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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y Leo Tolstoy

   
   
CHAPTER IV.  4  

CHRISTIANITY MISUNDERSTOOD BY MEN OF SCIENCE.

학자들에 의해서 오해되는 기독교

Attitude of Men of Science to Religions in General-What Religion is, and What is its Significance for the Life of Humanity-Three Concep­tions of Life-Christian Religion the Expression of the Divine Con­ception of Life-Misinterpretation of Christianity by Men of Science, who Study it in its External Manifestations Due to their Criticizing it from Standpoint of Social Conception of Life-Opinion, Resulting from this Misinterpretation, that Christ's Moral Teaching is Exagger­ated and Cannot be put into Practice-Expression of Divine Conception of Life in the Gospel-False Ideas of Men of Science on Christianity Proceed from their Conviction that they have an Infallible Method of Criticism-From which come Two Misconceptions in Regard to Chris­tian Doctrine-First Misconception, that the Teaching Cannot be put into Practice, Due to the Christian Religion Directing Life in a Way Different from that of the Social Theory of Life-Christianity holds up Ideal, does not lay down Rules-To the Animal Force of Man Christ Adds the Consciousness of a Divine Force-Christianity Seems to Destroy Possibility of Life only when the Ideal held up is Mistaken for Rule-Ideal Must Not be Lowered-Life,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is Movement-The Ideal and the Precepts-Second Mis­conception Shown in Replacing Love and Service of God by Love and Service of Humanity-Men of Science Imagine their Doctrine of Service of Humanity and Christianity are Identical-Doctrine of Service of Humanity Based on Social Conception of Life-Love for Humanity, Logically Deduced from Love of Self, has No Meaning because Humanity is a Fiction-Christian Love Deduced from Love of God, Finds its Object in the whole World, not in Humanity Alone -Christianity Teaches Man to Live in Accordance with his Divine Nature-It Shows that the Essence of the Soul of Man is Love, and that his Happiness Ensues from Love of God, whom he Recognizes as Love within himself.

종교들 일반에 관한 학자들의 태도-종교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류의 삶에서 그것의 중요성은 무엇인가-기독교, 삶에 대한 신적인 개념의 표현-과학자들에 의한 기독교의 오해, 그들은 기독교를 그 외적인 표상들로서 연구하다, 삶의 사회적 개념의 입장에서부터 그것을 비판함에 기인하다-여론, 이런 오해로부터 초래되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은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실천할 수 없다-복음서에서 삶에 대한 천국의 개념의 표현-기독교에 대한 과학자들의 틀린 생각들, 그들이 오류가 없는 비평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다-그것으로부터 기독교의 교리에 관해서 두가지 오해가 나오다-첫번째 오해, 가르침은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삶에 관한 사회적 이론으로부터 다른 방법에서 삶을 통제하는 기독교 종교-기독교는 이상을 들지만 명령은 내려 놓지 않는다-사람의 동물적인 힘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힘의 의식을 더한다-기독교는 들려진 이상이 오직 명령으로서 오해될 때 삶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이상은 낯추어질 수 없다-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은 움직임이다-이상과 가르침-두번째 오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인류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대체함-과학자들은 그들의 인류에 대한 봉사의 교리를 기독교와 동일하다고 상상하다-인류에 대한 봉사의 교리는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삶에 기초하다-인류애 대한 사랑, 논리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유추되다,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류애는 허구이기 때문이다-기독교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추, 그 대상을 전체 세상에서 찾는다, 인류애 만이 아니다-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하여 살도록 가르친다-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며, 하나님을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사랑으로 인식한다.

Now I will speak of the other view of Christianity which hinders the true understanding of it-the scientific view.

이제 나는 기도교의 진정한 의미를 가로막는 다른 시각-과학적인 시각-에 대해 말할 것이다.

Churchmen substitute for Christianity the version they have framed of it for themselves, and this view of Chris­tianity they regard as the one infallibly true one.

성직자들은 기독교를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것으로부터 조작한 버전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의 시각을 그들은 유일한 오류가 없는 진실한 것으로 여긴다.

Men of science regard as Christianity only the tenets held by the different churches in the past and present; and finding that these tenets have lost all the significance of Christianity, they accept it as a religion which has out­lived its age.

과학자들은 기독교를 오직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교회들이 견지한 강령으로서 여긴다; 그리고 이들 강령들이 기독교의 모든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들은 그것을 시대가 지나서 낡아 버린 종교로 받아들인다.

To see clearly how impossible it is to understand the Christian teaching from such a point of view, one must form for oneself an idea of the place actually held by religions in general, by the Christian religion in particular, in the life of mankind, and of the significance attributed to them by science.

그러한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분명히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먼저 일반 종교들이, 특히 인류의 삶에서 기독교적인 종교가 실제로 견지하는 입장에 대한, 그리고 과학에 의해서 그들에게 부여된 의미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여야 한다.

Just as the individual man cannot live without having some theory of the meaning of his life, and is always, though often unconsciously, framing his conduct in accord­ance with the meaning he attributes to his life, so too asso­ciations of men living in similar conditions-nations-can­not but have theories of the meaning of their associated life and conduct ensuing from those theories. And as the individual man, when he attains a fresh stage of growth, inevitably changes his philosophy of life, and the grown-up man sees a different meaning in it from the child, so too associations of men-nations-are bound to change their philosophy of life and the conduct ensuing from their philosophy, to correspond with their development.

각자의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에 관한 약간의 이론을 가짐이 없이 살 수없으며, 비록 가끔 무의식적이지만, 언제나 자신의 삶에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서 자신의 행위를 형성하는 것과 똑같이, 비슷한 조건들-민족들-에서 사는 사람들의 교제들 역시 그들의 연관된 삶의 의미에 대한 이론들과 그러한 이론들로부터 따라오는 행위에 대한 이론들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개개의 사람으로써, 그가 성장에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설 때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의 철학을 바꾼다, 그리고 성인은 그것에서 어린이와는 다른 의미를 보게되는 것처럼, 사람들-국가들(민족들)의 교제들 역시 그들의 삶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으로부터 따라오는 행위를 바꾸게 되어 있으며, 그들의 발전과 일치하게 되어 있다.

The difference, as regards this, between the individual man and humanity as a whole, lies in the fact that the individual, in forming the view of life proper to the new period of life on which he is entering and the conduct resulting from it, benefits by the experience of men who have lived before him, who have already passed through the stage of growth upon which he is entering. But humanity cannot have this aid, because it is always moving along a hitherto untrodden track, and has no one to ask how to understand life, and to act in the conditions on which it is entering and through which no one has ever passed before.

이점에 대하여, 개인 사람과 전체로서의 인류의 차이는, 삶의 시각을 형성함에서 그가 진입하는 삶의 새로운 기간 및 그로부터 초래되는 행위에 적합함으로써, 자신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으로 혜택을 보며, 그 사람들은 이미 그가 진입하고 있는 성장의 단계를 통과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이러한 도움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밟지 않은 길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고, 삶을 어떻게 깨달아야 할지, 그리고 그것이 진입하는그리고 전에 아무도통과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물어 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Nevertheless, just as a man with wife and children can­not continue to look at life as he looked at it when he was a child, so too in the face of the various changes that are taking place, the greater density of population, the estab­lishment of communication between different peoples, the improvements of the methods of the struggle with nature, and the accumulation of knowledge, humanity cannot con­tinue to look at life as of old, and it must frame a new theory of life, from which conduct may follow adapted to the new conditions on which it has entered and is enter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자식들을 가진 사람이 그가 어릴 때처럼 삶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 높은 인구 밀도, 사람들 사이의 통신의 확립, 자연과 투쟁하는 방법들의 개선, 그리고 지식의 축적을 직면함에 있어서, 역시 인류는 삶을 옛날처럼 바라볼 수 없으며, 새로운 삶의 이론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입하였거나 진입하고 있는 새로운 환경들에 적응하여 그 이론으로부터 행위가 따를 것이다.

To meet this need humanity has the special power of producing men who give a new meaning to the whole of human life-a theory of life from which follow new forms of activity quite different from all preceding them. The formation of this philosophy of life appropriate to humanity in the new conditions on which it is entering, and of the practice resulting from it, is what is called religion.

이러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류는 인간의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사람들을 생산하는 특별한 힘을 가진다-모든 이전 것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형태의 행위들이 동반되는 삶의 이론을 말함이다. 인류가 진입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인류에게 적합한 이러한 삶의 철학,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되는 행위의 형성이 소위 종교이다.

And therefore, in the first place, religion is not, as science imagines, a manifestation which at one time cor­responded with the development of humanity, but is after-ward outgrown by it. It is a manifestation always inherent in the life of humanity, and is as indispensable, as inherent in humanity at the present time as at any other. Secondly, religion is always the theory of the practice of the future and not of the past, and therefore it is clear that investigation of past manifestations cannot in any case grasp the essence of religion.

