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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y Leo Tolstoy

   
   
CHAPTER IX.  9  

THE ACCEPTANCE OF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WILL EMANCIPATE MEN FROM THE MISERIES OF OUR PAGAN LIFE.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의 수용은 사람들을 이교적인 삶의 불행들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The External Life of Christian Peoples Remains Pagan Though they are Penetrated by Christian Consciousness-The Way Out of this Contra­diction is by the Acceptance of the Christian Theory of Life-Only Through Christianity is Every Man Free, and Emancipated of All Human Authority-This Emancipation can be Effected by no Change in External Conditions of Life, but Only by a Change in the Concep­tion of Life-The Christian Ideal of Life Requires Renunciation of all Violence, and in Emancipating the Man who Accepts it, Emanci­pates the Whole World from All External Authorities-The Way Out of the Present Apparently Hopeless Position is for Every Man who is Capable of Assimilating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to Accept it and Live in Accordance with it-But Men Consider this Way too Slow, and Look for Deliverance Through Changes in Material Conditions of Life Aided by Government-That Will Lead to No Improvement, as it is simply Increasing the Evil under which Men are Suffering-A Striking Instance of this is the Submission to Com­pulsory Military Service, which it would be More Advantageous for Every Man to Refuse than to Submit to-The Emancipation of Men Can Only be Brought About by each Individual Emancipating Himself, and the Examples of this Self-emancipation which are already Appear­ing Threaten the Destruction of Governmental Authority-Refusal to Comply with the Unchristian Demands of Government Undermines the Authority of the State and Emancipates Men-And therefore Cases of such Non-compliance are Regarded with more Dread by State Authorities than any Conspiracies or Acts of Violence-Examples of Non-compliance in Russia, in Regard to Oath of Allegiance, Pay­ment of Taxes, Passports, Police Duties, and Military Service- Examples of such Non-compliance in other States-Governments do not Know how to Treat Men who Refuse to Comply with their Demands on Christian Grounds-Such People, without Striking a Blow, Undermine the very Basis of Government from Within-To Punish them is Equivalent to Openly Renouncing Christianity, and Assisting in Diffusing the Very Principle by which these Men Justify their Non-compliance-So Governments are in a Helpless Position- Men who Maintain the Uselessness of Personal Independence, only Retard the Dissolution of the Present State Organization Based on Force.

기독교인들의 외적인 삶은 이교적으로 머물러 있다 비록 그들에게 기독교적인 자각이 스며들었어도-이런 모순으로 벗어나는 길은 삶의 기독교적인 이론의 수용에 있다-오직 기독교를 통해서만 모든 사람은 모든 인간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해방된다-이러한 해방은 삶의 외적인 조건들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오직 삶의 개념의 변화에 있다-기독교적인 삶의 이상은 모든 폭력의 포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해방함에서, 전체 세계를 모든 외적인 권력들로부터 해방한다-현재의 명백히 희망없는 위치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을 흡수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 들이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이 방법이 너무나 느리다고 여긴다, 그리고 정부의 도움을 통한 삶의 물질적 상태의 변화들을 통해서 구원을 찾는다-그것은 아무런 개선을 동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악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이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강제적 병역 의무에 복종함이며, 그것은 복종하기 보다는 거부함이 모든 사람들에게 더욱 이익이 될 것이다-사람들의 해방은 오직 각기 개인들이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미 나타나고 있는 이런 자기 해방의 예들은 정부의 파괴로 위협한다-정부의 비 기독교적인 명령들에 순응하기를 거부함은 국가의 권력을 약하게 하여 사람들을 해방시킨다-그리고 그러므로 그러한 불복종의 경우들은 국가 권력들에게는 다른 어떤 음모나 폭력 행위들 보다 더욱 두렵게 여겨진다-충성 선서, 세금 납부, 신분증들, 경찰 의무들, 그리고 병역 의무 등에 관련한 러시아에서 불복종의 예들-정부들은 기독교를 이유로 그들이 명령들을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를 모른다-그러한 사람들은 주먹을 사용하지도 않고 내부로부터 정부의 기반 자체를 약하게 한다-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 사람들이 그들의 불복종을 정당화하는 원리 자체를 전파하는데 도움을 준다-개인적인 독립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직 폭력을 기반으로하는 현재 국가 조직의 와해를 더디게 할 뿐이다.

The position of the Christian peoples in our days has remained just as cruel as it was in the times of paganism. In many respects, especially in the oppression of the masses, it has become even more cruel than it was in the days of paganism.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위치는 이교주의 시대에 그러하던 것과 똑같이 잔인하다. 많은 점들에서, 특히 대중들을 탄압에서, 그것은 이교주의 시대보다 심지어 더욱 잔인하게 되었다.

But between the condition of men in ancient times and their condition in our days there is just the difference that we see in the world of vegetation between the last days of autumn and the first days of spring. In the autumn the external lifelessness in nature corresponds with its inward condition of death, while in the spring the external lifeless-ness is in sharp contrast with the internal state of reviving and passing into new forms of life.

그러나 과거 시대들의 사람들의 상황과, 우리 시대들의 그들의 상황은 바로, 우리는 식물의 세계에서 가을의 마지막 날들과 봄의 첫날들을 안다는 차이이다. 가을이 되면 자연의 외적인 삶의 정지가 내적인 죽음의 상태와 일치한다, 반면에 봄이 되면 외적인 삶의 정지는 내적인 부활과 새로운 삶의 형태로의 이동함과의 예리한 대조가 있다.

In the same way the similarity between the ancient heathen life and the life of to-day is merely external: the inward condition of men in the times of heathenism was absolutely different from their inward condition at the present time.

똑같은 식으로, 옛날의 이교적인 삶과 오늘날의 삶 사이의 유사성은 단순히 외적인 것이다: 이교의 시대들에서 사람들의 내적인 상태는 현 시대의 그들의 내적인 상태와는 절대적으로 달랐다.

Then the outward condition of cruelty and of slavery was in complete harmony with the inner conscience of men, and every step in advance intensified this harmony; now the outward condition of cruelty and of slavery is completely contradictory to the Christian consciousness of men, and every step in advance only intensifies this contradic­tion.

그당시 잔인함과 노예로서의 외적인 상태는 사람들의 내적인 양심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그리고 전진하는 모든 발걸음은 이러한 일치를 강화시켰다; 이제 잔인함과 노예로서의 외적인 상태는 기독교적인 자각과는 완전히 대치되며, 전진하는 각각의 발걸음은 오직 이러한 대치를 강화시킬 뿐이다.

Humanity is passing through seemingly unnecessary, fruitless agonies. It is passing through something like the throes of birth. Everything is ready for the new life, but still the new life does not come.

인류는 겉으로 보기에 불필요하며, 무익한 고통들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은 출산의 고통 같은 것을 통과하고 있다. 모든 것은 새로운 삶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삶은 오지 않는다.

There seems no way out of the position. And there would be none, except that a man (and thereby all men) is gifted with the power of forming a different, higher theory of life, which at once frees him from all the bonds by which he seems indissolubly fettered.

그러한 위치를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사람은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상이하며 더 높은 삶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이론이, 풀 수 없을 정도로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구속들로부터, 당장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길이 없을 것이다.

And such a theory is the Christian view of life made known to mankind eighteen hundred years ago.

그리고 그런 이론은 1800년 전에 인류에게 알려진 삶의 기독교적인 시각이다.

A man need only make this theory of life his own, for the fetters which seemed so indissolubly forged upon him to drop off of themselves, and for him to feel himself absolutely free, just as a bird would feel itself free in a fenced-in place directly it took to its wings.

사람은 오직 이 삶의 이론을 자기 자신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렇게 단단히 그에게 채워진 족쇄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이며, 한 마리의 새가 그 날개를 흔들자 마자 갇혀 있던 곳에서 자유로움을 느낌과 똑같이,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

People talk about the liberty of the Christian Church, about giving or not giving freedom to Christians. Under­lying all these ideas and expressions there is some strange misconception. Freedom cannot be bestowed on or taken from a Christian or Christians. Freedom is an inalienable possession of the Christian.

사람들은 기독교 교회의 자유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을 줌 또는 주지 않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모든 사상들과 표현들의 저변에는 어떤 이상한 오해가 있다. 자유는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 지거나, 그들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기독교인의 분리할 수 없는 소유물이다.

If we talk of bestowing freedom on Christians or with­holding it from them, we are obviously talking not of real Christians but of people who only call themselves Chris­tians. A Christian cannot fail to be free, because the attainment of the aim he sets before himself cannot be pre­vented or even hindered by anyone or anything.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거나 그들에게서 그것을 회수함을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진정한 기독교인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자유롭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 앞에 설정한 목표의 달성은 어느 누구나, 어느 것에 의해서도 금지되거나 방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Let a man only understand his life as Christianity teaches him to understand it, let him understand, that is, that his life belongs not to him-not to his own individual­ity, nor to his family, nor to the state-but to him who has sent him into the world, and let him once understand that he must therefore fulfill not the law of his own indi­viduality, nor his family, nor of the state, but the infinite law of him from whom he has come; and he will not only feel himself absolutely free from every human power, but will even cease to regard such power as at all able to hamper anyone.

기독교가 그에게 삶을 깨닫도록 가르친 대로 오직 그의 삶을 깨닫게하라, 다시 말하면, 그의 삶은 자신-그 자신의 개인에게가 아니며, 그의 가족에게도 아니며, 국가에게도 아니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그를 세상에 보내신 분께 속한 것을 깨닫게 하라, 그리고 그는 그러므로 그 자신 개인의 법도 아니며, 그의 가족의 법도 아니고, 국가의 법도 아니라, 그를 세상에 보낸 그분의 무한한 법을 실천해야 함을 한번만 깨닫게 하라; 그리하면 그는 그 스스로가 모든 인간들의 권력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러한 권력이 어느 누구를 방해할 수 있다고 조차 여기는 것을 그치게 될 것이다.

Let a man but realize that the aim of his life is the fulfill­ment of God's law, and that law will replace all other laws for him, and he will give it his sole allegiance, so that by that very allegiance every human law will lose all binding and controlling power in his eyes.

사람들이 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법을 실천함에 있다는 것을 오직 깨닫게 하라, 그러면 그 법은 그를 위한 다른 모든 법들을 바꿀 것이며, 그러면 그는 그것에 그의 유일한 충성을 다할 것이며, 그리하여 바로 그 충성으로 모든 인간의 법은 그의 눈에서 모든 구속적이며 통제하는 힘을 잃을 것이다.

