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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y Leo Tolstoy

   
   
CHAPTER V.  5  

CONTRADICTION BETWEEN OUR LIFE AND OUR CHRISTIAN CONSCIENCE.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독교적 양심의 모순

Men Think they can Accept Christianity without Altering their Life- Pagan Conception of Life does not Correspond with Present Stage of Development of Humanity, and Christian Conception Alone Can Accord with it-Christian Conception of Life not yet Understood by Men, but the Progress of Life itself will Lead them Inevitably to Adopt it-The Requirements of a New Theory of Life Always Seem Incomprehensible, Mystic, and Supernatural-So Seem the Requirements of the Christian Theory of Life to the Majority of Men-The Absorption of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will Inevitably be Brought About as the Result of Material and Spiritual Causes-The Fact of Men Knowing the Require­ments of the Higher View of Life, and yet Continuing to Preserve Inferior Organizations of Life, Leads to Contradictions and Sufferings which Embitter Existence and Must Result in its Transformation-The Contradictions of our Life-The Economic Contradiction and the Suffering Induced by it for Rich and Poor Alike-The Political Con­tradiction and the Sufferings Induced by Obedience to the Laws of the State-The International Contradiction and the Recognition of it by Contemporaries: Komarovsky, Ferri, Booth, Passy, Lawson, Wilson, Bartlett, Defourney, Moneta-The Striking Character of the Military Contradiction.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지 않고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교적 개념의 삶은 인류의 현재 발전 단계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개념만이 그것과 일치할 수 있다-기독교적 개념의 삶은 아직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앗다, 그리고 삶의 진행 자체는 그들이 필연적으로 그것을 채택하도록 이끌 것이다-새로운 삶에 대한 이론의 필요성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고, 신비스러우며, 그리고 초자연적이었다-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삶의 기독교적 이론의 요구는 그러했다-기독교적 개념의 삶의 흡수는 필연적으로 물질과 영혼의 원인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삶에 대한 더 높은 시각의 필요조건을 사람들이 알면서도 삶의 열등한 단체들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사실은 존재를 어렵게 하는 모순들과 고통들에 이른다 그리고 반드시 그 변형을 필요로 한다-우리의 삶의 모순들-경제적 모순과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똑같이 그로인해 초래되는 고통-국가의 법률을 따르므로서 초래되는 정치적 모순과 고통들-국제적인 모순과 동시대 사람들에 의한 그것의 인식:코마로프스키, 페리, 부스, 패시, 로슨, 윌슨, 바틀렛, 디포니, 모네타-군사적 모순의 두드러진 특징.

there are many reasons why Christ's teaching is not understood. One reason is that people suppose they have understood it when they have decided, as the Churchmen do, that it was revealed by supernatural means, or when they have studied, as the scientific men do, the external forms in which it has been manifested. Another reason, is the mistaken notion that it is impracticable, and ought to be replaced by the doctrine of love for humanity. But the principal reason, which is the source of all the other mistaken ideas about it, is the notion that Christianity is a doc­trine which can be accepted or rejected without any change of life.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해되지 않는 데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이 그렇듯이, 초자연적인 방법들로서 나타내어 진다고 결론지었을 때나, 또는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표출되어지는 외적인 형상들을 연구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은 실현불가능하며, 인류에 대한 사랑의 교리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모든 다른 그릇된 사상들의 근원이 되는, 주된 이유는, 기독교는 삶에 대한 어떤 변화가 없어도 받아 들여 지거나 거부될 수 있다는 교리라는 생각이다.

Men who are used to the existing order of things, who like it and dread its being changed, try to take the doc­trine as a collection of revelations and rules which one can accept without their modifying one's life. While Christ's teaching is not only a doctrine which gives rules which a man must follow, it unfolds a new meaning in life, and defines a whole world of human activity quite different from all that has preceded it and appropriate to the period on which man is entering.

기존 사물의 질서에 적응된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며 그것이 변회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삶을 수정함이 없이도 받아 들일 수 있는 계시들과 명령들의 집합으로 교리를 취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오직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들을 주는 교리가 아닌 반면에, 삶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를 열어준다, 그리고 이전에 있어온 모든 것들과는 매우 다른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 가고자 하는 시대에 적합한 인간의 활동의 전체 세계를 정의한다.

The life of humanity changes and advances, like the life of the individual, by stages, and every stage has a theory of life appropriate to it, which is inevitably absorbed by men. Those who do not absorb it consciously, absorb it unconsciously. It is the same with the changes in the beliefs of peoples and of all humanity as it is with the changes of belief of individuals. If the father of a family continues to be guided in his conduct by his childish con­ceptions of life, life becomes so difficult for him that he involuntarily seeks another philosophy and readily absorbs that which is appropriate to his age.

개인의 삶처럼, 인류의 삶은, 단계적으로, 변화하며 나아간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들은 그에 적합한 삶의 이론을 가지며,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흡수되어 진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흡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한다. 사람들과 인류의 믿음에 대한 변화들은 개인들의 믿음의 변화들과 똑같다. 만일 가족의 아버지가 그의 아이같은 삶에 대한 개념들에 의해서 그의 행위가 인도된다면, 삶은 그에게 너무나 힘들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철학을 찾게되고 그의 나이에 적합한 것을 쉽게 흡수하게 된다.

That is just what is happening now to humanity at this time of transition through which we are passing, from the pagan conception of life to the Christian. The socialized man of the present day is brought by experience of life itself to the necessity of abandoning the pagan conception of life, which is inappropriate to the present stage of humanity, and of submitting to the obligation of the Christian doctrines, the truths of which, however cor­rupt and misinterpreted, are still known to him, and alone offer him a solution of the contradictions surrounding him.

그것이 바로, 이교도적인 삶의 개념에서 기독교적인 것으로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지금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화된 사람은 삶 그 자체의 경험에 의하여 이교도적인 개념의 삶을 버리거나- 그러한 삶은 인류의 현 단계에서 적합하지 않으며-,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한 의무에 복종함-그것의 진리들은, 아무리 부패하였고, 왜곡되었더라도, 여전히 그에게 알려져 있으며, 그것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모순 들에 대한 해답을 준다-의 필요에 다가서게 된다.

If the requirements of the Christian doctrine seem strange and even alarming to the man of the social theory of life, no less strange, incomprehensible, and alarming to the savage of ancient times seemed the requirements of the social doctrine when it was not fully understood and could not be foreseen in its results.

만일 기독교 교리의 필요 조건들이 사회적인 삶의 이론을 가진 사람에게 이상하고 심지어 놀라운 것처럼 보인다면, 사회적 교리들의 필요 조건들이,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그 결과들이 예측될 수 없을 때에, 옛날의 야만인들에게도 결코 적지 않게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놀라운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It is unreasonable," said the savage, "to sacrifice my peace of mind or my life in defense of something incom­prehensible, impalpable, and conventional-family, tribe, or nation; and above all it is unsafe to put oneself at the dis­posal of the power of others."

야만인들이 말한다, “나의 마음이나 나의 삶을 어떤 이해할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그리고 진부한 것-가족, 부족, 또는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다른 사람의 힘의 처분에 맏기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But the time came when the savage, on one hand, felt, though vaguely, the value of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and of its chief motor power, social censure, or social approbation-glory, and when, on the other hand, the diffi­culties of his personal life became so great that he could not continue to believe in the value of his old theory of life. Then he accepted the social, state theory of life and sub­mitted to it.

그러나 야만인이, 한편으로, 막연하지만, 사회적 개념의 삶, 그리고 그 주된 동력, 사회적 검열, 또는 사회적 승인-명예-의 가치를 느끼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개인적인 삶이 어려움들이 너무나 커서 자신의 삶에 대한 과거의 이론의 가치를 더이상 믿을 수 없는 때가 왔다. 그러자 그는 사회적, 국가적 개념의 삶을 받아 들이고 그것에 복종했다.

That is just what the man of the social theory of life is passing through now.

그것이 바로 사회적 이론의 삶을 사는 사람이 현재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It is unreasonable," says the socialized man, "to sacri­fice my welfare and that of my family and my country in order to fulfill some higher law, which requires me to renounce my most natural and virtuous feelings of love of self, of family, of kindred, and of country; and above all, it is unsafe to part with the security of life afforded by the organization of government."

사회적인 사람이 말한다, “나의 행복, 그리고 가족과 국가의 행복을 좀더 높은 법을 실천하기 위하여-그것은 자신, 가족, 혈족 그리고 국가에 대한 사랑이라는 나의 가장 당연하고 고결한 감정을 포기하기를 요구한다-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 기관이 제공하는 삶의 안전을 버리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But the time is coming when, on one hand, the vague consciousness in his soul of the higher law, of love to God and his neighbor, and, on the other hand, the suffering, resulting from the contradictions of life, will force the man to reject the social theory and to assimilate the new one prepared ready for him, which solves all the contradictions and removes all his sufferings-the Christian theory of life. And this time has now come.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영혼에서 더 높은 법, 즉 하나님 그리고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막연한 인식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삶의 모순들로부터 초래되는 고통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흡수하도록 강제할 것이며, 그것이 모든 모순들을 해결하며 그의 모든 고통들을 제거할 것이다-그것은 기독교적인 이론을 따르는 삶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는 이제 왔다.

We, who thousands of years ago passed through the transition, from the personal, animal view of life to the socialized view, imagine that that transition was an inevita­ble and natural one; but this transition through which we have been passing for the last eighteen hundred years seems arbitrary, unnatural, and alarming. But we only fancy this because that first transition has been so fully completed that the practice attained by it has become un­conscious and instinctive in us, while the present transition is not yet over and we have to complete it consciously.

