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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nfession

( 고백 )


by Leo Tolstoy

   
       
   

IX

IX
   

A contradiction arose from which there were two exits. Either that which I called reason was not so rational as I supposed, or that which seemed to me irrational was not so irrational as I supposed. And I began to verify the line of argument of my rational knowledge.

모순이 일어나면서 그로부터 두 가지 출구가 있었다. 내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거나, 내게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던 것이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이성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Verifying the line of argument of rational knowledge I found it quite correct. The conclusion that life is nothing was inevitable; but I noticed a mistake. The mistake lay in this, that my reasoning was not in accord with the question I had put. The question was: "Why should I live, that is to say, what real, permanent result will come out of my illusory transitory life -- what meaning has my finite existence in this infinite world?" And to reply to that question I had studied life.

이성적 지식의 논거의 방향을 증명하자면 나는 그것이 매우 정확하다고 알고 있다. 인생은 무(無)라는 결론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오류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류는 여기에 놓인다, 나의 추론은 내가 제시한 문제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나의 환상적 일시적 인생으로부터 무슨 실제적, 영구적 결과가 나올 것인가-이 무한한 세상에서 나의 유한한 존재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인생을 연구했다.

The solution of all the possible questions of life could evidently not satisfy me, for my question, simple as it at first appeared, included a demand for an explanation of the finite in terms of the infinite, and vice versa.

인생에 대한 모든 가능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분명히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의 질문은, 그것은 처음에 단순해 보이지만, 유한함을 무한함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였다.

I asked: "What is the meaning of my life, beyond time, cause, and space?" And I replied to quite another question: "What is the meaning of my life within time, cause, and space?" With the result that, after long efforts of thought, the answer I reached was: "None."

나는 물었다: ‘나의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간, 원인, 그리고 공간을 초월하여?’ 그리고 나는 전혀 다른 질문에 대답하였다: ‘시간, 원인, 그리고 공간 안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각을 통한 오랜 노력들 뒤에, 내가 도달한 대답은 : ‘없다’ 라는 결과였다.

In my reasonings I constantly compared (nor could I do otherwise) the finite with the finite, and the infinite with the infinite; but for that reason I reached the inevitable result: force is force, matter is matter, will is will, the infinite is the infinite, nothing is nothing-and that was all that could result.

나의 추론에서 나는 부단히 유한함을 유한함과, 그리고 무한함을 무한함과 비교하였다(다르게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이르렀다: 힘은 힘이다, 물질은 물질이다, 의지는 의지이다, 무한은 무한이다, 무는 무이다-그리고 그것은 초래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It was something like what happens in mathematics, when thinking to solve an equation, we find we are working on an identity. The line of reasoning is correct, but results in the answer that a equals a, or x equals x, or o equals o. The same thing happened with my reasoning in relation to the question of the meaning of my life. The replies given by all science to that question only result in--identity.

그것은 수학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등식을 풀고자 할 때, 우리는 항등식을 풀고 있음을 발견한다. 추론의 방향은 정확했다, 그러나 a = a 또는 x=x 또는 o=o 인 답이 나온다. 나의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관련된 나의 추론에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질문에 대해 모든 과학에 의하여 주어진 해답들은 오로지--항등식이란 결과였다.

And really, strictly scientific knowledge-that knowledge which begins, as Descartes's* did, with complete doubt about everything-rejects all knowledge admitted on faith and builds everything afresh on the laws of reason and experience, and cannot give any other reply to the question of life than that which I obtained: an indefinite reply. Only at first had it seemed to me that knowledge had given a positive reply-the reply of Schopenhauer: that life has no meaning and is an evil. But on examining the matter I understood that the reply is not positive, it was only my feeling that so expressed it. Strictly expressed, as it is by the Brahmins* and by Solomon and Schopenhauer, the reply is merely indefinite, or an identity: o equals o, life is nothing. So that philosophic knowledge denies nothing, but only replies that the question cannot be solved by it--that for it the solution remains indefinite.

