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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IX. FAITH AND WORKS

IX. 신앙과 행위

   

Were all people to fulfill Christ's teaching the king­dom of God would have come on earth; if I alone fulfill it, I do the best that is possible for myself and for all men. Without the fulfillment of the teaching of Christ there is no salvation. 'But how is one to get the faith to fulfill it, always to follow it, and never to be unfaithful to it?' 'Lord, I believe; help Thou my unbelief.'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행한다면 하나님의 왕국은 지상에 세워질 것이다; 만일 나 혼자만이 그것을 실행한다면,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가능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구원도 없다. ‘그렇지만 가르침을 실행하고, 언제나 따르며, 그리고 결코 불충실 하지 않을 신앙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주여, 나는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The disciples asked Christ to confirm their faith; 'I wish to do good, but I do evil', says the Apostle Paul.

제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해달라고 그리스도에게 애원하였다; 사도 바울이 말한다, ‘나는 선을 바라면서도 악을 행하도다’.

'It is hard to be saved', men in general say and think.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렵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하고 생각한다.

A man is sinking and asks to be saved; a rope is thrown him which alone can save him, and the drowning man says: 'Confirm my faith that the rope will save me. I believe', says he, 'that the rope will save me, but help my unbelief.'

한 사람이 물에 가라 앉으면서 구조를 요청했다; 밧줄이 그에게 던져졌으며 그것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 그러자 물에 빠진 사람이 말한다: ‘그 밧줄이 나를 구할 것이라는 나의 믿음을 확인하여 주시오. 나는 이 밧줄이 나를 구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시오.’

What does this mean? If the man does not seize the thing that can save him it only means that he does not understand his position.

이것이 무슨 말인가? 만일 이 사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밧줄을 잡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직 그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How could a Christian, believing in the divinity of Christ and all his teachings (however he under­stand them), say that he wishes to believe but cannot? God himself, coming to earth, said: You have before you everlasting torment, fire, everlast­ing infernal darkness- and here is your salvation-  in my teaching and in its fulfillment.

어떻게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모든 가르침들을 믿으면서도(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믿기들 원하지만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 자신이, 이 땅 위에 와서, 말한 것이다: 너희 앞에 영원한 고통, 불, 영원한 지옥의 어둠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구원이 있다- 나의 가르침과 그것을 실행하라.

It is impossible for such a Christian not to believe in the offered salvation, not to fulfill it, and to say, 'Help thou my unbelief.

그러한 기독교인이, 제시된 구원을 믿지도 않고, 가르침을 실행하지도 않으면서,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In order that man might say that, he must disbelieve in his own destruction and must believe that he will not perish.

사람이 그런 말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기 자신의 파멸을 믿지 않으며,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을 믿어야만 한다.

Children jump from a ship into the water. They are still upheld by the current, by their clothes which are not yet soaked, and by their own feeble movements, and they do not understand their peril. From above, from the departing ship, a rope is thrown to them; they are told that they will cer­tainly perish, and are begged by those on the ship to save themselves (the parables of the woman who found a piece of silver, of the shepherd who found a lost sheep, of the supper, and of the prodigal son, speak only of this). But the children do not believe; they disbelieve, not in the rope but in the fact that they are perishing; other frivolous children like themselves have assured them that they will always continue merrily bathing even after the ship has gone. They do not believe that their clothes will soon be soaked, that their little arms will be tired, that they will begin to gasp, will be choked, and will go to the bottom; they do not believe in all this, and solely for that reason do not believe in the rope which would save them.

아이들이 배에서 물로 뛰어든다. 그들은 물의 흐름 때문에, 그들의 옷들은 아직 물이 깊이 스며들지 않아서, 그리고 그들의 미약한 움직임 때문에, 아직도 떠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멀어져 가는 배로부터, 밧줄 하나가 그들에게 던져 진다; 그들은 분명히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밧줄을 잡고서 목숨을 구하라고 애원을 한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부인,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동, 탕자에 대한 비유가 오직 이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밧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자신들과 같은 다른 경솔한 아이들이 심지어 배가 가버려도 언제까지 즐겁게 헤엄치고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안심시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옷이 곧 물을 흡수하고, 그들의 조그만 팔들이 지쳐서, 허덕거리다가 숨이 막혀서 바닥에 가라앉을 것임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을 구할 밧줄을 믿지 않는다.