The Christian is independent of every human authority by the fact that he regards the divine law of love, implanted in the soul of every man, and brought before his conscious­ness by Christ, as the sole guide of his life and other men's also.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법은, 모든 사람의 영혼에 심어져 있으며,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의 자각으로 나타났음을, 그의 삶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유일한 지침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간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The Christian may be subjected to external violence, he may be deprived of bodily freedom, he may be in bondage to his passions (he who commits sin is the slave of sin), but he cannot be in bondage in the sense of being forced by any danger or by any threat of external harm to perform an act which is against his conscience.

기독교인은 외적인 폭력에 처해질 수도 있으며, 육신의 자유을 박탈당할 수도 있고, 그는 그의 정열의 굴레(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죄의노예이다)에 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수행하도록 외적인 해악을 가져오는 어떤 위험이나 어떤 협박에 의해서 강제되는 의미로서의 굴레에 매일 수는 없다.

He cannot be compelled to do this, because the depriva­tions and sufferings which form such a powerful weapon against men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have not the least power to compel him.

그는 이것을 하도록 강요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매우 막강한 무기가 되는 박탈들이나 고통들은, 그를 강요할 수 있는 힘을 결코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Deprivations and sufferings take from them the happi­ness for which they live; but far from disturbing the happiness of the Christian, which consists in the conscious­ness of fulfilling the will of God, they may even intensify it, when they are inflicted on him for fulfilling his will.

박탈들이나 고통들은 그들로부터 그들이 살아가는 행복을 뺏아 간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행복을 방해하기는 커녕, 기독교인의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자각에 있으므로, 그분의 뜻을 실천함 때문에 그것들이 그에게 가해질 때에, 그것들은 행복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And therefore the Christian, who is subject only to the inner divine law, not only cannot carry out the enactments of the external law, when they are not in agreement with the divine law of love which he acknowledges (as is usually the case with state obligations), he cannot even recognize the duty of obedience to anyone or anything whatever, he cannot recognize the duty of what is called allegiance.

그리고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는 오직 내적인 하나님의 법에 구속되므로, 외적인 법의 조항들이 그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과 일치하지 않을 때 (흔히 국가의 의무들이 그런 경우인 것처럼), 그것들을 실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는 심지어 도무지 어느 누구나 어느 것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인정할 수 없으며, 소위 충성이라고 불리는 의무를 인정할 수 없다.

For a Christian the oath of allegiance to any govern­ment whatever-the very act which is regarded as the foundation of the existence of a state-is a direct renuncia­tion of Christianity. For the man who promises uncon­ditional obedience in the future to laws, made or to be made, by that very promise is in the most positive manner renouncing Christianity, which means obeying in every cir­cumstance of life only the divine law of love he recognizes within him.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어느 정부에 대한 어떠한 충성의 맹세-국가의 존재의 기초로서 여겨지는 행위 자체-기독교를 직접 포기하는 것이다. 만들어 져 있거나 만들어 질 미래의 법률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약속하는 사람에에는, 바로 그 약속으로서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이며, 기독교는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그의 안에서 인정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복종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Under the pagan conception of life it was possible to carry out the will of the temporal authorities, without infringing the law of God expressed in circumcisions, Sabbaths, fixed times of prayer, abstention from certain kinds of food, and so on. The one law was not opposed to the other. But that is just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hristian religion and heathen religion. Christianity does not require of a man certain definite negative acts, but puts him in a new, different relation to men, from which may result the most diverse acts, which cannot be defined beforehand. And therefore the Christian not only cannot promise to obey the will of any other man, without know­ing what will be required by that will; he not only cannot obey the changing laws of man, but he cannot even promise to do anything definite at a certain time, or to abstain from doing anything for a certain time. For he cannot know what at any time will be required of him by that Christian law of love, obedience to which constitutes the meaning of life for him. The Christian, in promising unconditional fulfillment of the laws of men in the future, would show plainly by that promise that the inner law of God does not constitute for him the sole law of his life.

이교적 개념의 삶 아래서는, 할례들, 안식일들, 정해진 기도 시간들, 특정한 종류의 음식들의 금지, 등등에 표현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고서, 세속의 권력들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전자의 법은 후자의 법과 충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기독교 종교와 이교적인 종교와의 차이이다. 기독교는 정해진 부정적인 행위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사람들에 대해 새롭고, 다른 관계에 두며, 그것은 사전에 정의될 수 없다. 그리고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다른 어떤 사람의 뜻도 따르기를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지에 의해서 무엇이 요구될 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변화하는 사람의 법들을 복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는 심지어 특정한 시간에 정해진 어떤 것을 할 것이라고 또는, 특정한 시간에 어떤 것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에 대한 그러한 기독교의 법에 의해서 어떤 시간에 그에게 무엇이 요구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에 대한 복종이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미래에 사람들의 법들을 무조건적으로 실천할 것을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법이 그에게 있어서 그의 삶의 유일한 법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약속으로 인해서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다.

For a Christian to promise obedience to men, or the laws of men, is just as though a workman bound to one em­ployer should also promise to carry out every order that might be given him by outsiders. One cannot serve two masters.

기독교인이 사람에게 또는 사람들의 법들에 복종을 약속하는 것은 바로 마치 한 고용주에게 속한 노동자가 또한 외부인들이 그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가 없다.

The Christian is independent of human authority, be­cause he acknowledges God's authority alone. His law, revealed by Christ, he recognizes in himself, and voluntarily obeys it.

기독교인은 인간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권세만을 오직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법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밝혀졌으며, 그는 자기 안에서 인식하며, 자원해서 그것에 복종한다.

And this independence is gained, not by means of strife, not by the destruction of existing forms of life, but only by a change in the interpretation of life. This independence results first from the Christian recognizing the law of love, revealed to him by his teacher, as perfectly sufficient for all human relations, and therefore he regards every use of force as unnecessary and unlawful; and secondly, from the fact that those deprivations and sufferings, or threats of deprivations and sufferings (which reduce the man of the social conception of life to the necessity of obeying) to the Christian from his different conception of life, present them­selves merely as the inevitable conditions of existence. And these conditions, without striving against them by force, he patiently endures, like sickness, hunger, and every other hardship, but they cannot serve him as a guide for his actions. The only guide for the Christian's actions is to be found in the divine principle living within him, which can­not be checked or governed by anything.

그리고 이 독립은,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삶의 모습들을 파괴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삶의 해석에 있어서의 변화에 의해서 얻어진다. 이 독립은 첫번째로 그의 교사에 의해서 그에게 밝혀진 사랑의 법이 모든 인간 관계들에 완전히 충분하다고 인정하는 기독교인으로부터 나오며,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모든 폭력의 사용을 불필요하며 불법으로 여긴다; 그리고 두번째로 기독교인에 대하여 그 상이한 삶의 개념을 이유로한 그러한 박탈들과 고통들, 또는 박탈들과 고통들 (이것은 사회적 개념의 삶의 사람을 복종이 필요하게 만든다)의 위협은 단순히 삶의 피할 수 없는 상황들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 상황들은, 힘에 의해서 그것과 싸움이 없이, 마치 질병, 배고픔, 그리고 다른 역경들 처럼 그는 인내심으로 참지만, 그들은 그에게 그의 행위들에 대한 지침으로 작용할 수가 없다. 기독교인의 행위들에 대한 유일한 지침은 그의 안에 살고 있는 신적인 원리에서 찾아져야 하며,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저지되거나 지배되어서도 안된다.

The Christian acts according to the words of the prophecy applied to his teacher: "He shall not strive, nor cry; neither shall any man hear his voice in the streets.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rid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till he send forth judgment unto victory." (Matt. xii. 19, 20.)

예언의 말씀들에 의한 기독교인의 행위들은 그의 교사에게 적용되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태복음 12 19,20)

The Christian will not dispute with anyone, nor attack anyone, nor use violence against anyone. On the con­trary, he will bear violence without opposing it. But by this very attitude to violence, he will not only himself be free, but will free the whole world from all external power.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지않으며,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는 폭력을 참을 것이며 그것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바로 이런 태도에 의해서, 그는 자신만 자유로와 지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외적인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Ye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If there were any doubt of Christianity being the truth, the perfect liberty, that nothing can curtail, which a man experiences directly he makes the Christian theory of life his own, would be an unmistakable proof of its truth.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독교가 진리임에 대한 한 점의 의혹도 없다면, 완전한 자유는, 아무것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것은 기독교적인 삶의 이론을 자기 것으로 만들자 마자 경험하는 것으로서, 그 진리의 틀림없는 증명이 될 것이다.

Men in their present condition are like a swarm of bees hanging in a cluster to a branch. The position of the bees on the branch is temporary, and must inevitably be changed. They must start off and find themselves a habitation. Each of the bees knows this, and desires to change her own and the others' position, but no one of them can do it till the rest of them do it. They cannot all start off at once, be­cause one hangs on to another and hinders her from separating from the swarm, and therefore they all continue to hang there. It would seem that the bees could never escape from their position, just as it seems that worldly men, caught in the toils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can never escape. And there would be no escape for the bees, if each of them were not a living, separate creature, en­dowed with wings of its own. Similarly there would be no escape for men, if each were not a living being endowed with the faculty of entering into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사람들의 현재 상태는 마치 가지 끝에 덩어리져서 매달려 있는 벌떼와 같다. 가지에서 벌들의 위치는 일시적이며, 필연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반드시 여행하여 스스로가 살곳을 찾아야 한다. 각각의 벌들은 이것을 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벌들의 처지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그들 나머지가 그것을 할 때가지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들은 한꺼번에 당장 출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매달려 있으며 벌떼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계속해서 거기에 매달려 있는다. 벌들은 결코 그들의 위치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세상의 사람들이, 국가적 개념의 삶의 역경에 사로잡혀서,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똑같다. 그리고 만일 그들 각자가 살아 있으며, 분리된 생물들이 아니며, 그 스스로의 날개들이 없다면, 벌들에겐 아무런 탈출이 없을 것이다. 비슷하게도, 만일 각자의 사람이 기독교적인 삶의 개념으로 들어갈 능력을 부여받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들에게는 어떤 탈출도 없을 것이다.

