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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III. THE LAW OF GOD AND THE LAW OF MAN

III. 하나님의 법 그리고 사람의 법

It is wrongly said that the Christian teaching relate only to personal salvation and not to public, political questions. That is merely an audacious and barefaced assertion which is most obviously false and collapses as soon as it is seriously considered. 'Very well, I will not resist the evil doer, I will turn my cheek as a private individual', say I to myself; but if an enemy comes, or the people are oppressed, and I am called on to take part in the struggle against the evil men and to go and kill them, then it is imperative for me to decide wherein lies the service of God, and wherein the service of 'the vain thing'. Am I to go to the war or not? I am a peasant, and am chosen to serve as a village elder, a judge, or a juryman, and I am told to take an oath to judge and to inflict punishment. What am I to do? Again I have to choose between the law of God and the law of man. Or I am a monk living in a monastery, and some peasants have taken our hay and I am sent to participate in the struggle against the evil men and to take legal proceedings against the peasants. Again I have to choose. No one can escape from the question. I speak not merely of our class whose activity consists almost entirely in resisting evil men: in the army, in the courts of justice, or in civil offices, there is not a single private person, however humble, who has not to choose between serving God by obeying His command, or serving the 'vain thing'- state institu­tions. My private life is interwoven with the general life of the state which demands of me an un-Christian activity directly contrary to the law of Christ. Now with universal military service and the liability of all to serve on a jury this dilemma is sharply presented to us all in a very striking manner. Every man must take the weapons of murder- a sword and a bayonet- and must either kill, or at least load the rifle and sharpen the sword, that is, prepare to kill. Every citizen must appear at the law-courts and participate in trial and punishment, that is to say, must repudiate Christ's law about not resisting him that is evil, and must do it not merely in words but in deeds.

기독교의 가르침이 오직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계하고 국가나,정치적인 문제는 관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거짓이며 진지하게 다루어 지자마자 무너지는, 오직 대담하고 뻔뻔스러운 주장일 뿐이다. ‘좋다, 나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대항하지 않겠다, 나는 개인적인 한 사람으로써 나의 뺨을 돌려대겠다’, 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그러나 만일 적이 쳐들어 오거나 사람들이 억압당하고, 그리고 내가 악한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투쟁하고 나아가서 그들을 죽이도록 소집된다면, 그럴 경우, 어느 곳에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그리고 어느 곳에 ‘헛된 것’에 대한 봉사를 행할 것인지를 내가 결정해야 함은 피할 수가 없다. 나는 전쟁에 나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나는 농부이다, 그리고 마을의 장로로, 법관으로, 또는 배심원으로 봉사하도록 선출되며, 심판을 내리거나 처벌을 가하기 위해서 선서를 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나는 다시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나는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이다, 그런데 어떤 농부들이 우리의 건초를 가져갔다 그리고 나는 그 악한 사람들과의 싸움에 참여하고 농부들에 대항하는 법적 절차를 밟도록 파견된다. 나는 다시 선택해야 한다. 그 문제로부터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나는 단순히 자신의 활동이 거의 전적으로 악한 사람들에 대항함에 있는 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군대에서, 재판소에서, 또는 시청에서, 자신이 아무리 초라할 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그에게 봉사하거나, ‘헛된 것’- 국가 제도들- 에 봉사할 것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단 한 명의 개인도 없다. 나의 개인적인 삶은 그리스도의 법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비기독교적인 행위를 나로부터 요구하는 국가의 일반적인 삶과 얽혀있다. 이제 보편적 병역의무와 모든 사람이 배심원으로 봉사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으므로, 이런 딜레마는 매우 현저한 방법으로 우리들 모두에게 날카롭게 제시된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살인용 무기- 칼이나 총검- 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살인해야 하거나, 또는 적어도 소총을 장전하고 칼을 갈아야, 즉, 살인을 준비해야 한다. 모든 시민들은 법정에 나가서 재판이나 처벌에 참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법을 반드시 저버려야 하고, 그것을 말로서 뿐만 아니라 행위로서 행하여야 한다.

The grenadier's question- The Gospel or the military code ? The law of God or man's law?- now presents itself to humanity as it did in the days of Samuel. It presented itself to Christ himself, and to his disciples. It stands before those who now wish to be Christians in deed, and it stood before me.

근위병의 문제- 복음인가 아니면 군대의 규정인가? 하나님의 법인가 아니면 사람의 법인가?- 가 사무엘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제 인류에게 제기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제 진정으로 기독교인이기를 원하는 사람들 앞에 놓여 있으며, 나의 앞에도 놓여 있다.

The law of Christ, and his teachings of love, humility, and self-repudiation had previously always touched my heart and attracted me. But from all sides, both in history and around me at the present day and in my own life, I saw a contrary law, repugnant to my heart and conscience and reason, but harmonizing with my animal instincts. I felt if I accepted the law of Christ I should be isolated and it would go ill with me, I should be one of the persecuted and suffering, as Christ predicted. While if I accepted man's law everyone would approve of it, and I should be at peace, secure, and have at my service all manner of theological subtleties to set my conscience at rest. I should laugh and be merry as Christ said. I felt this, and therefore did not penetrate into the meaning of Christ's law, but tried to understand it so that it should not prevent my living my accustomed animal life. But to under­stand it so was impossible, and therefore I did not understand it at all.

