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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X. 'MY YOKE IS EASY'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We say, 'It is difficult to live in accordance with the teaching of Christ!' And how can it but be difficult when we ourselves, by the arrangement of our whole life, laboriously hide our position from our­selves and laboriously confirm ourselves in a credu­lous belief that our position is not at all what it is, but is quite different? And having called this credulity 'faith', we make of it something sacred, and by every means- by working on their feelings, by threats, flattery, and deception- we allure men to this false credulity. In this demand for credulous belief in the impossible and unnatural we have reached such a pass that the very irrationality of that for which we demand credulous belief is con­sidered a sign of its validity. A man, 'a Christian', was found who said, Credo quia absurdum, and other Christians repeated this with enthusiasm, assuming that absurdity is the very best method of teaching people the truth.

우리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우리의 전체 삶의 계획에 따라서, 우리의 처지를 스스로에게 열심히 숨기고 우리의 처지는 전혀 현재의 것이 아니라 상당히 다르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애써가며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고자 할 때, 어찌하여 그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을 ‘신앙’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고, 모든 수단으로서- 그들의 감정들을 이용함으로써, 협박, 아첨, 기만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들을 이런 거짓된 신앙으로 유혹한다. 불가능하며 불합리한 것에 대한 이런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요구 안에서, 우리가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신앙의 불합리성 자체가 진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지경에 우리는 도달한 것이다. ‘Credo quia absurdum-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열정을 가지고 되풀이 하면서, 불합리함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Recently I had a conversation with a learned and clever man who told me that Christian teaching, as a moral teaching of life, is unimportant. 'All that', said he to me, 'could be found among the Stoics and the Brahmins and in the Talmud.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teaching is not in that, but in the theosophical teaching expressed in its dogmas.' In other words, not that is precious in Christian teaching which is eternal and common to all mankind, necessary for life and reasonable, but what is important and precious is what is quite unintelligible and therefore un­necessary, and for the sake of which millions of people have been slaughtered.

나는 최근에, 도덕적인 삶의 가르침으로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중요하지 않다고 내게 말하는 학식있고 명철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런 모든 것은 스토아 학파, 바라문교 그리고 탈무드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교리에 표현되어 있는 신지학적인 가르침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귀중한 것은 모든 인류에게 영원하며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불필요한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학살되어 왔다는 것이다.

We have formed for ourselves a false perception of our life and of the life of the world, based on nothing but our own enmities and personal desires; and we consider belief in this false perception, which is artificially connected with Christ's teaching, to be what is most necessary and important for life. Were it not for this credulous belief in falsehood, which has been maintained among men for centuries, the falsity of our conception of life and the truth of Christ's teaching would long ago have become plain.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 우리의 삶과 세상의 삶에 대한 거짓된 인식을 형성하여 왔으며,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적대감과 개인적인 욕망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거짓된 인식에 대한 믿음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억지로 연결시켜서, 삶에 있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수 세기 동안 사람들 사이에 지속되어온, 거짓에 대한 이런 맹목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삶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개념의 허구성은 은 오래 전에 드러났을 것이다.

It is terrible to say, but it sometimes appears to me that if Christ's teaching, with the Church teaching which has grown out of it, had not existed at all, those who now call themselves Christians would have been nearer to the truth of Christ-  that is to say, to a reasonable understanding of what is good in life- than they now are. The moral teaching of the prophets of all humanity would not have been closed to them; they would have had their own small preachers of truth and would have believed in them. But now that the whole truth is open to them, that whole truth has seemed so terrible to those whose deeds are evil, that they have reinterpreted it into falsehood, and people have lost their belief in what is true. In our European civilized society, in reply to Christ's statement that he came into the world to witness to the truth and that therefore everyone who is of the truth hears him- people have long ago answered in the words of Pilate, 'What is truth?' Those words, which so bitterly and profoundly expose the mental condition of one Roman ruler we have accepted seriously and have adopted as our belief. All in our world live, not merely without the truth, not merely without a desire to know it, but with a firm con­viction that of all useless occupations the most use­less is the search for truth defining human life.

말하기는 두렵지만, 그러나 내게 있어서 때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성장해온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지금 그들의 상태보다도 그리스도의 진리에- 다시 말해서, 삶에 있어서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에- 한층 가까워 질 수 있었을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인류의 선지자들의 도덕적 가르침이 그들에게 막혀져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들은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작은 설교자들을 가졌을 것이며 그들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진리가 그들에게 열리고, 그런 전체 진리가 행위가 악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두렵게 느껴져서, 그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재해석하였으며,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함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문명화된 유럽 사회에서는,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나의 말을 듣는다’는 그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사람들은 오래 전에 빌라도의 말 속에서 대답하였다, ‘진리는 무엇인가?’ 이 말을, 이 말은 한 로마의 통치자의 정신적 상태를 너무나 깊이 있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우리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의욕도 없으며, 모든 쓸모없는 일들 중에서 가장 쓸모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을 정의하는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굳은 확신으로 살고 있다.

The teaching of life- which among all nations before the age of European society was always considered the most important thing, and of which Christ said that it was the one thing needful- this one thing is excluded from our life and from the whole activity of humanity. With this matter the institution which calls itself the Church is occupied: an institution in which all, including even those who are its members, have long ceased to believe. The solitary window towards the light, to which the eyes of all who think or who suffer are directed, has been boarded up. In reply to the question, 'What am I ?' and 'What am I to do ? Can I not aid my life by the teaching of that God who, you say, came to save me?' I am told, 'Obey the demands of the powers that be, and believe in the Church'. 'But why is it so hard for me to live in this world?' asks a despairing voice; 'Why is there all this evil? Is it not possible for me in my own life to abstain from participating in this evil? Can it be that it is im­possible to lessen this evil?' They reply: 'It is im­possible. Your wish to live your life well and to help others to do the same is pride and a snare. The one thing you can do is to save yourself; that is, to save your soul for a future life. If you do not wish to participate in the evil of the world, retire from it; that path is open to everyone', says the teaching of the Church. 'But know that on choosing that path you must not take part in the life of the world, but must cease to live and slowly kill yourself.' There are two paths, say our teachers: (1) to believe and to obey us and the powers that be and partici­pate in the evil we have organized, or (2) to retire from the world and go into a monastery, not sleep­ing and not eating, rotting your flesh on the top of a column, bending and unbending and doing nothing of any use to men. Either admit the teach­ing of Christ to be impracticable, and therefore acquiesce in the lawlessness of life the Church has sanctified, or renounce life- which is equivalent to slow suicide.

삶의 가르침이- 유럽 사회의 시대 이전에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그것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필요한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한가지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그리고 인류의 전체 활동에서 제외되었다. 이 문제는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르는 기관에 점령당했다: 이 기관은,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그 구성원인 사람들도, 오래 전에 믿기를 중단했다. 생각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빛을 맞이하는 유일한 창문도 막혀버렸다.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당신이 말하는 대로, 나를 구원하러 왔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나의 삶을 도울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듣는다, ‘존재하는 권력의 명령에 복종하라, 그리고 교회를 믿으라’. 한 절망적인 목소리가 묻는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세상에 살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가? 왜 모든 악들은 있는가? 내가 나 자신의 삶에서 이런 악에 참여함을 막는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이런 악을 줄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의 삶을 훌륭하게 살고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당신의 생각은 교만이며 유혹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다; 즉, 미래의 삶을 위해서 당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상의 악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라고 교회의 가르침은 말한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함에 있어서, 당신은 세상의 삶에 참여하지 않지만, 살기를 중단하며 서서히 자신을 죽이는 것임을 알라.’ 우리의 교사들은 말한다, 두 가지 길들이 있다: (1) 우리와 존재하는 권력을 믿고 따르라 그리고 우리가 조직한 악에 참여하라, 또는 (2) 세상에서 떠나라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가라, 자지도 먹지도 말라, 당신의 육신을 기둥위에서 썩혀라, 그리고 매다가 풀다가 하면서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것을 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리하여 교회가 신성하게 여기는 삶의 무질서에 묵종하거나, 삶을 포기하라- 이것은 서서히 자살함과 같은 것이다.

Astonishing (to anyone who understands Christ's teaching) as is the delusion which admits Christ's teaching to be very good for men but impracticable, still more amazing is that delusion which acknowledges that a man who wishes to carry out the teaching of Christ not in words only but in deeds, ought to retire from the world.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지만 실행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망상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말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실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서 은퇴하여야만 한다고 인정하는 망상인 것이다.

The delusion that it is better for men to with­draw from the world is an old delusion, familiar long ago to the Jews, but quite foreign to the spirit not only of Christianity but even to that of Judaism. Against that fallacy, long before the time of Christ, was written the story of the prophet Jonah of which Christ was so fond and which he so often quoted. The thought of that story from beginning to end is identical. Jonah, the prophet, wishes personally, by himself alone, to be a just man, and he with­draws from among depraved people, but God shows him that he is a prophet and that therefore it is necessary that he should impart his knowledge to the people who are in error, and so he should not flee from the erring people, but should live in contact with them. Jonah despises the depraved Ninevites and flees from them; but, try as he may to escape from his destiny, God brings him back to the Ninevites by means of the whale, and what God desires is accomplished, namely, the Ninevites re­ceive God's teaching from Jonah, and their life becomes better. But Jonah, far from being glad that he is the instrument of God's will, is dis­contented, and is jealous of God's favor to the Ninevites, and would like to be reasonable and good alone by himself. He withdraws into the desert, weeps over his fate, and reproaches God: then a gourd grows up in one night over him and shields him from the sun, and in another night a worm eats the gourd, and Jonah reproaches God still more desperately because the gourd he valued has been lost. Then God says to him, 'You regret the gourd you call yours, which grew up in one night; but do I not regret the great people which was perishing, living like beasts unable to distinguish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 Your knowledge of the truth was only of value if it was communicated to those who had it not'.

