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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VII. CHRIST'S TEACHING. 
FALSE DOCTRINE. 
MAN IS A SON OF GOD.

VII. 그리스도의 가르침. 
거짓 교리.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Why do people not act as Christ told them to, and in the way that would give the greatest bliss attain­able by man- such as they have always longed for and still long for? From all sides I hear one and the same reply, differently expressed: 'The teaching of Christ is very good, and it is true that were it fulfilled the kingdom of God would be established on earth; but it is difficult, and therefore impracticable.'

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명령한 그대로, 그리고 사람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주는 방법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언제나 갈망해왔고 아직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모든 방면에서, 비록 다르게 표현될지라도, 하나이자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다, 그리고 그것이 실행된다면 하나님의 왕국이 지상에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실행하기가 불가능하다.’

Christ's teaching of how men should live is divinely true and gives men blessedness; but it is hard for them to obey it. We so often repeat this, and hear it, that the contradiction contained in the words no longer strikes us.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성한 진리이며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그것을 따르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것을 반복하고 들어서, 이 말들에 담겨있는 모순은 더 이상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다.

It is accordant with human nature to seek for what is best, and every teaching for the guidance of man's life is a teaching of what is best. If men are shown what is best for them, how can they say that they desire to do what is best but cannot? Man's rational activity, since mankind existed, has been directed to finding out what is best among the contradictions that fill the individual life and the life of humanity in general.

최선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과 일치한다, 그리고 사람의 삶을 인도하는 모든 가르침은 최선의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최선의 것을 보여 주었을 때, 어떻게 그들이 최선의 것을 행하기를 바라지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사람의 이성적인 활동은 개인적인 삶과 인류의 보편적인 삶을 채우는 모순들 속에서 최선의 것을 찾기 위한 노력에 기울여져 왔다.

Men fight for land, for things they desire, and then divide everything up and call it property; they consider that though this is difficult to institute, yet it is better so, and they hold on to property; men fight for wives and abandon children, and then conclude that it is better that each man should have his own family; and though it is very difficult to provide for a family, people retain property and family and much else. And as soon as people con­sidered that it was better so, then, however difficult it might be, they did it. What then do we mean when we say, The teaching of Christ is admirable, life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is better than the life we live, but we cannot live in the better way be­cause it is difficult?

사람들은 토지를 위해서, 그들이 바라는 물건들을 위해서 투쟁한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지고는 재산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비록 이것을 마련하기가 어렵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고, 재산에 매달린다; 사람들은 아내들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고 자녀들을 버린다, 그 다음 제각기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족을 가지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울지라도, 사람들은 재산과 가족을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을 유지하려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자마자,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행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보다 더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더 나은 방법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If one understands difficult to mean that it is difficult to sacrifice the momentary satisfaction of desire for the sake of a great good, then why do we not say that it is difficult to plough in order to obtain grain for bread or to plant apple-trees in order to get apples? That it is necessary to overcome difficulties to gain a great advantage is known to every being endowed with the rudiments of reason. And yet we say that Christ's teaching is admirable, but is impracticable because it is diffi­cult. Difficult because to follow it we must deny ourselves something we had possessed till then. It is as if we had never heard that it is sometimes better to endure and forgo than to suffer nothing and always satisfy our lusts.

만일 우리가 ‘어렵다’는 말을 커다란 유익을 위해서 욕망의 순간적인 만족을 희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왜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해서 땅을 가는 것이나 사과를 얻기 위해서 사과 나무를 심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가? 가장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성의 기미라도 부여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훌륭하지만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렵다는 이유는 그것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지금까지 우리가 소유해 왔던 어떤 것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으면서 언제나 우리의 탐욕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때로는 더 낫다는 것을 전혀 들은 적이 없는 것과 같다.

Man may be an animal, and no one need re­proach him for that; but a man cannot argue that he wishes to be merely an animal. As soon as he argues he acknowledges that he is a rational being, and, admitting that, he cannot but admit the dis­tinction between reasonable and unreasonable. Reason enforces nothing, it only sheds light.

사람은 동물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점에 대해서 그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단순히 동물이 되기를 원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자마자, 그는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은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며, 오직 비출 뿐이다.

In the dark I hurt my hand and my knee seeking the door. A man enters with a light, and I see the door. When I see the door I need no longer knock myself against the wall, and still less is it reasonably possible to assert that though I see the door and consider it better to pass through the door, it is difficult to do so and I therefore wish to continue to knock my knee against the wall.

나는 어둠 속에서 문을 찾다가 손과 무릎을 다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불을 가지고 들어 온다, 그러나 나는 문을 본다. 내가 문을 보면 나는 더 이상 벽에 부딪힐 필요가 없다, 그리고 비록 내가 문을 볼 수 있으며 문을 지나서 나가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기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나는 나의 무릎을 계속해서 벽에 부딪히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더욱 가능하지 않다.

There is an obvious misunderstanding in this extraordinary argument that the Christian teaching is desirable for and beneficial to the world, but that men are weak, men are bad, and continue to do worse though they wish to do better, and that therefore they cannot do better.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세상을 위해서 바람직하고 유익하지만, 사람들은 나약하다, 사람들은 악하다, 그래서 비록 더 좋은 일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계속해서 더 악한 일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이런 괴상한 논리에 명확한 오해가 있다.

It is evidently not a mere error in argument, but something else. There must be some false percep­tion here. Only a false opinion that that is which is not, and that that is not which is, could bring people to such a strange denial of the practicability of that which they admit gives them blessedness. The false perception which has led to this is what is called the dogmatic Christian faith- the very thing that all who profess the Christian faith according to the Church learn from childhood in the various Ortho­dox, Catholic, and Protestant Catechisms.

명백히 논리에 오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 있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어떤 거짓된 인식이 있을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실재하는 것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오직 그릇된 인식만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인정하고 있는 행복을 주는 것의 실행가능성을, 그토록 이상한 부정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한 거짓된 인식은 소위 교리적인 기독교 신앙- 교회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정교회, 카톨릭, 그리고 개신교의 교리 문답서 안에서 배운 바로 그것- 이다.