그리스도의 법, 그리고 그의 사랑, 공손, 및 자기 희생의 가르침들은 과거에 항상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으며, 나에게는 매력이었다. 그러나 모든 부분으로부터, 역사상에서 그리고 현 시대와 나 자신의 인생에서 나의 주변에서, 나는 상반적인 법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마음, 양심, 그리고 이성에 배반되지만, 나의 동물적인 본능들과는 어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만일 내가 그리스도의 법을 받아 들인다면, 나는 틀림없이 격리될 것이며 그것은 나에게 해롭게 될 것이고, 나는 그리스도가 예견한 대로, 박해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 반면에 만일 내가 사람의 법을 받아 들인다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인정할 것이고, 나는 틀림없이 평안하고, 안전하며, 나의 양심을 잠재우기 위한 모든 종류의 신학적인 치밀한 방법들을 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의 의미 안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적응해 있는 동물적인 삶으로 내가 살아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In this non-comprehension I reached a state of perplexity which now astonishes me, and as an example of that perplexity I will give my former understanding of the words,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Matt. vii. 1), 'Judge not and ye shall not be judged: condemn not, and ye shall not be condemned' (Luke vi. 37). The institution of law-courts in which I took part and which defended the safety of my property, appeared to me so indubitably sacred and accordant with the law of God that it never occurred to me that these sayings could mean anything but that one must not speak ill of one's neighbor. It never entered my head that in those words Christ could have spoken of the law-courts, of the Zemstvo, of the Criminal Court, of the District Courts and magistrates, and of all the Senates and departments. Only when I understood in the direct sense the words about not resisting him that is evil, only then did the question occur to me of Christ's attitude to all those courts and departments. And seeing that he must have dis­approved of them, I asked myself: Does it not mean that one must not merely refrain from condemning one's neighbor verbally, but must not judge him in the courts- must not condemn one's neighbor by means of our law-courts?

이런 오해 속에서 나는 지금 내가 놀라고 있는 혼란의 상태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의 예로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장1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누가복음 6장37절)라는 말씀을 내가 과거에 이해하던 것을 말해 보겠다. 내가 참여하고 나의 재산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재판 제도는 내게 너무도 의심할 여지도 없이 신성하고 하나님의 법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이런 구절들이 오직 ‘우리의 이웃을 욕해서는 안 된다’는 이외의 것을 의미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말씀들 안에 그리스도가 재판소, 지방 자치회, 형사 재판소, 지방 재판소 및 순회 재판소, 그리고 입법원과 국가의 각기 부처들에 대해서 말했었을 것이라고는 결코 나의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내가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의 직접적인 의미를 깨달았을 때, 오직 그때서야 그 모든 법정과 부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세에 관한 의문이 나에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틀림없이 그것들을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것은 말로서 우리가 이웃을 비난하는 것을 삼가야 할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그를 재판하지 말 것- 우리의 법정들을 이용하여 우리의 이웃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In Luke vi. 37-49, these words are spoken immediately after the teaching of non-resistance to evil and of returning good for evil. Following the words, 'Be merciful as your Father in heaven is merciful', come the words, 'Judge not, and ye shall not be judged: condemn not, and ye shall not be condemned'. Does not this mean that besides not blaming one's neighbor one must not set up law-courts, nor judge one's neighbor in them? said I. And I only had to formulate that question, and my heart and my common sense at once replied affirmatively.

누가복음(6장 37절~49절)에서는 이러한 구절은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 바로 뒤에 나온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라는 말씀 뒤에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해서 말로 비난하지 않을 뿐더러 우리는 재판소를 설치해서는 안되며 우리 이웃을 심판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자신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하자, 즉시 나의 마음과 상식이 당장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I know how this understanding of the words startles one at first. It startled me too. To show how far I was from such an understanding of the words I will confess to a shameful stupidity. When I had already become a believer and read the Gospels as a divine book, I used as a joke to say to my friends, on meeting any of them who were public prosecutors or judges: 'And you go on judging, though it is written,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So sure was I that those words could mean nothing more than a prohibition of evil-speaking, that I did not understand the terrible mockery of holy things my words contained. I had gone so far that, being convinced that these plain words did not mean what they do mean, I used them jokingly in their true sense.

이 말씀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최초에는 사람들을 얼마나 놀라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나 역시도 놀라게 했다. 내가 말씀에 대한 그런 깨달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겠다. 내가 이미 신자가 되어서 성경을 하나님의 책으로 읽은 후에도 검사와 판사를 하는 나의 친구들을 만나면 농담조로 말하곤 했다: ‘자네들은 성경에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라고 쓰여 있음에도 계속해서 재판을 하고 있는가?’ 나는 그 말씀이 오로지 비방을 금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너무도 확신하였기 때문에, 나의 말이 담고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한 무서운 비웃음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그 지경까지 이르러서, 이런 평이한 말씀들이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서, 나는 농담 삼아서 그것들을 진정한 의미로서 사용하곤 했다.

