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i.com Homepage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뒤로 ]  ] 위로 ] 다음 ]

 
   

 ] 위로 ] 머릿말 ] I. 악에 대한 무저항 ] II. 무저항의 비판 ] III. 믿는 자의 오해 ] IV. 학자들의 오해 ] V. 삶과 양심의 모순 ] VI. 전쟁에 대한 자세 ] VII. 병역 의무의 의미 ] [ VIII. 무저항의 당위성 ] IX. 기독교적 삶 ] X. 기독교인가 국가인가? ] XI. 폭력적 제도의 종말 ] XII. 결론 - 하나님의 나라 ] 꽁스땅스 서문 ] 마틴 그린의 서문 ]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y Leo Tolstoy

   
   
CHAPTER VIII.  8  

DOCTRINE OF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 MUST INEVITABLY BE ACCEPTED BY MEN OF THE PRESENT DAY.

힘에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는 필연적으로 이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되어야 한다.

Christianity is Not a System of Rules, but a New Conception of Life, and therefore it was Not Obligatory and was Not Accepted in its True Sig­nificance by All, but only by a Few-Christianity is. Moreover, Prophetic of the Destruction of the Pagan Life, and therefore of Necessity of the Acceptance of the Christian Doctrines-Non-resist­ance of Evil by Force is One Aspect of the Christian Doctrine, which must Inevitably in Our Times be Accepted by Men-Two Methods of Deciding Every Quarrel-First Method is to Find a Universal Defini­tion of Evil, which All Must Accept, and to Resist this Evil by Force -Second Method is the Christian One of Complete Non-resistance by Force-Though the Failure of the First Method was Recognized since the Early Days of Christianity, it was Still Proposed, and only as Mankind has Progressed it has Become More and More Evident that there Cannot be any Universal Definition of Evil-This is Recog­nized by All at the Present Day, and if Force is Still Used to Resist Evil, it is Not Because it is Now Regarded as Right, but Because People Don't Know How to Avoid It-The Difficulty of Avoiding It is the Result of the Subtle and Complex Character of the Government Use of Force-Force is Used in Four Ways: Intimidation, Bribery, Hypnotism, and Coercion by Force of Arms-State Violence Can Never be Suppressed by the Forcible Overthrow of the Government- Men are Led by the Sufferings of the Pagan Mode of Life to the Neces­sity of Accepting Christ's Teaching with its Doctrine of Non-resist­ance by Force-The Consciousness of its Truth which is Diffused Throughout Our Society, Will also Bring About its Acceptance-This Consciousness is in Complete Contradiction with Our Life-This is Specially Obvious in Compulsory Military Service, but Through Habit and the Application of the Four Methods of Violence by the State, Men do not See this Inconsistency of Christianity with Life of a Soldier-They do Not even See It, though the Authorities Themselves Show all the Immorality of a Soldier's Duties with Perfect Clearness- The Call to Military Service is the Supreme Test for Every Man, when the Choice is Offered Him, between Adopting the Christian Doctrine of Non-resistance, or Slavishly Submitting to the Existing State Organization-Men Usually Renounce All They Hold Sacred, and Submit to the Demands of Government, Seeming to See No Other Course Open to Them-For Men of the Pagan Conception of Life there is No Other Course Open, and Never Will Be, in Spite of the Growing Horrors of War-Society, Made Up of Such Men, Must Perish, and No Social Reorganization Can Save It-Pagan Life Has Reached Its Extreme Limit, and Will Annihilate Itself.

기독교는 통치 체제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무적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진정한 중요함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었다-기독교는, 게다가, 이교적인 삶의 파괴에 대하여 예언하며,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의 수용의 필요성에 대해서 예언한다-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은 기독교 교리의 한가지 현상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시대에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되어야 한다-모든 다툼을 조정하는 두가지 방법들-첫번째 방법은 악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를 내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받아들이며, 힘으로서 이런 악에 저항하는 것이다-두번째 방법은 힘에 의한 완전한 무저항의 기독교적인 것이다-비록 첫번째 방법의 실패는 기독교의 초기 시대부터 인정되었지만, 그것은 아직도 주장되고 있으며, 오직 인류가 그것을 진보시킴과 동시에 보편적인 악의 정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더 분명해졌다-이것은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악에 저항하기 위하여 아직 힘이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이 지금 옳다고 여겨져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피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기가 어려움은 정부의 힘의 사용이 교묘하며 복잡함의 결과이다-힘은 네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협박, 뇌물, 최면, 그리고 군대의 힘을 이용한 강압-국가 폭력은 결코 폭력적인 정부 전복으로 억제될 수 없다-사람들은 이교적인 삶의 양상의 고통들에 의해서 힘에 대한 무저항의 교리를 가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수용할 필요에 이르게 된다-이런 자각은 우리의 삶과 완전한 모순이다-이것은 특히 강제적인 병역 의무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습관과 국가에 의한 네가지 폭력의 방법들의 적용을 통하여, 사람들은 기독교와 병사의 삶의 불일치를 보지 못한다-비록 당국들 자신들이 모든 병사들의 의무들의 부도덕성을 완전함 명료함으로 보여 주지만 그들은 그것을 심지어 깨닫지 못한다-병역 의무로의 부름은 제각기 사람들에게 목숨을 건 시험이다, 그리고 그때 그에게 선택이 주어진다, 기독교의 무저항의 교리를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국가 조직에 노예처럼 복종할 것인가-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열린 다른 길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한다-이교적인 삶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른 길이 열려 있지 않다, 그리고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비록 전쟁에 대한 공포가 커지더라도-그러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반드시 사라지며, 어떤 사회적 재구성도 그것을 구할 수 없다-이교적인 삶은 극한에 도달했다, 그리고 자신을 전멸시킬 것이다.

it is often said that if Christianity is a truth, it ought to have been accepted by everyone directly it appeared, and ought to have transformed men's lives for the better. But this is like saying that if the seed were ripe it ought at once to bring forth stalk, flower, and fruit.

흔히들 말한다. 기독교는 진리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직접 보이는 대로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변형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일 씨앗이 여물면 그것은 당장 줄기, 꽃 그리고 열매를 내어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The Christian religion is not a legal system which, being imposed by violence, may transform men's lives. Chris­tianity is a new and higher conception of life. A new con­ception of life cannot be imposed on men; it can only be freely assimilated. And it can only be freely assimilated in two ways: one spiritual and internal, the other experi­mental and external.

기독교 종교는 폭력에 의해서 부과되는 법적인 제도가 아니면서 사람들의 삶을 변형시킬 수 있다. 기독교는 새롭고 더욱 높은 삶의 개념이다. 새로운 삶의 개념은 사람들 위에 부과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자유롭게 흡수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두가지 방법으로 자유롭게 흡수될 수 있다: 하나는 영적이며 내적이고, 다른 하나는 실험적이며 외적이다.

Some people-a minority-by a kind of prophetic instinct divine the truth of the doctrine, surrender themselves to it and adopt it. Others-the majority-only through a long course of mistakes, experiments, and suffering are brought to recognize the truth of the doctrine and the necessity of adopting it.

어떤 사람들은-소수의 사람들-일종의 예언적인 본능으로 교리의 진리를 궤뚤어보고, 그것에 승복하고 그것을 채택한다. 다른 사람들은-다수의 사람들-오직 오랜 과정의 실수들, 실험들, 그리고 고통을 겪음으로써 교리의 진리와 그것을 채택할 필요를 인식하게 된다.

And by this experimental external method the majority of Christian men have now been brought to this necessity of assimilating the doctrine. One sometimes wonders what necessitated the corruption of Christianity which is now the greatest obstacle to its acceptance in its true significance.

그리고 이런 실험적 외적인 방법을 통하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제 교리를 흡수할 필요에 다가왔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무엇이 현재 기독교의 참 의미를 수용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기독교의 부패를 강요했는지 놀라와 한다.

If Christianity had been presented to men in its true, uncorrupted form, it would not have been accepted by the majority, who would have been as untouched by it as the nations of Asia are now. The peoples who accepted it in its corrupt form were subjected to its slow but certain influence, and by a long course of errors and experiments and their resultant sufferings have now been brought to the necessity of assimilating it in its true significance.

만일 기독교가 진실되며 부패하지 않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다면, 그것은 다수에게 수용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 다수는, 지금 아시아의 민족들처럼, 기독교에 의해서 영향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 들인 사람들은 부패된 형태로서 완만하며 특정한 영향아래 놓였으며, 오랜 과정의 오류들과 실험들 그리고 그로인한 고통들에 의해서 이제 기독교를 그 진정한 의미로서 흡수할 필요성에 놓여졌다.

The corruption of Christianity and its acceptance in its corrupt form by the majority of men was as necessary as it is that the seed should remain hidden for a certain time in the earth in order to germinate.

기독교의 부패와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패된 형태로기독교를 받아들임은 씨앗이 싹을 트기 위해서 어느 기간 동안 흙속에 숨어 있어야 하는 것 만큼 필요한 것이었다..

Christianity is at once a doctrine of truth and a proph­ecy. Eighteen centuries ago Christianity revealed to men the truth in which they ought to live, and at the same time foretold what human life would become if men would not live by it but continued to live by their previous principles, and what it would become if they accepted the Christian doctrine and carried it out in their lives.

기독교는 진리의 교리인 동시에 예언이다. 18 세기 전에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야 하는 진리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서 살지 않으면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언하였으나 그들의 이전의 원리대로 계속해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 교리를 받아 들이며 그들의 삶에서 실천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언하였다.

Laying down in the Sermon on the Mount the principles by which to guide men's lives, Christ said: "Whosoever heareth these sayings of mine, and doeth them, I will liken him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and the rain descended, and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upon that house; and it fell not, for it was founded upon a rock. And everyone that heareth these say­ings, and doeth them not, shall be likened un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and the rain descended, and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eat upon that house; and it fell: and great was the fall of it" (Matt. vii. 24-27).