That faith, as defined by believers, is 'the giving substance to things hoped for' (this is said by Paul, and repeated in all the theological works and catechisms as the best definition of faith). And it is this acknowledgement of the unreal as real that has led people to the strange assertion that though Christ's teaching is good for men, it does not suit men.

그러한 신앙은, 신자들의 정의에 의하면, ‘바라는 것들에 대해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것은 바울이 말하였고, 신앙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로서, 모든 신학적인 서적들과 교리 문답서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비실재적인 것들을 실재적인 것들로 인정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주장으로 몰고 간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The teaching of this faith, in its exact expression, is as follows: A personal God, ever existing, One in Three Persons, suddenly decided to create a world of spirits. The good God created this world of spirits for their good; but it happened that one of the spirits became bad of himself and therefore un­happy. Much time passed and God created another world, a material world, and in it man, also for man's own benefit. God created man blessed, im­mortal, and sinless. The blessedness of man con­sisted in his enjoying the good of life without labor; his immortality consisted in that he should always so live; his sinlessness consisted in his not knowing evil.

이러한 신앙의 가르침은, 그 정확한 표현으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영원히 존재하며, 삼위일체의 한 분이던 인격을 지닌 하나님이, 갑자기 영혼의 세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선하신 하나님이 이런 영혼의 세계를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창조하였다; 그러나 영혼 중의 하나가 스스로 악해져서 비참해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갔으며, 하나님이 다른 세계, 즉, 물질적인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그 안에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행복하고, 불멸이며, 죄가 없이 창조하였다. 사람의 행복은 노동하지 않고 행복을 즐김에 있었다; 사람의 불멸성은 그가 언제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점이며; 그의 죄없음은 그가 악을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This man was tempted in paradise by that spirit of the first creation who had become bad, and from that time man fell and bore similar fallen children; and from that time people began to work, bear sickness, suffer, die, and struggle physically and spiritually; that is to say, this imaginary man be­came real, such as we know him and such alone as we have any right or reason to imagine him to be. Man's condition, laboring, suffering, choosing good and avoiding evil, and dying- that condition which exists and other than which we cannot imagine-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is faith is not man's real position, but an unnatural, acci­dental, and temporary position.

이 사람은 악하게 되어버린 처음 창조된 영혼에 의해서 낙원에서 유혹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은 타락하였으며 똑같이 타락한 자손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노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아픔을 참아야 했으며, 고통 당하며, 죽고, 그리고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싸우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상상 속의 사람이 현실이 되었고, 우리가 그에 대해 그렇게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상상할 권리나 이성은 오직 그렇게 만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사람의 상태, 즉, 노동, 고통, 선을 선택하고 악을 멀리하며, 그리고 죽어 가는 상태- 존재하고 있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상태- 는 이러한 신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의 참된 상태가 아니라, 부자연스럽고, 우발적이며, 일시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Although this condition continued for everybody, as this teaching tells us, from the banishment of Adam from paradise- that is to say,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world- till the birth of Christ, and continues in just the same way for everybody since then, yet believers have to suppose this to be only an accidental, temporary condition. According to this teaching, the Son of God, being himself God,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was sent by God to earth in human form to save men from that condition which was for them accidental and temporary, and to free them from all the curses which that same God had put upon them for Adam's sin, and in order to reinstate them in their former natural condition of blessedness- that is to say, in freedom from disease and in immortality, sinlessness, and idleness. According to this teaching,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Christ, by the fact that people executed him, redeemed Adam's sin and terminated man's unnatural condition which had last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world. And since then a man who believes in Christ has again become such as he was in paradise- that is to say, im­mortal, free from disease, sinless, and idle.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내용에 따르면, 비록 낙원으로부터 아담이 추방된 뒤부터-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되고, 그 후에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식으로 계속되지만, 신자들은 이것을 오직 우발적이며 일시적인 상태로 상상해야만 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은, 스스로 하나님이며, 삼위일체의 제 2위로서, 우발적이며 일시적인 상태에 놓인 상태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 아담의 죄로 인해서 똑같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린 모든 저주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며, 그들을 그들의 이전의 행복하던 자연적인 상태- 다시 말하면, 질병으로부터 해방, 불멸과 무죄, 그리고 나태함의 상태- 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지상으로 보내졌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제 2위인,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를 처형하였다는 사실로 인해서, 아담의 죄를 구속하였으며, 세상의 시작 이후부터 지속되어 왔던 사람의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시 그가 낙원에 있던 상태로 되었다- 다시 말하면, 불멸이며,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고, 죄가 없으며,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On that part of the accomplishment of the redemption in consequence of which, since Christ, the earth has everywhere brought forth its fruits without labor, by which sickness has ceased, and children have been born without pain to their mothers- the teaching does not much insist, for, however much they may believe, it is difficult to instill into people who find it hard to toil and painful to suffer a per­ception that it is not hard to work nor painful to suffer. But that part of the teaching according to which death and sin are annulled is most strongly insisted on.

그러나 구속의 완성에 대한 부분에서는,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 이후에 지구는 어느 곳에서든지 노동 없이 결실들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서 질병이 그쳤으며, 아기들은 어머니의 고통 없이 태어 났다- 교회의 가르침은 이것을 완강히 고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그것을 깊이 믿는다고 하더라도, 노동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받는 것이 아프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노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고통받는 것이 아프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과 죄가 폐지되었다는 가르침의 부분에 대새서는 가장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다.

It is stated that the dead continue to live. And as the dead are quite unable to affirm that they have died or that they are alive (just as a stone cannot affirm that it can or cannot speak) the absence of a denial is accepted as a proof; and it is asserted that those who have died have not died. With yet greater solemnity and confidence is it asserted that since Christ came, man by faith in him is freed from sin- that is to say, that since Christ's time a man need no longer shed the light of reason on his path through life and choose what is best; he need only believe that Christ has redeemed him from sin and then he is always sinless- that is to say, completely good. According to this teaching people should imagine that reason in them is powerless, and that therefore they are sinless- that is to say, cannot make a mistake.