If every bee who could fly, did not try to fly, the others, too, would never be stirred, and the swarm would never change its position. And if the man who has mastered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would not, without waiting for other people, begin to live in accordance with this con­ception, mankind would never change its position. But only let one bee spread her wings, start off, and fly away, and after her another, and another, and the clinging, inert cluster would become a freely flying swarm of bees. Just in the same way, only let one man look at life as Christianity teaches him to look at it, and after him let another and another do the same, and the enchanted circle of exist­ence in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from which there seemed no escape, will be broken through.

만일 날수 있는 각각의 벌이 날려고 시도하지 않으며, 다른 것들도 역시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벌떼들은 결코 그 위치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독교적인 삶의 개념을 숙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서, 이런 개념에 따라서 살기 시작한다면, 인류는 결코 그 위치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벌 한마리가 그 날개을 펼치고, 출발하여, 날아 가버리면, 그리고 그 벌을 따라서 다른 벌이, 그리고 다른 벌이, 그리고 뭉쳐있으며, 꿈적도 않는 덩어리가 자유롭게 나는 벌 떼가 될 것다. 정말 똑같은 방법으로, 오직 한 사람이 기독교가 그에게 삶을 쳐다 보도록 시키는대로 삶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를 따라서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이 똑같이 행한다면, 국가적 개념의 삶에서 넋을 잃은 존재의 고리가, 그곳에선 어떤 탈출구도 없다고 느겨졌지만, 부서져 버릴 것이다.

But men think that to set all men free by this means is too slow a process, that they must find some other means by which they could set all men free at once. It is just as though the bees who want to start and fly away should consider it too long a process to wait for all the swarm to start one by one; and should think they ought to find some means by which it would not be necessary for every separate bee to spread her wings and fly off, but by which the whole swarm could fly at once where it wanted to. But that is not possible; till a first, a second, a third, a hun­dredth bee spreads her wings and flies off of her own accord, the swarm will not fly off and will not begin its new life. Till every individual man makes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his own, and begins to live in accord with it, there can be no solution of the problem of human life, and no establishment of a new form of life.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느린 과정이므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동시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들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말로 출발해서 날고 싶어 하는 벌들이 모든 벌떼가 한마리씩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오래걸리는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제각기 별개의 벌이 날개를 펴서 날아 갈 필요가 없는 다른 방법들을 찾아야만 하며,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전체 벌떼들이 그것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당장 날아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백번째 벌이 그 날개를 펴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 갈 때 까지는, 벌떼들은 날아 오르지 못할 것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제각기 개인들이 기독교적 개념의 삶을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따라서 살 때까지는,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으며, 새로운 형태의 삶의 확립도 없다.

One of the most striking phenomena of our times is pre­cisely this advocacy of slavery, which is promulgated among the masses, not by governments, in whom it is inevitable, but by men who, in advocating socialistic theories, regard themselves as the champions of freedom.

우리 시대의 가장 두르러진 현상들 중의 하나는 정확히 이런 노예 상태의 옹호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 사이에 퍼져 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정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이론들을 옹호함에서 자신들을 자유의 옹호자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옹호되고 있다.

These people advance the opinion that the amelioration of life, the bringing of the facts of life into harmony with the conscience, will come, not as the result of the personal efforts of individual men, but of itself as the result of a certain possible reconstruction of society effected in some way or other. The idea is promulgated that men ought not to walk on their own legs where they want and ought to go, but that a kind of floor under their feet will be moved somehow, so that on it they can reach where they ought to go without moving their own legs. And, therefore, all their efforts ought to be directed, not to going so far as their strength allows in the direction they ought to go, but to standing still and constructing such a floor.

이 사람들은 삶의 개선은, 삶의 사실들을 양심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은, 개별적인 사람들의 개인적인 노력들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영향을 주는 특별히 가능한 사회의 재구축의 결과로서 온다고 의견을 전개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며 가야만 하는 곳에 스스로의 발을 가지고 걸어 가서는 안되며, 그들의 발 아래에 있는 어떤 종류의 바닥이 어쨋든 움직일 것이며, 그래서 그 위에서 그들은 발을 움직이지 않고도 그들이 가야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노력들은, 그들이 가야 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힘이 허락하는 한 걸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서 있으면서 그런 바닥을 건설해야 함에 집중되어 있다.

In the sphere of political economy a theory is propounded which amounts to saying that the worse things are the better they are; that the greater the accumulation of capital, and therefore the oppression of the workman, the nearer the day of emancipation, and, therefore, every per­sonal effort on the part of a man to free himself from the oppression of capital is useless. In the sphere of govern­ment it is maintained that the greater the power of the government, which, according to this theory, ought to inter­vene in every department of private life in which it has not yet intervened, the better it will be, and that therefore we ought to invoke the interference of government in private life. In politics and international questions it is maintained that the improvement of the means of destruction, the mul­tiplication of armaments, will lead to the necessity of making war by means of congresses, arbitration, and so on. And, marvelous to say, so great is the dullness of men, that they believe in these theories,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whole course of life, every step they take, shows how unworthy they are of belief.

정치적 경제의 분야에서는, 악하면 악할수록 더 좋다; 자본이 축적되면 될수록, ,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해방의 날은 더 가까와 진다, 그러므로,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 각자의 개인적 노력은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론이 발표된다. 정부의 분야에서는, 정부의 권력이 크면 클수록 더 좋으며, 정부는 이 이론에 따르면 아직 개입하지 않았던 모든 개인적인 삶의 분야에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인 삶에 정부의 간섭을 불러와야 한다고 주장된다. 정치와 국제문제들에 있어서는, 파괴 수단의 발전, 군비의 증강은 의회들, 중재, 등등을 수단으로하여 전쟁을 일으킬 필요에 이르게 될 것으로 주장된다. 그리고 말하기에 놀라운 일이지만, 전체 삶의 과정, 그들이 택하는 모든 걸음이 그들이 믿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 보여 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무나 우둔하여서, 이들 이론들을 믿고 있다.

The people are suffering from oppression, and to deliver them from this oppression they are advised to frame general measures for the improvement of their position, which measures are to be entrusted to the authorities, and them­selves to continue to yield obedience to the authorities. And obviously all that results from this is only greater power in the hands of the authorities, and greater oppression result­ing from it.

사람들은 억압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억압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려면,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반적인 대책들을 세워야 함이 권고된다, 그리고 그 대책들은 권력들에게 맏겨지고, 그들은 권력들에 계속해서 복종하고 있다. 그리고 명백히 이것으로부터 초래되는 모든 것들은 오직 권력들이 손에 더욱 큰 힘을 실어 주며, 그로부터 더욱 큰 억압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Not one of the errors of men carries them so far away from the aim toward which they are struggling as this very one. They do all kinds of different things for the attain­ment of their aim, but not the one simple obvious thing which is within reach of everyone. They devise the subtlest means for changing the position which is irksome to them, but not that simplest means, that everyone should refrain from doing what leads to that position.

바로 이것 만큼 그들이 싸우고 있는 목적으로부터 너무다 떼어 놓는 사람들의 오류는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일들을 다해 본다, 그러나 각자의 손에는 단 하나의 단순한 일도 없다. 그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지겨운 처지를 변모시키고자 교묘한 수단들을 강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정말 단순한 수단들은 없다, 그래서 각자는 그런 처지로 빠지는 것을 행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

I have been told a story of a gallant police officer, who came to a village where the peasants were in insurrection and the military had been called out, and he undertook to pacify the insurrection in the spirit of Nicholas I., by his personal influence alone. He ordered some loads of rods to be brought, and collecting all the peasants together into a barn, he went in with them, locking the door after him. To begin with, he so terrified the peasants by his loud threats that, reduced to submission by him, they set to work to flog one another at his command. And so they flogged one another until a simpleton was found who would not allow himself to be flogged, and shouted to his companions not to flog one another. Only then the flogging ceased and the police officer made his escape. Well, this simpleton's advice would never be followed by men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who continue to flog one another, and teach people that this very act of self-castigation is the last word of human wisdom.

나는 어떤 용맹한 경찰 관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농부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군대가 출동된 마을에 갔다, 그리고 그는 니콜라스 1세의 정신, 즉 자신의 개인적인 영향력만으로 폭동을 조용하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막대기 몇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모든 농부들을 헛간에 모두 모으고는, 그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의 문을 잠갔다. 시작하면서, 그는 그의 우렁찬 협박으로 농부들에게 엄청난 겁을 주어서, 그들은 복종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의 명령대로 서로에게 매질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에게 매질을 해대다가, 갑자기 매질을 당하지 않으려는 얼간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게 서로에게 매질을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오직 그때서야 매질이 그쳤다, 그리고 그 경찰 관리는 도망쳤다. 사실, 이 얼간이의 충고는 국가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에게 매질을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기 징계의 행위야말로 인간적 지혜의 최후의 말씀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Indeed, can one imagine a more striking instance of men flogging themselves than the submissiveness with which men of our times will perform the very duties required of them to keep them in slavery, especially the duty of military service? We see people enslaving themselves; suffering from this slavery, and believing that it must be so, that it does not matter, and will not hinder the emancipation of men, which is being prepared somewhere, somehow, in spite of the ever-increasing growth of slavery.

정말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두기를 요구하는 바로 그 명령들을 수행하는 복종심, 특히 병역 의무의 임무보다, 스스로에게 매질하는 더욱 놀라운 예를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것을 본다; 이런 노예 상태에서 고통받고, 그러한 일이 당연하며,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의 해방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해방은, 노예화의 끊임없는 증가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선가, 어찌하였든, 준비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In fact, take any man of the present time whatever (I don’t mean a true Christian, but an average man of the present day), educated or uneducated, believing or unbe­lieving, rich or poor, married or unmarried. Such a man lives working at his work, or enjoying his amusements, spending the fruits of his labors on himself or on those near to him, and, like everyone, hating every kind of restriction and deprivation, dissension and suffering. Such a man is going his way peaceably, when suddenly people come and say to him: First, promise and swear to us that you will slavishly obey us in everything we dictate to you, and will consider absolutely good and authoritative everything we plan, decide, and call law. Secondly, hand over a part of the fruits of your labors for us to dispose of-we will use the money to keep you in slavery, and to hinder you from forcibly opposing our orders. Thirdly, elect others, or be yourself elected, to take a pretended share in the govern­ment, knowing all the while that the government will pro­ceed quite without regard to the foolish speeches you, and those like you, may utter, and knowing that its proceedings will be according to our will, the will of those who have the army in their hands. Fourthly, come at a certain time to the law courts and take your share in those senseless cruel­ties which we perpetrate on sinners, and those whom we have corrupted, in the shape of penal servitude, exile, soli­tary confinement, and death. And fifthly and lastly, more than all this, in spite of the fact that you may be on the friend­liest terms with people of other nations, be ready, directly we order you to do so, to regard those whom we indicate to you as your enemies; and be ready to assist, either in per­son or by proxy, in devastation, plunder, and murder of their men, women, children, and aged alike-possibly your own kinsmen or relations-if that is necessary to us.