그리고 사실적이며 엄격한 과학적인 지식-데카르트가 그랬듯이,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의심으로 시작되는 그런 지식--은 신앙에서 인정되는 모든 지식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성과 경험의 법칙에 따라서 모든 것을 새로이 쌓는다, 그리고 내가 구한 것 같은 무한(否定)한 대답 외의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다른 어떤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처음에 내게는 지식이 긍정적인 대답을 준 것처럼 보였다--쇼펜하우어의 대답: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악이다. 그러나 그것을 조사해보자 나는 그 대답은 긍정적이 아니라 그렇게 표현한 것은 오직 나의 감정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격히 표현하자면, 브라만, 그리고 솔로몬 그리고 쇼펜하우어처럼, 그 대답은 단순히 무한함이거나 항등이다: O는 O이며,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철학적인 지식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그 질문은 지식으로 풀 수 없다고 대답한다--그것에 관한한 해답은 부정(否定)이다는 것.

Having understood this, I understood that it was not possible to seek in rational knowledge for a reply to my question, and that the reply given by rational knowledge is a mere indication that a reply can only be obtained by a different statement of the question and only when the relation of the finite to the infinite is included in the question. And I understood that, however irrational and distorted might be the replies given by faith, they have this advantage, that they introduce into every answer a relation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without which there can be no solution.

이것을 이해하게 되자, 나는 이성적 지식에서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이성적 지식에 의해 나온 대답은, 질문에 대한 상이한 진술에 의해서, 그리고, 유한함의 무한함에 대한 관계가 질문에 포함될 때에만 오직 구해질 수 있음의 단순한 암시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신앙에 의해 주어진 대답들이 아무리 비이성적이며 왜곡이 되어 있어도, 그것들은 이러한 장점이 있다, 즉, 그것들은 유한과 무한 사이의 관계를 각각의 해답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없으면 해답은 있을 수 없다.

In whatever way I stated the question, that relation appeared in the answer. How am I to live? -- According to the law of God. What real result will come of my life? -- Eternal torment or eternal bliss. What meaning has life that death does not destroy? -- Union with the eternal God: heaven.

내가 그 질문을 어떤 방법으로 말하더라도, 그런 관계는 대답에 나타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나의 인생에서 어떤 사실적인 결과가 나올 것인가?-영원한 고통 또는 영원한 행복. 죽음이 파괴하지 않는 인생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영원한 하나님과 연합: 천국.

So that besides rational knowledge, which had seemed to me the only knowledge, I was inevitably brought to acknowledge that all live humanity has another irrational knowledge -- faith which makes it possible to live. Faith still remained to me as irrational as it was before, but I could not but admit that it alone gives mankind a reply to the questions of life, and that consequently it makes life possible. Reasonable knowledge had brought me to acknowledge that life is senseless -- my life had come to a halt and I wished to destroy myself. Looking around on the whole of mankind I saw that people live and declare that they know the meaning of life. I looked at myself -- I had lived as long as I knew a meaning of life and had made life possible.

그리하여서, 내게 유일한 지식처럼 보이던 이성적 지식 외에, 나는 필연적으로 모든 인류는 다른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신앙. 신앙은 내게 여전이 이전처럼 비이성적으로 남아 잇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이 인류에게 인생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주며,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인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적인 지식이 나로 하여금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인정하게 하였다-나의 인생은 정지되었고 나는 자신을 파괴하기를 원했다. 전체 인류의 위에서 둘러보자, 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인생의 의미를 안다고 선언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신을 바라 보았다-내가 인생의 의미를 아는 한 나는 살았으며 인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Looking again at people of other lands, at my contemporaries and at their predecessors, I saw the same thing. Where there is life, there since man began faith has made life possible for him, and the chief outline of that faith is everywhere and always identical.

다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나와 동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선조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같은 것을 보았다. 인생이 있는 곳이, 그곳에선 사람이 신앙을 시작하였으며, 그에게 인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주된 요점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동일했다.

Whatever the faith may be, and whatever answers it may give, and to whomsoever it gives them, every such answer gives to the finite existence of man an infinite meaning, a meaning not destroyed by sufferings, deprivations, or death. This means that only in faith can we find for life a meaning and a possibility. What, then, is this faith? And I understood that faith is not merely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etc., and is not a revelation (that defines only one of the indications of faith), is not the relation of man to God (one has first to define faith and then God, and not define faith through God); it is not only agreement with what has been told one (as faith is most usually supposed to be), but faith is a knowledge of the meaning of human life in consequence of which man does not destroy himself but lives. Faith is the strength of life. If a man lives he believes in something. If he did not believe that one must live for something, he would not live. If he does not see and recognize the illusory nature of the finite, he believes in the finite; if he understands the illusory nature of the finite, he must believe in the infinite. Without faith he cannot live.