죽은 자가 계속해서 살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자는 그들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돌이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므로, 부정의 결여가 증거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죽은 자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고 단정된다. 그리고 더 큰 엄숙함과 확신과 함께, 그리스도가 온 후로, 그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다고-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부터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하여 더 이상 자신의 길에 이성의 빛을 비추거나 최선의 것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된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가 자신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였으며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죄가 없다고- 다시 말하면, 완전히 선하다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이성은 힘이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들은 죄가 없다- 다시 말하면, 죄를 지을 수 없다- 고 상상해야만 한다.

A true believer should imagine that since the time of Christ the earth yields her produce without labor, children are born painlessly, there are no diseases, no death, and no sins- that is to say, no mistakes- in other words, that that which is, is not, and that which is not, is.

진실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부터 토지가 노동 없이도 산물을 내고, 고통 없이 아이들이 태어나며, 질병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아무런 죄악도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 으로 상상하여야 된다.

That is what is said by strictly logical theological theory.

이것이 바로 엄격히 논리적인 신학 이론으로 말하는 것이다.

That teaching taken by itself seems harmless. But divergence from the truth never is harmless, but produces consequences that are the more important, the more important is the subject misrepresented. In this case the subject of the falsehood is the whole life of humanity.

그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리에서 이탈함은 결코 해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욱 중대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며, 잘못 이해되는 주제는 더욱 중대해 진다. 이런 경우에 거짓된 주제는 인류의 전체 삶이 되는 것이다.

What in this teaching is called true life is personal, blissful, sinless, and eternal- that is to say, life such as no one has ever known and such as does not exist. Life as it exists, the only life we know, the life we live and that all humanity has lived and still lives, ac­cording to this teaching is a fallen, bad life, merely a simulacrum of the good life proper to us.

이 가르침 안에서 참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적이며, 행복스럽고, 죄에서 벗어난, 영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삶인 것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삶,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삶, 그 삶은 모든 인류가 살아 왔으며 현재도 살고 있으며, 이 가르침에 의하면, 타락하고 악한 삶이며, 단순히 우리에게 적합한 훌륭한 삶의 환영일 뿐이다.

The struggle between the inclination towards an animal life and a rational life, which lies in the soul of each man and forms the essence of each life, is completely set aside by this teaching. That struggle is relegated to an event which happened to Adam in paradise at the time of the creation. And the question whether I should eat or should not eat those apples which tempt me does not exist for us according to this teaching. The question was de­cided once and for all by Adam in paradise in a negative sense. Adam sinned for me- that is to say, he made a mistake, and all men, all of us, fell irreparably, and all our attempts to live rationally are useless and even irreligious. I am incorrigibly bad, and ought to know it. And my salvation does not depend on the fact that I can enlighten my life by reason and, recognizing good and evil, can choose the better path. No; Adam has once and for all done for me what was bad, and Christ has once and for all corrected that evil done by Adam, and therefore I, as a spectator, should grieve for the fall of Adam and rejoice in the redemption by Christ.

동물적인 삶과 이성적인 삶을 향한 성향 사이에서의 투쟁은, 모든 사람의 영혼에 있으며 각자의 삶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임에도, 이 가르침에 의해서는, 완전히 무시된다. 그러한 투쟁은 창조의 시기에 낙원에 있던 아담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옮아 간다. 나를 유혹하는 그 사과들을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말아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이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문제는 아담에 의해서 한 번이자 영원히 아담에 의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결정되어 버렸다. 아담이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지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우리 모두들은, 회복할 수 없이 타락해 버렸으며, 이성적으로 살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들은 소용이 없어졌으며 심지어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구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해졌으며,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나의 구원은 내가 나의 삶을 이성으로서 계몽할 수 있으며, 선과 악을 깨달음으로써, 더 나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지 않는다. 아니다, 아담이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를 위해서 악한 짓을 행하였으며, 그리스도는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아담에 의해서 저질러진 악을 시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방관자로서, 아담의 타락을 슬퍼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에 즐거워해야 한다.

All the love of goodness and truth which lies in the soul of man, all his efforts by reason to shed light on life's phenomena, all man's spiritual life, is not merely unimportant according to this teaching, but is a snare or an arrogance.

사람의 영혼에 들어 있는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사랑, 삶의 현상들에 이성의 빛을 비추려는 그의 모든 노력들,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삶은 이 가르침에 따르면 사소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혹이나 거만함에 지나지 않는다.

Life such as we have on earth, with all its joys and beauties, with all its struggles of reason against darkness- the life of all who have lived before me, and my whole life with its inner strivings and vic­tories of reason, is not a true life, but a fallen, hope­lessly perverted one; while the true sinless life is in faith- that is in imagination, that is to say, in insanity.

우리가 지상에서 가지는 삶, 그 모든 기쁨과 아름다움들, 어둠에 대한 이성의 그 모든 투쟁들- 우리 앞에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삶, 그리고 내적인 갈등과 이성의 승리와 함께하는 나의 전체 삶- 은 참된 삶이 아니며, 타락하고 희망이라고는 없는 왜곡된 것이다; 한편, 죄가 없는 참된 삶은 신앙에 있다- 그것은 상상 속에 있다, 다시 말하면, 정신착란 안에 있는 것이다.

Let a man, setting aside the habit he has re­tained from childhood of accepting all this, try to look simply and straight at this teaching; let him transform himself mentally into a new man, educated outside the range of this teaching, and let him imagine what it would appear like. Surely it is utter insanity.

어린 시절부터 이 모든 것을 받아 들였던 습관들을 던져버리고, 단순히 솔직하고 정면으로 이 가르침을 바라 보도록 하라, 이런 가르침의 범주에서 벗어난 교육으로, 자신을 정신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보라, 그러면 그것이 어떤 교리인지 상상해 보도록 하라. 진정으로 그것은 얼토당토아니한 정신 이상임에 틀림없다.

And, strange and terrible as it was to think it, I could not but admit that it is so, for this alone ex­plained to me the amazing, contradictory, senseless objection which I hear from all sides as to the practicability of Christ's teaching: It is good and would bring happiness to men, but men cannot fulfill it.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고 무서운 일이지만,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실행가능성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들어온 놀랍고, 황당하며, 의미없는 논쟁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익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실행할 수 없다.

