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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y Leo Tolstoy

   
   
CHAPTER X.  10  

EVIL CANNOT BE SUPPRESSED BY THE PHYSICAL FORCE OF THE GOVERNMENT-THE MORAL PROGRESS OF HUMANITY IS BROUGHT ABOUT NOT ONLY BY INDIVIDUAL RECOGNI­TION OF TRUTH, BUT ALSO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A PUBLIC OPINION.

악은 정부의 물리적 힘으로 막을 수 없다-진리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여론의 확립을 통해서 인류애의 도덕적 진보가 이루어 진다

Christianity Destroys the State-But Which is Most Necessary: Christianity or the State?-There are Some who Assert the Necessity of a State Organization, and Others who Deny it, both Arguing from same First Principles-Neither Contention can be Proved by Abstract Argu­ment-The Question must be Decided by the Stage in the Develop­ment of Conscience of Each Man, which will either Prevent or Allow him to Support a Government Organization-Recognition of the Futility and Immorality of Supporting a State Organization Contrary to Christian Principles will Decide the Question for Every Man, in Spite of any Action on Part of the State-Argument of those who Defend the Government, that it is a Form of Social Life, Needed to Protect the Good from the Wicked, till all Nations and all Members of each Nation have Become Christians-The Most Wicked are Always those in Power-The whole History of Humanity is the History of the Forcible Appropriation of Power by the Wicked and their Oppression of the Good-The Recognition by Governments of the Necessity of Opposing Evil by Force is Equivalent to Suicide on their Part-The Abolition of State-violence cannot Increase the Sum Total of Acts of Violence-The Suppression of the Use of Force is not only Possible, but is even Taking Place before Our Eyes-But it will Never be Suppressed by the Violence of Government, but through Men who have Attained Power by Evidence Recognizing its Emptiness and Becoming Better and Less Capable of Using Force-Individual Men and also Whole Nations Pass Through this Process-By this Means Christianity is Diffused Through Consciousness of Men, not only in Spite of Use of Violence by Government, but even Through its Action, and therefore the Suppression is not to be Dreaded, but is Brought About by the National Progress of Life-Objection of those who Defend State Organization that Universal Adoption of Christianity is hardly Likely to be Realized at any Time-The General Adoption of the Truths of Christianity is being Brought About not only by the Gradual and Inward Means, that is, by Knowledge of the Truth, Prophetic Insight, and Recognition of the Emptiness of Power, and Renunciation of it by Individuals, but also by Another External Means, the Acceptance of a New Truth by Whole Masses of Men on a Lower Level of Development Through Simple Confidence in their Leaders-When a Certain Stage in the Diffusion of a Truth has been Reached, a Public Opinion is Created which Im­pels a Whole Mass of Men, formerly Antagonistic to the New Truth, to Accept it-And therefore all Men may Quickly be Brought to Renounce the use of Violence when once a Christian Public Opinion is Established-The Conviction of Force being Necessary Hinders the Establishment of a Christian Public Opinion-The Use of Violence Leads Men to Distrust the Spiritual Force which is the Only Force by which they Advance-Neither Nations nor Individuals have been really Subjugated by Force, but only by Public Opinion, which no Force can Resist-Savage Nations and Savage Men can only be Subdued by the Diffusion of a Christian Standard among them, while actually Christian Nations in order to Subdue them do all they can to Destroy a Christian Standard-These Fruitless Attempts to Civilize Savages Cannot be Adduced as Proofs that Men Cannot be Subdued by Chris­tianity-Violence by Corrupting Public Opinion, only Hinders the Social Organization from being What it Ought to Be-And by the Use of Violence being Suppressed, a Christian Public Opinion would be Established-Whatever might be the Result of the Suppression of Use of Force, this Unknown Future could not be Worse than the Present Condition, and so there is no Need to Dread it-To Attain Knowledge of the Unknown, and to Move Toward it, is the Essence of Life.

기독교는 국가를 파괴한다-그러나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기독교 또는 국가?-국가 조직의 필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둘다 똑같은 처음의 원리들로 논쟁한다-추상적인 논리로서는 어떤 투쟁도 증명될 수 없다-문제는 반드시 각기 사람들의 양심의 발전 단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정부 조직을 지원하는 것을 막거나 허락할 것이다.-기독교의 원리들에 반대되는 국가 조직을 지원함에 대한 무익함과 비도덕성은, 국가의 어떠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제각기 사람의 질문을 해결할 것이다-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 그것은 사회적 삶의 형태이다, 악한 자들로부터 선한 자들을 보호하는데 필요하다, 모든 나라들과, 각 나라들의 모든 구성원들이 기독교인이 될 때까지-가장 악한 자들은 언제나 권력에 오른 자들이다-인류애의 전체 역사는 악한 자들에 의한 폭력을 사용한 권력의 탈취와 그들의 선한 자에 대한 억압이다-정부들의 힘으로서 악에 저항함의 필요의 인식은 그들 편에서 보면 자살과 동등하다-국가 폭력의 폐지는 폭력 행위의 총체적 합계를 늘일 수 없다-폭력의 사용의 억제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정부의 폭력으로서는 결코 억제될 수 없으며, 폭력의 무의미함과 나아짐과 폭력사용의 감소를 인식한 증거로서 얻어진 힘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가능하다-개인적인 사람들과 전체 국민들이 이 과정을 지나고 있다-이 방법으로서 기독교는 사람들의 자각을 통하여 전파된다, 정부의 폭력 사용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억압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국가적인 삶의 진보에서 초래된다-어떤 시기에 가서라도 보편적인 기독교의 채택은 거의 가능성이 없다는 국가 조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반대-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수용은 점진적 및 내적인 방법, , 진리에 대한 지식, 예언적 통찰 , 그리고 권력의 무익함에 대한 인식과 개인들의 권력의 포기뿐만 아니라, 다른 외적인 방법에 의해서,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통한 낮은 수준의 발전에서 전체 대중에 의한 새로운 진리의 수용에 의해서도 달성된다-진리의 전파에 있어서 어떤 단계에 도달했을 때, 이전에는 새로운 진리에 대해 반대하던 전체 대중을 압박하는 여론이 만들어져서 그것을 받아 들이게 한다-그리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일단 기독교적인 여론이 확립 될때 신속하게 폭룍의 사용을 포기하게 된다. 폭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기독교적인 여론의 확립을 방해한다-폭력의 사용은 사람들이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영적인 힘을 불신하게 한다-국가들이든 개인들이든 실제로 힘에 의해서 종속된 적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힘도 저항할 수 없는 여론에 의해서-야만적인 국가들과 야만적인 사람들은 오직 그들 사이에 기독교적인 규범의 전파에 의해서 정복될 수 있으며, 반면에 현실적으로 그들을 억누르려고 하는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적인 규범을 파괴하려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야만인들을 문명화하기 위한 이러한 쓸모없는 시도들은 사람들은 기독교로서 정복될 수 없다는 증거로서 제출될 수 없다-여론을 더럽히는 폭력은 오직 사회 조직의 당연한 모습을 가로막는다-그리고 폭력의 사용이 억제됨으로써, 기독교적인 여론은 확립될 것이다-힘을 사용을 억제하는 결과가 무엇이 될지라도,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미래는 현재의상황보다 나쁠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미지의 세계의 지식을 얻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진행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christianity in its true sense puts an end to govern­ment. So it was understood at its very commencement; it was for that cause that Christ was crucified. So it has always been understood by people who were not under the necessity of justifying a Christian government. Only from the time that the heads of government assumed an external and nominal Christianity, men began to invent all the impossible, cunningly devised theories by means of which Christianity can be reconciled with government. But no honest and serious-minded man of our day can help seeing the incompatibility of true Christianity-the doctrine of meekness, forgiveness of injuries, and love-with govern­ment, with its pomp, acts of violence, executions, and wars. The profession of true Christianity not only excludes the possibility of recognizing government, but even destroys its very foundations.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는 정부를 폐지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시초부터 그렇게 깨달아졌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밖힌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언제나 기독교적인 정부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깨달아졌다. 오직 정부의 수뇌들이 형식적이며 명목상의 기독교를 취한 시점부터, 사람들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꾸며내기 시작하고, 교활하게 기독교가 정부와 타협될 수 있는 이론들을 고안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어떤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진정한 기독교-온유함, 피해에 대한 용서, 그리고 사랑-와 정부-거만함, 폭력행위들, 처형들, 그리고 전쟁들-의 비양립성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한 기독교의 선언은 정부를 인정함의 가능성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자체의 기반들을 파괴한다.

But if it is so, and we are right in saying that Christianity is incompatible with government, then the question naturally presents itself: which is more necessary to the good of humanity, in which way is men's happiness best to be secured, by maintaining the organization of government or by destroying it and replacing it by Christianity?

그러나 만일 그것이 그렇다면, 그리고 기독교는 정부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함에서 우리가 옳다면, 그 문제는 당연히 스스로 나오게 된다: 인류의 선을 위해서 어느 것이 더 필요한가 어느 방법이 사람들이 행복을 가장 확실히 확보할 수 있는가, 정부 조직을 운영하면서인가 아니면 그것을 파괴하고 기독교로 대체함으로써인가?

Some people maintain that government is more necessary for humanity, that the destruction of the state organization would involve the destruction of all that humanity has gained, that the state has been and still is the only form in which humanity can develop. The evil which we see among peoples living under a government organization they attribute not to that type of society, but to its abuses, which, they say, can be corrected without destroying it, and thus humanity, without discarding the state organization, can develop and attain a high degree of happiness. And men of this way of thinking bring forward in support of their views arguments, which they think irrefutable drawn from history, philosophy, and even religion. But there are men who hold on the contrary that, as there was a time when humanity lived without government, such an organization is temporary, and that a time must come when men need a new organization, and that that time has come now. And men of this way of thinking also bring forward in support of their views arguments which they think irrefutable from philosophy, history, and religion.

어떤 사람들은, 정부가 인류를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 국가 조직의 파괴는 인류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의 파괴를 동반할 것이다, 국가는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였으며 아직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정부 조직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보는 악을 그들은 사회의 형태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습에 돌리고 있으며, 그것은 파괴함이 없이 교정될 수 있으며, 그래서, 인류는, 국가 조직을 내버리지 않고서, 높은 수준의 행복을 발전시키고 획들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시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것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바, 역사, 철학,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로부터 가져온 논박할 수 없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반대로 인류가 정부 없이 살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그러한 조직은 임시적이며, 사람들은 새로운 조직이 필요한 때가 반드시 와야 하며, 그 때가 지금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시각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바 철학, 역사, 그리고 종교로부터 논박할 수 없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Volumes may be written in defense of the former view (and volumes indeed have long ago been written and more will still be written on that side), but much also can be written against it (and much also, and most brilliantly, has been written-though more recently-on this side).

전자의 시각을 변호하기 위해서 많은 책을 써야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오래 전에 많은 책들이 쓰여졌으며, 아직도 더 많이 그 쪽으로 쓰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반대하는 많은 책들도 쓰여졌다 (그리고 또한 많이, 그리고 가장 훌륭하게, 쓰여졌다-비록 좀더 최근이지만-이쪽으로 쓰여질 것이다).

