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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VIII. THE PATH OF LIFE

VIII. 삶의 길

   

But granting that Christ's teaching is beneficial to the world- granting that it is rational and that one has no reasonable right to reject it- still, what can one man do in a world of those who do not act on Christ's law? If all men suddenly agreed to fulfill Christ's teaching its observance would be possible; but one man cannot go against the whole world.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세상에 유익하다고 하자- 그의 가르침은 합리적이며 아무도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하자- 그래도, 그리스도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행하겠다고 동의한다면 그것의 이행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전체 세계에 맞설 수는 없다.

'If', it is generally said, 'I alone, in a world of those people who do not fulfill Christ's law, fulfill it: give away what I have, turn my cheek to the smiter without defending myself, do not even put in an appearance to take the appointed oaths or when summoned to war, and submit to be plundered; I shall, if I do not die of hunger, get beaten to death, or if not beaten, imprisoned or shot. So I shall have sacrificed all my happiness in vain and ruined my whole life.'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율법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나 혼자만이, 그것을 실행한다면: 내가 가진 것을 주어 버리고, 나를 방어함이 없이 나를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려 대고, 심지어 겉으로라도 정해진 맹세들을 하지 않거나 전쟁에 나가지 않거나, 약탈당함에 복종한다면; 나는, 굶주림으로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맞아 죽거나, 또는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투옥되거나 총살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의 모든 행복을 헛되이 희생하게 될 것이며 나의 전체 삶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This reply is based upon the same misunderstanding as the reply about the impracticability of Christ's teaching.

이러한 대답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행 불가능성에 대한 대답과 동일한 오해에 기초 되어 있다.

It is what one usually hears said, and I myself agreed with it until I had quite emancipated myself from Church teaching and so became able to under­stand the full meaning of Christ's doctrine about life.

이것은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며, 나 자신도 내가 교회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그리하여 삶에 관한 그리스도의 교리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 까지는 그것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Christ offers his teaching of life to redeem us from the ruinous life people live who do not follow his teaching; and suddenly we declare that we should be glad to follow his teaching were we not sorry to ruin our life. Christ teaches us how to escape from our ruinous life, and we grudge the sacrifice of that same life. It follows that we are far from considering our life ruinous, but consider it something in our possession, real and valuable. In that acknowledgement of our present worldly life as a real thing and something that is our own, lies the mistake which hinders a comprehension of Christ's teaching. Christ was aware of this mistake which causes people to consider this worldly life of theirs as some­thing real that belongs to them, and by a whole series of discourses and parables he showed them that they have no right to life, and possess no life till they obtain true life by rejecting the shadow they now call their 'life'.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파멸적인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삶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는 만일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그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파멸적인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동일한 삶을 희생하는 것을 아까워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삶이 결코 파멸적이 아니며, 우리의 소유의 일부로 여기며, 진실되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결과이다. 우리의 현재 세상의 삶을 진실한 거시며 우리 자신의 것인 어떤 것으로 용인함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이해를 가로막는 오류가 놓여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세속적인 그들의 삶을 그들 자신에게 속하는 진실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이런 오류를 깨달았으며, 많은 강연들과 비유로서, 그들이 삶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으며, 그들이 지금 그들의 ‘삶’이라고 부르는 환상을 버리고 참된 삶을 얻을 때까지는 아무런 삶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In order to understand Christ's doctrine of saving one's life, one must first understand what was said by all the prophets, what was said by Solomon, by Buddha, and by all the sages of the world concern­ing man's personal life. One may, as Pascal ex­presses it, disregard the matter and carry a shield before one to hide the abyss of death towards which we are all running; but one need only consider what man's isolated personal life is, to convince oneself that this whole life, if it be only a personal life, has for each separate person no sense or meaning, but is a malicious mockery of one's heart and reason and of all that is good in man. Therefore to understand Christ's teaching one has first of all to bethink oneself and to consider. It is necessary that in us should take place: that is what Christ's forerunner, John the Baptist, when preaching, said to people who were ensnared like ourselves. He said: 'First of all, repent- that is, bethink yourselves. Even now is the axe laid to the root of the trees to cut them down. Death and destruction are here beside each one of you. Do not forget it: bethink yourselves.' And Christ, beginning his teaching, says the same thing: 'Repent, or you will all perish.'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사람의 개인적인 삶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이 말한 것, 솔로몬, 부처 그리고 세상의 모든 현자들이 말한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파스칼이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문제를 무시하고 우리가 달려가는 곳에 있는 죽음의 심연을 가리기 위해서 우리 앞에 방패를 들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의 고립된 개인적인 삶이 무엇인지 오직 고려해 본다면, 이런 전체 삶은, 만일 그것이 오직 개인 만의 삶이라면, 제각기 별개의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런 감각이나 의미가 없으며, 우리의 마음이나 이성에 대한 그리고 사람 안에 있는 선한 모든 것에 대한 심술궂은 조롱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회개하고 되돌아 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 회개가 일어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앞 사람인 세례 요한이 설교할 때에, 우리와 같이 유혹에 빠진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하라- 즉, 반성하라. 바로 지금 도끼가 나무를 베어 넘기기 위해서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죽음과 파멸이 너희들 각자의 옆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잊지 말라: 회개하라.’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똑같은 것을 말한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멸망하리라.’

In Luke xiii. 1-5, Christ spoke of the destruction of the Galileans slain by Pilate, and he said: 'Think ye that these Galileans were sinners above all the Galileans because they have suffered these things? I tell you, Nay: but, except ye repent, ye shall all in like manner perish. Or those eighteen, upon whom the tower in Siloam fell, and killed them, think ye that they were offenders above all the men that dwell in Jerusalem? I tell you. Nay: but, except ye repent, ye shall all likewise perish.'

누가복음 13장 1-5절에서,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의 파멸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입음으로써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 보다도 더 죄가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들이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기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Had he lived in our day in Russia he would have said: Think ye that those who were burnt in the circus at Berdichev, or those who perished at the Kukuevsky embankment were worse than others? You also will all perish unless you bethink your­selves and find in your life that which does not perish. The death of those crushed by the tower or burnt in the circus, horrifies you; but your death, just as terrible and as unavoidable, awaits you, and in vain do you try to forget it. If it comes un­expectedly it will be all the more terrible.

그리스도가 오늘날 우리 나라에 살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베르디체프의 서커스에서 불에 타죽은 사람이나, 쿠쿠에브스키 제방에서 참사당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다고 생각하는가? 너희도 회개하여 소멸되지 않는 것을 너희 삶에서 찾지 않는다면 너희들 또한 모두 멸망할 것이다. 탑에 깔려서 또는 서커스에서 불타 죽음이 너희들을 두렵게 한다; 그러나 너희의 죽음은, 그와 똑같이 무섭고 피할 수 없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것을 잊으려 애쓰지만 헛된 일이다. 만일 죽음이 예기치 않게 온다면, 그것은 더욱 무서울 것이다.

He says (Luke xii. 54-7): 'When ye see a cloud rising in the west, straightway ye say, There cometh a shower; and so it cometh to pass. And when ye see a south wind blowing, ye say. There will be a scorching heat; and it cometh to pass. Ye hypo­crites, ye know how to interpret the face of the earth and the heaven; but how is it that ye know not how to interpret this time? And why even concerning yourselves judge ye not what is right?'

그는 말한다(누가복음 12장 54-7):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불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별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You can forecast the weather by its indications; how is it you perceive not what will befall yourselves? Avoid danger, safeguard your life as much as you please, and all the same, if Pilate does not kill you a tower will fall on you, or if neither Pilate nor the tower destroys you, you will die in your bed with yet greater suffering.

너희는 날씨를 그 징조를 보고서 예측할 수 있다; 어찌하여 너희는 자신들에게 일어날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위험을 피하라,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너희의 삶을 보호해 보아라,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빌라도가 너희를 죽이지 않으면 탑이 너희 위를 덮칠 것이며, 빌라도나 탑이 너희를 파멸시키지 않으면, 하지만 너희 침대에서 그 보다 더 큰 고통으로 죽을 것이다.