수천년 전에, 개인적 동물적 시각의 삶으로부터 사회적 시각으로 변천을 겪은 우리는 그 변천이 필연적이며 당연한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1800년 동안 통과하고 있는 이 변천은 일정하지 않으며, 부자연스럽고, 놀랍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첫번째 변천이 너무나 깊이 완성되어서 그것에 의해서 달성된 습관들이 우리 안에서 무의식적이며 본능적으로 되었으며, 반면에 현재의 변천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의식적으로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다.

It took ages, thousands of years, for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to permeate men's consciousness. It went through various forms and has now passed into the region of the instinctive through inheritance, education, and habit. And therefore it seems natural to us. But five thousand years ago it seemed as unnatural and alarming to men as the Christian doctrine in its true sense seems today.

사회적 개념의 삶이 사람들의 의식에 스며 들어가는 것은 세월이, 수천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것은 여러가지 형태을 거쳤으며 이제 유전, 교육, 그리고 습관을 통하여 본능적인 종교로 흘러 갔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천년 전에는 오늘날 기독교의 교리가 그의 진정한 의미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럽고 놀랍게 느껴졌다.

We think to-day that the requirements of the Christian doctrine-of universal brotherhood, suppression of national distinctions, abolition of private property, and the strange injunction of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demand what is impossible. But it was just the same thousands of years ago, with every social or even family duty, such as the duty of parents to support their children, of the young to main­tain the old, of fidelity in marriage. Still more strange, and even unreasonable, seemed the state duties of submitting to the appointed authority, and paying taxes, and fighting in defense of the country, and so on. All such requirements seem simple, comprehensible, and natural to us to-day, and we see nothing mysterious or alarming in them. But three or five thousand years ago they seemed to require what was impossible.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의 교리가-세계 동포, 민족적 구별들의 억제, 개인 재산의 폐지, 그리고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이라는 이상한 금지-불가능한 거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또는 심지어 가족에 대한 의미에서, 예를 들면, 부모들의 자녀들을 뒷받침하며, 젊은 사람이 노인을 부양하고, 결혼 생활의 순결해야할 의무등 에서, 그것은 오천년 전에도 똑같았다. 더욱 더 이상하며, 심지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정된 권력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며,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하는 국가적 의무들이었다. 그런 모든 필요조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단순하며,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에서 아무런 신비스럽거나 놀라운 것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삼천년 또는 오천년 전에 그것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served as the basis of reli­gion because at the time when it was first presented to men it seemed to them absolutely incomprehensible, mystic, and supernatural. Now that we have outlived that phase of the life of humanity, we understand the rational grounds for uniting men in families, communities, and states. But in antiquity the duties involved by such association were pre­sented under cover of the supernatural and were confirmed by it.

삶의 사회적 개념은, 그것이 처음 사람들에게 제시되었을 때 그들에게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신비스러우며, 초자연적이었으므로, 종교의 원리로서 작용했다. 우리는 인류의 삶의 단계를 극복하였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가족들, 공동체들, 그리고 국가들로 연합하는 이성적인 근거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러한 유대가 포함된 의무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구실삼아 제시되었으며 그것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The patriarchal religions exalted the family, the tribe, the nation. State religions deified emperors and states. Even now most ignorant people-like our peasants, who call the Tzar an earthly god-obey state laws, not through any rational recognition of their necessity, nor because they have any conception of the meaning of state, but through a religious sentiment.

가부장제의 종교들은 가족, 부족, 민족을 받들었다. 국가적인 종교들은 황제들과 국가들을 신격화하였다. 심지어 지금도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황제를 땅위의 신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농부들처럼-그것은 그들이 필요한 것에 대한 이성적 인식 때문이 아니며, 또는 그들이 국가의 의미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인 감정때문에 국가의 법을 따른다.

In precisely the same way the Christian doctrine is pre­sented to men of the social or heathen theory of life to-day, in the guise of a supernatural religion, though there is in reality nothing mysterious, mystic, or supernatural about it. It is simply the theory of life which is appropriate to the present degree of material development, the present stage of growth of humanity, and which must therefore inevitably be accepted.

정확히 똑같은 방법으로 오늘날 기독교 교리가 사회적 또는 이교적인 삶의 이론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록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비밀스럽고 신비스럽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없지만, 초자연적인 종교를 가장하여 나타났다. 그것은 단순히 삶의 이론으로서, 현재의 물질적인 발전 정도에, 현재의 인류의 성장단계에 적합하며, 그러므로 반드시 필연적으로 받아들여 져야한다.

The time will come-it is already coming-when the Christian principles of equality and fraternity, community of property, non-resistance of evil by force, will appear just as natural and simple as the principles of family or social life seem to us now.

때가 올 것이다-이미 오고 있다-평등 그리고 형제애, 재산 공유,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기독교적인 원리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족이나 사회적 삶의 원리들이 정말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보이는 것처럼 나타나는 때가 올 것이다.

Humanity can no more go backward in its development than the individual man. Men have outlived the social, family, and state conceptions of life. Now they must go forward and assimilate the next and higher concep­tion of life, which is what is now taking place. This change is brought about in two ways: consciously through spiritual causes, and unconsciously through material causes.

인류는 개인적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발전에서 후퇴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삶의 사회적, 가족적, 그리고 국가적 개념들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들은 나아가서 다음의 그리고 더 높은 삶의 개념을 흡수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두가지 방향에서 일어나게 된다: 영적인 원인들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인 원인들을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Just as the individual man very rarely changes his way of life at the dictates of his reason alone, but generally continues to live as before, in spite of the new interests and aims revealed to him by his reason, and only alters his way of living when it has become absolutely opposed to his conscience, and consequently intolerable to him; so, too, humanity, long after it has learnt through its religions the new interests and aims of life, toward which it must strive, continues in the majority of its representatives to live as before, and is only brought to accept the new conception by finding it impossible to go on living its old life as before.

정말로 자신의 이성의 명령 하나만으로 개인적인 사람이 그의 삶의 방향을 거의 바꾸지 않으며, 그러나 그의 이성에 의해서 그에게 밝혀지는 새로운 관심들과 목적들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전처럼 살아 가고, 오직 자신의 양심에 절대적으로 대치되어서 결국 참기 어려워질 때 생활의 방향을 바꾸듯이; 인류 역시 그러하다, 즉 그들은 그들의 종교들을 통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새로운 관심들과 목적들을 배운지 오래 지나서도, 그들의 대표자들의 대부분이 전처럼 계속 살아가고, 옛날 삶을 전처럼 살아가기가 불가능함을 알고 나서야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Though the need of a change of life is preached by the religious leaders and recognized and realized by the most intelligent men, the majority, in spite of their reverential attitude to their leaders, that is, their faith in their teach­ing, continue to be guided by the old theory of life in their present complex existence. As though the father of a family, knowing how he ought to behave at his age, should yet continue through habit and thoughtlessness to live in the same childish way as he did in boyhood.

비록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삶의 변화가 설교되고 가장 지성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고 깨달아 지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경의로운 태도, ,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현재의 복잡한 존재에 있어서 삶에 관한 옛날 이론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끌려 간다. 그것은 마치, 가족의 아버지가, 자신의 나이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를 알고 있음에도, 아직도 습관과 경솔함으로 소년 시절에 그랬던 것같이 계속해서 똑같이 어리석게 살아 가야하는 것과 같다.

That is just what is happening in the transition of humanity from one stage to another, through which we are passing now. Humanity has outgrown its social stage and has entered upon a new period. It recognizes the doctrine which ought to be made the basis of life in this new period. But through inertia it continues to keep up the old forms of life. From this inconsistency between the new concep­tion of life and practical life follows a whole succession of contradictions and sufferings which embitter our life and necessitate its alteration.

그것이 바로 인류가 한 단계에서 다음으로 변천함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 우리가 통과하고 있다. 인류에게 있어서 사회적 단계는 낡아 버렸으며, 이제 새로운 시기로 들어 섰다. 인류는 이 새로운 시대에 삶의 기초가 되어야하는 교리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 무력함 때문에 삶의 옛날 모습들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삶과 실용적인 삶 사이의 불일치로부터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총체적인 모순들과 고통들이 따라나오며, 인류의 변화를 필요하게 만들고 있다.

One need only compare the practice of life with the theory of it, to be dismayed at the glaring antagonism between our conditions of life and our conscience.

우리는 오직 삶의 실제와 이론을 비교하기만 하면 될 뿐이며, 결국 우리의 삶의 상태들과 우리의 양심사이의 첨예한 반목에 실망하고 만다.

Our whole life is in flat contradiction with all we know, and with all we regard as necessary and right. This con­tradiction runs through everything, in economic life, in political life, and in international life. As though we had forgotten what we knew and put away for a time the principles we believe in (we cannot help still believing in them because they are the only foundation we have to base our life on) we do the very opposite of all that our con­science and our common sense require of us.

우리의 전체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우리가 필요하며 옳다고 여기는 모든 것과 말 그대로 모순이다. 이런 모순은 모든 것을 관통한다, 경제적인 삶에서, 정치적인 삶에서, 그리고 국제적인 삶에서 그렇다. 비록 우리가 알던 것을 잊어 버리고 잠시동안 우리가 믿는 원리들을 저버렸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기초해야하는 유일한 토대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것들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일반 상식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너무나 상반되게 행동한다.