사람들이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이 더 좋다는 망상은 과거의 망상이며, 오래 전에 유태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기독교의 정신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대교의 정신에도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궤변에 반박하여, 그리스도 시대보다 오래 전에,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가 쓰여졌으며,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가 좋아하여 자주 인용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이 이야기의 사상은 동일하다. 선지자인 요나는, 자기 혼자만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몰래 원했다, 그리고 그는 타락한 사람들 사이에서 떠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선지자이며, 그러므로 그의 지식을 과오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히 전해주어야 하며, 그래서 그는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도망가서는 안되며, 그들과 접촉하며 살아야 한다고 명령한다. 요나는 타락한 니느웨 사람들을 경멸하고 그들로부터 도망간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고래를 이용하여 그를 다시 니느웨 사람들에게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성취된다, 결국,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요나로부터 받게되며, 그들의 삶은 깨끗하게 된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의 도구가 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화를 내었으며,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에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자기만이 홀로 현명하고 선해지고자 한다. 그는 사막으로 떠나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하나님을 비난한다: 그러자 하룻밤사이에 바가지 하나가 그의 위로 자라서 태양을 막아버린다. 그런데 다음날 벌레가 바가지를 파먹어 버린다, 그리고 요나는 그에게 필요하던 바가지가 없어져서 더욱 비통하게 하나님을 비난한다. 그 때 하나님은 말한다. ‘너는 바가지를 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바가지가 없어진 것을 애석해 한다, 그러나 그 바가지는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짐승처럼 생활하면서 오른손과 왼손을 구별치 못하며 멸망해가는 저 많은 사람들을 애석해 하지 않느냐? 너의 진리의 지식은 오직 진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Christ knew the story and frequently quoted it, and we are also told in the Gospels how Christ himself after visiting John the Baptist, who had withdrawn into the desert, underwent that same temptation before commencing his own preaching, and how he was led away by the devil (by a decep­tion) into the desert to be tempted, and how he conquered that deception and in the strength of his Spirit returned into Galilee, and how from that time on, he did not avoid depraved people, but spent his life among publicans, Pharisees, and sinners, teach­ing them the truth (Luke iv. 1).

그리스도는 이 이야기를 알았으며, 자주 인용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복음서에서, 그리스도 자신도 사막에 혼자 머물던 세례 요한을 방문하고서, 자기 자신의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똑 같은 시험을 받았으며, 그가 어떻게 악마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러한 속임을 극복하였는지 그리고 자신의 영의 힘으로 갈릴리에 돌아 왔는지를, 그리고 그 후로, 그는 타락한 사람들을 피하지 않았으며, 그의 삶을 세리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죄인들 사이에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보냈다는 것을 들었다(누가복음 4장 1절).

According to Church teaching, Christ, the God-Man, gave us an example of life. The whole of the life of Christ known to us was led in the very whirl­pool of life among publicans and adulterers in Jerusalem, and with the Pharisees. The chief in­junctions of Christ were love of one's neighbor and the preaching of the truth to others; the one and the other demand continual intercourse with the world. Suddenly out of this is deduced the conclusion that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Christ one should with­draw from everything, have nothing to do with anyone, and stand on a column. In order to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it appears that one must do exactly the opposite of what he taught and of what he did. The teaching of Christ, according to Church commentators, is presented both for worldly people and also for the Religious Orders not as a teaching of life- how to make it better for ourselves and for others- but as a teaching of what the worldly people, while living badly, should believe in order to save themselves in the next world; and for the Religious Orders, how to make this life still worse for themselves than it is.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이자 사람이었으며,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삶의 전부는 예루살렘의 세리들과 창녀들 사이에서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함께 삶의 소용돌이 자체에서 보냈다.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명령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명령은 세상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한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야 하며,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기둥위에 서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유도되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가 가르친 것과 그가 행한 것의 정반대를 행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교회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세속적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 삶의 가르침-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만들 것인가- 으로서가 아니라, 세속적인 사람들은, 악하게 살면서도, 다음 세상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성직자들에게는, 현재의 삶을 있는 것 보다도 더 추악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제시된다.

But that is not what Christ taught. Christ taught truth, and if abstract truth is truth it will also be true in practice; and if life in God is the only true life blessed in itself, then it is true and blessed here on earth, amid all the possible accidents of life. If life here did not confirm the teaching of Christ about life, that teaching would be untrue.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진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추상적인 진리가 진리라면, 그것은 또한 실제에 있어서도 진리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그 자체로서 행복된 유일한 참된 삶이라면, 여기 땅 위에서도, 가능한 모든 삶의 경우들 가운데서도 진리이며 행복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의 삶이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Christ does not call us to something worse instead of something better, but on the contrary to some­thing better instead of something worse. He pities people who appear to him like lost sheep perishing without a shepherd, and he promises them a shep­herd and good pasture. He says that his disciples will be persecuted for his teaching and will have to suffer and to endure worldly persecution with fortitude, but he does not say that by following his teaching they will suffer more than by following the world's teaching; on the contrary, he says that those who follow the teaching of the world will be unhappy, and those who follow his teaching will be blessed.

그리스도는 더 나은 것 대신에 더 악한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악한 것 대신에 더 나은 것을 명령한다. 그는 양치기 없이 죽어가는 잃어버린 양떼 같이 보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리고 그들에게 좋은 목자와 좋은 풀밭을 약속한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박해를 받을 것이며 강인함으로 세상의 박해를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에 의해서 보다도 자신의 가르침을 따름에 의해서 더 많이 고통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불행하게 될 것이나,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Christ does not teach salvation by faith or by asceticism- that is, by a deception of the imagina­tion or by voluntarily tormenting oneself in this life; but he teaches life in which besides salvation from the loss of personal life, there will, here in this world, be less of suffering and more of joy than in a personal life.

그리스도는 신앙에 의한, 또는 금욕에 의한- 즉, 상상에 의한 기만이나 이 삶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함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삶의 포기에 의한 구원 외에, 여기 이 세상에서, 개인적인 삶 안에서 보다도 더 적은 고통과 더 많은 기쁨이 있는 삶을 가르친다.

Christ, revealing his teaching, says to people that by following it, even among those who do not follow it, they will not be more unhappy than before but on the contrary will be happier than those who reject it. He says that there is true worldly advantage in not taking thought for the worldly life.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을 밝히면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심지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들은 이전 보다도 더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러나 반대로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 보다도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적인 삶에 대한 생각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세상적인 이익이 있다고 말한다.

'And Peter began to say unto him: Behold we have left all and followed thee; what shall we receive?' Jesus answered him and said, 'Verily, I say unto you, there is not one who has left home, or brother, or sister, or father, or mother, or wife, or child, or lands, for my sake and the Gospel's, who will not receive now, in this time, amid persecutions, a hundred times more houses, and brethren, and sisters, and fathers, and mothers, and children, and lands, and in the age to come life eternal'. (Matt. xix. 27, 2Q; Mark x. 28-30; Luke xviii. 28-30.)

‘이에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쫒았나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리스도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빛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의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6장 27, 29절; 마가복음 10장 28-30절; 누가복음 18장 28-30절 )

Christ, it is true, says that those who follow him will be persecuted by those who do not listen to him, but he does not say that the disciples will lose any­thing thereby; on the contrary, he says that his disciples will have more of joy here in this world than those who do not follow him.

진실로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로 인해서 그의 제자들이 무엇인가를 잃어 버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그의 제자들이 여기 이 세상에서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보다도 더 많은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That Christ says and thinks this is shown beyond possibility of doubt by the clearness of his words and the drift of his whole teaching, as well as by his way of life and that of his disciples. But is it true?

그리스도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말들의 명료함과 그의 전체 가르침의 취지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에 의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인가?

Examining the abstract question whether the position of the disciples of Christ or of the disciples of the world is the better, one cannot but see that the position of the disciples of Christ should be better, because they, doing good to all men, would not evoke hatred. The disciples of Christ, doing harm to no one, would only be persecuted by evil men, but the disciples of the world would be persecuted by all, since the law of their life is the law of strife- that is to say, the persecution one of another. The chances of suffering are the same for these as for those, with only this difference, that Christ's disciples will be prepared for the sufferings, but the world's disciples will employ all the powers of their souls to escape them; and that Christ's disciples when suffering will think that the world needs their sufferings, but the world's disciples when suffering will not know why they suffer. Arguing in the abstract, the position of Christ's followers should be better than that of those of the world. But is it so in reality?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위치가 나은지 세상 가르침의 제자들이 나은지의 추상적인 질문을 검토해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위치가 더 낫다는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므로, 증오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므로, 오직 악한 사람들에 게만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법칙은 투쟁의 법칙- 다시 말하면, 서로에 대한 박해- 이기 때문이다. 전자나 후자나 고통의 가능성은 같으나, 오직 이런 차이가 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고통들을 위에 준비가 되어 있지만, 세상의 제자들은 고통들을 피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고통 받을 때 세상이 그들의 고통들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의 제자들은 고통 받을 때 그들이 왜 고통 받는지 모를 것이다. 추상적인 의미에서 논하자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 보다도 더 유리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럴까?

To verify this let everyone remember all the painful moments of his life, all the physical and spiritual sufferings he has endured and still endures, and ask himself for what has he borne all these misfortunes, for the sake of the world's teaching or for that of Christ's? Let every sincere man re­member well his whole life, and he will see that never, not once, has he suffered from obeying the teaching of Christ, but that most of the misfortunes of his life have come about because contrary to his own inclination he has followed the world's teach­ing which constrained him.

이것을 확인하려면, 우리는 자신이 겪었으며 아직도 겪고 있는 자신의 삶의 모든 고통스럽던 순간들을,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들을 회상하고서, 무엇을 위해서 이 모든 불행들을 참았는지, 세상의 가르침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위해서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모든 성실한 사람은 자신의 전체 삶을 자세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이 아니라 결코 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복종함으로 고통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대부분의 불행은 자기 자신의 의향과 반대로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알 것이다.

In my own life, exceptionally fortunate in a worldly sense, I can recall sufferings borne by me in the name of the world's teaching which would be sufficient to supply a good Christian martyr. All the bitterest moments of my life, from the drunkenness and debauchery of student-days, the duels, war, and so on, to that ill-health and those un­natural and trying conditions of life in which I now live- all this was martyrdom in the name of the world's teaching.