Make a simple calculation, as worldly people do when they undertake anything: either to build a tower, or to go to war, or to erect a factory. They plan and toil at an undertaking that may have a reasonable end.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업을 시작할 때 행하는 것처럼, 탑을 세우든, 전쟁을 일으키든, 아니면 공장을 세우든 간단한 계산이라도 해보라. 그들은 사업이 합당한 결과를 얻도록 계획을 세우고 노력할 것이다.

Luke xiv. 28-31: 'For which of you, desiring to build a tower, doth not first sit down and count the cost, whether he have wherewith to complete it? Lest haply, when he hath laid a foundation, and is not able to finish, all that behold begin to mock him, saying, This man began to build and was not able to finish. Or what king, as he goeth to en­counter another king in war, will not sit down first and take counsel whether he is able with ten thousand to meet him that cometh against him with twenty thousand?'

누가복음 14장 28-31절에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Is it not really senseless to work at something which, however much you may try, will never be accomplished ? Death will always come sooner than the completion of the tower of your worldly happi­ness. And if you know in advance that however you may strive against death, not you, but he, will conquer, is it not better to refrain from struggling against it, and not to devote your life to what will certainly perish, but rather seek some undertaking which will not be destroyed by inevitable death?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에 수고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지 않는가? 죽음은 언제나 너희의 세상 행복의 탑의 완성 보다도 빨리 온다. 그리고 만일 너희가 아무리 죽음에 맞서서 싸우더라도, 너희가 아니라, 죽음이 너희를 이길 것임을 미리 안다면, 그것에 맞서 싸울 것을 체념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도 파괴하지 못하는 어떤 사업을 찾음이 낫지 않겠는가?

Luke xii. 22-7: 'And he said unto his disciples, Therefore I say unto you, Take no thought for your life, what ye shall eat; nor yet for your body, what ye shall put on. For the life is more than the food, and the body than the raiment. Consider the ravens, that they sow not, neither reap; which have no store- chamber, nor barn; and God feedeth them: of how much more value are ye than the birds! And which of you by being anxious can add a cubit unto his stature? If then ye are not able to do even that which is least, why are ye anxious concerning the rest? Consider the lilies, how they grow: they toil not, neither do they spin; yet I say unto you,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was not arrayed like one of these.'

누가복음 12장 22-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 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로 만들지도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이 못하였느니라.’

However much you may concern yourself about your body and your clothes, no one can add a single hour to his life. Is it not senseless then to concern yourself about something you cannot do?

너희들이 너희 육체와 의복에 대해서 아무리 염려하더라도, 아무도 자신의 삶에 단 한 시간도 늘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염려함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You know very well that your life will end with death, and you exert yourself to safeguard your life by property. Life cannot be safeguarded by pro­perty. Understand that this is an absurd deception with which you delude yourself.

너희는 너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너희의 삶을 재산으로 보증받으려 노력한다. 삶은 재산으로 보증될 수 없다. 이것은 너희 스스로를 현혹하는 터무니 없는 기만임을 알아야 한다.

The meaning of life cannot consist, Christ says, in what we possess and what we acquire- what is not ourselves- it must consist in something else.

그리스도는 말한다, 삶의 의미는 우리가 소유한 것과 우리가 얻은 것- 우리 자신이 아닌 것- 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He says (Luke xii. 15-21): 'A man's life consisteth not in the abundance of the things which he possesseth. The grounds of a certain rich man', he says, 'brought forth plentifully: and he reasoned within himself, saying, What shall I do, because I have not where to bestow my fruits? And he said, This will I do: I will pull down my barns, and build greater; and there will I bestow all my corn and my goods. And I will say to my soul, Soul, thou hast much goods laid up for many years; take thine ease, eat, drink, be merry. But God said unto him, Thou foolish one, this night is thy soul required of thee; and the things which thou hast prepared, whose shall they be? So is he that layeth up treasure for himself, and is not rich toward God.'

그가 말한다(누가복음 12장 15-21절):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리스도가 말한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자가 이와 같으니라.’

Death always, every instant, stands over you. And therefore (Luke xii. 35, 36, 38, 39, 40): 'Let your loins be girded about, and your lamps burning; and be ye yourselves like unto men looking for their lord, when he shall return from the marriage feast; that, when he cometh and knocketh, they may straightway open unto him. And if he shall come in the second watch, and if in the third, and find them so, blessed are those servants. But this ye know, that if the master of the house had known in what hour the thief was coming, he would have watched, and not have left his house to be broken through. Be ye also ready: for in an hour that ye think not the Son of man cometh.'

죽음은 언제나, 매 순간마다, 우리 위에 서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말한다(누가복음 12장 35, 36, 38, 39, 40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와서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송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The parable of the virgins awaiting the bride­groom, and of the end of the age and the day of judgment- all these passages, in the opinion of all the commentators, besides relating to the end of the world also relate to death, which stands always before us every hour.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비유와 세상의 종말과 마지막 심판에 관한 비유는- 이 모든 구절들은, 모든 주석가들의 의견에서, 세상의 종말에 관련함 외에도, 죽음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 죽음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Death, death, death awaits you every second. Your life passes in the presence of death. If you labor personally for your own future, you yourself know that the one thing awaiting you is- death. And that death ruins all you work for. Consequently life for oneself can have no meaning. If there is a reasonable life it must be found elsewhere; it must be a life the aim of which does not lie in preparing further life for oneself. To live rationally one must live so that death cannot destroy life.

죽음, 죽음, 죽음이 매초마다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너희의 삶은 죽음 앞에서 지나간다. 만일 너희가 개인적으로 너희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한다면,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 유일한 것은- 죽음이란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너희가 바라며 일한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만일 이성적인 삶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더 나은 삶을 준비함에 목적을 두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

Luke x. 41: 'Martha, Martha, thou art anxious and troubled about many things: but one thing is needful.'

누가복음 10장 41절에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느니라.’

All the innumerable things we do for our own future are unnecessary: it is all deception with which we delude ourselves. Only one thing is needful.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행하는 무수한 모든 일들은 소용이 없다: 그것은 모두가 우리가 스스로를 현혹하는 기만이다. 오직 한가지 만이 필요할 뿐이다.

From the day of man's birth, his position is such that inevitable destruction awaits him- that is to say, a meaningless life and a meaningless death, unless he finds that one thing necessary for true life. It is that one thing which Christ shows to men. He does not invent it or promise to give it by his divine power, he only shows people that, together with that personal life which is certainly a deception, there must be something that is true and not a deception.

사람이 출생하는 날부터, 그의 운명에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이 기다린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참된 삶을 위해 필요한 한 가지를 찾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삶과 의미없는 죽음이 기다린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그 한 가지이다. 그는 자신의 신적인 힘으로 그것을 고안하지도 그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며, 그는 오직, 분명히 기만인 그런 개인적인 삶과 함께, 진실하면서 기만이 아닌 어떤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뿐이다.

In the parable of the husbandmen (Matt. xxi. 33-42) Christ explains the source of the error which hides that truth from men and causes them to mis­take the phantom of life (their own personal life) for true life.

농부들의 비유(마태복음 21장 33-42절)에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진리를 숨기며 그들이 삶의 환상(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진리의 삶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오류의 근원을 설명한다.

Men living in the cultivated garden of a householder took it into their heads that they owned that garden. And from this false conception flowed a series of insensate and cruel actions performed by them which ended in their expulsion, in their being ejected from that life. In just such a way have we imagined that the life of each of us is his own personal possession and that we have a right to it and can do with it as we please, bound by no obli­gation to anyone. And for us, having imagined this, a similar series of insensate and cruel actions and misfortunes is inevitable, resulting in a similar expulsion from life. And as the husbandmen thought that the more cruel they were the better would they secure themselves (for instance, by killing the messengers and the householder's son), so we also imagine that the more cruel we are the better we shall be safeguarded.