As the children who have fallen from the ship do not believe that they will perish, and therefore do not catch at the rope, so people who believe in the immortality of the soul have convinced themselves that they are not perishing, and therefore they do not obey the teaching of Christ-God. They do not believe in that which it is impossible to disbelieve, and this simply because they believe in that which it is impossible to believe.

배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그들이 죽는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그래서 밧줄을 잡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불멸을 믿는 사람들도 그들이 죽지 않으며, 그래서 하나님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And so they call to someone: 'Confirm in us the belief that we are not perishing.'

그리고 그들은 누구에겐가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소서.’

But this it is impossible to do; in order that they should have faith that they will not perish they must cease to do the things that destroy them and must begin to do the things that save them-  they must catch at the rope which would save them and they do not wish to do this but to assure themselves that they are not perishing, despite the fact that one after another their comrades perish before their eyes. And this desire of theirs to believe in that which is not true, they call faith. It is natural that they always have little faith and want to have more.

그러나 이것을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이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려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파멸하는 것들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들을 구하는 것들을 행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구해줄 밧줄을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행하기를 원치 않으면서, 한 사람씩 차례대로 동무들이 자신들의 눈 앞에서 죽어 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진리가 아닌 것을 믿으려 하는 그들의 이런 소망을 그들은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언제나 적은 믿음을 가지며 더 많은 믿음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Only when I understood the teaching of Christ did I understand also that what these people call faith is not faith, and that this false faith is what the Apostle James rejected in his Epistle. (That Epistle was long not acknowledged by the Church, and when it was accepted it underwent certain per­versions, some words were thrown out, and some transposed or arbitrarily translated. I follow the accepted translation, merely correcting the in­accuracies, in accordance with Tischendorf's text.)

내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였을 때, 나는 또한 이 사람들이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신앙이 아니며, 그리고 사도 야고보가 그의 서한에서 거부한 것이 바로 이런 거짓된 신앙이다. (이 서한은 오랫동안 교회에 의해서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서한이 인정되었을 때, 특정한 부분들은 왜곡되었고 어떤 말들은 삭제되었으며, 어떤 부분은 바뀌어져서 임의대로 번역되었다. 나는 권위있는 번역본을 따랐으며, 단지 정확치 않은 것들을 티센도르프 사본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James ii. 14-22, 24, 26: 'What doth it profit, my brethren', says James, 'if a man say he hath faith, and have not works? can that faith save him? If a brother or sister be naked, and in lack of daily food and one of you say unto them. Go in peace, be ye warmed and filled; and yet ye give them not the things needful to the body; what doth it profit? Even so faith, if it have not works, is dead in itself. Yea, a man may say, Thou hast faith, and I have works: show me thy faith apart from thy works, and I by my works will show thee my faith. Thou believest that God is one; thou doest well: the devils also believe, and shudder. But wilt thou know, 0 vain man, that faith apart from works is barren? Was not Abraham our father justified by works, in that he had offered up Isaac his son upon the altar? Thou seest that faith wrought with his works, and by works was faith made perfect. . . . Ye see that by works a man is justified, and not only by faith. For as the body apart from the spirit is dead, even so faith apart from works is dead.'

야고보서 2장 14-22, 24, 26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James says that the only signs of faith are the works which flow from it, and that therefore faith from which works do not flow is a matter of mere words, which, as they will not feed anyone, will also not justify anyone or save him, and therefore faith from which works do not flow is not faith but only the desire to believe something: only a mistaken as­sertion in words that I believe what I do not believe.

야곱은 말한다, 신앙의 유일한 표시는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행위들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행위가 흘러나오지 않는 신앙은 단순히 말장난들이며, 그것들이 어떤 사람도 먹일 수 없듯이, 어느 누구도 정당화하거나 그들 구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행위가 흘러나오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며 오직 어떤 것을 믿고자 하는 희망일 뿐이다: 내가 믿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말의 그릇된 주장일 뿐이다.

Faith, according to this definition, is that which promotes deeds, and deeds are what faith produces- that is to say, that which makes faith really faith. The Jews said to Christ (John vi. 30), 'What then doest thou for a sign, that we may see, and believe thee? What workest thou?'