그리고 그러므로, 첫번째로, 종교는, 과학이 상상하는 것처럼, 한 때 인류의 발전과 함께 하다가, 뒤에 가서 인류에게 필요가 없어져 버린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인류의 삶에 내재된 상징이며, 다른 시대 만큼이나 현재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인류에게 내재된 것이다. 두번째로, 종교는 언제나 미래의 행위에 대한 이론이지 과거의 이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징들을 조사함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The essence of every religious teaching lies not in the desire for a symbolic expression of the forces of nature, nor in the dread of these forces, nor in the craving for the marvelous, nor in the external forms in which it is manifested, as men of science imagine; the essence of religion lies in the faculty of men of foreseeing and pointing out the path of life along which humanity must move in the discovery of a new theory of life, as a result of which the whole future conduct of humanity is changed and dif­ferent from all that has been before.

각각의 종교적인 가르침의 본질은 ,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자연의 힘들에 관한 상징적인 표현에 대한 욕구나, 이러한 힘들을 두려워함이나, 기적을 갈망함이나, 그것이 나타내는 외적인 형식들에도 있지 않다; 종교의 본질은 새로운 삶의 이론의 발견하기 위하여 인류가 반드시 따라가며 움직여야 하는 삶의 길을 예견하고 가리키는 사람들의 능력에 있으며, 그 결과, 인류 전체의 미래의 행위는 변화되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과 다르다.

This faculty of foreseeing the path along which humanity must move, is common in a greater or less degree to all men. But in all times there have been men in whom this faculty was especially strong, and these men have given clear and definite expression to what all men felt vaguely, and formed a new philosophy of life from which new lines of action followed for hundreds and thousands of years.

인류가 반드시 따라가며 움직여햐 하는 길을 예견하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소간에 흔하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서, 이러한 능력이 특별히 강한 사람들이 있어 왔으며, 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던 것에 분명하고 명확한 표현을 주었으며, 그리고 새로운 방향의 행동이 수백년 그리고 수천년 동안 이어질 삶의 새로운 철학을 형성하였다.

Of such philosophies of life we know three; two have already been passed through by humanity, and the third is that we are passing through now in Christianity. These philosophies of life are three in number, and only three, not because we have arbitrarily brought the various theories of life together under these three heads, but because all men's actions are always based on one of these three views of life-because we cannot view life otherwise than in these three ways.

그러한 삶의 철학들에 대하여 우리는 세가지를 안다; 두가지는 인류에 의하여 이미 통과하여 왔고, 그리고 세번째는 이제 우리가 기독교를 통하여 지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철학들은 세가지, 그리고 셋이다, 이유인 즉, 우리가 임의적으로 여러가지 삶의 이론들을 이 세가지 표제 밑에 모아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행동들은 언제나 이 세가지 삶의 시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세가지 방법 말고 다르게 삶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These three views of life are as follows: First, embrac­ing the individual, or the animal view of life; second, embracing the society, or the pagan view of life; third, embracing the whole world, or the divine view of life.

이들 삶에 대한 세가지 시각들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삶에 대한 개인의, 또는 동물적인 시각을 받아 들임; 두번째는, 삶에 대한 사회 또는 이교적 시각을 받아 들임; 세번째는, 삶에 대한 전 세계적, 또는 신적인 시각을 받아 들임이다.

In the first theory of life a man's life is limited to his one individuality; the aim of life is the satisfaction of the will of this individuality. In the second theory of life a man's life is limited not to his own individuality, but to certain societies and classes of individuals: to the tribe, the family, the clan, the nation; the aim of life is limited to the satis­faction of the will of those associations of individuals. In the third theory of life a man's life is limited not to socie­ties and classes of individuals, but extends to the principle and source of life-to God.

삶의 첫번째 이론에서, 사람의 삶은 자신의 하나의 개체에 제한된다; 삶의 목적은 이런 개체의 의지를 만족시킴이다. 삶의 두번째 이론에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의 개체에 국한 되지 않으며, 개인들에 의한 특정한 사회들이나 계급들까지 확대된다: 종족, 가족, 씨족, 민족에게; 삶의 목적은 그들 모임들의 의지를 만족시킴으로 제한된다. 삶의 세번째 이론에서, 사람의 삶은 개인들에 의한 사회들이나 계급들에 제한되지 않으며, 삶의 원리 및 근원까지 펼쳐진다-, 하나님까지.

These three conceptions of life form the foundation of all the religions that exist or have existed.

이러한 삶의 세가지 개념들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였던 모든 종교들의 토대를 형성한다.

The savage recognizes life only in himself and his per­sonal desires. His interest in life is concentrated on him­self alone. The highest happiness for him is the fullest satisfaction of his desires. The motive power of his life is personal enjoyment. His religion consists in propitiating his deity and in worshiping his gods, whom he imagines as persons living only for their personal aims.

야만인은 오직 자신 안에서의 삶과 개인적 욕망을 인식한다. 그의 삶에 대한 관심은 자기 하나만에 집중된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자신의 욕망들을 가장 완전하게 만족시킴에 있다. 그의 삶의 동기가 되는 힘은 개인적인 즐거움이다. 그의 종교는 자신의 신에게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신들을 숭배하며, 그 신들이 오직 그들의 개인적 목적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로 상상한다.

The civilized pagan recognizes life not in himself alone, but in societies of men-in the tribe, the clan, the family, the kingdom-and sacrifices his personal good for these societies. The motive power of his life is glory. His religion consists in the exaltation of the glory of those who are allied to him-the founders of his family, his ancestors, his rulers-and in worshiping gods who are exclusively pro­tectors of his clan, his family, his nation, his government.

문명화된 이교도는 삶을 자신 안에서 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들에서 인식한다-부족, 씨족, 가족, 왕국에서-그리고 이들 사회들을 위하여 그의 개인적 선을 희생한다.그의 삶의 동기가 되는 힘은 명예이다. 그의 종교는 그에게 동맹이 되어 있는 사람들-그의 가족의 시조, 그의 선조들, 그의 통치자들-의 명예를 높임에 있으며, 그의 씨족, 그의 가족, 그의 민족, 그의 정부의 배타적인 보호자들인 신들을 숭배함에 있다.

The man who holds the divine theory of life recognizes life not in his own individuality, and not in societies of individualities (in the family, the clan, the nation, the tribe, or the government), but in the eternal undying source of life-in God; and to fulfill the will of God he is ready to sacrifice his individual and family and social welfare. The motor power of his life is love. And his religion is the worship in deed and in truth of the principle of the whole- God.

삶에 있어서 신적인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체, 그리고 개체들의 사회들에서(가족, 씨족, 민족, 부족, 또는 정부에서)가 아니라, 삶의 영원하며 죽지 않는 근원에서-하나님에서-삶을 인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개체, 가족, 그리고 사회의 행복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삶의 동력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의 종교는 행함와 전체 교리의 진리-하나님-에 대한 숭배에 있다.

The whole historic existence of mankind is nothing else than the gradual transition from the personal, animal conception of life to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and from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to the divine conception of life. The whole history of the ancient peoples, lasting through thousands of years and ending with the history of Rome, is the history of the transition from the animal, personal view of life to the social view of life. The whole of history from the time of the Roman Empire and the appearance of Christianity is the history of the transition, through which we are still passing now, from the social view of life to the divine view of life.

인류 전체의 역사적 존재는 다름이 아니라, 개인적 동물적 개념의 삶으로부터 사회적 개념의 삶으로 변화, 그리고 사회적 개념의 삶에서 신적인 개념의 삶으로 변화이다. 옛날 사람들 전체의 역사는, 수천년을 지속하다가 로마의 역사와 함께 끝이 나는, 동물적 개인적 시각의 삶에서 사회적 시각의 삶으로 변천하는 역사이다.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출현 시대로부터의 전체 역사는,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통과하고 있으며, 사회적 시각의 삶에서 천국의 시각의 삶으로 변화하는 역사이다.

This view of life is the last, and founded upon it is the Christian teaching, which is a guide for the whole of our life and lies at the root of all our activity, practical and theoretic. Yet men of what is falsely called science, pseudo-scientific men, looking at it only in its externals, regard it as something outgrown and having no value for us.

이 시각의 삶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은 바로 그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위한 안내이며, 사실적이고 이론적인 우리의 모든 행위의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소위 위선되게 일컬어 지는 과학자들, 의사 과학자들은 오직 그것의 외적인 것들을 바라보면서 시대에 뒤떨어 졌으며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Reducing it to its dogmatic side only-to the doctrines of the Trinity, the redemption, the miracles, the Church, the sacraments, and so on-men of science regard it as only one of an immense number of religions which have arisen among mankind, and now, they say, having played out its part in history, it is outliving its own age and fading away before the light of science and of true enlightenment.

