progress is insufficient as a guide to life, was my brother's death. Wise, good, serious, he fell ill while still a young man, suffered for more than a year, and died painfully, not understanding why he had lived and still less why he had to die. No theories could give me, or him, any reply to these questions during his slow and painful dying. But these were only rare instances of doubt, and I actually continued to live professing a faith only in progress. "Everything evolves and I evolve with it: and why it is that I evolve with all things will be known some day." So I ought to have formulated my faith at that time.

나는 그 당시에 이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오직 가끔씩-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능에 의해-우리 시대에 매우 흔한 이런 미신에 혐오를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의 결여로 그런 미신으로서 자신들을 숨겼다... 그래서, 예를 들면, 내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사형집행 장면은 진보에 대한 나의 미신적인 믿음의 불안정함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몸으로부터 머리 가 떨어져서 그들이 어떻게 따로따로 상자에 쳐넣는가를 내가 보았을 때, 나의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존재 전체로, 우리의 현재의 진보의 이성스러움의 어떤 이론도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세상의 창조로부터 그것이 필요하다고 유지되었다고 하더라도, 무슨 이론상으로라도, 나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며 악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므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결정자는 사람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진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마음과 나였다. 진보에 대한 미신적 믿음이 인생 지침으로서 불충분함을 깨달은 다른 예는 나의 형의 죽음이었다. 지혜롭고, 뛰어나며, 진지하였으나, 아직 젊은데도 그는 병이 들어서 일년 이상을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자신이 왜 살았는지 깨닫지 못하고, 더욱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서. 그가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동안 어떤 이론들도 나에게 아니 그에게 이 질문들에 대한 어떤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의혹에 대한 드문 예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상 오직 진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계속 살아 갔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 그리고 나도 그에 따라 진화한다: 그리고 내가 왜 모든 것과 함계 진화하는가는 언젠가 알려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에 나의 신앙을 형성했어야 했다.

On returning from abroad I settled in the country and chanced to occupy myself with peasant schools. This work was particularly to my taste because in it I had not to face the falsity which had become obvious to me and stared me in the face when I tried to teach people by literary means. Here also I acted in the name of progress, but I already regarded progress itself critically. I said to myself: "In some of its developments progress has proceeded wrongly, and with primitive peasant children one must deal in a spirit of perfect freedom, letting them choose what path of progress they please." In reality I was ever revolving round one and the same insoluble problem, which was: How to teach without knowing what to teach. In the higher spheres of literary activity I had realized that one could not teach without knowing what, for I saw that people all taught differently, and by quarrelling among themselves only succeeded in hiding their ignorance from one another. But here, with peasant children, I thought to evade this difficulty by letting them learn what they liked. It amuses me now when I remember how I shuffled in trying to satisfy my desire to teach, while in the depth of my soul I knew very well that I could not teach anything needful for I did not know what was needful. After spending a year at school work I went abroad a second time to discover how to teach others while myself knowing nothing.

외국에서 돌아오자, 나는 시골에 정착하여 농부들의 학교에 종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 일은 특히 나의 취향에 맞았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명백해진 위선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리고 사람들을 문학적인 수단으로서 가르치고자 할 때 나를 직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나는 진보의 이름으로 행동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진보 자체를 비판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진보는 잘못 진행되었다, 그리고 원시적인 농촌 어린이들은 반드시 완전한 자유의 정신으로 대해 주어야 하며, 그들이 좋아하는 진보의 길을 선택하게 해 주어야 한다.” 사실상, 나는 꼭 같이 풀지 못할 한가지 문제 둘레를 계속 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 지를 모르면서 어떻게 가르치는가 이다. 문학적인 활동의 높은 영역에서 나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가르쳤으며, 서로간에 싸우므로 해서, 오직 자신들의 무지를 다른 사람에게 감추는데 성공했을 뿐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농부들의 아이들에게는,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배우도록 함으로써 이런 어려움을 회피하려고 생각했다. 나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나는 몰랐으므로 필요한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나의 가르치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교묘히 시도하였는지를 기억해 보면 지금도 우스운 일이다. 학교 일에 일년을 소비한 다음 나는 두 번째로 외국에 나가서 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아 보려고 했다.