이런 정의에 다르면, 신앙은 행위를 장려하는 것이며, 행위들은 신앙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진정으로 신앙으로 만드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말했다(요한복음6장 30절),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보고 믿게하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That is what was said to him when he was on the cross (Mark xv. 32): 'Let the Christ, the King of Israel, now come down from the cross, that we may see and believe.' (Matt. xxvii. 42): 'He saved others; himself he cannot save. He is the King of Israel; let him now come down from the cross, and we will believe on him.' And to this demand to increase their faith, Christ replies that their wish is vain and that nothing can compel them to believe that which they do not believe. (Luke xxii. 67) He said, 'If I tell you, ye will not believe'. (John x. 25-6) 'I told you, and ye believe not. But ye believe not, because ye are not of my sheep.'

이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있을 때 그에게 한 말이었다(마가복음 15장 32절):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마태복음 27장 42절):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작가에서 내려 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리고 그들의 신앙의 강화하기 위한 이런 요구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구가 헛된 것이며 어떤 방법도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강제로 믿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스도 말했다(누가복음 22장 67절):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25-6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 것은 너희가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The Jews demanded what is demanded by Church Christians, some external sign which would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teaching of Christ, and he replies and explains to them why it is impossible. He says that they cannot believe because they are not of his sheep- that is to say, do not follow that path of life which he has shown to his sheep. He explained (John v. 44) wherein lies the difference between his sheep and others, explaining what some believe and others do not believe, and on what faith rests. 'How can ye believe', says he, 'which receive teaching one of another, and the teaching that cometh from the only God ye seek not?'

유태인들은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요구한 것,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게할 수 있는 어떤 외적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왜 불가능한지 그들에게 대답하고 설명하였다. 그는 그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라서- 즉, 그리스도가 자신의 양들에게 보여준 삶의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그의 양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했으며,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지, 그리고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가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는 서로에게 주는 가르침을 믿으면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가르침을 찾지 않는가?’

To believe, says Christ, you must seek that teaching which flows from the only God. He who speaks from himself seeks his own teaching ( ), but he who seeks the teaching of him who sent me is true, and there is no untruth in him (John vii. 18). The teaching of life is the basis of faith.

그리스도는 말한다, 믿으려 한다면, 너희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가르침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가르침 ( )을 구하되, 나를 보내신 이의 가르침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한복음 7장 18절). 삶의 가르침은 신앙의 기초이다.

Actions all flow from faith, faith comes from doxa, that meaning which we attribute to life. There may be innumerable actions; there are also very many faiths; but there are only two doxa, doctrines of life. One of these is denied and the other affirmed by Christ. One teaching, that which is denied by Christ, is that personal life is something really exist­ing and belonging to men. This is the doctrine which was held, and is held, by the majority of men, and from which flow all the various faiths held by worldly men and all their actions. The other doctrine is that which was preached by all the prophets and by Christ: it is that our personal life gains meaning only by the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행위들은 모두 신앙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신앙은 doxa,즉, 삶에 대해 우리가 목적으로부터 나온다. 무수히 많은 행위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신앙들이 있다; 그러나 오직 두 가지 doxa, 즉, 삶의 교리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가 부정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인정한 것이다. 전자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가 부정한 것으로, 개인적인 삶이 진실로 존재하며 사람들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녔으며, 지니고 있는 교리이며, 이것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지니는 모든 다양한 신앙들이 흘러 나온다. 후자의 교리는 모든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르친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If a man has for his doxa that the most important thing is his personality, he will consider that his personal welfare is the most important and desirable thing in life, and according to the direction in which he seeks that welfare- whether in obtaining pro­perty, or distinction, or fame, or in the satisfaction of his desires- he will have a faith corresponding to that outlook, and all his actions will accord with it.

만일 어떤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개성이라는 doxa를 가졌다면, 그는 삶에 있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이 가장 중요하며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을 따라- 재산, 명예, 명성을 획득함에서, 또는 자신의 욕망들의 충족에서- 그는 그러한 인생관에 상응하는 신앙을 가질 것이며, 그의 모든 행위들을 그것에 맞추어 질 것이다.

If his doxa is different, if he understands life in such a way that its meaning lies only in the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as it was understood by Abraham and as Christ taught, then his view of faith will accord with his perception of the will of God, and all his actions will conform therewith.

만일 그의 doxa 가 다르다면, 만일, 아브라함이 이해하였으며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처럼, 삶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에 있다는 방향에서 삶을 이해한다면, 그의 신앙의 시각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의 인식에 합당할 것이며, 그의 모든 행위들은 그에 맞추어 질 것이다.