나 자신의 삶에서, 세상적인 의미에서 예외적으로 행복하였지만, 나는 세상의 가르침의 이름으로 내가 겪은 고통들이 훌륭한 기독교 순교자를 만들어 낼 만큼 충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나의 삶의 가장 쓰라린 모든 순간들, 학창시절의 술취함과 방탕함과, 결투, 전쟁, 등에서부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쁜 건강과 비자연적이고 괴로운 삶의 상태들까지- 이 모든 것은 세상의 가르침의 순교들이다.

And I speak of my own life, which is exceptionally fortunate in a worldly sense. But how many martyrs are there who have endured and are now enduring, for the sake of the world's teaching, sufferings which I cannot even vividly imagine to myself!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삶을 말한다, 나의 삶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세상의 가르침을 위하여, 내가 심지어 선명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들을 겪었으며, 지금도 겪고 있는 것일까!

We do not see all the difficulty and danger of obeying the world's teaching, merely because we consider that all we endure for it is unavoidable.

우리는 세상의 가르침을 이행함의 모든 어려움과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이는 오직 우리 모두가 그것을 참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We have assured ourselves that all these mis­fortunes which we inflict on ourselves are necessary conditions of our life, and therefore we are unable to grasp the fact that Christ teaches just how we should free ourselves from these misfortunes and live happily.

우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이 모든 불행들이 우리의 삶에 필요한 조건들이라고 스스로 확신해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정말 우리 자신을 이런 불행들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없다.

To be in a condition to discuss the question which life is happier, we should dismiss that false notion, if only in thought, and look without prejudice within ourselves and around us.

어느 쪽의 삶이 더 행복한지의 문제를 논의할 상황에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이런 거짓된 개념을 잊어버리고, 생각에서라도, 우리의 안과 우리의 주변에서 편견 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Go among a large crowd of people, especially townsfolk, and notice the wearied, distressed, sickly faces, and then remember your own life and the lives of people about whom you have known; re­member all the violent deaths, all the suicides which you have heard, and ask yourself for whose sake was all this suffering, death, and suicidal despair? And you will see, strange as it at first seems, that nine-tenths of these sufferings are en­dured for the sake of the world's teaching, that all these sufferings are unnecessary and need not exist, and that the majority of people are martyrs to the world's teaching.

대규모 군중들, 특히 도시 사람들, 속을 걸어 가보라, 그리고 지쳐있고, 괴로워 하며, 병든 얼굴들을 보라, 그리고 나서 당신 자신의 삶과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삶들에 대해 기억해보라; 모든 폭력적인 죽음들,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자살들을 기억해 보라,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이 모든 고통, 죽음 그리고 자살을 부르는 절망이 존재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처음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지라도, 이런 고통들의 9할은 세상의 가르침을 위해서 겪는 것이며, 이 모든 고통들은 불필요하며 존재할 필요도 없으며,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가르침의 순교자들임을 알게 것이다.

Recently, one rainy autumn Sunday, I went by tram through the Bazaar at the Sukharev Tower. For nearly half a mile the car made its way through a dense crowd of people who immediately closed in again behind it. From morning to night these thousands of people, of whom most are hungry and ragged, swarm here in the dirt, scolding, cheating, and hating one another. The same thing occurs in all the bazaars of Moscow. The evening is passed by these people in the dram-shops and taverns, the night in their corners and hovels. Sundayis the best day in their week. On Monday, in their infected dens, they will again resume the work they detest.

근래에, 어느 비오는 가을의 일요일에, 나는 전차를 타고 스카레브 타워 시장을 지나갔다. 거의 반 마일 동안 전차는 빽빽한 군중을 뚫고 나아 갔으며 이내 뒤는 다시 메워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수천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대부분은, 굶주리고 헐벗었으며, 이 곳 진흙탕 속에서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속이며 미워하고 있었다. 똑 같은 일들이 모스크바의 시장들에서 일어난다. 저녁이면 선술집과 대포집에 이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며, 밤이 되면 그들의 구석방들과 오두막으로 돌아 간다. 월요일에는, 오염된 소굴에서, 그들은 다시 지겨운 일을 시작할 것이다.

Consider the life of all these people in the positions they left to choose that in which they have placed themselves, and remember the unceasing toil these people voluntarily endure- men and women- and you will see that they are real martyrs.

그들이 자신들이 위치한 삶을 선택하기 위해 떠난 처지에서 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고,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감당하는 끊임없는 노역들을 생각해보라, 그러면 그들이 진정한 순교자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All these people have left their homes, fields, fathers, brothers, and often their wives and children, and have abandoned everything, even their very lives, and have come to town to acquire that which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world is considered indispensable for each of them. And they all- not to mention those tens of thousands of unfortunate people who have lost everything and struggle along on garbage and vodka in the doss-houses- they all, from the factory hands, cabmen, seamstresses and prostitutes, to the rich merchants and Ministers of State with their wives, endure the most trying and unnatural manner of life and yet fail to acquire what,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world, they need.

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집들, 들판들, 아버지들, 형제들, 그리고 흔히 그들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떠났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렸다, 심지어 그들의 삶마저도, 그리고 세상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들 각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들을 얻기 위하여 도시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모든 것을 잃고서 값싼 하숙집에서 쓰레기와 술과 싸우는 수만의 불행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모두, 공원들, 마부들, 가정부들과 창녀들에부터, 부유한 상인들 그리고 국가의 각료들과 그들의 아내들 까지, 가장 고통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삶의 방법을 견뎌내지만, 세상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데 실패한다.

Search among these people for a man, poor or rich, for whom what he earns secures what he considers necessary according to the world's teaching, and you will not find one in a thousand. Everyone struggles with his whole strength to obtain what he does not need, but what is demanded of him by the teaching of the world and the absence of which therefore makes him unhappy. And as soon as he obtains what is required, something else, and again some­thing else, is demanded of him, and so this work of Sisyphus continues endlessly, ruining the life of men. Take the ladder of wealth of people who spend from 30 to 5,000 a year, and you will rarely find one who is not tormented and worn out with work to obtain 40 when he has30, and 50 when he has 40, and so on endlessly. And there is not one who having 50 would voluntarily exchange into the way of life of one having 40, or if there are such cases the exchange is made not to live more easily, but to save money and hide it away. They all have to burden their already overladen life more and more with work and to devote their life and soul entirely to the service of the world's teaching. Today I obtain a coat and galoshes, tomorrow a watch and chain, after tomorrow a lodging with a sofa and a lamp, then carpets in the sitting-room and velvet clothes, then race-horses and pictures in gilt frames, till finally I fall ill from my excessive labors and die. Another continues the same labor and also sacrifices his life to that same Moloch; he too dies and also does not know why he did what he did. But perhaps the life itself during which a man does all this is happy?

이런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 거지에서 부유층까지, 그가 벌어 들이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에 따라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 을 찾아 보라, 그러면 천명 중에서 한 명도 찾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에게 요구되는 것을 얻으려고 자신의 전력을 다하여 투쟁하며, 그러므로 그것을 구하지 못하면 그는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요구되는 것을 얻자마자, 다른 어떤 것, 그리고 다시 다른 어떤 것이 그에게 요구된다, 그리고 이런 시지프스의 고역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 년간 300 만원부터 5억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부의 단계를 예를 들자, 그러면 300만원을 가진 사람이 400만원을 벌고자 일한다면 고통받고 지치지 않는 사람을 거의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400 만원을 가졌을 때 500만원을 벌고자 할 경우, 그리하여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500 만원을 가진 사람이 임의적으로 400 만원을 가진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만일 그런 경우들이 있다면, 그러한 교환은 더욱 쉽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절약하고 숨기기 위해서다. 그들은 모두 이미 그들의 과부하된 삶에 일로서 더욱더 짐을 지워야 하며, 그리고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전부 세상의 가르침에 봉사함에 쏟아야만 한다. 오늘 나는 코트와 반장화를 얻는다, 내일은 시계와 시계줄, 모래는 소파와 등이 있는 방, 그리고 나서 거실에는 카페트 그리고 비단 옷들, 그리고 나서 경주마와 금테를 두른 액자를 한 그림들, 마침내 나는 과도한 노동으로부터 병이 들어서 죽는다. 다른 사람이 똑 같은 노동을 되풀이 하며, 또한 자신의 생명을 똑 같은 몰록에게 바친다; 그 역시 죽고 말며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일을 왜 행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혹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동안 삶 자체는 행복할까?

Test that life by the measure of what all men have always described as happiness and you will see that this life is terribly unhappy. Indeed, what are the chief conditions of earthly happiness- those which no one disputes?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척도로 그 삶을 시험해보라, 그러면 이런 삶은 무섭도록 불행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진실로, 지상의 행복의 주된- 아무도 논쟁할 수 없는- 조건들은 무엇일까?