사실, 교육받았거나 겨육받지 못했거나, 믿거나 믿지 않거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결혼하였거나 결혼하지 않았거나 간에, 이 시대의 어떤 사람이라도 붙들어 보라 (나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시 시대의 보통사람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위해서 일하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즐기며, 자신의 노동들의 소산을 자신이나 그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용한다, 그리고 누구나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제한과 박탈, 분쟁과 고통을 증오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길을 평화스럽게 가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말한다: 다음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맹세하라, 첫째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노예처럼 복종하라, 그리고 우리가 계획하고, 결정하며, 그리고 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선하며 권한 있는 것으로 여기라. 두째로, 당신의 노동의 소산의 일부를 우리가 처분할 수 있도록 넘겨라-우리는 그 돈을 당신을 노예 상태로 묶어두고, 당신이 우리의 명령들에 반대하는 것을 강압적으로 방해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세째로, 정부에 형식적인 몫을 가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선출하거나 당신이 선출되어라,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정부는 당신 그리고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표현하는 바보같은 말 들에 관계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런 진행들은 우리의 의지, , 군대를 손에 가진 사람들의 의지에 따를 것임을 알라. 네째로, 지정된 시간에 법정으로 나오라 그리고 우리가 죄인들과 우리가 부패시킨 사람들에게, 징역, 추방, 독방감금 그리고 사형의 형태로, 저지르는 몰지각한 잔인함들에 당신 몫을 가지라. 그리고 다섯째이자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더해서, 당신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매우 친절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당신에게 명령하자 마자, 우리가 가리키는 사람들을 당신의 적들로 여길 준비를 하라; 그리고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대리인을 통해서든, 만일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아마도 당신 자신의 동족이거나 친척들이더라도, 그들의 사람들, 여자들,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을 유린하고 약탈하며, 살해함을 도울 준비를 하라.

One would expect that every man of the present day who has a grain of sense left, might reply to such require­ments, "But why should I do all this?" One would think every right-minded man must say in amazement: "Why should I promise to yield obedience to everything that has been decreed first by Salisbury, then by Gladstone; one day by Boulanger, and another by Parliament; one day by Peter III., the next by Catherine, and the day after by Pougachef; one day by a mad king of Bavaria, another by William? Why should I promise to obey them, knowing them to be wicked or foolish people, or else not knowing them at all? Why am I to hand over the fruits of my labors to them in the shape of taxes, knowing that the money will be spent on the support of officials, prisons, churches, armies, on things that are harmful, and on my own enslavement? Why should I punish myself? Why should I go wasting my time and hoodwinking myself, giv­ing to miscreant evildoers a semblance of legality, by taking part in elections, and pretending that I am taking part in the government, when I know very well that the real control of the government is in the hands of those who have got hold of the army? Why should I go to the law courts to take part in the trial and punishment of men because they have sinned, knowing, if I am a Christian, that the law of vengeance is replaced by the law of love, and, if I am an educated man, that punishments do not reform, but only deprave those on whom they are inflicted? And why, most of all, am I to consider as enemies the people of a neighboring nation, with whom I have hitherto lived and with whom I wish to live in love and harmony, and to kill and rob them, or to bring them to misery, simply in order that the keys of the temple at Jerusalem may be in the hands of one archbishop and not another, that one German and not another may be prince in Bulgaria, or that the English rather than the American merchants may cap­ture seals?

우리는 한 알의 지각이라도 가진 현 시대의 모든 사람은, 그러한 요구들에, “내가 왜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가?” 라고 응답할 것임을 예상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놀람에 가득차서 말할 것이다, “내가 왜 처음에 살리스베리에 의해서, 다음음 글래드스톤에 의해서 선포된 모든 것에 복종해야 하는가?; 어느날은 불란저, 그리고 다음은 국회가; 어느날은 피터 3, 다음날은 캐더린, 그리고 다음날은 푸가체프가; 어느날은 바바리아의 미친 왕이, 다음날은 윌리엄에 의해 선포된 것을 복종해야 하는가? 나는 왜 그들이 사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임을 알면서 또는 그들을 전혀 모르면서 복종하기를 약속해야 하는가? 나는 왜 나의 노동의 소산을 세금이라는 형태로 그들에게 넘겨 주어야 하는가, 그 돈은 관리들과, 감옥들, 교회들, 군대들, 해로운 것들에, 그리고 나 자신을 노예화 시키는 것들에 사용될 것임을 알고 있지 않는가? 나는 왜 나 자신을 처벌해야 하는가? 나는 왜 나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며 자신을 속이는가, 사악한 악한 자들에게 거짓 충성을 하며, 선거에 참여하고, 그리고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척하지만, 나는 정부를 실제 통제함은 군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손에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나는 왜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심리하고 처벌에 참여해야 하는 법정에 가야하는가, 만일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복수의 법은 사랑의 법으로 대체되며, 만일 내가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처벌들이 교화하지 못하며, 오직 처벌들이 가해지는 사람들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 이웃국가의 사람들을 적으로 여겨야 하는가, 그 사람들과 함께 나는 여태까지 살아 왔으며, 나는 그 사람들과 사랑과 화합으로 살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왜 그들을 죽이고 강탈하며, 또는 불행에 빠트려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의 열쇠가 다른 주교가 아니라 이 주교의 손에 있어야 하며, 불가리의군주는 이 독일인어야 하며 다른 독일인은 아니어야 하며, 또는 미국 상인들보다는 차라리 영국 상인들이 바다표범을 잡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닌가?

And why, most of all, should I take part in person or hire others to murder my own brothers and kinsmen? Why should I flog myself? It is altogether unnecessary for me; it is hurtful to me, and from every point of view it is immoral, base, and vile. So why should I do this?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형제들과 동족을 죽이기 위해서 내가 직접 또는 다른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가? 나는 왜 내게 매질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내게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내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그것은 비도덕적이며, 천하고, 사악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

If you tell me that if I do it not I shall receive some injury from someone, then, in the first place, I cannot anticipate from anyone an injury so great as the injury you bring on me if I obey you; and secondly, it is perfectly clear to me that if we our own selves do not flog ourselves, no one will flog us.

만일 당신이 내게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나는 누군가로부터 어떤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제일 먼저, 나는 내가 당신에게 복종한다면 당신이 내게 가하는 손해보다 큰 상처를 누구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두번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매질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매질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 내게 완전히 분명하다.

As for the government-that means the tzars, ministers, and officials with pens in their hands, who cannot force us into doing anything, as that officer of police compelled the peasants; the men who will drag us to the law court, to prison, and to execution, are not tzars or officials with pens in their hands, but the very people who are in the same position as we are. And it is just as unprofitable and harmful and unpleasant to them to be flogged as to me, and therefore there is every likelihood that if I open their eyes they not only would not treat me with violence, but would do just as I am doing.

정부에 대해서는-그것은 황제들, 장관들, 그리고 손에 펜대를 들고 있는 관리들을 의미하며, 농부들에게 명렬을 내린 경찰 관리처럼,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행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우리를 법정에, 감옥에, 그리고 처형장으로 끌고가는 사람들은, 손에 펜대를 들고 있는 황제들이나 관리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위치에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들도 나 만큼이나 매질 당하는 것은 똑같이 이익이 되지 않으며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눈을 뜨게 만든다면, 그들은 나를 폭력으로 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행하는 것처럼 행할 것이라는 온갖 가능성이 있다.

Thirdly, even if it should come to pass that I had to suffer for it, even then it would be better for me to be exiled or sent to prison for standing up for common sense and right-which, if not to-day, at least within a very short time, must be triumphant-than to suffer for folly and wrong which must come to an end directly. And there­fore, even in that case, it is better to run the risk of their banishing me, shutting me up in prison, or executing me, than of my living all my life in bondage, through my own fault, to wicked men. Better is this than the possibility of being destroyed by victorious enemies, and being stupidly tortured and killed by them, in fighting for a cannon, or a piece of land of no use to anyone, or for a senseless rag called a banner.

세번째로, 비록 내가 그것으로 고통받아야 하는 일이 발생하더라고, 심지어 그렇더라도, 곧 끝이 날 어리석음과 악함 때문에 고통받는 것보다, 보통의 상식과 정의를 대변함으로서 추방되거나 감옥에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그것은, 만일 오늘이 아니라면, 적어도 얼마 안가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나 자신의 잘못을 통하여, 나의 모든 삶을 악한 사람들에게 매여 사는 것보다, 나를 추방하거나, 감옥게 가두거가, 또는 처형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포나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한 필지의 땅을 위해 또는 깃발이라고 불리는 무의미한 누더기를 위해서 싸울 때는, 승리하는 적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들에 의해서 바보처럼 고문당하고 살해당할 가능성이 이것 보다는 좋을 것이다,

I don't want to flog myself and I won't do it. I have no reason to do it. Do it yourselves, if you want it done; but I won't do it.

나는 나 자신에게 매질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됨을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 하라; 나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One would have thought that not religious or moral feeling alone, but the simplest common sense and foresight should impel every man of the present day to answer and to act in that way. But not so. Men of the state con­ception of life are of the opinion that to act in that way is not necessary, and is even prejudicial to the attainment of their object, the emancipation of men from slavery. They hold that we must continue, like the police officer's peas­ants, to flog one another, consoling ourselves with the reflection that we are talking away in the assemblies and meetings, founding trades unions, marching through the streets on the 1st of May, getting up conspiracies, and stealthily teasing the government that is flogging us, and that through all this it will be brought to pass that, by enslaving ourselves in closer and closer bondage, we shall very soon be free.

우리는, 종교적인 또는 도덕적인 느낌 만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상식 그리고 안목 만으로도 오늘날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답하고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국가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은 심지어 그들이 목적, 사람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함을 달성함에 있어서 편파적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마치 경찰 관리의 농부들 처럼, 서로를 계속해서 매질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는 회의들이나 모임들에서 재잘거리며, 노동 조합을 설립해서 5 1일 거리들로 행진하고, 음모들을 꾸며서, 우리를 매질하는 정부를 은밀히 간지럽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를 더욱 더 가까운 굴레에 예속함으로서, 우리는 조만간 자유로워지는 일이 일어 날 것이라고 위안 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Nothing hinders the emancipation of men from slavery so much as this amazing error. Instead of every man directing his energies to freeing himself, to transforming his conception of life, people seek for an external united method of gaining freedom, and continue to rivet their chains faster and faster.