어떤 주인의 경작된 포도원에 살던 사람들이 그들이 그 포도원을 소유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그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일련의 어리석고 잔인한 행동들이 흘러나오고 결국은 그들은 추방되어서, 그들이 그러한 삶에서 제외되는 결과를 낳았다. 바로 이와 똑같이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소유이며 우리가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의무를 지지 않으며, 그것을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렇게 상상하고 있어서, 유사한 일련의 어리석고 잔인한 행위들과 불행들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삶으로부터 비슷하게 추방되게 되었다. 그리고 농부들이 잔인할수록 그들이 더욱 유리하게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예를 들면, 주인의 심부름꾼과 아들을 살해함으로써), 우리 또한 잔인할수록 더 확실히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As the inevitable end of the husbandmen who would not yield the fruit of the garden to anyone was that the householder expelled them, so also will be the end of those who imagine personal life to be real life. Death drives them from life, replacing them by others; and this not as a punishment but merely because they have not understood life. As the dwellers in the garden had either forgotten or wished to ignore the fact that the garden was handed to them ready cultivated, hedged, and supplied with a well, and that someone had labored there before and therefore expected them to work; so people living a personal life have forgotten, or wish to forget, all that was done for them before their birth and is being done all the time they are alive, and that something is therefore expected of them: they wish to forget that all the good things of life which they use have been given and are being given, and should therefore be passed on and returned.

포도원의 소산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으려던 농부들의 피할 수 없는 종말은 포도원의 주인이 그들을 추방하였던 것처럼, 개인적인 삶이 참된 삶인 것으로 상상한 사람들의 종말 역시 그러할 것이다. 죽음은 그들을 삶으로부터 몰아 내며, 다른 사람들로 대체한다; 그리고 이것은 처벌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삶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도원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그 포도원이 이미 경작되어서, 울타리가 쳐지고, 우물도 있으며, 그리고 누군가가 이전에 그곳에서 일했으며, 그러므로 그들도 일할 것이 요구되는 상태로 그들에게 넘겨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거나 잊기를 원했던 것처럼,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들의 출생 이전에 그들을 위해서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언제나 행해지고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에게서도 무엇인가가 요구된다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잊기를 원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훌륭한 것들이 주어졌거나 주어지고 있으며, 계속해서 전해져야 하며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기 원한다.

This correction of the understanding of life, this is the corner-stone of Christ's teaching, as he said at the end of that parable.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as the husbandmen in the garden they had not planted should have understood and realized that they owed more to the householder than they could repay, so we also should understand and feel that, from the day of our birth to our death, we are overwhelmingly in debt to others, to those who lived before us, those now living, and those who will live, and to that which was, is, and will be - the source of all things. They should understand that each hour of their life, while they retain it, they admit that obligation, and that therefore a man living for himself, who denies that obligation uniting him with life and with the source of life, deprives himself of life, and must understand that by living so he destroys his life- while wishing to save it, as was repeatedly said by Christ.

이러한 삶의 이해에 대한 교정, 이런 또는 회개가, 그리스도가 이 비유의 마지막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초석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들이 재배하지 않은 포도원에 살고 있는 농부들이, 그들이 갚아야 하는 것 보다도 더 많이 주인에게 빚졌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듯이, 우리도 역시, 우리가 태어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앞에 살았던 사람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것- 만물의 근원- 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음을 반드시 깨닫고 느껴야 한다. 그들은 삶의 매 시간마다, 그들이 빚을 지고 있는 한, 그러한 의무를 인정해야 하며, 그러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삶의 근원을 연결하여 주는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박탈하는 것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하며, 그렇게 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계속해서 말하듯이, 그것을 보존하려고 바라는 동안-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That only is true life which carries on the life of the past, promotes the welfare of the present, and prepares the welfare of the future.

과거의 삶을 지속하고, 현재의 복리를 증진하며, 미래의 복리를 준비하는 것이 오직 참된 삶이다.

To participate in that life a man must forgo his own will and do the will of the Father of life who has given life to the Son of man.

이러한 삶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자기 자신의 의지를 버려야 하며 사람의 아들에게 삶을 주신 삶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

In John viii. 35, Christ, again expressing the same thought, says that a slave who follows his own will and not the will of the master abideth not in the house for ever: only the son, who fulfilleth the will of the Father, abideth for ever.

요한복음 3장 35절에서, 그리스도는, 다시 똑같은 사상을 표현하면서, 말한다: 자기 자신의 의지를 따르고 아버지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종은 그 집에 영원히 살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의 의지를 실행하는 자, 즉, 오직 아들 만이 영원히 살 것이다.

The will of the Father of life is not the life of an individual man, but of the only son of man dwelling within men, and therefore a man preserves his life only when he takes his life as a loan, a talent en­trusted to him by the Father for the service of the life of all, and lives not for himself but for the son of man,

삶의 아버지의 의지는 개인이 아니라, 오직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람의 아들의 삶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담보로서 자신의 삶을 볼 때, 모든 사람의 삶에 봉사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그에게 맡긴 재능으로서 자신의 삶을 볼 때,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을 위해서 살 때 오직 자신의 삶을 보존한다.

Matt. xxv. 14-46: A master gave part of his property to each of his bondsmen and, without giving them any instructions, left them alone. Some of the bondsmen, though they had received no orders from their master as to the use of his property, understood that it was not theirs but the master's, and that it should increase; and they worked for their master. And those who worked for their master became partakers in the master's life, but those who did not work were deprived of what had been given them.

마태복음 25장 14-46절에서: 어떤 주인의 그의 하인들 각자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고,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고서 그냥 떠났다. 어떤 하인들은, 그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라는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았지만, 그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며 재산을 늘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주인을 위해서 일했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을 위해서 일한 사람들은 주인의 삶에 동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것마저 빼앗겨 버렸다.

The life of the son of man is given to all men and they are not told why it is entrusted to them. Some understand that life is not their own, but is received as a gift, and that they should serve the life of the son of man, and they live accordingly. Others, on the pretext of not understanding the aim of life, do not serve life. And those who serve life merge with the source of life, while those who do not serve life are deprived of it. And (in verses 31 to 46) Christ tells us wherein the service of the son of man consists, and what the reward of that service is. The son of man, as Christ expressed it, will say like a king: 'Come, ye blessed of my Father, inherit the kingdom, for ye gave me meat and drink, clothed me, took me in and comforted me, for I am ever one and the same, in you and in these little ones whom you have pitied and to whom you have done good. You have not lived the personal life, but the life of the son of man; therefore you have eternal life.'

사람의 아들의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 그것이 왜 그들에게 주어졌는지 듣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직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며, 사람의 아들의 삶을 섬겨야 한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 합당하게 산다. 다른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구실로, 삶을 섬기기 않았다. 그리고 삶을 섬긴 사람은 삶의 근원과 연합되며, 삶을 섬기기 않는 사람은 그것을 빼앗긴다. 그리고 (31-46절에서)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을 섬김이 무엇에 있으며, 그러한 섬김의 보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은 왕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영생에 들어가리라.’

Only of eternal life of that kind does Christ teach in all the Gospels, and, strange as it may sound to say it of Christ, who personally rose and promised resurrection to all, never did Christ by a single word assert a personal resurrection and personal immortality beyond the grave; and to the restoration of the dead in the kingdom of the Messiah, which the Pharisees taught, he gave a meaning which excluded the conception of personal resurrection.

그리스도는 모든 복음서에서 오직 이런 종류의 영원한 삶에 대해서만 가르친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그는 개인적으로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을 약속하였으면서도, 그는 결코 무덤을 떠난 개인적인 부활 그리고 개인적인 불멸을 단 한 마디의 말로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였던 구세주의 왕국에서 죽은 자의 회복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개인적인 부활의 개념을 배제한 의미를 말했다.

The Sadducees denied the restoration of the dead. The Pharisees acknowledged it and it is now acknowledged by orthodox Jews.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회복을 부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은 오늘날 정통 유태교인들에게 인정되고 있다.

The restoration of the dead (and not the resur­rection, as the word is incorrectly translated), ac­cording to the belief of the Jews will be accomplished at the coming of the time of the Messiah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on earth. And Christ, encountering this belief in a temporary, local, and corporeal resurrection, denies it and puts in place of it his teaching of eternal life in God.