One of the first conditions acknowledged by everyone is that man's union with nature should not be infringed- that is to say, that he should live under the open sky, in the light of the sun and in the fresh air, in contact with the earth, with vegetation, and with animals. All men have always considered that to be deprived of those things was a great misfortune. Men confined in prison feel this deprivation more than anything else. But consider the life of people who live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world: the more they achieve success accord­ing to the world's teaching the more are they de­prived of this condition of happiness. The higher they climb in the scale of worldly fortune the less do they see of the light of the sun, of the fields and the woods, and of wild or domestic animals. Many of them, almost all the women, live on to old age seeing the rising of the sun only once or twice in their lives, and never seeing the fields and the woods except from a carriage or a railway train, and not only without having sown or planted anything, or fed or reared cows, horses, or hens, but without even having an idea of how those animals are born, grow, and live. These people only see textiles, stone, and wood shaped by human toil, and that not by the light of the sun but by artificial light. They only hear the sounds of machines, vehicles, cannons, and musical instruments; they smell scents and tobacco-smoke; under their feet and hands they have only textiles, stone, and wood; for the most part, on account of their weak digestions, they eat highly-spiced food that is not fresh. Their movements from place to place do not save them from these deprivations. They move about in closed boxes. In the country and abroad, wherever they go, they have the same textiles and wood under their feet, the same curtains hiding the light of the sun from them, the same footmen, coachmen and porters depriving them of contact with the earth, with plants, and with animals. Wherever they may be they are deprived, like prisoners, of this condition of happiness. As prisoners console themselves with a tuft of grass that grows in the prison yard, with a spider or a mouse, so these people sometimes con­sole themselves with puny indoor plants, a parrot, or a monkey, and even these they do not themselves rear.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행복의 첫째 조건은 자연과 사람의 조화가 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활짝 트인 하늘 아래서, 햇볕을 받으며,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대지와, 식물과, 그리고 동물들과 접촉하면서 살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이러한 것들을 박탈당하는 것은 커다란 불행으로 여겼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이러한 박탈감을 무엇보다도 많이 느낀다. 그러나 세상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고려해보자: 세상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들이 성공을 이루면 이룰수록, 그들은 이런 행복의 조건을 더 많이 박탈당한다. 세상의 부의 높은 단계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들은 햇빛, 들판, 숲, 야생의 또는 집안의 동물들을 더 적게 보게 된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모든 여자들의 경우에, 노인이 되도록 살면서 그들의 생애에 떠오르는 해를 오직 한 번이나 두 번 밖에 보지 못하며, 마차 안에서나 기차 안에서 말고는 들판이나 숲을 결코 보지 못한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무엇을 재배하거나, 또는 소나 말이나 닭을 먹이거나 기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런 동물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고 사는지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이 사람들은 오직 사람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옷감들, 돌, 그리고 나무를 볼 뿐이며 그것도 햇빛 아래서가 아니라 인조 불 빛 아래서 본다. 그들은 오직 기계들, 자동차들, 대포들, 그리고 악기들의 소리만 듣는다; 그들은 향수와 담배 냄새를 맡는다; 그들의 발과 손 아래는 오직 섬유, 석재, 그리고 목재가 있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그들의 약한 소화기능 때문에, 그들은 신전하지도 않은 양념을 많이 친 음식을 먹는다. 이곳 저곳으로의 여행들도 그들에게서 이런 결핍들에서 구해내지 못한다. 그들은 폐쇄된 상자 안에서 이리저리 이동한다. 나라 안에서나 외국에서나, 그들이 어디에 가든지, 그들의 발 아래는 똑 같은 천들과 목재들이 깔려 있으며, 똑 같은 커튼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며, 똑 같은 하인, 마부 그리고 심부름 꾼들이 그들이 대지, 식물들 그리고 동물들과의 접촉할 기회를 빼앗는다. 그들이 어디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마치 죄수들처럼, 이런 행복의 조건을 박탈당한다. 마치 죄수들이 감옥의 뜰에 자라는 한 줌의 잔디, 거미나 쥐에 스스로 위안을 얻듯이, 이 사람들도 때로는 보잘 것 없는 실내용 식물, 앵무새, 또는 원숭이를 보고 위안을 얻지만, 심지어 이것들도 그들이 스스로 기르는 것이 아니다.

Another undoubted condition of happiness is work; in the first place voluntary work which one is fond of, and secondly physical work which gives one an appetite and sound, restful sleep. Again the more good fortune people have secured according to the world's teaching, the more are they deprived of this second condition of happiness. All the fortunate ones of the world, the men in important places and the rich, either live like prisoners, quite deprived of work and vainly struggling with diseases that arise from the absence of physical labor, and still more vainly with the ennui which overcomes them (I say vainly, because work is only joyous when it is undoubtedly needful- and they need nothing), or they do work they hate, as bankers, public prosecu­tors, governors, or ministers, while their wives arrange drawing-rooms, china, and costumes for themselves and their children. (I say hateful be­cause I have never yet met one of them who praised his occupation, or did it with even as much pleasure as that with which a porter clears away the snow from before the house.) All these fortunate people are either deprived of work or are burdened with work they dislike-  that is to say, they find themselves in the position in which prisoners are placed.

행복의 확실한 또 하나의 조건은 노동이다; 첫째는 우리가 좋아하는 자발적인 노동이며, 둘째는 우리에게 식욕과 건강하고 안락한 잠을 주는 육체적 노동이다. 다시, 사람들이 세상의 가르침대로 더 훌륭한 부를 확보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이런 행복의 둘째 조건을 잃게 된다. 세상의 모든 운좋은 사람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부자들은, 은행가, 변호사, 지사, 장관의 직책을 가지고, 죄수처럼 살거나 노동을 완전히 빼앗기고 육체적 노동의 결여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들과 헛되이 싸워야 하며 그들을 뒤덮는 권태와 더욱 헛되이 싸우고 있거나(나는 헛되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노동은 오직 명백히 필요할 때만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어하는 일을 하며, 한편 그들의 아내들은 그들 자신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응접실, 접시, 그리고 의복들을 정리한다. (나는 싫어하는이라는 말을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직업을 칭찬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며, 심지어 문지기가 집 앞에서 눈을 쓸어내는 정도의 즐거움 만이라도 가진 사람을 결코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운좋은 사람들은 노동을 박탈당하거나 그들이 지겨워하는 일로 괴로워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죄수들이 처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The third indubitable condition of happiness is a family. And again, the further people have advanced in worldly success the less is that happiness accessible to them. Most of them are adulterers, and consciously renounce the happiness of a family, submitting only to its inconveniences. If they are not adulterers, still their children are not a joy to them but a burden, and they deprive themselves of them, trying in every way-  often by most tormenting means- to make their marital unions barren. Or if they have children they are deprived of the joy of intercourse with them. By their rules they have to hand them over to strangers, for the most part quite alien people; first to foreigners, and then to the Government instructors; so that their family only causes them grief, their children from infancy becoming as unhappy as their parents and having only one feeling towards their parents- a desire for their death in order to inherit their pro­perty. They are not shut up in prison, but the consequences of their life in regard to their family, are more tormenting than the deprivation of family life to which prisoners are exposed.

행복의 확실한 세째 조건은 가족이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이 세상적인 성공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그런 행복은 그들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그들 대부분은 간음죄를 지으며, 의도적으로 가족의 행복을 포기하고, 오직 가족의 불편함만을 염두에 둔다. 만일 그들이 행음자들이 아니라면, 그렇더라도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에게 즐거움이 아니라 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자식을 갖지 않으려 한다- 가끔 가장 고통을 주는 방법을 이용하여- 그리하여 그들의 부부관계를 쓸모 없게 만든다. 아니면, 그들이 자녀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녀들과 대화의 즐거움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법칙에 의하면, 그들은 자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경우 낮선 사람들에게, 넘겨 주어야만 한다; 최초에는 외국인들에게, 다음엔 공공 교육기관에 넘겨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가족은 오직 그들에게 슬픔만 줄 뿐이며,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들 만큼이나 불행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에 대해서 오직 한가지 감정을 가진다- 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서 부모가 그들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들이 감옥에 갖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에 관련한 그들의 삶의 결과들은, 죄수들이 겪는 가족 생활이 없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The fourth condition of happiness is free, amic­able intercourse with all the different people in the world. And again, the higher the rank attained by men of the world the more are they deprived of this chief condition of happiness: the higher, the narrower and the more restricted is the group of people with whom it is possible for them to associate and the lower in mental and moral development are the few people who form the enchanted circle from which there is no escape. For a peasant and his wife intercourse is open with the whole world of mankind, and if one million people do not wish to have intercourse with him he still has eighty millions of people such as himself, laboring people with whom, from Archangel to Astrakhan, without waiting for visits or introductions, he can at once enter into the closest brotherly relations. For an official with his wife there are hundreds of people on the same level as himself, but those above him do not receive him and those below him are all separated from him. For a rich man of the world and his wife a few dozen worldly families are ac­cessible, all the rest are cut off from him. For a Minister of State, or a millionaire, and his family, there are a single dozen similarly important or wealthy people. For Emperors and Kings the circle is yet more restricted. Is not this a form of im­prisonment in which the prisoner can only have intercourse with two or three warders?

행복의 네째 조건은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자유롭고 우호적인 교제이다. 그리고 다시,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지위가 높아지면 질수록 그들은 이런 행복의 주된 조건을 빼앗긴다: 높아지면 질수록, 그들이 교제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더욱 더 좁아지고 제한되며, 탈출할 수 없는 마법의 고리를 형성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정신적 도덕적 발전이 더욱 낮아진다. 농부와 그의 아내에게는 전세계의 인류로 교제가 열려있다, 그리고 만일 백만 명이 그와 교제하고 싶지 않는다면 아직 그와 같은 팔천만 명의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노동하는 사람들로서, 아크엔젤에서부터 아스트라칸까지, 방문이나 소개를 기다림이 없이 그는 당장 매우 친밀한 형제관계를 맺을 수 있다. 관리와 그의 아내에게는 그와 똑 같은 수준의 수백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높은 사람들은 그를 받아 주지 않으며 그보다 낮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세상의 부유한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는 수십 명의 다른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며, 나머지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서 차단되어 있다. 국가의 장관이나 백만장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는, 열 댓 명의 비슷하게 중요하거나 부유한 사람들이 있다. 황제들과 왕들에게는 그러나 더욱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죄수가 단 두 세 사람의 간수들과 교제가 가능한 감옥의 한 모습이 아닌가?

Finally, a fifth condition of happiness is a healthy and painless death. And again, the higher people stand on the social ladder the more are they de­prived of this condition of happiness. Take for example a moderately rich man and his wife and an average peasant and his wife: notwithstanding all the hunger and excessive toil which, not by his fault but by the cruelty of man, a peasant has to bear, you will see that the lower the healthier and the higher the sicklier are men and women.