이러운 놀라운 오류 만큼 많이 사람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 제각기 사람이 그의 에너지를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데 쏟는 대신에, 그의 삶의 개념을 변형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유을 얻기 위해 외적인 연합된 방법을 찾으며, 그들의 사슬을 점점 더 단단히 고정시킨다.

It is much as if men were to maintain that to make up a fire there was no need to kindle any of the coals, but that all that was necessary was to arrange the coals in a certain order. Yet the fact that the freedom of all men will be brought about only through the freedom of individual persons, becomes more and more clear as time goes on. The freedom of individual men, in the name of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from state domination, which was formerly an exceptional and unnoticed phenomenon, has of late acquired threatening significance for state authorities.

그것은 사람들이 불을 피우는 것은 석탄들에 점화할 필요가 없으며 필요한 모든 것은 석탄들을 일정한 순서대로 늘어 놓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함과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자유는 오직 개개의 사람들의 자유를 통해서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감에 따라서 점점 더 명확해 지고 있다. 기독교적인 삶의 개념의 이름으로, 국가의 지배로부터 개인적인 사람들의 자유는, 그것은 이전에 예외적이며 눈에 뛰지 않는 현상이었지만, 근래에 국가 권력들에게는 위협적인 의미가 되었다.

If in a former age, in the Roman times, it happened that a Christian confessed his religion and refused to take part in sacrifices, and to worship the emperors or the gods; or in the Middle Ages a Christian refused to worship images, or to acknowledge the authority of the Pope-these cases were in the first place a matter of chance. A man might be placed under the necessity of confessing his faith, or he might live all his life without being placed under this necessity. But now all men, without exception, are sub­jected to this trial of their faith. Every man of the present day is under the necessity of taking part in the cruelties of pagan life, or of refusing all participation in them. And secondly, in those days cases of refusal to worship the gods or the images or the Pope were not incidents that had any material bearing on the state. Whether men worshiped or did not worship the gods or the images or the Pope, the state remained just as powerful. But now cases of refusing to comply with the unchristian demands of the government are striking at the very root of state authority, because the whole authority of the state is based on the compliance with these unchristian demands.

만일, 이전의 시대에, 로마 시대에, 한 기독교인이 그의 종교를 고백하고 희생들에 참여하는 것과, 황제들이나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면; 또는 중세 시대에 어떤 기독교인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교황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였다면-이런 경우들은 첫번째로 우연한 문제였다. 그 사람은 그의 신앙을 고백할 필요 아래 놓일 것이거나, 그는 그의 모든 삶을 이러한 필요 아래 놓이지 않고 살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들이 신앙에 대한 이런 시험에 처해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은 이교적 삶의 잔인함들에 참여하거나 그것들에 대한 모든 참여를 거부할 필요 아래 놓여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 시대에는 신들이나 우상들이나 교황을 숭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들은 국가에 대한 물질적인 흔적을 내는 사건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들이나 우상들이나, 교황을 숭배하든, 숭배하지 않든, 국가는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정부의 비 기독교적인 요구들에 응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들은 국가 권력의 뿌리 그 자체를 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전체 권력은 이러한 비기독교적인 요구들에 복종함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The sovereign powers of the world have in the course of time been brought into a position in which, for their own preservation, they must require from all men actions which cannot be performed by men who profess true Chris­tianity.

세계의 통치 세력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들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기독교를 고백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이행될 수 없는 행위들을 반드시 요구하는 입장으로 위치로 들어가 있다.

And therefore in our days every profession of true Chris­tianity, by any individual man, strikes at the most essential power of the state, and inevitably leads the way for the emancipation of all.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들의 시대에는, 어떤 개인적인 사람에 의해서라도, 각각의 진정한 기독교의 고백은,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권력을 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길로 인도한다.

What importance, one might think, can one attach to such an incident as some dozens of crazy fellows, as people will call them, refusing to take the oath of allegiance to the government, refusing to pay taxes, to take part in law pro­ceedings or in military service?

어떤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일컫는 것처럼, 수십명의 미친 녀석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거부하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소송 절차나 병역 의무에 참가를 거부하는 것 같은 그런 사건에 무슨 중요성을 우리가 부여할 수 있겠는가?

These people are punished and exiled to a distance, and life goes on in its old way. One might think there was no importance in such incidents; but yet, it is just those inci­dents, more than anything else, that will undermine the power of the state and prepare the way for the freedom of men. These are the individual bees, who are beginning to separate from the swarm, and are flying near it, waiting till the whole swarm can no longer be prevented from starting off after them. And the governments know this, and fear such incidents more than all the socialists, communists, and anarchists, and their plots and dynamite bombs.

이 사람들은 처벌 받아서 멀리 추방된다 그리고 삶은 옛날 처럼 진행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사건들에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무어보다 먼저, 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사람들의 자유를 향한 길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그들 사건들이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벌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 주위를 날고 있다, 그리고 전체 벌떼가 그들을 따라서 출발하는 것을 더 이상 막힘이 없을 때가지 기다리고 있는다. 그리고 정부들은 이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을 모든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 보다도, 그리고 그들의 음모와 다이너마이트 폭탄들 보다도 더 무서워한다.

A new reign is beginning. According to the universal rule and established order it is required that all the subjects should take the oath of allegiance to the new government. There is a general decree to that effect, and all are summoned to the council-houses to take the oath. All at once one man in Perm, another in Tula, a third in Moscow, and a fourth in Kalouga declare that they will not take the oath, and though there is no communication between them, they all explain their refusal on the same grounds-namely, that swearing is forbidden by the law of Christ, and that even if swearing had not been forbidden, they could not, in the spirit of the law of Christ, promise to perform the evil actions required of them in the oath, such as informing against all such as may act against the interests of the government, or defending their government with firearms or attacking its enemies. They are brought before rural police officers, district police captains, priests, and gov­ernors. They are admonished, questioned, threatened, and punished; but they adhere to their resolution, and do not take the oath. And among the millions of those who did take the oath, those dozens go on living who did not take the oath. And they are questioned:

새로운 지배가 시작되고 있다. 보편적인 통치와 세워진 질서에 의하면, 모든 백성들은 새로운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반적인 법령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맹세를 하기 위해서 읍사무소에 소환된다. 일제히 한 사람은 페름에서, 다른 사람은 툴라에서, 세번째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네번째는 카로우가에서 선언한다: 그들은 맹세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 사이에 통신이 없었지만, 그들 모두는 똑같은 이유들로서 그들의 거부를 설명한다-, 맹세는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금지된다, 그리고 맹세가 금지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법의 정신에 따라서, 맹세-정부의 이익들에 대치되어 행동하는 것같은 모든 것을 밀고하거나, 무기들을 가지고 그들의 정부를 방어하거나, 그 적들을 공격하는 것-에 의해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악한 행위들을 이행할 것을 약속할 수가 없다. 그들은 시골 경찰 관리들, 지역 경찰서장, 성직자들, 그리고 총독들 앞에 선다. 그들은 훈계받고, 심문 당하며, 협박받고, 처벌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결심을 고집한다, 그리고 선서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서를 한 수백만의 사람들 가운데, 선서를 하지 않은 그들 십여명은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질문을 받는다:

"What, didn't you take the oath?" "No, I didn't take the oath." "And what happened-nothing?" "Nothing."

“무어라고요, 선서를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선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The subjects of a state are all bound to pay taxes. And everyone pays taxes, till suddenly one man in Kharkov, another in Tver, and a third in Samara refuse to pay taxes-all, as though in collusion, saying the same thing. One says he will only pay when they tell him what object the money taken from him will be spent on. "If it is for good deeds," he says, "he will give it of his own accord, and more even than is required of him. If for evil deeds, then he will give nothing voluntarily, because by the law of Christ, whose follower he is, he cannot take part in evil deeds." The others, too, say the same in other words, and will not voluntarily pay the taxes.

한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세금을 내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세금을 낸다, 그런데 갑자기 카르코프에서 한사람, 트베르에서 다른 사람, 그리고 사마라의 세번째 사람이 세금을 내기를 거부했다-모두다, 마치 결탁한 것처럼,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은 그로부터 받아 가는 돈이 무슨 목적으로 쓰여지는지 말해주면 납부하겠다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좋은 일들을 위해서라면,” 그는 말한다, “그는 그 스스로가 그것을 낼 것이고, 그에게 요구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낼 것이다. 만일 나쁜 일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아무것도 자진해서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므로, 그는 나쁜 행위들에 가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 역시 다른 말호서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진해서 세금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Those who have anything to be taken have their prop­erty taken from them by force; as for those who have nothing, they are left alone.

빼앗길 것이 있는 사람은 폭력으로서 그들의 재산을 빼았겼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두어졌다.

"What, didn't you pay the tax? " "No, I didn't pay it." "And what happened-nothing?" "Nothing."

“무어라고요,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까?” “아니오, 그것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There is the institution of passports. Everyone moving from his place of residence is bound to carry one, and to pay a duty on it. Suddenly people are to be found in various places declaring that to carry a passport is not necessary, that one ought not to recognize one's depend­ence on a state which exists by means of force; and these people do not carry passports, or pay the duty on them. And again, it's impossible to force those people by any means to do what is required. They send them to jail, and let them out again, and these people live without pass­ports.

신분증 기관이 있다. 그의 거주지로부터 이동하는 모든 사람은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세금을 내어야 한다. 갑자기 여러지역에서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필요 없다고,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국가에 자신이 종속됨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신분증을 지니고 다니지 않거나, 그들에게 세금을 물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을 강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를 감옥에 보냇다, 그리고 그들 다시 내 보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신분증이 없이 산다.

All peasants are bound to fill certain police offices-that of village constable, and of watchman, and so on. Sud­denly in Kharkov a peasant refuses to perform this duty, justifying his refusal on the ground that by the law of Christ, of which he is a follower, he cannot put any man in fetters, lock him up, or drag him from place to place. The same declaration is made by a peasant in Tver, another in Tambov. These peasants are abused, beaten, shut up in prison, but they stick to their resolution and don't fill these offices against their convictions. And at last they cease to appoint them as constables. And again nothing happens.