Only the representation as existent of that which does not exist, and as non-existent of that which does exist, could lead to this astonishing contradic­tion. And such a false representation I found in the pseudo-Christian faith which has been preached for 1500 years.

오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함만이, 이런 놀라운 모순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거짓된 주장을 나는 1500년 동안 설교 되어온 거짓 기독교 신앙에서 발견하였다.

But the objection to Christ's teaching (that it is good but impracticable) is made not only by believers but also by unbelievers, by people who do not believe, or think they do not believe, in the dogma of the fall and redemption. The objection to Christ's teaching on the score of its impractica­bility is made also by scientists, philosophers, and in general by people who are educated and consider themselves quite free from any superstition and who do not believe, or think they do not believe, in anything; and who therefore consider themselves free from the superstitions of the fall and the re­demption. And so at first it seemed to me. I too thought that these learned people had other grounds for their denial of the practicability of Christ's teaching. But on penetrating deeper into the reason of their denial I became convinced that the non-believers have the same false perception that our life is not what it is, but is what they imagine it to be; and that this conception rests on the same basis as the believers' conception. Those who consider themselves unbelievers do not, it is true, believe in God, nor in Christ, nor in Adam; but in the funda­mental, false conception of man's right to a blissful life, on which everything rests, they believe as firmly or even more firmly than the theologians.

그리스도의 가르침(즉, 좋은 것이지만 실생활에 적용할 수 없다)에 대한 반대는 신자들에 의해서만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이 없는 사람들, 타락과 구원의 교리를 믿지 않거나,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이유에 대해서는 또한 과학자들, 철학자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교육받았으며 자신들을 어떠한 미신으로부터도 매우 자유롭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것도 믿지 않거나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므로 자신들이 타락과 구원이라는 미신들로부터 자유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나 역시 이들 학식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행가능성에 대한 그들의 부정에 대해서 또 다른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정의 이유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보고 나서, 나는 불신자들도 실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똑같이 거짓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관념은 믿는 사람들의 관념과 똑 같은 기초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자신들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그리스도도, 아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행복한 삶의 권리에 대한 근본적이며, 거짓된 관념을 믿으며, 그 위에 모든 것들을 올려 놓고서, 심지어는 신학자들 못지않게 아니 심지어는 신학자들 이상으로 굳게 믿는다.

However much privileged science and philosophy may boast themselves, asserting that they are the guides and directors of man's mind- they are not the directors but the servants. A ready-made out­look on life is always supplied to science by religion, and science only works along the paths indicated to it by religion. Religion shows man the meaning of life, and science and philosophy apply this meaning to various sides of life. And therefore if religion gives a false meaning to life, science, educated to that religious outlook, will apply that false per­ception to the various phases of human life. And that is what has happened with our European-Christian science and philosophy.

특권을 소유한 과학과 철학이, 자신들이 인간의 사상의 선도자며 주관자라고 주장하면서, 아무리 자신들을 뽐내더라도- 그들은 주관자들이 아니라 하인들일 뿐이다. 기성 사회의 인생관은 언제나 종교에 의해서 과학에 공급되었다, 그리고 과학은 언제나 종교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서 활동할 뿐이다. 종교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과학과 철학은 이런 의미를 삶의 다양한 측면에 적용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만일 종교가 삶에 대한 그릇된 의미를 제공한다면, 과학은, 종교의 전망에 맞게 교육되어서, 그러한 그릇된 인식을 사람의 삶의 여러 방면에 적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의 기독교적 과학과 철학에 일어난 것이다.

Church teaching has presented the fundamental meaning of human life as being this, that man has a right to a blissful life and that this bliss is not obtainable by man's exertion but by something outside himself; and this idea underlies all our science and philosophy.

교회의 가르침은 사람의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렇게 제시하였다, 즉, 사람은 행복한 삶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이 행복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외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우리의 모든 과학과 철학에 깔려있다.

Religion, science, and public opinion, all with one voice declare that the life we lead is bad, but that the teaching which shows how we ourselves can become better and thereby make life better, is impracticable.

종교, 과학, 그리고 여론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우리가 영위하는 삶은 나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더 좋아 질 수 있으며, 그리하여 삶을 더 좋게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실행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The teaching of Christ, aiming at improving human life by man's own reasonable efforts, is im­practicable, says religion, because Adam fell and the world is in an evil state.

종교는 말한다, 사람 자신의 이성적인 노력들로서 사람의 삶을 개선함을 목적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실행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하였으며 세상은 악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That teaching is impracticable because man's life is regulated by certain laws which are indepen­dent of man's will, says our philosophy. Philosophy and all science only repeat in other words just what religion announces by the dogma of original sin and redemption.

우리의 철학은 말한다, 그 가르침은 실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삶은 사람의 의지와 관계 없는 특정한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기 때문이다. 철학과 모든 과학은 오직 종교가 원죄와 속죄의 교리에 의하여 선언한 바로 그것을 다른 말들로 반복할 뿐이다.

In the doctrine of redemption there are two fundamental propositions on which everything de­pends: (1) Real human life is a blissful life, but life in the world here is a bad life, irreparable by any effort of man; and (2) Redemption from this life lies in faith.

속죄의 교리에는 모든 것들이 의존하고 있는 두 가지 근본적인 명제들이 있다: (1) 사람의 참된 삶은 행복을 주는 삶이다, 그러나 이곳 세상에서의 삶은 악한 삶이며,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다; 그리고 (2) 이런 삶으로부터의 구원은 신앙에 있다.

These two propositions have come to underlie the outlook on life both of believers and of unbelievers in our pseudo-Christian society. From the second proposition arose the Church with her institutions. From the first come our public opinion and our philosophic and political theories.

우리의 위선적인 기독교 사회에는 이런 두 가지의 명제들이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인생관에 깔려져 있었다. 두 번째의 명제로부터 교회가 그 조직들과 함께 생겨났다. 첫번째 명제로부터는 우리의 여론과 우리의 철학적 및 정치적인 이론들이 생겨났다.