기독교의 가르침을 오직 교리적인 측면으로 축소하여-삼위일체, 대속, 기적들, 교회, 성례, 등등의 교리-과학자들은 그것을 오직 인류에게서 일어난 무수히 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이제, 역사에서 그 역할을 다하였으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 과학과 진리의 계몽의 빛 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We come here upon what, in a large proportion of cases, forms the source of the grossest errors of mankind. Men on a lower level of understanding, when brought into contact with phenomena of a higher order, instead of making efforts to understand them, to raise themselves up to the point of view from which they must look at the sub­ject, judge it from their lower standpoint, and the less they understand what they are talking about, the more confidently and unhesitatingly they pass judgment on it.

우리는 여기, 커다란 경우들에 있어서, 인류의 가장 심각한 오류들의 근원을 형성하는 것 위에 와 있다. 저급한 수준의 깨달음에 있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현상들과 접촉할 때, 그것들을 이해하며, 그 주제를 반드시 바라보아야 하는 관점까지 자신들을 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에, 그것을 낮은 관점에서 판단하며, 그들이 토론하는 것에 대하여 적게 알면 알수록, 그들은 더 많은 확신으로 그리고 주저함이 없이 그것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To the majority of learned men, looking at the living, moral teaching of Christ from the lower standpoint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this doctrine appears as nothing but a very indefinite and incongruous combination of Indian asceticism, Stoic and Neoplatonic philosophy, and insub­stantial anti-social visions, which have no serious sig­nificance for our times. Its whole meaning is con­centrated for them in its external manifestations-in Catholicism, Protestantism, in certain dogmas, or in the conflict with the temporal power. Estimating the value of Christianity by these phenomena is like a deaf man's judg­ing of the character and quality of music by seeing the movements of the musicians.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삶에 있어서 낮은 관점의 국가 개념으로 부터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바라보면, 이 교리는 단지 인도의 금욕주의, 스토아 및 네오플라톤 철학, 그리고 비현실적인 반사회적 환상들의 불확실하고 조리없는 결합으로 보이며, 그것은 우리 시대에 아무런 중요한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의 전체 의미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르침의 외적인 표상들에 집중된다-카톨릭에서, 신교에서, 특정한 교들에서, 또는 속세의 권력과의 갈등에서. 이러한 현상들에 의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짐작하는 것은 장님인 사람이 음악가들의 움직임들을 보고서 음악의 성격과 질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The result of this is that all these scientific men, from Kant, Strauss, Spencer, and Renan down, do not under­stand the meaning of Christ's sayings, do not under­stand the significance, the object, or the reason of their utterance, do not understand even the question to which they form the answer. Yet, without even taking the pains to enter into their meaning, they refuse, if unfavorably dis­posed, to recognize any reasonableness in his doctrines; or if they want to treat them indulgently, they condescend, from the height of their superiority, to correct them, on the supposition that Christ meant to express precisely their own ideas, but did not succeed in doing so. They behave to his teaching much as self-assertive people talk to those whom they consider beneath them, often supplying their companions' words: "Yes, you mean to say this and that." This correction is always with the aim of reduc­ing the teaching of the higher, divine conception of life to the level of the lower, state conception of life.

이런 결과는 이 모든 과학자들은, 칸트, 스트라우스, 스펜서, 그리고 아래로 르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며, 그 말씀들의 의미, 목적, 또는 이유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이 대답을 만들어 내야하는 질문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 말씀들의 의미에 들어가려는 수고도 하지 않은 체, 기분이 나쁘다면, 그들은 그의 교리들에서 어떠한 타당함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아니면, 그들이 그 교리들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싶으면, 그들의 우월한 위치로부터, 그리스도가 정확하게 그들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려는 뜻이었다는 가정하에, 정중한 척하면서 그것을 교정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함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자신 만만한 사람이 그들이 자신들의 하수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그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가끔 그들의 동료들의 말들도 덧붙이기도 한다: “그렇다, 당신은 이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교정은 언제나 더 높으며, 신적인 개념의 삶의 가르침을 더 낮은, 국가 개념의 삶의 수준으로 깎아 내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They usually say that the moral teaching of Christianity is very fine, but overexaggerated; that to make it quite right we must reject all in it that is superfluous and un­necessary to our manner of life. "And the doctrine that asks too much, and requires what cannot be performed, is worse than that which requires of men what is possible and consistent with their powers," these learned interpreters of Christianity maintain, repeating what was long ago asserted, and could not but be asserted, by those who crucified the Teacher because they did not understand him-the Jews.

그들은 흔히 말한다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너무 과장되어 있다; 그것을 상당히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 우리의 삶의 방식에 의미가 없으며 불필요한 것을,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그 교리는 그들의 힘으로서 가능하며 합당한 것을 사람들로부터 요구하는 것보다 나쁘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있는 해석가들이 주장한다, 그리고 오래 전에 주장한 것을, 그리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유태인들-에 의해서 주장될 수 밖에 없던 것을 반복한다.

It seems that in the judgment of the learned men of our time the Hebrew law-a tooth for a tooth, and an eye for an eye-is a law of just retaliation, known to mankind five thousand years before the law of holiness which Christ taught in its place.

우리 시대의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히브리의 율법-이에는 이, 그리고 눈에는 눈-은 정당한 보복의 율법으로, 그리스도가 그것 대신에 가르친 성스러운 법보다 오천년 전에 인류에게 알려진 것처럼 보인다.

It seems that all that has been done by those men who understood Christ's teaching literally and lived in accord­ance with such an understanding of it, all that has been said and done by all true Christians, by all the Christian saints, all that is now reforming the world in the shape of socialism and communism-is simply exaggeration, not worth talking about.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직설적으로 깨닫고 그것에 대한 그러한 깨달음에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에 행해진 모든 것은, 모든 진정한 기독교인들, 모든 기독교의 성자들에 의하여 말해지고 행해진 모든 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형태로서 지금 세상을 개혁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단순히 과장이며, 말할 가치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After eighteen hundred years of education in Christianity the civilized world, as represented by its most advanced thinkers, holds the conviction that the Christian religion is a religion of dogmas; that its teaching in relation to life is unreasonable, and is an exaggeration, subversive of the real lawful obligations of morality consistent with the nature of man; and that very doctrine of retribution which Christ rejected, and in place of which he put his teaching, is more practically useful for us.

기독교에 대한 1800년의 교육 뒤에 문명세계는, 가장 진보된 사상가들에 의하여 설명되듯이,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이다; 삶에 관련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비이성적이고, 과장이며, 사람의 본성과 일치되는 진정한 합법적인 의무들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거부한 복수의 교리는, 그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그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우리에게 더욱 실용적으로 유익하다는 확신을 견지한다.

To learned men the doctrine of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 is exaggerated and even irrational. Christianity is much better without it, they think, not observing closely what Christianity, as represented by them, amounts to.

학자들에게는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는 과장되었으며 심지어 비이성적이다. 기독교는 그것이 없는 것이 훨씬 좋다, 그들에 의하여 설명되듯이,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깊이 있게 관찰해 보지도 않고서 그들은 생각한다.

They do not see that to say that the doctrine of non-resistance to evil is an exaggeration in Christ's teaching is just like saying that the statement of the equality of the radii of a circle is an exaggeration in the definition of a circle. And those who speak thus are acting precisely like a man who, having no idea of what a circle is, should declare that this requirement, that every point of the circumference should be an equal distance from the center, is exaggerated. To advocate the rejection of Christ's command of non-resistance to evil, or its adaptation to the needs of life, implies a misunderstanding of the teaching of Christ.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과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원의 반지름이 같다는 주장이 원의 정의에서 과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므로, 이런 조건, 즉 원 둘레의 각 점은 가운데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사람과 정확히 같이 행동한다. 그리스도의 악에 대한 무저항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나, 삶의 필요에 맞추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암시한다.

And those who do so certainly do not understand it. They do not understand that this teaching is the institution of a new theory of life, corresponding to the new conditions on which men have entered now for eighteen hundred years, and also the definition of the new conduct of life which results from it. They do not believe that Christ meant to say what he said; or he seems to them to have said what he said in the Sermon on the Mount and in other places accidentally, or through his lack of intelligence or of cultivation.

그리고 확실히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가르침이 삶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규칙이며, 이제 사람들이 1800년 동안 살고 있는 새로운 상황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삶의 새로운 행위에 대한 정의에 상응한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말하고자 한 것을 믿지 않는다; 또는 그가 산상수훈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말한 것은 우연히, 또는 그의 지능이 모자라거나 또는 교양이 부족해서 그들에게 말한 것처럼 보인다.