And it cannot be proved, as the champions of the state maintain, that the destruction of government involves a social chaos, mutual spoliation and murder, the destruction of all social institutions, and the return of mankind to bar­barism. Nor can it be proved as the opponents of govern­ment maintain that men have already become so wise and good that they will not spoil or murder one another, but will prefer peaceful associations to hostilities; that of their own accord, unaided by the state, they will make all the arrangements that they need, and that therefore govern­ment, far from being any aid, under show of guarding men exerts a pernicious and brutalizing influence over them. It is impossible to prove either of these contentions by abstract reasoning. Still less possible is it to prove them by experiment, since the whole matter turns on the ques­tion, ought we to try the experiment? The question whether or not the time has come to make an end of gov­ernment would be unanswerable, except that there exists another living means of settling it beyond dispute.

그리고 국가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부의 파괴는 사회적 혼란, 상호 약탈, 그리고 살인, 모든 사회 제도들의 파괴, 그리고 인류가 야만주의로 복귀를 동반한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 또한 정부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미 너무나 현명하고 선해져서 그들은 서로를 약탈하고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적대 행위들 보다는 평화스런 관계들을 선호할 것이며; 그들 스스로, 국가의 도움이 없이, 그들이 필요한 모든 조정들을 해나가고, 그리고 그러므로, 정부는, 어떤 도움이 되기는 커녕, 수비하는 사람들로서 과시하면서 그들에게 해롭고 잔인한 영향을 행사할 것이라는 것도 증명될 수 없다. 이들 항변들에 대한 어느 것도 추상적인 논리로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실험에 의해서 증명하는 것은 훨씬 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전체 문제는, ‘우리는 실험을 해보아야만 하는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정부를 폐지할 때가 왔는지 아닌지의 질문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삶의 방법이 존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답될 수 없을 것이다.

We may dispute upon the question whether the nestlings are ready to do without the mother-hen and to come out of the eggs, or whether they are not yet advanced enough. But the young birds will decide the question without any regard for our arguments when they find themselves cramped for space in the eggs. Then they will begin to try them with their beaks and come out of them of their own accord.

우리는 아마 병아리들이 어미닭이 없어도 되고 알에 나올 준비가 되었는지, 또는 그것들이 아직도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는지의 의문에 대해 논쟁할 것이다. 그러나 어린 새들은 알 안에서 갑갑함을 느낄 때에 우리의 논쟁들에 관계 없이 그 문제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들은 부리를 가지고 시험을 해보고, 그들 스스로 알에서 나올 것이다.

It is the same with the question whether the time has come to do away with the governmental type of society and to replace it by a new type. If a man, through the growth of a higher conscience, can no longer comply with the demands of government, he finds himself cramped by it and at the same time no longer needs its protection. When this comes to pass, the question whether men are ready to discard the governmental type is solved. And the conclusion will be as final for them as for the young birds hatched out of the eggs. Just as no power in the world can put them back into the shells, so can no power in the world bring men again under the governmental type of society when once they have outgrown it.

그것은 정부 형태의 사회를 폐지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바꿀 시간이 왔는가의 문제와 똑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더 높은 양심의 성장을 통하여, 정부의 명렬들을 더 이상 복종할 수 없다면, 그는 그것이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더 이상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 날 때, 사람들이 정부 형태를 버릴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해결된다. 그리고 결론은 그들에게 있어서나 알에서 부화되어 나오는 어린 새들에게서나 최종적일 것이다. 정말 세상의 어떤 힘도 그들을 껍데기 안으로 다시 넣을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의 어느 권력도, 사람들이 일단 정부가 필요 없게 되어 버렸다면, 그들을 정부 형태의 사회로 다시 데려다 놓을 수가 없다.

"It may well be that government was necessary and is still necessary for all the advantages which you attribute to it," says the man who has mastered the Christian theory of life. "I only know that on the one hand, government is no longer necessary for me, and on the other hand, I can no longer carry out the measures that are necessary to the existence of a government. Settle for yourselves what you need for your life. I cannot prove the need or the harm of governments in general. I know only what I need and do not need, what I can do and what I cannot. I know that I do not need to divide myself off from other nations, and therefore I cannot admit that I belong exclusively to any state or nation, or that I owe allegiance to any govern­ment. I know that I do not need all the government institutions organized within the state, and therefore I cannot deprive people who need my labor to give it in the form of taxes to institutions which I do not need, which for all I know may be pernicious. I know that I have no need of the administration or of courts of justice founded upon force, and therefore I can take no part in either. I know that I do not need to attack and slaughter other nations or to defend myself from them with arms, and therefore I can take no part in wars or prepara­tions for wars. It may well be that there are people who cannot help regarding all this as necessary and indispens­able. I cannot dispute the question with them, I can only speak for myself; but I can say with absolute certainty that I do not need it, and that I cannot do it. And I do not need this and I cannot do it, not because such is my own, my personal will, but because such is the will of him who sent me into life, and gave me an indubitable law for my conduct through life."

“ 아마 정부가 필요하였으며 당신이 부여하는 모든 이익들을 위하여 아직도 필요할지도 모른다라고 기독교적인 삶의 이론을 완성한 사람이 말한다. “나는 오직, 한편으로 나에게 있어서 정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나는 정부의 존재에 필요한 행동들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당신의 삶에 필요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라. 나는 일반적으로 정부의 필요나 해로움을 증명할 수 없다. 나는 오직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만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해야 할 필요가 없으므로, 나는 특정 국가나 민족에 배타적으로 소속한다거나, 특정한 정부에 충성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안다. 나는 국가 안에서 조직된 모든 정부 기구들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는 세금이라는 형태로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기구들에 주어버림으로써 나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궁핍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 기구들이 내가 아는 한 해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나 재판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 어느 것에도 참여할 수 없음을 안다. 나는 다른 민족들을 공격하거나 살인하거나, 나 자신을 무기로서 방어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전쟁이나 전쟁 준비들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마 이 모든 것을 필요하며 부득이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른다. 나는 이 문제들 그들과 다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며 나는 그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필요치 않으며 그것을 행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필요치 않으며, 그것을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 자시의, 나의 개인적인 뜻이 아니라, 나를 삶으로 보내셨으며, 삶을 통해서 나의 행위를 위한 확실한 율법을 주신 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Whatever arguments may be advanced in support of the contention that the suppression of government authority would be injurious and would lead to great calamities, men who have once outgrown the governmental form of society cannot go back to it again. And all the reasoning in the world cannot make the man who has outgrown the governmental form of society take part in actions dis­allowed by his conscience, any more than the full-grown bird can be made to return into the egg-shell.

정부 권력의 억제는 해로울 것이며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는 항변을 지지함에 있어서 아무리 진보된 주장들이라고 할지라도, 정부 형태가 일단 필요하지 않아진 사람들은 다시 그것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추론들은 사회의 정부적인 형태가 쓸모가 없어져 버린 사람들을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들에 참여하게 할 수 없으며, 다 자란 새가 다시 알 껍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과 다르지 않다. 

"But even it be so," say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of things, "still the suppression of government violence can only be possible and desirable when all men have become Christians. So long as among people nomi­nally Christians there are unchristian wicked men, who for the gratification of their own lusts are ready to do harm to others, the suppression of government authority, far from being a blessing to others, would only increase their mis­eries. The suppression of the governmental type of society is not only undesirable so long as there is only a minority of true Christians; it would not even be desirable if the whole of a nation were Christians, but among and around them were still unchristian men of other nations. For these unchristian men would rob, outrage, and kill the Christians with impunity and would make their lives miser­able. All that would result, would be that the bad would oppress and outrage the good with impunity. And there­fore the authority of government must not be suppressed till all the wicked and rapacious people in the world are extinct. And since this will either never be, or at least cannot be for a long time to come, in spite of the efforts of individual Christians to be independent of government authority, it ought to be maintained in the interests of the majority. The champions of government assert that with­out it the wicked will oppress and outrage the good, and that the power of the government enables the good to resist the wicked."

“그러나 심지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고 기존 세상 질서의 옹호자들이 말한다, “여전히 정부의 폭력을 억제함은 오직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 오직 가능하며 바람직하다. 명목상으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비기독교인인 사악한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정부 권력의 억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는 커녕, 오직 그들의 불행을 증가시킬 것이다. 정부 형태의 사회를 억제하는 것은 오직 소수의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있는한 바람직 하지 않은 것 뿐만이 아니다; 만일 전체 국민이 기독교인들이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것 뿐만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여전히 다른 국가의 비기독교인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 비기독교인들이 벌을 받지 않고 기독교인들을 강탈하고, 폭행하며, 죽일 것이며 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초래되는 모든 것은 악한 자들이 선한 사람들을 벌을 받징 않고서 억압하고 폭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정부의 권력은, 세상의 모든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억제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오지 않거나, 적어도 당분간은 올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이 정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노력들에 불구하고, 정부는 대다수의 이익들을 위하여 유지 되어야만 한다. 정부의 옹호자들은 정부가 없으면 사악한 자들이 선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폭행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권력은 선한 사람들이 악한 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주장한다.”

But in this assertion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of things take for granted the proposition they want to prove. When they say that except for the government the bad would oppress the good, they take it for granted that the good are those who at the present time are in posses­sion of power, and the bad are those who are in subjection to it. But this is just what wants proving. It would only be true if the custom of our society were what is, or rather is supposed to be, the custom in China; that is, that the good always rule, and that directly those at the head of government cease to be better than those they rule over, the citizens are bound to remove them. This is supposed to be the custom in China. In reality it is not so and can never be so. For to remove the heads of a government ruling by force, it is not the right alone, but the power to do so that is needed. So that even in China this is only an imaginary custom. And in our Christian world we do not even suppose such a custom, and we have nothing on which to build up the supposition that it is the good or the superior who are in power; in reality it is those who have seized power and who keep it for their own and their retainers' benefit.

그러나 이 주장에서 기존 세상 질서의 옹호자들은 그들이 증명하고자 하는 명제를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들이 정부가 없다면 악한 자들이 선한 사람들을 억압할 것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선한 사람들은 현 시대에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악한 사람들은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당연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증명을 요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사회의 관습이 중국의 관습이거나,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가정된다면, 그것은 오직 진리일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선한 자가 언제나 통치한다는 것이고, 정부의 수뇌들이 통치당하는 사람들 보다 낫기를 멈추자 마자, 시민들은 그들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관습이 그렇다고 가정된다. 현실에선,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부 통치의 수뇌들을 힘으로서 제거하려면, 필요한 것은 권리 만이 아니고 그렇게 하기 위한 힘이다. 그래서 심지어 중국에서 일지라도 이것은 오직 상상속의 관습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독교적 세계에서는 우리는 심지어 그러한 관습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리고 권력에 오르는 자는 선한 자이거나 뛰어난 자라는 가정을 세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권력을 잡았으며 그것을 그들 자신의 것 그리고 그것들을 보유한 자의 이익으로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The good cannot seize power, nor retain it; to do this men must love power. And love of power is inconsistent with goodness; but quite consistent with the very opposite qualities-pride, cunning, cruelty.

선한 사람들은 권력을 잡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보유할 수도 없다; 이것을 행하려면 사람들은 반드시 권력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사랑은 선함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반대의 성질들과 상당치 일치한다-자만심, 교활함, 잔인함.

Without the aggrandizement of self and the abasement of others, without hypocrisies and deceptions, without prisons, fortresses, executions, and murders, no power can come into existence or be maintained.

자신을 높임과 다른 사람들을 낮춤이 없으면, 위선과 기만 없으면, 감옥과 요새, 처형, 그리고 살인들이 없으면, 어떠한 권력도 존재하거나 유지될 수 없다.

