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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nfession

( 고백 )


by Leo Tolstoy

   
       
   

V

V

   

"But perhaps I have overlooked something, or misunderstood something?" said to myself several times. "It cannot be that this condition of despair is natural to man!" And I sought for an explanation of these problems in all the branches of knowledge acquired by men. I sought painfully and long, not from idle curiosity or listlessly, but painfully and persistently day and night-sought as a perishing man seeks for safety-and I found nothing.

“그렇지만, 아마도 내가 어떤 것을 간과하였거나, 무엇을 오해하였다면?” 하면서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절망의 상태가 인간에게 당연할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모든 지식의 분야에서 이들 문제에 대한 설명을 찾았다. 나는 고통스럽게 그리고 오랫동안, 심심한 호기심이나 억지로가 아니라, 그러나 밤낮으로 고통스러이 그리고 끈질기게 찾았다-죽어가는 사람이 무사함을 바라듯이 찾았다-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I sought in all the sciences, but far from finding what I wanted, became convinced that all who like myself had sought in knowledge for the meaning of life had found nothing. And not only had they found nothing, but they had plainly acknowledged that the very thing which made me despair -- namely the senselessness of life -- is the one indubitable thing man can know.

나는 모든 과학에서 찾았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는 커녕, 나와 같은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지식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절망-말하자면, 인생의 무의미함-하게 만든 바로 그것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임을 명백하게 인정하였다.

I sought everywhere; and thanks to a life spent in learning, and thanks also to my relations with the scholarly world, I had access to scientists and scholars in all branches of knowledge, and they readily showed me all their knowledge, not only in books but also in conversation, so that I had at my disposal all that science has to say on this question of life.

나는 어디에서든지 찾았다, 그리고 학문에 쏟은 삶 덕분에 그리고 학자들의 세상과의 관련 덕택에, 나는 지식의 모든 분야에서 과학자들과 학자들 접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그들의 모든 지식을 내게 보여주었다, 책으로서 만이 아니고 또한 대화를 통해서, 그 결과, 나는 학문이 이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내 손아귀에 넣었다.

I was long unable to believe that it gives no other reply to life's questions than that which it actually does give. It long seemed to me, when I saw the important and serious air with which science announces its conclusions which have nothing in common with the real questions of human life, that there was something I had not understood. I long was timid before science, and it seemed to me that the lack of conformity between the answers and my questions arose not by the fault of science but from my ignorance, but the matter was for me not a game or an amusement but one of life and death, and I was involuntarily brought to the conviction that my questions were the only legitimate ones, forming the basis of all knowledge, and that I with my questions was not to blame, but science if it pretends to reply to those questions.

나는 그것이 실제로 주는 것 외에 인생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랫동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사람의 인생의 실제 문제들과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결론들을 과학이 발표하는 중요하고도 진지한 분위기를 보았을 때, 나에게는 깨닫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오랫동안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과학 앞에서 겁이 많았다, 그리고 답변들과 나의 질문들 사이의 일치의 결여는 과학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무지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있어서 오락이나 재미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의 문제는 유일하게 정당하며, 그리고 이 확신은 모든 지식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나는 나의 문제에 관한한 비난 받아서는 안되며, 그러한 문제에 답하는 척한다면 과학이 비난 받아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My question-that which at the age of fifty brought me to the verge of suicide-was the simplest of questions, lying in the soul of every man from the foolish child to the wisest elder: it was a question without an answer to which one cannot live, as I had found by experience. It was: "What will come of what I am doing today or shall do tomorrow? What will come of my whole life?"

나의 의문-오십의 나이에 나를 자살의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리석은 어린아이부터 가장 현명한 노인들 까지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놓여 있는 가장 단순한 질문들: 내가 경험으로 발견하였듯이, 해답을 찾지 못하면 살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내가 오늘 하고 있는 또는 내일 할 일로부터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나의 전체 인생으로 인하여 무엇이 일어날까?

Differently expressed, the question is: "Why should I live, why wish for anything, or do anything?" It can also be expressed thus: "Is there any meaning in my life that the inevitable death awaiting me does not destroy?"