We are guided in economical, political, and international questions by the principles which were appropriate to men of three or five thousand years ago, though they are directly opposed to our conscience and the conditions of life in which we are placed today.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및 국제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삼 또는 오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원리들에 이끌려 간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우리의 양심과 삶의 상태들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It was very well for the man of ancient times to live in a society based on the division of mankind into masters and slaves, because he believed that such a distinction was decreed by God and must always exist. But is such a belief possible in these days?

고대의 사람들은 인류가 주인들과 노예로 나누어져 성립된 사회에 사는 것이 매우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분이 하나님에 의해서 명해졌으며 언제나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믿음이 가능한가?

The man of antiquity could believe he had the right to enjoy the good things of this world at the expense of other men, and to keep them in misery for generations, since he believed that men came from, different origins, were base or noble in blood, children of Ham or of Japhet. The greatest sages of the world, the teachers of humanity, Plato and Aristotle, justified the existence of slaves and demonstrated the lawfulness of slavery; and even three centuries ago, the men who described an imaginary society of the future, Utopia, could not conceive of it without slaves.

고대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여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있고 그들을 수 세대 동안 불행에 묶어둘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이 다른 근원들에서 나왔으며, 피가 천하거나 고귀하고, 함이나 야펫의 자손들에서 온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현인들, 인류의교사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들의 존재를 정당화하였으며 노예제도의 합법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3세기 전에, 미래의 가상 사회인 유토피아를 묘사한 사람들은 노예들이 없이는 그것을 구상할 수가 없었다.

Men of ancient and mediaeval times believed, firmly believed, that men are not equal, that the only true men are Persians, or Greeks, or Romans, or Franks. But we cannot believe that now. And people who sacrifice themselves for the principles of aristocracy and of patriotism to-day, don't believe and can't believe what they assert.

고대와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들은 평등하지 않으며, 유일하게 참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 또는 그리스인들, 또는 로마인들, 또는 프랑크인들이라고 믿었으며, 확고하게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귀족주의나 애국주의의 원리들을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으며 믿을 수 없다.

We all know and cannot help knowing-even though we may never have heard the idea clearly expressed, may never have read of it, and may never have put it into words, still through unconsciously imbibing the Christian sentiments that are in the air-with our whole heart we know and can­not escape knowing the fundamental truth of the Christian doctrine, that we are all sons of one Father, wherever we may live and whatever language we may speak; we are all brothers and are subject to the same law of love implanted by our common Father in our hearts.

우리 모두는 안다 그리고 알지 않을 수가 없다-비록 우리는 결코 그 사상이 명백하게 표현된 것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을 결코 읽어보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을 결코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지라도, 여전히 유포되고 있는 기독교적인 정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 들임으로써-우리의 모든 가슴으로 우리는 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근본 진리를 알기를 피할 수가 없으니,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다, 우리가 어디에 살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우리의 가슴들에 있는 우리의 한 아버지에 의해 심어진 똑같은 사랑의 법에 속해 있다.

Whatever the opinions and degree of education of a man of to-day, whatever his shade of liberalism, whatever his school of philosophy, or of science, or of economics, however ignorant or superstitious he may be, every man of the present day knows that all men have an equal right to life and the good things of life, and that one set of people are no better nor worse than another, that all are equal. Everyone knows this, beyond doubt; every­one feels it in his whole being. Yet at the same time everyone sees all round him the division of men into two castes-the one, laboring, oppressed, poor, and suffering, the other idle, oppressing, luxurious, and profligate. And everyone not only sees this, but voluntarily or involun­tarily, in one way or another, he takes part in maintaining this distinction which his conscience condemns. And he cannot help suffering from the consciousness of this con­tradiction and his share in it.

오늘날 한 사람의 의견들과 교육의 정도가 어떻든지, 그의 자유주의의 색깔이 어떻든지, 그의 철학, 과학, 경제의 학파는 어느 것이든지, 그가 아무리 무식하거나 미신적이든지, 현 시대의 제각기 사람은 모든 사람이 삶과 좋은 것들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낫거나 악아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안다. 누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을 안다; 누구나 그것을 자신의 전체 존재로서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나 그의 모든 주위에 사람들이 두 계급으로 존재하는 것을 본다-하나는, 노동하며, 억압받고, 가난하며,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게으르고 억압하며, 사치스럽고, 그리고 방탕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것을 알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이모저모로, 그의 양심이 비난하는 이러한 구분을 옹호하는데 참여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모순을 의식함과 그것 안에 자신이 기여함으로부터 고통받지 않을 수가 없다.

Whether he be master or slave, the man of to-day can­not help constantly feeling the painful opposition between his conscience and actual life, and the miseries resulting from it.

그가 주인이던 노예이던, 오늘날의 사람은 그의 양심과 실제 삶 사이에서 가슴아픈 갈등 그리고 그로부터 연유되는 불행들을 끊임없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The toiling masses, the immense majority of mankind who are suffering under the incessant, meaningless, and hopeless toil and privation in which their whole life is swallowed up, still find their keenest suffering in the glaring contrast between what is and what ought to be, according to all the beliefs held by themselves, and those who have brought them to that condition and keep them in it.

수고하는 민중들, 삶 전체를 삼켜버리는 끊임없고, 의미 없으며, 절망적인 수고와 궁핍 아래서, 고통받는 인류의 엄청난 대부분은, 그들이 지닌 모든 믿음들 그리고 그들을 그런 상태로 데려왔으며 그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들에 따라서 현재의 모습과 당연히 있어야 할 모습의 첨예한 대조 안에서 그들의 가장 예리한 고통을 찾고 있다.

They know that they are in slavery and condemned to privation and darkness to minister to the lusts of the minority who keep them down. They know it, and they say so plainly. And this knowledge increases their suffer­ings and constitutes its bitterest sting.

그들이 노예 상태에 있으며 궁핍과 어둠을 강요당하여서 그들을 누고 있는 소수들의 탐욕들을 채워주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들은 그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평범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고통들을 증가시키며 가장 쓰라린 고통을 구성한다.

The slave of antiquity knew that he was a slave by nature, but our laborer, while he feels he is a slave, knows that he ought not to be, and so he tastes the agony of Tantalus, forever desiring and never gaining what might and ought to be his.

옛날의 노예들은 그가 태어 나면서부터 노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동자는, 그가 노예라는 것을 느끼는 반면에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탄탈루스의 고통을 맛본다, 그리고 그의 것으로 존재하며 그의 것이어야하는 것을 영원히 갈망하면서도 결코 얻지 못하고 있다.

The sufferings of the working classes, springing from the contradiction between what is and what ought to be, are increased tenfold by the envy and hatred engendered by their consciousness of it.

노동자 계층의 고통들은, 현재의 모습과 당연히 있어야할 모습과의 갈등으로부터 분출되어서, 그들이 그것을 인식함으로서 생성되는 시기와 증오로서 열배나 증폭된다.

The laborer of the present day would not cease to suffer even if his toil were much lighter than that of the slave of ancient times, even if he gained an eight-hour working day and a wage of three dollars a day. For he is working at the manufacture of things which he will not enjoy, working not by his own will for his own benefit, but through necessity, to satisfy the desires of luxurious and idle people in general, and for the profit of a single rich man, the owner of a factory or workshop in particular. And he knows that all this is going on in a world in which it is a recognized scientific principle that labor alone creates wealth, and that to profit by the labor of others is immoral, dishonest, and punishable by law; in a world, moreover, which professes to believe Christ's doctrine that we are all brothers, and that true merit and dignity is to be found in serving one's neighbor, not in exploiting him. All this he knows, and he cannot but suffer keenly from, the sharp contrast between what is and what ought to be.

현 시대의 노동자는, 비록 고대의 노예보다 고통이 훨씬 가벼워진다고 하더라도, 비록 하루에 여덟시간과 삼 달러의 임금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즐거워 하지 않는 제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일을 자신의 의지에 의하지 않고, 필요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치스럽고 게으른 사람들의 욕망들을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그리고 단 한 명의 부자, 특별히 공장이나 작업장의 소유자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들이 노동만이 부를 만들어 내며,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부정직하고, 법으로 처벌 받는다는 인정된 과학적인 원리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진정한 장점과 존엄은 이웃을 사랑함에 있으며, 착취함에 있지 않다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근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안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상황과 원래 되어 있어야할 상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부터 예리하게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According to all principles, according to all I know, and what everyone professes," the workman says to himself, "I ought to be free, equal to everyone else, and loved; and I am-a slave, humiliated and hated." And he too is filled with hatred and tries to find means to escape from his position, to shake off the enemy who is over-riding him, and to oppress him in turn. People say, "Workmen have no business to try to become capitalists, the poor to try to put themselves in the place of the rich." That is a mis­take. The working-men and the poor would be wrong if they tried to do so in a world in which slaves and masters were regarded as different species created by God; but they are living in a world which professes the faith of the Gospel, that all are alike sons of God, and so brothers and equal. And however men may try to conceal it, one of the first conditions of Christian life is love, not in words but in deeds.

“모든 원리들에 의하면, 내가 아는 모든 것에 의하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에 따르면,” 노동자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자유로워야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평등해야 하며, 그리고 사랑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굴욕 받고, 미움받는 노예이다.” 그리고 그 역시 증오에 가득차서 그의 입장으로부터 도피할 방법들을 찾으려 하고, 그를 깔아 뭉개려는 원수를 털어내려하며, 반대로 그를 억압하려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되려고 시도하며,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위치에 들어설 이유가 없다.” 노예들과 주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른 종족으로 창조된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그들이 그렇게 시도한다면, 일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자들이 틀린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사람들은 똑깥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러므로 형제들이고 평등하다는, 복음서의 신앙을 고백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그것을 숨기려하더라도, 기독교인의 첫번째 조건들의 하나는 사랑이며, 말로서가 아니라 행함으로서이다.