"If the power of government is suppressed the more wicked will oppress the less wicked," say the champions of state authority. But when the Egyptians conquered the Jews, the Romans conquered the Greeks, and the Barbarians conquered the Romans, is it possible that all the conquerors were always better than those they con­quered? And the same with the transitions of power with­in a state from one personage to another: has the power always passed from a worse person to a better one? When Louis XVI was removed and Robespierre came to power, and afterward Napoleon-who ruled then, a better man or a worse? And when were better men in power, when the Versaillist party or when the Commune was in power? When Charles I was ruler, or when Cromwell? And when Peter III was Tzar, or when he was killed and Catherine was Tzaritsa in one-half of Russia and Pougachef ruled the other? Which was bad then, and which was good? All men who happen to be in authority assert that their authority is necessary to keep the bad from oppressing the good, assuming that they themselves are the good par ex-cellence, who protect other good people from the bad.

“만일 정부의 권력이 억제된다면, 더욱 악한 자들이 덜 악한 자들을 억압할 것이다,”라고 국가 권력의 옹호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유대인들을 정복하였을 때,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였을 때, 바바리아가 로마인들을 정복하였을 때, 모든 정복자들이 언제나 그들이 정복한 자들 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한 국가 안에서 한 개인으로부터 다른 개인으로 권력이 전환될 때도 마찬가지다: 권력은 언제나 더 나쁜 사람에게서 더 좋은 사람에게로 옮겨 졌는가? 루이 14세가 제거되고 로베스피에르가, 그리고 그뒤에 나폴레옹이 권력에 올랐을 때-그 때 누가 통치하였는가, 더 훌륭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그리고 그리고 언제 좋은 사람들이 권력에 있었는가, 베르사이유 당인가 아니면 파리코뮌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인가? 찰스 1세가 통치자일 때인가 아니면 크롬웰인가? 그리고 피터 3세인가 아니면 그가 살해되고 캐더린이 여왕이 러시아의 절반을 통치하고 푸가체프가 나머지를 통치할 때인가? 그렇다면 어느쪽이 악한 쪽이고 어느쪽이 좋은 쪽인가?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권력이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그들 자신은 월등히 선한 자들이며, 다른 선한 자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한다고 여긴다.

But ruling means using force, and using force means doing to him to whom force is used, what he does not like and what he who uses the force would certainly not like done to himself. Consequently ruling means doing to others what we would not they should do unto us, that is, doing wrong.

그러나 통치는 힘을 의미하고, 그리고 힘을 사용하는 것은 힘이 사용되는 사람에게 행함을 의미하며, 그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그리고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자신에게는 행해 지는 것을 분명히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통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하는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 악한 일을 하는것을, 그들에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To submit means to prefer suffering to using force. And to prefer suffering to using force means to be good, or at least less wicked than those who do unto others what they would not like themselves.

복종한다는 것은 힘을 사용함보다는 고통을 선호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힘을 사용함 보다 고통을 선호한다는 것은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니면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좋아 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사람들 보다도 덜 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And therefore, in all probability, not the better but the worse have always ruled and are ruling now. There may be bad men among those who are ruled, but it cannot be that those who are better have generally ruled those who are worse.

그리고 그러므로, 모든 가능성에서, 더 좋은 사람들 보다도 언제나 더 악한 사람들이 통치하였으며 지금도 통치하고 있다. 통치 받는 사람들 중에도 나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더 나쁜 사람들을 통치했다고 할 수 없다.

It might be possible to suppose this with the inexact heathen definition of good; but with the clear Christian definition of good and evil, it is impossible to imagine it.

이것을 부정확한 이교적인 선의 정으로서 가정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독교적인 정의로서는, 그것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If the more or less good, and the more or less bad can­not be distinguished in the heathen world, the Christian conception of good and evil has so clearly defin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good and the wicked, that it is impos­sible to confound them.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the good are those who are meek and long-suffering, do not resist evil by force, forgive injuries, and love their enemies; those are wicked who exalt themselves, oppress, strive, and use force. Therefore by Christ's teaching there can be no doubt whether the good are to be found among rulers or ruled, and whether the wicked are among the ruled or the rulers. Indeed it is absurd even to speak of Christians ruling.

만일 다소간에 선한 사람, 그리고 다소간에 악한 사람이 이교적인 세상에서 구별될 수 없다면, 기독교적인 개념의 선고 악은 너무나 분명히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특징들을 정의 하였으므로, 그들을 혼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선한 자들은 온유하고 오래 참으며, 힘으로 악에 저항하지 않으며, 피해를 보더라도 용서하며, 그들의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스스로를 높이며, 억압하고 투쟁하고 힘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선한 자들이 통치자들 또는 피통치자들 가운데 발견되든, 그리고 악한 자들이 통치자 또는 피통치자들 가운데 있든,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참으로 기독교인들이 통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심지어 부조리하다.

Non-Christians, that is those who find the aim of their lives in earthly happiness, must always rule Christians, the aim of whose lives is the renunciation of such earthly happiness.

비기독교인들은, , 그들의 삶의 목적을 세상에서의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언제나 기독교인들을 통치하며, 그들의 삶의 목적은 그러한 세상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다.

This difference has always existed and has become more and more defined as the Christian religion has been more widely diffused and more correctly understood.

이러한 차이는 언제나 존재하였으며, 기독교 종교가 더욱 널리 전파되고 더욱 정확히 깨달아짐에 따라서 점점더 확실해졌다.

The more widely true Christianity was diffused and the more it penetrated men's conscience, the more impossible it was for Christians to be rulers, and the easier it became for non-Christians to rule them.

기독교가 멀리 전파되면 될수록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양심속에 더욱 더 파고들수록, 기독교인들이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더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 그들을 통치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

"To get rid of governmental violence in a society in which all are not true Christians, will only result in the wicked dominating the good and oppressing them with impunity," say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of things. But it has never been, and cannot be otherwise. So it has always been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and so it is still. The wicked will always dominate the good, and will always oppress them. Cain overpowered Abel, the cunning Jacob oppressed the guileless Esau and was in his turn deceived by Laban, Caiaphas and Pilate oppressed Christ, the Roman emperors oppressed Seneca, Epictetus, and the good Romans who lived in their times. John IV. with his favorites, the syphilitic drunken Peter with his buffoons, the vicious Catherine with her paramours, ruled and oppressed the industrious religious Russians of their times.

“모두가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회에서 정부의 폭력을 없앤다는 것은 오직 악한 자들이 무사히 선한 자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억압함을 초래할 것이다,” 라고 기존 세상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나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르게 될 수도 없다. 태초부터 언제나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악한 자들이 언제나 선한 자들을 지배랗 것이며, 언제나 그들을 억압할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압도했다, 교활한 야곱이 순진한 이새를 억압했으며, 그는 다시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으며, 가야바와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억압했고, 로마의 황제들은 세네카, 에픽테투스, 그리고 그들 시대에 살았던 선한 로마인들을 억압했다. 4세와 그의 추종자들, 매독에 걸리고 술주정뱅이인 피터와 그의 광대들, 사악한 캐더린과 그녀의 애인들은, 그들 시대의 근면하고 종교적인 러시아인들을 통치하며 억압하였다.

William is ruling over the Germans, Stambouloff over the Bulgarians, the Russian officials over the Russian people. The Germans have dominated the Italians, now they dominate the Hungarians and Slavonians; the Turks have dominated and still dominate the Slavonians and Greeks; the English dominate the Hindoos, the Mongo­lians dominate the Chinese.

윌리엄 황제가 독일인을 통치하고, 스탐볼로프가 불가리아인들을, 러시아의 관리들이 러시아 사람들을 지배한다. 독일인들은 이탈리아인들을 지배했다, 이제 그들은 헝가리인들과 슬라비아인들을 지배한다; 터어키인들은 슬라비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아직도 지배한다;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을, 몽고인들은 중국인들을 지배한다.

So that whether governmental violence is suppressed or not, the position of good men, in being oppressed by the wicked, will be unchanged.

그래서 정부의 폭력이 억제되든 아니하든, 선한 사람들의 위치는, 악한 사람들에게 압박받음에 있어서, 불변할 것이다.

To terrify men with the prospect of the wicked dominat­ing the good is impossible, for that is just what has always been, and is now, and cannot but be.

사람들에게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으로 위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 언제나 있어왔으며, 지금도 있으며, 있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The whole history of pagan times is nothing but a recital of the incidents and means by which the more wicked gained possession of power over the less wicked, and retained it by cruelties and deceptions, ruling over the good under the pretense of guarding the right and protecting the good from the wicked. All the revolutions in history are only examples of the more wicked seizing power and oppressing the good. In declaring that if their authority did not exist the more wicked would oppress the good, the ruling authorities only show their disinclination to let other oppressors come to power who would like to snatch it from them.

이교 시대의 전체 역사는 오직 더 악한 자들이 덜 악한 자들 위에서 권력을 소유를 확보하며, 잔혹행위들과 기만들로서 그것을 유지하며, 권리를 지켜주며 악한 자들로부터 선한 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아래서 선한 자들위에 군림하는 사건들과 방법들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상의 모든 혁명들은 단지 더 악한 권력을 잡으며 선한 자들을 억압하는 예들일 뿐이다. 만일 그들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억압할 것이라고 선언함에 있어서, 지배하는 권력들은 오직 다른 압제자들이 힘을 얻어서 그들로부터 권력을 가로채는 것을 허용하기 싫어함을 보여줄 뿐이다.

But in asserting this they only accuse themselves. They say that their power, i.e., violence, is needed to defend men from other possible oppressors in the present or the future.

그러나 이것을 주장함에서 그들은 오직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의 권력, , 폭력은 현재나 미래에 다른 가능한 압제자들로부터 사람들을 수호함에 필요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The weakness of the use of violence lies in the fact that all the arguments brought forward by oppressors in their own defense can with even better reason be advanced against them. They plead the danger of violence-most often imagined in the future-but they are all the while continuing to practice actual violence themselves. "You say that men used to pillage and murder in the past, and that you are afraid that they will pillage and murder one another if your power were no more. That may happen- or it may not happen. But the fact that you ruin thou­sands of men in prisons, fortresses, galleys, and exile, break up millions of families and ruin millions of men, physically as well as morally, in the army, that fact is not an imaginary but a real act of violence, which, according to your own argument, one ought to oppose by violence. And so you are yourselves these wicked men against whom, according to your own argument, it is absolutely necessary to use violence," the oppressed are sure to say to their oppressors. And non-Christian men always do say, and think and act on this reasoning. If the oppressed are more wicked than their oppressors, they attack them and try to overthrow them; and in favorable circumstances they succeed in overthrowing them, or what is more common, they rise into the ranks of the oppressors and assist in their acts of violence.

폭력 사용의 약점은 압제자들에 의해서 그들 자신의 변호를 위해 제시되는 모든 논증은 심지어 더 좋은 논리로서 그들에 대항하여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폭력의 위험을 주장한다-미래에 가장 흔히 상상되는-그러나 그들은 줄곧 계속해서 스스로가 실제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과거에 서로를 약탈하고 살인했으며, 만일 당신들의 권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서로를 약탈하고 살인할 것이라고 당신들은 말한다. 그런 일은 일어 날지 모른다-아니 그것은 안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이 수천명의 사람들을 감옥, 요새, 갤리선, 그리고 추방으로 망하게 하고, 수백만의 가정을 파탄시키고,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및 도덕적으로, 군대에서 망하게 한 사실, 그 사실은 상상이 아니며 현실의 폭력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들의 논리에 의하면, 반드시 폭력으로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당신들이 바로, 당신들의 논리에 따르면, 억압받는 사람들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분명히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이들 악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이런 논리로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만일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하는 사람들 보다도 더 악하다면, 그들은 억압하는 자들을 공격하여 전복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좋다면 그들은 그들을 전복함에 성공하거나, 흔한 일이지만, 그들은 압제자들의 지위로 상승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폭력 행위들을 돕는다.