다르게 표현한다면, 문제는: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왜 무엇인가를 원해야 하고, 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또한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나를 기다리는 피할 수 없는 죽음도 파괴하지 못하는 내 인생에서의 어떤 의미가 있을까?

To this one question, variously expressed, I sought an answer in science. And I found that in relation to that question all human knowledge is divided as it were into two opposite hemispheres at the ends of which are two poles: the one a negative and the other a positive; but that neither at the one nor the other pole is there an answer to life's questions.

이 한가지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하면서, 나는 과학에서 답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관련하여 모든 인간의 지식은 두개의 반구를 이루며 그 끝에는 두개의 극이 있는 것처럼 나누어 진다: 하나는 부정적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쪽의 극에도 저쪽의 극에도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다.

The one series of sciences seems not to recognize the question, but replies clearly and exactly to its own independent questions: that is the series of experimental sciences, and at the extreme end of it stands mathematics. The other series of sciences recognizes the question, but does not answer it; that is the series of abstract sciences, and at the extreme end of it stands metaphysics.

한편의 일련의 과학들은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그 자체의 동떨어진 문제들에 대하여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그것은 일련의 실험 과학들이다, 그리고 그 극단에 수학이 서있다. 다른 한편의 일련의 과학들은 문제를 인식하나, 그것에 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련의 추상적 과학들이다, 그리고 그 극단에는 형이상학이 서있다.

From early youth I had been interested in the abstract sciences, but later the mathematical and natural sciences attracted me, and until I put my question definitely to myself, until that question had itself grown up within me urgently demanding a decision, I contented myself with those counterfeit answers which science gives.

어린 청년기부터 나는 추상적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수학과 자연과학이 나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내가 나의 문제를 명확히 나 자신에게 제시할 때까지, 긴급하게 결정을 요구하면서, 나의 안에서 그 문제 자체가 자라날 때까지, 나는 과학이 주는 그들 허위의 답변에 만족했다.

Now in the experimental sphere I said to myself: "Everything develops and differentiates itself, moving towards complexity and perfection, and there are laws directing this movement. You are a part of the whole. Having learnt as far as possible the whole, and having learnt the law of evolution, you will understand also your place in the whole and will know yourself." Ashamed as I am to confess it, there was time when I seemed satisfied with that. It was just the time when I was myself becoming more complex and was developing. My muscles were growing and strengthening, my memory was being enriched, my capacity to think and understand was increasing, I was growing and developing; and feeling this growth in myself it was natural for me to think that such was the universal law in which I should find the solution of the question of my life. But a time came when the growth within me ceased. I felt that I was not developing, but fading, my muscles were weakening, my teeth falling out, and I saw that the law not only did not explain anything to me, but that there never had been or could be such a law, and that I had taken for a law what I had found in myself at a certain period of my life. I regarded the definition of that law more strictly, and it became clear to me that there could be no law of endless development; it became clear that to say, "in infinite space and time everything develops, becomes more perfect and more complex, is differentiated", is to say nothing at all. These are all words with no meaning, for in the infinite there is neither complex nor simple, neither forward nor backward, nor better or worse.

이제 실험적 분야에 대하여 나는 생각해 보았다: “복합성과 완성을 향하여 움직이면서 모든 것은 발전한다 그리고 스스로 구별된다, 그리고 이 움직임을 이끄는 법칙이 있다. 당신은 전체의 일부이다. 가능한 한 전체를 배우고, 진화의 법칙을 배운다면, 당신은 또한 전체에서의 당신의 위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고백하기도 부끄럽지만, 나는 그것에 만족하던 것처럼 보이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발전하던 바로 그때였다. 나의 근육이 자라서 힘이 세어지고 있었으며, 나의 기억은 풍부하여지고, 나의 사고하며 이해하는 용량은 증가하고 있었다, 나는 자라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서 이런 성장을 느끼면서 그러한 것이 바로 내가 나의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일반적 법칙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 안에서의 성장이 멈춘 때가 왔다. 나는 발전하지 않고 있었으며 사그러들고 있었다, 나의 근육들은 약해지고 있었다, 나의 이빨들도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법칙은 나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법칙이 있었거나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의 일정 시기에 있어서의 나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을 법칙이라고 간주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법칙의 정의를 좀더 엄격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끊임없는 발전의 법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내게 분명해졌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에서 모든 것이 발전한다, 더욱 완전해지고 더욱 복잡해진다, 차별화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함이 아니다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모든 말들이다, 왜냐하면 무한에서는 복잡함도 단순함도, 전진도 후진도, 개선도 개악도 없기 때문이다.