신앙이 무엇이던지, 그리고 그 대답들이 무엇이던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 지던지, 각각의 그런 대답은 인간의 유한한 존재에게 무한한 의미, 즉, 고통, 상실 또는 죽음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 의미를 준다. 이것은 오직 신앙 안에서 우리가 인생에 대한 의미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신앙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신앙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 등이 아니며, (오직 신앙의 표시중의 하나를 정의하는) 계시도 아니고,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아니다(우리는 먼저 신앙을, 다음엔 하나님을 정의해야 하며, 하나님을 통해서 신앙을 정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지시된 대로의 계약일 뿐만 아니라(신앙이 가장 흔히 그렇게 여겨지듯이), 신앙은 사람의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지식이며, 그 결과로 사람은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 만일 사람이 산다면 그는 무엇인가를 믿는다. 사람은 반드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가 믿지 않는다면, 그는 살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유한한 것의 환상적 본질을 보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유한함을 믿는다; 만일 그가 유한한 것의 환상적인 본질을 깨닫는다면, 그는 분명히 무한한 것을 믿는다. 신앙이 없이는 그는 살 수 없다.

And I recalled the whole course of my mental labour and was horrified. It was now clear to me that for man to be able to live he must either not see the infinite, or have such an explanation of the meaning of life as will connect the finite with the infinite. Such an explanation I had had; but as long as I believed in the finite I did not need the explanation, and I began to verify it by reason. And in the light of reason the whole of my former explanation flew to atoms. But a time came when I ceased to believe in the finite. And then I began to build up on rational foundations, out of what I knew, an explanation which would give a meaning to life; but nothing could I build. Together with the best human intellects I reached the result that o equals o, and was much astonished at that conclusion, though nothing else could have resulted.

그리고 나는 나의 정신적 노동의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는 전율했다. 사람이 살 수 있으려면 그는 반드시 무한함을 깨닫지 않아야 하거나, 유한함을 무한함에 연결하여 주는 것 같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그러한 설명을 가져야 함이 이제 나에게는 분명해졌다. 그러한 설명을 나는 가졌었다; 그러나 내가 유한함을 믿는 한 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성으로 증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성의 빛 안에서 나의 이전 설명의 전부는 원자들로 날아 가버렸다. 그러나 내가 유한함을 믿기를 그만두는 때가 왔다. 그리고 그때 나는 이성적인 토대 위에서,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인생에 의미를 줄 설명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지을 수 없었다. 나는 가장 뛰어난 인간의 지성들과 함께 O는 O가 되는 결과에 도달했다, 그리고, 비록 다른 어떤 것으로도 초래될 수 없었겠지만, 그러한 결론에 너무나 놀랐다.

What was I doing when I sought an answer in the experimental sciences? I wished to know why I live, and for this purpose studied all that is outside me. Evidently I might learn much, but nothing of what I needed.

실험적 과학들에서 내가 해답을 찾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내가 왜 사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으로 나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을 탐구하였다. 분명히 나는 많이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필요한 것을 아무것도 없었다.

What was I doing when I sought an answer in philosophical knowledge? I was studying the thoughts of those who had found themselves in the same position as I, lacking a reply to the question "why do I live?" Evidently I could learn nothing but what I knew myself, namely that nothing can be known.

내가 철학적 지식에서 해답을 찾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나는 ‘왜 내가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빼놓은 채로 나와 똑같은 위치에서 자신들을 발견한 사람들의 사상을 탐구하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오직 스스로 알 수 있는 것만을 배울 수 있었으며,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What am I? -- A part of the infinite. In those few words lies the whole problem.

나는 무엇인가?-무한함의 일부분. 그러한 몇 마디의 말에 전체 문제가 놓여있다.

Is it possible that humanity has only put that question to itself since yesterday? And can no one before me have set himself that question -- a question so simple, and one that springs to the tongue of every wise child?

인류가 오직 어제부터 그 문제를 자신에게 내놓았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나 이전에 아무도 그 문제를 스스로 제기할 수 없었을까-너무나 단순한 문제, 그리고 모든 지혜로운 어린이의 혀에서 조차 튀어 나올 수 있는 것인데도?