산상 설교에서 사람들의 삶들을 인도할 원리들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는 말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 24-27)

And now after eighteen centuries the prophecy has been fulfilled. Not having followed Christ's teaching generally and its application to social life in non-resistance to evil, men have been brought in spite of themselves to the inevi­table destruction foretold by Christ for those who do not fulfill his teaching.

그리고 이제 18세기 뒤에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악에 대한 무저항으로서 사회적인 삶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들도 모르게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예언한 피할 수 없는 파멸에 도달했다.

People often think the question of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 is a theoretical one, which can be neglected. Yet this question is presented by life itself to all men, and calls for some answer from every thinking man. Ever since Christianity has been outwardly professed, this question is for men in their social life like the question which presents itself to a traveler when the road on which he has been journeying divides into two branches. He must go on and he cannot say: I will not think about it, but will go on just as I did before. There was one road, now there are two, and he must make his choice.

사람들은 흔히 힘에 의한 악에 대한 무저항의 문제를 이론적인 것이며, 그것이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삶 그 자체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되며,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대답을 요구한다. 기독교가 공개적으로 선언된 이후에, 이 문제는 사람들의 삶 안에서 마치 어떤 나그네에게 떠오른 질문 같다: 나그네가 여행하던 길이 두갈래도 나누어 졌다. 그는 계속 가야 하며,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나 이전에 가던 것처럼 계속 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길이 하나였었지만, 이제 길은 두개이며, 그는 반드시 선택을 하여야 한다.

In the same way since Christ's teaching has been known by men they cannot say: I will live as before and will not decide the question of resistance or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 At every new struggle that arises one must inevitably decide; am I, or am I not, to resist by force what I regard as evil.

똑같은 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므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나는 이전처럼 살아 갈 것이다. 나는 힘에 의한 악에 대한 저항 또는 무저항의 문제를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발생하는 매번의 새로운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결정해야만 한다; 내가 악이라고 여기는 것을 힘으로서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The question of resistance or non-resistance to evil arose when the first conflict between men took place, since every conflict is nothing else than resistance by force to what each of the combatants regards as evil. But before Christ, men did not see that resistance by force to what each regards as evil, simply because one thinks evil what the other thinks good, is only one of the methods of settling the dispute, and that there is another method, that of not resisting evil by force at all.

악에 대한 저항 또는 무저항의 문제는 사람들 사이의 첫번째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일어났다, 왜냐하면 모든 갈등은 다름이 아니라 싸우는 각자가 악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힘에 의해 저항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전에는, 사람들은 각자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힘으로 저항함이, 단순히 한 쪽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쪽은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쟁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들 중의 하나이며,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 , 전혀 힘에 의해서 악을 저항하지 않는 것을 몰랐다.

Before Christ's teaching, it seemed to men that the one only means of settling a dispute was by resistance to evil by force. And they acted accordingly, each of the com­batants trying to convince himself and others that what each respectively regards as evil, is actually, absolutely evil.

그리스도의 가르침 전에는, 분쟁을 조정하는 유일한 수단들은 힘으로써 악에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행동했으며, 싸우는 각자는 서로가 상대적으로 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실적으로, 절대적으로 악임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 하였다.

And to do this from the earliest time men have devised definitions of evil and tried to make them binding on every­one. And such definitions of evil sometimes took the form of laws, supposed to have been received by supernatural means, sometimes of the commands of rulers or assemblies to whom infallibility was attributed. Men resorted to vio­lence against others, and convinced themselves and others that they were directing their violence against evil recog­nized as such by all.

그리고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 초기 시대부터 사람들은 악에 대한 정의들을 고안하였으며 그것이 모두에게 의무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악의 정의들은 때로는 법률들의 형태를 취했고, 초자연적인 수단들에 의해서 받아 진 것들로 가정되었으며, 때로는 무류성이 부여된 통치자들 또는 집회들의 명령들의 형태를 취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항할 때 폭력에 의존하였으며,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악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항하여 그들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켰다.

This means was employed from the earliest times, espe­cially by those who had gained possession of authority, and for a long while its irrationality was not detected.

이 수단들은 초창기부터 사용되었으며, 특히 권력의 소유를 획득한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었고, 오랫동안 그 비합리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But the longer men lived in the world and the more com­plex their relations became, the more evident it was that to resist by force what each regarded as evil was irrational, that conflict was in no way lessened thereby, and that no human definitions can succeed in making what some regard as evil be accepted as such by others.

그러나 사람들이 오래 살면 살수록 그리고 그들이 관계들이 복잡해 지면 질수록, 각자가 악이라고 여기는 것을 힘에 의하여 저항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갈등이 결코 완화되지 않으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정의들도 어떤 사람들이 악으로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다고 받아 들여지게 만드는 것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했다.

Already at the time Christianity arose, it was evident to a great number of people in the Roman Empire where it arose, that what was regarded as evil by Nero and Caligula could not be regarded as evil by others. Even at that time men had begun to understand that human laws, though given out for divine laws, were compiled by men, and can­not be infallible, whatever the external majesty with which they are invested, and that erring men are not rendered infallible by assembling together and calling themselves a senate or any other name. Even at that time this was felt and understood by many. And it was then that Christ preached his doctrine, which consisted not only of the pro­hibition of resistance to evil by force, but gave a new con­ception of life and a means of putting an end to conflict between all men, not by making it the duty of one section only of mankind to submit without conflict to what is pre­scribed to them by certain authorities, but by making it the duty of all-and consequently of those in authority-not to resort to force against anyone in any circumstances.

이미 기독교가 일어날 무렵에, 그것이 일어난 로마 제국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네로 및 칼리굴라에게 악으로 여겨지던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인간의 법들이, 비록 신성한 법들로서 제시되었지만, 사람들에 의하여 수정되었으며, 그들이 투자한 외적인 웅장함이 어떠하더라도 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서로 집회를 가지고 스스로들을 상원이나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하더라도 무결하다고 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당시에도 이것이 느껴졌으며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깨달아 졌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리스도가 그의 교리를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힘에 의한 악에 저항의 금지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새로운 개념과, 모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끝낼 수 있는 수단을 주었으며, 특정한 당국들에 의해서 처방된 것에 한 부류의 인류들만 오직 갈등없이 복종하는 것을 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에 대해서도 힘에 의존하지 말것을 모든 사람들-그리고 결국 권력에 있는 자들-의 의무로 만들었다.

This doctrine was accepted at the time by only a very small number of disciples. The majority of men, especially all who were in power, even after the nominal acceptance of Christianity, continued to maintain for themselves the prin­ciple of resistance by force to what they regarded as evil. So it was under the Roman and Byzantine emperors, and so it continued to be later.

이 교리는 그 당시 오직 아주 적은 숫자의 제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권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기독교를 명목상으로 수용한 뒤에도, 그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에 힘에 의한 저항의 원리를 계속하여 지지하였다. 그것은 로마와 비잔틴 황제들 통치하에서도 그러하였으며, 그것은 이후에도 그렇게 계속되었다.

The insufficiency of the principle of the authoritative defi­nition of evil and resistance to it by force, evident as it was in the early ages of Christianity, becomes still more obvious through the division of the Roman Empire into many states of equal authority, through their hostilities and the internal conflicts that broke out within them.

악에 대한 권위있는 정의 및 그것에 대한 힘에 의한 저항의 원리의 불충분함은, 초기 기독교 시대들에서는 명백하였지만, 로마 제국이 동등한 권력을 가진 많은 국가들로 분할됨을 통해서, 그들의 적대 행위들 및 그들 안에서 발생한 내적인 갈등들을 통해서 훨씬 더 분명해진다.

But men were not ready to accept the solution given by Christ, and the old definitions of evil, which ought to be resisted, continued to be laid down by means of making laws binding on all and enforced by forcible means. The authority who decided what ought to be regarded as evil and resisted by force was at one time the Pope, at another an emperor or king, an elective assembly or a whole nation. But both within and without the state there were always men to be found who did not accept as binding on them­selves the laws given out as the decrees of a god, or made by men invested with a sacred character, or the institutions supposed to represent the will of the nation; and there were men who thought good what the existing authorities regarded as bad, and who struggled against the authorities with the same violence as was employed against them.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주는 해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옛날의 악에 대한 정의는, 반드시 거부되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지며 강압적인 수단들로서 집행되는 법들을 만들어서 계속적으로 제시되었다. 무엇이 악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힘으로 저항하여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권력은 한때는 교황이었으며, 다른 한 때는 황제나 왕, 선출된 의회나 전체 국민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언제나 하나님의 뜻으로 발표되었거나, 또는 신성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 또는 국민들의 뜻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기구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 법들이 그들에게는 의무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당국들이 악하다고 여기는 것을 선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사용된 것과 똑같은 폭력으로 당국들에 맞서서 투쟁한 사람들이 있었다.

The men invested with religious authority regarded as evil what the men and institutions invested with temporal authority regarded as good and vice versa, and the struggle grew more and more intense. And the longer men used violence as the means of settling their disputes, the more obvious it became that it was an unsuitable means, since there could be no external authority able to define evil recognized by all.