All the philosophic and political theories that justify the existing order, Hegelianism and its children, are founded on that basis. Pessimism, demanding of life what life cannot give and there­fore repudiating life, also arose from it. Materialism, with its wonderful and enthusiastic assertion that man is a process and nothing else, is the lawful child of this doctrine which acknowledges life here to be a fallen life. Spiritualism, with its scientific followers, is the best proof that the scientific and philosophic outlook is not free, but based on the religious doctrine that a blissful eternal life is natural to man.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모든 철학적 정치적 이론들, 헤겔주의자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런 명제를 기반으로 세워졌다. 삶이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다가 삶을 부인하게 된 염세주의도, 역시 그것으로부터 일어났다. 사람은 과정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놀랍고 열성적인 주장을 펴는 물질주의는, 이곳의 삶이 타락한 삶이라고 여기는 이런 교리의 합법적인 후손들이다. 학문적인 추종자들을 거느리는 유심론도, 과학적 및 철학적 견해는 자유롭지 못하며, 행복을 주는 영원한 삶이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는 종교적인 교리에 기반을 두었다고 하는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This perversion of the meaning of life has per­verted the whole rational activity of man. The dogma of man's fall and redemption has hidden from men the most important and legitimate realm of human activity and has shut out of the realm of human knowledge the knowledge of what man should do that he may become happier and better. Science and philosophy, imagining that they are counter­acting pseudo-Christianity and priding themselves thereon, are only serving it. Science and philosophy deal with anything you please, save only with the question how man can himself become better and lead a better life. What is called ethics- moral teaching- has quite disappeared from our pseudo-Christian society.

삶의 의미에 대한 이런 왜곡은 사람의 모든 이성적 활동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사람의 타락과 구원에 관한 교리는 사람들에게서 인류의 활동의 가장 중요하고 합법적인 영역을 숨겨 놓았으며 인류의 지식의 영역에서 사람이 더욱 행복해지고 개선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을 차단시켰다. 과학과 철학은, 자신들이 사이비 기독교에 대적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 점에 대해서 자랑스러워 하고 있지만, 그것을 섬기고 있을 뿐이다. 과학과 철학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다루지만, 어떻게 하면 오직 사람이 스스로 개선되고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제외한다. 소위 윤리학- 도덕적인 가르침- 이라는 것은 우리의 위선적인 기독교 사회에서는 형편없이 사라졌다.

Neither believers nor unbelievers ask themselves how they should live and how use the reason that has been given us; but they ask: Why is our human life not such as we have imagined it should be, and when will it become what we desire?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든 갖지 않은 사람들이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묻는다: 우리 인간의 삶은 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상상한 것과 같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언제 이루어 질 것인가?

Only as a result of that false teaching absorbed into the flesh and blood of our generation, could such an astonishing thing occur as that man- as though he had spat out the appl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which tradition says he ate in para­dise, and had forgotten that the progress of man­kind lies only in solving the contradictions between our rational and our animal natures- should set to work to use his reason in discovering the historic laws of his animal nature and of that alone.

오직 이와 같이 우리 세대까지 살과 피에 흡수되어 온 거짓된 가르침의 결과 때문에, 이토록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즉, 사람은-  마치, 전설에는 낙원에서 그가 과일을 먹었다고 말하지만, 그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과일을 뱉어 버렸으며, 인류의 진보는 오직 우리의 이성적 및 동물적인 본성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함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반드시 자신의 동물적 본능의 역사적 법칙들과 오직 그것만을 발견하는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작업해야 되었다.

Except the philosophic teaching of our pseudo-Christian world, the religions and philosophic teachings of all the nations known to us- Judaism, Confucianism, Buddhism, Brahmanism, and the philosophy of the Greeks- all aim at arranging human life and explaining to people how each one should strive to be better and to lead a better life. All Confucianism consists in personal perfecting of oneself; Judaism, in the personal following of each law of God; Buddhism, in the teaching of how each man can save himself from the evil of life. Socrates taught the personal perfecting of oneself in the name of reason, and the Stoics acknowledged rational freedom as the only basis of a true life.

우리의 사이비적인 기독교 세계의 철학적 가르침을 제외하면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모든 나라들의 종교들과 철학적 가르침들- 유대교, 유교, 불교, 바라문교, 및 그리스인들의 철학- 은 한결같이 사람의 삶을 규제하고, 사람들에게 각자가 더 나아지는 것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설명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공자의 모든 가르침은 자신의 개인적인 완성에 있고; 유태교는, 하나님이 주신 각각의 율법의 개인적인 이행에 있으며; 불교는, 모든 사람이 삶의 악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을 가르침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완성을 가르쳤으며, 스토아 학파는 이성적인 자유를 참된 삶의 유일한 기초라고 인정하였다.

Man's whole rational activity could not but con­sist, and has always consisted, in one thing- in illuminating by reason the striving towards what is good. Free-will, says our philosophy, is an illusion; and it prides itself much on the boldness of this assertion. But free-will is not merely an illusion, it is a phrase devoid of meaning. It is a phrase invented by the theologians and criminalists, and to refute that phrase is to tilt at windmills; but reason- that which illumines our life and obliges us to alter our actions- is not an illusion and cannot be denied. To follow wisdom for the attainment of what is good- in that has always consisted the doctrine of the true teachers of humanity and in that lies the whole teaching of Christ, and, being reason, it can in no way be rejected by reason.

사람의 전체 이성적 활동은 단 한 가지- 이성으로서 선한 것을 향한 노력을 밝혀 주는 것- 에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언제나 있어왔다. 우리의 철학자는 말한다, 자유 의지는 환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주장의 대담함에 많은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자유 의지는 단순히 환상이 아니라, 의미가 결여된 말이다. 그것은 신학자들이나 범죄학자들에 의해서 고안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반박하는 것은 풍차와 싸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성은- 우리의 삶을 밝혀주고 우리의 행위들을 바꾸도록 하는 것으로서- 환상도 아니며 부정될 수도 없다. 선한 것을 획득을 위해서 지혜를 따르는 것- 바로 여기에 언제나 인류의 참된 교사들의 교리가 존재하였으며,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전체 가르침이 놓여 있으며, 그리고 이성이 있으므로, 결코 이성이 이성에 의해서 부정될 수 없다.