Surely that question has been asked since man began; and naturally for the solution of that question since man began it has been equally insufficient to compare the finite with the finite and the infinite with the infinite, and since man began the relation of the finite to the infinite has been sought out and expressed.

확실히 그런 질문은 인간이 시작되면서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당연히도 인간이 시작된 이후로 그런 문제의 해답을 위해서 유한함을 유한함과 그리고 무한함을 무한함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공히 불충분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시작된 후로 유한함과 무한함의 관계는 추구되었으며 표현되었다.

All these conceptions in which the finite has been adjusted to the infinite and a meaning found for life-the conception of God, of will, of goodness-we submit to logical examination. And all those conceptions fail to stand reason's criticism.

이 모든 개념들, 유한함이 무한함에 맞추어 지고 인생에 대한 의미가 발견되는 이러한 모든 개념들-하나님, 의지, 선의 개념-을 우리는 논리적 검증에 맡긴다. 그리고 그 모든 개념들은 이성의 비판에 맞설 수가 없다.

Were it not so terrible it would be ludicrous with what pride and self-satisfaction we, like children, pull the watch to pieces, take out the spring, make a toy of it, and are then surprised that the watch does not go.

그것이 그리 무섭지 않다면, 자만과 자기만족으로 우리가, 어린아이들처럼, 시계를 잡아당겨 조각을 내고, 스프링을 꺼내서, 그것으로 장난하며, 그리고 나서 그 시계가 가지 않는다고 놀라면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A solution of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and such a reply to the question of life as will make it possible to live, is necessary and precious. And that is the only solution which we find everywhere, always, and among all peoples: a solution descending from times in which we lose sight of the life of man, a solution so difficult that we can compose nothing like it -and this solution we light-heartedly destroy in order again to set the same question, which is natural to everyone and to which we have no answer.

유한함과 무한함 사이의 모순의 해결, 그리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그러한 대답은 필요하고 귀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어느 곳에나, 언제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 찾는 유일한 해결이다: 사람의 인생의 시각을 잃어버린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해답, 너무나 어려워서 해답 같은 것을 만들 수 없는 해답-그리고 우리는 이 해답을 가벼운 마음으로 파괴하여 똑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당연하며, 그에 대한 대답은 없다.

The conception of an infinite god, the divinity of the soul, the connexion of human affairs with God, the unity and existence of the soul, man's conception of moral goodness and evil -- are conceptions formulated in the hidden infinity of human thought, they are those conceptions without which neither life nor I should exist; yet rejecting all that labour of the whole of humanity, I wished to remake it afresh myself and in my own manner.

무한한 신의 개념, 영혼의 신성, 사람의 일들과 하나님의 관련, 영혼의 연합과 존재, 사람의 도덕적 선함과 악에 대한 개념-은 인간 사상의 숨겨진 무한에서 형성된 개념들이며, 그러한 개념이 없다면 인생도 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체 인류의 그러한 모든 노력을 거부하면서, 나는 그것을 스스로 그리고 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싶어하였다.

I did not then think like that, but the germs of these thoughts were already in me. I understood, in the first place, that my position with Schopenhauer and Solomon, notwithstanding our wisdom, was stupid: we see that life is an evil and yet continue to live. That is evidently stupid, for if life is senseless and I am so fond of what is reasonable, it should be destroyed, and then there would be no one to challenge it. Secondly, I understood that all one's reasonings turned in a vicious circle like a wheel out of gear with its pinion. However much and however well we may reason we cannot obtain a reply to the question; and o will always equal o, and therefore our path is probably erroneous. Thirdly, I began to understand that in the replies given by faith is stored up the deepest human wisdom and that I had no right to deny them on the ground of reason, and that those answers are the only ones which reply to life's question.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의 씨앗은 이미 나의 안에 있었다. 첫번째로, 우리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 및 솔로몬과 함께하는 나의 위치는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인생은 악이다 그러나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분명히 어리석다, 왜냐하면 만일 인생이 의미가 없으며 내가 이성적인 것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파괴되어야 하며, 그러면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추론이 마치 기어에서 빠져 나온 바퀴처럼 악순환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그리고 아무리 훌륭하게 추론하더라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O는 언제나 O일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길은 아마도 잘못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는 가장 깊은 인간의 지혜는 신앙에 의하여 주어지는 대답들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리고 나는 이성을 이유로 하여 그것들을 부인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 대답은 인생의 질문에 응답하는 유일한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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