So that the very violence which the champions of gov­ernment hold up as a terror-pretending that except for its oppressive power the wicked would oppress the good-has really always existed and will exist in human society. And therefore the suppression of state violence cannot in any case be the cause of increased oppression of the good by the wicked.

그러므로 정부의 옹호자들이 공포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폭력이-그들의 억압적인 권력이 없다면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억합할 것이라 꾸미면서-사실상 언제나 인간 사회에 존재하였으며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국가 폭력의 억제는 어떤 경우에도 악한 자들에 의한 선한 자들에 대한 증가된 억압의 원인이 될 수 없다.

If state violence ceased, there would be acts of violence perhaps on the part of different people, other than those who had done deeds of violence before. But the total amount of violence could not in any case be increased by the mere fact of power passing from one set of men to another.

만일 국가 폭력이 중단된다면 아마도, 이전에 폭력 행위들을 행한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편에서 폭력 행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의 전체 규모는 어떤 경우에도 권력이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서 다른 무리에게 옮겨진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서 증가될 수가 없다.

"State violence can only cease when there are no more wicked men in society," say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of things, assuming in this of course that since there will always be wicked men, it can never cease. And that would be right enough if it were the case, as they assume, that the oppressors are always the best of men, and that the sole means of saving men from evil is by violence. Then, indeed, violence could never cease. But since this is not the case, but quite the contrary, that it is not the better oppress the worse, but the worse oppress the better, and since violence will never put an end to evil, and there is, moreover, another means of putting an end to it, the asser­tion that violence will never cease is incorrect. The use of violence grows less and less and evidently must disappear.

“국가 폭력은 오직 사회에 악한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멈출 수 있다,” 라고 기존 세상 질서의 옹호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물론 이점에 대해서, 언제나 악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므로, 폭력은 결코 중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만일 압제자들이 언제나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며,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폭력에 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옳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폭력은 결코 중지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 그러나 전혀 반대로, 더 선한 자들이 더 악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한 자들이 더 선한 자들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은 결코 악을 끝내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게다가 그것들 끝낼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에, 폭력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폭력의 사용은 점점 더 줄어 들고, 분명히 반드시 사라진다.

But this will not come to pass, as som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imagine, through the oppressed becoming better and better under the influence of government (on the contrary, its influence causes their continual degradation), but through the fact that all men are constantly growing better and better of themselves, so that even the most wicked, who are in power, will become less and less wicked, till at last they are so good as to be incapable of using violence.

그러나 이런 일은 , 어떤 기존 질서의 옹호자들이 상상하듯이, 억압받는 자들이 정부의 영향 아래서 점점 더 선해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정부의 영향은 그들의 계속적인 악화의 원인이다), 모든 사람들은 끊임 없이 스스로가 점점 더 선해진다는 사실을 통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는 가장 악한 자들도, 점점 덜 악해 질 것이며, 마침내 그들이 폭력을 사용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선해질 것이다.

The progressive movement of humanity does not proceed from the better elements in society seizing power and making those who are subject to them better, by forcible means, as both conservatives and revolutionists imagine. It proceeds first and principally from the fact that all men in general are advancing steadily and undeviatingly toward a more and more conscious assimilation of the Christian theory of life; and secondly, from the fact that, even apart from conscious spiritual life, men are unconsciously brought into a more Christian attitude to life by the very process of one set of men grasping the power, and again being replaced by others.

인류애의 진보적 움직임은, 마치 보수주의자들이나 혁명주의자들이 상상하듯이, 사회의 선한 구성 요소들이 권력을 잡고서 그들에게 종속된 자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선하게 만듬으로써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첫번째로, 그리고 주로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적인 삶의 이론을 점점 더 의식적으로 흡수함을 향하여 꾸준히 그리고 이탈하지 않으며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나아가며; 두번째로, 심지어 의식적인 영적인 삶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한 무리의 살람들이 권력을 잡으며, 다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교체되는 과정에 의해서 삶에 대한 더욱 기독교적인 태도로 변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아간다.

The worse elements of society, gaining possession of power, under the sobering influence which always accom­panies power, grow less and less cruel, and become inca­pable of using cruel forms of violence. Consequently others are able to seize their place, and the same process of soft­ening and, so to say, unconscious Christianizing goes on with them. It is something like the process of ebullition. The majority of men, having the non-Christian view of life, always strive for power and struggle to obtain it. In this struggle the most cruel, the coarsest, the least Christian elements of society overpower the most gentle, well-dis­posed, and Christian, and rise by means of their violence to the upper ranks of society. And in them is Christ's prophecy fulfilled: " Woe to you that are rich! woe unto you that are full! woe unto you when all men shall speak well of you!" For the men who are in possession of power and all that results from it-glory and wealth-and have at­tained the various aims they set before themselves, recog­nize the vanity of it all and return to the position from which they came. Charles V., John IV., Alexander I., recognizing the emptiness and the evil of power, renounced it because they were incapable of using violence for their own benefit as they had done.

사회의 더 악한 요소들은, 권력의 소유를 확보하고, 언제나 권력을 동반하는 진지한 영향 아래서, 점점 잔인함이 약해지고, 그리고 잔인한 폭력의 형태들을 사용하기가 불가능 해진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되고, 그리고 똑같은 완화 과정, 말하자면, 무의식적인 기독교화가 그들 안에 진행된다. 그것은 마치 분출 과정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기독교적인 삶의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제나 권력을 추구하며 그것을 얻으려고 투쟁한다. 이러한 투쟁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거칠며, 가장 비기독교적인 사회의 요소들이 가장 온순하고, 친절하며, 기독교적인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들의 폭력으로 사회의 상류층으로 일어선다. 그리고 그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예언이 실현된다: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찐저 너희 배부른 자여!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왜냐하면 권력과 그로 연유되는 모든 것-부귀와 영화-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설정한 여러가지 목적들을 달성하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의 헛됨을 인식하고 그들이 온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찰스 5 , 4 , 알렉산더 1 세는 권력의 공허함과 악함을 인식하고서, 그들이 행했던 대로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기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였다.

But they are not the solitary examples of this recogni­tion of the emptiness and evil of power. Everyone who gains a position of power he has striven for, every general, every minister, every millionaire, every petty official who has gained the place he has coveted for ten years, every rich peasant who has laid by some hundred rubles, passes through this unconscious process of softening.

그러나 그들이 권력의 공허함과 악함에 대한 이런 인식에 대한 유일한 예들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던 권력의 지위를 얻으면, 어느 장군이나, 어느 장관이나, 어느 백만장자나, 10년동안 그가 탐을 내던 지위를 얻은 어느 하사관이나, 수백 루불을 저축한 어느 부유한 농부나, 이런 무의식적인 완화 과정을 겪는다.

And not only individual men, but societies of men, whole nations, pass through this process.

그리고 개인적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체 국민들도 이런 과정을 겪는다.

The seductions of power, and all the wealth, honor, and luxury it gives, seem a sufficient aim for men's efforts only so long as they are unattained. Directly a man reaches them he sees all their vanity, and they gradually lose all their power of attraction. They are like clouds which have form and beauty only from the distance; directly one as­cends into them, all their splendor vanishes.

권력에 대한 유혹, 그리고 모든 부귀, 명예, 그리고 그것이 주는 사치들은 오직 그들이 아직 얻지 못하였을 때에 사람들의 노력의 가치가 있는 충분한 목적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이 그것들에 도달하지 마자, 그는 그 모든 것의 헛됨을 깨닫는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들의 모든 권력에 대한 매력을 잃는다. 그것들은 마치 오직 멀리에서 만이 모습과 아름다움을 가지는 구름과 같다; 그가 그것들에 올라가자 마자, 그것들의 모든 화려함은 사라진다.

Men who are in possession of power and wealth, some­times even those who have gained for themselves their power and wealth, but more often their heirs, cease to be so eager for power, and so cruel in their efforts to obtain it.

권력과 부귀를 소유한 사람들, 때때로 심지어 그들 스스로 그들의 권력과 부귀를 획득한 사람들, 그러나 더욱 흔히 그들의 상속자들은, 권력에 대한 지독한 애착과 그것을 얻기 위한 그들에 노력에서 지독한 잔인함을 멈춘다.

Having learnt by experience, under the operation of Christian influence, the vanity of all that is gained by vio­lence, men sometimes in one, sometimes in several genera­tions lose the vices which are generated by the passion for power and wealth. They become less cruel and so cannot maintain their position, and are expelled from power by a rank of society lower in position, but higher in morality, raising thereby the average level of Christian consciousness in men. But directly after them again the worst, coarsest, least Christian elements of society rise to the top, and are subjected to the same process as their predecessors, and again in a generation or so, seeing the vanity of what is gained by violence, and having imbibed Christianity, they come down again among the oppressed, and their place is again filled by new oppressors, less brutal than former op­pressors, though more so than those they oppress. So that, although power remains externally the same as it was, with every change-of the men in power there is a constant increase of the number of men who have been brought by experience to the necessity of assimilating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and with every change-though it is the coarsest, cruelest, and least Christian who come into pos­session of power, they are less coarse and cruel and more Christian than their predecessors when they gained posses­sion of power.

기독교적인 영향의 작용 아래서, 폭력으로 얻어진 모든 것들이 허무함을 경험으로서 배웠으므로, 때로는 한 세대, 때로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사람들은 권력과 부귀에 대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악함들을 잃는다. 그들은 잔인함이 약해지고 그러므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위가 낮으나 도덕성은 높은 사회 계급에 의해서 권력으로부터 쫓겨난다, 그러므로서 사람들 안에서 기독교적 양심의 평균 수준을 높인다. 그러나 그들 뒤에 곧바로 다시 가장 악하고, 가장 거칠고, 가장 비기독교적인 시사회 요소들이 제일 위로 오른다, 그리고 그들을 앞서간 사람들처럼 똑같은 과정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두 세대 안에, 폭력으로 얻어진 것의 허무함을 깨닫고, 기독교를 흡수하여, 기들은 다시금 압박받는 사람들 사이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다시 새로운, 이전의 압제들 보다 덜 잔인한 압제자들에 의해서 채워진다. 그래서, 비록 권력은 외관상 옛날과 똑같이 남아 있지만, 권력에 있는 사람들이 변할 때마다, 경험에 의해서 기독교적인 삶의 개념을 흡수할 필요를 접하게 되는 사람들의 숫자의 끊임 없는 증가가 있다, 그리고 변할 때마다-비록 권력을 소유하게 되는 사람이 가장 거칠고, 가장 비 기독교적인 사람들이더라도, 그들이 권력을 소유하게 되면 그들의 선조들보다 덜 거칠어지고 덜 잔인해진다.

Power selects and attracts the worst elements of society, transforms them, improves and softens them, and returns them to society.

권력은 사회의 가장 최악의 요소들을 선택하며 끌어들여서, 그들을 변형하고, 그들을 개선하고 완화시켜서, 그들을 사회로 보낸다.

Such is the process by means of which Christianity, in spite of the hindrances to human progress resulting from the violence of power, gains more and more hold of men. Christianity penetrates to the consciousness of men, not only in spite of the violence of power, but also by means of it.