죽은 자의 회복은(그리고 부활이 아니라, 왜냐하면 이 말이 부정확하게 번역되었으므로), 유태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구세주의 시대가 와서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 질 때 성취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일시적이며, 지역적이고, 육체적 부활에 대한 이런 신앙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부인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으로 대신한다.

When the Sadducees, who did not acknowledge the restoration of the dead, asked Christ, whom they supposed to share the view of the Pharisees, 'To whom will the wife of the seven brothers belong?' he replies clearly and definitely on both points.

사두개인들은, 사자의 회복을 부인하였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의 의견과 함께하는 것으로 상상하면서, ‘7형제들의 아내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하고 그리스도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는 명료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두가지 점에 대해서 대답한다.

He says (Matt. xxii. 29-32; Mark xii. 24-7; Luke xx. 34-8): 'Ye do err, not knowing the Scriptures, nor the power of God.' And rejecting the Phari­sees' view, he says: The restoration of the dead is neither corporeal nor personal. Those who attain to a restoration from the dead become sons of God and live like the angels (the powers of God) in heaven (i.e. with God); and personal questions-  such as whose wife a woman will be- cannot exist for them, for they, united with God, cease to be personalities. 'As touching the restoration of the dead', says he, replying to the Sadducees who only acknowledged earthly life, 'have ye not read that which was spoken unto you by God?' In the book of Moses it is said that God from the bush spake unto Moses, saying, 'I am the God of Abraham, and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If God said to Moses that he is the God of Jacob, then Jacob is not dead for God, since God is the God of the living only and not of the dead. For God, all art alive. And therefore if there is a living God, that man also lives who has entered into communion with the ever-living God.

그는 말한다(마태22장 29절과 32절, 마가 12장 24-27절, 누가 20장 34-38절):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은 자의 회복은 육체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에서 회복에 도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에서 천사(하나님의 권능들)처럼 살며, 이들에게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개인적인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들은- 예를 들면 어떤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는-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연합하므로, 개인들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오직 지상의 삶만을 인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대답하면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죽은 자의 회복에 관하여, 너희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한 말을 읽지 않았느냐?’ 모세의 책에 기록되기를 관목 속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하였느니라.’ 만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이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면, 야곱은 하나님에게 죽은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산 자의 하나님이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두가 살아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만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다면,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과 교통함에 든 사람도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다.

Against the Pharisees Christ says that the restora­tion of life cannot be corporeal and personal. Against the Sadducees he says that besides a personal and temporary life there is also a life in communion with God. .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에게 삶의 회복은 육체적이거나 개인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 사두개인들에게는 개인적이며 일시적인 삶 외에도 또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이 있다고 말한다.

Christ denies the personal, the corporeal resur­rection, but acknowledges a restoration of life in a man who merges his life into God's. Christ teaches salvation from personal life and places that salva­tion in the exaltation of the son of man and life in God. Uniting this teaching of his with the Jewish doctrine of the coming of a Messiah, he speaks to the Jews of the raising of the son of man from the dead, meaning by this not a corporeal and personal restoration of the dead, but an awakening of life in God. He never spoke of a corporeal, personal resur­rection. The best proof that he never preached the resurrection of man is furnished by the two solitary passages quoted by the theologians in proof of his having taught the doctrine of resurrection. These two passages are Matt. xxv. 31-46 and John v. 28,29. The first of these speaks of the coming, i.e. of the restoration, the exaltation, of the son of man (just as in Matt. x. 23) and therefore the majesty and power of the son of man are compared to a king. In the second passage what is spoken of is the restoration of true life here on earth, as it is ex­pressed in the preceding twenty-four verses.

그리스도는 개인적이며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하지만,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것과 연합하는 사람에게서 삶의 회복을 인정한다. 그리스도는 개인적인 삶으로부터의 구원을 가르치며 그런 구원을 사람의 아들을 높임과 하나님 안에서의 삶에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가르침을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유태인들의 교리와 결합하여, 그리스도는 유태인들에게 죽은 자로부터 사람의 아들의 일어섬을 말하며, 이것은 죽은 자의 육체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삶을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는 결코 육체적, 개인적 부활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부활을 설교하지 않았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그가 부활의 교리를 가르쳤다는 증거로서 신학자들에게 인용되는 두 가지의 유일한 구절을 들 수 있다. 이 두가지 구절들은 마태복음 25장 31-46절 및 요한복음 5장 28, 29절이다. 이 중에서 첫째 구절에서는 강림, 즉, 사람의 아들의 회복, 높임(마태복음 10장 23절과 똑같이)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의 위엄과 권능이 왕과 비교된다. 두번째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그 앞의 24 장에서도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이곳 지상에서의 참된 삶의 회복이다.

One need only reflect on th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of eternal life in God, and recollect the teaching of the Hebrew prophets, to understand that if Christ wished to teach the doctrine of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which was then only beginning to find a place in the Talmud and was a subject of dispute, he would have stated that doc­trine clearly and definitely; but on the contrary not only did he not do so, but he rejected it; and not a single place can be found in any one of the Gospels which confirms that doctrine. The two passages referred to above mean something quite different.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를 오직 상고한다면, 그리고 히브리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상고해 봄으로써, 만일 그리스도가, 그 당시 오직 탈무드 안에서 자리잡으려 하고 있었으며 논란의 대상이던, 죽은 자의 부활의 교리를 가르치고자 했다면, 그는 그 교리를 명료하고 명확하게 선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복음서 어떤 곳에서도 그 교리를 확인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두 구절들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Of his own personal resurrection- strange as this may sound to people who have not themselves studied the Gospels- Christ never spoke at all! If, as the theologians teach, the basis of Christian faith lies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one would think that the least one could wish would be that Christ, knowing that he would rise again and that this would constitute the chief dogma of the Christian faith, should at least once say so clearly and definitely. But not only did he not say so definitely and clearly, he never once, not one single time in all the canonical Gospels, even mentioned it! What Christ taught was to exalt the son of man; that is to say, the essential life of man, and to acknowledge oneself a son of God. Christ personified in himself a man acknowledging sonship to God (Matt. xvi. 13-20). He asked the disciples what men said of him- the son of man? The disciples replied that some considered him to be John the Baptist miraculously risen from the dead, or a prophet; others, Elijah descended from heaven. 'But who do you say I am ?' asked he. And Peter, understanding Christ as he understood himself, replied: 'Thou art the Messiah, the son of the living God.' And Christ replied: 'Not flesh and blood hath revealed this unto thee, but 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That is to say, you have understood this not because you believed human explanations, but because you, recognizing yourself to be a son of God, have understood me. And, explaining to Peter that on this sonship to God the true faith rests, Christ warned the other disciples (v. 20) that they should not in future say that he, Jesus, was the Messiah.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부활에 대해서- 이것은 복음서를 스스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신학자들이 가르치듯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소의 것은, 그가 다시 일어날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를 구성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가 적어도 한번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명료하고 명확하게 말했어야 한다는 것임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명확하고 명료하게 말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결코 한번도, 모든 정경 복음서들 안에서 단 한 번도 심지어는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은 사람의 아들을 높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본질적인 삶을 높이고,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안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사람을 구현하였다(마태복음16장 13-20절).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 사람의 아들- 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물었다.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그를 기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세례 요한, 또는 선지자로 여겼으며; 다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엘리야라고 여긴다고 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말하느냐?하고 그가 물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그를 이해하듯이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대답했다: ‘당신은 구세주이며,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대답했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니라’. 다시 말하자면, 너희는 사람들의 설명을 믿어서가 아니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였으므로, 나를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써 참된 신앙이 머물게 된다고 베드로에게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는 다른 제자들에게 경고(5장 20절)하기를, 이후에 그들은 그, 즉, 예수가, 메시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And after this Christ says that notwithstanding the fact that he would be tortured and killed, the son of man, knowing himself to be God's son, would nevertheless be re-established and triumph over all. And it is these words that are interpreted as a pre­diction of his resurrection!

그리고 이런 뒤에 그리스도는 자신이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는, 사람의 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워져서 모든 사람 위에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의 예언으로 해석되는 것이 바로 이 말들인 것이다!