종교적 권력을 갖춘 사람들은 세속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기관들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악하게 여기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투쟁은 점점 심해졌다. 사람들이 그들이 분쟁을 조정하는 수단으로서 폭력을 오래 사용하면 할 수록, 그것이 부적합한 방법임이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악을 정의할 수 있는 외적인 권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Things went on like this for eighteen centuries, and at last reached the present position in which it is absolutely obvious that there is, and can be, no external definition of evil binding upon all. Men have come to the point of ceasing to believe in the possibility or even desirability of finding and establishing such a general definition. It has come to men in power ceasing to attempt to prove that what they regard as evil is evil, and simply declaring that they regard as evil what they don't like, while their subjects no longer obey them because they accept the definition of evil laid down by them, but simply obey because they can­not help themselves. It was not because it was a good thing, necessary and beneficial to men, and the contrary course would have been an evil, but simply because it was the will of those in power that Nice was incorporated into France, and Lorraine into Germany, and Bohemia into Austria, and that Poland was divided, and Ireland and India ruled by the English government, and that the Chinese are attacked and the Africans slaughtered, and the Chinese prevented from immigrating by the Americans, and the Jews persecuted by the Russians, and that landowners appropriate lands they do not cultivate and capitalists enjoy the fruits of the labor of others. It has come to the present state of things; one set of men commit acts of violence no longer on the pretext of resistance to evil, but simply for their profit or their caprice, and another set sub­mit to violence, not because they suppose, as was supposed in former times, that this violence was practiced upon them for the sake of securing them from evil, but simply because they cannot avoid it.

18 세기 동안 일들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재의 위치에 도착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악에 대한 외적인 정의는 있지도 있을 수도 없음이 절대적으로 명백하다. 사람들은 그러한 일반적인 정의을 찾거나 확립할 가능성 또는 심지어 바람직함에 대해 믿기를 중지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권력에 속한 사람들도 그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악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중지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악이라고 여긴다고 단순히 선언한다, 반면에 그들의 백성들은 그들이 제시한 악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더이상 아니라, 그들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며, 필요하고, 이익이 되며, 그리고 반대 과정이 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에 있는 사람들의 뜻이었기 때문이었다-니스가 프랑스에, 로레인이 독일에,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에 합병되고, 그리고 폴란드는 분할되었으며, 아일랜드와 인도는 영국 정부에 의해서 통치되고, 중국은 공격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은 도살되었고, 중국인들은 미국에 이주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태인들이 러시아인들에게 학대받았다-지주들은 그들이 경작하지 않는 토지들을 차지하였으며, 자본가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과실들을 향유하였다. 그것은 현재의 상태까지 이르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더 이상 악에 대한 저항을 구실로 폭력행위들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그들의 이익이나 그들이 변덕 때문이며, 그리고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폭력에 굴복하지만, 과거에 상상하던 것처럼, 이 폭력이 그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하여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행해진다고 상상하지 않으며, 단순히 그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If the Roman, or the man of mediaeval times, or the average Russian of fifty years ago, as I remember him, was convinced without a shade of doubt that the violence of authority was indispensable to preserve him from evil; that taxes, dues, serfage, prisons, scourging, knouts, executions, the army and war were what ought to be-we know now that one can seldom find a man who believes that all these means of violence preserve anyone from any evil whatever, and indeed does not clearly perceive that most of these acts of violence to which he is exposed, and in which he has some share, are in themselves a great and useless evil.

만일 로마인, 또는 중세 시대의 사람, 또는, 내가 기억하는바, 오십년 전의 평범한 러시아인이 권력의 폭력이 그들 악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세금들, 수수료들, 노예들, 감옥들, 인간 쓰레기들, 채찍들, 처형들, 군대와 전쟁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 점의 의혹도 없이 확신하였더라도-우리는 이제 이 모든 폭력적 수단들이 도무지 어떤 악으로보터 누구라도 보호해 준다고 믿는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가 노출되어 있으며, 그도 어느정도 함께 하고 있는 이런 폭력 행위들 대부분이, 그 자체로서 커다란 그리고 무익한 악임을 명백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There is no one to-day who does not see the uselessness and injustice of collecting taxes from the toiling masses to enrich idle officials; or the senselessness of inflicting punishments on weak or depraved persons in the shape of transportation from one place to another, or of imprison­ment in a fortress where, living in security and indolence, they only become weaker and more depraved; or the worse than uselessness and injustice, the positive insanity and barbarity of preparations for war and of wars, causing devastation and ruin, and having no kind of justification. Yet these forms of violence continue and are supported by the very people who see their uselessness, injustice, and cruelty, and suffer from them. If fifty years ago the idle rich man and the illiterate laborer were both alike con­vinced that their state of everlasting holiday for one and everlasting toil for the other was ordained by God himself, we know very well that nowadays, thanks to the growth of population and the diffusion of books and education, it would be hard to find in Europe or even in Russia, either among rich or poor, a man to whom in one shape or another a doubt as to the justice of this state of things had never presented itself. The rich know that they are guilty in the very fact of being rich, and try to expiate their guilt by sacrifices to art and science, as of old they expiated their sins by sacrifices to the Church. And even the larger half of the working people openly declare that the existing order is iniquitous and bound to be destroyed or reformed. One set of religious people of whom there are millions in Russia, the so-called sectaries, consider the existing social order as unjust and to be destroyed on the ground of the Gospel teaching taken in its true sense. Others regard it as unjust on the ground of the socialistic, communistic, or anarchistic theories, which are springing up in the lower strata of the working people. Violence no longer rests on the belief in its utility, but only on the fact of its having existed so long, and being organized by the ruling classes who profit by it, so that those who are under their authority cannot extricate themselves from it. The governments of our day-all of them, the most despotic and the liberal alike-have become what Herzen so well called "Ghenghis Khan with the telegraph;" that is to say, organizations of violence based on no principle but the grossest tyranny, and at the same time taking advantage of all the means invented by science for the peaceful collective social activity of free and equal men, used by them to enslave and oppress their fellows.

오늘날 게으른 관리들을 살찌우기 위해서 애써 일하는 대중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의 무익함과 부당함; 또는 나약한자나 부패한 사람들에게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형태로 처벌들을 가하거나, 또는 어떤 요새에 투옥하여 은밀함과 게으름 속에 살면서, 그들은 오직 더욱 나약해지고 더욱 부패하게 하는 어리석음; 또는 무익함과 부당함 보다도 악한 전쟁 준비들과 전쟁들의 적극적인 정신이상 및 야만성으로서, 그것들은 황폐함과 파멸을 일으키며, 아무런 정당성을 갖지 못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폭력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무익함과 부당함 그리고 잔인함을 인식하며 그것들로부터 고통받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서 지지된다. 만일 오십년 전에 게으른 부자와 문맹인 노동자가 똑같이 한 편에겐 그들의 영원한 휴일과 다른 한 편에겐 영원한 고역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라고 확신하였더라도, 우리는 오늘날 인구의 증가와 서적의 확산 및 교육으로, 유럽이나 심지어 러시아에서, 부자나 가난한 자 사이에서, 이런 모습이나 저런 모습에서, 이런 상태의 사물들에 대한 정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결코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부자들은 그들이 부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유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예술이나 과학에 대한 희생으로서 그들의 죄의식을 속죄하려고 한다, 마치 과거에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희생으로서 그들의 죄를 속죄하였던 것처럼. 그리고 심지어 노동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공개적으로 기존 질서가 불법적이며 파괴되어야 하거나 개혁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러시아에서 수백만이 되는, 소위 종파인, 한 무리의 종교인들은 기존 사회 질서가 부당하며, 복음서의 가르침을 진실된 의미로 받아 들임을 근거로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적인, 공산주의적인 또는 무정부적인 이론들을 근거로서 기존 질서가 파괴되어야 한다고 여기며, 그것들은 낮은 계층의 노동하는 사람들에서 분출되어 나온다. 폭력은 더 이상 그 유익함에 대한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오랫동안 존재하였으며, 그것으로 이익을 보는 지배 계급들에 의해서 조직되었다는 사실에 의존하며, 그래서 그들의 권력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수가 없다. 우리 시대의 정부들은-그들 모두는, 독재적이며 동시에 자유주의적이지만-헤르젠이 너무나 잘 지칭한, “전보를 들고있는 징키스칸 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원리가 없이 총체적인 폭정을 기반으로 하는 폭력 단체들, 그리고 이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평화적 집합적 사회적 활동을 위하여 과학에 의해서 발명된 모든 수단들을 활용하는 동시에, 이것들을 그들의 동포들을 노예화시키고 억압하는데 사용된다.

Governments and the ruling classes no longer take their stand on right or even on the semblance of justice, but on a skillful organization carried to such a point of perfection by the aid of science that everyone is caught in the circle of violence and has no chance of escaping from it. This circle is made up now of four methods of working upon men, joined together like the links of a chain ring.

정부들과 지배 계급들은 더 이상 옳은 것이나 심지어 정의와 유사한 것에 대해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의 도움으로 그렇게 완벽한 지경까지 다다른 능숙한 조직을 옹호하여서, 누구나 폭력의 울타리 안에 잡혀 있게되며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 울타리는 이제 사람들 위에 작용하는 네가지 방법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쇄 고리의 연결들 처럼 함께 결합되어 있다.

The first and oldest method is intimidation. This con­sists in representing the existing state organization-what­ever it may be, free republic or the most savage des­potism-as something sacred and immutable, and therefore following any efforts to alter it with the cruelest punish­ments. This method is in use now-as it has been from olden times-wherever there is a government: in Russia against the so-called Nihilists, in America against Anarch­ists, in France against Imperialists, Legitimists, Com­munards, and Anarchists.

첫번째이며 가장 오래된 방법은 위협이다. 이것은 기존의 국가 조직-그것이 무엇이든지, 자유 공화국 또는 가장 야만적인 독재주의든지-을 신성하며 불변하는 어떤 것으로 나타냄에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어떤 노력이든지 가장 잔인한 처벌들이 뒤따른다. 이 방법은 정부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지금-그것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소위 허무주의자들에 대하여, 미국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서, 프랑스에서는 제국주의자들, 정통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Railways, telegraphs, telephones, photographs, and the great perfection of the means of getting rid of men for years, without killing them, by solitary confinement, where, hidden from the world, they perish and are forgotten, and the many other modern inventions employed by govern­ment, give such power that when once authority has come into certain hands, the police, open and secret, the admin­istration and prosecutors, jailers and executioners of all kinds, do their work so zealously that there is no chance of overturning the government, however cruel and senseless it may be.