이러한 것이 바로, 기독교가, 권력의 폭력으로 초래되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방해들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방법이다. 기독교는, 권력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수단으로하여서 사람들의 의식속에 침투해 들어간다,

And therefore the assertion of the champions of the state, that if the power of government were suppressed the wicked would oppress the good, not only fails to show that that is to be dreaded, since it is just what happens now, but proves, on the contrary, that it is governmental power which enables the wicked to oppress the good, and is the evil most desirable to suppress, and that it is being gradually suppressed in the natural course of things.

그리고 그러므로, 만일 정부의 권력이 억제된다면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억누를 것이라는 국가들 옹호하는 자들의 주장은, 그것이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해야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억누르게 하는 것은 정부의 권력이며, 억제함이 바람직한 것은 악이며, 사물의 자연적인 과정에서 점차 억제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But if it be true that governmental power will disappear when those in power become so Christian that they renounce power of their own accord, and there are no men found willing to take their place, and even if this process is already going on," say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when will that come to pass? If, after eighteen hundred years, there are still so many eager for power, and so few anxious to obey, there seems no likelihood of its happening very soon-or indeed of its ever happening at all.

“그러나 만일 권력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독교인이 되어서 그들이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고, 그들의 자리를 가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지 못할 때, 정부 권력이 사라진다는 것이 사실이며, 그리고 비록 이 과정이 이미 진행되고 있더라도,”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이 말한다, “그것이 언제 일어 날 것인가? 만일, 1800년 뒤에, 여전히 권력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리고 복종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면, 그것이 가까운 장래에 발생할-또는 정말로 도대체 그것이 일어나기라도 할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Even if there are, as there have always been, some men who prefer renouncing power to enjoying it, the mass of men in reserve, who prefer dominion to subjection, is so great that it is difficult to imagine a time when the number will be exhausted.

“비록, 언제나 존재 했었던 것처럼, 권력을 향유하기 보다는 포기함을 선호하는 약간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규모가, 복종보다는 지배를 좋아하기때문에, 너무나 커서 언제 그 숫자가 줄어들 것인지 그 때를 상상하기 어렵다.

"Before this Christianizing process could so affect all men one after another that they would pass from the heathen to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and would voluntarily abandon power and wealth, it would be neces­sary that all the coarse, half-savage men, completely inca­pable of appreciating Christianity or acting upon it, of whom there are always a great many in every Christian society, should be converted to Christianity. More than this, all the savage and absolutely non-Christian peoples, who are so numerous outside the Christian world, must also be converted. And therefore, even if we admit that this Christianizing process will some day affect everyone, still, judging by the amount of progress it has made in eighteen hundred years, it will be many times eighteen centuries before it will do so. And it is therefore impos­sible and unprofitable to think at present of anything so impracticable as the suppression of authority. We ought only to try to put authority into the best hands."

“이 기독교화 과정이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서로 서로 영향을 미쳐서 그들이 이교에서 기독교적인 개념의 삶으로 변화할 것이며, 자진해서 권력과 부귀를 포기하기 전에, 모든 거칠고, 반야만적인 사람들, 기독교를 이해하거나 그것을 행하기에는 완전히 불가능한 사람들-이미 그들은 모든 기독교 사회에 너무나 많이 있다-이 반드시 기독교인으로 개종되어야 한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모든 야만적이고 절대적으로 비기독교적인 사람들이 기독교 세계의 바깥에 너무나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도 또한 반드시 개종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비록 이런 기독교화 과정이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지리라고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1800년동안 이룩된 진보의 양으로 판단해 보면, 그렇게 되려면, 몇번의 1800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현재 권력의 억제와 같은 실행불가능한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소득이 없다. 우리는 오직 권력을 가장 선한 사람들의 손에 넘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And this criticism would be perfectly just, if the transi­tion from one conception of life to another were only accomplished by the single process of all men, separately and successively, realizing, each for himself, the emptiness of power, and reaching Christian truth by the inner spiritual path. That process goes on unceasingly, and men are passing over to Christianity one after another by this inner way.

그리고 이 비난은 완전히 정당할 것이다, 만일 하나의 삶의개념이 다른 것으로 변천함이 오직 모든 사람들의 단 하나의과정으로만 성취된다면, 개별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각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의 공허함을 깨닫고, 그리고 내적인 영적인 길에 의해서 기독교적인 진리에 도달한다면. 그 과정은 그치지 않고 진행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내적인 방법으로 차례대로 기독교로 개종되어 간다.

But there is also another external means by which men reach Christianity and by which the transition is less gradual.

그러나 사람들이 기독교를 깨닫고 그것에 의한 변화가 덜 점진적인 또 다른 외적인 방법이 있다.

This transition from one organization of life to another is not accomplished by degrees like the sand running through the hourglass grain after grain. It is more like the water filling a vessel floating on water. At first the water only runs in slowly on one side, but as the vessel grows heavier it suddenly begins to sink, and almost instantaneously fills with water.

삶의 한 조직으로부터 다른 조직으로의 이러한 변천은 모래가 모래 시계를 한 알 한 알 통과하는 것처럼 천천히 이룩되지 않느다. 그것은 물 위에 떠있는 용기에 물을 채우는 것과 더 유사하다. 처음엔 물이 오직 천천히 측면으로 흐른다, 그러나 그 용기가 더욱 무거워짐에 따라서 그것은 갑자기 가라 않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의 순간적으로 물로 가득찬다.

It is just the same with the transitions of mankind from one conception-and so from one organization of life-to another. At first only gradually and slowly, one after another, men attain to the new truth by the inner spiritual way, and follow it out in life. But when a certain point in the diffusion of the truth has been reached, it is suddenly assimilated by everyone, not by the inner way, but, as it were, involuntarily.

그것은 인류가 한 개념-그리고 삶의 한 조직으로부터 그러하다-에서 다른 개념으로 변화하는 것과 정말 똑같다. 처음엔 오직 점진적이며 서서히, 한 사람씩, 사람들은 내적인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 새로운 진리에 도달하며 그것을 삶에서 실천한다. 그러나 진리의 전파가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갑자기 모든 사람들에게 내적인 방법이 아니라, 말하자면, 무의식적으로 흡수된다.

That is why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are wrong in arguing that, since only a small section of man­kind has passed over to Christianity in eighteen centuries, it must be many times eighteen centuries before all the remainder do the same. For in that argument they do not take into account any other means, besides the inward spiritual one, by which men assimilate a new truth and pass from one order of life to another.

그것이 왜 기존 질서의 옹호자가, 오직 인류의 작은 일부분 만이 1800년 동안 기독교로 변화되었으므로, 모든 나머지 사람들이 똑같이 되려면 여러번의 1800년이 걸려야 한다고 주장함이 틀린 이유이다. 왜냐 하면 그 논리에서, 내적 영적인 것은 물론, 그들은 다른 어떤 수단들을 고려하지 않지만, 그것들로서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흡수하고, 한 가지 삶의 질서에서 다른 것으로 이동한다.

Men do not only assimilate a truth through recognizing it by prophetic insight, or by experience of life. When the truth has become sufficiently widely diffused, men at a lower stage of development accept it all at once simply through confidence in those who have reached it by the inner spiritual way, and are applying it to life.

사람들은 진리를 오직 예언적인 통찰에 의하거나 삶의 경험에 의해서 인식함을 통하여 흡수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가 충분히 널리 전파되었을 때, 낮은 발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내적인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 그것에 도달한 사람들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 일제히 진리를 받아 들이며, 그것을 삶에 적용한다.

Every new truth, by which the order of human life is changed and humanity is advanced, is at first accepted by only a very small number of men who understand it through inner spiritual intuition. The remainder of mankind who accepted on trust the preceding truth on which the exist­ing order is based, are always opposed to the diffusion of the new truth.

제각기 새로운 진리들은, 그것으로 해서 인간의 삶의 질서가 변화되가 인류가 진보되는 것으로, 처음에는 오직 진리를 내적이며 영적인 직관으로 깨달은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된다. 기존 질서가 기초로하고 있는 이전의 진리를 덮어 놓고 수용한 나머지 인류들은, 언제나 새로운 진리의 전파에 반목한다.

But seeing that, to begin with, men do not stand still, but are steadily advancing to a greater recognition of the truth and a closer adaptation of their life to it, and secondly, all men in varying degrees according to their age, their education, and their race are capable of understanding the new truths, at first those who are nearest to the men who have attained the new truth by spiritual intuition, slowly and one by one, but afterward more and more quickly, pass over to the new truth. Thus the number of men who accept the new truth becomes greater and greater, and the truth becomes more and more comprehensible.

그러나, 먼저, 사람들은 정체하지 않고 꾸준히 진리에 대한 커다란 인식과 그것에 대한 그들의 삶의 더 근접한 적응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나이, 학력, 그리고 인종에 따라 다양한 정도의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는데, 처음에 영적인 직관으로 새로운 진리를 성취한 사람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천천히 그리고 하나씩, 그러나 뒤에는 점점 빨리, 새로운 진리로 넘어 간다. 그래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고, 그 진리는 점점 더 많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And thus more confidence is aroused in the remainder, who are at a less advanced stage of capacity for under­standing the truth. And it becomes easier for them to grasp it, and an increasing number accept it.

그리고 이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음에 있어서 조금 낮은 진보 단계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확신이 일깨워진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것을 파악하는것이 더욱 쉬워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 들인다.

And so the movement goes on more and more quickly, and on an ever-increasing scale, like a snowball, till at last a public opinion in harmony with the new truth is created, and then the whole mass of men is carried over all at once by its momentum to the new truth and establishes a new social order in accordance with it.

그리고 그래서 움직임은 점점 더 빨리 진행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로, 마치 눈덩이처럼, 마침내 새로운 진리와 일치하는 여론이 만들어 질 때까지, 그리고 그때 사람들 전체가 일체히 그런 동력으로 새로운 진리로 넘어가며 그와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한다.

Those men who accept a new truth when it has gained a certain degree of acceptance, always pass over all at once in masses. They are like the ballast with which every ship is always loaded, at once to keep it upright and enable it to sail properly. If there were no ballast, the ship would not be low enough in the water, and would shift its position at the slightest change in its conditions. This ballast, which strikes one at first as superfluous and even as hinder­ing the progress of the vessel, is really indispensable to its good navigation.

진리가 특정한 인정 범위를 얻었을 때 새로운 진리를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전체가 일제히 넘어오게 된다. 그들은 마치 모든 배가 언제나 싣고 있으면서, 동시에 배를 바로 세우기도 하고 배가 적절히 항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바닥짐과 같다. 만일 바닥짐이 없다면, 배가 충분히 물 아래에 위치하지 않아서, 상태들이 조금만 바뀌어도 그 위치를 바꾼다. 이 바닥짐은, 얼핏 보기에 배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처럼 불필요하게 느껴지겠만, 훌륭한 항해를 위해서 정말로 없어서는 안된다.

It is the same with the mass of mankind, who not indi­vidually, but always in a mass, under the influence of a new social idea pass all at once from one organization of life to another. This mass always hinders, by its inertia, frequent and rapid revolutions in the social order which have not been sufficiently proved by human experience. And it delays every truth a long while till it has stood the test of prolonged struggles, and has thoroughly permeated the consciousness of humanity.

