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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3. Do not promise anything on oath to anyone. 3. 누구에게 맹세로서 무엇이든 약속하지 말라.

Immediately after the second commandment comes again a reference to the ancient law, and the third commandment is set forth (Matt. v. 33-7): 'Again, ye have heard that it hath been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forswear thyself, but shalt perform unto the Lord thine oaths [Lev. xix. 12; Deut. xxiii. 21]: but I say unto you, Swear not at all; n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n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neithe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Neither shalt thou swear by thy head, because thou canst not make one hair white or black. But your speech shall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is of the evil one.'

제 2 계명에 바로 뒤 이어서 다시 옛 율법에 대한 참조가 나타난다, 그리고 제 3의 계명이 제시된다 (마태복음 5장 33-7절):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레위기19장 12절, 신명기 23장 21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니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나느니라.’

This passage when I had read it before had always perplexed me. It did so, not by its obscurity (as did the passage about divorce), nor by contra­dicting other passages (as did the sanction of anger with a cause), nor by the difficulty of fulfilling it (as with the passage about offering the other cheek); on the contrary, it perplexed me by its clearness, simplicity, and ease. Side by side with rules the profundity and importance of which terrified and touched me, one suddenly found such an un­necessary, empty, easy rule, which was of no conse­quence to me or to others. As it was, I swore neither by Jerusalem, nor by God, nor by anything else, and it cost me no effort to abstain: besides which it seemed to me that whether I swore or not could have no importance to anyone. And wishing to find an explanation of this rule which perplexed me by its ease, I turned to the interpreters; and this time the interpreters really helped me.

이 구절은 이 전에 내가 그것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의 모호함도(이혼에 관한 구절이 그랬듯이), 다른 구절들과의 모순도(이유있는 분노의 허락에서 그랬듯이), 그것을 이행함의 어려움도(다른 뺨을 내미는 구절처럼)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그 명료함, 단순함, 그리고 편안함으로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심오함과 중요함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감동을 주는 규칙들과 나란히 있는, 우리가 갑자기 그토록 불필요하며, 공허하고, 쉬운 규칙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은, 나는 예루살렘이나, 하나님 이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삼가는데 아무런 노력도 들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기로는 내가 맹세하든지 말든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너무 쉬운 바람에 나를 당혹하게 하는 이 규칙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나는 주석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 번에는 정말로 주석가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They all see in these words a confirmation of the third commandment of Moses- not to swear by the name of God. They explain these words to mean that Christ, like Moses, forbids us to pronounce God's name in vain. But besides this the interpreters also explain that this law of Christ's- not to swear-  is not always obligatory and does not relate at all to an oath of loyalty which each citizen gives to those who hold authority; and texts are selected from Holy Writ not to confirm the direct meaning of Christ's injunction, but to prove that it may and should be disobeyed.

그들은 모두 이 말에서 모세의 제 3 계명-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 을 확인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그들은 이 말들이 그리스도가, 모세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고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서 주석가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이 율법- 맹세하지 말라- 은 언제나 의무적인 것은 아니며,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각각의 시민이 행하는 충성의 서약과는 전혀 관계 없으며, 원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의 명백한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행할 수 도 있고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택된다고 설명한다.

It is said that Christ himself confirmed an oath in a court of law when in reply to the High Priest's words, 'I adjure thee by the living God', he replied, 'Thou hast said'. It is said that the apostle Paul called God to witness the truth of his words, which is evidently the same as an oath; it is said that oaths were enjoined by the law of Moses and that God did not abolish these oaths; it is said that it is only vain, pharisaical, hypocritical oaths that are abolished.

그리스도 자신도 법정에서 ‘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코 너에게 명한다’는 대제사장의 말에, ‘너희는 말하였다’라고 대답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말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불렀으며, 그것은 명백히 맹세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맹세는 모세가 명령하였으며, 하나님은 이 맹세들을 폐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헛되며,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적인 맹세들이 폐지된다고 말한다.