철도, 전신, 전화, 사진, 그리고 수년 동안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의 위대한 완벽함, 독방에 감금함으로써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서도 그곳은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있어서, 그들은 사라지고 잊혀진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사용되는 다른 많은 현대적 발명품들은 그러한 힘을 주어서, 한 번 권력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 간다면, 공개 및 비밀 경찰, 행정기관 및 소추자들, 간수들과 모든 종류의 처형자들은 그들의 일을 너무나 열심히 수행하여서, 아무리 그것이 잔인하고 어리석을 지라도 정부를 전복할 기회는 없다.

The second method is corruption. It consists in plun­dering the industrious working people of their wealth by means of taxes and distributing it in satisfying the greed of officials, who are bound in return to support and keep up the oppression of the people. These bought officials, from the highest ministers to the poorest copying clerks, make up an unbroken network of men bound together by the same interest-that of living at the expense of the people. They become the richer the more submissively they carry out the will of the government; and at all times and places, sticking at nothing, in all departments support by word and deed the violence of government, on which their own pros­perity also rests.

두번째 방법은 부패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로부터 세금을 수단으로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관리들의 탐욕을 만족시켜 줌에 그것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댓가로 사람들의 억압을 지원하며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들 사들인 관리들은, 가장 높은 장관들로부터 가장 가난한 복사하는 서기까지, 똑같은 이해-사람들의 비용으로 살아가는 이해-에 의해서 함께 묶인 사람들의 끊어지지 않은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그들은 부자가 되면 될수록 더욱더 복종적으로 정부의 의지를 수행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달려 있으면서, 모든 부서에서 말과 행동으로 정부의 폭력을 지원한다, 그리고 그 위에 그들 자신의 번영도 또한 함께 한다.

The third method is what I can only describe as hypnotizing the people. This consists in checking the moral development of men, and by various suggestions keeping them back in the ideal of life, outgrown by mankind at large, on which the power of government rests. This hypnotizing process is organized at the present in the most complex manner, and starting from their earliest childhood, continues to act on men till the day of their death. It begins in their earliest years in the compulsory schools, created for this purpose, in which the children have in­stilled into them the ideas of life of their ancestors, which are in direct antagonism with the conscience of the modern world. In countries where there is a state religion, they teach the children the senseless blasphemies of the Church catechisms, together with the duty of obedience to their superiors. In republican states they teach them the savage superstition of patriotism and the same pretended obedi­ence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세번째 방법은 나는 오직 사람들을 최면시키는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발전을 저해함에 있으며, 여러가지 제안들로서 그들을 전체 인류에 의해서 뒤쳐져 버린 옛날의 이상적인 삶에 붙들어 두려함에 있으며, 정부의 권력은 그 위에 의지한다. 이런 최면화 과정은 지금은 가장 복잡한 방법으로 조직화 되며, 그들이 가장 어린 유년기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죽는 날 까지 계속해서 사람들 위에 행해진다. 그것은 의무 교육에 있어서 첫해부터 시작되어서, 이 목적으로 만들어 지고, 어린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삶의 사상들을 주입받고, 그것은 현대 세계의 양심과 직접 대치되는 것이다. 국가의 종교가 있는 나라에서는, 그들은 어린이 들에게, 그들의 윗사람에 대한 복종과 함께, 교회의 교리문답 같은 어리석은 신성모독적인 것을 가르친다. 공화국들에서는 그들은 어린이들에게 애국심과 같은 야만적인 미신을 가르친다 그리고 지배하는권력들에 대하여 똑같은 의례적인 복종을 가르친다.

The process is kept up during later years by the en­couragement of religious and patriotic superstitions.

그 과정은 종교적 및 애국적인 미신들을 장려함으로써 그 뒤에도 계속 유지된다.

The religious superstition is encouraged by establish­ing, with money taken from the people, temples, proces­sions, memorials, and festivals, which, aided by painting, architecture, music, and incense, intoxicate the people, and above all by the support of the clergy, whose duty consists in brutalizing the people and keeping them in a permanent state of stupefaction by their teaching, the solemnity of their services, their sermons, and their interference in pri­vate life-at births, deaths, and marriages. The patriotic superstition is encouraged by the creation, with money taken from the people, of national fetes, spectacles, monu­ments, and festivals to dispose men to attach importance to their own nation, and to the aggrandizement of the state and its rulers, and to feel antagonism and even hatred for other nations. With these objects under despotic governments there is direct prohibition against printing and disseminat­ing books to enlighten the people, and everyone who might rouse the people from their lethargy is exiled or imprisoned. Moreover, under every government without exception everything is kept back that might emancipate and every­thing encouraged that tends to corrupt the people, such as literary works tending to keep them in the barbarism of religious and patriotic superstition, all kinds of sensual amusements, spectacles, circuses, theaters, and even the physical means of inducing stupefaction, as tobacco and alcohol, which form the principal source of revenue of states. Even prostitution is encouraged, and not only recognized, but even organized by the government in the majority of states. So much for the third method.

종교적 미신은, 사람들로부터 거두어 진 돈으로서, 사원들, 행렬기도식들, 추모회들, 그리고 축제들을 세우며, 그것들은, 그림, 건축, 음악, 그리고, 분향하며, 사람들을 마취시킴으로써 장려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직자를 부양하며, 그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그들의 가르침, 그들의 예배들의 엄숙함, 그들의 설교들, 그리고 그들의 사생활-출생, 임종, 그리고 결혼-에 개입함으로써 그들을 영구적인 마취 상태에 붙들어 둠에 있다. 애국적인 미신은, 사람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돈으로써, 국경일, 구경거리, 기념물, 그리고 축제들을 세움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국가에, 그리고 국가와 그 통치자들의 권력 강화에 중요함을 부여하도록, 그리고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 반목과 증오를 느끼도록 유도하도록 장려된다 이런 목적들을 가지고 독제적인 정부들 아래에서는 사람들을 계몽하는 책들의 인쇄나 배포가 직접적으로 금지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무감각으로부터 깨우는 사람은 누구나 추방되거나 투옥된다. 게다가, 모든 정부들 아래서 예외없이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억제되고,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는 것은 장려된다, 예를 들면, 종교적 및 애국적인 미신같은 야만주의에 그들을 묶어 두는 것은 문학적인 작품들, 모른 종류의 육체적 쾌락들, 구경거리들, 서커스들, 극장들, 그리고 심지어 마비를 초래하는 담배나 술같은 물리적 수단들 같은 것들로서, 국가의 주된 수입원이 되는 것들이다. 심지어 매춘도 장려되며 그것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들의 정부에서 심지어 조직된다. 세번째 방법은 이정도로 하고자 한다.

The fourth method consists in selecting from all the men who have been stupefied and enslaved by the three former methods a certain number, exposing them to special and intensified means of stupefaction and reutilization, and so making them into a passive instrument for carrying out all the cruelties and brutalities needed by the government. This result is attained by taking them at the youthful age when men have not had time to form clear and definite principles of morals, and removing them from all natural and human conditions of life, home, family and kindred, and useful labor. They are shut up together in barracks, dressed in special clothes, and worked upon by cries, drums, music, and shining objects to go through certain daily actions invented for this purpose, and by this means are brought into an hypnotic condition in which they cease to be men and become mere senseless machines, submissive to the hypnotizer. These physically vigorous young men (in these days of universal conscription, all young men), hypnotized, armed with murderous weapons, always obedient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and ready for any act of violence at their command, constitute the fourth and principal method of enslaving men.

네번째 방법은 앞의 세가지 방법들로서 마비되고 노예화된 모든 사람들 중에서 일정한 숫자를 선발하고, 그들을 특별히 강화된 마비와 재활용에 노출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을 정부가 필요한 모든 잔인한 일들과 무자비한 일들을 수행하는 수동적 도구로 만든다. 이런 결과는 사람들이 아직도 명확하고 정해진 도덕적인 원리들을 형성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 한창 젊은 나이에 그들을 데려감으로서 달성하며, 그들을 모든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삶의 조건들, 가정, 가족, 그리고 친족, 그리고 유익한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들은 함께 병영에 갇히고, 특수한 복장들을 입으며, 그리고 이러한 목적들을 위해서 고안된 일정한 날마다의 행동들을 거치지 위한 고함들, 드럼들, 음악, 그리고 반짝이는 물체들을 준비해 나간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이 되기를 포기하는 최면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며, 단순히 감각이 없는 기계들로 변해서, 최면술사에게 복종한다. 이들 신체적으로 왕성한 젊은 사람들(이런 보편적 징병제 시대에는, 모두 젊은 사람들이다), 최면당하고, 살인적인 무기들로 무장하여서, 언제나 통치하는 권력들에 복종한다 그리고 그들이 내리는 어떤 폭력 행위에도 준비가 되어 있어서, 사람들을 노예화시키는 네번째이자 중심이 되는 방법을 구성한다.

By this method the circle of violence is completed.

이 방법으로 폭력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Intimidation, corruption, and hypnotizing bring people into a condition in which they are willing to be soldiers; the soldiers give the power of punishing and plundering them (and purchasing officials with the spoils), and hyp­notizing them and converting them in time into these same soldiers again.

위협, 부패, 그리고 최면은 사람들을 병사들이 되고 싶어하는 상태로 만든다; 병사들은 사람들을 처벌하고 약탈하며(그리고 전리품으로 장교들를 사들이고), 그들을 최면시키고, 그들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들과 똑같은 병사를로 개조시킨다.

The circle is complete, and there is no chance of break­ing through it by force.

고리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힘으로 궤뚤을 기회는 없다.