I will recount in detail how all my doubts-  whether these words could be understood except as meaning that Christ totally forbids the human institution of any law-court, and that he could mean nothing else by those words- were destroyed.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가 지상의 모든 재판을 금한다는 뜻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그러한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는 이러한 말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에 관한 의심이 어떻게 제거되었는가를 상세히 말하겠다.

The first thing that struck me when I understood the law of non-resistance to the evil man in its direct meaning, was the man's courts of law are not in. accord with it, but are directly opposed to it and to the meaning of the whole teaching, and that Christ therefore, if he thought of the law-courts, must have condemned them.

내가 악한 사람에 대한 무저항의 법을 그 직접적인 의미대로 깨달았을 때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최초의 것은 사람의 법정이 그것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그리고 전체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치되며, 그리스도는 그러므로, 만일 그가 법정들을 생각하였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비난하였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Christ says: 'Resist not him that is evil.' The purpose of the courts is to resist the evil man. Christ tells us to return good for evil. The courts repay evil for evil. Christ tells us not to distinguish good people from bad. The courts are entirely concerned in making the distinction. Christ says, for­give all men. Forgive not once, not seven times, but endlessly. Love your enemies and do good to them that hate you. The courts do not forgive, but punish. They deal out not good but evil to those they call the enemies of society. So it appeared evident that Christ must have condemned the courts. But, thought I, perhaps Christ had nothing to do with the law-courts and was not thinking of them. But I saw that this could not be: from the day of his birth and until his death Christ came in con­flict with the courts of Herod, of the Sanhedrin, and of the high priests. And I noticed that Christ often spoke directly of the courts as of an evil. He warned his disciples that they would be judged, and he told them how to bear themselves in the courts. Of himself he said that he would be condemned; and he himself set an example of how one should treat man's courts of law. Therefore Christ did think of these human courts, which condemned him and his disciples and which have condemned and are con­demning millions of people. Christ saw this evil and plainly indicated it. At the execution of the sen­tence of the court on the woman taken in adultery he plainly repudiated the court and showed that man must not judge because he is himself guilty. And he expressed that same thought several times, saying that with dirt in one's own eye one cannot see the dirt in another's eye and that the blind must not lead the blind. He even explains what results from such a blunder. The pupil becomes like his master.

그리스도는 말한다: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 재판들의 목적은 악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말한다. 재판은 악을 악으로 되 갚는다. 그리스도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하지 말라고 한다. 재판은 전적으로 구별하는 일에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 한 번 또는 일곱 번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재판은 용서하지 않고 처벌한다. 재판들은 그들이 사회의 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선이 아니라 악을 베푼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재판들을 틀림없이 비난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가 재판소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출생한 날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는 헤롯, 산헤드린, 그리고 대제사장 들의 법정들과 충돌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가 종종 재판들을 악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법정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선고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우리가 인간의 법정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의 법정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와 그의 제자들을 정죄하였으며, 수백만의 사람들을 정죄하여 왔으며 정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런 악을 깨달았으며 그것을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간음으로 붙잡힌 여자에 대한 법정의 선고를 집행함에서 그는 명백히 재판을 부정하였으며 사람은 스스로가 죄인이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똑 같은 사상을 여러 번 표현하였는데, 자신의 눈에 티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 눈의 티끌을 볼 수 없으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심지어 그러한 엄청난 실수로 무엇이 초래되는지 설명한다. 학생은 그의 스승처럼 된다.

But perhaps having said this about the judgment on the woman taken in adultery and having put forth parables about the foundations of the house, referring to the general weakness of man­kind, he nevertheless does not forbid appeals to human courts of law for the purpose of obtaining protection from evil men. But I saw that this is quite inadmissible.

그러나 아마도 간음죄로 붙잡힌 여자를 심판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으며 집의 기초에 대한 비유를 말해주고, 인류의 일반적인 결함을 언급했을지라도, 그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를 얻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 사람의 법정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절대로 용납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In the Sermon on the Mount, addressing every­body, he says: 'And if any man will sue thee at law and take away thy coat, let him have thy cloak also.' Therefore he forbids anyone to go to law. But perhaps Christ speaks only of each man’s personal relation to the courts and does not condemn the process of law itself, but allows people to judge others provided they do so in the institutions estab­lished for that purpose? But neither can this be supposed. Christ, in the prayer he gave, bids all men without exception forgive others, that they may be forgiven their own sins. And he repeats the thought often. Therefore every man when he prays and before bringing his gift to the altar should for­give everyone. How can a man, who by the faith he professes must always forgive all men, judge and condemn anyone in the law-courts? It follows that,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there can be no such things as Christian courts which inflict punishment.