And on understanding the meaning and aim of these explanations I understood that Christ's in­junction concerning oaths is not at all so insignifi­cant, easy, and unimportant as it had seemed to me when, among the oaths prohibited by Christ, I had not included oaths demanded by the State.

그리고 이런 설명들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았을 때, 국가가 요구하는 맹세들을 내가 포함하지 않았을 때 나에게 느껴졌던 것보다, 맹세에 관한 그리스도의 금지가 결코 사소 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깨달았다.

And I asked myself: Is it not said here that the oath is also forbidden for which the Church com­mentators are so anxious to make an exception? Is not the oath here forbidden, that very oath without which the separation of men into nations is im­possible and without which a military class is im­possible? Soldiers are those who do all the violence, and they call themselves 'the sworn'. Were I to ask the Grenadier how he solves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Gospels and the military code he would tell me that he has been sworn in: that is to say, has taken an oath on the Gospels. Such replies have always been given me by military men. So necessary is an oath for the organization of the terrible evil which is produced by violence and war, that in France, where Christianity is officially re­jected, the oath is nevertheless retained. Indeed if Christ had not said 'Swear not at all', he ought to have said it. He came to destroy evil, and had he not abolished the oath this enormous evil would have remained in the world. Perhaps it will be said that in the time of Christ that evil was not noticeable. But this is untrue: Epictetus and Seneca spoke about not taking an oath to anyone; in the laws of Manu that rule is found. Why should I say that Christ did not see this evil? And especially when he said this so directly, clearly, and even minutely.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도 교회의 주석가들이 그토록 애써서 예외를 두고 있는 맹세도 또한 금지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도 맹세는 금지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로 그 맹세가 없다면 사람들을 국가들로 나눌 수도 없고, 그것이 없다면 군인 계급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군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맹세한 자’라고 부른다. 만일 내가 근위병에게 복음서와 군법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맹세를 하였다고, 즉, 복음서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폭력과 전쟁에 의해서 생산되는 무서운 악의 조직을 위해서 맹세가 너무나 필요하므로, 프랑스에서는 비록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맹세가 강요되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렇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악을 멸망시키러 세상에 왔다, 그런데도 그가 맹세를 폐지하지 않았다면, 이 엄청난 악은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의 시절에는 그런 악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에픽테토스와 세네카는 어느 누구에게도 맹세하지 말 것에 대해 말했다; 마누 법전에도 이 같은 명령이 보인다. 내가 어찌하여 그리스도가 이런 악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특히 그가 이런 명령을 그토록 직접적이고, 명료하며, 심지어는 세밀하게 말했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He said: Swear not at all. That expression is as simple, clear, and indubitable as the words 'Judge not and condemn not' and as little susceptible of misinterpretation, especially as it is added in con­clusion, that anything demanded of you beyond yes and no comes from the source of evil.

그가 말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이 표현은 ‘심판하지 말라 그리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처럼 단순하고, 명료하며, 확실할 뿐만 아니라, 특히 결론적으로, ‘예’ 그리고 ‘아니오’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악의 근원으로부터 나온다고 덧붙이는 것과 같이, 오해의 여지가 없다.

Really, if Christ's teaching is that one should always obey the will of God, how can a man swear to obey the will of man? The will of God may not coincide with the will of man. Indeed, in this very passage Christ says that very thing. He says, Swear not by thy head, for not only thy head but every hair of it, is in God's power. The same is said in the Epistle of James.

사실, 만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어찌 사람의 의지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와 일치되지 않는다. 실제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자신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말한다.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At the end of his Epistle, in conclusion, the Apostle James says (ch. v. 12): But above all things, my brethren, swear not, neither by the heaven, nor by the earth, nor by any other oath: but let your yea be yea, and your nay, nay; that ye fall not under judgment. The Apostle says plainly why one should not swear: the oath by itself appears innocent, but from it people fall under judgment, and therefore swear not at all. How could what is said both by Christ and by the Apostle be said more plainly?