Some persons maintain that freedom from violence, or at least a great diminution of it, may be gained by the oppressed forcibly overturning the oppressive government and replacing it by a new one under which such violence and oppression will be unnecessary, but they deceive them­selves and others, and their efforts do not better the posi­tion of the oppressed, but only make it worse. Their con­duct only tends to increase the despotism of government. Their efforts only afford a plausible pretext for government to strengthen their power.

어떤 사람들은, 폭력으로부터 자유, 또는 적어도 그것을 잘게 나눈 것이라도, 피압박자들이 힘을 이용해서 억압하는 정부를 전복하고 그러한 폭력과 억압이 필요하지 않는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움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들은 압박받는 자들의 지위를 더 낫게 하지 않으며 그것을 더욱 악화 시킬 뿐이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정부의 독재를 증가시킴에 도움될 뿐이다. 그들의 노력들은 오직 정부들이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그럴듯한 구실만 줄 뿐이다.

Even if we admit that under a combination of circumstances specially unfavorable for the government, as in France in 1870, any government might be forcibly over­turned and the power transferred to other hands, the new authority would rarely be less oppressive than the old one; on the contrary, always having to defend itself against its dispossessed and exasperated enemies, it would be more despotic and cruel, as has always been the rule in all revolutions.

우리가 비록, 정부에 특별히 좋지 못한 상황들이 겹쳐서, 1870년의 프랑스처럼, 어떤 정부가 폭력으로 전복되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갈 수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새로운 권력은 이전의 권력보다도 덜 억압적일 수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실권으로 분노하는 적들에 대해서 언제나 방어해야 하므로, 모든 혁명들에서 통치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더욱 독재적이며 잔인할 것이다.

While socialists and communists regard the individualistic, capitalistic organization of society as an evil, and the anarchists regard as an evil all government whatever, there are royalists, conservatives, and capitalists who consider any socialistic or communistic organization or anarchy as an evil, and all these parties have no means other than violence to bring men to agreement. Whichever of these parties were successful in bringing their schemes to pass, must resort to support its authority to all the existing methods of violence, and even invent new ones.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개인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사회 조직을 악으로 여기고, 무정부주의자들이 모든 정부를 어떠하든지 악으로 여기는 반면에, 어떤 사회주의적인 또는 공산주의적인 조직 또는 무정부 상태를 악으로 여기는 정통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자본주의자들이 있으며, 이 모든 당파들은 사람들을 합의에 이르게 하려면 오직 폭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들 당파들 중에서 어느 것이 그들의 계획이 통과하도록 성공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모든 기존의 폭력적인 방법들에 반드시 의존해야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The oppressed would be another set of people, and coercion would take some new form; but the violence and oppression would be unchanged or even more cruel, since hatred would be intensified by the struggle, and new forms of oppression would have been devised. So it has always been after all revolutions and all attempts at revolution, all conspiracies, and all violent changes of government. Every conflict only strengthens the means of oppression in the hands of those who happen at a given moment to be in power.

피압박자들은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될 것이며, 강압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폭력과 억압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더욱 잔인할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에 의해서 증오가 심화되기 때문이며,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 고안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모든 혁명들과 혁명에 대한 모든 시도들, 모든 음모들, 그리고 모든 폭력적인 정부의 교체들 뒤에는 그러했다. 모든 갈등은 주어진 순간에 권력을 쥔 자들의 손에서 억압의 방법들을 오직 강화할 뿐이다.

The position of our Christian society, and especially the ideals most current in it, prove this in a strikingly convinc­ing way.

기독교 사회의 위치가, 그리고 특히 가장 최근에 지배적인 이념들이, 이것을 가장 현저하게 확인시켜주는 방법으로 증명한다.

There remains now only one sphere of human life not encroached upon by government authority-that is the domestic, economic sphere, the sphere of private life and labor. And even this is now-thanks to the efforts of com­munists and socialists-being gradually encroached upon by government, so that labor and recreation, dwellings, dress, and food will gradually, if the hopes of the reformers are successful, be prescribed and regulated by government.

이제는 정부의 권력에 의해서 잠식되지 않은 오직 한가지 범주의 인간의 삶만이 남아 있다-그것은 가정적, 경제적 범주, 개인적인 삶과 노동의 범주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도 지금은-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노력 덕택에-점진적으로 정부에 의해서 잠식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노동과 여가, 거처들, 의복, 그리고 음식이 점차적으로, 만일 개혁가들의 희망들이 성공적이라면, 정부에 의해서 명령받으며 통제될 것이다.

The slow progress of eighteen centuries has brought the Christian nations again to the necessity of deciding the question they have evaded-the question of the acceptance or non-acceptance of Christ's teaching, and the question following upon it in social life of resistance or non-resist­ance to evil by force. But there is this difference, that whereas formerly men could accept or refuse to accept the solution given by Christ, now that solution cannot be avoided, since it alone can save men from the slavery in which they are caught like a net.

18 세기 동안의 점진적인 진행이 기독교 국가들로 하여금 그들이 회피하였던 문제를 해결해야할 필요에 다시 데려다 놓았다-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수용과 불수용의 문제,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사회적 삶에 있어서 힘에 의한 악에 대한 저항과 무저항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있다, , 이전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준 해답을 수용하거나 수용하기를 거부할 수 있었던 반면에, 이제는 그 해답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사람들이 그물에 잡혀있는 것같은 노예상태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But it is not only the misery of the position which makes this inevitable.

그러나 이것을 피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그 처지의 불행함 뿐이 아니다.

While the pagan organization has been proved more and more false, the truth of the Christian religion has been growing more and more evident.

이교적인 조직들이 점점 더 거짓임이 증명되어 갈 때, 기독교 종교의 진리는 점점 더 분명해 져 가고 있었다.

Not in vain have the best men of Christian humanity, who apprehended the truth by spiritual intuition, for eighteen centuries testified to it in spite of every menace, every privation, and every suffering. By their martyrdom they passed on the truth to the masses, and impressed it on their hearts.

헛되지 않게도, 기독교적인 인류애를 지닌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영적인 직관으로 진리를 깨달았으며, 18 세기동안 모든 협박, 모든 궁핍, 그리고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증거하였다. 그들의 순교에 의해서 그들은 진리를 대중들 위에 전달하였으며, 그것을 그들의 마음에 각인시켰다.

Christianity has penetrated into the consciousness of humanity, not only negatively by the demonstration of the impossibility of continuing in the pagan life, but also through its simplification, its increased clearness and free­dom from the superstitions intermingled with it, and its diffusion through all classes of the population.

기독교는 인류의 자각 속에 스며들었으며, 부정적으로 이교적인 삶을 계속함의 불가능성의 증거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의 단순성, 그것에 더하여진 명료함과 그것과 뒤섞여 있던 미신들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모든 계층들의 인구로의 확산을 통하여 스며들었다.

Eighteen centuries of Christianity have not passed with­out an effect even on those who accepted it only externally. These eighteen centuries have brought men so far that even while they continue to live the pagan life which is no longer consistent with the development of humanity, they not only see clearly all the wretchedness of their position, but in the depths of their souls they believe (they can only live through this belief) that the only salvation from this posi­tion is to be found in fulfilling the Christian doctrine in its true significance. As to the time and manner of salvation, opinions are divided according to the intellectual develop­ment and the prejudices of each society. But every man of the modern world recognizes that our salvation lies in fulfilling the law of Christ. Some believers in the super­natural character of Christianity hold that salvation will come when all men are brought to believe in Christ, whose second coming is at hand. Other believers in supernatural Christianity hold that salvation will come through the Church, which will draw all men into its fold, train them in the Christian virtues, and transform their life. A third section, who do not admit the divinity of Christ, hold that the salvation of mankind will be brought about by slow and gradual progress, through which the pagan principles of our existence will be replaced by the principles of liberty, equality, and fraternity-that is, by Christian principles. A fourth section, who believe in the social revolution, hold that salvation will come when through a violent revolution men are forced into community of property, abolition of government, and collective instead of individual industry- that is to say, the realization of one side of the Christian doctrine. In one way or another all men of our day in their inner consciousness condemn the existing effete pagan order, and admit, often unconsciously and while regarding themselves as hostile to Christianity, that our salvation is only to be found in the application of the Chris­tian doctrine, or parts of it, in its true significance to our daily life.

18 세기 동안의 기독교는 심지어 기독교를 오직 외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없이 지나가지 않았다. 이들 18 세기 동안은 사람들은, 그들이 인류의 발전에 더 이상 합당하지 않은 이교적인 삶을 계속해서 사는 동안에도, 그들은 그들 처지의 모든 비참함을 분명히 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의 깊이에서 이러한 처지에서의 유일한 구원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기독교 교리의 실천에서 찾을 수 있음을 그들은 믿는(그들은 오직 이런 믿음을 통해서 살 수 있다) 지경까지 이르렀다. 구원의 시기와 방법에 관해서는, 각기 사회들의 지적인 발전과 편견들에 따라서 의견들이 나누어 진다. 그러나 현대 세상의 제각기 사람들은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있다는것을 인식하고 있다.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성격을 믿는 어떤 신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될 때 구원이 온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고 주장한다. 초자연적인 기독교를 믿는 다른 신자들은 구원을 교회를 통해서 오며,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그 우리로 이끌며, 그들에게 기독교적인 도덕을 가르쳐서, 그들의 삶을 변모시킨다. 세번째 계층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으며, 인류의 구원은 서서히 점진적인 진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그로인해서 우리들 존재의 이교적인 원리들은 자유, 평등 그리고 형제애의 원리들-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원리들-로 교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번째 계층들은 사회적 혁명을 믿으며, 구원은 폭력적인 혁명을 통하여 사람들이 재산 공통체, 정부의 폐지, 그리고 개인적인 산업대신 집합적인 산업으로 강제될 때 온다고 주장한다-다시 말하자면, 기독교 교리의 한 측면의 실현이다. 이 방법이든 저 방법이든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내면의 자각에서 기존의 낡아 빠진 이교적 질서를 비난하며, 가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신들은 기독교에 적대적이라고 여기면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기독교 교리 또는 그것의 일부분이라도 우리의 일상의 삶에 그 진정한 의미를 적용함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Christianity cannot, as its Founder said, be realized by the majority of men all at once; it must grow like a huge tree from a tiny seed. And so it has grown, and now has reached its full development, not yet in actual life, but in the conscience of men of today.