그리스도는 산상수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연설하면서 말한다: ‘너는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법에 호소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금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리스도는 재판에 대한 각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말할 뿐이며, 법 절차 자체는 비난하지 않으며, 제도가 설립된 목적상 허용한다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재판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결코 고려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기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 받으려면, 예외 없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생각을 자주 반복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기도를 하고 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어찌하여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에 따라서 언제나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법정에서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처벌을 가하는 기독교적인 법정 같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But perhaps the context shows that in this passage Christ, when he says,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was not thinking of human courts of justice? But this again is not so; on the contrary, it is clear from the context that when he said, 'Judge not', Christ was speaking precisely of the institution of law-courts. In Matthew and Luke, before saying, 'Judge not', he says: Resist not him that is evil, endure evil, do good to all men. And before that, in Matthew, he repeats the words of the Hebrew criminal code,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And after this reference to the criminal law, he says: But ye shall not do so; resist not him that is evil; and then he adds, 'Judge not'. Therefore Christ speaks precisely of human criminal law, and. repudiates it by the words, 'Judge not'.

그러나 아마도 문맥으로 보아서, 그리스도가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의 재판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 또한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문맥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비판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는 정확하게 재판 제도를 말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비판하지 말라’를 말하기 전에, 그는 말한다: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 악을 참으라,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그리고 이 말을 하기 전에, 마태복음에서, 그는 히브리의 형법의 조항들을 말한다, ‘눈에는 눈, 그리고 이에는 이’. 그리고 이러한 형법에 대한 참조 뒤에 그는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행하지 말라;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 그리고 나서 그는 덧붙인다, ‘비판하지 말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정확하게 사람의 형법을 말하고 있으며,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Moreover in Luke, he not only says, 'Judge not', but 'Judge not. . . and condemn not'. That word 'condemn', which has so similar a meaning, was not added for nothing. The addition can have had only one aim- to elucidate the sense in which the word 'judge' is used.

더구나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비판하지 말라’ 뿐만 아니라, ‘비판치 말라…정죄치 말라’라고 말하고 있다. ‘정죄하지 말라’는 이 말은, 너무나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아무런 이유없이 첨가된 것이 아니다. 첨가된 말은 오직 한가지 목적 밖에 있을 수 없다- ’비판하다’는 말이 사용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If he had meant to say, do not judge your neighbor, he would have added that word 'neighbor', but he adds the word which is translated 'do not condemn', and then adds, 'that ye be not con­demned; forgive all men and you will be forgiven'.

만일 그리스도가 ‘너의 이웃’을 비판치 말라고 말하길 원했으면 그는 ‘이웃’이란 말을 첨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죄치 말라’고 번역되는 말을 첨가했으며, 그 말에 이어서,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리라’ 라고 첨가한다.

But perhaps, all the same, Christ was not thinking of the law-courts when he said this and I may be attributing my own thought to his words which had a different meaning.

그러나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이것을 말할 때 법률에 의한 재판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다른 뜻을 가진 그의 말씀에 나 자신의 생각으로 바꾸었는지 모른다.

So I asked myself how Christ's first disciples, the Apostles, regarded man's law-courts. Did they acknowledge them or approve of them?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최초의 제자들이, 사도들이 사람의 법정들을 어떻게 여겼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그것들을 인정하였거나 호의적으로 여겼을까?

In chap. iv. 11, the Apostle James says: 'Speak not evil one of another, brethren. He that speaketh evil of his brother, and judgeth his brother, speak­eth evil of the law, and judgeth the law: but if thou judge the law, thou art not a doer of the law, but a judge. There is one lawgiver who is able to save or to destroy: who art thou that judgest another?'

사도 야고보는, 제 4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The word translated 'speak evil of' is . Without referring to the dictionary one can see that this word must mean indict. And so it does, as any­one may convince himself by a reference to the dictionary. It is translated, 'Who speaks evil of his brother, speaks evil of the law'. One involuntarily asks, Why? However much I may speak evil of my brother, I do not speak evil of the law; but if I indict and bring my brother before the court of law, I evidently thereby condemn the law of Christ: that is to say, I consider the law of Christ insufficient and indict and condemn his law. Then it is clear that I do not fulfill his law but constitute myself its judge. The judge, says Christ, is he who can save. But how shall I, who am not able to save, be a judge and inflict punishments?

‘비방한다’로 번역된 말은 이다. 사전을 찾아 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 말이 틀림없이 정죄하다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누가 사전을 참조하여 확인해 보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는 자’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묻는다, 왜? 내가 나의 형제를 아무리 나쁘게 말하더라도, 나는 법률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나의 형제를 정죄하여 법정에 데려 간다면, 나는 분명히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정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불충분하게 여기고서 그의 법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법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법의 심판자가 되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심판자는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내가, 구원할 수 도 없으면서, 심판자가 되고 처벌들을 가하겠는가?