모든 농부들은 특정한 경찰 업무들을 보충하도록 되어 있다-마을 순경 업무, 그리고 방범 업무, 그리고 여러가지가 있다. 갑자기 카르코프의 농부가 그의 의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한다,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므로, 그는 어떤 사람에게도 족쇄를 채울 수 없고, 그를 가두거나 이곳 저곳으로 끌고 다닐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걱부를 정당화한다. 똑같은 선언이 트베르의 농부에게서, 탐보프에서 행해졌다. 이 사람들은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결심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들이 신조들에 반대되는 이들 직책들을 채우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순경으로 임명하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다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All citizens are obliged to take a share in law proceedings in the character of jurymen. Suddenly the most different people-mechanics, professors, tradesmen, peasants, serv­ants, as though by agreement refuse to fill this office, and not on the grounds allowed as sufficient by law, but because any process at law is, according to their views, unchristian. They fine these people, trying not to let them have an opportunity of explaining their motives in public, and replace them by others. And again nothing can be done.

모든 시민들은 배심원의 자격으로 법 절차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갑자기 아주 서로 다른 사람들이-기술자, 교수들, 상업인들, 농부들, 하인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 직책을 채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법에 의해서 충분하다고 인정한 이유들이 아니라, 법에 의한 모든 절차는, 그들의 시각에 의하면, 비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한다, 그들에게 그들이 동기들을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다른 사람들로 바꾼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All young men of twenty-one years of age are obliged to draw lots for service in the army. All at once one young man in Moscow, another in Tver, a third in Kharkov, and a fourth in Kiev present themselves before the authorities, and, as though by previous agreement, declare that they will not take the oath, they will not serve because they are Christians. I will give the details of one of the first cases, since they have become more frequent, which I happen to know about. The same treatment has been repeated in every other case. A young man of fair education refuses in the Moscow Townhall to take the oath. No attention is paid to what he says, and it is requested that he should pronounce the words of the oath like the rest. He declines, quoting a particular passage of the Gospel in which swear­ing is forbidden. No attention is paid to his arguments, and he is again requested to comply with the order, but he does not comply with it. Then it is supposed that he is a sectary and therefore does not understand Christianity in the right sense, that is to say, not in the sense in which the priests in the pay of the government understand it. And the young man is conducted under escort to the priests, that they may bring him to reason. The priests begin to reason with him, but their efforts in Christ's name to per­suade him to renounce Christ obviously have no influence on him; he is pronounced incorrigible and sent back again to the army. He persists in not taking the oath and openly refuses to perform any military duties. It is a case that has not been provided for by the laws. To overlook such a refusal to comply with the demands of the authorities is out of the question, but to put such a case on a par with simple breach of discipline is also out of the question.

스물 한살이 되는 모든 청년들은 군대에 복무할 의무가 있다. 일제히 모스크바의 한 청년이, 트베르의 다른 청년, 카르코프의 세번째 청년, 그리고 키에프의 네번째 청년이 당국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선서를 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복무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나는 첫번째 경우의 사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자주 있으므로, 나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대우가 각기 다른 경우들에도 반복되었다. 상당한 교육을 받은 한 청년이 모스크바의 시청에서 선서를 거부한다.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두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나머지 사람들처럼 선서의 귀절을 복창해야 한다고 요구받았다. 그는 맹세가 금지되어 있는 복음서의 특정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거부한다. 그의 주장에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다시 명령에 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이단이며, 그러므로 기독교를 올바른 의미대로, 다시 말하면, 정부의 봉급을 받는 성직자들이 이해하는 의미대로 기독교를 깨닫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청년은 호위하에 성직자들에게 이끌고 가서 그를 설득해 보려고 한다. 성직자들은 그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가 그리스도를 포기하게 설득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명백히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는 교정 불가능이라고 선고 받고서 다시 군대로 보내진다. 그는 맹세를 하지 않을 것을 고집하며, 공개적으로 어떤 병역 의무들도 이행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법들로서 정해지지 않은 경우였다. 당국들의 명령에 대한 응할 것에 대한 그러한 거부를 눈감아 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를 단순한 규율을 위반한 것과 똑같이 두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After deliberation among themselves, the military au­thorities decide to get rid of the troublesome young man, to consider him as a revolutionist, and they dispatch him under escort to the committee of the secret police. The police authorities and gendarmes cross-question him, but nothing that he says can be brought under the head of any of the misdemeanors which come under their jurisdiction. And there is no possibility of accusing him either of revo­lutionary acts or revolutionary plotting, since he declares that he does not wish to attack anything, but, on the con­trary, is opposed to any use of force, and, far from plotting in secret, he seeks every opportunity of saying and doing all that he says and does in the most open manner. And the gendarmes, though they are bound by no hard-and-fast rules, still find no ground for a criminal charge in the young man, and, like the clergy, they send him back to the army. Again the authorities deliberate together, and decide to ac­cept him though he has not taken the oath, and to enroll him among the soldiers. They put him into the uniform, enroll him, and send him under guard to the place where the army is quartered. There the chief officer of the division which he enters again expects the young man to perform his military duties, and again he refuses to obey, and in the presence of other soldiers explains the reason of his refusal, saying that he as a Christian cannot voluntarily prepare himself to commit murder, which is forbidden by the law of Moses.

그들 서로 간에 협의한 다음에, 군 당국들은 그 말썽많은 청년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혁명주의자로 여기면서, 그들은 그를 호위를 하면서 비밀 경찰 위원회에 보낸다. 경찰 당국들과 경관들은 그를 대질 신문하지만, 그가 말하는 어느 것도 그들의 관할에 속하는 어떤 범죄의 조항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혁명 행위들이나 혁명 음모로서 기소할 가능성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도 공격할 뜻이 없으며, 반대로 그는 폭력의 사용에 반대한다, 그리고 비밀 음모를 꾸미기는 커녕,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할 모든 기회를 찾고 있으며 가장 공개적인 태도로 행한다. 그리고 경관들은, 비록 그들이 정해진 규칙들에 얽매여 있지 않지만, 아직 그 청년에게 범죄 혐으로서 아무런 이유를 찾이 못한다, 그리고 성직자들처럼, 그들은 그를 다시 군대로 보낸다. 다시 당국들은 함께 협의를 한다, 그리고 그가 비록 선서를 하지 않았지만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를 병사들 사이에 등록한다. 그들은 그에게 제복을 입히고 등록하여 그를 호위하여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가 입소한 사단의 책임 장교는 다시금 그 청년이 그의 병역 의무들을 수행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다시 그는 복종을 거부한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의 면전에서 그가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진해서 살인할 준비를 할 수 없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다고 말한다.

This incident occurs in a provincial town. The case awakens the interest, and even the sympathy, not only of outsiders, but even of the officers. And the chief officers consequently do not decide to punish this refusal of obedi­ence with disciplinary measures. To save appearances, though, they shut the young man up in prison, and write to the highest military authorities to inquire what they are to do. To refuse to serve in the army, in which the Tzar himself serves, and which enjoys the blessing of the Church, seems insanity from the official point of view. Consequently they write from Petersburg that, since the young man must be out of his mind, they must not use any severe treatment with him, but must send him to a lunatic asylum, that his mental condition may be inquired into and be scientifically treated. They send him to the asylum in the hope that he will remain there, like another young man, who refused ten years ago at Tver to serve in the army, and who was tortured in the asylum till he submitted. But even this step does not rid the military authorities of the inconvenient man. The doctors examine him, interest themselves warmly in his case, and naturally finding in him no symptoms of mental disease, send him back to the army. There they receive him, and making believe to have forgot­ten his refusal, and his motives for it, they again request him to go to drill, and again in the presence of the other soldiers he refuses and explains the reason of his refusal. The affair continues to attract more and more attention, both among the soldiers and the inhabitants of the town. Again they write to Petersburg, and thence comes the decree to transfer the young man to some division of the army stationed on the frontier, in some place where the army is under martial law, where he can be shot for refusing to obey, and where the matter can proceed without attracting observation, seeing that there are few Russians and Christians in such a distant part, but the majority are foreigners and Mohammedans. This is accordingly done. They transfer him to a division stationed on the Zacaspian border, and in company with convicts send him to a chief officer who is notorious for his harshness and severity.

이 사건은 지방 도시에서 일어난다. 그 사건은 외부인들 뿐만 아니라, 장교들 마저도 관심과, 심지어는 동정마저 일깨운다. 그리고 책임 장교들은 결국 이 복종 거부를 징계 처분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그들은 그 청년을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최고위 군 당국들에 그들이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질의 서신을 보낸다. 황제도 복무하고, 교회의 축복을 누리는 군대에 복무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들은 페테스부르크로부터 편지를 쓴다, 왜냐하면 그 청년은 미친 것이 틀림없으므로, 그들은 그에게 심한 조치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정신병자 수용소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정신 상태를 조사해서 과학적으로 치료되어야 한다고 기록한다. 그들은 그를 정신 병원에 보낸다, 그리고, 그도 거기서, 십년 전에 트베르에서 군 복무를 거부하여 그가 복종할 때가지 고문을 받고 있는 다른 청년처럼, 머물러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절차도 군 당국들은 그 불편한 사람을 제거하지 못한다. 의사들이 그를 검사하며 그들도 이 사건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당연히도 그에게서 아무런 정신 질병의 증상들을 발견하지 못하고는, 그들 다시 군대로 보낸다. 그곳에서는 그들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의 거부, 그것에 대한 그의 동기들을 잊은 체하면서, 그들은 다시 그들 훈련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다시 다른 병사들 앞에서 그는 거부하며 그의 거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 문제는 더욱 더 많은 관심들을 불러 일으키기를 계속한다, 병사들 사이에서나 그 도시의 거주자들 사이에서. 그들은 다시 페테스부르크에 편지를 쓴다, 그리고 나서 그 청년을 전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어떤 사단에 전출하라는 명령이 내려 온다. 그곳에서는 군대가 계엄령하에 있으며, 거기서 그는 복종 거부로서 총살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문제는 관심을 끌지 않고서 진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먼 지역에서는 러시아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외국인들이며 회교인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처리되었다. 그들은 그를 자카스피안 국경에 주둔한 사단에 전출시켰다, 그리고 죄수들과 함께 그들 무자비하고 가혹하기로 악명 높은 책임 장교에게로 보낸다.