John ii. 19-22; Matt. xii. 40; Luke xi. 30; Matt. xvi. 4-21; Mark viii. 31; Luke ix. 22; Matt. xvii. 23; Mark ix. 31; Matt. xx. 19; Mark x. 34; Luke xviii. 33; Matt. xxvi. 32; Mark xiv. 28. Those are all the thirteen passages which are understood as being predictions by Christ of his resurrection. In three of them what is spoken of is Jonah in the whale's belly, and in one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In the remaining ten passages it is said that the son of man cannot be destroyed, but nowhere is there one word about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요한복음 2장 19-22, 마태복음 12장 40, 누가복음 11장 30, 마태복음 16장 4절, 마태복음 16장 21, 마가복음 8장 31, 누가복음 9장 22, 마태복음 17장 23, 마가복음 9장 31, 마태복음 20장 19, 마가복음 10장 34, 마가복음 14장 28, 누가복음 18장 33, 마태복음 26장 32절.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해되고 있는 열세 가지의 구절들이다. 이 중의 세 가지는 고래의 뱃속에 있는 요나에 대해서, 한 가지는 성전의 재건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머지 열 가지 구절들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멸망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In none of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does the word 'resurrection' even occur. Give a man who does not know the theological interpretation but who knows Greek, these passages to translate, and he will never translate them as they have been translated. In the original, two different words are used in three passages; the one is and the other . One of these words means, 'to up­raise'; the other means 'to awaken', and, in the middle voice, 'to wake up', 'to rouse oneself'. But neither the one nor the other can ever, under any circumstances, mean 'to raise from the dead'. In order fully to convince oneself that these Greek words, and the corresponding Hebrew word kum, cannot mean 'to raise from the dead', one need only compare the other passages in the Gospels where these words are used. They are used frequently and never translated by the words 'to raise from the dead' (auferstehen, ressusciter); such words did not exist in Greek or in Hebrew, nor was there the con­ception that corresponds to them. To express the conception of resurrection in Greek or in Hebrew, one has to employ a circumlocution and say: 'arose from the dead' or 'awoke from the dead'. So in the Gospels (Matt. xiv. 2) where the matter in hand is that Herod assumed the resurrection of John the Baptist, the words used are 'is risen from the dead'. So also in Luke xvi. 31 it is said, in the parable about Lazarus, that if there were a resurrection the man who returned from the dead would still not be believed, and the expression used is: 'if one rise from the dead'. Where the words 'from the dead' are not added to the words 'to rise', 'to awaken', the words 'rise' and 'awaken' never imply or could imply 'resurrection'. And speaking of himself, Christ did not once, in all the passages quoted as proof of his prediction of his resurrection- not one single time did he employ the words, 'from the dead'.

원전에서 이들 구절 중의 어느 곳에도 ‘부활’이라는 말 조차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어는 알되 신학적 이론을 모르는 어떤 사람에게, 이 구절들을 해석하도록 해보라, 그러면 그는 결코 그 구절들을, 이미 번역되어 왔던 것처럼, 번역하지 않을 것이다. 원전에서는 두 가지 다른 말들이 세 가지 구절들에서 사용된다; 그 하나는 이며 다른 하나는 이다. 이 말들 중의 하나는 ‘회복하다’를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깨우다’이며, 중간태로서, ‘눈을 뜨다’, ‘일어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부활하다’를 의미할 수 없다. 이들 그리스어 단어들과, 이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 kum가, ‘부활하다’를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확인해 보려면, 복음서에서 이런 말들이 사용되는 다른 구절들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말들은 자주 사용되지만 결코 ‘부활하다’ (aufersthen, ressusciter)는 단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이 말들은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에 상응하는 개념도 그곳에 없었다.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부활의 개념을 표현하려면, 완곡어법을 사용하여, ‘죽음에서 일어났다라고 하거나 죽음에서 깨어났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서(마태복음14 2)에서 헤롯이 세례 요한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인데, 사용된 말들은 죽음에서 깨어나다이다. 그래서 또한 누가복음 16 31절의, 나자로에 대한 비유에서, 만일 부활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을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사용된 표현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말들이 일어나다’, ‘깨어나다에 첨가되지 않는 곳에서는, ‘일어나다’, ‘깨어나다라는 말들이 결코 부활을 의미하거나 의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도, 그의 부활을 예언함의 증거로 인용되는 모든 구절들에서, 그리스도는 한번도- 단 한번도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말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Our conception of the resurrection is so different from the Jewish conception of life that it is im­possible even to imagine how Christ could have spoken to the Jews about resurrection and an everlasting, personal life belonging to each man. The conception of a future personal life has come to us neither from Jewish teaching nor from Christ's teaching. It entered church doctrine quite from without. Strange as it may appear, it cannot but be said that a belief in a future personal life is a very low and gross conception (based on a confusion of sleep with death) and one natural to all savage tribes, and that the Hebrew doctrine, not to speak of the Christian doctrine, stood immeasurably above it. We are convinced that this superstition is something very elevated, and seriously try to prove the superiority of our teaching to other doc­trines by the fact that we hold this superstition, while others, such as the Chinese and Hindus, do not hold it. This is argued not only by theologians but also by the free-thinking, scholarly historians of religion (Tiele, Max Muller, and others), who, when classifying religion, reckon those which share this superstition as superior to those which do not share it. The free-thinking Schopenhauer plainly calls the Hebrew religion the vilest (niedertrachtigste) of all religions, because it contains no idea (keine Idee) of the immortality of the soul. Actually in the Hebrew religion neither that conception nor that word exists. Eternal life, in Hebrew, is Khaye-olam. Olam means endless, unchangeable in time. Olani also means the world, the cosmos, life in general, and especially endless life. Khaye-olam, according to the Hebrew doctrine, is an attribute of the one God. God is the God of life, the living God. Man in the Hebrew conception is always mortal; only God is ever-living. In the Pentateuch the words 'live for ever' are twice employed. Once in Deuteronomy, xxxii. 39, 40, God says: 'See now that I, even I, am he, and there is no God but me: I kill, and I make alive; I have wounded and I heal; and there is none that can deliver out of my hand. For I lift up my hand to heaven, and say, I live for ever. . . .' The other time, in Genesis iii. 22, God says: 'Behold, the man has eaten of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and is become as us [one of us]; and now, may he not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 ever?' Except in one chapter of the apocry­phal book of Daniel, these are the only two instances of the use of the words 'live for ever' in the Penta­teuch or in the whole of the Old Testament, and they clearly define the Jews' conception of life generally and of life eternal. Life itself, in the con­ception of the Jews, is eternal, and so is life in God; but man is mortal, such is his nature.

부활에 관한 우리의 사상은 유태인들의 삶에 대한 사상과는 너무나 다르므로, 심지어 그리스도가 유태인들에게 부활 및 각각의 사람에게 속하는 영원하며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미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사상은 유태인들의 가르침으로부터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도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이것은 전혀 다른 출처로 교회의 교리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미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신앙은 매우 조악하고 야만적인 개념으로서 모든 야만적인 종족들에게 고유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교리는 말할 것도 없이, 히브리의 교리는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상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미신이 매우 고상한 어떤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런 미신을 지니고 있지만, 반면에 중국인들이나 인도인들 같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서, 우리의 가르침이 다른 교리들보다도 우월함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은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틸레, 막스뮐러, 기타의)학구적 자유사상 종교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주장된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를 분류할 때, 이런 미신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보다도 우월하다고 평가한다. 자유 사상가인 쇼펜하우어는 히브리인들의 종교를 명백히 가장 가장 열등하다고(niedertrachtigste) 여기는데, 그것이 영혼 불멸에 관한 아무런 사상(keine Idee)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히브리 종교에는 그러한 개념도 그러한 용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삶은, 히브리어에서, Khaye-olam이다. Olam은 시간에서 끝이 없다, 불변이다를 의미한다. Olani 역시 세상, 우주, 보편적인 삶, 그리고 특별히 끝없는 삶을 의미한다. Khaye-olam은, 히브리의 교리에 의하면, 유일한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삶의 하나님이며, 살아있는 하나님이다. 히브리인들의 사상에서 사람은 언제나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 만이 영원히 산다. 모세 오경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은 두 번 사용된다. 한 번은 신명기 32장 39, 40절에 있으며, 하나님이 말한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40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창세기 3장 22절의 다른 시기에, 하나님이 말한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묵시록인 다니엘의 한 장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세 오경이나, 구약 성서 전체를 통하여, 이것들이 ‘영원히 살다’ 말들의 사용의 유일한 두 가지 예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료하게 유태인들의 삶에 개념을 정의한다. 삶 자체는, 유태인들의 개념에서, 영원하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삶도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Nowhere in the Old Testament is it said, as taught in our Bible-classes, that God breathed into man an immortal soul, or that the first man before he sinned was immortal. God created man, as is told in the first story in the book of Genesis (ch. i. 26) just as He created the animals, of the male and female gender: and He ordered them to be fruitful and multiply in just the same way. Just as it is not said of the animals that they are immortal, so it is not said of man. In the following chapters it is plainly said that God drove man out of paradise and warded him off from the way to the tree of life. So that man did not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and did not obtain khaye-olam- that is to say, 'life for ever'- but remained mortal.