The whole passage speaks of human law-courts, and repudiates them. The whole of the Epistle is full of that thought. In the Epistle of James (ii. 1-13) it is said: (1) 'My brethren, let the faith of our Lord Jesus Christ be held without respect of persons. (2) For if there come unto your assembly a man with a gold ring, in fine clothing, and there come in also a poor man in vile clothing; (3) And ye have regard to him that weareth the fine clothing, and say unto him, Sit thou here in a good place; and say to the poor, Stand thou there, or sit here under my foot­stool: (4) Are ye not then partial in yourselves, and are become judges of evil thoughts? (5) Hearken, my beloved brethren, Hath not God chosen the poor of this world rich in faith, and heirs of the kingdom which he hath promised to them that love him? (6) But ye have despised the poor. Do not rich men oppress you, and themselves drag you before the judgment seats? Do not they blaspheme that worthy name by the which ye are called ? (8) If ye fulfill the royal law according to the scripture,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Lev. xix. 18), ye do well. (9) But if ye have respect to persons, ye commit sin, and are convicted by the law as trans­gressors. (10) For whosoever shall keep the whole law, and yet offend in one point, he is guilty of all. (11) For he who said, Do not commit adultery, said also, Do not kill. Now if thou commit no adultery, yet if thou kill, thou art become a transgressor of the law (Deut. xxii. 22; Lev. xviii. 17-25). (12) So speak ye, and so do, as they that shall be judged by the law of liberty. (13) For he shall have judgment without mercy that hath showed no mercy; and mercy rejoiceth against judgment.' The last words have often been translated: 'Mercy is proclaimed in the courts', and were so translated to imply that there may be Christian courts of law, but that they must be merciful.

이 구절 전체가 사람의 법정들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있다. 야고보서 전체가 이와 같은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야고보서(2장1-13)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 있다.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마지막 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법정에서 자비가 선언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재판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자비로워야 한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James exhorts the brethren not to make distinc­tions between people. If you make distinctions, you , are divided in your minds, like the judges with evil intentions in the courts. You have judged the poor to be worse. But on the contrary it is the rich man who is worse. He both oppresses you and drags you before the courts. If you live according to the law of love of your neighbor, according to the law of charity (which, in distinc­tion from the other law, James calls the 'law of the Lord'), you do well. But if you regard persons and make distinctions between man and man, you are offenders against the law of mercy. And, having probably in mind the example of the woman taken in adultery whom they brought before Christ that she might be stoned, or the sin of adultery in general, James says that he who executes the adulterers will be guilty of murder and will infringe the external law. For the same external law forbids both adultery and murder. He says: 'Behave like men who are judged by the law of liberty. For there is no mercy for him who has no mercy, and therefore mercy destroys the courts.'

야고보는 사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말 것을 권고한다. 만일 너희가 차별을 한다면, 너희는 서로 구별하여(), 저마다 의견으로 갈라져서, 악한 마음을 가진 법정의 재판관과 같을 것이다. 너희들은 가난한 자를 나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부자가 나쁘다. 그들은 너희들을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간다. 만일 너희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율법에 의하여, 자비의 율법(야고보는 이 율법을 다른 율법과 구별하여, 왕의 율법이라고 부른다)에 따라서 생활한다면, 너희는 훌륭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무시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둔다면, 자비의 율법을 범하는 자이다. 그리고, 아마도 돌로 쳐죽이기 위해서 그리스도 앞에 끌고 온 간음한 여자의 경우나 일반적인 간음죄를 고려하고서, 야고보는 간음한 자를 처벌한 자도 살인죄를 짓게 되며 외면적인 법을 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똑 같은 외면적인 법이 간음과 살인을 동시에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자유의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라. 자비가 없는 자를 위한 자비는 없으며, 그러므로 자비는 심판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How could that be said more clearly and definitely ? All discrimination between people is for­bidden, every judgment that this man is good and that man evil directly indicates that the human Courts are undoubtedly bad, and proves that the court itself is criminal, as it executes people for offences and therefore itself infringes God's law of charity.

이 이상 분명하고 명확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사람에 대한 모든 차별이 금지된다, 즉 이 사람은 선하다 그리고 저 사람은 악하다는 모든 판단은 사람의 법정이 의심할 것 없이 나쁘다는 것을 정확히 가리키며, 법정 자체가 범죄적임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의 죄를 처벌하고 그러므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의 율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I read the Epistles of St. Paul, who himself suffered from the courts, and in the very first chapter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I found a reprimand which he addresses to the Romans for their various sins and errors, and among the rest for their courts (v. 32): 'Who knowing the judgment of God, that they which commit such things are worthy of death, not only do the same, but have pleasure in them that do them.' Chap. ii. 1: 'Therefore thou art without excuse, O man, whosoever thou art, who judgest; for wherein thou judgest another, thou condemnest thyself; for thou that judgest dost practise the same things. (2) And we are sure that the judgment of God is according to truth against them which commit such things. (3) And thinkest thou this, O man, that judgest them which do such things, and doest the same, that thou shalt escape the judgment of God ? (4) Or despisest thou the riches of his goodness and forbearance and long-suffering; not knowing that the goodness of God leadeth thee to repentance?'