The man of the so-called educated classes lives in still more glaring inconsistency and suffering. Every educated man, if he believes in anything, believes in the brotherhood of all men, or at least he has a sentiment of humanity, or else of justice, or else he believes in science. And all the while he knows that his whole life is framed on principles in direct opposition to it all, to all the principles of Christi­anity, humanity, justice, and science.

소위 교육받은 계층들은 훨씬 더 심각한 모순과 고통에 산다. 제각기의 교양있는 사람은, 그가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형제임을 믿으며, 적어도 그는 인류애, 또는 정의의 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그는 과학을 믿는다. 그리고 내내 그의 전체 삶은 그것 모두에, 기독교, 인류애, 정의, 그리고 과학의 모든 원리들에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원리 위에 형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He knows that all the habits in which he has been brought up, and which he could not give up without suffering, can only be satisfied through the exhausting, often fatal, toil of oppressed laborers, that is, through the most obvious and brutal violation of the principles of Christianity, humanity, and justice, and even of science (that is, economic science). He advocates the principles of fraternity, humanity, justice, and science, and yet he lives so that he is dependent on the oppression of the working classes, which he denounces, and his whole life is based on the advantages gained by their oppression. Moreover he is directing every effort to main­taining this state of things so flatly opposed to all his beliefs.

그가 양육되어 왔으며, 그가 고통없이는 포기할 수 없었던 모든 습관들은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오직 피를 말리며, 흔히 치명적인 고역들로서, , 기독교, 인류애, 그리고 정의, 그리고 심지어 과학(, 경제과학)의 원리들을 가장 명백하고 잔인하게 범하므로써, 만족되어 질 수 있다. 그는 형제애, 인류애, 정의, 그리고 과학의 원리들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비난하고 있는 노동하는 계급들의 억압에 의존하며, 그의 전체 삶은 그들의 억압으로 얻어지는 이익들에 근거를 두고 살고 있다. 게다가 그는 모든 자신의 믿음들에 너무나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현상들의 이러한 상태를 지속하려고 모든 노력들을 쏟아넣고 있음을 그는 안다.

We are all brothers-and yet every morning a brother or a sister must empty the bedroom slops for me. We are all brothers, but every morning I must have a cigar, a sweet­meat, an ice, and such things, which my brothers and sisters have been wasting their health in manufacturing, and I en­joy these things and demand them. We are all brothers, yet I live by working in a bank, or mercantile house, or shop at making all goods dearer for my brothers. We are all brothers, but I live on a salary paid me for prosecuting, judging, and condemning the thief or the prostitute whose existence the whole tenor of my life tends to bring about, and who I know ought not to be punished but reformed. We are all brothers, but I live on the salary I gain by collecting taxes from needy laborers to be spent on the luxur­ies of the rich and idle. We are all brothers, but I take a stipend for preaching a false Christian religion, which I do not myself believe in, and which only serves to hinder men from understanding true Christianity. I take a stipend as priest or bishop for deceiving men in the matter of the greatest importance to them. We are all brothers, but I will not give the poor the benefit of my educational, medical, or literary labors except for money. We are all brothers, yet I take a salary for being ready to commit murder, for teaching men to murder, or making firearms, gunpowder, or fortifications.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그러나 매일 아침 형제나 자매가 나를 위해 침대의 오물을 치워야 한다. 우리는 형제들이다, 그러나 매일 아침 나는 담배 한대, 사탕과자, 얼음, 그리고 그런 것들을 취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나의 형제 자매들이 그것들을 생산하느라고 그들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즐기고 그것들을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은행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나의 형제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상품들을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산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모든 삶의 신조가 그들의 존재를 초래하는 도둑 또는 창녀를 기소하고, 재판하며, 선고함으로써 주어지는 봉급으로 산다, 그리고 그들은 처벌되어서는 안되며 교화되어야 함을 나는 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부자들과 게으른 자들의 사치에 사용되어질 세금들을 노동자들로부터 징수하며 산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거짓 기독교 종교를 설교하는 봉급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나자신도 믿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사람들이 진정한 기독교를 깨닫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나는 사제나 주교로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을 속임으로써 봉급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금전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의 교육의, 의료의, 또는 문학적인 수고들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러나 나는 살인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살인을 가르치거나, 무기, 화약, 또는 요새들을 만들게 함으로써 봉급을 받는다.

The whole life of the upper classes is a constant incon­sistency. The more delicate a man's conscience is, the more painful this contradiction is to him. A man of sensitive conscience cannot but suffer if he lives such a life. The only means by which he can escape from this suffering is by blunting his conscience, but even if some men succeed in dulling their conscience they cannot dull their fears.

상류 계급들의 전체 삶은 끊임없는 불일치이다. 사람의 양심이 섬세할 수록, 그에게 있어서 이런 모순은 더욱 더 고통스럽다. 민감한 양심을 지신 사람은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이런 고통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들은 그의 양심을 무디게 함으로써이다, 그러나 비록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을 둔하게 하는데 성공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들을 둔하게 할 수는 없다.

The men of the higher dominating classes whose con­science is naturally not sensitive or has become blunted, if they don't suffer through conscience, suffer from fear and hatred. They are bound to suffer. They know all the hatred of them existing, and inevitably existing in the work­ing classes. They are aware that the working classes know that they are deceived and exploited, and that they are beginning to organize themselves to shake off oppres­sion and revenge themselves on their oppressors. The higher classes see the unions, the strikes, the May Day Celebrations, and feel the calamity that is threatening them, and their terror passes into an instinct of self-defense and hatred. They know that if for one instant they are worsted in the struggle with their oppressed slaves, they will perish, because the slaves are exasperated and their exasperation is growing more intense with every day of oppression. The oppressors, even if they wished to do so, could not make an end to oppression. They know that they themselves will perish directly they even relax the harshness of their oppression. And they do not relax it, in spite of all their pretended care for the welfare of the working classes, for the eight-hour day, for regulation of the labor of minors and of women, for savings banks and pensions. All that is humbug, or else simply anxiety to keep the slave fit to do his work. But the slave is still a slave, and the master who cannot live without a slave is less disposed to set him free than ever.

당연히 그들의 양심이 민감하지 않거나 뭉툭하게 되어버린 더욱 높이에서 지배하는 계급들의 사람들은, 양심에 의해서 고통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움과 증오로서 고통받는다. 그들은 고통받게 되어 있다. 그들은 존재하는, 피할 수 없이 일하는 계급들의 사람들에서 존재하는 그들에 대한 모든 증오들을 안다. 그들은 노동하는 계급들이 속임을 당하며 착취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압제를 털어버리고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복수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더욱 높은 계급들은 노동조합, 파업, 노동절 축제들 보고서 그들을 위협하는 재앙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공포는 자기 방어와 증오의 본능으로 변해간다. 만일 그들이 한 순간 그들의 억압받는 노예들과의 투쟁에서 진다면, 그들을 멸망할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노예들은 분노하고 있으며 그들의 분노는 나날의 억압으로 더욱 강해져 가고 있기때문이다. 압제자들, 비록 그들의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고, 압제를 끝낼 수가 없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압제의 강도를 늦춘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그들은 멸망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 계급들의 복지에 대해서, 연소자와 여자들의 노동에 대해서, 저축은행과 연금에 대한 그들의 겉치레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늦추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은 사탕발림이거나 또는 기타 단순히 노예들이 그들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묶어두는 염려함이다. 그러나 노예는 여전히 노예이다, 그리고 노예 없이 살 수 없는 주인은 이전 보다 더욱 그들 자유로이 해줄 마음이 없다.

The attitude of the ruling classes to the laborers is that of a man who has felled his adversary to the earth and holds him down, not so much because he wants to hold him down, as because he knows that if he let him go, even for a second, he would himself be stabbed, for his adver­sary is infuriated and has a knife in his hand. And there­fore, whether their conscience is tender or the reverse, our rich men cannot enjoy the wealth they have filched from the poor as the ancients did who believed in their right to it. Their whole life and all their enjoyments are embittered either by the stings of conscience or by terror.

노동자들에 대한 지배계급들의 태도는 그의 적을 땅에 넘어 뜨리고 그를 붇들고 있는 사람의 태도이다, 그것은 그가 그들 붙들고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그를 심지어 일초라도 보내 준다면, 그의 적은 성이 나있고 그의 손에 칼을 들고 있으므로, 자신은 찔려 죽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의 양심이 부드럽든 그 반대이든, 우리의 부자들은 옛날 사람들이 당연한 권리로 여기던 가난한 자들로부터 훔친 재물을 즐길 수가 없다. 그들의 전체 삶과 그들의 즐거움들은 양심이 찔려서나 공포로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So much for the economic contradiction. The political contradiction is even more striking.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것은 그만 이야기 하기로 하자. 정치적 모순은 훨씬 더 두드러진다.