Matt. vi. 25-34: "Therefore I say unto you, Take no thought for your life, what ye shall eat, or what ye shall drink; nor yet for your body, what ye shall put on. Is not the life more than meat, and the body than raiment? Be­hold the fowls of the air; for they sow not, neither do they reap, nor gather into barns;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eth them. Are ye not much better than they? Which of you by taking thought can add one cubit unto his stature? And why take ye thought for raiment? Consider the lilies of the field how they grow; they toil not, neither do they spin; and yet I say unto you, That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was not arrayed like one of these. Wherefore, if God so clothe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to-day is, and to-morrow is cast into the oven, sha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 O ye of little faith? Therefore take no thought,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here­withal shall we be clothed? (For after all these things do the Gentiles seek), for your heavenly Father knoweth that ye have need of all these things.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 Take therefore no thought for the morrow; for the morrow shall take thought for the things of itself. Sufficient unto the day is the evil thereof." Luke xii. 33-34: "Sell that ye have, and give alms; pro­vide yourselves bags which wax not old, a treasure in the heavens that faileth not, where no thief approacheth, neither moth corrupteth.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Sell all thou hast and follow me; and he who will not leave father, or mother, or children, or brothers, or fields, or house, he cannot be my disciple. Deny thyself, take up thy cross each day and follow me. My meat is to do the will of him that sent me, and to per­form his works. Not my will, but thine be done; not what I will, but as thou wilt. Life is to do not one's will, but the will of God.

마태복음 6 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누가복음 12 33~34 :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너의 가진 모든 것을 팔고 나를 좇으라;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느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생명은 자신의 뜻을 행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행함이라.

All these principles appear to men who regard them from the standpoint of a lower conception of life as the expression of an impulsive enthusiasm, having no direct application to life. These principles, however, follow from the Christian theory of life, just as logically as the prin­ciples of paying a part of one's private gains to the com­monwealth and of sacrificing one's life in defense of one's country follow from the state theory of life.

이 모든 원리들은 낮은 개념의 삶의 관점으로부터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적용성이 없는 충동적인 열정의 표현처럼 보인다. 이 원리들은, 그러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이론으로부터 나온다, 마치 한 개인의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 바치며, 개인의 삶을 자신의 국가의 방어에 희생한다는 원리들이 삶의 국가 이론에서 나오는 것처럼 똑같은 논리이다.

As the man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said to the savage: Reflect, bethink yourself! The life of your indi­viduality cannot be true life, because that life is pitiful and passing. But the life of a society and succession of indi­viduals, family, clan, tribe, or state, goes on living, and therefore a man must sacrifice his own individuality for the life of the family or the state. In exactly the same way the Christian doctrine says to the man of the social, state con­ception of life, Repent ye-metanoxete-i. e., bethink your­self, or you will be ruined. Understand that this casual, personal life which now comes into being and to-morrow is no more can have no permanence, that no external means, no construction of it can give it consecutiveness and per­manence. Take thought and understand that the life you are living is not real life-the life of the family, of society, of the state will not save you from annihilation. The true, the rational life is only possible for man according to the measure in which he can participate, not in the family or the state, but in the source of life-the Father; according to the measure in which he can merge his life in the life of the Father. Such is undoubtedly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visible in every utterance of the Gospel.

국가 개념의 삶의 사람이 야만인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반성하라, 자신을 회개하라! 너의 개인적인 삶은 진리의 삶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삶은 비참하고 잠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그리고 개인들, 가족, 씨족, 부족, 또는 국가의 연속인 삶은 계속해서 살아 갈 수 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체를 희생하여 가족 또는 국가의 삶을 위하여야 한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기독교의 교리는 사회적, 국가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에게 말한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지금 존재하다가 내일이면 사라지는 이 우연하며, 개인적인 삶은 영속성이 없다, 어떤 외적인 수단이나, 삶을 어떻게 영위하더라도, 연속성이나 영속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하라. 당신이 살고 있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가족의, 사회의, 국가의 삶은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깨닫도록하라. 진리의, 이성적인 삶은, 가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삶의 근원-아버지-에 참여하는 방법에 의하여서만이 오직 가능하다;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삶에 병합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은 틀림없이 그러하며, 복음서의 모든 말씀에서 나타나 있다.

One may not share this view of life, one may reject it, one may show its inaccuracy and its erroneousness, but we cannot judge of the Christian teaching without mastering this view of life. Still less can one criticize a subject on a higher plane from a lower point of view. From the base­ment one cannot judge of the effect of the spire. But this is just what the learned critics of the day try to do. For they share the erroneous idea of the orthodox believers that they are in possession of certain infallible means for investigating a subject. They fancy if they apply their so-called scientific methods of criticism, there can be no doubt of their conclusion being correct.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의 시각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부정확함과 오류성을 밝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런 삶의 시각을 터득하지 않고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더욱이 낮은 관점에서 높은 면의 주제를 비난할 수 없다. 바닥으로부터는 정점의 효과를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시대의 유식한 비평가들이 하려고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제를 분석함에 있어서 확실히 오류가 없는 방법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정통교회의 신자들의 잘못된 사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의 소위 과학적인 비평 방법들을 적용한다면, 그들의 결론이 정확함에 대한 의심이 없다고 상상한다.

This testing the subject by the fancied infallible method of science is the principal obstacle to understanding the Christian religion for unbelievers, for so-called educated people. From this follow all the mistakes made by scientific men about the Christian religion, and especially two strange misconceptions which, more than everything else, hinder them from a correct understanding of it. One of these misconceptions is that the Christian moral teaching cannot be carried out, and that therefore it has either no force at all-that is, it should not be accepted as the rule of con­duct-or it must be transformed, adapted to the limits within which its fulfillment is possible in our society. Another misconception is that the Christian doctrine of love of God, and therefore of his service, is an obscure, mystic principle, which gives no definite object for love, and should therefore be replaced by the more exact and comprehensible principles of love for men and the service of humanity.

상상속에서의 오류가 없는 과학의 방법으로 이러한 주제를 시험하는 것은 불신자들,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를 이해함에 대한 주된 장애 이다. 이로 인하여 과학자들에 의해서 기독교에 대해 만들어진 잘못들이 나오게 되며, 특히 무엇보다도 그들이 기독교를 정확히 이해함을 방해하는 두가지의 오해들이 있게된다. 이들 오해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은 실천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것은 행위의 규칙으로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또는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사회 안에서 그 실천이 가능한 한계에 맞도록 변형되고 적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오해는 기독교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는, , 그에 대한 봉사는, 애매하여 신비스러운 원리이다, 그것은 아무런 정확한 사랑의 대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로므로 좀더 정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및 인류에 대한 봉사의 원리들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The first misconception in regard to the impossibility of following the principle is the result of men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unconsciously taking that conception as the standard by which the Christian religion directs men, and taking the Christian principle of perfection as the rule by which that life is to be ordered; they think and say that to follow Christ's teaching is impossible, because the complete fulfillment of all that is required by this teaching would put an end to life. "If a man were to carry out all that Christ teaches, he would destroy his own life; and if all men carried it out, then the human race would come to an end," they say.

그 원리를 따름이 불가능하다는 첫번째 오해는, 국가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들이 그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기독교가 사람들을 지시한다는 기준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완성의 원리를 그 삶이 명령받아야 하는 법으로 받아들임에서 초래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른 것은 이 가르침에 의해서 요구되는 모든 것의 오나성이 삶을 끝장 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한다. “한사람이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실행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한다면, 인류는 끝이 날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If we take no thought for the morrow, what we shall eat and what we shall drink, and wherewithal we shall be clothed, do not defend our life, nor resist evil by force, lay down our life for others, and observe perfect chastity, the human race cannot exist," they say.

“우리가 내일을 위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그리고 무엇으로 입을까, 우리의 삶을 지키지 않으며, 힘으로 악을 저항하지 않으며, 우리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 놓고, 그리고 완전한 순수함을 지킨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And they are perfectly right if they take the principle of perfection given by Christ's teaching as a rule which every­one is bound to fulfill, just as in the state principles of life everyone is bound to carry out the rule of paying taxes, supporting the law, and so on.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하는 완성의 원리로 받아 들인다면, 삶의 국가적 원리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세금을 내야 하는 법을 이행해야 하며, 기타의 경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 그들은 확실히 옳다.

The misconception is based precisely on the fact that the teaching of Christ guides men differently from the way in which the precepts founded on the lower conception of life guide men. The precepts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only guide men by requiring of them an exact fulfill­ment of rules or laws. Christ's teaching guides men by pointing them to the infinite perfection of their heavenly Father, to which every man independently and voluntarily struggles, whatever the degree of his imperfection in the present.