That is why those who believe that our life is satisfactory cannot believe in the teaching of Christ and all their efforts to believe it always remain vain. In order to believe, they would have to alter their outlook on life; and until they alter that, their actions will always conform to their belief and not to what they wish to believe and say they believe.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을 수 없으며, 가르침을 믿고자 하는 그들의 모든 노력이 언제나 헛수고에 머무는 이유이다. 믿으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바꿀 때까지는, 그들의 행위들은 언제나 그들의 믿음과 일치할 것이며, 그들이 믿고자 하거나 그들이 믿는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에 일치되지 않을 것이다.

The desire to believe in the teaching of Christ, in those who asked a sign of him and in our believers, does not correspond and cannot correspond with their life, however they may try to make it. They may pray to Christ-God, and receive Communion, and do deeds of charity, and build churches, and convert others; all this they do, but they cannot do Christ's deeds, because such deeds flow from faith based on quite another teaching (doxa) than that which they hold. They cannot offer up in sacrifice their only son as was done by Abraham, whereas Abraham could not have hesitated about presenting or not presenting his son in sacrifice to God, that God who alone gave meaning and blessedness to his life. And in just the same way Christ and his disciples could not but give up their lives for others, for in that alone lay the meaning and welfare of their life. From this misunderstanding of the essence of faith flows that strange desire people have to believe that it would be better to live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Christ, while with all the strength of their souls, in accordance with their faith in personal life, they seek to live contrary to that teaching.

기적을 요구한 사람들이나 우리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으려는 욕망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일치하지 않으며 일치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성찬식에 참여하며, 자선을 행하며, 교회를 짓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개종 시킬지라도, 이 모든 것을 그들이 행할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행함을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가르침(doxa)에 기초를 둔 신앙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유일한 아들을 아브라함이 행한 것처럼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칠 수가 없으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 오직 자신의 삶에 의미와 행복을 주는 그런 하나님에게, 제물로 내놓거나 내놓지 않음에 대해 주저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삶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행함 안에 그들의 삶의 의미와 행복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오해로부터,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개인적인 삶에 대한 신앙에 맞추어 가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반대로 살기를 추구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산다면 더 좋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진 이상한 욕망이 흘러 나온다.

The basis of faith is the meaning of life, from which flows the valuation of what is important and good and what is unimportant and bad in life. The valuation of all the phenomena of life depends on one's faith. And as now people having faith based on their own teaching, cannot in any way make it accord with the faith which flows from the teaching of Christ, so was it also impossible for his disciples to do so. And this misunderstanding is frequently and clearly expressed in the Gospels. Christ's disciples often asked him to confirm their faith in what he told them (Matt. xix. 23-8 and xx. 20-8; Mark x. 35-45). According to both the Evangelists, after the sayings- terrible to every believer in personal life and to everyone who sees welfare in worldly riches- after the words that the rich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and the words still more terrible for those who believe only in personal life- that whosoever does not leave all, even life itself, for the sake of Christ's teaching, will not be saved- Peter asks, 'What shall we have who have left all and followed thee?' After­wards, James and John, themselves according to Mark, but their mother according to Matthew, asked him to grant that they should sit on each side of him when he should be in his glory. They asked him to confirm their faith by promising a reward. To Peter's question Jesus replied with the parable of the laborers hired at different hours (Matt. xx. 1-16). To James's question he answered: You know not yourself what you ask- that is to say, you ask impossibilities, you do not understand the teaching. The teaching lies in the renunciation of personal life and you are asking for personal fame, personal reward. You can drink the same cup (live the same life) as I, but to sit on my right and left hand, that is, to be equal with me, is what no one can do. And here Christ says: Only in worldly life do the powerful enjoy and delight in the fame and power of personal life; but you, my disciples, should know that the meaning of human life does not lie in personal happiness, but in serving all, in hu­miliation before all. Man lives not to be served, but himself to serve and give up his personal life as a ransom for all. Christ, in reply to his disciples' demand, which showed him how completely they failed to understand his teaching, did not tell them to believe- that is to say, to change that valuation of the good and evil in life which flowed from their conception (he knew that this was impossible) but explained to them the meaning of life on which his faith rested- that is to say, the true valuation of what is good and evil, important and unimportant.