All this time, through all these changes from place to place, the young man is roughly treated, kept in cold, hun­ger, and filth, and life is made burdensome to him generally. But all these sufferings do not compel him to change his resolution. On the Zacaspian border, where he is again requested to go on guard fully armed, he again declines to obey. He does not refuse to go and stand near the hay­stacks where they place him, but refuses to take his arms, declaring that he will not use violence in any case against anyone. All this takes place in the presence of the other soldiers. To let such a refusal pass unpunished is impossi­ble, and the young man is put on his trial for breach of discipline. The trial takes place, and he is sentenced to confinement in the military prison for two years. He is again transferred, in company with convicts, by etape, to Caucasus, and there he is shut up in prison and falls under the irresponsible power of the jailer. There he is perse­cuted for a year and a half, but he does not for all that alter his decision not to bear arms, and he explains why he will not do this to everyone with whom he is brought in contact. At the end of the second year they set him free, before the end of his term of imprisonment, reckoning it contrary to law to keep him in prison after his time of mili­tary service was over, and only too glad to get rid of him as soon as possible.

이 모든 시간들, 이곳 저곳으로의 이 모든 이동을 통하여, 청년은 거칠게 다루어지고, 추위, 배고픔, 그리고 오물에 가두어 진다, 그리고 삶은 그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짐스러워진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들이 그로하여금 그이 결심을 바꾸게 하지는 못한다. 자카스피안 국경에서, 그는 다시 완전히 무장을 한 채로 보초에 나서라고 명령받는다, 그러나 그는 다시 복종을 거부한다. 그는 그들이 그를 세워두는 건초더미 근처에 가서 서있기를 거부하지 않느다, 그러나 그이 무기들을 들기를 거보한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어느 누구에게라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한 거부를 처벌받지 않고 놓아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청년은 군율을 어김에 대해서 재판을 받는다 재판은 진행되고 그는 군 감옥에 2년동안 감금을 선고 받는다. 그는 다시 범죄자들과 함께 역마차로 코카서스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그것에서 그는 감옥게 갇히고 간수의 무책임한 권력 앞에 떨어진다. 그곳에서 그는 일년 반 동안을 학대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기를 들지 않는다는 그의 결심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접촉하는 누구에게도 이것을 행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년이 끝날 무렵 그들은 그를 풀어 준다, 그의 형기가 끝나기도 전에, 왜냐하면 그의 군 복무 기간이 끝난 뒤에 그를 잡아 두는 것은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그를 가능한 빨리 제거하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기 때문이다.

Other men in various parts of Russia behave, as though by agreement, precisely in the same way as this young man, and in all these cases the government has adopted the same timorous, undecided, and secretive course of action. Some of these men are sent to the lunatic asylum, some are enrolled as clerks and transferred to Siberia, some are sent to work in the forests, some are sent to prison, some are fined. And at this very time some men of this kind are in prison, not charged with their real offense-that is, denying the lawfulness of the action of the government, but for non-fulfillment of special obligations imposed by government. Thus an officer of reserve, who did not re­port his change of residence, and justified this on the ground that he would not serve in the army any longer, was fined thirty rubles for non-compliance with the orders of the superior authority. This fine he also declined volun­tarily to pay. In the same way some peasants and soldiers who have refused to be drilled and to bear arms have been placed under arrest on a charge of breach of discipline and insolence.

러시아의 여러지역들의 다른 사람들도,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 청년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들에서 정부는 똑같이 소심하며, 우유부단하며, 비밀스런 행위 과정을 채택한다. 이 사람들 중의 몇명은 정신 병원에 보내지고, 어떤 사람들은 서기로 등록되어 시베리아로 전출되며, 어떤 사람들은 숲속에 노역하러 보내지고,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보내지며, 어떤 사람들은 벌금을 문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순간에 이 같은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있으며, 그들은 실제 범죄- 정부의 행위의 정당성을 부인-때문에 기소된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 부과된 특별한 의무들을 불이행한 때문이다. 이렇게, 예비부대의 장교는, 그의 거주지 변경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그가 이제 더이상 군대에 복무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정당화 했으므로, 상부 당국의 명령들에 대한 불복종으로 30 루블의 벌금에 처해졌다. 그는 이 벌금 또한 자진해서 납부하기를 거부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몇명의 농부들과 병사들이 훈련과 무기 휴대를 거부했으며 군율과 복종의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And cases of refusing to comply with the demands of government when they are opposed to Christianity, and especially cases of refusing to serve in the army, are occur­ring of late not in Russia only, but everywhere. Thus I happen to know that in Servia men of the so-called sect of Nazarenes steadily refuse to serve in the army, and the Austrian Government has been carrying on a fruitless con­test with them for years, punishing them with imprison­ment. In the year 1885 there were 130 such cases. I know that in Switzerland in the year 1890 there were men in prison in the castle of Chillon for declining to serve in the army, whose resolution was not shaken by their punishment. There have been such cases in Sweden, and the men who refused obedience were sent to prison in exactly the same way, and the government studiously concealed these cases from the people. There have been similar cases also in Prussia. I know of the case of a sub-lieutenant of the Guards, who in 1891 declared to the authorities in Berlin that he would not, as a Christian, continue to serve, and in spite of all admonitions, threats, and punishments he stuck to his resolution. In the south of France a society has arisen of late bearing the name of the Hinschists (these facts are taken from the Peace Herald, July, 1891), the members of which refuse to enter military service on the grounds of their Christian principles. At first they were enrolled in the ambulance corps, but now, as their numbers increase, they are subjected to punishment for non-compli­ance, but they still refuse to bear arms just the same.

그리고 기독교에 대치될 때에 정부의 명령들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경우들, 그리고 특히 군대에 복무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들은, 최근에 러시아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그래서 세르비아에서 소위 나자렌느 파의 사람들이 끈질기게 군대에 복무할 것을 거부하며, 오스트리아 정부는 수년동안 그들과의 소득없는 싸움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투옥하는 처벌을 내렸다. 그러한 경우들은 스웨덴에도 있었다, 그리고 복종을 거부한 사람은 똑같은 방법으로 감옥에 보내졌으며, 정부는 이 사건들을 사람들에게서 애를 써서 숨겼다. 프러시아에서도 유사한 경우들이 있었다. 나는 경비대의 중위의 사건을 알고 있으며, 그는 1891년 베를린의 당국들에게,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복무를 계속할 수 없으며, 모든 권고들, 협박들, 그리고 처벌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념을 고수했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최근에 힌시스트 (이 사실은 1891 7피스 헤럴드에서 가져온 것이다)라는 이름을 가진 모임이 생겨났으며, 그 회원들은 그들의 기독교적인 원리들을 이유로 병역 의무를 거부하고 있다. 처음엔 그들은 야전 의무대에 등록되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서, 그들은 불복종에 대한 처벌에 처해지고 있으나 그들은 여전히 똑같이 무기를 들기를 거부한다.

The socialists, the communists, the anarchists, with their bombs and riots and revolutions, are not nearly so much dreaded by governments as these disconnected indi­viduals coming from different parts, and all justifying their non-compliance on the grounds of the same religion, which is known to all the world.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들의 폭탄과 소요들과 혁명들을 일으켜도, 다른 지방으로부터 오는 이들 상관 없는 개인들 만큼 정부가 두려워 하는 것은 거의없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은 종교를 이유로 그들의 불복종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그들의 종교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Every government knows by what means and in what manner to defend itself from revolutionists, and has re­sources for doing so, and therefore does not dread these external foes. But what are governments to do against men who show the uselessness, superfluousness, and perniciousness of all governments, and who do not contend against them, but simply do not need them and do without them, and therefore are unwilling to take any part in them?

모든 정부는 혁명주의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이나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렇게 하가 위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러한 외적인 적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정부들을 무익하고, 불필요하며, 해롭다고 주장하고,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직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이 없이 지내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참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The revolutionists say: The form of government is bad in this respect and that respect; we must overturn it and substitute this or that form of government. The Christian says: I know nothing about the form of government, I don't know whether it is good or bad, and I don't want to overturn it precisely because I don't know whether it's good or bad, but for the very same reason I don't want to support it either. And I not only don't want to, but I can't, because what it demands of me is against my con­science.

혁명주의자들은 말한다: 정부 형태는 이런 점에서 그리고 저런 점에서 나쁘다; 우리는 그들을 전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또는 저런 형태의 정부로 바꾸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말한다: 나는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전복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정확히 나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똑같은 이유로서 그것을 지지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게 바라는 것은 나의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All state obligations are against the conscience of a Christian-the oath of allegiance, taxes, law proceedings, and military service. And the whole power of the govern­ment rests on these very obligations.

국가의 모든 의무들은 기독교인의 양심에 어긋난다-충성의 선서, 세금, 법 절차들, 그리고 병역 의무. 그리고 정부의 전체 권력은 이들 의무들 위에 의존하고 있다.

Revolutionary enemies attack the government from without. Christianity does not attack it at all, but, from within, it destroys all the foundations on which govern­ment rests.

혁명적인 적들은 바깥으로부터 정부를 공격한다. 기독교는 그것을 전혀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으로부터, 정부가 의지하고 있는 모든 기초들을 파괴한다.

Among the Russian people, especially since the age of Peter I., the protest of Christianity against the govern­ment has never ceased, and the social organization has been such that men emigrate in communes to Turkey, to China, and to uninhabited lands, and not only feel no need of state aid, but always regard the state as a useless burden, only to be endured as a misfortune, whether it happens to be Turkish, Russian, or Chinese. And so, too, among the Russian people more and more frequent examples have of late appeared of conscious Christian freedom from subjection to the state. And these examples are the more alarming for the government from the fact that these non-compliant persons often belong not to the so-called lower uneducated classes, but are men of fair or good education; and also from the fact that they do not in these days justify their position by any mystic and excep­tional views, as in former times, do not associate them­selves with any superstitious or fanatic rites, like the sects who practice self-immolation by fire, or the wandering pilgrims, but put their refusal on the very simplest and clearest grounds, comprehensible to all, and recognized as true by all.