마지막으로, 행복의 다섯번째 조건은 건강하고 고통이 없는 죽음이다. 그리고 다시, 사회적 계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러한 행복의 조건을 더 많이 박탈당한다. 어느 정도 부유한 사람과 그의 아내, 그리고 평범한 농부와 그의 아내를 예로 들어보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의 잔인함에 의해서 비롯되어 농부가 참아야 하는 모든 배고픔과 과도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남녀 모두 낮으면 낮을수록 더 건강하고, 높으면 높을수록 더 병이 많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Count over in your memory the rich men and their wives you have known or now know, and you will notice that most of them are ill. Among them a healthy man, who is not undergoing treatment continually or periodically summer after summer, is as much an exception as is a sick man among the peasantry. All these fortunate people without ex­ception, begin with onanism (which has become in their class a natural condition of development), they all have bad teeth, are all gray or bald at an age when a workman is just reaching his full strength. They are nearly all subject to nervous, digestive, and sexual illnesses from gluttony, drunkenness, debauchery, and doctoring, and those who do not die young spend half their life in being doctored and taking injections of morphia, or are shriveled cripples unfitted to live by their own exertions and capable of existing only like parasites or like those ants who are fed by slave-ants. Con­sider their deaths: this one shot himself; that one rotted with syphilis; another old man died from the effects of a stimulant, while another died young from a flogging to which he submitted in his desire for sex-stimulation; one was eaten alive by lice, another by worms; one drank himself to death, another died of over-eating; one from morphia, and another as the result of an abortion. They perish one after another for the sake of the world's teaching. And the crowd throngs after them and seeks, like martyrs, for suffering and destruction.

당신이 알았거나 지금 알고 있는 부자들과 그들의 부인들을 당신의 기억에서 생각해보라, 그러면 그들 대부분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들 중에서 어떤 건강한 사람은, 여름마다 지속적으로 또는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농부들 중에 있는 한 명의 병자 만큼이나 예외에 속할 것이다. 이 모든 운이 좋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위로 시작하며(이것은 그들의 계급에서 성장의 자연적인 상태이다), 노동자들이 막 왕성한 힘에 도달하는 나이에, 그들 모두는 치아가 나쁘고, 모두 머리가 희어지거나 대머리가 된다. 그들은 모두 과식, 폭음, 방탕, 그리고 약물중독으로 신경쇠약, 소화불량, 그리고 성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요절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절반을 병간호를 받으며 모르핀주사를 맞거나, 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가기에 적합치 않은 무력한 불구자들이며 오직 기생충처럼 또는 일개미들이 먹여주는 개미들처럼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죽음들을 생각해보라: 이 사람은 총으로 자살하고; 저 사람은 매독으로 몸이 썩는다; 다른 노인은 흥분제 남용으로 죽고, 다른 사람은 성적 자극을 위해 매질을 당하여 요절한다; 어떤 사람은 이에 의해서 산채로 먹히며 다른 사람은 벌레에 먹힌다; 어떤 사람은 죽도록 술을 마시며, 다른 사람은 과식으로 죽는다; 어떤 사람은 모르핀 때문에, 다른 사람은 낙태 때문에 죽는다. 그들은 세상의 가르침을 위하여 차례대로 죽어간다. 그리고 군중들은 그들을 따라서 몰려가며, 마치 순교자들처럼, 고통과 멸망을 찾고 있다.

One life after another is flung under the chariot-wheels of that god: the chariot passes on tearing them to pieces, and more and more victims, with groans, cries, and curses, fall beneath it! :

한 생명 또 한 생명이 그러한 신의 마차 바퀴 아래에 내던져진다: 마차는 그들을 조각으로 만들면서 계속 지나간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희생자들이, 신음과 눈물과 저주의 비명을 지르면서, 그 아래로 넘어진다!

To fulfill the teaching of Christ is hard! Christ says: 'Let him that would follow me leave house, and fields, and brothers, and follow me in God's way, and he shall receive in this world a hundred times more houses, fields, and brothers, and shall also gain eternal life.' And no one follows him. But the teaching of the world says: 'Abandon house, and fields, and brothers, and go from the village to the rotten town. Live all your life as a naked bath-attendant soaping other people's backs amid the steam, or serve in a money-changer's basement-office all your life counting other people's pence; or live as a public prosecutor, spending your whole life in the courts over law-papers and devoting your­self to making miserable people's fate yet worse; or as a Minister of State, signing unnecessary papers in a hurry all your life; or as a colonel, killing people all your life- live such a monstrous life as this, always ending in a painful death, and you will neither gain anything in this world nor will you receive life eternal.' And everyone follows this course. Christ said: 'Take up your cross and follow me'- that is to say, endure submissively the fate that has befallen you and obey me, God; and no one follows him. But the first abandoned man wear­ing epaulets and fit for nothing but murder, into whose head it enters, says: 'Take, not a cross but a knapsack and rifle, and follow me to all kinds of torment and to certain death'- and all follow him.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행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집, 밭, 그리고 형제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 안에서 나를 따를라, 그리하면 이 세상에서 백배의 집, 밭, 형제들을 받을 것이며, 또한 영원한 삶을 얻으리라.’ 그리고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가르침은 말한다: ‘집, 밭, 그리고 형제들을 버리라 그리고 시골을 떠나 타락한 도시로 가라. 당신의 일생을 수증기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등이나 밀어주는 벌거벗은 때밀이로 살라, 아니면 당신의 일생을 환전상의 지하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의 푼돈이나 세면서 살아라; 아니면 검사처럼 당신의 일생을 법정에서 조서와 싸우고, 불쌍한 사람들의 운명을 더욱 악하게 만드는데 헌신하라; 아니면 국가의 장관으로, 당신의 한 평생 서둘러서 필요없는 서류에 서명하며 살아라; 아니면 대령이 되어서 한 평생 사람들을 죽이면서 살라- 언제나 고통스런 죽음으로 끝나는, 이와 같이 괴물 같은 삶을 살아라, 그러면 당신은 결코 이 세상에서 어느것도 얻지 못할 것이며, 영원한 삶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간다. 그리스도가 말한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다시 말해서, 너희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순종으로 인내하고 나, 하나님을 따르라; 그리고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견장을 달았으며 아무 쓸모 없고 살인만 일삼는 처음의 파렴치한 사람은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십자가를 지지 말고 배낭과 소총을 가지고, 모든 종류의 고통과 틀림없는 죽음으로 나를 따르라’- 그리고 모두가 그를 따른다.

Having abandoned their families, parents, wives, and children, and having been dressed up like fools and submitted themselves to the authority of the first man of higher rank that they happened to meet: cold, hungry, and exhausted by forced marches, they go like a herd of bullocks to the slaughter; yet they are not bullocks but human beings. They cannot but know that they are being driven to slaughter with the question unanswered- Why? And with despair in their hearts they go: and die of cold, hunger, and infectious diseases, till they are placed under a shower of bullets and cannon-balls and ordered to kill people who are unknown to them. They slay and are slain. And no one of the slayers knows why or wherefore. The Turks roast them alive on the fire, skin them, and tear out their entrails. And again to-morrow someone will whistle, and again all will follow to horrible sufferings, to death, and to obvious evil. And no one considers this hard! Neither those who endure the sufferings, nor their fathers and mothers, consider this difficult. The parents even themselves advise their children to go. It seems to them that not only is this necessary and unavoidable, but that it is also good and moral.

가족들, 부모들, 아내들 그리고 자녀들을 버리고, 바보들처럼 차려 입고서 처음 만난 고위 인물의 명령에 스스로 복종한다: 춥고, 배고프고, 그리고 강제 행군으로 지쳐서, 그들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떼들처럼 간다; 그러나 그들은 소떼들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대답도 얻지 못한 채, 그들은 자신들이 도살장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들 속에는 절망을 느끼면서, 그들은 간다: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빗발치는 총알들과 대포알 아래 서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받는다. 그들은 죽이고 또 죽인다.그리고 살인자들 중의 어느 누구도 왜 또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다. 터어키인들은 그들을 산 채로 불에 굽고, 그들의 가죽을 벗기고 그들의 내장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내일은 누군가가 호루라기를 불고, 그리고 다시 모두가 전율스러운 고통들, 죽음, 그리고 틀림없는 악으로 따라간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것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고통들을 겪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아버지들, 어머니들도, 이것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들 스스로가 그들이 자녀들에게 가라고 권유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일은 필요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하고 도덕적인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It would be possible to believe that the fulfillment of Christ's teaching is difficult and terrible and tormenting, if the fulfillment of the world's teaching were easy, safe, and pleasant. But in fact the fulfillment of the world's teaching is much more dangerous and tormenting than the fulfillment of Christ's teaching.

만일 세상의 가르침을 이행함이 쉽고, 안전하며, 그리고 유쾌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이행이 어렵고, 무서우며,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세상의 가르침을 이행함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행함 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고통스럽다.

There used, it is said, to be Christian martyrs, but they were the exception; they have been reckoned at 380,000- voluntary and involuntary, in 1800 years. But count the worldly martyrs, and for each Christian martyr you will find a thousand worldly martyrs whose sufferings are a hundred times more terrible. Those slain in war, during the present century, are reckoned at thirty millions.

한 때는 기독교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180년 동안- 38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세상의 가르침의 순교자들을 세어보라, 그러면 기독교 순교자 한 명당 수천명의 세상 순교자들이 있으며, 그들의 고통은 백배 이상이나 더 무서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에, 전쟁에서 살해된 사람들의 수는 3000만 명이나 된다.

Now these were all martyrs to the world's teach­ing, who needed not even to follow the teaching of Christ but simply to abstain from following the teaching of the world, in order to have escaped from suffering and death.

오늘날 이 사람들은 모두 세상 가르침의 순교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도, 단순히 세상의 가르침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A man need only do what he wishes to do-­refuse to go to war- he will be set to dig trenches, but will not be tormented in Sevastopol or Plevna. A man need but disbelieve the world's teaching that he must wear over-shoes and a watch-chain and have a drawing-room he does not need, and that he must do all the stupid things demanded of him by the world's teaching, and he will not be exposed to excessive toil and suffering, never-ending cares, and work without rest or aim; he will not be deprived of intercourse with nature, will not be deprived of congenial work, of family, and of health, and will not perish by a senseless and tormenting death.

사람은 오직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 전쟁에 나가기를 거부하는 것- 을 하면 될 뿐이다- 그는 참호를 파도록 명령받을 것이며, 세바스톨이나 플레브나에서 고문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덧신을 신고 시계줄을 차며, 필요하지도 않은 응접실을 가져야 하고, 세상의 가르침이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어리석은 짓들을 해야만 한다는 세상의 가르침을 부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는 과도한 노역과 고통, 끝없는 근심들, 그리고 휴식이나 목적이 없는 노동에 노출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자연과의 교제도 상실당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 가족, 건강을 잃지 않을 것이며, 무의미하며 고통받는 죽음으로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It is not necessary to be a martyr in Christ's name- that is not what he teaches. He only bids us cease to torment ourselves in the name of the world's false teaching.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직 우리에게 세상의 거짓된 가르침의 이름으로 자기자신을 고문하기를 중단할 것을 명령한다.