All men are brought up to the habit of obeying the laws of the state before everything. The whole existence of modern times is defined by laws. A man marries and is divorced, educates his children, and even (in many countries) professes his religious faith in accordance with the law. What about the law then which defines our whole existence? Do men believe in it? Do they regard it as good? Not at all. In the majority of cases people of the present time do not believe in the justice of the law, they despise it, but still they obey it. It was very well for the men of the ancient world to observe their laws. They firmly believed that their law (it was generally of a religious character) was the only just law, which everyone ought to obey. But is it so with us? we know and cannot help knowing that the law of our country is not the one eternal law; that it is only one of the many laws of different countries, which are equally imperfect, often obviously wrong and unjust, and are criticized from every point of view in the newspapers. The Jew might well obey his laws, since he had not the slightest doubt that God had written them with his finger; the Roman too might well obey the laws which he thought had been dictated by the nymph Egeria. Men might well observe the laws if they believed the Tzars who made them were God's anointed, or even if they thought they were the work of assemblies of lawgivers who had the power and the desire to make them as good as possible. But we all know how our laws are made. We have all been behind the scenes, we know that they are the product of covetousness, trickery, and party struggles; that there is not and cannot be any real justice in them. And so modern men cannot believe that obedi­ence to civic or political laws can satisfy the demands of the reason or of human nature. Men have long ago recog­nized that it is irrational to obey a law the justice of which is very doubtful, and so they cannot but suffer in obeying a law which they do not accept as judicious and binding.

무엇보다 먼저 모든사람들은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습관으로 키워져 왔다. 현대의 모든 존재는 법률로써 정의된다. 사람은 법률에 따라서 결혼하며 이혼 당하고, 그의 자녀를 교육시키며, 그리고 심지어(많은 국가들에서) 그의 종교적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체 존재를 정의하는 법률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선하다고 여기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현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 법의 정의를 믿지 않으며, 그것을 경멸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복종하고 있다. 옛날 세상의 사람들이 그들의 법률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들은 그들의 법률(그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이 유일하게 정당한 법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것이 그러한가? 우리는 우리국가의 법률이 영원한 법이 아님을 알고 있으며 알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다양한 국가들의 많을 법률들 중의 하나이며, 그것들은 똑같이 불완전하고, 흔히 명백하게 잘못되었으며 부당하며, 신문들에서 다양한 관점에서 비난받고 있다. 유태인은,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법률을 기록하였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므로, 그의 법률들을 잘 지킬 것이다; 로마인도 요정 이제리아가 지시해주었다고 생각하는 법률들을 잘 지킬 것이다. 사람들은 법률들을 만든 황제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라는 것을 믿는다면, 심지어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들을 가능한 선하게 만드려는 능력과 욕구를 지닌 입법가들의 회의의 노력이라면 그것들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법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막의 뒤편에 있으며, 그것들은 탐욕, 속임수, 그리고 당쟁들의 소산임을 알고 있다; 즉 그것들에는 어떤한 진정한 정의도 있지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그러므로 시민법이나 정치법들에 복종하는 것이 이성이나 인간 본성의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정의가 매우 의심스러운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이 판단가능하며 구속력이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법률을 복종하면서 고통받지 않을 수가 없다.

A man cannot but suffer when his whole life is defined beforehand for him by laws, which he must obey under threat of punishment, though he does not believe in their wisdom or justice, and often clearly perceives their injustice, cruelty, and artificiality.

법률에 의하여 사전에 그의 모든 삶이 정의되고, 비록 그들 법률들의 지혜나 정의를 믿지 않으며, 흔히들 명백하게 그것들의 부당함, 잔인함 그리고 인위성을 깨닫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처벌이라는 위협아래서 복종하여야 할 때에, 그는 고통받지 않을 수가 없다.

We recognize the uselessness of customs and import duties, and are obliged to pay them. We recognize the uselessness of the expenditure on the maintenance of the Court and other members of Government, and we regard the teaching of the Church as injurious, but we are obliged to bear our share of the expenses of these institutions. We regard the punishments inflicted by law as cruel and shameless, but we must assist in supporting them. We regard as unjust and pernicious the distribution of landed property, but we are obliged to submit to it. We see no necessity for wars and armies, but we must bear terribly heavy burdens in support of troops and war expenses.

우리는 세관과 수입관세의 무익함을 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불해야만 한다. 우리는 법정과 기타 정부의 기관들의 유지에 관한 지출의 무익함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해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관들의 지출들에 우리의 몫을 져야할 의무를 가진다. 우리는 법률에 의한 처벌들이 잔인하며 파렴치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지지함에 있어서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지의 분배가 부당하며 나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전쟁들과 군대들에 대한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군대들과 전쟁비용들에 너무나도 무거운 짐들을 져야 한다.

But this contradiction is nothing in comparison with the contradiction which confronts us when we turn to interna­tional questions, and which demands a solution under pain of the loss of the sanity and even the existence of the human race. That is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Chris­tian conscience and war.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국제적인 문제들에 방향을 돌릴 때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모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건전한 판단과 심지어 인류의 존재의 상실의 고통아래 해답을 요구한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양심과 전쟁 사이의 모순이다.

We are all Christian nations living the same spiritual life, so that every noble and pregnant thought, springing up at one end of the world, is at once communicated to the whole of Christian humanity and evokes everywhere the same emotion of pride and rejoicing without distinction of nationalities. We who love thinkers, philanthropists, poets, and scientific men of foreign origin, and are as proud of the exploits of Father Damien as if he were one of our­selves, we, who have a simple love for men of foreign nationalities, Frenchmen, Germans, Americans, and Eng­lishmen, who respect their qualities, are glad to meet them and make them so warmly welcome, cannot regard war with them as anything heroic. We cannot even imagine without horror the possibility of a disagreement between these people and ourselves which would call for reciprocal murder. Yet we are all bound to take a hand in this slaughter which is bound to come to pass to-morrow- if not to-day.

우리는 모두 똑같은 영적인 삶을 사는 기독교적인 민족들이다, 그래서 모든 고귀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상들이, 세상의 한 쪽 끝에서 일어나서, 당장에 전체 기독교 인류들에게 전파되고 국적의 구별없이 어디에서나 똑같은 자부심과 즐거움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서로 다른 국적의 사상가들, 박애주의자들, 시인들 그리고 과학자들을 사랑하며, 신부 다미엔 이 마치 우리 자신인 것처럼 그의 공적을 자랑스러워하는 우리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 , 프랑스인들 독일인들, 미국인들, 그리고 영국인들에 대한 단순한 사랑을 가지며, 그들의 품성을 존중하며, 그들을 기꺼이 맞아 들이며 그들이 따뜻하게 환영하게 하는 우리는, 그들과의 전쟁을 결코 영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상호간에 죽음을 불러올 이 사람들과 우리들 사이의 불화의 가능성을 공포없이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오늘은 아닐지라도 내일 반드시 거쳐야하는 이런 살륙에 손을 대어야만 한다.

It was very well for the Jew, the Greek, and the Roman to defend the independence of his nation by murder. For he piously believed that his people was the only true, fine, and good people dear to God, and all the rest were Philis­tines, barbarians. Men of mediaeval times-even up to the end of the last and beginning of this century-might con­tinue to hold this belief. But however much we work upon ourselves we cannot believe it. And this contradiction for men of the present day has become so full of horror that without its solution life is no longer possible.

유태인, 그리스인, 그리고 로마인이 살인을 통하여 자신의 민족의 독립을 수호함은 매우 잘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유일하게 진실되며, 훌륭하고 선하며 모든 나머지 사람들은 속물들이며 야만인들이라는 것을 충실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심지어 중세시대의 마지막 과 이 세기 시작까지도-의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계속하여 지니고 있으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많이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애를 쓰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이 모순은 너무나 두려움으로 가득차서 그 해답 없이는 삶은 더이상 가능할 수 없다.

"We live in a time which is full of inconsistencies," writes Count Komarovsky, the professor of international law, in his learned treatise. "The press of all countries is continually expressing the universal desire for peace, and the general sense of its necessity for all nations.

“우리는 모순 투성이 시대에 살고 있다.” 라고 국제법 교수인 코마로프스키 백작은 그의 박식한 논문에서 쓰고 있다. “모든 국가들의 언론들은 지속적으로 평화와 모든 국가들을 위한 평화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에 대한 희망을 지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Representatives of governments, private persons, and official organs say the same thing; it is repeated in parlia­mentary debates, diplomatic correspondence, and even in state treaties. At the same time governments are increas­ing the strength of their armies every year, levying fresh taxes, raising loans, and leaving as a bequest to future generations the duty of repairing the blunders of the senseless policy of the present. What a striking contrast between words and deeds! Of course governments will plead in justification of these measures that all their ex­penditure and armament are exclusively for purposes of defense. But it remains a mystery to every disinterested man whence they can expect attacks if all the great powers are single-hearted in their policy, in pursuing nothing but self-defense. In reality it looks as if each of the great powers were every instant anticipating an attack on the part of the others. And this results in a general feeling of insecurity and superhuman efforts on the part of each government to increase their forces beyond those of the other powers. Such a competition of itself increases the danger of war. Nations cannot endure the constant in­crease of armies for long, and sooner or later they will prefer war to all the disadvantages of their present posi­tion and the constant menace of war. Then the most trifling pretext will be sufficient to throw the whole of Europe into the fire of universal war. And it is a mis­taken idea that such a crisis might deliver us from the political and economical troubles that are crushing us. The experience of the wars of latter years teaches us that every war has only intensified national hatreds, made mili­tary burdens more crushing and insupportable, and ren­dered the political and economical position of Europe more grievous and insoluble."