기독교는, 그 창립자가 말한 것처럼,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깨달아 질 수 없다; 조그만 씨앗에서부터 거대한 나무처럼 자라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은 자라났다, 그리고 이제 그 완전한 성장에 도달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가 아니라, 오늘날의 사람들의 양심속에서이다.

Now not only the minority, who have always compre­hended Christianity by spiritual intuition, but all the vast majority who seem so far from it in their social existence recognize its true significance.

이제 언제나 기독교를 영적인 직관으로 이해한 소수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존재 안에서 기독교로부터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던 방대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진정한 의미를 인식한다.

Look at individual men in their private life. Listen to their standards of conduct in their judgment of one another; hear not only their public utterances, but the counsels given by parents and guardians to the young in their charge; and you will see that, far as their social life based on violence may be from realizing Christian truth, in their private life what is considered good by all without excep­tion is nothing but the Christian virtues; what is con­sidered as bad is nothing but the antichristian vices. Those who consecrate their lives self-sacrificingly to the service of humanity are regarded as the best men. The selfish, who make use of the misfortunes of others for their own advantage, are regarded as the worst of men.

그들의 사적인 삶을 사는 개인적인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서로를 판단함에서 그들의 행위의 표준 들에 귀 기울여 보라; 그들의 대중 연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어린 것들에 대한 부모나 보호자들의 조언들도 들어보라; 그러면 폭력에 의존하고 있는 그들의 사회적 삶이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음에 멀리 있을 지라도, 그들의 사적인 삶에서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오직 기독교적인 미덕들이며;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은 오직 적그리스도의 악들임을 당신은 알 것이다.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을 자기 희생적으로 바치는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하는 이기주의자들은, 가장 나쁜 사람들로 여겨진다.

Though some non-Christian ideals, such as strength, courage, and wealth, are still worshiped by a few who have not been penetrated by the Christian spirit, these ideals are out of date and are abandoned, if not by all, at least by all those regarded as the best people. There are no ideals, other than the Christian ideals, which are accepted by all and regarded as binding on all.

비록 어떤 비 기독교적인 이상들은, 예를 들면, , 용기, 그리고 부 등은, 기독교적인 정신이 아직 스며들지 않은 소수에 의해서 숭배되고 있지만, 이들 이상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모두에 의해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는 내버려진다. 기독교적인 이상들 외에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지며, 모든 사람들에게 의무적이라고 여겨지는 이상들은 없다.

The position of our Christian humanity, if you look at it from the outside with all its cruelty and degradation of men, is terrible indeed. But if one looks at it within, in its inner consciousness, the spectacle it presents is absolutely different.

우리의 기독교적인 인류의 처지는, 사람들의 그 모든 잔인함과 타탁으로서 물들어 있는 바깥으로부터 바라본다면, 정말로 무섭다. 그러나 그것을 안에서, 내적인 자각에서, 바라 본다면, 그것이 제시하는 광경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All the evil of our life seems to exist only because it has been so for so long; those who do the evil have not had time yet to learn how to act otherwise, though they do not want to act as they do.

우리의 삶의 모든 악은 단지 너무 오랫동안 그러했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행하던 대로 행하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아직 반대로 행하는 방법을 배울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All the evil seems to exist through some cause inde­pendent of the conscience of men.

모든 악들은 사람들의 양심과는 별개의 원인들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Strange and contradictory as it seems, all men of the present day hate the very social order they are themselves supporting.

이상하면서도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지원하고 있는 사회적 질서 자체를 증오한다.

I think it is Max Muller who describes the amazement of an Indian convert to Christianity, who after absorbing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doctrine came to Europe and saw the actual life of Christians. He could not recover from his astonishment at the complete contrast between the reality and what he had expected to find among Christian nations. If we feel no astonishment at the contrast between our convictions and our conduct, that is because the influ­ences, tending to obscure the contrast, produce an effect upon us too. We need only look at our life from the point of view of that Indian, who understood Christianity in its true significance, without any compromises or concessions, we need but look at the savage brutalities of which our life is full, to be appalled at the contradictions in the midst of which we live often without observing them.

나는 기독교로 개종한 인도인의 놀라움을 묘사한 사람이 막스 뮐러인 것을 생각한다. 그 인도인은 기독교 교리의 본질을 흡수한 다음 유럽에 갔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실제 삶을 보았다. 그는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의 현실과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의 완전한 차이를 보고 놀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신념들과 우리의 행위들 사이의 차이에 아무런 놀라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역시, 그 차이를 흐리고자 하는 영향들이 우리들 위에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오직, 기독교를 어떤 타협도 양보도 없이 그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은 인도인의 관점으로부터 보기만 하면 되며, 우리는 오직 우리의 삶에 가득차 있는 야만적인 잔학 행위들을 쳐다 봄으로써, 흔히 우리가 관찰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 가운데서 모순들을 보고 놀라게 된다.

We need only recall the preparations for war, the mitrail­leuses, the silver-gilt bullets, the torpedoes, and-the Red Cross; the solitary prison cells, the experiments of execu­tion by electricity-and the care of the hygienic welfare of prisoners; the philanthropy of the rich, and their life, which produces the poor they are benefiting.

우리는 오직 전쟁에 대한 준비들, 기관총들, 은도금한 총알들, 어뢰들 그리고-적십자, 감옥의 독방들, 전기처형 실험들-그리고 죄수들에 대한 위생 복지 관리를 기억할 필요만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박애주의, 그리고 그들의 삶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들은 그들이 혜택을 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And these inconsistencies are not, as it might seem, because men pretend to be Christians while they are really pagans, but because of something lacking in men, or some kind of force hindering them from being what they already feel themselves to be in their consciousness, and what they genuinely wish to be. Men of the present day do not merely pretend to hate oppression, inequality, class dis­tinction, and every kind of cruelty to animals as well as human beings. They genuinely detest all this, but they do not know how to put a stop to it, or perhaps cannot decide to give up what preserves it all, and seems to them necessary.

그리고 이들 모순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교도들이면서 기독교도들인 것처럼 행세 해서가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부족한 어떤 것, 또는 그들의 자각 속에 있다고 이미 스스로 느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순수하게 되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방해하는 어떤 종류의 힘 때문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억압, 불평등, 계급차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잔인함을 단순히 미워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이 모든 것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멈추게 할지를 모르거나, 또는 그 모든 것을 보존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포기함을 결정하지 못한다.

Indeed, ask every man separately whether he thinks it laudable and worthy of a man of this age to hold a position from which he receives a salary disproportionate to his work; to take from the people-often in poverty-taxes to be spent on constructing cannon, torpedoes, and other instruments of butchery, so as to make war on people with whom we wish to be at peace, and who feel the same wish in regard to us; or to receive a salary for devoting one's whole life to constructing these instruments of butchery, or to preparing oneself and others for the work of murder. And ask him whether it is laudable and worthy of a man, and suitable for a Christian, to employ himself, for a salary, in seizing wretched, misguided, often illiterate and drunken, creatures because they appropriate the property of others- on a much smaller scale than we do-or because they kill men in a different fashion from that in which we undertake to do it-and shutting them in prison for it, ill treating them and killing them; and whether it is laudable and worthy of a man and a Christian to preach for a salary to the people not Christianity, but superstitions which one knows to be stupid and pernicious; and whether it is laudable and worthy of a man to rob his neighbor for his gratification of what he wants to satisfy his simplest needs, as the great landowners do; or to force him to exhausting labor beyond his strength to augment one's wealth, as do factory owners and manufacturers; or to profit by the poverty of men to increase one's gains, as merchants do. And everyone taken separately, especially if one's remarks are directed at someone else, not himself, will answer, No! And yet the very man who sees all the baseness of those actions, of his own free will, uncoerced by anyone, often even for no pecuniary profit, but only from childish vanity, for a china cross, a scrap of ribbon, a bit of fringe he is allowed to wear, will enter military service, become a magistrate or justice of the peace, commissioner, archbishop, or beadle, though in fulfilling these offices he must commit acts the baseness and shamefulness of which he cannot fail to recognize.

진실로,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물어보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나이에 그가 하는 일에 어울리지 않는 보수를 받는 직책을 가진다면, 칭찬받을 만하며 바람직한지를; 사람들-흔히 빈곤에 빠진-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대포, 어뢰, 그리고 다른 도살용 도구들을 만드는데 사용되고, 그래서 우리가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며, 그들은 또한 똑같은 바램을 우리에게 느낀다면; 또는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한 댓가로 보수를 받아서 이들 도살 도구들을 만드는데 사용한다면, 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살인 작업에 투입시킨다면, 칭찬받을 만하며 바람직한 지를 물어보라. 그리고 그에게 물어보라. 봉급을 받기 위해서 비참하고, 비뚤어진, 종종 문맹인 그리고 술취한 사람들을,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훔치기 때문에-우리가 행하는 것보다도 훨씬 적은 규모일지라도-또는 그들이 우리가 맡은 임무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때문에-붙들어서, 그 때문에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면, 그들을 벌주고 죽인다면 칭찬받을 만하며 바람직하며,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합당한 일인지를 물어보라;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리고 기독교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서 기독교가 아니라, 자신이 알기로 멍청하고 해로운 미신들을 설교하는 것이 칭찬받을 만하며, 바람직한 일인지를;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마치 대지주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단순한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즐거움을 목적으로 자신의 이웃을 강탈한다면, 칭찬받을 만하며, 바람직한 일인지를; 또는 그에게, 마치 공장 소유주나 제조업자들이 그러하듯, 심신을 지치게하는 노동을 강요한다면; 또는, 상인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소득을 늘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가난함으로 이익을 보고자 한다면. 그리고 모두를 따로 떼어서 질문한다면, 특별히, 비난이 자신에게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에게로 향해진다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아니오! 그러나 그러한 행위들의 모든 악함을 깨닫는 바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로,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당하지 않고서, 심지어 아무런 금전적인 이득도 바라지 않으면서, 그러나 오직 소아적인 허영으로, 그가 착용하도록 허용된 사기로 만든 십자가, 한 조각의 리본, 약간의 장식를 위해서, 병역 의무를 받으며, 법관 또는 치안 판사, 경찰청장, 대주교, 말단관리가 된다, 비록 이러한 관직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는 반드시 자신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악한 일과 부끄러운 일들을 저질러야 함에도 그렇게 한다.