그것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언제나 무리로서, 새로운 사회적 사상의 영향아래서, 일제히 하나의 삶의 조직에서 다른 것으로 변해가는 인류의 무리와 똑같다. 이들 무리들은 언제나, 그 자체의 무력감으로, 인간의 경험으로서 충분히 증명되지 않은 사회적 질서에로의 빈번하고 급속한 혁명들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된 투쟁들의 시험을 견뎌내고, 인류의 의식 속에 깊이 속속들이 스며들 때까지 제각기 진리를 오래동안 지연시킨다.

And that is why it is a mistake to say that because only a very small minority of men has assimilated Christianity in eighteen centuries, it must take many times as many centuries for all mankind to assimilate it, and that since that time is so far off, we who live in the present need not even think about it. It is a mistake, because the men at a lower stage of culture, the men and the nations who are represented as the obstacle to the realization of the Chris­tian order of life, are the very people who always pass over in masses all at once to any truth that has once been recog­nized by public opinion.

그리고 그것이, 1800년 동안 오직 극 소수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흡수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그것을 흡수하려면 몇세기 정도는 걸릴 것다, 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 못인 이유이다.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낮은 단계의 문명에 있는 사람들은, 삶의 기독교적인 질서의 실현에 장애로 대표되는 사람들과 국민들은, 언제나 일체히 여론에 의해서 한번 인정된 어떤 진리로 개종되는 바로 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And therefore the transformation of human life, through which men in power will renounce it and there will be none anxious to take their place, will not come only by all men consciously and separately assimilating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It will come when a Christian public opinion has arisen, so definite and easily comprehensible as to reach the whole of the inert mass, which is not able to attain truth by its own intuition, and therefore is always under the sway of public opinion.

그리고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변형은, 그들 해서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아무도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열망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기독교적 개념의 삶을 흡수함으로서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여론이 일어났을 때 올 것이며, 그것이 너무나 확정적이며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전체 무기력한 대중에게 도달되며,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직관으로서 진리를 얻을 수 없지만, 그러므로서, 언제나 여론의 영향 아래에 있다.

Public opinion arises spontaneously and spreads for hundreds and thousands of years, but it has the power of working on men by infection, and with great rapidity gains a hold on great numbers of men.

여론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수백 그리고 수천년 동안 확산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감염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사람들에게 뿌리 내리게 된다.

"But," say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even if it is true that public opinion, when it has attained a certain degree of definiteness and precision, can convert the inert mass of men outside the Christian world-the non-Christian races-as well as the coarse and depraved who are living in its midst, what proofs have we that this Christian public opinion has arisen and is able to replace force and render it unnecessary.

“그러나,” 기존 질서의 옹호자들이 말한다, “비록 여론이, 어느 정도의 확정성과 정확성을 획득하고, 기독교 세계의 바깥-비기독교적인 인류들-에 있는 무기력한 대중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거칠고 사악한 사람들까지 개종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기독교 여론이 발생하였으며 폭력을 대체하고 그것이 필요 없도록 할 수 있다는 어떤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We must not give up force, by which the existing order is maintained, and by relying on the vague and impalpable influence of public opinion expose Christians to the risk of being pillaged, murdered, and outraged in every way by the savages inside and outside of civilized society.

“우리는 무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것으로서 기존 질서가 유지되며, 모호하며 허구적인 여론의 영향에 의존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로하여금 어느 면에서나 문명사회의 안팎에서 야만인들에게 약탈당하며, 살해됨에 노출시킨다.

"Since, even supported by the use of force, we can hardly control the non-Christian elements which are always ready to pour down on us and to destroy all that has been gained by civilization, is it likely that public opinion could take the place of force and render us secure? And be­sides, how are we to find the moment when public opinion has become strong enough to be able to replace the use of force? To reject the use of force and trust to public opinion to defend us would be as insane as to remove all weapons of defense in a menagerie, and then to let loose all the lions and tigers, relying on the fact that the animals seemed peaceable when kept in their cages and held in check by red-hot irons. And therefore people in power, who have been put in positions of authority by fate or by God, have not the right to run the risk, ruining all that has been gained by civilization, just because they want to try an experiment to see whether public opinion is or is not able to replace the protection given by authority."

“왜냐하면, 심지어 폭력의 사용으로 뒷받침 되어도, 우리는 이미 우리들 위에 쏟아지고 문명으로서 이룩된 모든 것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비기독교적인 요소들을 거의 통제할 수강 없기 때문에, 여론이 폭력을 대신하고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가? 폭력의 사용을 거부하고 우리를 방어함을 여론에 맡기는 것은, 동물들은 그들 우리에 가두어 두고 벌걷게 단 인두로 제지할 때 온순해 보인다는 사실을 믿으며, 동물원에서 모든 방어 무기들을 제거하고, 모든 사자들 그리고 호랑이들을 풀어 놓는 것 만큼이나 미친 짓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운명이나 하나님에 의해서 권력의 지위들에 들어섰으므로, 문명으로 얻어진 모든 것을을 망치면서, 오직 여론이 권력에 의해서 주어진 보호를 대체할 수 있는지 없는지 보기위한 시험을 원하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을 감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A French writer, forgotten now, Alphonse Karr, said somewhere, trying to show the impossibility of doing away with the death penalty: "Que messieurs les assassins commencent par nous donner l'exemple." Often have I heard this bon mot repeated by men who thought that these words were a witty and convincing argument against the abolition of capital punishment. And yet all the erroneousness of the argument of those who consider that governments can­not give up the use of force till all people are capable of doing the same, could not be more clearly expressed than it is in that epigram.

이제는 잊혀졌지만, 프랑스 작가 알폰스 카르가, 사형제도를 폐지할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 어디에선가 말했다: “만일 살인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나는 이 말들이 사형 제도의 폐지에 맞서는 재치있고 그럴듯한 논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경구가 자주 인용되는 것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행할 때까지 정부들이 폭력의 사용을 포기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의 모든 오류는 그 경구에서 보다 분명히 표현될 수는 없었다.

"Let the murderers," say the champions of state violence, "set us the example by giving up murder and then we will give it up." But the murderers say just the same, only with much more right. They say: "Let those who have undertaken to teach us and guide us set us the example of giving up legal murder, and then we will imitate them." And they say this, not as a jest, but seriously, because it is the actual state of the case.

국가 폭력의 옹호자들이 말한다, “살인자들이 살인을 포기하는 본을 보인다면, 우리도 그것을 포기하겠다.” 그러나 살인자들도 정말 똑같이 말한다, 오직 훨씬 더 정당하게. 그들은 말한다: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려는 자들이 법적인 살인을 포기하는 예를 우리에게 보인다면, 우리도 그들을 따라할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말한다, 농담으로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We cannot give up the use of violence, because we are surrounded by violent ruffians." Nothing in our days hinders the progress of humanity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organization corresponding to its present develop­ment more than this false reasoning. Those in authority are convinced that men are only guided and only progress through the use of force, and therefore they confidently make use of it to support the existing organization. The existing order is maintained, not by force, but by public opinion, the action of which is disturbed by the use of force. So that the effect of using force is to disturb and to weaken the very thing it tries to maintain.

“우리는 폭력의 사용을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적인 악당들에 둘러 싸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의 어느 것도 이런 거짓된 논리 보다 더 현재의 발전에 부합하는 인류의 발전과 조직의 설립을 막지 못한다. 권력에 든 사람들은 사람들은 오직 폭력의 사용을 통하여 인도되며, 오직 진보한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은 기존 조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확신을 가지고 폭력을 활용한다. 기존 질서는 여론이 아니라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 왜냐하면 여론의 행위는 폭력의 사용으로 방해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을 사용하는 효과는 그것이 유지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방해하고 약화시킨다.

Violence, even in the most favorable case, when it is not used simply for some personal aims of those in power, always punishes under the one inelastic formula of the law what has long before been condemned by public opinion. But there is this difference, that while public opinion cen­sures and condemns all the acts opposed to the moral law, including the most varied cases in its reprobation, the law which rests on violence only condemns and punishes a cer­tain very limited range of acts, and by so doing seems to justify all other acts of the same kind which do not come under its scope.

폭력은, 심지어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도, 그것이 단순히 권력을 지닌 자들의 어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을 때라도, 언제나 오래 전에 여론에 의해서 지탄을 받은 일종의 비탄력적인 법 조항 아래서 처벌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있다, , 여론이 그 질책함에 있어서 가장 다양한 경우들을 포함하여, 도덕적인 법에 대치되는 모든 행위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한편, 폭력에 의존하는 법은 특정하게 매우 제한적인 범위의 행위들 만을 오직 정죄하고 처벌한다, 그리고 그렇게 행함으로써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 똑같은 종류의 모든 다른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것 같이 보인다.

Public opinion ever since the time of Moses has regarded covetousness, profligacy, and cruelty as wrong, and cen­sured them accordingly. And it condemns every kind of manifestation of covetousness, not only the appropriation of the property of others by force or fraud or trickery, but even the cruel abuse of wealth; it condemns every form of profligacy, whether with concubine, slave, divorced woman, or even one’s own wife; it condemns every kind of cruelty, whether shown in blows, in ill-treatment, or in murder, not only of men, but even of animals. The law resting on force only punishes certain forms of covetousness, such as rob­bery and swindling, certain forms of profligacy and cruelty, such as conjugal infidelity, murder, and wounding. And in this way it seems to countenance all the manifestations of covetousness, profligacy, and cruelty which do not come under its narrow definition.

모세 시대 이후로부터 여론은 탐욕, 방탕함, 그리고 잔혹함을 죄라고 여겼으며, 따라서 그것들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종류의 탐욕 행위,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폭력,사기, 또는 속임수로서 차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부의 잔인한 남용 마저도 정죄했다. 여론은 모든 형태의 방탕함을 정죄한다, , 노예, 이혼한 여자, 또는 자시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론은, 모든 종류의 잔인함, 주먹질, 부당한 대우, 또는 살인,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 까지도 정죄한다. 힘에 의존하는 법은 강도질과 사기행위처럼, 오직 특정한 형태들의 탐욕을 처벌하며, 결혼 생활의 탈선, 살인, 그리고 상해 같은 특정형태의 방탕함만을 처벌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러한 좁은 정의아래 들지 않는 탐욕, 방탕, 그리고 잔인 등의 모든 행위들은 묵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But besides corrupting public opinion, the use of force leads men to the fatal conviction that they progress, not through the spiritual impulse which impels them to the at­tainment of truth and its realization in life, and which con­stitutes the only source of every progressive movement of humanity, but by means of violence, the very force which, far from leading men to truth, always carries them further away from it. This is a fatal error, because it leads men to neglect the chief force underlying their life-their spiritual activity-and to turn all their attention and energy to the use of violence, which is superficial, sluggish, and most generally pernicious in its action.

그러나 부패한 여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진보함에 있어서, 진리의 달성과 그것을 삶에 실현하도록 사람들에게 강제하며, 인류의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의 유일한 근원을 구성하는 영적인 자극을 통해서가 아니라, 폭력을 통해서, 사람들을 진리에 이르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바로 그 힘에 의해서, 사람들이 진보한다는 치명적인 확신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치명적 오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깔려 있는 중요한 힘-영적인 활동-을 간과하도록 하며 그들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폭력으로 사용으로 돌리며, 그것의 행함은 피상적이며 나태하고, 가장 일반적으로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They make the same mistake as men who, trying to set a steam engine in motion, should turn its wheels round with their hands, not suspecting that the underlying cause of its movement was the expansion of the steam, and not the motion of the wheels. By turning the wheels by hand and by levers they could only produce a semblance of move­ment, and meantime they would be wrenching the wheels and so preventing their being fit for real movement.