“정부들의 대표자들, 사적인 사람들, 그리고 공식적인 기관들에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국회의 토론들, 외교 서신 그리고 심지어 국가간의 협약들에서 도 언급되어 지고 있다. 동시에 정부들은 해마다 그들의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새로운 세금들을 부과하고 공채를 모집하고, 미래의 세대들에게 현재의 어리석은 정치의 실책들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다. 말과 행동에서 얼마나 현저한 차이가 나는가! 물론 정부들은 그들의 모든 지출과 장비들은 전적으로 국방을 위한 것이라고 이들 조처들의 정당성에 대해서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제각기 사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대국들이 그들의 정책에 있어서 한 마음이라면, , 단지 자기 방어만을 추구할 뿐이라면, 어디에서 침략을 예상할 수 있을지가 의혹으로 남는다. 현실적으로 각각의 강국들은 매 순간마다 다른 나라들의 침략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각각의 정부 당사자에게 일반적인 불안감과 다른 강국들을 능가하는 군사력으로 증가시키려고 하는 초인간적인 노력들을 초래하게된다. 그러한 경쟁 자체는 전쟁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국가들은 끊임없는 군사력의 증강을 오랫동안 버텨낼 수 없다, 그리고 조만간에 그들은 현재 상황의 모든 불리함 보다도 그리고 전쟁의 끊임없는 위협보다도 전쟁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면 가장 사소한 구실도 전체 유럽을 세계 대전의 화염속으로 던져 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가 우리를 깔아 뭉개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고통들에서 구원해 주리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지나간 시대의 전쟁에 대한 경험은 각각의 전쟁이 오직 증대된 국가의 증오들 가지게 되었으며, 군사적인 부담이 더욱더 부담이 되며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유럽의 정치적 및 경제적 입지를 견디기 어렵고 해결이 어렵게 몰아부쳤다.”

"Modern Europe keeps under arms an active army of nine millions of men," writes Enrico Ferri, "besides fifteen millions of reserve, with an outlay of four hundred millions of francs per annum. By continual increase of the armed force, the sources of social and individual prosperity are paralyzed, and the state of the modern world may be com­pared to that of a man who condemns himself to wasting from lack of nutrition in order to provide himself with arms, losing thereby the strength to use the arms he pro­vides, under the weight of which he will at last succumb."

엔리코 페리는 기록하고 있다, “현대 유럽은 900만명의 군대에다가 1500만 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연간 지출은 연간 4억 프랑이나 된다. 군사력의 지속적인 증가에 따라서, 사회적 및 개인적인 번영의 근원이 마비된다, 그리고 현대 세계의 상태는 무기를 준비하기 위해 영양을 희생함에 처하며, 그로인해서 그가 준비한 무기들을 사용할 힘을 잃게 되고, 그것이 무거워서 마침내 주저 앉게 되고 마는 사람의 상태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Charles Booth, in his paper read in London before the Association for the Reform and Codification of the Law of Nations, June 26, 1887, says the same thing. After referring to the same number, nine millions of the active army and fifteen millions of reserve, and the enormous expenditure of governments on the support and arming of these forces, he says: "These figures represent only a small part of the real cost, because besides the recognized expenditure of the war budget of the various nations, we ought also to take into account the enormous loss to society involved in withdrawing from it such an immense number of its most vigorous men, who are taken from industrial pursuits and every kind of labor, as well as the enormous interest on the sums expended on military preparations without any return. The inevitable result of this expenditure on war and preparations for war is a contin­ually growing national debt. The greater number of loans raised by the governments of Europe were with a view to war. Their total sum amounts to four hundred millions sterling, and these debts are increasing every year."

1887년 6 26일 런던에서 국제법 개혁 및 성문화 협회에서 읽은 그의 논문에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똑같은 숫자, 900만의 현역 군인들, 그리고 1500만의 예비군, 그리고 이 모든 군사력을 지원하고 형성하기 위해 정부의 엄청난 지출을 언급하고나서, 그는 말한다, “이 숫자들은 오직 실제 경비의 작은 부분 만을 나타낼 뿐이다, 왜냐하면 여러국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전쟁 예산 뿐만 아니라, 그렇게 엄청난 숫자의 가장 왕성한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빼나감과 관현하여 사회에 끼친 엄청난 손실과, 그 사람들은 산업 현장에서 그리고 갖가지의 노동으로부터 붙들려 갔으며, 그뿐만 아니라 반환될 수 없는 군사적 비축에 사용된 자금들에 대한 이윤까지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쟁 및 전쟁준비들에 대한 지출의 피할수 없는 결과는 계속적으로 불어나는 국가의 부채이다. 유럽의 정부들에 의하여 도입된 많은 수의 차관들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총액은 4억 스털링에 달하며, 이들 부채들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The same Professor Komarovsky says in another place: "We live in troubled times. Everywhere we hear com­plaints of the depression of trade and manufactures, and the wretchedness of the economic position generally, the miserable conditions of existence of the working classes, and the universal impoverishment of the masses. But in spite of this, governments in their efforts to maintain their independence rush to the greatest extremes of senseless­ness. New taxes and duties are being devised everywhere, and the financial oppression of the nations knows no limits. If we glance at the budgets of the states of Europe for the last hundred years, what strikes us most of all is their rapid and continually growing increase.

코마로프스키 교수는 다른 장소에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디에서나 우리는 교역과 제조의 침체에 대한 불만, 일반적인 경제적 위치의 비참함, 노동자 계급들의 불행한 생존 상태들, 그리고 민중들의 보편적인 가난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들은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성을 잃은 최극단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디에서나 새로운 세금과 의무가 고안되고, 국가들의 재정적인 억압은 그 한계를 모른다. 만일 우리가 과거 100년 동안의 유럽국가들의 재정을 일견한다면,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그것들이 빠르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How can we explain this extraordinary phenomenon, which sooner or later threatens us all with inevitable bankruptcy?"

“어떻게 우리가 이런 범상치 않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조만간에 피할 수 없은 파산으로서 우리 모두를 위협할 것이 아닌가?”

"It is caused beyond dispute by the expenditure for the maintenance of armaments which swallows up a third and even a half of all the expenditure of European states. And the most melancholy thing is that one can foresee no limit to this augmentation of the budget and impoverish­ment of the masses. What is socialism but a protest against this abnormal position in which the greater proportion of the population of our world is placed?"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유럽 국가들의 삼분의 일 또는 심지어 이분의 일을 집어 삼키는 군사력 유지를 위한 지출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가장 우울한 것은 이런 예산의 증가와 대중들의 빈곤이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세계의 너무나 많은 인구들이 처해있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저항이 바로 사회주의가 아니던가?”

"We are ruining ourselves," says Frederick Passy in a letter read before the last Congress of Universal Peace (in 1890) in London, "we are ruining ourselves in order to be able to take part in the senseless wars of the future or to pay the interest on debts we have incurred by the sense­less and criminal wars of the past. We are dying of hunger so as to secure the means of killing each other."

“우리는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다,” 라고 (1890) 런던에서의 마지막 만국 평화회의에서 읽은 서한에서 프레드릭 파시는 말한다, “우리는 미래의 제정신이 아닌 전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하기 위하여 과거에 제정신이 아니며 범죄적인 전쟁들로서 우리가 야기한 부채에 대한 이자를 갚느라고 우리 스스로를 망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죽이기 위한 수단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굶어 죽어가고 있다.”

Speaking later on of the way the subject is looked at in France, he says: "We believe that, a hundred years after 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the time has come to recognize the rights of nations and to renounce at once and forever all those undertakings based on fraud and force, which, under the name of conquests, are veritable crimes against humanity, and which, whatever the vanity of monarchs and the pride of nations may think of them, only weaken even those who are triumphant over them."

그 뒤에 프랑스에서 그 주제가 비쳐지는 경향을 연설하면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사람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있은 후 100년 뒤에, 국민들의 권리들을 인정하며, 사기와 강압에 의하여 부과된 그 모든 일들을 당장 그리고 영원히 중지 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복들이라는 미명하의 인류에 대한 확실한 범죄이며, 군주들의 허영과 민족들의 자존심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오로지 그것들에 대한 승리에 도취해있는 사람들 마저도 약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믿는다.”

"I am surprised at the way religion is carried on in this country," said Sir Wilfrid Lawson at the same congress. "You send a boy to Sunday school, and you tell him: 'Dear boy, you must love your enemies. If another boy strikes you, you mustn't hit him back, but try to reform him by loving him.' Well. The boy stays in the Sunday school till he is fourteen or fifteen, and then his friends send him into the army. What has he to do in the army? He certainly won't love his enemy; quite the contrary, if he can only get at him, he will run him through with his bayonet. That is the nature of all religious teaching in this country. I do not think that that is a very good way of carrying out the precepts of religion. I think if it is a good thing for a boy to love his enemy, it is good for a grownup man."

“나는 이 나라에서 종교가 실행되는 관행에 놀랐다,” 라고 윌프리드 로슨 경이 같은 회의에서 말했다: ”당신들은 한 아이를 주일 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당신은 그에게 말한다: ‘착한 아이야, 너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다른 아이가 너를 때린다면, 너도 돌아서서 그를 때리지 말고, 그를 사랑으로 착하게 만들도록 해라.’ 글쎄, 그 아이는 열네 살 또는 열다섯 살까지 주일 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군대에 보낸다. 그는 군대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는 틀림없이 그의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정 반대로, 만일 그가 적에게 다가 갈 수만 있다면, 그의 총검으로 그들 구멍낼 것이다. 그것이 모든 종교적 가르침의 본질이다. 나는 그것이 종교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아이가 그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다자란 성인에게도 좋다고 생각한다.”