구약성서 어디에도, 우리의 성경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불멸의 혼을 불어 넣어 주셨고, 최초의 사람이 죄를 짓기 전까지 불멸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첫번째 이야기에서(1장 26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동물을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똑 같은 방법으로 자식을 낳고 번식하라고 명령했다. 동물들에 대해서 불멸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에 대해서도 불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음 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낙원에서 쫓아내었으며 그가 생명의 나무로부터 차단하였다. 결국 사람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으며, Khaye-olam- 다시 말하면, ‘영원한 삶’도 얻지 못했으며, 죽어야 하는 상태로 남았다.

According to the Jewish teaching man is man just as we know him- that is to say, he is mortal. Life in him is only life continuing itself in the race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Only the race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Jews has in itself the possibility of life. When God says: 'You shall live and not die', He speaks to the race. The life breathed by God into man is mortal for each separate man; but this life is continu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f men fulfill their covenant with God- that is to say, fulfill the conditions demanded for this by God.

유태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 안에 있는 삶은 오직 세대에서 세대로 인류 안에서 그 자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이다. 유태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직 인류만이 그 자체로서 삶의 가능성을 가진다. 하나님이, ‘너희는 살 것이며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인류에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호흡으로 불어 넣은 삶은 제각기 분리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계약을 이행한다면- 다시 말하면,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이행한다면- 이 삶은 세대에서 세대로 계속된다.

Having set forth all the laws, and said that these laws are not from heaven but are in their hearts, Moses says in Deuteronomy xxx. 15: 'See, I have set before thee life and good, and death and evil; in that I command thee to love Go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commandments, that thou mayest live.' And in verse 19: 'I call heaven and earth to witness against you this day, that I have set before thee life and death, the blessing and the curse: therefore choose life, that thou mayest live, thou and thy seed: to love God, to obey his voice, and to cleave unto him; for from him is thy life and the length of thy days.'

모든 율법들을 선언하고 이 율법들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모세는 신명기30장 15절에서 말한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을 행하며 그 명령과 규제와 법도를 지키라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여 번성할 것이요’. 그리고 19절에서: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요 장수시니.’

The chief distinction between our understanding of human life and that of the Jews consists in this, that according to our understanding our mortal life, transmitt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s not real life but a fallen life, for some reason temporarily spoilt; but in the Jewish conception this life is the most real, it is the highest good, given to man on condition that he fulfils the will of God. From our point of view the transmission of that fallen life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s the continuation of a curse.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Jews, it is the highest blessing attainable by man and to be reached only by fulfilling God's will.

사람의 삶에 우리의 이해와 유태인들의 이해의 주된 차이는 이것에 있다, 즉, 우리들의 사상에 따르면 불멸이 아닌 우리의 삶은, 세대로부터 세대로 이어지며, 참된 삶이 아니라 타락한 삶, 어떠한 이유로 일시적으로 타락한 삶이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사상에서는 이런 삶이 가장 진실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조건으로 사람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이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그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타락한 삶은 저주의 연속이다. 유태인들의 관점으로는, 그것은 사람에 의해서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

It is on that understanding of life that Christ bases his teaching of the true or eternal life, which he contrasts with personal and mortal life. 'Ye search the scriptures', says Christ to the Jews (John v. 39), 'because ye think that in them ye have eternal life.'

바로 이런 이해 위에서 그리스도는 진실하고 영원한 삶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기초하며, 개인적이며 죽어야 할 삶과 대조한다. 그리스도는 유태인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라.’ (요한복음5장 39절).

A young man asked Christ (Matt. xix. 16) how to enter into eternal life. Christ, replying to the question of eternal life, says: 'If thou wouldest enter into life (he does not say eternal life, but simply life), keep the commandments.' He says the same to the lawyer (Luke x. 28): 'This do, and thou shalt live', and here also he said live simply, without adding 'live eternally.' Christ in both cases defines what would be understood by the words 'eternal life'; when he uses them he says to the Jews what had often been said in their law, namely, that the fulfillment of God's will is eternal life.

한 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원한 삶에 들 수 있는지 그리스도에게 물었다(마태복음 19장 16절).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말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그는 영원한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을 말한다), 계명들을 지키라.’ 그는 율법학자에게도 똑같이 말한다(누가복음 10장 28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리고 여기에서도 또한 그는 ‘영원히 산다’라고 덧붙임이 없이, 단순히 산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예에서 ‘영원한 삶’이라는 말이 무엇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정의한다; 그가 이 말들을 사용할 때, 그는 유태인들에게 그들의 율법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 영원한 삶이라고 말한다.

Christ, in contradiction to temporal, private, personal life, teaches that eternal life which, in Deuteronomy, God promised to Israel, only with this difference, that according to the Jewish con­ception eternal life endured only in the chosen people of Israel and to obtain that life it was necessary to observe the exceptional laws God had given to Israel; while by Christ's teaching eternal life continues in the son of man, and what is needed to preserve it is the observance of the laws of Christ which express God's will for the whole of humanity.

그리스도는, 세속적이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반대하면서,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하였던 영원한 삶을 가르친다, 그러나 오직 이런 차이가 있다, 즉, 유태인들의 사상에 의하면 영원한 삶은 오직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지속되며 그런 삶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었던 예외적인 율법들을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영원한 삶은 사람의 아들 안에서 계속되며,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율법의 준수이다.

Christ contrasts with personal life, not a life beyond the grave but common life bound up with the past, present, and future, the life of the whole of humanity, the life of the son of man.

그리스도는 개인적인 삶을, 무덤 저편의 삶이 아니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속하는 공통의 삶, 전체 인류의 삶, 사람의 아들의 삶과 대비한다.

The salvation of personal life from death,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Jews, lay in the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expressed in the law of Moses by His commandments. Only on that condition did life as the Jews understood it not perish but pass o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mong God's chosen people. The salvation of personal life from death,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lies in a similar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expressed in Christ's commandments. Only on that condition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does personal life not perish but become ever secure in the son of man. The difference is only in this, that Moses' service of God is a service of the God of one people, while Christ's service of God is a service of the God of all man­kind. The survival of life in the generations of one race was doubtful, for that people itself might dis­appear, and also because that survival depended on corporeal descendants. The survival of life by Christ's teaching is indubitable, because life ac­cording to his teaching is transferred to the son of man who lives by the will of the Father.

죽음으로부터 개인적인 삶의 구원은, 유태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의 계명들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에 있다. 오직 이런 조건에서 유태인들이 이해하였던 삶은 소멸되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 사이에서 전해질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개인적인 삶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계명들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똑같이 이행함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오직 이런 조건에서 개이적인 삶은 소멸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 안에서 더욱 안전해진다. 차이는 오직 여기에 있다, 모세의 하나님에 대한 봉사는 한 민족의 하나님에 대한 봉사이며, 반면에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봉사는 모든 인류의 하나님에 대한 봉사이다. 한 민족의 세대들에서 삶의 존속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민족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으며, 또한 그런 생존은 육신의 후손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한 삶의 존속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은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사는 사람의 아들에게 계승되기 때문이다.