러시아 사람들 중에는, 특히 피터 1세 이후에, 정부에 대한 기독교의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 조직들은 그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서 터어키, 중국,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이민을 갔으며, 국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국가를 무익한 짐으로 여겼으므로, 터어키이든, 러시아인이든, 또는 중국인이든, 불행으로 알고 참았다. 그리고 그러함은 역시,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최근에는 국가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의식적인 기독교적 자유에 관한 잦은 예들이 나타났다. 이 예들은 이런 불복종하는 사람들이 소위 배우지 못한 계급들에 속하지 않고, 상당한 또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로부터 정부에게 있어서는 더욱 놀라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오늘날 그들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입장을 어떤 신비주의나 외적인 시각들로서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며, 불로서 자기를 희생하거나 돌아다니는 순례를 행하는 종파들처럼 어떤 미신적이거나 광신적인 의식들과 관련시키지도 않으면서, 너무나 단순하며 분명한, 모든 사람들에게 납득이 가는,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진리라고 인식되는 이유들로서 그들의 거부를 행하기 때문이다.

Thus they refuse the voluntary payment of taxes, because taxes are spent on deeds of violence-on the pay of men of violence-soldiers, on the construction of prisons, fortresses, and cannons. They as Christians regard it as sinful and immoral to have any hand in such deeds.

그리하여 그들은 자진 납세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세금들은 폭력 행위들-폭력을 행하는 사람들-병사들, 감옥들, 요새들, 그리고 대포들의 건설-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그러한 행위들에 협력하는 것을 죄악이며 비도덕적이라고 여긴다.

Those who refuse to take the oath of allegiance refuse because to promise obedience to authorities, that is, to men who are given to deeds of violence, is contrary to the sense of Christ's teaching. They refuse to take the oath in the law courts, because oaths are directly forbidden by the Gospel. They refuse to perform police duties, because in the performance of these duties they must use force against their brothers and ill treat them, and a Christian cannot do that. They refuse to take part in trials at law, because they consider every appeal to law is fulfilling the law of vengeance, which is inconsistent with the Christian law of forgiveness and love. They refuse to take any part in military preparations and in the army, because they can­not be executioners, and they are unwilling to prepare themselves to be so.

충성의 선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권력들에, 폭력 행위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함을 약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와 대치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정에서 선서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맹세들은 복음서에서 직접 금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찰 의무들의 이행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무들의 이행에 있어서 그들은 그들의 형제들에게 반드시 폭력을 사용해야하며, 그들을 학대 해야 하고, 기독교인은 그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정의 재판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법에 대한 모든 호소는 복수의 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며, 그것은 기독교적인 용서의 법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사적인 대비들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형자 들일 수가 없으며, 그들은 스스로가 그런 준비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The motives in all these cases are so excellent that, how­ever despotic governments may be, they could hardly punish them openly. To punish men for refusing to act against their conscience the government must renounce all claim to good sense and benevolence. And they assure people that they only rule in the name of good sense and benevolence.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한 동기들은 너무나 훌륭해서, 아무리 독제적인 정부들이라도, 그들은 공개적으로는 거의 그들을 처벌할 수가 없다. 그들의 양심에 반대되는 행위를 거부하는 사람을 처벌하려면, 정부는 반드시 선의와 선행에 대한 주장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그들만이 선의와 선행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사람들에게 주장하고 있다.

What are governments to do against such people?

정부들은 그런 사람들에 맞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Governments can of course flog to death or execute or keep in perpetual imprisonment all enemies who want to overturn them by violence, they can lavish gold on that section of the people who are ready to destroy their enemies. But what can they do against men who, without wishing to overturn or destroy anything, desire simply for their part to do nothing against the law of Christ, and who, therefore, refuse to perform the commonest state requirements, which are, therefore, the most indispensable to the maintenance of the state?

정부들은 물론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려는 모든 적들을 매질하여 죽이거나 사형하거나 또는 무기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적들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의 무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대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전복하거나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이, 단순히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법에 어긋나는 것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가장 평범한 국가의 명령들을, 다시 말하면, 국가의 유지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들을 이행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맞서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If they had been revolutionists, advocating and practic­ing violence and murder, their suppression would have been an easy matter; some of them could have been bought over, some could have been duped, some could have been overawed, and these who could not be bought over, duped, or overawed would have been treated as criminals, enemies of society, would have been executed or imprisoned, and the crowd would have approved of the action of the govern­ment. If they had been fanatics, professing some peculiar belief, it might have been possible, in disproving the super­stitious errors mixed in with their religion, to attack also the truth they advocate. But what is to be done with men who profess no revolutionary ideas nor any peculiar religious dogmas, but merely because they are unwilling to do evil to any man, refuse to take the oath, to pay taxes, to take part in law proceedings, to serve in the army, to fulfill, in fact, any of the obligations upon which the whole fabric of a state rests? What is to done with such people? To buy them over with bribes is impossible; the very risks to which they voluntarily expose themselves show that they are incorruptible. To dupe them into believing that this is their duty to God is also impossible, since their refusal is based on the clear, unmistakable law of God, recognized even by those who are trying to compel men to act against it. To terrify them by threats is still less possible, because the deprivations and sufferings to which they are subjected only strengthen their desire to follow the faith by which they are commanded: to obey God rather than men, and not to fear those who can destroy the body, but to fear him who can destroy body and soul. To kill them or keep them in perpetual imprisonment is also impossible. These men have friends, and a past; their way of thinking and acting is well known; they are known by everyone for good, gentle, peaceable people, and they cannot be regarded as criminals who must be removed for the safety of society. And to put men to death who are regarded as good men is to provoke others to champion them and justify their refusal. And it is only necessary to explain the reasons of their refusal to make clear to everyone that these reasons have the same force for all other men, and that they all ought to have done the same long ago. These cases put the ruling powers into a desperate position. They see that the prophecy of Christianity is coming to pass, that it is loosening the fetters of those in chains, and setting free them that are in bondage, and that this must inevitably be the end of all oppressors. The ruling authorities see this, they know that their hours are numbered, and they can do nothing. All that they can do to save themselves is only deferring the hour of their downfall. And this they do, but their position is none the less desperate.

만일 그들이 폭력과 살인을 사주하는 혁명주의자들이라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쉬운 문제일 것이다; 그들 중의 일부는 돈으로 매수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속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협박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매수할 수도, 속여질 수도, 협박되어질 수도 없는 이런 사람들은 범죄자나, 사회의 적들로 여겨져서, 사형되거나 투옥되어 질 것이며, 군중들은 정부의 행위를 인정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약간 이상한 믿음을 선언하는 광신자들이라면, 그들의 종교에 섞여 있는 미신적인 오류들을 반증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 또한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혁명적 사상이나 기괴한 종교적 교리를 선언하지 않으며, 단순히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선서를 행하는 것, 세금을 납부하는 것, 법적 절차에 참가하는 것, 군대에 복무하는 것, 사실, 국가의 전체 구조가 의존하는 어떤 명령들도 이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그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그들을 뇌물로서 사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들이 자진해서 스스로를 노출시킨 바로 그 위험들이 그들은 부패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라고 속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부는 명백하고 틀림없는 하나님의 법으로서,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법에 기초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협박으로 겁을 주는 것은 훨씬 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하게 되는 박탈들과 고통들은 오직 그들이 명받게 되는 신앙을 따르고자 하는 욕구를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사람들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하며, 육신을 파괴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오직 육신과 영혼을 파괴하는 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이거나 그들을 영원한 감금 상태에 두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 사람들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생각하며 행동하는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모두에게 선하고 점잖으며, 평화스러운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범죄자들로 여겨질 수가 없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죽음에 처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하여금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거부를 정당화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거부에 대한 이유들을 설명해서, 누구라도 이들 이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힘을 가지도록, 누구에게나 이해되도록 하는것이 오직 필요하며, 그들 모두는 똑같은 일을 오래 전에 했어야 했다. 이들 경우들은 지배 권력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놓는다. 그들은 기독교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며, 사슬에 묶인 자들의 족쇄를 느슨하게 하며, 묶인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그리고 이것은 틀림없이 모든 압제자들의 종언임을 알고 있다. 지배 권력들은 이것을 안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들의 몰락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행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It is like the position of a conqueror who is trying to save a town which has been been set on fire by its own inhabit­ants. Directly he puts out the conflagration in one place, it is alight in two other places; directly he gives in to the fire and cuts off what is on fire from a large building, the building itself is alight at both ends. These separate fires may be few, but they are burning with a flame which, however small a spark it starts from, never ceases till it has set the whole ablaze.

그것은 마치 주민들 스스로가 불질러 버린 한 도시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정복자의 입장과 같다. 그가 한 곳의 대화재를 진압하자 마자, 다른 두곳에서 불이 붙었다; 그가 불에 뛰어 들어서 큰 건물에 타고 있는 불을 차단하자 마자, 그 건물 자체가 양쪽 끝에서 불타오른다. 이러한 각각의 불들은 적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작은 불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불태우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을 화염으로 불타고 있다.

Thus it is that the ruling authorities are in such a defenseless position before men who advocate Christianity, that but little is necessary to overthrow this sovereign power which seems so powerful, and has held such an exalted position for so many centuries. And yet social reformers are busy promulgating the idea that it is not necessary and is even pernicious and immoral for every man separately to work out his own freedom. As though, while one set of men have been at work a long while turning a river into a new channel, and had dug out a complete water-course and had only to open the floodgates for the water to rush in and do the rest, another set of men should come along and begin to advise them that it would be much better, instead of letting the water out, to construct a machine which would ladle the water up from one side and pour it over the other side.

이렇게 하여 통치하는 권력들은 기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력한 위치에 서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세기 동안그렇게도 강력해 보이며, 그렇게 높은 위치를 유지하고 있던 이 통치 세력을 전복하는 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회 개혁가들은 제각기의 사람이 따로따로 자기 자신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은 필요치 않으며, 심지어는 해로우며, 비도덕적이다는 사상들을 퍼뜨리기에 바쁘다. 그것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강을 새로운 운하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으며, 오직 수문을 열어서 물들이 들어오게 하고서 나머지를 행하면 되는 한편,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서는, 물이 빠져 나가게 하기 보다는, 한 쪽에서 물을 퍼서 다른 쪽에 붓는 기계를 건설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그들에게 권유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But the thing has gone too far. Already ruling govern­ments feel their weak and defenseless position, and men of Christian principles are awakening from their apathy, and already begin to feel their power.

그러나 일은 너무 깊이 진행되었다. 이미 지배하는 정부는 그들의 약하고 무기력한 처지를 느끼고, 기독교의 원리들의 사람들은 그들이 무감각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그들이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I am come to send a fire on the earth," said Christ, "and what will I, if it be already kindled?" And this fire is beginning to burn.

“나는 지상에 불을 지르려고 왔다,” 그리스도가 말했다, “그리고, 만일 이미 그것이 불이 붙었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불은 타들어 가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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