Christ's teaching has a profound metaphysical meaning, it has an all-human meaning, and it has the simplest, clearest, and most practical meaning for the life of every single man. That last meaning can be expressed thus: Christ teaches men not to commit stupidities. Therein lies the simplest mean­ing of Christ's teaching, accessible to all.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심오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전 인류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것은 모든 개인의 삶을 위한 가장 단순하며, 가장 명료하고, 그리고 가장 실용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마지막 의미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르지 말라고 가르친다. 바로 여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가능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장 단순한 의미가 있다

Christ says: Do not be angry, do not consider any­one your inferior- to do so is stupid. If you get angry and insult people it will be the worse for you. Christ also says: Do not run after women, but unite with one woman and live with her- it will be better for you so. He also says: Do not promise anything to people, or else they will oblige you to do stupid and evil actions. He also says: Do not return evil for evil, or the evil will return to you yet more bitterly than before: like the heavy log suspended over the store of honey, which kills the bear. He also says: Do not consider men foreign to you merely because they live in another country and speak another language. If you consider them as enemies and they consider you such, it will be worse for you. So do not commit all these stu­pidities, and it will be better for you.

그리스도는 말한다: 화를 내지 말라, 다른 사람을 너희보다 열등하다고 여기지 말라-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만일 너희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한다면 그것은 너희에게는 더욱 악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말한다: 여자들의 꽁무니를 좆지 말고, 한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살아라-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에게 더 나을 것이다. 그는 또한 말한다: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약속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너희에게 어리석고 악한 행동들을 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그는 또한 말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 악은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마치 꿀통 위의 무거운 통나무가 곰을 죽이는 것처럼. 그는 또한 말한다: 단순히 그들이 다른 나라에 살고 다른 언어를 말한다고 하여, 사람들을 너희에게 낮선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 만일 너희가 그들을 원수들로 여기고 그들이 너희들을 그렇게 여긴다면, 그것은 너희에게 더 악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르지 말라, 그러면 그것은 너희에게 더욱 복이 될 것이다.

'Yes', people reply, 'but the world is so arranged that to resist its arrangements is more painful than to live in accord with them. If a man refuses military service he will be sent to a fortress and perhaps shot. If a man does not safeguard his life by acquiring the property he and his family need, he and they will die of hunger.' So people say, trying to defend the world's arrangement, but they do not think so themselves. They only speak so because they cannot deny the justice of the teaching of Christ in whom they are supposed to believe, and they must justify themselves in some way for not fulfilling that teaching. They not only do not think this, but they have never even thought about the matter at all. They believe the world's teaching and merely employ the excuse the Church has taught them, to the effect that if one fulfils Christ's teach­ing one must endure great suffering; and therefore they have never even tried to fulfill it. We see the innumerable sufferings people endure for the sake of the world's teaching, but in our time we never see sufferings for the sake of Christ's teaching at all. Thirty millions have perished for the world's teach­ing in warfare; thousands of millions have pined in a tormenting life for the sake of the world's teaching, while I know not only no millions, but not even thousands or dozens, or even one single man, who has perished by death or by a painful life of hunger and cold for the sake of Christ's teaching. It is only a ridiculous excuse, showing to what a degree Christ's teaching is unknown to us. Not only do we not share it, we have never even seriously con­sidered it. The Church has been at pains to explain Christ's teaching so that it has appeared to us not as a teaching of life but as a bugbear.

사람들은 대답한다: ‘옳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조직되어 있어서 그 제도들에 저항하는 것은 그것들에 맞추어 사는 것 보다도 고통스럽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병역의무를 거부한다면 그른 감옥에 보내져서 총살당할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와 그의 가족이 필요한 재산을 획득하여 자신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와 그들은 굶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제도를 옹호하려 하지만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그렇게 말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의로움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런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음에 대해서 스스로를 정당화 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심지어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가르침을 믿으며 교회가 그들에게 가르쳐준 변명을 단순히 이용할 뿐이다, 결국에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행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심지어 그들은 그것을 이행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의 가르침을 위해서 사람들이 겪는 무수한 고통들을 본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위한 고통은 결코 보지 못한다. 삼천만 명이 세상의 가르침을 위해서 전쟁으로 죽었다; 몇 십억의 사람들이 세상의 가르침을 위해서 고통스러운 삶으로 사라졌지만, 나는 수백만 명도, 심지어 수천 명 아니 수십 명도, 아니 심지어 단 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에 굶주리거나 추위로 인한 죽음에 이르거나 고통스런 삶으로 소멸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오직 우스꽝스러운 변명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공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결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삶의 가르침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깨비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를 써서 설명해 왔다.

Christ calls men to a spring of water which is there beside them. Men are tormented by thirst, eat dirt, and drink one another's blood, but their teachers tell them that they will perish if they go to the spring to which Christ directs them. And people believe this; they suffer and die of thirst at two steps from the water, not daring to go to it. But it is only necessary to believe Christ, that he has brought blessing on earth and that he gives us who thirst a spring of living water, and to come to him, to see how insidious is the Church's deception and how insensate are our sufferings when salvation is so near at hand. It is only necessary to accept Christ's teaching simply and plainly for the terrible decep­tion in which we all and each are living to become clear.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옆에 있는 샘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목마름으로 고통받으며, 먼지를 먹고 다른 사람들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그들의 교사들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인도하는 샘으로 간다면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믿는다; 그들은 물 을 몇 걸음 앞에 두고서 갈증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서, 그가 세상에 행복을 가져왔으며 목마른 우리에게 살아 있는 샘물을 주며, 그에게 나아가서, 교회의 기만이 얼마나 교할하며, 구원이 바로 가까이 있음에도 우리는 얼마나 무의미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단순히 그리고 평범하게 받아 들일 필요가 있으며, 그러면 우리 모두 그리고 각자가 살고 있는 무서운 기만이 분명해질 것이다.

Generation after generation we labor to secure life by means of violence and by safeguarding our property. Our happiness seems to us to lie in obtaining the maximum of power and the maximum of property. We are so accustomed to this that Christ's teaching, that a man's happiness cannot depend on his power or his estate and that a rich man cannot be happy, seems to us like a demand to make a sacrifice for the sake of future bliss. But Christ did not think of calling us to sacrifice; on the contrary, he teaches us not to do what is worse but to do what is better for us here in this life. Christ, loving men, teaches them to refrain from securing themselves by violence and by property, just as others who love men teach them to refrain from brawling and drunkenness. He says that men, if they live without resisting others and without property, will be happier; and by the example of his own life he confirms this. He says that a man living in accord with his teaching must be prepared to die at any moment by the violence of others, by cold or hunger, and cannot be sure of a single hour's life. And we imagine this to be a terrible demand of sacrifice; but it is only a declaration of the conditions in which every man always and inevitably lives. Christ's disciple must be prepared at any moment for suffering and death. But is not a disciple of the world in the same position? We are so accustomed to our pretence that all we do for the imaginary security of our life- our armies, fortifications, stores, clothes, and doctoring, our property and our money- seems to us something that really and seriously secures our life. We forget, though it is obvious to everyone, what happened to the man who planned to build barns in order to be safe for many years. He died that same night. Indeed all we do to safeguard our life is just what an ostrich does, standing still and hiding its head in order not to see how it is being killed. We do worse than the ostrich: doubtfully to safeguard our doubt­ful life in a doubtful future, we certainly destroy our certain life in the certain present.

우리는 대를 이어서 폭력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의 재산을 축적함으로써 삶을 보장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최대의 권력과 최대의 재산을 획득함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런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사람의 행복은 자신의 권력이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으며, 부자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마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우리의 이곳에서 지금의 삶을 위해서 더욱 해로운 것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행하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그들에게 폭력이나 재산에 의해서 스스로를 보장하지 말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싸움과 음주를 피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똑같다. 그리스도, 만일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재산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욱 행복해 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자기 자신의 삶에서 본을 보임으로써 이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폭력에 의해서, 추위나 굶주림에 의해서, 어느 순간에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단 한 시간의 삶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무서운 희생의 요구인 것처럼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모든 사람이 언제나 피할 수 없이 살고 있는 상태들에 대한 선언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반드시 어느 순간에라도 고통과 죽음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제자도 똑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 우리의 기만에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의 삶에 대한 가상의 안전- 우리의 군대들, 요새들, 상점들, 의복들, 그리고 의료, 우리의 재산과 돈- 을 위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진실로 그리고 진정으로 삶을 보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에게 명백한 것으로서, 몇 년 동안 안전해지기 위해서 창고를 지을 계획을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잊어 버린다. 그는 바로 그날 밤에 죽었다. 진실로 우리가 삶을 보장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은 마치 낙타가 살해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가만히 서서 머리를 숨기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낙타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한다: 의심스러운 미래에 의심스런 삶을 의심스럽게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는 확실한 현실에서 우리의 확실한 삶을 확실히 파괴하고 있다.

The deception consists in the false conviction that our life can be secured by strife against others. We are so accustomed to this deception- an imaginary safeguarding of our life and property- that we do not notice all we lose by it. And we lose all- our whole life. Our whole life is so absorbed in cares for this safeguarding of life, this preparation for life, that no life at all is left us.

기만은 바로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으로 확보된다는 거짓된 확신에 있다. 우리는 이런 기만- 우리의 삶과 재산에 대한 가상의 안전- 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잃게 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의 전체 삶은 이러한 삶의 안전에, 이러한 삶의 준비에, 대한 근심들에 너무나 몰두해 있어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삶도 남아 있지 않다.