그들은, 마치 증기 엔진을 가동하려는 사람이, 그 움직임의 이면에 깔려 있는 이유는 바퀴의 움직임이 아니라, 증기의 팽창임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손으로 바퀴들을 돌려햐 하는 사람들의 실수와 똑같다. 손과 지렛대들을 가지고서 바퀴들을 돌림으로써, 그들은 움직이는 효과를 만들어 내어서, 잠시동안 그들은 억지로 바퀴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것들의 실제 움직임에 합당함을 방해할 것이다.

That is just what people are doing who think to make men advance by means of external force.

그것이 바로 외적인 힘으로서 사람들을 전진하게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They say that the Christian life cannot be established without the use of violence, because there are savage races outside the pale of Christian societies in Africa and in Asia (there are some who even represent the Chinese as a danger to civilization), and that in the midst of Christian societies there are savage, corrupt, and, according to the new theory of heredity, congenital criminals. And vio­lence, they say, is necessary to keep savages and criminals from annihilating our civilization.

기독교 사회들의 울타리 바깥인 아프리카와 아시아(어떤 사람들은 중국을 문명에 대한 위험한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다)에는 야만 인종이 살고 있으며, 기독교 사회들의 가운데서도 야만적이며 부패하고, 그리고 새로운 유전의 이론에 따르면, 선천적 범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적인 삶은 폭력이 없이는 확립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폭력은, 야만인들과 범죄자들이 우리의 문면을 멸망시킴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But these savages within and without Christian society, who are such a terror to us, have never been subjugated by violence, and are not subjugated by it now. Nations have never subjugated other nations by violence alone. If a nation which subjugated another was on a lower level of civilization, it has never happened that it succeeded in introducing its organization of life by violence. On the contrary, it was always forced to adopt the organization of life existing in the conquered nation. If ever any of the nations conquered by force have been really subjugated, or even nearly so, it has always been by the action of public opinion, and never by violence, which only tends to drive a people to further rebellion.

그러나 기독교 사회의 안과 바깥에 있는 이들 야만인들은, 우리에게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지만, 폭력에 의해서 결코 진압된 적이 없으며, 현재도 그것으로 진압되지 않는다. 국가들이 다른 국가들을 결코 폭력만으로서 정복하지 못했다. 만일 다른 나라에 의해서 정복당한 나라가 문명이 낮다면, 그들의 삶의 조직을 폭력의 힘으로 들여 놓음에 성공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언제나 정복당한 나라에 존재하는 삶의 조직을 채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힘에 의해 정복당한 나라가 정말로 복종당했거나, 거의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어제나 여론의 행동에 의해서였으며, 결코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폭력은 오직 사람들로하여금 지속적인 반항으로 몰고 가기 쉽기 때문이다.

When whole nations have been subjugated by a new religion, and have become Christian or Mohammedan, such a conversion has never been brought about because the authorities made it obligatory (on the contrary, violence has much oftener acted in the opposite direction), but because public opinion made such a change inevitable. Nations, on the contrary, who have been driven by force to accept the faith of their conquerors have always remained antagonistic to it.

전체 국민이 새로운 종교에 의해서 지배당해서, 기독교나 회교국이 되었을 때, 그러한 개종은 결코 당국들이 그것을 의무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반대로 폭력은 훨씬 흔하지만 정반대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론이 그러한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민들은, 그들의 정복자들의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힘에 의해서 강요당했들 때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남아 있었다.

It is just the same with the savage elements existing in the midst of our civilized societies. Neither the increased nor the diminished severity of punishment, nor the modifi­cations of prisons, nor the increase of police will increase or diminish the number of criminals. Their number will only be diminished by the change of the moral standard of society. No severities could put an end to duels and vendettas in certain districts. It spite of the number of Tcherkesses executed for robbery, they continue to be robbers from their youth up, for no maiden will marry a Tcherkess youth till he has given proof of his bravery by carrying off a horse, or at least a sheep. If men cease to fight duels, and the Tcherkesses cease to be robbers, it will not be from fear of punishment (indeed, that invests the crime with additional charm for youth), but through a change in the moral standard of public opinion. It is the same with all other crimes. Force can never suppress what is sanctioned by public opinion. On the contrary, public opinion need only be in direct opposition to force to neutralize the whole effect of the use of force. It has always been so and always will be in every case of martyr­dom.

그것은 우리의 문명화된 사회들의 한 가운데 존재하는 야만적인 요소들에도 정말 똑같다. 늘어 나거나 줄어 드는 처벌의 강도, 감옥의 변화, 또는 경찰의 증강도 범죄자의 숫자가 늘어나게 하거나 줄어들게 하지 못한다. 그들의 숫자는 오직 사회의 도덕적 기준의 변화에 따라서 감소할 것이다. 어떤 처벌들도 특정 지역들에서의 결투들이나 피의 복수극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 강도 행위로 인해서 처형당한 체르키스의 숫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청년기 이후에 계속해서 강도들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을 훔쳐서 달아나는 용감함으로서 증명하지 않는다면, 어떤 처녀들도 체르키스 청년들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결투로서 싸움을 중지하거나, 체르키스인들이 강도들이 되는 것을 중지한다면, 그것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사실, 처벌은 젊은이들에게 또 다른 매력으로 미화한다), 여론의 도덕적인 표준이 변하였음을 통해서일 것이다. 다른 모든 범죄들에도 그것은 똑같다. 폭력은 여론이 금지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한다. 반대로, 여론은 오직 폭력 사용의 전체 효과를 중화시키도록 강제하는 직접적인 반대편에 있을 필요가 있다. 여론은 모든 순교들의 경우에 언제나 그러 했었고,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What would happen if force were not used against hostile nations and the criminal elements of society we do not know. But we do know by prolonged experience that neither enemies nor criminals have been successfully sup­pressed by force.

만일 적대국들과 사회의 범죄적인 요소들에 대항하여 힘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는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되는 경험에 의해서, 적들도 범죄자들도 힘을 사용으로 성공적으로 억제된 것을 알지 못한다.

And indeed how could nations be subjugated by violence who are led by their whole education, their traditions, and even their religion to see the loftiest virtue in warring with their oppressors and fighting for freedom? And how are we to suppress by force acts committed in the midst of our society which are regarded as crimes by the government and as daring exploits by the people?

그리고 그들의 전체 교육, 그들의 전통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압제자들과 전쟁하며 자유를 위해 싸움에 있어서 숭고한 도덕을 바라는 그들의 종교들에 의해서 지탱되는 국민들이 정말 어떻게 폭력에 의해서 지배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정부에 의한 범죄들로서, 그리고 사람들의 용감한 영웅적 업적들로서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한가운데서 저질러지는 행위들을 힘으로서 억제할 수 있는가?

To exterminate such nations and such criminals by vio­lence is possible, and indeed is done, but to subdue them is impossible.

그러한 국가들과 그러한 범죄자들을 폭력으로 전멸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정말로 이루어 진다, 그러나 그들을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sole guide which directs men and nations has always been and is the unseen, intangible, underlying force, the resultant of all the spiritual forces of a certain people, or of all humanity, which finds its outward expression in pub­lic opinion.

사람들과 국가들을 이끌어 온 유일한 지침은 언제나 존재하였고 존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내적인 힘이며, 즉 특정한 사람들 또는 모든 인류의 모든 영적인 힘들의 결과로서, 그것은 그 외적인 표현을 여론에서 찾는다.

The use of violence only weakens this force, hinders it and corrupts it, and tries to replace it by another which, far from being conducive to the progress of humanity, is detri­mental to it.

폭력의 사용은 오직 이런 힘을 약화시키며, 방해하고, 부패시키며, 그리고 인류의 진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로움이 될 뿐인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체 하려고 한다.

To bring under the sway of Christianity all the savage nations outside the pale of the Christian world-all the Zulus, Mandchoos, and Chinese, whom many regard as savages-and the savages who live in our midst, there is only one means. That means is the propagation among these nations of the Christian ideal of society, which can only be realized by a Christian life, Christian actions, and Christian examples. And meanwhile, though this is the one only means of gaining a hold over the people who have remained non-Christian, the men of our day set to work in the directly opposite fashion to attain this result.

기독교 세계의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야만 민족들-모든 줄루인, 만주인, 그리고 중국인들, 그들을 많은 사람들은 야만인들로 부른다-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살고 있는 야마인들을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들게 하려면,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 방법은 이런 민족들 사이에 기독교적인 사회 이상을 전파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기독교적인 삶, 기독교적인 행위들, 그리고 기독교적인 모범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한편, 비록 이것이 비기독교인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영향을 확보하는유일한 방법이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결과를 얻고자 함에 있어서 정 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To bring under the sway of Christianity savage nations who do not attack us and whom we have therefore no excuse for oppressing, we ought before all things to leave them in peace, and in case we need or wish to enter into closer relations with them, we ought only to influence them by Christian manners and Christian teaching, setting them the example of the Christian virtues of patience, meekness, endurance, purity, brotherhood, and love. Instead of that we begin by establishing among them new markets for our commerce, with the sole aim of our own profit; then we appropriate their lands, i.e., rob them; then we sell them spirits, tobacco, and opium, i.e., corrupt them; then we establish our morals among them, teach them the use of violence and new methods of destruction, i.e., we teach them nothing but the animal law of strife, below which man can­not sink, and we do all we can to conceal from them all that is Christian in us. After this we send some dozens of missionaries prating to them of the hypocritical absurdities of the Church, and then quote the failure of our efforts to turn the heathen to Christianity as an incontrovertible proof of the impossibility of applying the truths of Christianity in practical life.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억압할 아무런 구실이 없는 야만 민족들을 기독교의 영향아래 들어 오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들을 평화롭게 두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들이 필요하거나 그런 관계를 가지려면, 우리는 오직 그들에게 기독교적인 태도들과 기독교적인 가르침으로 영향을 주어야 하며, 인내, 온유함, 오래참음, 순결, 형제애, 그리고 사랑 같은 기독교의 미덕들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함 대신에 우리는 그들 안에 우리의 상업을 위한 새로운 시장들을 건설함으로 시작한다, 오직 우리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그리고 그들의 토지들을 차지한다, , 그것들을 강탈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을 판다, , 그들을 부패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도덕을 그들 안에 확립시키며, 그들에게 폭력의 사용과 새로운 파괴 방법들을 가르친다, , 더 이상 사람이 가라 앉을 수 없는 오직 투쟁의 동물적인 법을 그들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기독교적인 모든 것을 그들로부터 숨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이런 뒤에, 우리는 그들에게 교회의 위선적인 헛소리들을 지껄이기 위해서 수십명의 선교사들을 보낸다, 그리고 나서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들의 실패를 실제 삶에 있어서 기독교 진리들을 적용함이 불가능하다는 논의할 여지가 없는 증명으로 인용한다.

It is just the same with the so-called criminals living in our midst. To bring these people under the sway of Chris­tianity there is one only means, that is, the Christian social ideal, which can only be realized among them by true Christian teaching and supported by a true example of the Christian life. And to preach this Christian truth and to support it by Christian example we set up among them prisons, guillotines, gallows, preparations for murder; we diffuse among the common herd idolatrous superstitions to stupefy them; we sell them spirits, tobacco, and opium to brutalize them; we even organize legalized prostitution; we give land to those who do not need it; we make a dis­play of senseless luxury in the midst of suffering poverty; we destroy the possibility of anything like a Christian public opinion, and studiously try to suppress what Christian public opinion is existing. And then, after having ourselves assiduously corrupted men, we shut them up like wild beasts in places from which they cannot escape, and where they become still more brutalized, or else we kill them. And these very men whom we have corrupted and brutalized by every means, we bring forward as a proof that one cannot deal with criminals except by brute force.