나는 사도 바울의 서한들을 읽었는데, 그 자신도 여러 법정에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째 장에서 나는 그들의 다양한 죄악들과 과오에 대해 로마인들에게 전하는 질책을 발견하였으며, 그 내용의 나머지는 그들의 법정에 대한 것이었다(32절):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하느니라.’ 제2장: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The Apostle Paul says that they, knowing the righteous law of God, themselves do wrong and teach others to do the same, and therefore the man who judges cannot be justified.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알면서도, 스스로 불의한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똑 같이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판단하는 사람은 정당화될 수 없다.

Such is the attitude to the law-courts which I found in the Epistles of the Apostles, and in their lives, as we all know, man's courts appeared an evil and a temptation which had to be endured with firmness, and with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서한들에서 내가 발견한 법정들에 대한 견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들은 실제 생활에서는 사람의 법정들은 악으로 보였으며, 굳센 의지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참아야 하는 시험으로 보였다.

By reconstructing in one's imagination the posi­tion of the first Christians among the heathen, one can easily understand that the Christians, who were persecuted in man's law-courts, could not prohibit law-courts. Only incidentally could they allude to that evil, condemning its foundations, as they did.

우리의 상상 속에 이교도(異敎徒)들 사이에 있는 초대 그리스도인 들의 상태를 재구성해 본다면,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사람들의 법정들에서 박해 받았으며, 법정들을 금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만 그러한 악을 지적하고, 그 근본원리를 비난할 수 있었으며, 그처럼 행동했다.

I consulted the Fathers of the Church of the first centuries, and saw that they always define the difference between their teaching, and that of all others by the fact that they never put compulsion on anyone in any way and never went to law with anyone (see Athenagoras and Origen), did not execute, but only endured the torments to which they were condemned by man's courts. All the martyrs, by their deeds, made the same profession. I saw that all the Christians till the time of Constantine re­garded the law-courts not otherwise than as an evil which had to be patiently endured, and that the thought could never enter the head of any Christian of those days that Christians could take part in prosecutions. I saw that the words of Christ,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were understood by his first disciples as I now understand them in their direct meaning: 'Do not prosecute in the courts, and do not participate in them.'

나는 1 세기 경의 교부들을 참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가르침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를 정의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은 그들이 결코 다른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강요를 하지 않았고 결코 다른 사람을 고소하지 않았으며(참조:아데나고라스 및 오리겐), 처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법정들에 의해서 가해지는 고통들을 오직 참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순교자들은, 그들의 행위로서, 똑 같은 교리를 고백을 하였다. 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 대제(大帝) 이전까지는 이러한 재판을 인내로써 참아야 하는 악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당시 기독교인들의 머리 속에 기독교인들이 소추 절차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결코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그의 첫번째 제자들도 깨달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도 이제 그 말씀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사법기관에 고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절차에 참여하지 말라.’

Everything indubitably confirmed my conviction that the words 'Judge not and condemn not' mean, do not judge in the courts; yet the explanation that it means do not malign your neighbor is so gener­ally accepted, and so boldly and confidently do the courts flourish in all Christian countries, supported even by the Church, that I long doubted the cor­rectness of my interpretation. If everybody could explain the matter in this way and organize Chris­tian courts, then probably they had some ground for so doing and there is something I do not under­stand, said I to myself. There must be grounds on which the words are understood to mean 'to malign', and there must be grounds for instituting Christian courts.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는 말은 가장 실제적인 의미, ‘법정에서 재판하지 말라’는 뜻을 가진다는 나의 믿음을 모든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설명이 너무나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고, 모든 기독교 국가들에서 법정들이 너무나 활발하게, 자신만만하게 번창하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에 의해서 비호받고 있으므로, 나는 오랫동안 나의 해석의 정확성을 의심하였다. 만일 모든 사람이 그 문제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의 법정들을 조직할 수 있으며,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음에는 어떤 근거가 있을 것이며 내가 깨닫지 못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 말들이 ‘비방하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에는 반드시 근거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법정이 설립됨에 대한 근거들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And I examined the explanations of the ecclesias­tical theologians. In all these interpretations, from the fifth century onward, I found that the words were taken in the sense of condemnation of one's neighbor, that is, maligning. And as the words are taken only to mean condemning one's neighbor in words, the question arises- how can one refrain from condemning? Evil must be condemned! Therefore all the interpretations revolve round the question, what one may and what one may not condemn. It is said (St. Chrysostom and Theophilus) that for the servants of the Church it must not be understood as a prohibition to judge, for the Apostles themselves judged. It is said that probably Christ referred to the Jews who condemned their neighbors for small sins and themselves committed great ones.

그리고 나는 교회 신학자들의 설명을 조사하였다. 이 모든 해석들에서, 5세기 이후부터, 나는 이 말들이 자신의 이웃에 대한 정죄, 즉, 비방의 의미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말들이 오직 자신의 이웃을 말로서 정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질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일어난다- 우리는 어떻게 정죄함을 금지할 수 있을까? 악은 반드시 정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해석들은 이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즉 무엇을 정죄해야 하며 무엇을 정죄하지 말아야 하는가? 크리서스톰과 테오필리우스는, 교회의 봉사자들에 있어서, 그것은 재판의 금지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도들 자신도 재판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아마도 자기 이웃들의 작은 실무에 대해서는 비방하면서 자신들은 더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유태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가 한 말일지도 모른다고도 말한다.