The teaching of Christ is the teaching of the son of man that is present in us all- that is to say, it is the teaching of the striving common to all men for what is good, and of the reason, shared by all, which illuminates that striving. (To prove that 'the son of man' means 'son of man' is quite superfluous. To understand by 'son of man' something else instead of what the words mean, one would have to show that Christ to indicate what he meant to say, intentionally used words which have quite another meaning. But even if, as the Church wishes to make out, 'son of man' means son of God, even then 'son of man' also essentially means man, for Christ calls all men the sons of God.)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의 안에 존재하는 사람의 아들의 가르침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선한 것을 위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노력과 그러한 노력을 밝혀주며 모두에 의해서 공유되는, 이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불필요한 일이다. ‘사람의 아들’을 이 말이 의미하는 것 대신에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상당히 다른 뜻을 지닌 말들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처럼, 비록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그렇더라도 ‘사람의 아들’은 역시 근본적으로 사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Christ's teaching of the son of man-  son of God-   which forms the basis of all the Gospels, is expressed most clearly in his talk with Nicodemus. Each man, says he, besides consciousness of his personal life in the flesh, which proceeds from a male parent in the womb of his physical mother, cannot but be con­scious of his birth from above (John iii. 5, 6, 7). That which man is conscious of in himself as free is that which is born of the eternal-  that which we call God (vv. 11, 14). That which is born of God (the son of God in man) we should exalt in our­selves in order to attain true life (vv. 14, 17). The son of man is the son of God 'of a like nature' (not 'only begotten'). He who exalts in himself that son of God above all else, he who believes that life dwells only in that, will not be in discord with life. Discord with life results only because people do not believe in the light within themselves (vv. 18-21) (that light of which it is said in John's Gospel that in it i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an).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모든 복음서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명료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가 말한다, 모든 사람은, 남성의 부모로부터 육체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어나는, 육신으로서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의식함 외에도, 위로부터 자신이 태어남을(요한복음 3장 5,6,7절)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자신의 안에서 자유롭다고 의식하는 것이 영원한 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 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11, 14절).우리는 스스로 참된 삶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으로부터 나는 것 높여야만 한다(14, 17절). 사람의 아들은 ‘같은 본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신의 안에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을 높이는 자, 삶은 오직 그 안에만 머무른 다는 것을 믿는 자는, 삶과 불일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삶의 왜곡은 오직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에 있는 빛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18-21절) (빛 속에 삶이 있으며, 그 삶은 사람의 빛이었다고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빛).

Christ taught us to exalt the son of man, who is the son of God and the light of men, above all else. He says: When you exalt [honor, raise up] the son of man, you will know that I speak nothing of myself (John xii. 32, 44, 49). The Jews did not understand his teaching, and asked: 'Who is this son of man, that must be lifted up?' (John xii. 34). And to this question he replies (v. 35): 'Yet a little while is the light in you. Walk while ye have the light, that darkness overtake you not;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To the question, what is meant by 'lift up the son of man', Christ replies: Live in the light that is in man.

그리스도는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의 아들을 높이 올려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람들의 빛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일[존경하고, 받들어 올릴] 때, 너희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요한복음 12장 32,44,49절). 유태인들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여 물었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누구인데, 그가 높여져야 한단 말인가?’(요한복음 12장 34절). 그리고 이런 질문에 그리스도가 대답한다(35절):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높여져야 한다’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그가 대답한다: ‘사람 안에 있는 빛 안에서 살라.’

The son of man, according to Christ's reply, is that light in which men ought to walk while they have light within them.

그리스도의 대답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 자신들 안에 빛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반드시 걸어 가야 할 빛을 말한다.

Luke xi. 35: 'Look therefore whether the light that is in thee be not darkness.'

누가복음 11장 35절에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하였다.

Matt. vi. 23: 'If the light that is in thee be dark­ness, how great is the darkness!’ says he, teaching the multitude.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는, :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했다.

Before and after Christ men have said the same thing: that a divine light which has descended from heaven dwells in man, and that that light is reason, and that one must serve it only and by its aid seek for what is good. This was said by the teachers among the Brahmins and by the Hebrew prophets, and by Confucius, and Socrates, and Marcus Aurelius, and Epictetus, and by all the true sages-  not the compilers of philosophic theories but those who sought truth for their own welfare and for that of all men.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살기 전에도 또 이후에도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말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이 빛이 사람 안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이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이것을 따라야 하며 그것의 도움으로써 선한 것을 찾아야 한다. 이 가르침은 바라문교의 교사들이, 히브리의 선지자들이, 그리고 공자, 소크라테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에픽테투스, 및 다른 모든 참된- 철학 이론의 편집자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진리를 찾았던- 현자들이 말한 것이다.

But suddenly, according to the dogma of redemption, we admit that it is quite unnecessary to speak or think about this light within us. We must think, say the believers, about the nature of each separate person of the Trinity; what sacraments must or must not be performed; because the salva­tion of man comes not from our efforts, but from the Trinity and the correct observance of the sacraments. We must think, say the non-believers, of the laws which regulate the movements of in­finitely small atoms of matter in infinite space and infinite time; but of what man's reason demands for his good there is no need to think, because the betterment of man's condition does not depend on him, but on general laws which we discover.

그러나 갑자기, 구원의 교리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빛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전혀 필요치 않다고 인정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반드시 삼위일체의 각각의 인격의 성격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성례가 지켜져야 하는지 지켜지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와 성례들을 엄숙히 준수함에서 오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안에서 무한히 작은 물질의 원자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법칙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선을 위해서 사람의 이성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 사람의 상태의 개선은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는 일반적인 법칙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I am convinced that a few centuries hence the so-called 'scientific' activity of our belauded recent centuries of European humanity will furnish an inextinguishable fund of mirth and pity to future generations. For some centuries the learned men of a small western part of the great continent were in a condition of epidemic madness, imagining that eternal blissful life belonged to them, and they occupied themselves with every kind of investiga­tion as to how, and according to what laws, this life would come to them; but they themselves did nothing and never thought of doing anything to make their life better. And what will seem yet more pathetic to the future historian is that he will find that these people had had a teacher who clearly and definitely indicated to them what they should do to live more happily, and that the words of this teacher were explained by some to mean that he would come on the clouds to arrange everything, and by others that this teacher's words were ex­cellent but impracticable, because man's life was not such as they wished it to be and therefore it was not worth while to concern themselves with it, but man's reason had to be directed to the investigation of the laws of life without regard to what is good for man.