We need only discard our habits for a moment and regard our life from outside, to see that all we do for the supposed safeguarding of our life we really do not at all to safeguard our life, but only to forget, by busying ourselves with these things, that life is never secure. But not only do we deceive ourselves and spoil our real life for the sake of an imaginary one; we generally by this effort to make ourselves safe, ruin the very thing we wish to secure. The French armed themselves to secure their life in 1870, and in consequence of this safeguarding hundreds of thousands of Frenchmen perished. The same is done by all nations that arm themselves. The rich man secures his life by having money, and that very money attracts a robber who kills him. A nervous man safeguards his life by undergoing a cure, and the cure itself slowly kills him, or if it does not kill him certainly deprives him of life, like that sick man who deprived himself of life for thirty-eight years, by waiting for the angel at the pool (John v. 2-8).

우리는 오직 잠시 동안 우리의 습관들을 버리고 바깥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삶의 가상적인 보장을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진정 전혀 우리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를 이 모든 것들에 분주하게 만듦으로써, 삶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잊어 버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상의 삶을 위해서 스스로를 속이며 우리의 진정한 삶을 망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려는 이런 노력에 의해서 우리가 보장하고 싶어하는 것 자체를 파괴한다. 1870년에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이런 보호행위의 결과로서 수십만 명의 프랑스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유한 자들은 돈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돈은 그를 죽이려 하는 강도를 유인하다. 우울증 환자는 치료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호하려 하지만, 그 보호 자체가 그를 서서히 죽이거나, 그것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연못에서 천하를 기다리면서 38년동안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병자처럼(요한복음 5장 2-8절), 분명히 자신의 삶을 빼앗길 것이다.

Christ's teaching that life cannot be made safe, but that one must always, at each moment, be ready to die, is certainly better than the world's teaching that one must secure one's life: it is better because the inevitability of death and the insecurity of life remain the same whether one adopts the world's teaching or that of Christ; and in Christ's teaching life itself is not entirely absorbed in the useless occupation of pseudo-safeguarding one's life, but becomes free and can be devoted to its one natural aim, the welfare of oneself and one's fellows. A disciple of Christ will be poor. Yes; that is to say, he will always make use of all those blessings which God has given him. He will not ruin his life. We have called poverty, which is a happiness, by a word that indicates misfortune, but the reality of the matter is not altered thereby. To be poor means that a man will not live in a town but in a village, and will not sit at home but will work in the woods or fields; will see the light of the sun, the earth, the sky, and animals; will not con­sider what he can eat to arouse his appetite and how to get his bowels to move, but will be hungry three times a day; will not toss about on soft cushions wondering how he is to escape from sleeplessness, but will sleep; he will have children and will live with them; will have free intercourse with all men, and above all will not do things he does not wish to do, and will not be afraid of what will happen to him. He will sicken, suffer, and die, as everyone does (though, to judge by the way poor men sicken and die, it will be better for him than it is for the rich) but he will certainly live more happily. To be poor, to be indigent and a vagrant( means vagrant) is what Christ taught; that without which it is impossible to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out which it is impossible to be happy here on earth.

삶은 안전하게 만들질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는 세상의 가르침보다 분명히 낫다: 그것은 더 낫다 왜냐하면 죽음의 불가피성과 삶의 불확실은 우리가 세상의 가르침을 취하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취하든 똑같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삶 자체는 자신의 삶을 거짓되게 보장하는 무의미한 직업에 전적으로 몰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워져서 우리의 당연한 목적, 자신과 인류의 행복에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가난할 것이다. 그렇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언제나 하나님이 그에게 준 모든 행복들을 사용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빈곤이 행복이지만, 그것을 불행을 뜻하는 말로 불렀다, 그러나 그 때문에 문제의 실체가 바뀌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도시에 살지 않고 시골에 살며, 집 안에 앉아 있지 않고, 숲속에서나 들판에서 일하며; 햇빛, 대지, 하늘, 그리고 동물들을 보게 되며; 식욕을 돋구기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그리고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루에 세 번 배고플 것이며; 연한 베개를 위에서 어떻게 불면증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고 자며; 그는 자녀들을 가질 것이며 그들과 함께 살 것이고; 모든 사람들과 자유로운 교제를 가지며 무엇보다도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처럼(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병들고 죽는다는 점에서 비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더 나을 것이다) 병들고 고통받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더 행복하게 살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하며 거지( 는 거지를 의미한다)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이다, 즉, 가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감이 불가능하며, 가난하지 않고는 이곳 지상에서 행복할 수 없다.

'But no one will feed you and you will die of hunger', is said in reply to this. To the objection that a man living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will die of hunger Christ replied by one brief sentence (the one which is interpreted as a justification for the sloth of the clergy, Matt. x. 10; Luke x. 7).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을 부양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굶어 죽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은 굶어 죽을 것이다는 반대에, 그리스도는 한 가지 짧은 문장으로 대답했다(이것은 목사들의 무위도식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태복음 10장 10절; 누가복음 10장 7절).

He said: 'Take no wallet for your journey, neither two coats, nor shoes, nor staff: for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food.' 'In that same house remain, eating and drinking such things as they give, for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hire.'

그가 말한다: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그 집에 유하여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The laborer is worthy, , literally means: can and should have his subsistence. It is a very short saying; but for anyone who under­stands it as Christ did, there can be no idea of arguing that a man who has no property will die of hunger. To understand these words in their real meaning one must first of all quite renounce the supposition (which has become so common among us as a consequence of the dogma of the redemption) that man's welfare consists in idleness. One must return to the conception natural to all unperverted people, that the necessary condition of happiness for man is not idleness, but work; that a man cannot reject work; that not to work is dull, wearisome, and hard, as it is dull and hard for an ant, a horse, or any other animal not to work. One must forget our savage superstition that the position of a man with an inexhaustible purse- that is to say, with a Govern­ment post, the ownership of land, or of bonds bear­ing interest, which make it possible for him to do nothing- is a naturally happy condition. One must restore in one's imagination that view of work which all unperverted people have, and which Christ had when he said that the laborer was worthy of his subsistence. Christ could not imagine people who would regard work as a curse, and therefore could not imagine a man who did not work or did not wish to work. He always supposes that his disciples work. And therefore he says: 'If a man works, then his work will feed him.' If another man takes the produce of this man's labor, then the other man will feed the worker just because he reaps the ad­vantage of his labor. And so the worker will re­ceive his subsistence. He will not have property, but there can be no doubt about his subsistence.

일꾼은 가치가 있다, , 직설적으로 말하면, 음식을 얻을 수도 있으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이것을 그리스도가 이해한 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산이 없는 사람이 굶어 죽을 것이라는 주장을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을 그 진정한 의미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람의 행복이 나태함에 있다는(이것은 구속의 교리의 결과로서 우리에게는 너무나 흔해졌다) 주장을 확실히 버려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사람을 위한 행복의 필요한 조건은 나태함이 아니라 노동이며; 사람은 노동을 거부해서는 안되며; 노동하지 않는 것은, 개미나 말 기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단조롭고 지루하며 힘든 것이라는, 타락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고유한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지갑 속에 무진장한 돈을 가진 사람의 지위- 다시 말하면, 정부의 관리, 토지나 유가증권의 소유권- 가 당연한 행복의 조건이라는 우리의 야만적인 미신을 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상상속에서, 타락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노동자는 먹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 노동의 시각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노둥을 저주라고 여기거나 노동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제자들이 노동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사람이 일하면, 그의 노동은 그를 부양할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의 노동의 결과를 가지려 한다면, 다른 사람은 그 노동자를 먹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노동의 이익을 거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 노동자는 자신의 양식을 얻을 것이다. 그는 재산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양식에 대한 걱정은 있을 수 없다.

The difference between Christ's teaching about work and the teaching of our world lies in this, that according to the world's teaching work is man's peculiar merit for which he keeps account with others and considers that he has a right to the more subsistence the more he works; while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work is a necessary condition of man's life and subsistence is the inevitable conse­quence of work. Work produces food, food pro­duces work, that is the unending circle: the one is the consequence and the cause of the other. How­ever evil a master may be, he will feed his workman as he will feed the horse that works for him; and will feed him so that the workman may produce as much as possible, in other words, can co-operate in that which provides the welfare of man.

노동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르침의 차이는 이와 같다. 세상의 가르침에 의하면 노동은 사람의 독특한 장점으로 사람은 노동으로써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그가 일하면 일할수록 더 많은 식량을 가진다고 여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노동은 사람의 삶의 필수적인 조건이며 식량은 노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노동은 음식을 만들고, 음식은 노동을 만든다, 이것은 끝없는 순환이다: 전자는 후자의 결과이며 원인이다. 주인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말을 먹이듯이 그의 일꾼에게 양식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일꾼이 가능한 많이 생산하도록 그를 먹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행복을 마련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Christ each individual man, independently of what the world may be like, will have the best kind of life if he understands that his vocation is not to demand work from others but to devote his own life to working for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A man who acts so, says Christ, is worthy of his subsistence- that is to say, cannot but receive it. In a word, man does not live that others should work for him, but that he should work for others. Christ sets up the basis which undoubtedly ensures man's material existence, and by the words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subsistence', he sets aside that very common objection to the possibility of fulfilling his teaching which says that a man carry­ing out Christ's teaching among people who do not carry it out will perish of hunger and cold. Christ shows us that a man ensures his subsistence not by taking it from others, but by doing what is useful and necessary for others. The more necessary he is to others the more safe will be his existence.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그리고 그의 삶을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해 바치러 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각자 개인은, 세상이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만일 그의 천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노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노동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담보로 맡기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최상의 삶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그의 양식을 구할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양식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도록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물질적인 존재를 확실히 보장하는 원리를 내세운다, 그리고 ‘일꾼은 자기 삯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말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며 굶주림과 추위로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행 가능성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자체를 일축해 버렸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빼앗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행함으로써 확보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할수록, 그의 존재는 더욱 안전해질 것이다.

Under the existing arrangements of the world people who do not fulfill Christ's law but who work for their neighbors and have no property, do not die of hunger. How then can one make it an objection to Christ's teaching that those who obey it- that is to say, those who work for their neighbors- will die of hunger? A man cannot die of hunger while the rich have bread. In Russia, at any given moment, there are always millions of people living without any property, simply by their labor.

기존의 세상의 제도 아래에서도 그리스도의 율법을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을 위해 일하면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이웃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이 굶어 죽을 것이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부자가 빵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굶어 죽지 않는다. 러시아에서는, 어떤 시점에서도, 재산이 없이 단순히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수백만은 된다.