Above all, my personal question, "What am I with my desires?" remained quite unanswered. And I understood that those sciences are very interesting and attractive, but that they are exact and clear in inverse proportion to their applicability to the question of life: the less their applicability to the question of life, the more exact and clear they are, while the more they try to reply to the question of life, the more obscure and unattractive they become. If one turns to the division of sciences which attempt to reply to the questions of life-to physiology, psychology, biology, sociology-one encounters an appalling poverty of thought, the greatest obscurity, a quite unjustifiable pretension to solve irrelevant question, and a continual contradiction of each authority by others and even by himself. If one turns to the branches of science which are not concerned with the solution of the questions of life, but which reply to their own special scientific questions, one is enraptured by the power of man's mind, but one knows in advance that they give no reply to life's questions. Those sciences simply ignore life's questions. They say: "To the question of what you are and why you live we have no reply, and are not occupied with that; but if you want to know the laws of light, of chemical combinations, the laws of development of organisms, if you want to know the laws of bodies and their form, and the relation of numbers and quantities, if you want to know the laws of your mind, to all that we have clear, exact and unquestionable replies."

무엇보다 먼저, 나의 개인적인 질문, “나의 욕망은 어떻게 되는가?” 는 전혀 답변을 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과학은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생의 문제에 대한 적용에서 정확하고 명백한 반비례인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에 그들의 적용성이 줄어들면 들수록 그것들은 더욱 정확하고 명백하다, 반면에, 그것들이 인생의 문제에 답변하려고 하면 할 수록, 그것들은 점점 더 불투명하고 매력이 없게 되어 버린다. 인생의 문제에 대답하려고 시도하는 과학의 분야를 찾는다면-생리학,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그는 놀라운 사상의 빈곤, 최고의 불투명함, 상관 없는 문제를 풀려고 하는 너무나 정당화될 수 없는 주장, 그리고 개개의 권위에 대한 타인들 또는 심지어 스스로에 의한 끊임없는 모순을 만나게 된다. 인생의 문제와 관련이 없는 과학의 분야로서, 그러나 그들 자신의 구체적인 과학적 문제들에 답변하는 분야를 찾는다면, 그는 사람의 마음의 힘에 매료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생의 문제에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음을 미리 알게 된다. 그런 과학들은 단순히 인생의 문제들을 무시해 버린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이 무엇인지, 왜 사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대답이 없으며 그것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빛, 화학적 결합의 법칙, 유기체의 성장법칙을 알고 싶어 한다면, 몸과 그의 구조의 법칙, 그리고 수와 양의 관계를 알고 싶어 한다면, 당신 마음의 법칙을 알고 싶어 한다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명백하고 정확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답들을 가지고 있다.”

In general the relation of the experimental sciences to life's question may be expressed thus: Question: "Why do I live?" Answer: "In infinite space, in infinite time, infinitely small particles change their forms in infinite complexity, and when you have under stood the laws of those mutations of form you will understand why you live on the earth."

일반적으로 실험적 과학의 인생의 문제에 대한 관계는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질문: “나는 왜 사는가” 답변: 무한한 우주에서, 무한한 시간에서, 무한하게 작은 분자들이 그들의 모양을 무한한 복합성에서 변화시킨다, 그리고 당신이 그러한 변화의 법칙들을 깨달았을 때 당신이 땅 위에 왜 사는지 깨달을 것이다.

Then in the sphere of abstract science I said to myself: "All humanity lives and develops on the basis of spiritual principles and ideals which guide it. Those ideals are expressed in religions, in sciences, in arts, in forms of government. Those ideals become more and more elevated, and humanity advances to its highest welfare. I am part of humanity, and therefore my vocation is to forward the recognition and the realization of the ideals of humanity." And at the time of my weak-mindedness I was satisfied with that; but as soon as the question of life presented itself clearly to me, those theories immediately crumbled away. Not to speak of the unscrupulous obscurity with which those sciences announce conclusions formed on the study of a small part of mankind as general conclusions; not to speak of the mutual contradictions of different adherents of this view as to what are the ideals of humanity; the strangeness, not to say stupidity, of the theory consists in the fact that in order to reply to the question facing each man: "What am I?" or "Why do I live?" or "What must I do?" one has first to decide the question: "What is the life of the whole?" (which is to him unknown and of which he is acquainted with one tiny part in one minute period of time.) To understand what he is, one man must first understand all this mysterious humanity, consisting of people such as himself who do not understand one another.