I know that many of these men will confidently try to prove that they have reasons for regarding their position as legitimate and quite indispensable. They will say in their defense that authority is given by God, that the functions of the state are indispensable for the welfare of humanity, that property is not opposed to Christianity, that the rich young man was only commanded to sell all he had and give to the poor if he wished to be perfect, that the existing distribution of property and our commer­cial system must always remain as they are, and are to the advantage of all, and so on. But, however much they try to deceive themselves and others, they all know that what they are doing is opposed to all the beliefs which they pro­fess, and in the depths of their souls, when they are left alone with their conscience, they are ashamed and miser­able at the recollection of it, especially if the baseness of their action has been pointed out to them. A man of the present day, whether he believes in the divinity of Christ or not, cannot fail to see that to assist in the capacity of tzar, minister, governor, or commissioner in taking from a poor family its last cow for taxes to be spent on cannons, or on the pay and pensions of idle officials, who live in luxury and are worse than useless; or in putting into prison some man we have ourselves corrupted, and throw­ing his family on the streets; or in plundering and butchering in war; or in inculcating savage and idolatrous superstitions in the place of the law of Christ; or in impounding the cow found on one's land, though it belongs to a man who has no land; or to cheat the workman in a factory, by imposing fines for accidentally spoiled articles; or making a poor man pay double the value for anything simply because he is in the direst poverty;-not a man of the present day can fail to know that all these actions are base and disgraceful, and that they need not do them. They all know it. They know that what they are doing is wrong, and would not do it for anything in the world if they had the power of resisting the forces which shut their eyes to the criminality of their actions and impel them to commit them.

나는 이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위를 적법하며 아주 필요하다고 여김에 대한 이유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증명하려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말한다.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국가의 기능들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된다, 재산은 부자인 젊은이가 완벽하기를 바란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기독교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재산 분배와 우리의 상업적인 제도는 언제나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등등.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많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시도하여도,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 고백하는 모든 믿음들에 대치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들의 깊은 곳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만으로 혼자 남아 있을 때, 특히 만일 그들 행동들의 악함이 자신들을 겨냥할 때는 그것을 기억하면 부끄러워하고 비참해한다. 이 시대의 사람은 깨닫지 못할 수가 없다, , 그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든 말든, 황제, 장관, 총독, 또는 경찰청장의 권력에 동참하여서, 대포들이나, 게으른 관리들의 봉급이나 연금들에 지출하기 위해서 빈곤한 가정에서 마지막 남은 닭 한마리를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는 것; 또는 우리 자신이 부패시킨 어떤 사람을 감옥에 쳐 넣으며, 그의 가족들을 거리로 쫓아내는 것; 또는 전쟁에서 약탈하고 도살하는 것; 또는 그리스도의 법 대신에 야만적이며 우상숭배하는 미신들을 주입시키는 것; 또는 공장에서 우연히 망가진 물건들에 대해서 벌금을 매겨서 노동자를 속이는 것; 또는 가난한 사람에게 그가 단순히 지독한 빈곤 속에 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두배의 값을 지불하게 만드는 것;-이 시대의 어떤 한 사람도 이 모든 것들이 악하고 수치스러우며 그것들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임을 모를 수가 없다. 그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악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들의 범죄성에 눈을 감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저지르게하는 강요하는 세력들에 저항하는 힘을 가졌다면 결코 조금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In nothing is the pitch of inconsistency modern life has attained to so evident as in universal conscription, which is the last resource and the final expression of violence.

현대의 삶이 도달한 모순의 극치는 보편적 징병제에서 가장 분명해진다, 그것은 폭력의 최후의 보루이며 마지막 표현이다.

Indeed, it is only because this state of universal arma­ment has been brought about gradually and imperceptibly, and because governments have exerted, in maintaining it, every resource of intimidation, corruption, reutilization, and violence, that we do not see its flagrant inconsistency with the Christian ideas and sentiments by which the modern world is permeated.

사실, 이런 보편적 군대의 상태는 점진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게 초래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정부들은, 그것을 유지함에 있어서, 위협, 부패, 재활용, 및 폭력 같은 모든 자원들을 사용했으므로 우리는 현대의 세상에 스며든 기독교의 사상들 및 감정들과의 명약관화한 불일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We are so accustomed to the inconsistency that we do not see all the hideous folly and immorality of men volun­tarily choosing the profession of butchery as though it were an honorable career, of poor wretches submitting to con­scription, or in countries where compulsory service has not been introduced, of people voluntarily abandoning a life of industry to recruit soldiers and train them as murderers. We know that all of these men are either Christians, or pro­fess humane and liberal principles, and they know that they thus become partly responsible-through universal conscrip­tion, personally responsible-for the most insane, aimless, and brutal murders. And yet they all do it.

우리는 너무나 모순에 적응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원해서 도살하는 직업이 존경스러운 것처럼 선택하며, 가난하며 불쌍한 사람들이 징병에 복종하고, 또는 강제 병역 의무가 실시되지 않은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자원해서 산업의 삶을 버리고 병사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살인자들로 훈련시키는, 무서운 어리석음과 비도덕성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거나, 또는 자비로우며 자유의 원리들을 고백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해서, 가장 제정신이 아니며, 목적없는, 그리고 잔인한 살인들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으며-보편적인 징병에 따라서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그것을 행한다.

More than that, in Germany, where compulsory service first originated, Caprivi has given expression to what had been hitherto so assiduously concealed-that is, that the men that the soldiers will have to kill are not foreigners alone, but their own countrymen, the very working people from whom they themselves are taken. And this admission has not opened people's eyes, has not horrified them! They still go like sheep to the slaughter, and submit to every­thing required of them.

그것 뿐만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의무 병역제도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서, 카프리비가 여태까지 끈질기게 숨겨온 것에 대해서 밝혔던 바, 병사들이 죽여야 하는 사람들은 외국인들 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동포도 포함되었으며, 그들이 뽑혀 왔던 바로 그 노동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의 인정조차도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도 양들처럼 도살장에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에 복종한다.

And that is not all: the Emperor of Germany has lately shown still more clearly the duties of the army, by thank­ing and rewarding a soldier for killing a defenseless citizen who made his approach incautiously. By rewarding an action always regarded as base and cowardly even by men on the lowest level of morality, William has shown that a soldier's chief duty-the one most appreciated by the authorities-is that of executioner; and not a professional executioner who kills only condemned criminals, but one ready to butcher any innocent man at the word of com­mand.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독일의 황제는 최근에, 조심스럽지 못하게 다가간 무방비 상태의 시민을 살해한 병사에게 고마움과 감사를 표현함으로써, 훨씬 더 명백하게 군대의 의무들을 밝혔다. 심지어 가장 낮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도 항상 추악하고 비겁하다고 여기는 행위에 상을 내림으로써, 윌리엄은 병사들의 주된 의무는-권력들에 의해서 가장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사형 집행자로서의 의무임을 밝혔다, 그것은 선고받은 범죄자들 만을 죽이는 직업적인 사형집행자가 아니라, 명령 하나면 언제든지 무고한 사람을 도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로서의 의무를 밝힌 것이다.

And even that is not all. In 1892, the same William, the enfant terrible of state authority, who says plainly what other people only think, in addressing some soldiers gave public utterance to the following speech, which was reported next day in thousands of newspapers: "Con­scripts!" he said, "you have sworn fidelity to me before the altar and the minister of God! You are still too young to understand all the importance of what has been said here; let your care before all things be to obey the orders and instructions given you. You have sworn fidelity to me, lads of my guard; that means that you are now my soldiers, that you have given yourselves to me body and soul. For you there is now but one enemy, my enemy. In these days of socialistic sedition it may come to pass that I command you to fire on your own kindred, your brothers, even your own-fathers and mothers-which God forbid!- even then you are bound to obey my orders without hesitation."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 만이 전부가 아니다. 1892년에, 다른 사람들이 오직 생각만 하는 것을 평범하게 말하는, 동일인인 윌리엄은, 국가 권력의 무서운 아이(enfant terrible)로서, 그는 몇명의 병사들에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대중 앞에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달 수천 종류의 신문들에 보도되었다: “징집병들이여! 너희들은 하나님의 제단과 사제들 앞에서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너희들을 여기서 말한 것의 모든 중요성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 무엇보다 먼저 너희들에게 주어진 명령들과 지시들을 복종하도록 힘쓰라. 나의 젊은 파수병들이여, 너희들은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것은 너희들은 이제 나의 병사들이며, 너희들은 나에게 너희들의 몸과 영혼을 바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들에게는, 이제 오직 하나의 적, , 나의 적 만이 존재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이 있는 오늘날에는, 너희의 혈족과, 너희의 형제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에게도-그것은 하나님이 금지하지만!-총을 쏠 것을 내가 명령하는 일이 일어 날 것이며, 그때에도 너희들은 주저함이 없이 나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This man expresses what all sensible rulers think, but studiously conceal. He says openly that the soldiers are in his service, at his disposal, and must be ready for his advantage to murder even their brothers and fathers.