But nowhere is a word said of the institution of courts of law and of the relation in which the courts stand to this condemnation of judging. Does Christ forbid them or allow them?

그러나 재판 제도와 법정 그리고 그런 재판소가 죄를 단정하는 것을 금하는, 즉 정죄하지 말라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제판을 금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정하는 것일까?

To that particular question no reply is given, as though it were quite obvious that as soon as a Christian occupied a judge's seat, he might not merely condemn his neighbor, but have him executed.

비록 기독교인이 판관의 자리에 않자마자, 그는 자신의 이웃을 정죄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할 것이 너무나 분명할 지라도, 이런 특별한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I consulted the Greek, the Catholic, and the Protestant writers, and the writers of the Tubingen School and of the historical school. All of them, even the most free-thinking, understood those words as a condemnation of evil-speaking. But why, contrary to the whole teaching of Christ, the words are understood so narrowly that the courts are not included in the prohibition of judging; why it is supposed that Christ, forbidding as an evil deed a condemnation of one's neighbor that involuntarily slips from one's tongue, does not consider as evil and does not forbid a similar condemnation uttered de­liberately and associated with the infliction of vio­lence on the person condemned, is not explained, nor is there the slightest hint that it is possible for 'condemnation' to mean the judging which takes place in the law-court and from which millions of people suffer. More than that, in dealing with these words, 'Judge not and condemn not', reference to that most cruel habit of legal condemnation is care­fully avoided, and even fenced off. The theologian-interpreters remark that Christian law-courts must exist and do not conflict with the law of Christ.

나는 그리스 정교(希臘正敎), 카톨릭, 개신교의 저술가들과 튀빙겐파와 역사학파의 저술가들의 견해를 살펴 보았다. 그들 모두는, 심지어 대부분의 자유 사상가들도, 그 말들을 비방의 금지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왜, 그리스도의 전체 가르침에 반대가 되도록, 그 말씀들이 그토록 편협하게 이해되어서 법정들은 재판의 금지안에 포함되지 되지 않는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입에서 무의식 중에 나오는 이웃에 대한 비방을 악한 행위로 금지하면서, 의도적으로 발설되며 죄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관련된 유사한 정죄는 악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금지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정죄’라는 것이 법정에서 일어나는 재판이며 그로부터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해석되지 않으며, 그러한 최소한의 암시조차 없는 것일까? 거기에다가,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정죄하지 말라’와 같은 말씀들을 대함에 있어서, 법적인 정죄와 같은 가장 잔인한 관례들에 대한 언급은 조심스럽게 회피되며, 심지어 울타리가 쳐지고 있다. 신학적 해석가들은 기독교인의 법정들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율법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Noticing this, I began to doubt the good faith of these interpretations and referred to the translation of the words 'judge' and 'condemn'- the very matter with which I ought to have begun.

나는 이러한 점에 흥미를 갖고, 이러한 해석들의 정직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비판하다’ 그리고 ‘정죄하다’는 단어의 번역에 관심을 돌렸다- 내가 당연히 시작했어야 할 과제 자체였다.

In the original these words are and . The incorrect translation of the word in the Epistle of James, where it is trans­lated by the words 'speak evil of', confirmed my suspicion of the incorrectness of the translations.

원전(原典)에서 이 말들은 이다. 야고보의 서한에서 라는 말의 부정확한 번역이, 그곳에서는 ‘비방하다’로 번역되어 있음으로써, 그 번역들의 부정확함에 대한 나의 의심을 확인시켜 주엇다.

I looked how the words and are translated in the Gospels in different languages, and I saw that the word which in the Vulgate is trans­lated condemnare, is translated in a similar way in French, while in Slavonic it is 'condemn', and Luther translates it Verdammen, to curse.

나는 복음서 안에서 단어들이 다른 언어들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는 벌게이트에서는 condemnare로 번역되며, 불어에서도 유사하게 번역되고, 반면에 슬라브어로는 ‘정죄하다’로, 그리고 루터는 저주하다는 의미인, Verdammen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The contrast of these translations strengthened my doubts, and I asked myself: What does and what can the Greek word , employed in both the Gospels, mean, and also the word , used by Luke the Evangelist, who, in the opinion of the experts, wrote rather good Greek? How would a man translate those words who knew nothing of the Gospel teaching and the existing interpretations of it, but had before him merely that saying?

이러한 번역들의 차이는 나의 의심들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마태와 마가의 두 복음서들에서 채택된 그리스어 단어인 는 무엇을 의미하며 의미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전문가의 입장에서 상당히 훌륭한 그리스어를 문장력을 구사한 사도인 누가가 사용한 의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서 또한 그 해석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성서의 한 구절만 바로 앞에 놓고 있는 사람이 이 말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I consulted the general dictionary and found that the word has many different meanings, and among them very commonly the meaning of sen­tencing in the law-court, even executing, but that it never has the meaning of evil-speaking. I con­sulted the New Testament dictionary and found that the word is often used in the New Testament in the sense of to sentence in court. It is sometimes used in the sense of differentiation, but never in the sense of evil-speaking. And so I see that the word may be translated variously, but that a trans­lation which makes it mean 'speak evil' is the most far-fetched and unexpected of all.