And it seemed to me that I had learnt this abroad, and in the year of the peasants' emancipation (1861) I returned to Russia armed with all this wisdom, and having become an Arbiter.* I began to teach, both the uneducated peasants in schools and the educated classes through a magazine I published. Things appeared to be going well, but I felt I was not quite sound mentally and that matters could not long continue in that way. And I should perhaps then have come to the state of despair I reached fifteen years later had there not been one side of life still unexplored by me which promised me happiness: that was my marriage.

그리고 내가 이것을 외국에서 배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농민 해방의 해(1861)에 나는 이 모든 지혜로 무장하여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중재자가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한 농부들을, 내가 출판하는 잡지로는 배운 계층을 가르쳤다. 매사가 잘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으로 그렇게 매우 건전하지 못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일들이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만일 나에게 행복을 약속해주는, 나에 의해 아직도 탐구 되지 않은 인생의 한 측면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때 내가 십오년 뒤에 봉착한 절망의 상태에 도달했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결혼이었다.

For a year I busied myself with arbitration work, the schools, and the magazine; and I became so worn out-as a result especially of my mental confusion-and so hard was my struggle as Arbiter, so obscure the results of my activity in the schools, so repulsive my shuffling in the magazine (which always amounted to one and the same thing: a desire to teach everybody and to hide the fact that I did not know what to teach), that I fell ill, mentally rather than physically, threw up everything, and went away to the Bashkirs in the steppes, to breathe fresh air, drink kumys,* and live a merely animal life.

일년 동안 나는 학교들, 그리고 잡지 사이에서 조정 작업을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나는 너무 지쳐서-나의 정신적 혼란의 결과로-그리고 나의 조정자로서의 너무 힘든 노력 때문에, 학교들에서 나의 활동의 결과가 너무 불투명해서, 잡지에서 나의 속임수가 너무나 메스꺼워서(이것은 언제나 똑같은 한가지로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도, 내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는 욕구였다), 나는 병이 들었으며,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쿠미를 마시려고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광활한 초원의 바스키르에 갔다 그리고 오직 동물적인 생활을 하였다.

Returning from there I married. The new conditions of happy family life completely diverted me from all search for the general meaning of life. My whole life was centered at that time in my family, wife and children, and therefore in care to increase our means of livelihood. My striving after self-perfection, for which I had already substituted a striving for perfection in general, i.e. progress, was now again replaced by the effort simply to secure the best possible conditions for myself and my family.

그곳에서 돌아와 나는 결혼을 하였다. 행복한 가족 생활의 새로운 상황이 삶의 일반적 의미의 탐구로부터 나를 완전히 돌려 놓았다. 나의 전체 인생은 그 당시 나의 가족, 아내 그리고 아이들에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의 생계수단을 늘리는 일에 집중되었다. 나의 자기 완성을 위한 추구는, 그에 대해 나는 이미 일반적 완성을 위한 추구로 대체하였는데, 예를 들면, 진보, 나 자신과 나의 가족의 가능한 최상의 환경을 확보하기위한 단순한 노력으로 이제 다시 대체되었다.

So another fifteen years passed.

그래서 다시 십오 년이 흘렀다.

In spite of the fact that I now regarded authorship as of no importance-the temptation of immense monetary rewards and applause for my insignificant work-and I devoted myself to it as a means of improving my material position and of stifling in my soul all questions as to the meaning of my own life or life in general.

저작업을 이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사실에도 불구하고-나 자신의 하찮은 작품들에 대한 엄청난 금전적 보수와 찬사에 대한 유혹때문에-나는 나의 물질적 위치를 개선하며 나의 영혼에서 나 자신의 인생이나 보편적인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모든 질문을 억누르는 수단으로서 그 일에 몰두하였다.

I wrote: teaching what was for me the only truth, namely, that one should live so as to have the best for oneself and one's family.

나는 기록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진실인 것을 가르치는 것, 즉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최상의 것을 갖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

So I lived; but five years ago something very strange began to happen to me. At first I experienced moments of perplexity and arrest of life, and though I did not know what to do or how to live; and I felt lost and became dejected. But this passed and I went on living as before. Then these moments of perplexity began to recur oftener and oftener, and always in the same form. They were always expressed by the questions: What is it for? What does it lead to?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오년 전에 매우 이상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처음에 나는 삶에 있어서 순간적인 당혹감과 정지를 경험했다, 그리고 무엇을 할지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풀이 죽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지나가고 나는 이전처럼 살아 갔다. 그런데 이런 당혹한 순간들이 점점 자주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무엇 때문인가? 그게 무슨 소용이지? 등의 질문으로 표현되었다.