오해는 정확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낮은 개념의 삶에 기초된 가르침이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식과 다르게 사람들은 인도한다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국가적 개념의 삶의 가르침들은 명령이나 법률을 정확히 실천함을 요구함으로써 사람들을 인도한다.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완성으로 그들을 가리킴으로써 사람들을 인도하며, 현재에 있어서 자신의 불완전 정도가 어떠하든지, 각자의 사람은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이를 위해서 노력한다.

The misunderstanding of men who judge of the Christian principle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state principle, con­sists in the fact that on the supposition that the perfection which Christ points to, can be fully attained, they ask themselves (just as they ask the same question on the sup­position that state laws will be carried out) what will be the result of all this being carried out? This supposition cannot be made, because the perfection held up to Chris­tians is infinite and can never be attained; and Christ lays down his principle, having in view the fact that absolute perfection can never be attained, but that striving toward absolute, infinite perfection will continually increase the blessedness of men, and that this blessedness may be increased to infinity thereby.

국가의 원리라는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원리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오해는, 그리스도가 지적하는 완성은 완전히 달성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이 모든 것들이 실천된다면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스스로 묻는다 (마치 국가의 법률이 달성되리라는 가정에서 똑같은 질문을 하듯이) 는 사실에 있다. 이 전제는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완성은 무한하며 결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완성은 결코 달성될 수 없으며, 절대적, 무한한 완성을 향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행복을 더해주며, 그리고 이 행복이 그렇게 해서 무한으로 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봄으로써, 그의 원리를 규정한다.

Christ is teaching not angels, but men, living and moving in the animal life. And so to this animal force of move­ment Christ, as it were, applies the new force-the recog­nition of Divine perfection-and thereby directs the move­ment by the resultant of these two forces.

그리스도는 천사들이 아니라 동물적인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런 관계로, 이런 동물적 힘의 움직임에, 그리스도는, 이를테면, 새로운 힘-신적인 완성에 대한 인식-을 적용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이 두가지 힘들의 결과에 의하여 움직임을 이끌어 간다.

To suppose that human life is going in the direction to which Christ pointed it, is just like supposing that a little boat afloat on a rapid river, and directing its course almost exactly against the current, will progress in that direction.

인간의 삶이 그리스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세찬 강물위에 떠있는 작은 배가, 그 경로를 흐름에 거의 정확히 반대로 이끌 때, 그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가 정과 똑같다.

Christ recognizes the existence of both sides of the parallelogram, of both eternal indestructible forces of which the life of man is compounded: the force of his animal nature and the force of the consciousness of kin­ship to God. Saying nothing of the animal force which asserts itself, remains always the same, and is therefore independent of human will, Christ speaks only of the Divine force, calling upon a man to know it more closely, to set it more free from all that retards it, and to carry it to a higher degree of intensity.

그리스도는 평행 사변형의 양쪽 면들, , 사람의 삶이 구성되는 두개의 영원한 파괴할 수 없는 힘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 사람의 동물적 본능의 힘과 하나님에 대한 혈연관계를 의식하는 힘의 존재를 의식한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언제나 그대로 있으며, 그리고 사람의 의지와는 별개인 동물적인 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는 오직 신적인 힘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그것을 좀 더 가까이 알기를 요구하고, 그것을 저해하는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하며, 그리고 그것을 좀 더 강렬한 상태로 끌고간다.

In the process of liberating, of strengthening this force, the true life of man,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con­sists. The true life, according to preceding religions, consists in carrying out rules, the law;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it consists in an ever closer approximation to the divine perfection held up before every man, and recognized within himself by every man, in an ever closer and closer approach to the perfect fusion of his will in the will of God, that fusion toward which man strives, and the attainment of which would be the destruction of the life we know.

이 힘을 자유롭게 하며,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의 참된 삶이 존재한다. 참된 삶은, 이전의 종교들에 의하면, 명령들, , 법을 실행함에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것은 각각의 사람들 앞에 제시되며,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 안에 인식되는 된 신적인 완성에 훨씬 더 근접함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뜻의 완벽한 융합에 끊임없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감에 있고, 그곳으로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그 융합, 그리고 그것의 달성은 우리가 아는 삶의 파괴일 것이다.

The divine perfection is the asymptote of human life to which it is always striving, and always approaching, though it can only be reached in infinity.

신적인 완성은 그것을 위해 사람의 인생이 언제나 애쓰며, 언제나 다가 가고자 하는 점근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무한에 가서야 도달될 수 있다.

The Christian religion seems to exclude the possibility of life only when men mistake the pointing to an ideal as the laying down of a rule. It is only then that the principles presented in Christ's teaching appear to be destructive of life. These principles, on the contrary, are the only ones that make true life possible. Without these principles true life could not be possible.

기독교는, 사람들이 이상을 지향하는 것을 명령의 제시로서 착각할 때에 오직, 삶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 같다. 오직 그럴 때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제시된 원리들이 삶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원리들은, 반대로, 진리의 삶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이 원리들이 없이는 진리의 삶은 가능할 수가 없다.

"One ought not to expect so much," is what people usually say in discussing the requirements of the Christian religion. "One cannot expect to take absolutely no thought for the morrow, as is said in the Gospel, but only not to take too much thought for it; one cannot give away all to the poor, but one must give away a certain definite part; one need not aim at virginity, but one must avoid debauchery; one need not forsake wife and children, but one must not give too great a place to them in one's heart," and so on.

“너무 많이 기대해서는 안된다,” 라고 사람들이 기독교의 요구조건들을 토론할 때에 흔히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절대적으로 아무런 생각을 갖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복음서에서 말하는대로, 그러나 오직 그것을 위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정해진 양만큼은 주어야 한다; 우리는 순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방탐함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아내와 자식들을 용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그들에 대한 너무나 큰 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등등.

But to speak like this is just like telling a man who is struggling on a swift river and is directing his course against the current, that it is impossible to cross the river rowing against the current, and that to cross it he must float in the direction of the point he wants to reach.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급류와 싸우고 있으며, 흐름에 맞서서 그의 방향을 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흐름을 거슬러서 노를 저어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건너려면,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반드시 떠내려 가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In reality, in order to reach the place to which he wants to go, he must row with all his strength toward a point much higher up.

현실적으로, 그가 가고자 하는 곳에 도달하려면, 그는 반드시 훨씬 더 위쪽을 향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 노를 저어야 된다.

To let go the requirements of the ideal means not only to diminish the possibility of perfection, but to make an end of the ideal itself. The ideal that has power over men is not an ideal invented by someone, but the ideal that every man carries within his soul. Only this ideal of com­plete infinite perfection has power over men, and stimulates them to action. A moderate perfection loses its power of influencing men's hearts.

이상의 필수 조건들을 포기하는 것은 완성의 가능성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이상 자체를 끝장내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힘을 가지고 있는 그 이상은 누군가에 의해서 고안된 이상이 아니라 각자의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에 지니고 다니는 이상이다. 오직 이렇게 완전하며 무한한 완성의 이상만이 사람들에게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자극한다. 적절한 완성은 사람들의 가슴에 영향을 주는 힘을 상실한다.

Christ's teaching only has power when it demands abso­lute perfection-that is, the fusion of the divine nature which exists in every man's soul with the will of God-the union of the Son with the Father. Life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consists of nothing but this setting free of the Son of God, existing in every man, from the animal, and in bringing him closer to the Father.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것이 절대적인 완성-다시 말하면, 제각기 사람들의 영혼에 존재하는 신적인 본성과 하나님의 뜻의 융합-아들과 아버지의 연합-을 요구할 때 오직 힘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은, 오직 이렇게 각각의 사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동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그를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데려감에 있다.

The animal existence of a man does not constitute human life alone. Life,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only, is also not human life. Human life is a combination of the animal life and the divine life. And the more this com­bination approaches to the divine life, the more life there is in it.

사람의 동물적인 존재만이 사람의 삶을 구성하지 않는다. 삶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면, 또한 사람의 삶이 아니다. 사람의 삶은 동물적인 삶과 신적인 삶의 조합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합이 신적인 삶에 접근하면 할 수록, 그 안에는 더 나은 삶이 있게된다.

Life, according to the Christian religion, is a progress toward the divine perfection. No one condition, accord­ing to this doctrine, can be higher or lower than another. Every condition, according to this doctrine, is only a par­ticular stage, of no consequence in itself, on the way toward unattainable perfection, and therefore in itself it does not imply a greater or lesser degree of life. Increase of life, according to this, consists in nothing but the quickening of the progress toward perfection. And therefore the prog­ress toward perfection of the publican Zaccheus, of the woman that was a sinner, and of the robber on the cross, implies a higher degree of life than the stagnant righteous­ness of the Pharisee. And therefore for this religion there cannot be rules which it is obligatory to obey. The man who is at a lower level but is moving onward toward perfection is living a more moral, a better life, is more fully carrying out Christ's teaching, than the man on a much higher level of morality who is not moving onward toward perfection.