한편, 추상적 과학의 범주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모든 인류는 그것이 지향하는 정신적인 원리와 이상을 토대로 살아가며 발전한다. 그들 이상들은 종교, 과학, 예술, 정부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들 이상들은 점점 더 높아지고, 인류는 그의 최상의 행복으로 나아간다. 나는 인류의 부분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의 소명은 인류의 이상들에 대한 인식과 현실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연약한 마음의 시절에는 나는 그것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생의 문제 자체가 내게 명백하게 제시되자마자, 그들 이론들은 즉시 가루가 되어 버렸다. 그들 과학들이 인류의 작은 부분을 연구하여 구성한 결론들을 일반적인 결론으로 선언하는 뻔뻔스러운 애매함은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이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들 시각의 상이한 추종자들의 상호 모순은 말할 것도 없이; 어리석음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이론의 생소함은 각기 사람들에게 당면한 문제들에 답변하려는 사실에 있다: “나는 무엇인가?” 또는 “나는 왜 사는가?” 또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이 질문부터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전체의 인생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것에 대하여 그는 하나의 작은 시기의 시간 안에서 하나의 작은 부분만 면식이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 위해서 그는 반드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모든 신비에 싸인 인류를 깨달아야 한다.

I have to confess that there was a time when I believed this. It was the time when I had my own favourite ideals justifying my own caprices, and I was trying to devise a theory which would allow one to consider my caprices as the law of humanity. But as soon as the question of life arose in my soul in full clearness that reply at once flew to dust. And I understood that as in the experimental sciences there are real sciences, and semi-sciences which try to give answers to questions beyond their competence, so in this sphere there is a whole series of most diffused sciences which try to reply to irrelevant questions. Semi-sciences of that kind, the juridical and the social-historical, endeavour to solve the questions of a man's life by pretending to decide each in its own way, the question of the life of all humanity.

나는 내가 이것을 믿던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 때 나는 자신의 변덕들을 정당화 시켜주는 나의 가장 선호하는 이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변덕들을 인류의 법칙으로 여기도록 이끄는 이론을 고안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가 나의 영혼에 완전한 명백함으로 제기되자 그러한 답변은 당장 먼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실험 과학에서, 진정한 과학들, 그리고 그들의 능력을 초월하여 문제들에 대답하려 시도하는 유사 과학들이 있는 것처럼, 이 범주에는 상관성이 없는 문제들에 답변하려 시도하는 가장 널리 퍼진 총체적이 일련의 과학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률 및 사회-역사 등의 그러한 종류의 유사 과학들은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인류의 인생의 문제를 각자가 각기의 방법대로 해결하겠다고 감히 주장함으로써,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한다.

But as in the sphere of man's experimental knowledge one who sincerely inquires how he is to live cannot be satisfied with the reply -- "Study in endless space the mutations, infinite in time and in complexity, of innumerable atoms, and then you will understand your life" -- so also a sincere man cannot be satisfied with the reply: "Study the whole life of humanity of which we cannot know either the beginning or the end, of which we do not even know a small part, and then you will understand your own life." And like the experimental semi-sciences, so these other semi-sciences are the more filled with obscurities, inexactitudes, stupidities, and contradictions, the further they diverge from the real problems. The problem of experimental science is the sequence of cause and effect in material phenomena. It is only necessary for experimental science to introduce the question of a final cause for it to become nonsensical. The problem of abstract science is the recognition of the primordial essence of life. It is only necessary to introduce the investigation of consequential phenomena (such as social and historical phenomena) and it also becomes nonsensical.