우리들 가운데 살고 있는 소위 범죄자들도 정말 똑같다. 이 사람들을 기독교의 영향 아래로 들게 하려면 오직 한가지 방법, , 기독교적 사회적 이상 뿐으로서, 이것은 오직 진정한 기독교적 가르침에 의해서 그들 안에 실현될 수 있으며 기독교적 삶의 진정한 본에 의해서 뒷받침 된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적 진리를 설교하고 그것을 기독교적인 본에 의해서 뒷받침하려고, 우리는 그들 안에서 감옥들, 단두대, 교수대, 살인의 준비를 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무리들을 마비시키려고 우상 숭배하는 미신들을 퍼뜨린다; 우리는 그들에게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을 팔아서 그들을 짐승으로 만든다; 우리는 심지어 법의 비호를 받는 매춘을 조직한다;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토지를 준다; 우리는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지각없는 사치를 자랑한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여론같은 것은 무엇인든지 파괴하려고 하며, 존재하는 기독교적인 여론을 계획적으로 억압하려고 한다. 그리고나서, 우리 자신은 사람들을 열심히 부패하게 만들고서, 탈출 할 수 없는 곳에 그들을 야생의 짐승들 처럼 가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더욱더 짐승처럼 되어가거나, 우리는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부패하게 만들고 바로 이 사람들을, 우리는 잔인한 폭력이 아니고서는 다룰 수 없는 범죄자들이라는 증거로서 제출한다.

We are just like ignorant doctors who put a man, recov­ering from illness by the force of nature, into the most unfavorable conditions of hygiene, and dose him with the most deleterious drugs, and then assert triumphantly that their hygiene and their drugs saved his life, when the patient would have been well long before if they had left him alone.

우리는 정말로 무식한 의사들 같아서 자연의 힘으로 병에서 회복하는 사람을 가장 열악한 건강 상태로 몰아 넣으며, 그에게 가장 해로운 독약들을 먹이며, 그리고나서 환자가 그대로 놓아 두었다면 오래전에 낳았을 것을 그들의 건강학과 그들의 의약들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Violence, which is held up as the means of supporting the Christian organization of life, not only fails to produce that effect, it even hinders the social organization of life from being what it might and ought to be. The social organization is as good as it is not as a result of force, but in spite of it.

기독교적인 삶의 조직을 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장되는 폭력은, 그런 효과를 만들어 냄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회적인 삶의 조직의 가능성과 당연성을 저해한다. 사회 조직은 폭력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없을 때에가 좋다.

And therefore the champions of the existing order are mistaken in arguing that since, even with the aid of force, the bad and non-Christian elements of humanity can hardly be kept from attacking us, the abolition of the use of force and the substitution of public opinion for it would leave humanity quite unprotected.

그리고 기존 질서의 옹호자들은, 심지어 폭력의 도움으로라도, 인류의 악하며 비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우리를 공격함을 거의 막을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의 사용의 폐지와 그것을 여론으로 대체함이 인류를 심히 보호받지 못하게 내버려둔다고 주장함은 잘못된 것이다.

They are mistaken, because force does not protect human­ity, but, on the contrary, deprives it of the only possible means of really protecting itself, that is, the establishment and diffusion of a Christian public opinion. Only by the suppression of violence will a Christian public opinion cease to be corrupted, and be enabled to be diffused with­out hindrance, and men will then turn their efforts in the spiritual direction by which alone they can advance.

그들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폭력은 인류를 보호하지 못하며, 반대로 인류가 정말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 , 기독교 여론의 확립과 전파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오직 폭력의 억제에 의해서만이 기독교 여론은 부패함을 중지하고, 방해받음이 없이 전파되게 될 것이며,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 그들이 오직 전진할 수 있는 영적인 방향에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But how are we to cast off the visible tangible pro­tection of an armed policeman, and trust to something so intangible as public opinion? Does it yet exist? More­over, the condition of things in which we are living now, we know, good or bad; we know its shortcomings and are used to it, we know what to do, and how to behave under present conditions. But what will happen when we give it up and trust ourselves to something invisible and intan­gible, and altogether unknown?"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무장한 경찰관의 보며 만질 수 있는 보호를 던져버리고, 여론 같은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에 의존할 수 있는가? 그것이 정말 존재하는가? 게다가, 좋거나 나쁘거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으며, 알고 있는 상황; 우리는 그것의 결점을 알고 있으며 그것에 적응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고, 현재의 상황들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보이지 않으며 만질 수 없으며, 전적으로 미지인 것에 맏긴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The unknown world on which they are entering in renouncing their habitual ways of life appears itself as dreadful to them. It is all very well to dread the unknown when our habitual position is sound and secure. But our position is so far from being secure that we know, beyond all doubt, that we are standing on the brink of a precipice.

그들이 그들의 삶의 습관적인 방법들을 포기하고 들어가는 미지의 세계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 두려운 것이다. 우리의 습관적인 지위가 건전하고 안전할 때는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는 안전한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가 벼랑 끝에 서있는 것을 알고 있다.

If we must be afraid let us be afraid of what is really alarming, and not what we imagine as alarming.

만일 우리가 반드시 두려워 해야 한다면, 정말로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고, 우리가 두렵다고 상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Fearing to make the effort to detach ourselves from our perilous position because the future is not fully clear to us, we are like passengers in a foundering ship who, through being afraid to trust themselves to the boat which would carry them to the shore, shut themselves up in the cabin and refuse to come out of it; or like sheep, who, terrified by their barn being on fire, huddle in a corner and do not go out of the wide-open door.

미래가 우리에게 완전히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위험스런 처지에서 자신들을 격리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두려워 한다면, 우리는 마치 가라 앉는 배의 승객들과 같아서, 그들을 육지로 데려다 줄 배에 자신들을 맏기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들을 선실에 가두어 두고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아니면, 그들의 헛간이 불타고 있어서 두려워하는 양들과 같아서, 구석에 떼지어 모셔서 활짝 열린 문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We are standing on the threshold of the murderous war of social revolution, terrific in its miseries, beside which, as those who are preparing it tell us, the horrors of 1793 will be child's play. And can we talk of the danger threaten­ing us from the warriors of Dahomey, the Zulus, and such, who live so far away and are not dreaming of attacking us, and from some thousands of swindlers, thieves, and murderers, brutalized and corrupted by ourselves, whose number is in no way lessened by all our sentences, prisons, and executions?

우리는 사회적 혁명의 살인적인 문지방에 서있다, 그 불행들에 대해서두려워 한다, 게다가, 그들이 우리에게 말한 바대로, 1793년의 공포는 어린이 장난일 뿐이다. 그리고 너무나 멀리 살고 있으며 우리를 공격하려 꿈꾸지 않는 다호미, 줄루족 등으로부터, 그리고 수천명의 사기꾼들, 도둑들, 및 살인자 들로부터, 그들은 우리 자신들에 의해서 짐승처럼 변하고 타락하여서, 그들의 숫자는 결코 우리의 모든 선고들, 감옥들, 그리고 처형들로서도 결코 감소되지 않게 되어버린 그들에 의한 위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Moreover this dread of the suppression of the visible protection of the policeman is essentially a sentiment of townspeople, that is, of people who are living in abnormal and artificial conditions. People living in natural conditions of life, not in towns, but in the midst of nature, and carrying on the struggle with nature, live without this pro­tection and know how little force can protect us from the real dangers with which we are surrounded. There is something sickly in this dread, which is essentially depend­ent on the artificial conditions in which many of us live and have been brought up.

게다가 가시적인 경찰관의 보호를 억제함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도시 사람들의, , 비정상적이며 인위적인 상황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이다. 삶의 자연적인 상황하에서, 도시가 아니라, 자연의 한 가운데서 살고 있으며, 자연과 투쟁을 해 나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보호 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가 둘러 싸인 사실적인 위험들로부터 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보호하기 어려운지 알고 있다. 이 두려움에는 어떤 병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성장해온 인위적인 상황들에 기인하고 있다.

A doctor, a specialist in insanity, told a story that one summer day when he was leaving the asylum, the lunatics accompanied him to the street door. "Come for a walk in the town with me?" the doctor suggested to them. The lunatics agreed, and a small band followed the doctor. But the further they proceeded along the street where healthy people were freely moving about, the more timid they became, and they pressed closer and closer to the doctor, hindering him from walking. At last they all be­gan to beg him to take them back to the asylum, to their meaningless but customary way of life, to their keepers, to blows, strait waistcoats, and solitary cells.

의사, , 정신병 전문의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느 여름날, 그가 정신 병원을 떠나고 있을 때, 정신 병자들이 거리로 나가는 문으로 그를 따라갔다. “나와 함께 시내로 걸어 보겠소?” 의사가 그에게 물었다. 정신 병자들은 동의했다, 그리고 몇 명이 의사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건강한 사람들이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는 거리를 따라서 전진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겁이 났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의사에게로 다가 붙어서 그가 걸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의사에게 정신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들의 무의미하며,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그들의 감시자에게, 매맞는 곳으로, 단순한 환자복, 그리고 독방들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This is just how men of today huddle in terror and draw back to their irrational manner of life, their factories, law courts, prisons, executions, and wars, when Christianity calls them to liberty, to the free, rational life of the future com­ing age.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그들에게 자유로, 자유로우며 이성적인 다가오고 있는 시대의 미래의 삶으로 초대하고 있을 때, 오늘날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몰려 다니며 그들의 비이성적인 삶의 방식, 그들의 공장들, 법정들, 처형장들, 전쟁들로 되돌아 가고 있는 모습이다.

People ask, "How will our security be guaranteed when the existing organization is suppressed? What precisely will the new organization be that is to replace it? So long as we do not know precisely how our life will be organized, we will not stir a step forward."

사람들은 묻는다, “기존의 조직이 폐지된다면 우리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조직될 것인가를 정확히 모르는 한에선,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뗄 수가 없다.”

An explorer going to an unknown country might as well ask for a detailed map of the country before he would start.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가도 마찬가지로 그가 출발하기 전에 그 지방에 대한 자세한 지도를 요구할 것이다.

If a man, before he passed from one stage to another, could know his future life in full detail, he would have nothing to live for. It is the same with the life of human­ity. If it had a programme of the life which awaited it before entering a new stage, it would be the surest sign that it was not living, nor advancing, but simply rotating in the same place.

만일 한 사람이,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그의 미래의 삶을 완전히 알 수 있다면, 그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기 전에 인류에게 기다리고 있는 삶의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것은 살고 있지 않으며, 전진하지도 않고, 단순히 똑 같은 장소에서 쳇바퀴 돌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시일 것이다.

The conditions of the new order of life cannot be known by us because we have to create them by our own labors. That is all that life is, to learn the unknown, and to adapt our actions to this new knowledge.

삶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상황들은 그것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들에 의해서 창조해야 하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이 삶의 전부이다, 즉 미지 세계로부터 배우고, 이 새로운 지식에 우리의 행위들을 적응 시키는 것이다.

That is the life of each individual man, and that is the life of human societies and of humanity.

그것이 바로 개개의 사람의 삶이며, 인간의 사회들 및 인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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