지금부터 몇 세기 후면, 우리가 극찬하는 우리 인류의 최근 수 세기 동안의 소위 과학적인 업적은 미래의 세대들에게 꺼질 줄 모르는 조소와 연민 거리를 제공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수 세기 동안 방대한 대륙의 조그만 서쪽의 학자들은, 영원히 행복한 삶이 그들의 것인 양, 유행성 정신병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떤 법칙에 의해서, 이러한 삶이 그들에게 올 것인지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결코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의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더욱더 측은하게 느껴지게 보일 것은, 이 사람들이 명료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그들이 더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그들에게 가리켜준 교사가 있었으며, 어떤 자들은 이 교사의 말을 그가 구름을 타고 와서 세상을 정리할 것이라고, 다른 자들은 이 교사의 말이 훌륭하지만 실행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삶은 그들이 바라는 것과 같지 않으며 그러므로 삶에 관심을 가질 가치가 없으며, 사람의 이성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에 관계없는 삶의 법칙을 연구함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The Church says: Christ's teaching is impracticable because life here is but an imitation of true life; it cannot be good, it is all evil. The best way to live such a life is to despise it and live by faith-  that is, by imagining a future, blissful, eternal life, and to live here as one is living, and to pray.

교회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실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곳의 삶은 단지 참된 삶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훌륭할 수 없다, 그것은 모두 악하다. 이런 삶에서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경멸하고 신앙으로 사는 것이다- 즉, 미래의 행복된 그리고 영원한 삶을 상상하면서,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그대로 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Philosophy, science, and public opinion say: Christ's teaching is impracticable because man's life depends not on that light of reason by which he can himself illuminate this life, but on general laws; and therefore it is not necessary to illuminate this life by reason and to live in accord therewith, but one must live as one is living, firmly believing that according to historical, sociological, and other laws of progress, after we have lived badly a very long time our life will of itself become very good.

철학, 과학 그리고 여론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실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삶은 이런 삶을 스스로 밝히는 그러한 이성의 빛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칙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이성으로 밝게 하거나 그것에 맞추어서 살아 갈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진보에 관한 역사적, 사회학적 및 다른 법칙을 따라서, 아주 오랫동안 악하게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저절로 매우 좋게 변할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People come to a farm and there find everything necessary for their life: a house with all needful utensils, barns full of corn, cellars, vaults containing all kinds of supplies; in the yard are agricultural implements, tools, harness, horses, cows, sheep, and a complete inventory- all that is needful for a well-supplied life. People from various parts come to this farm and begin to make use of all they find there, each only for himself, not thinking of leaving any­thing either for those who are there with him in the house or for those who will come later. Each wishes to have everything for himself. Each hastens to make use of what he can seize, and the destruction of everything begins- strife and a struggle for possession. A milch cow, unshorn sheep and sheep bearing young, are killed for meat; fires are fed with benches and carts and people fight for milk and grain, and spill, scatter, and destroy more than they use. No one eats a morsel quietly, he eats and snarls; a stronger than he comes and takes the piece away, and another takes it from him. Having tor­mented themselves, these people, beaten and hungry, leave the place. Again the master arranges every­thing in the place so that people could live quietly in it. Again in the farm there is abundance, and again passers-by come in; but again there is a scrimmage and a fight; all is wasted in vain; and again, tormented and embittered, people go away, scolding, angry with their comrades and also with their host for having prepared the place badly and insufficiently. Again the good host rearranges the place so that people could live in it; and again the same thing occurs, and again, and again, and again. Then in one of the fresh parties a teacher is found who says to the others, 'Brothers, we are not acting rightly. See how many goods there are in the place and how well it is all arranged! There is enough for us all and there will be a surplus for those who come after us, only let us live reasonably. We will not snatch from one another, but will help one another. Let us sow, and plough, and tend the cattle, and all will be able to live well.' And it happened that some people understood what the teacher said, and those who understood began to do as he bade them; they ceased fighting and snatching from one another and began to work. But the rest, who had either not heard the words of the teacher or had heard but did not believe him, did not follow his advice, but fought as before and spoilt their host's goods and went away. Others came and the same thing occurred. Those who attended to the teacher ever repeated the same thing: 'Do not fight, do not destroy the host's goods, and it will be better for you all. Do as the teacher says.'

사람들이 어떤 농장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한다: 모든 필요한 가재도구를 갖춘 집, 곡식으로 가득찬 곳간, 포도주 저장실, 온갖 것들이 들어 있는 지하저장실과; 정원에는 농기구, 연장들, 마구, 말들, 소들, 양들, 그리고 완전한 재고 등- 윤택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다. 다양한 지역들로부터 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거기서 발견한 모든 것들을, 제각기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탕진하기 시작하며, 그 집안에서 자신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나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남겨 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제각기 모든 것을 자신만이 가지기를 바란다. 각자는 자신이 붙들 수 있는 것을 서둘러서 탕진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파괴- 소유를 위한 싸움과 투쟁- 가 시작된다. 젖을 짜야 하는 암소, 털을 깎지 않는 양 그리고 새끼를 밴 양들도 고기를 먹으려고 죽인다; 의자들과 마차들이 땔감으로 이용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유와 곡식을 얻기 위해서 싸우며, 쏟고 흐트리며, 그들이 이용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파괴한다. 어느 누구도 한 입도 조용히 먹지 않는다, 먹으면서 으르렁거리는 것이다; 그 보다 더 힘센 자가 와서는 고기 조각을 강탈한다, 그리고 다른 자가 그것을 또 빼앗는다. 스스로를 고문하고 난 뒤에, 이 사람들은 얻어터지고 굶주린 채로 그곳을 떠난다. 다시 주인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리하여 사람들이 그곳에서 평화스럽게 살수 있도록 한다. 다시 농장은 풍요로워지며, 그리고 다시 나그네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다시 비명소리와 싸움이 일어난다; 모든 것은 허무하게 탕진된다; 그리고 다시, 고문당하고 악에 받혀서, 동료들에게 그리고 또한 그들의 주인에게 준비가 소홀하며 빈약하다고 욕을 하고 분통을 터트리며, 사람들은 가버린다. 다시 마음 좋은 주인은 그곳을 정리하여 사람들이 그 안에 살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그리고 다시, 그리고 다시. 그런데 새로운 무리 중의 하나 안에 한 교사가 나타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 보라, 이곳에 얼마나 많은 재물들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잘 정돈되어 있는가!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충분한 양이 있으며,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남을 정도로 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합리적으로 살자. 우리는 서로의 것을 강탈하지 말고 서로를 도와야 한다.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갈며, 가축을 돌보자, 그러면 모두가 잘 살 것이다.’ 그러자 몇 사람이 그가 말한 것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해한 사람들은 그가 그들에게 권고한 것을 이행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싸움질하고 강탈하는 것은 중단하였다 그리고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교사의 말들을 듣지 못하였거나, 믿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이전처럼 싸웠으며 그들의 주인의 재물들을 파괴하고 가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교사의 말을 경청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똑같이 말했다: ‘싸우지 말라, 주인의 재산을 파괴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들 모두는 더 잘 살게 될 것이다. 교사가 말하는 대로 행하라.’