기독교에 의하면, 삶은 신적인 완성으로의 전진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어떤 한가지 상태도, 다른 것보다 높거나 낮지 않다. 각각의 상태는, 이 교리에 따르면, 도달할 수 없는 완성을 향한 길위에 있는 오직 특정한 단계로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는 더욱 크거나 더욱 작은 정도의 삶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삶의 향상은 오직 완성을 향한 전진을 빠르게 함에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세리 삭개오의, 죄를 지은 여자의,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의 완성을 향한 전진은, 바리새인의 정체된 의로움보다 더 높은 정도의 삶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종교에 있어서는복종해야할 의무가 있는 명령들이 있을 수 없다. 낮은 단계에 있더라도 완성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는 사람은, 완성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지 않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에 있는 사람보다, 더욱 도덕적이며, 나은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많이 이행하고 있다 .

It is in this sense that the lost sheep is dearer to the Father than those that were not lost. The prodigal son, the piece of money lost and found again, were more precious than those that were not lost.

잃어 버린 양이 잃어 버리지 않은 양들 보다도 아버지에게는 더욱 소중함은 이런 의미에서다. 탕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몇푼을 다시 찾은 이야기, 등은 잃어 버리지 않은 것들 보다 소중하다.

The fulfillment of Christ's teaching consists in moving away from self toward God. It is obvious that there can­not be definite laws and rules for this fulfillment of the teaching. Every degree of perfection and every degree of imperfection are equal in it; no obedience to laws consti­tutes a fulfillment of this doctrine, and therefore for it there can be no binding rules and laws.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천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서 하나님께로 감에 있다. 가르침에 대한 이런 실천은 정해진 법률이나 명령이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모든 완성의 정도와 모든 불완성의 정도는 그 안에서 동등하다; 법률에 복종하지 않음이 이 교리의 실천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그것에 있어서는 아무런 구속력이 있는 명령들과 법률들이 있을 수 없다.

From this fundamental distinction between the religion of Christ and all preceding religions based on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follows a corresponding difference in the special precepts of the state theory and the Christian pre­cepts. The precepts of the state theory of life insist for the most part on certain practical prescribed acts, by which men are justified and secure of being right. The Christian precepts (the commandment of love is not a precept in the strict sense of the word, but the expression of the very essence of the religion) are the five commandments of the Sermon on the Mount-all negative in character. They show only what at a certain stage of development of humanity men may not do.

그리스도의 종교와 삶의 국가적 개념에 기초한 모든 이전의 종교들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구별로부터, 국가 이론의 특수한 가르침들과 기독교의 가르침들에서 상응하는 차이가 따른다. 삶의 국가적 이론의 가르침은 대체적으로 특정한 실용적으로 규정된 행위들을 고집하며, 그것으로서 사람들은 정당화되며 옳음을 확신한다. 기독교의 가르침들은 (사랑의 계명은 단어의 엄격한 의미상으로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 그 자체의 표현이다) 산상 수훈-성격상 모두 부정적이다-의 다섯가지 계명들이다. 그것들은 오직 인류의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준다.

These commandments are, as it were, signposts on the endless road to perfection, toward which humanity is mov­ing, showing the point of perfection which is possible at a certain period in the development of humanity.

이 다섯가지 계명들은, 말하자면, 완성을 향한 끝없는 길에서 이정표이다, 인류는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인류의 특정한 발전의 시기에 가능한 완성 지점을 보여 준다.

Christ has given expression in the Sermon on the Mount to the eternal ideal toward which men are spontaneously struggling, and also the degree of attainment of it to which men may reach in our times.

그리스도는 산상 수훈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도 애쓰고 있는 영원한 이상, 그리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 달성하고자 하는 정도를 표현하였다.

The ideal is not to desire to do ill to anyone, not to pro­voke ill will, to love all men. The precept, showing the level below which we cannot fall in the attainment of this ideal, is the prohibition of evil speaking. And that is the first command.

이상은 누구를 해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며, 나쁜 뜻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악한 말의 금지로서, 우리가 이런 이상의 달성에 들어갈 수 없는 낮은 수준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이 첫번째 계명이다.

The ideal is perfect chastity, even in thought. The pre­cept, showing the level below which we cannot fall in the attainment of this ideal, is that of purity of married life, avoidance of debauchery. That is the second command.

이상은 완전한 순수함이며, 심지어 생각에서도 그렇다. 그 가르침은 결혼 생활의 순결, 방탕함의 금지로서, 우리가 이런 이상의 달성에 들어 갈 수 없는 낮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것이 두번째 계명이다.

The ideal is to take no thought for the future, to live in the present moment. The precept, showing the level below which we cannot fall, is the prohibition of swearing, of promising anything in the future. And that is the third command.

이상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갖지 말것이며, 현재 순간에 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맹세함, 미래의 어떤 것을 약속함의 금지로서,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낮은 수준을 보여 준다. 그것이 세번째 계명이다.

The ideal is never for any purpose to use force. The precept, showing the level below which we cannot fall is that of returning good for evil, being patient under wrong, giving the cloak also. That is the fourth command.

이상은 결코 의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부당하더라도, 옷을 벗어 주면서라도 참으라는 것으로서,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아래의 수준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수준의 아래이다. 그것이 네번째 계명이다.

The ideal is to love the enemies who hate us. The pre­cept, showing the level below which we cannot fall, is not to do evil to our enemies, to speak well of them, and to make no difference between them and our neighbors.

이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우리의 원수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그들을 좋게 말하며, 그리고 그들과 우리 이웃들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으로서, 우리가 들어가서는 안돼는 아래 수준을 보여 준다.

All these precepts are indications of what, on our journey to perfection, we are already fully able to avoid, and what we must labor to attain now, and what we ought by degrees to translate into instinctive and unconscious habits. But these precepts, far from constituting the whole of Christ's teaching and exhausting it, are simply stages on the way to perfection. These precepts must and will be followed by higher and higher precepts on the way to the perfection held up by the religion.

이 모든 가르침들은, 우리의 완성을 향한 여행에서, 우리가 이미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제 우리가 반드시 달성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점진적으로 본능적이며 무의식적인 습관들로서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들의 표시들이다. 그러나 이들 가르침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전체를 구성하기보다는, 단순히 완성을 향한 길위에 있는 단계들이다. 이 가르침들은 종교에 의하여 견지되는 완성의 길 위에서 점점 더 높은 가르침들이 반드시 따라주어야 하며, 따라 줄것이다.

And therefore it is essentially a part of the Christian religion to make demands higher than those expressed in its precepts; and by no means to diminish the demands either of the ideal itself, or of the precepts, as people imagine who judge it from the standpoint of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그리고 그러므로 그 가르침들에서 표현된 것들보다더 높은 요구들을 하는 것이; 그리고 마치 사회적 관점의 삶으로부터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이상 그자체 또는 가르침들의 요구들을 결코 낮추지 않는 것이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한 부분이다.

So much for one misunderstanding of the scientific men, in relation to the import and aim of Christ's teaching. Another misunderstanding arising from the same source consists in substituting love for men, the service of human­ity, for the Christian principles of love for God and his service.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와 목적에 관련한 과학자들의 한가지 오해는 그런 정도였다. 똑같은 출처에서 생겨나는 또 하나의 오해는 하나님과 그를 위한 봉사에 대한 기독교적인 사랑의 원리 대신에, 사람들의 사랑, 인류에 대한 봉사로 대체함에 있다.

The Christian doctrine to love God and serve him, and only as a result of that love to love and serve one's neigh­bor, seems to scientific men obscure, mystic, and arbitrary. And they would absolutely exclude the obligation of love and service of God, holding that the doctrine of love for men, for humanity alone, is far more clear, tangible, and reasonable.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오직 그러한 사랑의 결과로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은 과학자들에게는 모호하고, 신비스러우며, 그리고 막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의무를 배제할 것이며, 이는 사람들을 위한, 인류만을 위한 사랑의 교리가 훨씬더 명료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그리고 합리적이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Scientific men teach in theory that the only good and rational life is that which is devoted to the service of the whole of humanity. That is for them the import of the Christian doctrine, and to that they reduce Christ's teach­ing. They seek confirmation of their own doctrine in the Gospel, on the supposition that the two doctrines are really the same.

과학자들은 이론에서 유일하게 선하고 이성적인 삶은 전체 인류에 대한 봉사에 바쳐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런 의미로 축소한다. 그들은, 두 개의 교리가 실제로 같다는 가정하에서, 복음서에서 그들의 교리에 대한 확증을 찾는다.