But even supposing the words of Christ about a day of judgment, the end of the age, and other sayings in John's Gospel, have a meaning referring to a life beyond the grave for the souls of those who have died, nevertheless it is unquestionable that his teaching about the light of life and the kingdom of God also has the meaning, comprehensible to his hearers and comprehensible to us, that the only true life is the life of the son of man according to the will of the Father. It is easier to admit this, since the doctrine of true life according to the will of the Father of life can include the conception of immortality and of life beyond the grave.

그러나 심지어 심판의 날과 종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과, 요한복음에서의 다른 구절들이, 죽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 무덤 저편의 삶을 언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빛과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역시,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지며, 유일한 참된 삶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의 아들의 삶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한층 쉽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참된 삶에 대한 교리는 불멸과 사후의 생명에 대한 개념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It may be more correct to suppose that after this worldly life lived for the fulfillment of his personal will, an everlasting personal life still awaits a man in paradise with all possible delights: perhaps that is more correct; but to think that it is so and to try to believe that for good deeds I shall be rewarded with everlasting bliss and for bad deeds with everlasting torments, does not conduce to an understanding of Christ's teaching. On the contrary, to think so deprives Christ's teaching of its chief basis.

개인적인 의지의 실행을 위해서 살아온 이런 세속적인 삶 후에, 영원한 개인적인 삶이 아직도 가능한 모든 희열들로 가득찬 낙원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욱 옳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더욱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선한 행위들에 대해서 내가 영원한 축복을 받을 것이고 악한 행위들에 대해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고 믿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그 핵심적인 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The whole teaching of Christ is that his disciples, having understood the illusory nature of personal life, should renounce it and transfer it into the life of the whole of humanity; the life of the son of man. The teaching of the immortality of the personal soul, on the other hand, does not call for the re­nunciation of one's personal life, but rivets that personality for ever.

그리스도의 전체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이, 개인적인 삶의 덧없는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포기하여서 전체 인류의 삶, 즉 사람의 아들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가르침은, 한 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포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개성을 영원히 고착화하는 것이다.

According to the conception of the Jews, the Chinese, the Hindus, and all the people of the world who do not believe the dogma of the fall of man and his redemption, life is life as we know it. A man copulates, has children, brings them up, grows old, and dies. His children grow up and continue his life, which goes on uninterruptedly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just as all goes on in the world: stones, earth, metals, plants, animals, stars, and everything in the universe. Life is life and must be used as well as possible. To live for oneself is irrational. Therefore since people existed they have sought an aim of life outside themselves, and live for their child, their family, their tribe, or for humanity, for all that does not die with their personal life.

사람의 타락과 구원에 관한 교리를 믿지 않는 유태인들, 중국인들, 인도인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의하면,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사람은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으며, 그들을 양육하고, 나이가 들어서 죽는다. 그의 자녀들이 자라나서 그의 삶을 계속하며, 그 삶은 세대에서 세대로 끊임없이 계속되며 세상 모든 것에서 계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들, 땅, 금속들,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우주의 모든 것들처럼. 삶은 삶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최선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존재한 이후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외부에서 삶의 목적을 추구하였으며, 그들의 자녀를 위해서 살고, 그들의 가족, 그들의 종족, 또는 인류를 위해서, 그들의 개인적인 삶과 함께 죽지 않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산다.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our Church, on the contrary, human life, as the greatest good known to us, is represented as being only an atom of the life that is for a time held back from us. Our life according to that view is not life as God wished to give and should have given it us, but is a spoilt, bad, fallen life, a copy of life, a caricature of the real life we for some reason imagine God ought to have given us. The chief aim of our life, according to this view, is not to live this mortal life as the Giver of life desires, nor to make it permanent in the generations of men as the Jews teach, nor does it lie in merging it with the will of the Father as Christ taught, but in convincing oneself that after this life the true life will begin.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와 반대로,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최선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오직 우리에게 잠시동안 보류되어 있는 삶의 지극히 작은 부분으로 제시된다. 우리의 삶은 그런 시각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했으며, 주었어야 할 삶이 아니라, 그것은 못쓰게되어, 악하고 타락한 삶이며,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었어야 하는 것을 상상하는 참된 삶을 복사한 것이며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의 주된 목적은, 이런 교리에 의하면, 삶을 주신 분이 원하는 대로 이런 죽어야 할 삶을 사는 것이 아니며, 유태인들이 가르치듯이 사람들이 세대들을 거쳐서 영원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가르쳤듯이 아버지의 뜻에 삶을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이 가고 나면 참된 삶이 올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Christ does not speak of this imaginary life of ours which God ought to have given, but for some reason did not give, to man. The theory of the fall of Adam and everlasting life in paradise and an immortal soul breathed into Adam by God, was unknown to Christ and he did not refer to it, nor by a single word hint at its existence. Christ speaks of life as it is and always will be. But we speak of a life we have imagined for ourselves- such as never existed; how then can we understand Christ's teaching?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었어야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주지 않은 이런 상상 속의 삶을 말하지 않는다. 아담의 타락과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아담에게 불어넣어 진 불멸의 영혼에 대한 이론은, 그리스도는 모르는 것이며, 그는 그것을 언급도 하지 않았고, 그것의 존재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암시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삶을 있는 또는 있을 그대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상상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Christ could not imagine such a strange concep­tion among his followers. He assumes that everyone understands that personal life inevitably perishes, and he shows a life that does not perish. He gives welfare to those who are in evil plight; but to those who have persuaded themselves that they have much more than Christ gives, his teaching can offer nothing. I may exhort a man to work, assuring him that for his labor he will receive food and clothing, but suddenly the man becomes con­vinced that he is a millionaire; evidently he will not listen to my exhortations. The same thing occurs with Christ's teaching. Why should I try to earn, when I can be rich without work? Why should I try to live this life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when I am confident that without that I shall have an everlasting personal life?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 사이에 그토록 이상한 개념을 상상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삶은 필연적으로 죽는다 것을 이해한다고 전제하고, 죽지 않는 삶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악한 역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가 줄 수 있는 이상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가르침은 아무 것도 줄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을 설득하여 일하도록 하고, 그가 이 노동에 대하여 음식과 의복을 받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지만, 갑자기 그 사람이 자신이 백만장자라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그는 나의 권고들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하지 않아도 부자인데 왜 내가 돈을 벌겠다고 일을 해야 하는가? 내가 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런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 하는가, 나는 그것 없이도 영원한 개인적인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지 않는가?

We are taught that Christ saved people by the fact that he was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that he was God and became incarnate, and having taken on himself the sins of Adam and of all man­kind, he redeemed the sins of men before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and for our salvation estab­lished the Church and the sacraments. By believing this we are saved and receive everlasting personal life beyond the grave. But it cannot be denied that he saved and saves people also by the fact that having shown them the inevitable destruction awaiting them, he, by his words,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showed them a true path of life in place of the false path of personal life we previously followed.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2인이며, 그는 하나님이며 육신이 되어서, 아담의 죄를 대신 지셨다, 그는 삼위일체의 제1위 앞에서 사람들의 죄를 구속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교회와 성례를 확립하였다. 이것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고 무덤 저편에서 영원한 삶을 얻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또한 사람들에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보여주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로써, 그들에게 우리들이 이전에 따라가던 거짓된 개인적인 삶의 길 대신에,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There may be people who have doubts about life beyond the grave and salvation based on the re­demption, but about the salvation of men,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by showing them the inevitability of the destruction of their personal life and by merging their will with that of the Father, there can be no doubt. Let any rational man ask himself what his life and death is. Can he give to that life and death any other meaning than that which Christ gave?

죽음 저편의 삶과 속죄에 근거를 둔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나, 사람들에게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필연적인 멸망을 보여주고 아버지의 뜻과 그들의 뜻을 연합함으로써,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합적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혹이 있을 수 없다. 모든 합리적인 사람에게 자신의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도록 하라. 그가 그런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준 것과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Any meaning given to a personal life if it be not based on the renunciation of self for the service of man, humanity, the son of man, is a delusion which flies to pieces at the first contact with reason. That my personal life perishes and that the life of the whole world in the will of the Father does not perish, and that only by merging with it can I possibly be saved, of that I can have no doubt. But this is so little in comparison with those exalted religious beliefs in a future life! Though it be little, it is sure.