"There are in Europe twenty-eight millions of men under arms," says Wilson, "to decide disputes, not by discussion, but by murdering one another. That is the accepted method for deciding disputes among Christian nations. This method is, at the same time, very expensive, for, according to the statistics I have read, the nations of Europe spent in the year 1872 a hundred and fifty millions sterling on preparations for deciding disputes by means of murder. It seems to me, therefore, that in such a state of things one of two alternatives must be admitted: either Christianity is a failure, or those who have undertaken to expound it have failed in doing so. Until our warriors are disarmed and our armies disbanded, we have not the right to call ourselves a Christian nation."

“유럽에는 무장을 하고 있는 2800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윌슨은 말한다, “그들은 토론이 아니고 상대방을 살인하여 분쟁을 해결하려 한다. 그것이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용인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동시에 매우 비싸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통계에 따르면, 유럽의 국가들은 1872년에 살인의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준비로서 일억 오천만 스털링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들의 상태로서, 두가지 중의 한가지 대안들이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실패이다, 아니면 그것을 설명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함에 실패하였다. 우리의 전사들이 무장해제하고 우리의 군대들이 해체되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기독교 국가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In a conference on the subject of the duty of Christian ministers to preach against war, G. D. Bartlett said among other things: "If I understand the Scriptures, I say that men are only playing with Christianity so long as they ignore the question of war. I have lived a longish life and have heard our ministers preach on universal peace hardly half a dozen times. Twenty years ago, in a drawing room, I dared in the presence of forty persons to moot the proposition that war was incompatible with Christianity; I was regarded as an arrant fanatic. The idea that we could get on without war was regarded as unmitigated weakness and folly."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전쟁을 반대하는 설교를 해야하는 의무에 관한 주제들 다루는 회의에서, G. D. 바틀렛은 다른 일들 중에서 말했다: “ 내가 성서들을 이해한다면, 사람들이 전쟁의 문제를 무시하는 한 그들은 오직 기독교를 가지고 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나는 긴 삶을 살아 왔으나 성직자들이 전 세계 평화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거의 여섯 번도 듣지 못했다. 이십년 전에, 응접실에서, 나는 사십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전쟁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는 명제를 의제로 내세웠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미치광이로 여겨졌다. 우리가 전쟁없이 살아 갈 수 있다는 사상은 순전한 겁장이며 바보라고 여겨졌다.”

The Catholic priest Defourney has expressed himself in the same spirit. "One of the first precepts of the eternal law inscribed in the consciences of all men," says the Abbe Defourney, "is the prohibition of taking the life or shed­ding the blood of a fellow-creature without sufficient cause, without being forced into the necessity of it. This is one of the commandments which is most deeply stamped in the heart of man. But so soon as it is a question of war, that is, of shedding blood in torrents, men of the present day do not trouble themselves about a sufficient cause. Those who take part in wars do not even think of asking themselves whether there is any justification for these innumerable murders, whether they are justifiable or unjustifiable, lawful or unlawful, innocent or criminal; whether they are breaking that fundamental commandment that forbids killing without lawful cause. But their con­science is mute. War has ceased to be something depend­ent on moral considerations. In warfare men have in all the toil and dangers they endure no other pleasure than that of being conquerors, no sorrow other than that of being conquered. Don't tell me that they are serving their country. A great genius answered that long ago in the words that have become a proverb: 'Without justice, what is an empire but a great band of brigands?' And is not every band of brigands a little empire? They too have their laws; and they too make war to gain booty, and even for honor.

카톨릭의 사제인 디푸르니도 똑같은 정신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양심들 안에 기록되어 있는 영원한 법의 첫번째 교리들 중의 한가지는,” 신부 듀포니는 말한다, “충분한 이유가 없이, 그것의 필요성에 대한 강압이 없이 같은 인류의 목숨을 빼앗거나 피를 흘리는 것의 금지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깊이 각인된 계명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쟁의 문제가 되자마자, , 격류처럼 피를 흘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현 시대의 사람들은 충분한 이유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다. 전쟁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이러한 무수한 살인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정당화되든 정당화되지 않든, 합법적이든 불법적인든, 결백하든 죄인이든 간에,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들이 합법적인 이유없이 살인하는 것을 금하는 기본적인 계명을 위반하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은 벙어리가 되었다. 전쟁들은 도덕적인 고려들에 의존하는 어떤 것이기를 멈추어 버렸다. 전쟁중의 사람들은 모든 고역과 위험들 안에서 정복자들이 되는 즐거움, 피정복자가 되는 슬픔외는 누릴 것이 없다. 그들의 그들의 국가에 봉사한다고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한 위대한 천재가 오래 전에 속담이 되어 버린 말로서 대답했다: ‘정의가 없다면, 제국은 커다란 강도들의 무리가 아닌가? 그들도 그들의 법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약탈하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 명예를 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

"The aim of the proposed institution [the institution of an international board of arbitration] is that the nations of Europe may cease to be nations of robbers, and their armies, bands of brigands. And one must add, not only brigands, but slaves. For our armies are simply gangs of slaves at the disposal of one or two commanders or min­isters, who exercise a despotic control over them without any real responsibility, as we very well know.

“상정된 기구[국제 중재 위원회 기구]는 유럽의 국가들이 강도들의 국가가, 그들의 군대들은 강도들의 무리이기를 중단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강도들 만이 아니라 노예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군대들은 한 두명의 장군들이나 장관들의 처분에 달려있는 단순히 노예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무런 실제적인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병사들에게 횡포를 일삼는다.

"The peculiarity of a slave is that he is a mere tool in the hands of his master, a thing, not a man. That is just what soldiers, officers, and generals are, going to murder and be murdered at the will of a ruler or rulers. Military slavery is an actual fact, and it is the worst form of slavery, especially now when by means of compulsory service it lays its fetters on the necks of all the strong and capable men of a nation, to make them instruments of murder, butchers of human flesh, for that is all they are taken and trained to do.

“노예의 특수성은 그의 주인의 손에 달려있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며, 물건이지 사람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병사들, 장교들, 그리고 장군들이, 통치나나 통치자들의 의지에 따라 살인하려하거나 살해되는 것이다. 군사적 노예는 실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최악의 형태의 노예이다, 특히 강압적인 복무를 통해서 한 나라의 튼튼하고 능력있는 모든 사람들의 목에 쇠목걸이를 채우고, 그들을 살인 도구들, 인간의 육신의 도살자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붙들려가서 행하도록 훈련받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The rulers, two or three in number, meet together in cabinets, secretly deliberate without registers, without pub­licity, and consequently without responsibility, and send men to be murdered."

“통치자들 서넛이 내각에서 회동한다, 비밀리에 서기들도 없이, 공공에 알리지도 않고, 그리고 결국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살해되도록 보낸다."

"Protests against armaments, burdensome to the people, have not originated in our times," says Signer E. G. Moneta. "Hear what Montesquieu wrote in his day. ' France [and one might say, Europe] will be ruined by soldiers. A new plague is spreading throughout Europe. It attacks sov­ereigns and forces them to maintain an incredible number of armed men. This plague is infectious and spreads, because directly one government increases its armament, all the others do likewise. So that nothing is gained by it but general ruin.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군사력에 대한 저항들은 우리 시대에 유래한 것이 아니다,” E. G. 모네타는 말한다. “몽테스키외가 그의 시절에 기록한 것을 들어보라. ‘프랑스 [그리고 어떤이는 유럽이라고 하겠지만] 병사들에 의해서 망할 것이다. 새로운 전염병이 전 유럽에 번지고 있다. 그것은 군주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믿기 어려운 정도의 무장 병력을 유지하라고 시킨다. 이 전염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번진다, 곧바로 한 정부가 그의 군사력을 증강하므로, 모든 다른 정부들도 똑같이 행한다. 결국 그 전염병에 의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전체적인 멸망만이 올 뿐이다.

"Every government maintains as great an army as it possibly could maintain if its people were threatened with extermination, and people call peace this state of tension of all against all. And therefore Europe is so ruined that if private persons were in the position of the governments of our continent, the richest of them would not have enough to live on. We are poor though we have the wealth and trade of the whole world.'

“ ‘제각기 정부들은 만일 그의 사람들이 멸종의 위협을 받는다면 유지할 수 있는 가능한 많은 군대를 유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에 대적하는 이러한 긴장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러므로 유럽은 너무나 멸망하여 만일 우리 대륙의 정부들의 위치에 민간인인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 중에 가장 부자라고 하더라도 살아 갈 만큼 충분히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의 부와 통상의 결과를 가지더라도 가난하다.’

"That was written almost 150 years ago. The picture seems drawn from the world of to-day. One thing only has changed-the form of government. In Montesquieu's time it was said that the cause of the maintenance of great armaments was the despotic power of kings, who made war in the hope of augmenting by conquest their personal revenues and gaining glory. People used to say then: 'Ah, if only people could elect those who would have the right to refuse governments the soldiers and the money-then there would be an end to military politics.' Now there are representative governments in almost the whole of Europe, and in spite of that, war expenditures and the preparations for war have increased to alarming proportions.

“그것은 약 150년 전에 쓰여졌다. 그 배경은 오늘날의 세상으로부터 가져온 것 같다. 오직 한가지 만이 바뀌었다-정부의 형태. 몽테스키외의 시대에는 엄청난 군사력의 유지의 원인이 국왕들의 전제적인 폭력이며, 그들이 정복을 통하여 개인적인 수입을 증가시키며 명예를 얻기를 희망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당시는 사람들은 흔히 이처럼 말했다: ‘, 정말 만일 사람들이 정부들에 대해서 병사들과 돈을 거절할 권리를 가지는 사람들을 선출할 수 있다면-그러면 군사 정치들이 끝이 날텐데.’ 이제 거의 유럽 전체에서 대표제 정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지출과 전쟁에 대한 준비들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했다.