This idea is an absolutely mistaken one. The Christian doctrine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doctrine of the Positivists, Communists, and all the apostles of the univer­sal brotherhood of mankind, based on the general advantage of such a brotherhood. They differ from one another espe­cially in Christianity's having a firm and clear basis in the human soul, while love for humanity is only a theoretical deduction from analogy.

이 개념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실증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형제지간이라고 하는 일반적 이점에 입각한, 인류의 사해 동포 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것들은 기독교가 사람의 영혼이라는 확고하며 명백한 기초를 가지고 있음에서 특별히 서로가 다르며, 반면에 인류에 대한 사랑은 단지 유추에 의한 이론적인 추론일 뿐이다.

The doctrine of love for humanity alone is based on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인류에 대한 사랑의 교리만이 삶의 사회적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The essence of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consists in the transference of the aim of the individual life to the life of societies of individuals: family, clan, tribe, or state. This transference is accomplished easily and naturally in its earliest forms, in the transference of the aim of life from the individual to the family and the clan. The transference to the tribe or the nation is more difficult and requires special training. And the transference of the sentiment to the state is the furthest limit which the process can reach.

삶의 사회적 개념의 본질은 개인의 삶의 목적을 개인들의 사회의 삶으로 양도함에 있다: 가족, 씨족, 부족, 또는 국가. 이런 양도는 그 초기 형태들에서, 개인의 삶의 목적을 가족 및 씨족으로 양도함에 있어서, 쉽게 자연적으로 이루어 진다. 부족이나 민족으로의 양도는 더 어려우며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감정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은 그 과정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한계이다.

To love one's self is natural to everyone, and no one needs any encouragement to do so. To love one's clan who sup­port and protect one, to love one's wife, the joy and help of one's existence, one's children, the hope and consolation of one's life, and one's parents, who have given one life and education, is natural. And such love, though far from being so strong as love of self, is met with pretty often.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렇게 행함에 있어서 어떤 격려도 필요하지 않다. 자신을 지지해주며 보호해주는 씨족을 사랑하는 것, 자신의 아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쁨과 도움, 자신의 자녀들, 자신의 삶의 희망과 위안, 그리고 자신에게 생명과 교육을 준 자신의 부모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비록 자신을 사랑함보다 결코 강하지 않지만, 너무나 자주 만날 수 있다.

To love-for one's own sake, through personal pride- one's tribe, one's nation, though not so natural, is neverthe­less common. Love of one's own people who are of the same blood, the same tongue, and the same religion as one's self is possible, though far from being so strong as love of self, or even love of family or clan. But love for a state, such as Turkey, Germany, England, Austria, or Russia is a thing almost impossible. And though it is zealously inculcated, it is only an imagined sentiment; it has no exist­ence in reality. And at that limit man's power of trans­ferring his interest ceases, and he cannot feel any direct sentiment for that fictitious entity. The Positivists, how­ever, and all the apostles of fraternity on scientific principles, without taking into consideration the weakening of senti­ment in proportion to the extension of its object, draw further deductions in theory in the same direction. "Since," they say, "it was for the advantage of the individual to extend his personal interest to the family, the tribe, and sub­sequently to the nation and the state, it would be still more advantageous to extend his interest in societies of men to the whole of mankind, and so all to live for humanity just as men live for the family or the state."

개인적인 만족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부족,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비록 그렇게 당연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하다. 자기 자신과 같은 피, 같은 언어, 그리고 같은 종교를 가진 자기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비록 자신에 대한, 또는 심지어 가족이나 씨족을 사랑함 보다는 결코 강하지 않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사랑, 예를 들면, 터어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또는 러시아 같은 국가에 대한 사랑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열심히 주입시켜 주지만, 그것을 오로지 상상속의 감정이다; 그것은 현실에는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에서 사람이 그의 관심을 전이하는 힘은 중단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가공의 존재에 대하여 아무런 직접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들, 그리고 과학적 원리들에 대한 형제애의 모든 사도들은, 그 대상의 확장에 비례하여 감정이 약화됨을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방향으로 이론에 대한 추론을 넓혀 나간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을, 가족, 부족, 그리고 결국 민족과 국가로 넓혀 나가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회들에 대한 그이 관심을 전 인류에게 넓히는 것은 더욱 유익하며, 그리고 사람들이 가족이나 국가를 위해서 사는 것처럼 모두가 인류를 위해서 사는 것 또한 유익하다.”

Theoretically it follows, indeed, having extended the love and interest for the personality to the family, the tribe, and thence to the nation and the state, it would be perfectly logical for men to save themselves the strife and calami­ties which result from the division of mankind into nations and states by extending their love to the whole of human­ity. This would be most logical, and theoretically nothing would appear more natural to its advocates, who do not observe that love is a sentiment which may or may not be felt, but which it is useless to advocate; and moreover, that love must have an object, and that humanity is not an object. It is nothing but a fiction.

사실, 이론적으로 개인의 사랑과 관심을 가족, 부족, 그리고 나서 민족과 국가로 확대함이 뒤따르며, 그들의 사랑을 전체 인류에게로 넓혀서, 사람들이 민족들과 국가들로 분할되어 초래되는 전쟁 및 재앙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는 것은 완벽하게 논리적일 것이다. 이것은 가장 논리적이며, 이론적으로 그 옹호자들에게 어느 것도 더욱 당연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은 느껴지거나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라고 여기기 보다는 옹호해 봐야 쓸모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게다가,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가져야하며, 그리고 인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허구일 뿐이다.

The family, the tribe, even the state were not invented by men, but formed themselves spontaneously, like ant­hills or swarms of bees, and have a real existence. The man who, for the sake of his own animal personality, loves his family, knows whom he loves: Anna, Dolly, John, Peter, and so on. The man who loves his tribe and takes pride in it, knows that he loves all the Guelphs or all the Ghibellmes; the man who loves the state knows that he loves France bounded by the Rhine, and the Pyrenees, and its principal city Paris, and its history and so on. But the man who loves humanity-what does he love? There is such a thing as a state, as a nation; there is the abstract conception of man; but humanity as a concrete idea does not, and cannot exist.

가족, 부족, 심지어 국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치 개미때 또는 벌떼들처럼 스스로가 자연스러이 형성되었으며 실제 존재를 가진다. 자기 자신의 동물적 개인을 위하여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안다: 안나, 돌리, , 피터, 등등. 자신의 부족을 사랑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가 모든 구엘프 가문 또는 모든 기벨름 가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라인강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하고, 그 수도는 파리이며, 그 역사 등등 을 포함하는 프랑스를 안다. 그러나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은-그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국가와 같은 것, 민족과 같은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개념으로서 인류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Humanity! Where is the definition of humanity? Where does it end and where does it begin? Does human­ity end with the savage, the idiot, the dipsomaniac, or the madman? If we draw a line excluding from humanity its lowest representatives, where are we to draw the line? Shall we exclude the Negroes like the Americans, or the Hindoos like some Englishmen, or the Jews like some others? If we include all men without exception, why should we not include also the higher animals, many of whom are superior to the lowest specimens of the human race.

인류! 인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가? 인류는 야만인, 백치, 알콜중독자, 또는 광인에서 끝나는가? 만일 우리가 인류에서 그의 가장 낮은 대표자들을 배제하는 선을 긋는다면, 어디에다가 그 선을 그어야 하는가? 미국인들처럼 흑인을, 어떤 영국인 들처럼 힌두를,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 유태인들을 배제할 것인가? 우리가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야 한다면, 우리는 왜 좀더 높은 동물들을 포함하지 않는가, 그들 중에 많은 수가 인류의 가장 열등한 표본들보다 우월하다.

We know nothing of humanity as an eternal object, and we know nothing of its limits. Humanity is a fiction, and it is impossible to love it. It would, doubtless, be very advantageous if men could love humanity just as they love their family. It would be very advantageous, as Commun­ists advocate, to replace the competitive, individualistic organization of men's activity by a social universal organi­zation, so that each would be for all and all for each.

우리는 영원한 대상으로서 인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한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인류는 허구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듯 인류를 사랑할 수 있으면 매우 이로울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듯, 사람들의 활동에 있어서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단체 대신에 사회적 세계적인 단체로 바꾼다면 매우 유일하여서 각자가 모두를 위하고 모두가 각자들 위하게 될 것이다.

Only there are no motives to lead men to do this. The Positivists, the Communists, and all the apostles of frater­nity on scientific principles advocate the extension to the whole of humanity of the love men feel for themselves, their families, and the state. They forget that the love which they are discussing is a personal love, which might expand in a rarefied form to embrace a man's native country, but which disappears before it can embrace an artificial state such as Austria, England, or Turkey, and which we cannot even conceive of in relation to all human­ity, an absolutely mystic conception.