결론적으로, 사도 야고보는 그의 서한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야고보서 5장 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정함을 면하라.’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한다: 맹세 그 자체는 죄가 아닐지 모르나 맹세를 통해서 우리는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 그리스도와 사도가 말한 것 이상으로 더 분명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But I had been so entangled that I long asked myself in astonishment: Can it be that it means what it does mean? How is it that we are all made to swear on the Gospels? It is impossible!

그러나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오랫동안 놀라움 속에서 스스로 물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진정한 뜻일 수 있을까? 어찌하여 우리 모두가 복음서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But I had already read the commentators and had seen how this impossibility was accomplished. As with the explanations of the words, Judge not, do not be angry with anybody, do not break the bond of husband and wife, so also here. We have established our ways of life, we like them and wish to consider them sacred. Then comes Christ, whom we consider to be God, but we do not wish to aban­don our ways of life. What are we to do? Where possible, slip in the words without a cause, and reduce the rule against anger to nothing; where possible, like the most unscrupulous of unjust judges, inter­pret the meaning of the articles of the law so as to make it mean the very reverse, and that instead of a command never to divorce one's wife it should mean that one may divorce her. And where, as in the case of the words Judge not, and condemn not, and swear not at all, it is quite impossible to misinterpret, act boldly and directly contrary to the teaching, affirming that we are obeying it. Indeed the chief obstacle to understanding that the Gospels forbid every vow, and especially every oath of allegiance, is that pseudo- Christian teachers with extraordinary effrontery oblige men, on the Gospels themselves, to swear by the Gospels- that is to say, oblige them to do what is contrary to the Gospels.

그러나 나는 이미 주해서들을 읽었으며 이런 불가능함이 이루어진 방법을 알았다. ‘심판하지 말라, 누구에게도 분노하지 말라,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파괴하지 말라’의 해석들처럼, 그러한 여기도 역시 마찬가지 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법들을 확립하였다, 우리는 그것들에 애착을 느끼며 신성하다고 여기려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온다, 그는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능한 곳에 ‘이유 없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분노에 대한 규칙을 무산시켜라; 가능한 곳에, 마치 편파적인 법관들 같이 가장 비양심적인 사람들처럼, 율법의 조항들의 의미가 정반대를 의미하도록 해석하여서 자신의 아내와 결코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 대신에 이혼해도 좋다고 하라. 그리고,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그리고 결코 맹세하지 말라’의 경우처럼, 왜곡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담하게 그리고 정면으로 가르침과 반대로 행동하라. 진실로 복음서가 모든 맹세를, 특히 모든 충성의 맹세를 금지한다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된 장애는, 거짓 기독교 교사들이 대단한 뻔뻔스러움으로, 복음서에 손을 얹고서, 복음서에 의해서 맹세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 하여금 복음서에 반대되는 것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How can it occur to a man who is obliged to swear on a cross, or on the Gospels, that the cross is sacred because on it he was crucified who forbade us to swear, and that when taking an oath one perhaps kisses, as what is sacred, the very place in the book where it clearly and definitely says: Swear not at all.

십자가나 복음서에 손을 얹고 맹세해야 하는 사람에게, 맹세를 금지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십자가가 신성하다는 생각이 어찌 들 수 있겠으며, 맹세를 할 때 아마도 신성하다고 키스하는 바로 복음서의 바로 그 곳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명료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어찌 들 수 있겠는가?

But this effrontery no longer disconcerted me. I saw clearly that in Matt. v, verses 33 to 37, a definite and practicable third commandment is clearly expressed: Never take an oath to anyone, anywhere, about anything. Every oath is extorted for evil ends. 

그러나 이런 뻔뻔스러움은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나는 마태복음 5장 33~37에서, 명확하고 실행 가능한 제 3의 계명이 명백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어느 것에 대해서도 맹세하지 말라. 모든 맹세는 악한 목적으로 강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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