그러나 사람의 실험적인 지식의 범주에서처럼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다-‘끝없는 공간에서 무수한 원자들의 변화들을 연구하라, 무한한 시간 속에서 그리고 복잡 함에서,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함 같이, 또한 진지한 사람은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다: “우리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인류의 전체 인생을 연구하라, 그것에 대하여는 우리도 심지어 조그만 부분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험적인 유사 과학들처럼, 이들의 다른 유사 과학들은 더 많은 애매함 들, 부정확함 들, 우둔함 들, 그리고 모순들로 가득 차 있으며, 실제 문제들보다 더욱 멀리 벌어져 나간다. 실험 과학의 문제는 물질적 현상들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의 연속이다. 실험 과학은 그에 대한 마지막 원인에 대한 문제 제기만이 필요할 뿐이며 무의미해 진다. 추상적 과학의 문제는 인생의 원초적인 본질을 인식함이다. 그것은 오직 결과론적인 현상들(예를 들면 사회적 및 역사적 현상들)에 대한 조사를 제기하는 것에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 또한 무의미해진다.

Experimental science only then gives positive knowledge and displays the greatness of the human mind when it does not introduce into its investigations the question of an ultimate cause. And, on the contrary, abstract science is only then science and displays the greatness of the human mind when it puts quite aside questions relating to the consequential causes of phenomena and regards man solely in relation to an ultimate cause. Such in this realm of science -- forming the pole of the sphere -- is metaphysics or philosophy. That science states the question clearly: "What am I, and what is the universe? And why do I exist, and why does the universe exist?" And since it has existed it has always replied in the same way. Whether the philosopher calls the essence of life existing within me, and in all that exists, by the name of "idea", or "substance", or "spirit", or "will", he says one and the same thing: that this essence exists and that I am of that same essence; but why it is he does not know, and does not say, if he is an exact thinker. I ask: "Why should this essence exist? What results from the fact that it is and will be?" ... And philosophy not merely does not reply, but is itself only asking that question. And if it is real philosophy all its labour lies merely in trying to put that question clearly. And if it keeps firmly to its task it cannot reply to the question otherwise than thus: "What am I, and what is the universe?" "All and nothing"; and to the question "Why?" by "I do not know".

실험 과학은 오직 긍정적인 지식을 주며 긍극적인 원인에 대한 문제 조사에 들어가지 못할 때는 인간의 마음이 위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반대로, 추상적 과학은 오직 그때에 과학이다. 그리고 현상들에 대한 결과적인 원인들에 관련한 문제들을 제껴 놓으며 사람을 오직 궁극적인 원인에 관련하여 고려할 때에 인간의 마음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역에 있는 것-구의 극을 형성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다. 그러한 과학은 그 문제를 명백히 말해 준다: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주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존재한 이후로 언제나 똑같은 식으로 답변이 되었다. 철학자가 인생의 본질이 나 안에 그리고 “이념”, 또는 “물질”, 또는 “영혼”, 또는 “의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존재한다고 일컫는다 하더라도, 그는 똑같은 한가지를 말함이다: 이 본질은 존재하며, 나는 똑같은 본질이다; 그러나 왜 그러한지 그는 모른다, 그리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만일 꼼꼼한 사상가라면. 나는 묻는다: “왜 이 본질이 존재하여야 하는가? 그것이 있으며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하여 초래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철학은 답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차제도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진정한 철학이라면 그 모든 노력은 그 문제를 명확하게 해석함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면 이것 외에는 문제에 대하여 대답할 수 없다: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주는 무엇인가?” 는 “유(有) 그리고 무(無)”; 그리고 “왜” 에 관한 질문에는 “모른다”

So that however I may turn these replies of philosophy, I can never obtain anything like an answer-and not because, as in the clear experimental sphere, the reply does not relate to my question, but because here, though all the mental work is directed just to my question, there is no answer, but instead of an answer one gets the same question, only in a complex form.

그러한 결과로, 내가 아무리 이들 철학들의 대답을 들어 보아도, 나는 대답 같은 것을 결코 얻을 수 없다-분명한 실험적 범주에서처럼, 그 대답은 나의 질문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 비록 모든 정신적 작업이 오직 나의 질문에 맞추어 졌지만, 답이 없다는 것이며, 그러나 답변 대신에 더욱 복잡한 모양으로서 똑같은 의문만 갖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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