오직 사람들이 이 일을 하도록 이끌어 갈 동기들이 없을 뿐이다. 실증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모든 과학적인 원리들에 대한 형제애의 사도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이나,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느끼는 전체 인류애로의 확장을 옹호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토론하고 있는 사랑이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희석된 형태로서 자신의 고국을 품지만, 오스트리아, 영국, 또는 터어키 같은 인위적인 국가를 품기도 전에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인류, 즉 절대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개념과 관련하여 심지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A man loves himself (his animal personality), he loves his family, he even loves his native country. Why should he not love humanity? That would be such an excellent thing. And by the way, it is precisely what is taught by Christianity." So think the advocates of Positivist, Communistic, or Socialistic fraternity.

“사람은 자신(자신의 동물적 인격)을 사랑한다, 그는 그의 가족을 사랑한다, 그는 심지어 그의 조국을 사랑한다. 인류를 사랑하면 어떤가? 그것은 정말 너무나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데, 그것은 정확하게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공산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형제애의 옹호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It would indeed be an excellent thing. But it can never be, for the love that is based on a personal or social con­ception of life can never rise beyond love for the state.

사실 그것은 훌륭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적 또는 사회적 개념의 삶에 기초하고 있는 사랑은 국가를 위한 사랑을 초월하여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The fallacy of the argument lies in the fact that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on which love for family and nation is founded, rests itself on love of self, and that love grows weaker and weaker as it is extended from self to family, tribe, nationality, and state; and in the state we reach the furthest limit beyond which it cannot go.

논리의 허위성은 사회적 개념의 삶은 , 그리고 그 위에 가족과 민족이 형성되고 있는데, 그 자체가 자기에 대한 사랑에 의존하며, 그것이 자신에서 가족, 부족, 민족, 그리고 국가로 확장되면서 그 사랑은 점점 약해진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갈 수 없는 가장 먼 한계에 우리가 도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The necessity of extending the sphere of love is beyond dispute. But in reality the possibility of this love is de­stroyed by the necessity of extending its object indefinitely. And thus the insufficiency of personal human love is made manifest.

사랑의 범위를 확장할 필요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사랑의 가능성은 그 대상을 명확하지 않게 넓혀야 할 필요성에 의하여 파괴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개인적인 인간의 사랑의 불충분이 명백해 진다.

And here the advocates of Positivist, Communistic, Socialistic fraternity propose to draw upon Christian love to make up the default of this bankrupt human love; but Christian love only in its results, not in its foundations. They propose love for humanity alone, apart from love for God.

그리고 여기에 실증주의적,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형제애의 옹호자들은 이 파산 상태의 인간의 사랑의 불이행을 메꾸기 위하여 기독교적인 사랑에 의지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사랑은 오직 그 결과에만 의존하고, 그 기초들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인류에 대한 사랑 만을 제안한다.

But such a love cannot exist. There is no motive to produce it. Christian love is the result only of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in which the aim of life is to love and serve God.

그러나 그러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을 만들어 낼 아무런 동기가 없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오직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의 결과이다, 그 안에서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has led men, by a natural transition from love of self and then of family, tribe, nation, and state, to a consciousness of the necessity of love for humanity, a conception which has no definite limits and extends to all living things. And this necessity for love of what awakens no kind of sentiment in a man is a con­tradiction which cannot be solved by the social theory of life.

사회적 개념의 삶은 사람들을,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나서 가족, 부족, 민족, 그리고 국가에 의해서, 인류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의 의식으로 이끌었으며, 그것은 정해진 한계가 없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에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아무런 종류의 감정을 일깨우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은 삶의 사회적 이론에 의해서 풀어질 수 없는 모순이다.

The Christian doctrine in its full significance can alone solve it, by giving a new meaning to life. Christianity recognizes love of self, of family, of nation, and of humanity, and not only of humanity, but of everything living, every­thing existing; it recognizes the necessity of an infinite extension of the sphere of love. But the object of this love is not found outside self in societies of individuals, nor in the external world, but within self, in the divine self whose essence is that very love, which the animal self is brought to feel the need of through its consciousness of its own perishable nature.

기독교 교리의 완전한 의미 안에서 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으며, 삶에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다. 기독교는 자신, 가족, 민족, 그리고 인류, 그리고 인류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인식한다; 그것은 사랑의 범위에 있어서 무한한 확장의 필요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대상은 개인들의 사회들 안에 있는 자신의 외부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외부의 세상에서도 아니며, 그러나 자신의 안에서, 본질이 바로 그 사랑인 신적인 자신에서에서 발견되며, 그것은 동물적인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소멸되기 쉬운 본질의 의식을 통하여,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The difference between the Christian doctrine and those which preceded it is that the social doctrine said: "Live in opposition to your nature [understanding by this only the animal nature], make it subject to the external law of family, society, and state." Christianity says: "Live according to your nature [understanding by this the divine nature]; do not make it subject to anything-neither you (an animal self) nor that of others-and you will attain the very aim to which you are striving when you subject your external self."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이전의 것들과의 차이는, 사회적 교리는 말한다: “당신의 본능과 반대하여 살아라 [이는 오직 동물적인 본능만 깨달음], 그것을 가족, 사회, 그리고 국가의 외형적인 법률에 복종하게하라.” 기독교는 말한다: “당신의 본능에 따라서 살아라[이는 신적인 본능의 깨달음]; 그것을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않게 하라-당신이든(동물적인 자신), 다른 사람이든-그러면 당신의 외적인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The Christian doctrine brings a man to the elementary consciousness of self, only not of the animal self, but of the divine self, the divine spark, the self as the Son of God, as much God as the Father himself, though confined in an animal husk. The consciousness of being the Son of God, whose chief characteristic is love, satisfies the need for the extension of the sphere of love to which the man of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had been brought. For the latter, the welfare of the personality demanded an ever-widening extension of the sphere of love; love was a necessity and was confined to certain objects-self, family, society. With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love is not a necessity and is confined to no object; it is the essential faculty of the human soul. Man loves not because it is his interest to love this or that, but because love is the essence of his soul, because he cannot but love.

기독교 교리는 사람을 자신에 대한 기초적인 의식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비록 동물적인 껍질에 갇혀있지만, 동물적 자신에게가 아니라 신적인 자신, 신적인 생기, 하나님이 아버지 자신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에게로 데려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은, 그의 주된 특징은 사랑으로서, 사회적 개념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범위에 대한 확장의 필요를 만족 시킨다. 사회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개인의 행복은 끊임없이 넓어지는 사랑의 범위를 요구 했다; 사랑은 필요였으며 특정한 대상들에 갇혀있었다-자신, 가족, 사회.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에 있어서는, 사랑은 필요가 아니며 아무런 대상에 갇혀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의 본질적인 능력이다. 사람은 이것을 또는 저것을 사랑함이 그의 이익이기 때문이아니라, 사랑은 그의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한다.

The Christian doctrine shows man that the essence of his soul is love-that his happiness depends not on loving this or that object, but on loving the principle of the whole -God, whom he recognizes within himself as love, and therefore he loves all things and all men.

기독교의 교리는 사람에게 자신의 영혼의 본질이 사랑임을 보여 준다-, 그의 행복은 이런 또는 저런 대상을 사랑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원리-그가 자기 자신 안에 사랑으로서 인식하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In this is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he Chris­tian doctrine and the doctrine of the Positivists, and all the theorizers about universal brotherhood on non-Christian principles.

이 점에서 기독교 교리와 실증주의자들의 교리, 그리고 비기독교적인 원리들에 입각한 사해 동포주의에 대한 모든 이론주의자들과의 차이가 있다.

Such are the two principal misunderstandings relating to the Christian religion, from which the greater number of false reasonings about it proceed. The first consists in the belief that Christ's teaching instructs men, like all pre­vious religions, by rules, which they are bound to follow, and that these rules cannot be fulfilled. The second is the idea that the whole purport of Christianity is to teach men to live advantageously together, as one family, and that to attain this we need only follow the rule of love to humanity, dismissing all thought of love of God altogether.

앞에 말한 것들이 기독교 종교에 관련된 두가지의 주된 오해들이었으며, 그로부터 그것에 대한 더욱 많은 거짓된 추론들이 나온다. 첫번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모든 이전의 종교들처럼, 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들로서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들 명령들은 실천될 수 없다는 믿음에 있다. 두번째는 기독교의 전체 목표는 사람들에게, 한 가족으로서, 서로 이롭게 살도록 가느치는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모든 사상들을 완전히 버리고, 우리는 오직 인류에 대한 사랑의 명령만을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다.

The mistaken notion of scientific men that the essence of Christianity consists in the supernatural, and that its moral teaching is impracticable, constitutes another reason of the failure of men of the present day to understand Christianity.

기독교의 본질은 초자연적인 것에 있으며 그 도덕적 가르침은 실행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잘못된 관념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깨닫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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