But there were still many who had not heard or did not believe, and matters long went on in the old way. This was all comprehensible, and things might happen so as long as people did not believe what the teacher said. But at last, it is told, a time came when all in the place had heard the teacher's words, all understood them, and not only understood them but acknowledged that it was God Himself who spoke through the teacher and that the teacher was himself God, and all believed every word the teacher spoke to be sacred. And it is told that after this, instead of all living as the teacher advised, no one any longer refrained from the brawls, and they started thrashing one another and all began to say that we know now for certain that it should be so and that nothing else is possible!

그러나 아직도 듣지 못했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옛날과 같은 사태들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모두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교사가 말한 것을 믿지 않은 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전해지는 이야기는, 마침내 그 농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교사의 말들을 듣게 된 때가 왔다, 모두가 그 말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교사를 통해서 말한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었으며 그 교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그 교사의 모든 말씀을 신성하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은 교사가 권고한 대로 사는 대신에, 어느 누구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으며, 서로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우리는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What does it all mean ? Even cattle manage to eat their fodder so that it should not be wasted uselessly, but men, having learnt how they might live better and believing that God Himself ordered them to do so, live even worse, because they say it is impossible to live otherwise. These people have imagined something that is not true. Well, what could these people at the farm have imagined, which let them, having believed the teacher's words, continue to live as before, snatching from one another, fighting, and ruining the goods and themselves? The teacher had told them: 'Your life at this farm is bad; live better and your life will become good'; but they imagined that the teacher had condemned any kind of life at that farm, and had promised them another, a good life, not at that farm but somewhere else. And they decided that this farm was a temporary inn, and that it was not worth while arranging to live well in it, but that it was only necessary to be on the alert not to miss the good life promised in another place. Only so can the strange conduct of these people at the farm be explained who believed the teacher to be God, and of those others who considered him a wise man and his words to be true, but continued to live as before in contra­diction to his advice.

이 모든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심지어 가축들도 그들의 먹이가 쓸데 없이 낭비되지 않도록 먹는데, 사람들은,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웠으며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그렇게 행하라고 명령하였는데도, 더 악하게 살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과 다르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자신들이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진실이 아닌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교사의 말을 믿었음에도, 이전처럼 계속해서 살아가며, 서로의 것을 강탈하고, 싸우며 재산과 자기 자신들을 파괴하면서, 농장에서 이 사람들은 무엇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교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농장에서의 너희의 삶은 악하다; 선하게 살아라, 그러면 너희의 삶은 훌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사가 농장에서의 어떤 형태의 삶을 비난했으며, 그들에게 다른 삶, 그 농장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다 복된 삶을 약속했다고 상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농장은 임시로 머무는 여관이며, 그 안에서 잘 살아 볼 준비를 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다른 장소에 약속된 복된 삶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된다고 마음 먹었다. 오직 이런 방법에 의해서만, 그 교사가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농장에 있던 이런 사람들의 행위와, 그 교사를 현자로 여기고 그의 말이 진리이지만, 이전처럼 그의 권고와 모순되도록 계속해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Men have heard all and understood all; but have let slip past their ears that the teacher said that men must create their own happiness here, at this farm at which they have met; and have imagined that this farm was an inn and that the real one will be some­where else. And from this has come their amazing argument that the words of the teacher were very admirable, and were even the words of God Him­self, but that it was now difficult to obey them.

사람들은 모든 것을 들었으며 모든 것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교사가,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 자신의 행복을 여기서 그들이 모인 이 농장에서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그들의 귀가 흘려 듣게 하였으며; 이 농장은 여관이며 참된 곳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교사의 말이 너무나 훌륭하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지금 따르기는 어렵다고 하는 놀라운 주장이 나온 것이다.

If only people would cease from destroying them­selves and expecting someone to come and help them- Christ on the clouds with the sound of trumpets, or an historic law, or a law of the differentiation and integration of forces! No one will help them unless they help themselves. Nor do they need help. They only need, instead of expecting anything from heaven or from earth, to cease to destroy themselves.

만일 사람들이 오직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을 멈추고 누군가가 와서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 트럼펫 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는 그리스도, 또는 역사적 법칙, 또는 힘의 분리와 결합의 법칙- 를 버린다면! 그들이 스스로를 돕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나 땅으로부터 어떤 것을 바라는 대신에, 그들은 오직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을 중지할 필요가 있다.

   
       
   

 ] 위로 ] 서문 ] I. 복음 교훈의 열쇠 ] II. 무저항의 명령 ] III.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 IV.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 VI. 다섯 가지 계명 ] [ VII. 거짓 교리 ] VIII. 삶의 길 ] IX. 신앙과 행위 ]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 XI. 죽은 교회 ] XII. 신앙이란 무엇인가? ] Notes ] Maude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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