이 사람은 모든 상식적인 통치자들이 생각하지만 용의주도하게 숨기는 것을 표명한다. 그는 공공연히 병사들은 그에게 복종하며, 그의 처분에 따르며, 심지어 그들의 형제들과 아버지들을 살해하면서라도 반드시 그의 이익을 위해서 대기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In the most brutal words he frankly exposes all the horrors and criminality for which men prepare themselves in entering the army, and the depths of ignominy to which they fall in promising obedience. Like a bold hypnotizer, he tests the degree of insensibility of the hypnotized sub­ject. He touches his skin with a red-hot iron; the skin smokes and scorches, but the sleeper does not awake.

가장 잔인한 말로서 그는 솔직하게 사람들이 군대에 입대함으로써 맞아 들여야 하는 모든 공포들과 범죄를 , 그리고 복종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처하게 되는 굴욕의 깊이를 드러내었다. 마치 대담한 최면술사처럼, 그는 최면당한 백성들의 무감각의 정도를 시험한다. 그는 벌겆게 달군 쇠를 그의 피부에 댄다, 피부에 연기가 나며 타들어 간다, 그러나 잠자는 사람은 깨어나지 않는다.

This miserable man, imbecile and drunk with power, outrages in this utterance everything that can be sacred for a man of the modern world. And yet all the Chris­tians, liberals, and cultivated people, far from resenting this outrage, did not even observe it.

이 불쌍한 사람은, 어리석고 권력에 취해서, 그의 발언으로서 현대 세상의 사람들에게 신성시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짓밟는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교양있는 사람들, 이 무도한 행위에 대해 화를 내기는 켜녕, 그것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The last, the most extreme test is put before men in its coarsest form. And they do not seem even to notice that it is a test, that there is any choice about it. They seem to think there is no course open but slavish submission. One would have thought these insane words, which out­rage everything a man of the present day holds sacred, must rouse indignation. But there has been nothing of the kind.

마지막으로서, 가장 극단적인 시험이 가장 거치른 형탱로서 사람들 앞에 놓인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시험이며, 그것에 대해 어떤 선택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아무런 길이 열려 있지 않으며 오직 노예같은 복종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미친 말들은, 이 시대의 사람이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짓밟으므로, 반드시 분노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일은 없었다.

All the young men through the whole of Europe are ex­posed year after year to this test, and with very few excep­tions they renounce all that a man can hold sacred, all express their readiness to kill their brothers, even their fathers, at the bidding of the first crazy creature dressed up in a livery with red and gold trimming, and only wait to be told where and when they are to kill. And they ac­tually are ready.

전체 유럽을 통하여 모든 젊음 사람들은 해마다 이 시험에 노출된다, 그리고 지극히 드문 예를 빼고는, 그들은 사람이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며, 적색과 금색 장식을 단 첫번째 미친 인간의 명령에 따라, 모두가 그들의 형제들과, 심지어 아버지들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명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그들이 살인해야 하는지 명령 받기 위해 오직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준비가 되어 있다.

Every savage has something he holds sacred, something for which he is ready to suffer, something he will not con­sent to do. But what is it that is sacred to the civilized man of to-day? They say to him: "You must become my slave, and this slavery may force you to kill even your own father;" and he, often very well educated, trained in all the sciences at the university, quietly puts his head under the yoke. They dress him up in a clown's costume, and order him to cut capers, turn and twist and bow, and kill-he does it all submissively. And when they let him go, he seems to shake himself and go back to his former life, and he continues to discourse upon the dignity of man, liberty, equality, and fraternity as before.

제각기 야만인은 그가 신성하게 여기는 어떤 것,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것, 그가 행할 것을 동의하지 않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문명화된 시민들에게 있어서 신성시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은 반드시 나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예속은 심지어 당신의 아버지 마저 죽이라고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우 훌륭하게 교육을 받았으며, 대학에서 모든 과학들에 대해서 훈련받았음에도, 조용히 그의 머리를 멍에 밑에 둔다. 그들은 그에게 광대의 복장으로 입힌다, 그리고 그에게 뛰어 다니고, 돌고, 비틀고, 인사하고, 그리고 살해하도록 명령한다-그는 그 모든 것들을 유순하게 행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놓아 주면, 그는 자신을 흔들면서 그의 옛날 삶으로 돌아가서,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 그리고 형제애에 대해 전과 같이 설교한다.

"Yes, but what is one to do?" people often ask in gen­uine perplexity. "If everyone would stand out it would be something, but by myself, I shall only suffer without doing any good to anyone."

“그래요,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가끔 진정 당황하여 묻는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불거져 나온다면, 그것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지만, 나 자신으로서는, 나는 누구에게도 선행을 하지도 못하고 오직 고통받을 것이다.”

And that is true. A man with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cannot resist. The aim of his life is his personal wel­fare. It is better for his personal welfare for him to submit, and he submits.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사회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은 저항할 수 없다. 그의 삶의 목적은 그 개인의 행복이다. 그가 복종하는 것이 그의 개인적 행복을 위해 더 좋다, 그리고 그는 복종한다.

Whatever they do to him, however they torture or hu­miliate him, he will submit, for, alone, he can do nothing; he has no principle for the sake of which he could resist violence alone. And those who control them never allow them to unite together. It is often said that the invention of terrible weapons of destruction will put an end to war. That is an error. As the means of extermination are im­proved, the means of reducing men who hold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to submission can be improved to cor­respond. They may slaughter them by thousands, by millions, they may tear them to pieces, still they will march to war like senseless cattle. Some will want beating to make them move, others will be proud to go if they are allowed to wear a scrap of ribbon or gold lace.

그들이 그에게 무엇을 행하더라도, 그들이 그들 아무리 고문하고 창피를 주어도, 그는 복종할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서 폭력에 저항할 수 있음을 위한 아무런 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함께 연합하도록 두지 않는다.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무기들을 사용하면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것은 거짓이다. 종식시키는 방법들이 개선됨에 따라서, 국가적 개념의 삶에 복종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줄이는 방법들도 상응하여 개선될 수 있다. 그들은 수천 수백만을 죽일 것이며, 그들은 그들을 조각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각없는 가축들처럼 전쟁으로 행군해 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움직이기 위해서 매질을 당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리본 조각이나 황금 줄을 달게되면 자랑스럽게 나아갈 것이다.

And of this mass of men so brutalized as to be ready to promise to kill their own parents, the social reformers- conservatives, liberals, socialists, and anarchists-propose to form a rational and moral society. What sort of moral and rational society can be formed out of such elements? With warped and rotten planks you cannot build a house, however you put them together. And to form a rational moral society of such men is just as impossible a task. They can be formed into nothing but a herd of cattle, driven by the shouts and whips of the herdsmen. As in­deed they are.

그리고 너무나 잔인하여서 그들 자신의 부모들, 사회 개혁자들-보수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을 살해할 약속이 되어 있는 이 사람들의 무리에게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사회를 세울 것을 제안한다. 어떤 종류의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사회가 그러한 요소들로서 형성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짜 맞춘다고 하더라도, 비틀어지고 썩은 판자들로서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서 이성적 도덕적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오직 가축의 무리밖에 될 수 없으며, 그들은 목동들의 고함들과 회초리로 몰려 갈 수 있을 뿐이다. 진정 그들은 그러하다.

So, then, we have on one side men calling themselves Christians, and professing the principles of liberty, equality, and fraternity, and along with that ready, in the name of liberty, to submit to the most slavish degradation; in the name of equality, to accept the crudest, most senseless division of men by externals merely into higher and lower classes, allies and enemies; and, in the name of fraternity, ready to murder their brothers.

그리하여, 우리는 한편에는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 평등, 그리고 인류애의 원리들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준비된 다음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가장 노예같은 타락에 복종하며;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적나라하며, 가장 의미없는 사람들의 무리를 외관상으로 더 높고 낮은 계급들, 동맹군과 적군으로서 받아들이고; 그리고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형제들을 살해할 준비를 한다.

The contradiction between life and conscience and the misery resulting from it have reached the extreme limit and can go no further. The state organization of life based on violence, the aim of which was the security of personal family, and social welfare, has come to the point of renouncing the very objects for which it was founded-it has reduced men to absolute renunciation and loss of the welfare it was to secure.

삶과 양심의 모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초래되는 불행은 극한에 도달했으며 더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폭력에 기초한 삶의 국가적 조직은, 개인의 가정의 안전, 그리고 사회적 행복이 그 목적임에도, 그것이 설립된 목적들 그 자체를 포기하는 지점에 도달했다-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보호하기로 되어 있는 행복의 절대적 포기와 상실로 몰아 세웠다.

The first half of the prophecy has been fulfilled in the generation of men who have not accepted Christ's teaching. Their descendants have been brought now to the absolute necessity of putting the truth of the second half to the test of experience.

예언의 첫번째 절반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세대에서 실현되었다. 그들의 후손들은 이제 두번째 절반의 진리를 경험을 통해 시험해야할 절대적인 필요에 서있다.

   
       
   

 ] 위로 ] 머릿말 ] I. 악에 대한 무저항 ] II. 무저항의 비판 ] III. 믿는 자의 오해 ] IV. 학자들의 오해 ] V. 삶과 양심의 모순 ] VI. 전쟁에 대한 자세 ] VII. 병역 의무의 의미 ] [ VIII. 무저항의 당위성 ] IX. 기독교적 삶 ] X. 기독교인가 국가인가? ] XI. 폭력적 제도의 종말 ] XII. 결론 - 하나님의 나라 ] 꽁스땅스 서문 ] 마틴 그린의 서문 ]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뒤로 ]  ] 위로 ] 다음 ]

 
 

Jesusi.com Homepage



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