개인적인 삶에 주어진 어떤 의미라도, 만일 그것이 사람, 인류, 사람의 아들에 대한 봉사를 위한 자기 부정에 기초되지 않는다면, 이성과의 첫번째 접촉으로 가루가 되어 날아가버릴 망상일 뿐이다. 나의 개인적인 삶은 소멸되며 아버지의 뜻 안에 있는 전체 세상의 삶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그것과 연합함으로써, 나는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의심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의 삶 안에서의 숭고한 종교적인 신앙들에 비하면 너무나 하잘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하잘 것 없더라도, 그것은 확실하다.

We are lost in a snow-storm. A man assures us, and he believes, that there are lights and there is a village, but it only seems so to him and to us be­cause we wish it were so. We have walked towards those lights, and there were none. Another man has walked through the snow, he has reached the road and shouts to us: 'You will get nowhere, the lights are in your eyes, you will go astray and perish. But here is the hard road; I am on it, it will keep us right.' That is very little. When we believed in the lights that glittered in our bewildered eyes we seemed close to a village and a warm hut, and to safety and rest, and here we have only a firm road. But if we listen to the first man we shall certainly perish, and if we listen to the second we shall certainly reach our destination.

우리는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확신시켜 주며 그도 믿는다, 저기에 불빛들이 있다 그리고 마을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우리가 그랬으면 하고 원하기 때문에 오직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다른 사람이 눈 속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길에 도착하여 우리에게 소리친다: ‘그리 가지 말라, 불빛들은 너희 눈 안에 있는 것이다, 엉뚱한 길로 가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딱딱한 길이 있다; 나는 그 위에 서있다, 이 길이 우리를 바른 길로 데려다 줄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이야기다. 우리가 우리의 당황한 눈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믿었다면 우리는 마을과 따뜻한 오두막에, 그리고 안전과 휴식에 가까웠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는 오직 단단한 길만이 있다. 만일 우리가 첫 사람의 말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사람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And so what should I do if I alone have understood Christ's teaching and believed in it- alone among people who do not understand it and do not fulfill it?

그런데, 나 하나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였으며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믿지도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What am I to do? Live like everyone else, or live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I have understood Christ's teaching in his commandments, and I see that their fulfillment offers blessedness to me and to all men. I have understood that the execution of these commandments is the will of that Source of all from which my life also has come.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의 계명들 속에서 그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이행함이 나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실행함이 모든 것의 근원의 의지이며, 나 자신도 그로부터 나온 것임을 임을 깨달았다.

I have understood that whatever I may do I shall inevitably perish in a meaningless life and death, with all who surround me, if I do not fulfill the will of the Father, and that in its fulfillment lies the only possibility of salvation.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의미 없는 삶과 죽음에 의해서, 나의 주변의 모든 것들과 함께 틀림없이 소멸할 것이며, 오직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에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Doing as all do I shall certainly counteract the welfare of all, I shall certainly act contrary to the will of the Father of life, I shall certainly deprive myself of the only possibility of bettering my desperate position. Doing what Christ teaches me, I continue what has been done by people who pre­ceded me: I co-operate in the welfare of all men now living as well as of those who will come after me; I do what is desired of me by Him who brought me into existence, and I do what alone can save me.

모든 사람들이 행하듯 행한다면, 나는 분명히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반대로 행동할 것이며, 나는 분명히 삶의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행할 것이며, 나는 분명히 나의 절망적인 상태를 개선할 유일한 가능성을 나 자신으로부터 빼앗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가르쳐준 대로 행한다면, 나는 나를 앞선 사람들이 행하던 것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이후에 생존할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협력한다; 나는 나를 존재하게 만든 분이 나에게 바라는 것을 행한다, 그리고 나는 오직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

The circus at Berdichev is on fire: all push and suffocate one another, pressing against the door which opens inwards. A saviour appears and says: 'Stand back from the door, turn back; the more you push the less chance you have of being saved. Turn back, and you will find an exit and will be saved.' Whether many people, or I alone, hear this and believe it- in any case having heard and believed, what can I do but stand back and call on all to listen to the saviour? They may smother, crush, and kill me; but all the same there is no salvation for me except by going the only way that makes an exit possible. And I cannot but go that way. A saviour should really be a saviour- that is to say, should really save. Christ's salvation is really salvation. He came, spoke, and humanity is saved.

서커스에 불이 났다: 모두가 안으로 열리는 문을 밀면서 서로를 밀고 질식시킨다. 어떤 구원자가 나타나서 말한다: ‘문에서 물러 서시오, 뒤로 물러 나시오; 밀면 밀수록 구조될 가능성은 작아집니다. 뒤로 물러 나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출구를 찾고 구조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인지 아니면 나 혼자서 이 소리를 듣고 믿었는지- 어떤 경우든 듣고서 믿었다면, 나는 뒤로 물러서서 구원자의 말을 들으라고 모든 사람들을 부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들이 나를 질식시키고, 깔아뭉개서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출구가 있는 유일한 방향으로 가는 것 말고는 나를 위한 다른 구원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구원자는 틀림없이 구원자이다- 다시 말하면, 정말로 구원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다. 그는 와서 말했다, 그리고 인류는 구원 받았다.

The circus has been burning an hour and one must make haste, and the people may not be in time to escape. But the world has been burning for 1800 years, since the day when Christ said, 'I have come to bring fire upon earth; and how am I straitened till it is kindled'- and that fire will burn till people save themselves. Is not that why men exist, and is not that why the fire burns, in order that people may have the joy of being saved?

서커스는 한 시간이나 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탈출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는 지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그리고 그것이 타는 한 계속 불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로 세상은 1800년 동안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조할 때까지 탈 것이다. 사람들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불은 왜 타는가, 사람들이 구조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And having understood this, I understood and believed that Jesus is not only the Messiah, the Christ, but that he is really the Saviour of the world.

그리고 나는 이것을 깨닫자, 예수는 구세주인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그는 진정으로 세상의 구원자임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I know that there is no other exit either for me or for all those who together with me are tormented in this life. I know that for all, and for me together with them, there is no way of escape except by ful­filling those commands of Christ which offer to all humanity the highest welfare of which I can conceive.

나 자신을 위한 또는 이런 삶에서 나와 함께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다른 어떤 출구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나를 위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모든 인류에게 제공하는 그리스도의 이런 명령들을 이행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탈출구도 없다는 것을 안다.

I am not frightened about whether I shall have more unpleasantness or whether I shall die sooner. This may be terrible to one who does not see how senseless and ruinous is his separate, personal life, and who thinks he will not die. But I know that my life, aiming at personal, solitary happiness, is the greatest absurdity, and that at the end of this stupid life there is inevitably nothing but a stupid death. Therefore things cannot be at all terrible for me. I shall die like everyone else, like those who do not fulfill the teaching; but both for me and for all, my life and death will have a meaning. My life and death will serve the salvation and life of all, and that is what Christ taught.

내가 더한 불행을 맞게 될지 아니면 더 빨리 죽을는지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 자신의 독단적이며, 개인적인 삶이 얼마나 어리석고 파괴적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아마도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이며,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나의 삶은 가장 엄청난 모순이며, 이런 어리석은 삶의 끝에 오직 피할 수 없는 어리석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세상은 전혀 두려울 수가 없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죽을 것이다, 가르침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러나 나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나의 삶과 죽음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나의 삶과 나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삶에 봉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이다.

   
       
   

 ] 위로 ] 서문 ] I. 복음 교훈의 열쇠 ] II. 무저항의 명령 ] III.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 IV.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 VI. 다섯 가지 계명 ] VII. 거짓 교리 ] [ VIII. 삶의 길 ] IX. 신앙과 행위 ]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 XI. 죽은 교회 ] XII. 신앙이란 무엇인가? ] Notes ] Maude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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