일반적인 사전을 찾아보니 라는 말은 여러 가지 다른 의미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매우 흔한 의미는 ‘법정에서 선고하다’,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방한다’는 뜻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약성서 사전을 찾아보니 그 말은 종종 ‘법정에서 선고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때때로 구별하다의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나, 비방이라는 의미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라는 말이 여러가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으나 ‘비방한다’를 의미하는 번역은 가장 억지의 기상천외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Then I inquired about the word coupled to , the word of many meanings-  evidently on purpose to define the sense in which the writer was using that word. In the general dictionary I found that the word never has any other meaning than to condemn in court to punishment or execution. I looked in the New Testament dictionary, and found that the word is used in the Epistle of James v. 6, 'Ye have condemned and killed the just'; the word 'condemned' is this same word katadikaxw, used in reference to Christ, who was con­demned. And in no other way is this word ever used in the whole of the New Testament, or in any Greek dialect.

그리고 나서 나는 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와 한 쌍이 되는 라는 말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이 단어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 사전에서 나는 그 단어는 법정에서 처벌이나 처형을 선고하다라는 의미 말고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신약 성서 사전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야고보의 서한 5장 6절에서,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의로운 자를 죽였다’라고 이 말이 사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죄하다’는 단어는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는 정죄되었다(사형되었다). 그리고 전체 신약 성서에서, 또는 다른 어떤 그리스어 방언에서도, 다른 어떤 의미로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What does this all mean? What absurdity have I arrived at? I, and everyone in our society, if we have ever considered the fate of mankind, have been horrified at the sufferings and the evil introduced into man's life by man's criminal law- an evil both for the judged and for those who judge- from the executions of Genghiz Khan to the executions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those of our day.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황당한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나,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만일 우리가 인류의 운명을 염려한 적이 있었다면, 인간의 형법- 심판당하는 사람들이나 심판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악- 징기스칸의 형벌들로부터 프랑스 혁명의 사형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형들 까지- 에 의해서 사람의 삶에 파고든 고통들과 악들에 공포를 느껴오고 있었다.

No one with a heart can have escaped an impression of horror and doubt in goodness at even hearing of, not to say seeing, the execution of men by other men; the flogging to death with rods, the guillotines, and the scaffolds.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어느 누구라도, 만일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고; 몽둥이들로 매질하여 죽이고, 단두대, 교수대 등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심지어 듣기만 하여도, 전율의 느낌과 선에 대한 회의를 피해갈 수 없다.

In the Gospels, each word of which we consider holy, it is directly and clearly said: You have had a criminal law - 'an eye for an eye'- but I give you a new law: 'Resist not him that is evil.' Obey this law, all of you: do not inflict evil for evil, but do good always and to all men, forgive all men.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도 신성시하고 있는 복음서에서, 직접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형법- ’눈에는 눈’- 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새로운 법을 준다: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 너희는 모두 이 법에 복종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Further, it is clearly said: 'Do not go to law.' And that doubt about the meaning of the words may be impossible, it is added, 'Do not condemn to punishment in the courts.'

더 나아가, 분명히 말한다: ‘고소하지 말라.’ 이 말들에 대한 의혹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덧붙인다, ‘법정들에서 형벌을 선고하지 말라.

My heart says clearly and distinctly: do not execute. Science says, do not execute; the more you execute the more evil will there be. Reason says, do not execute, evil cannot be cut off by evil. The word of God, in which I believe, says the same. And I, reading the whole teaching and reading the words: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condemn not that ye be not condemned, forgive and ye shall be for-given', admit that this is the word of God, say that it means that I must not go about talking scandal and maligning people, and continue to consider the law-court to be a Christian institution and to consider myself both a judge and a Christian. And I was horrified at the grossness of the deception in which I was involved.

나의 마음은 명료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말한다: 사형을 행하지 말라. 학문도 말한다: 사형에 처하지 말라; 형벌이 많으면 많을수록 악은 더욱 커진다. 이성은 말한다, 사형을 행하지 말라. 악은 악으로써 제거할 수 없다. 내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도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나는 전체 가르침, 그 말씀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받을 것이라’- 을 읽고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나는 그것이 사람들을 중상하고 비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임을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법정은 기독교의 제도라고 여기며, 나 자신은 심판자이고 기독교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연루된 총체적인 기만에 두려움으로 몸이 떨렸다.

   
       
   

 ] 위로 ] 서문 ] I. 복음 교훈의 열쇠 ] II. 무저항의 명령 ] [ III.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 IV.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 VI. 다섯 가지 계명 ] VII. 거짓 교리 ] VIII. 삶의 길 ] IX. 신앙과 행위 ]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 XI. 죽은 교회 ] XII. 신앙이란 무엇인가? ] Notes ] Maude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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