신앙의 기초는 삶의 의미에 있으며, 이런 의미로부터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선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고 나쁜 것인지의 평가가 흘러나온다. 삶의 모든 현상들의 평가는 그 사람의 신앙에 달려있다. 그리고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가르침에 기초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신앙과 결코 일치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초기 제자들에게도 역시 불가능했었다. 그리고 이런 오해는 복음서에서 자주 그리고 명료하게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가 그들에게 말한 것에 대해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자주 그에게 물었다(마태복음 19장 23-8절 및 20장 20-8절; 마가복음 10장 35-45절). 마태와 마가에 두 전도자에 따르면, 다음의 구절들- 개인적인 삶을 믿는 모든 신자들과 세상의 부에서 행복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과, 오직 개인적인 삶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무서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위하여,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 자체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들 다음에, 베드로는 묻는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으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후에, 마가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나 마태에 의하면 그들의 어머니가, 그리스도가 영광의 자리에 있을 때, 그들이 그의 양쪽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상급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 서로 다른 시간에 고용된 일꾼들의 비유로서 대답했다(마태복음 20장 1-16절). 야고보의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 구하는 것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너희는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의 가르침은 개인의 삶의 포기에 있으나, 너희는 개인적인 명성, 개인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너희는 나와 같은 잔을 마실 수 있으나(똑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나), 나의 왼 쪽과 오른 쪽에 앉는 것, 즉, 나와 같아지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오직 세상의 삶에서만 권력을 가진 자가 개인적인 삶의 명성과 권력을 누리고 즐긴다; 그러나 너희는, 나의 제자들아, 사람의 삶의 의미는 개인적인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김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함에 있느니라. 사람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기 위해서 산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저당으로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가르침을 이해함에 완전히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제자들의 요구에 대답하면서, 그들에게 믿으라고- 다시 말하면, 그들의 사상으로부터 나오는 그들의 선과 악에 대한 그러한 평가를 바꾸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삶의 의미- 다시 말하면, 선한 것과 악한 것, 그리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진정한 평가- 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To Peter's question (Matt. xix. 27) 'What shall we have, what reward for our sacrifices?' Christ replies with the parable of the laborers hired at different times and receiving identical payment. Christ explains to Peter his misunderstanding of the teaching, from which his absence of faith results. Christ says: Only in personal and meaningless life is it precious and important that the remuneration for work should accord with the amount of work done. The belief in a remuneration for work according to the amount of work flows from the doctrine of personal life. That belief rests on the assumption that we have a claim to something; but man has no rights and can have none. He is ever in debt for the welfare given him, and therefore can make no demands on anyone. Even if he gives up his whole life he still cannot repay what has been given him, and therefore his master cannot be unjust to him. If a man asserts rights to his life and keeps account with the Source of all things which has given him life, he thereby only shows that he does not understand the meaning of life.

베드로의 질문(마태복음 19장 27절)으로서, ‘우리가 모든것을 희생하고 주를 쫓았으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받으리이까?’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시간에 고용되어서 똑 같은 보수를 받는 일꾼들의 비유로서 대답한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가르침에 대한 그의 오해를 설명하며, 바로 그 오해에서 베드로의 신앙의 결핍이 초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오직 개인적이며 무의미한 삶에서, 노동에 대한 보수가 일한 노동의 양에 비례하여야 함이 소중하며 중요하게 여겨진다. 노동의 양에 따른 노동에 대한 보상의 믿음은 개인적인 삶의 교리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행복에 대하여 영원히 빚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삶 전체를 포기한다고 하여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보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의 주인은 그에게 불공평할 수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들을 주장하며 그에게 삶을 준 모든 것들의 근원과 다투려 한다면, 그는 그것 때문에 자신이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오직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People who had received happiness demanded something more. These people stood in the market­places idle and unhappy, lacking life. The master took them, and gave them the greatest blessing of life- work. They accepted the kindness of the master, and then remained dissatisfied. They were dissatisfied because they had no clear consciousness of their position; they had come to work holding a false doctrine to the effect that they had rights to their life and to their labor, and that therefore their labor should be rewarded. They did not understand that this labor was the highest blessing, which is freely given to them and for which they should only try to return a similar blessing but could not demand reward. And therefore people having a perverted understanding of life, like these workmen, cannot have a just and true faith.