"It is evident that the insanity of sovereigns has gained possession of the ruling classes. War is not made now be­cause one king has been wanting in civility to the mistress of another king, as it was in Louis XIV's time. But the natural and honorable sentiments of national honor and patriotism are so exaggerated, and the public opinion of one nation so excited against another, that it is enough for a statement to be made (even though it may be a false report) that the ambassador of one state was not received by the principal personage of another state to cause the outbreak of the most awful and destructive war there has ever been seen. Europe keeps more soldiers underarms to-day than in the time of the great Napoleonic wars. All citizens with few exceptions are forced to spend some years in barracks. Fortresses, arsenals, and ships are built, new weapons are constantly being invented, to be replaced in a short time by fresh ones, for, sad to say, science, which ought always to be aiming at the good of humanity, assists in the work of destruction, and is constantly inventing new means for killing the greatest number of men in the shortest time. And to maintain so great a multitude of soldiers and to make such vast preparations for murder, hundreds of millions are spent annually, sums which would be sufficient for the education of the people and for immense works of public utility, and which would make it possible to find a peaceful solution of the social question.

“군주들의 정신이상이 지배 계급들을 소유하게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전쟁은 루이 14세의 경우처럼, 한 국왕이 다른 국왕의 왕비에게 공손함이 부족해서 일어남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의 명예와 애국심이라는 자연적이며 귀중한 감정들이 너무나 과장되어서, 그리고 한 국가의 여론이 상대 국가에 대해 너무나 흥분되어서, 한 국가의 대사가 다른 국가의 중요 인물에 의해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진술서(비록 그것이 거짓된 보고서일지라도) 가 만들어져서 이제까지 보았던 중 가장 무섭고 파괴적인 전쟁을 발발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유럽은 위대한 나폴레옹 전쟁들의 시대보다 더욱 병사들로 무장하고 있다. 드문 예를 제외한 모든 시민들은 몇년 간을 병영에서 보내기를 강요당한다. 요새들, 무기고들, 그리고 선박들이 건조되고, 새로운 무기들이 끊임없이 발명되어 얼마지 않아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며, 말하기엔 슬프지만, 언제나 인류의 복리를 추구하고 있어야 할 과학이, 파멸의 작업에 동조하고,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살상하는데 사용할 새로운 수단들을 끊임없이 발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다수의 병사들을 유지하고 그렇게 엄청난 살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년 수억씩 지출되고 있으나, 그곳에 지출되는 돈은 사람들의 교육과 방대한 공익 사업들에 적절히 쓰일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으로해서 사회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찾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Europe, then, is, in this respect, in spite of all the conquests of science, in the same position as in the darkest and most barbarous days of the Middle Ages. All deplore this state of things-neither peace nor war-and all would be glad to escape from it. The heads of governments all declare that they all wish for peace, and vie with one another in the most solemn protestations of peaceful inten­tions. But the same day or the next they will lay a scheme for the increase of the armament before their legislative assembly, saying that these are the preventive measures they take for the very purpose of securing peace.

“유럽은 그렇다면, 이런 점에서, 모든 과학들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의 어둡고 야만적인 시대와 같은 상황에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평화도 아니며 전쟁도 아닌-에 대해 애통해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로부터 기꺼이 탈출하고 싶어한다. 모든 정부들의 수뇌들은 모두가 평화를 기원하고, 평화적 의도를 가장 엄숙히 주장함에 있어서 서로와 경쟁하자고 선언한다. 그러나 어느날 또는 그 다음날 그들은 국회에 군사력 증강에 대한 계획을 내놓으면서, 이것들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 자체로만 취해지는 예방적 대책이라고 말한다.

"But this is not the kind of peace we want. And the nations are not deceived by it. True peace is based on mutual confidence, while these huge armaments show open and utter lack of confidence, if not concealed hostility, between states. What should we say of a man who, want­ing to show his friendly feelings for his neighbor, should invite him to discuss their differences with a loaded revolver in his hand?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평화가 아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이것에 속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는 상호 신뢰에 기초하고 있으며, 반면에 이런 방대한 군사력은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간의 공공연하며 터무니 없는 신뢰의 부족을 나타낸다. 자신의 이웃에 대한 다정한 느낌들을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를 초청하고 자신의 손에 리볼버를 장전하고 그들의 이견에 대하여 토론한다면 우리는 이사람을 어떻게 말해야하는가?

"It is just this flagrant contradiction between the peace­ful professions and the warlike policy of governments which all good citizens desire to put an end to, at any cost."

“그것은 모든 선량한 시민들이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종지부를 찍고 싶어하는, 정부들의 평화적 선언들과 호전적인 정책 사이의 명약관화한 모순이다.”

People are astonished that every year there are sixty thousand cases of suicide in Europe, and those only the recognized and recorded cases-and excluding Russia and Turkey; but one ought rather to be surprised that there are so few. Every man of the present day, if we go deep enough into the contradiction between his conscience and his life, is in a state of despair.

사람들은 매년 유럽에서 60,000건의 자살이 있음에 놀란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직 인정되고 기록된 경우들이다-그리고 러시아와 터어키는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너무나 적은 숫자임에 놀라야 한다. 현 시대의 모든 사람은, 만일 우리가 그의 양심과 그의 삶 사이의 갈등에 깊이 들어가 본다면, 절망의 상태에 빠져있다.

Not to speak of all the other contradictions between modern life and the conscience, the permanently armed condition of Europe together with its profession of Chris­tianity is alone enough to drive any man to despair, to doubt of the sanity of mankind, and to terminate an existence in this senseless and brutal world. This contradiction, which is a quintessence of all the other contradictions, is so ter­rible that to live and to take part in it is only possible if one does not think of it-if one is able to forget it.

현대의 삶과 양심 사이의 다른 모든 모순들은 말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를 선언하면서도 영구적으로 무장된 상태의 유럽 자체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절망으로 몰고가며, 인류의 제정신을 의심하며, 그리고 이 제정신이 아니며 잔인한 세상에서의 존재에 끝을 내도록 몰고가기에 충분하다. 이 모순은, 그것은 모든 다른 모순들의 정수이며, 너무나 무서운 것이라서, 그 안에서 살며 동참한다는 것은 오직 그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거나-그가 그것을 잊어버릴 수만 있어야만 가능하다.

What! all of us, Christians, not only profess to love one another, but do actually live one common life; we whose social existence beats with one common pulse-we aid one another, learn from one another, draw ever closer to one another to our mutual happiness, and find in this closeness the whole meaning of life!-and to-morrow some crazy ruler will say some stupidity, and another will answer in the same spirit, and then I must go expose myself to being murdered, and murder men-who have done me no harm- and more than that, whom I love. And this is not a remote contingency, but the very thing we are all preparing for, which is not only probable, but an inevitable certainty.

아니, 우리들 모두,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사랑할 것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의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사회적 존재가 하나의 공통의 박동으로 뛰고 있는 우리는-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서로에게서 배우며, 상호 행복을 위하여 서로에게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친밀감에서 전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그리고 내일 어떤 미친 통치자가 어떤 어리석을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똑같은 취지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나는 살해 당할 지경에 처해져야 하고, 나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며, 그것은 증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다.

To recognize this clearly is enough to drive a man out of his senses or to make him shoot himself. And this is just what does happen, and especially often among military men. A man need only come to himself for an instant to be impelled inevitably to such an end.

이것을 명백히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어서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군인들 중에서 종종 그러하다. 사람은 오직 순간적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피할 수 없이 그러한 종말로 내몰릴 수 있다.

And this is the only explanation of the dreadful inten­sity with which men of modern times strive to stupefy themselves, with spirits, tobacco, opium, cards, reading newspapers, traveling, and all kinds of spectacles and amusements. These pursuits are followed up as an impor­tant, serious business. And indeed they are a serious business. If there were no external means of dulling their sensibilities, half of mankind would shoot themselves with­out delay, for to live in opposition to one's reason is the most intolerable condition. And that is the condition of all men of the present day. All men of the modern world exist in a state of continual and flagrant antagonism between their conscience and their way of life. This antagonism is apparent in economic as well as political life. But most striking of all is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Christian law of the brotherhood of men existing in the conscience and the necessity under which all men are placed by compulsory military service of being prepared for hatred and murder-of being at the same time a Christian and a gladiator.

그리고 이것은 그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며, 이 긴장감으로 인해서 현 시대의 사람들은, , 담배, 마약 , 도박, 신문 구독, 여행, 그리고 모든 종류의 구경거리들과 오락으로서 자신을 마비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이러한 탐닉들의 결과로 중요하며, 진중한 문제들이 따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것을는 중대한 문제이다. 만일 그들의 감각들을 둔하게할 외적인 수단들이 없었다면, 인류의 절반은 멈추지 않고 자신들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성에 반대되게 산다는 것은 가장 참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다. 현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과 그들의 삶의 방향 사이의 끊임없이 첨예한 반목의 상태에 살고 있다. 이 반목은 경제적 및 정치적인 삶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양심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형제애에 대한 기독교적인 법과, 모든 사람들이 증오나 살인을 준비해야하는 강압적인 병역의무에 처해지는 필요와의 갈등에 있다-기독교인인 동시에 검투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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