At first it seemed to me that these were aimless and irrelevant questions. I thought that it was all well known, and that if I should ever wish to deal with the solution it would not cost me much effort; just at present I had no time for it, but when I wanted to I should be able to find the answer. The questions however began to repeat themselves frequently, and to demand replies more and more insistently; and like drops of ink always falling on one place they ran together into one black blot.

처음에는 내게는 이것들이 목적이 없으며 연관이 없는 문제들로 여겨 졌었다. 나는 그것이 모두 잘 알려진 것으로 내가 해답을 찾고자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러나 내가 원할 때 나는 틀림없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그 자체가 자주 반복이 되었고, 점점 더 집요하게 대답들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마치 언제나 한 곳에 떨어지는 잉크 방울처럼 그것들은 함께 흘러서 하나의 검은 얼룩이 되었다.

Then occurred what happens to everyone sickening with a mortal internal disease. At first trivial signs of indisposition appear to which the sick man pays no attention; then these signs reappear more and more often and merge into one uninterrupted period of suffering. The suffering increases, and before the sick man can look round, what he took for a mere indisposition has already become more important to him than anything else in the world -- it is death!

그때 죽음에 이르는 속병에 걸려 아픈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나타났다. 병자가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사소한 불쾌한 증상이 처음에 나타난다; 그리고 나서 이들 증상은 점점 더 자주 나타나서 고통이 하나의 끊이지 않는 시기로 합해진다. 고통은 증가되고, 그리고 아픈 사람이 알아 보기 전에, 그가 단순히 불쾌함으로 여긴 것이 이미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그것은 죽음이다!

That is what happened to me. I understood that it was no casual indisposition but something very important, and that if these questions constantly repeated themselves they would have to be answered. And I tried to answer them. The questions seemed such stupid, simple, childish ones; but as soon as I touched them and tried to solve them I at once became convinced, first, that they are not childish and stupid but the most important and profound of life's questions; and secondly that, occupying myself with my Samara estate, the education of my son, or the writing of a book, I had to know why I was doing it. As long as I did not know why, I could do nothing and could not live. Amid the thoughts of estate management which greatly occupied me at that time, the question would suddenly occur: "Well, you will have 6,000 desyatinas* of land in Samara Government and 300 horses, and what then?" ... And I was quite disconcerted and did not know what to think. Or when considering plans for the education of my children, I would say to myself: "What for?" Or when considering how the peasants might become prosperous, I would suddenly say to myself: "But what does it matter to me?" Or when thinking of the fame my works would bring me, I would say to myself, "Very well; you will be more famous than Gogol or Pushkin or Shakespeare or Moliere, or than all the writers in the world-and what of it?" And I could find no reply at all. The questions would not wait, they had to be answered at once, and if I did not answer them it was impossible to live. But there was no answer.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나는 그것이 결코 우연한 불쾌감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무엇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만일 이들 문제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반드시 해답이 나와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에 대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질문들은 너무나 우둔하고, 단순하며,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그것들에 손을 대어 풀어 보려고 하자마자 나는 당장, 첫번째로, 먼저 그것들이 어리석고 우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질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심오하며; 그리고 두 번째로, 내가 나의 사마라의 저택, 자식 교육, 또는 책의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왜 내가 그것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유를 모르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살 수도 없었다. 당시에 엄청나게 나를 붙들고 있던 저택 운영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문제가 갑자기 나타나곤 했다: “글쎄, 너는 사마라 행정구역에서 토지 육천 데사티나와 말 삼백 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엇을?”... 그리고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를 몰랐다. 또는 내 자녀들의 교육에 관한 계획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또는 농부들이 어떻게 번영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갑자기 스스로 묻는다: “그러나 그게 나에게 무슨 상관이지?” 또는 나의 작품들이 나에게 가져다 줄 명성을 생각할 때, 스스로 묻곤 한다, “그래 좋아, 나는 고골 또는 푸쉬킨 또는 쉐익스피어 또는 몰리에르 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작가들 보다 더 유명해 질 것이다-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전혀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질문들은 기다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만일 그것들에 답변하지 못한다면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I felt that what I had been standing on had collapsed and that I had nothing left under my feet. What I had lived on no longer existed, and there was nothing left.

나는 내가 서 있어 온 것이 무너져 내렸으며 나의 발 밑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살아온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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