행복을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이 사람들은 시장에서 게으르고 비참하게, 삶을 잃어버리고서 서있다. 주인이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삶의 가장 큰 축복- 노동- 을 주었다. 그들은 주인의 친절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서 불만에 차있었다. 그들은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짓된 교리를 가지고 일하러 왔으며, 결국 그들은 삶과 노동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가졌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노동은 반드시 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노동이 가장 귀중한 축복이며, 그 축복은 그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졌으며, 그것에 대해서 똑 같은 축복으로 돌려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뿐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노동자들처럼, 올바르고 진실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The parable of the master and the workman who returned from the field, spoken in reply to the disciples' direct request that he would confirm their faith, defines yet more clearly the foundations of the faith Christ teaches.

주인과 밭에서 돌아온 일꾼에 대한 비유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강하게 해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대답하면서 말한 것이나, 그리스도가 가르친 신앙에 대한 기본을 더욱 명료하게 정의한다.

(Luke xvii. 3-10) Horrified at the difficulty of fulfilling the rule Christ lays down, that one must forgive one's brother not seven times, but unto seventy times seven, the disciples say: 'Yes, but. . . in order to fulfill this, one must have faith; confirm, increase, our faith.' As previously they had asked: 'What shall we get for it?' so now they ask what all so-called Christians ask today: We want to believe, but cannot; confirm our belief that the rope of salvation will save us. They say: Do something to make us believe, just as the Jews had asked of him a sign. By miracles, or by promising rewards, make us believe in our salvation.

(누가복음 17장 3-10절) 자신의 형제들에게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번이나 용서하라고, 그리스도가 내려준 명령을 실행함의 어려움에 충격을 받고서, 제자들은 말한다: ‘옳소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나이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그 전에 그들이 ‘그리하면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던 것처럼, 여기선 오늘날 소위 모든 기독교인들이 묻는 것을 그들은 묻는다: 우리는 믿고 싶으나 믿을 수 없나이다; 구원의 밧줄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해주소서. 그들은 말한다: 유태인들이 그에게 기적을 요구한 것과 같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무엇을 해주소서. 기적들이나 보상을 약속하여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믿게 하소서.

The disciples said, as we say: It would be well to arrange so that we, living the personal, self-willed life we do, could also believe that if we were to fulfill God's teaching things would be still better for us. We all make that demand, which is one contrary to the whole sense of Christ's teaching, and we are surprised that we are quite unable to believe. And to this most fundamental misunderstanding, which existed then as it exists now, he replies with a parable in which he shows what true faith is. Faith cannot result from credulous acceptance of what is said; faith comes only from recognizing one's position. Faith rests only on reasonable conscious­ness of what it is best to do being in the position in which we are. He shows that it is impossible to arouse this faith in others by promising a reward or by threats of punishment, and that this could result only in a weak credulity which would crumble at the first temptation; that the faith which moves mountains- that which nothing can disturb- rests on a consciousness of inevitable impending destruc­tion, and of the only possible means of safety in this position.

우리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자들은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개인적이며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면서도, 또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상황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요구를 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전체 의미에 반대되는 것이며, 우리는 너무나 믿을 수 없다는 것에 놀라와 한다. 그리고, 오늘날 존재하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존재하였던 이 같은 가장 근본적인 오해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비유로 대답한다. 신앙은 말하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임으로써 생기지 않는다; 신앙은 자신의 위치를 인식함으로써 오직 나온다. 신앙은 오직 우리가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무엇을 행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합리적인 의식에 기초를 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수를 약속하거나 처벌의 위협으로서 이런 신앙을 일깨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최초의 유혹에도 무너져 내리는 나약한 신앙에서 나올 수 있으며; 산을 움직이는 신앙은-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는 신앙은- 피할 수 없이 임박한 파멸과 이런 위치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안전 수단에 대한 의식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To have faith, no promises of reward are neces­sary. It is only necessary to understand that salva­tion from inevitable destruction lies in living a common life according to the Master's will. Whoever understands that, will not seek for confirmation but will save himself without any exhortations.

신앙을 가지기 위해, 보수에 대한 어떤 약속들도 필요하지 않다. 피할 수 없는 파멸로부터의 구원은 주인의 뜻에 따르는 공통의 삶을 사는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확인을 구하지 않으며 어떠한 권고가 없어도 스스로를 구원할 것이다.

To the disciples' request for a confirmation of their faith Christ says: When a workman returns from the field, his master does not at once tell him to have dinner, but tells him to stall the cattle and serve him, and only then will the workman sit down to table and have dinner. The workman does all this without considering himself ill-used, and does not boast or demand gratitude or reward, but knows that so it should be and that he is but doing what is needful: that this is a necessary condition both of the service and of the true welfare of his life. So also you, says Christ, when you have done all that is demanded of you, must consider that you have only done your duty. He who understands his relation to the Master will understand that only by submitting to his Master's will can he have life; and he will know wherein his welfare lies and will have a faith to which nothing will be impossible. This is the faith Christ teaches. Faith,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rests on a reasonable conscious­ness of the meaning of one's life.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말한다: 일꾼이 들판에서 돌아오면, 그의 주인은 그에게 당장 식사하라고 말하지 않고 가축을 가두고 돌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야 일꾼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 일꾼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이 혹사 당한다고 여김이 행한다, 그리고 자랑하거나 사례나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과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즉, 이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봉사와 참된 행복의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그래서 너희들 또한,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행할 때, 너희는 오직 너희의 의무를 행하였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자신과 주인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오직 주인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며 불가능한 것이 없는 신앙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앙은 자신의 삶에 대한 합리적인 의식을 기초로 한다.

The foundation of faith,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is light.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앙의 기초는 빛이다.

(John i. 9-12) 'That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coming into the world. He was in the world, and the world was made through him, and the world knew him not. He came unto his own, and his own received him not. But as many as received him,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gave he the right to become the children of God.' (iii. 19-21) 'And this is the judgment, that the light is come into the world, but men loved the darkness rather than the light: for their works were evil. For everyone that doeth ill hateth the light, and cometh not to the light, lest his works should be reproved. But he that doeth the truth cometh to the light, that his works may be made manifest, because they have been wrought in God.'

(요한복음 1장 9-12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3장 19-21절) ‘정죄는 이것이니 곧 그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쫒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For him who has understood the teaching of Christ there cannot be any question of confirming his faith. Faith,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rests on light, on truth. Christ nowhere demands faith in himself: he demands faith in the truth.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에게는 신앙의 확립에 대한 어떤 문제도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앙은 빛에, 진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서도 자신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에 대한 신앙을 요구한다.

(John viii. 40) He says to the Jews: 'Ye seek to kill me, a man that hath told you the truth, which I heard from God.' (46) 'Which of you convicteth me of sin? If I say truth, why do ye not believe me?' (xviii. 37) He says, 'To this end was I born, and to this end am I come into the world, that I should bear witness unto the truth. Everyone that is of the truth heareth my voice.' (xiv. 6) He says,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16) 'The Father', says he to the disciples, 'shall give you another comforter, that he may be with you for ever.' (17) 'That comforter is the spirit of truth, whom the world neither sees nor knows, but whom ye know, for he is with you and shall be in you.'

(요한복음 8장 40절) 그리스도가 유태인들에게 말한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46절)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18장 37절) 그가 말한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소리를 듣느니라.’ (14장 6절) 그가 말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속에 계시겠음이라.’

He says that his whole teaching, and that he himself, is truth.

그리스도는 그의 전체 가르침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진리라고 말한다.

The teaching of Christ is the teaching of truth. And therefore faith in Christ is not credulously accepting something concerning Jesus, but is know­ledge of the truth. The teaching of Christ is not a thing anyone can be induced to believe in, nor is it possible to bribe anyone to fulfill it. He who under­stands the teaching of Christ will also have faith in it, because that teaching is the truth. And he who knows the truth necessary for his welfare cannot but believe it, as a man who has understood that he is really sinking cannot but catch at the rope of salvation. And the question: What must I do to believe? is a question which merely displays a non-comprehension of Jesus Christ's teaching.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진리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예수에 관한 무엇인가를 쉽게 받아들임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누군가를 믿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가르침을 실행하도록 매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또한 가르침에 대한 신앙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에 필요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물에 가라 앉고 있으면서 구원의 밧줄을 잡을 수 밖에 없는 사람처럼, 가르침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믿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질문이다.

   
       
   

 ] 위로 ] 서문 ] I. 복음 교훈의 열쇠 ] II. 무저항의 명령 ] III.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 IV.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 VI. 다섯 가지 계명 ] VII. 거짓 교리 ] VIII. 삶의 길 ] [ IX. 신앙과 행위 ]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 XI. 죽은 교회 ] XII. 신앙이란 무엇인가? ] Notes ] Maude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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