Among the heathen a Christian will be provided for as among Christians. He works for others, consequently they need him, and therefore he will be fed. Even a dog that is wanted is fed and cared for, how then should a man not be fed and cared for who is of use to everyone? . .

이교도들 안에서도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처럼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양식을 얻는다. 심지어 유용한 개마저 먹이를 얻으며 보호를 받는데, 어찌하여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이 먹지 못하며, 보호받지 못하겠는가?

But a sick man, one with a family and children, is not wanted and cannot work- so people will cease to feed him, say those who are bent on making out a case for a bestial life. They will and do say this, and do not notice that they themselves, who say so and would like to act so, cannot do it, but behave quite otherwise. Those very people who do not acknowledge the practicability of Christ's teaching, follow it! They do not cease to feed a sheep, a bull, or a dog which falls ill. They do not even kill an old horse, but give it such work as it can do; they feed their family, as well as lambs, little pigs, and puppies, expecting them to be of use. So how should they not feed a useful man when he is ill, and how should they fail to find work within their strength for the old and the young, or cease to rear those who will one day work for them?

그러나 병자, 가족과 자식들을 가진 사람은 필요하지도 않고 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부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인간적인 삶의 경우를 끄집어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그들은 이것을 말하기도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말하며 그렇게 행도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그와는 전혀 반대로 행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행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자체도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양, 소, 또는 개가 병에 걸렸을 때 먹이기를 중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늙은 말도 죽이지 않고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을 준다; 그들은 그들의 가족 뿐만 아니라, 어린양들, 돼지 새끼들, 그리고 강아지들도, 그들이 유용하기를 기대하면서, 먹여준다. 그런데 유용한 사람을 그가 아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노인들이나 아이들의 힘에 맞는 일을 찾아 주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을 위해 일해줄 사람들을 양육하지 않겠는가?

They not only will do this, but they are doing this very thing. Nine-tenths of the people- the common laborers- are fed like working cattle by the one-tenth who are not common people but are rich and powerful. And however gross the delusion in which that one-tenth live, however much they may despise the other nine-tenths, this one-tenth of powerful people never deprive the nine-tenths of necessary subsistence, though they have the power to do so. In order that they may have offspring who should labor for them, they do not deprive the common people of what is necessary for them. Latterly this one-tenth have consciously endeavored to arrange for the nine-tenths to be properly fed, that as large an output of work may be got from them as possible, and that fresh workmen may be produced and reared. Even the ants breed and rear their own milk-cows, so how should men not do as much and breed those who will work for them? Workers are needed. And those who make use of their work will always be much concerned to see that the workers do not die out.

그들은 이런 일을 행할 것이며, 바로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다. 사람들 중의 9할- 보통의 노동자들- 은 보통 사람들이 아닌 부자와 권력자들로 구성된 1할에 의해서 노동하는 가축처럼 식량을 얻고 있다. 그리고 1할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망상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들이 다른 9할의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경멸하더라도, 이런 1할의 힘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9할의 사람들에게서 필요한 식량을 박탈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렇게 행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을 위해 일해 줄 자손들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런 1할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9할의 사람들이 적절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애써서 계획을 마련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가능한 많은 노동량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노동자들이 생겨나고 키워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심지어 개미들도 그들의 젖소를 키우고 부양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들이 그처럼 행하지 않으며 그들을 위해 일해줄 사람들을 부양하지 않겠는가? 노동자들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노동자들이 죽어 없어지지 않도록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The objection to the practicability of Christ's teaching, which says that if I do not acquire for myself, and do not retain what I have acquired, no one will feed my family, is correct, but only in relation to idle, useless, and therefore harmful, people such as the majority of our wealthy class. No one except stupid parents will bring up idle people, because idle people are of no use to anyone, not even to themselves; but even the worst men will feed and rear workers. Calves are reared, and man as a working animal is more valuable than a bull, as the prices in the slave-markets have always proved. That is why children will never be left without care.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용성에 대한 반대 이론은,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구하지 않고, 내가 구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나의 가족을 부양해 주지 않을 것이다 말하고 있으나, 이 말은 옳지 않으며, 오직 게으르고 무익하며, 그러므로 해로운 사람들, 예로 들면 우리의 부유층의 대부분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미련한 부모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게으른 사람들을 부양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게으른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쓸모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악한 사람들도 노동자들을 먹을 것을 주고 양육할 것이다. 송아지들을 기른다, 그리고 일하는 동물로서 사람은, 노예 시장에서 언제나 가치가 증명되었듯이, 소 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결코 보호되지 않은 채 버려두지 않는 이유이다.

Man does not live that others should serve him, but that he should himself serve others. He who labors will be fed.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섬기도록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산다. 일하는 사람은 먹을 것이다.

That is a truth confirmed by the life of the whole world.

이 말은 전 세상의 삶에 의해서 확인된 진리이다.

Till the present time, always and everywhere, where man has worked he has obtained sustenance, as every horse receives his feed. And such sustenance was received by the workers involuntarily, against the grain, for they only desired to free themselves from toil, to get as much as possible, and to seat themselves on the neck of those who were sitting on their necks. Such an involuntary, unwilling worker, envious and angry, was not left without sustenance, and was even more fortunate than the man who did not work but lived on the labor of others. How much more fortunate still will he be who works according to Christ's law, and whose aim is to work as much as he can and to take as little as possible! And how much more happy will his position be when around him there are at least some, and perhaps even many, men like himself, who will serve him!

오늘날까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말들이 먹이를 받아 먹듯이, 사람이 노동해 왔던 곳에서는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양식들은 노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마지못해 받아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노동에서 해방되고, 가능한 많이 받아서, 그들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앉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지못해 억지로 일하는 노동자도, 시기하고 화를 내지만, 식량을 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일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따라 일하며, 그의 목적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며 가능한 적게 받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자신처럼 그를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이 적어도 몇 사람이라도, 아니 심지어 더 많이 있을 때, 그의 위치는 얼마나 더 행복하겠는가?

Christ's teaching of work and its fruits is expressed in the story of the feeding of the five and the four thousand with five loaves and two fishes. Humanity will reach the highest happiness possible for it on earth when people do not try to swallow and consume everything themselves, but when they do as Christ taught them by the sea-shore.

일과 그 결과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의 사람들의 배를 채운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신만을 위해서 삼켜버리거나 소비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바닷가에서 그들에게 가르친 대로 행할 때, 인류는 가능한 최대의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Some thousands of people had to be fed. A disciple told Christ that he had seen a lad who had some fishes, the disciple also had some loaves. Jesus understood that some of the people coming from a distance would have brought food, but that others would not. (That some had supplies with them is shown by the fact that in all four Gospels it is mentioned that when the meal was ended remnants were collected in twelve baskets. If no one but the lad had brought anything, there would not have been those twelve baskets in the field.) If Christ had not done what he did, namely, performed the miracle of feeding the thousands of people with five loaves, what happens in our world would have happened there. Those who had supplies would have eaten what they had. They would have eaten it all, and even over-eaten themselves so as not to leave anything over. The mean ones, perhaps, would have carried home their surplus. Those who had nothing would have remained hungry, watch­ing the eaters with angry envy, and perhaps some of them would have snatched from those who saved and there would have been quarrels and fights, and some would have gone home satiated, others hungry and angry. It would have been as it is in our life.

수천명의 사람들을 먹여야만 했다. 한 제자가 고기 몇 마리를 가진 아이를 보았다고 그리스도에게 말했으며 그 제자 역시 빵 몇 개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먼 곳에서 오는 어떤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 왔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을 것으로 이해했다. (어떤 사람들이 여분을 지녔다는 것은 식사가 끝났을 때 음식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나 모였다고 4 복음서 모두에 언급된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만일 그 아이만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면, 들판에 열 두 광주리가 있을 리가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자신이 행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면, 즉, 빵 다섯 개로 수천명의 사람들을 먹인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 났을 것이다. 여분을 가진 사람들은 가진 것을 다 먹어 버렸을 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을 모두 먹어 버렸을 것이며, 심지어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고 억지로 먹어 버렸을 것이다. 인색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남은 것을 집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을 것이며, 먹고 있는 사람들을 분노의 시기심으로 쳐다보다가, 아마도 그들 중의 몇몇은 아끼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가로채 갔을 것이고, 말다툼과 싸움들이 있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배를 채우고 집에 갔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배도 고프고 화도 났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있는 일과 똑 같은 일이 일어 났을 것이다.

But Christ knew what he wanted to do (as is said in the Gospels). He bade them all sit round, and he told his disciples to offer to others what they themselves had, and to bid others do the same. And then it appeared that, when all who had supplies had done like Christ's disciples- that is to say, had offered what they had to others- all ate moderately, and, after going round the circle, there was food enough left for those who had at first not eaten. And all were satisfied and much food remained over, so much that they gathered up twelve baskets full.

그러나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둘러 앉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분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따라 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모두가 적당하게 먹었다 그리고, 한 바퀴 돌고 나자, 처음에 먹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음식이 충분히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였으며 많은 음식이 남아서, 열 두 광주리에 가득할 만큼 많이 모였다.

Christ taught men that they should deliberately behave in this way in life, because such is the law of man and of all humanity. Work is a necessary condition of man’s life. Work also gives welfare to man. And therefore the withholding from others of the fruits of one's labor or of other people's labor, hinders the welfare of man. Giving one's labor to others promotes man's happiness.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삶에 있어서 이처럼 사려 깊게 행동하는 것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사람과 모든 인류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사람의 삶의 필요 조건이다. 노동은 또한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또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열매를 빼앗는 것은 사람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람의 행복을 촉진하는 것이다.

'If people do not take away property from one another they will die of hunger', we say. It would seem that we should rather say the contrary: if people take by force from one another there will be some who will die of hunger- and this actually occurs.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재산을 빼앗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우리는 차라리 반대를 말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일 사람들이 폭력으로 서로에게서 빼앗는다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Really every man, however he lives- whether ac­cording to Christ's teaching or to the world's- is alive only thanks to the work of other people. Others have protected him and given him drink and fed him, and still protect him and feed him and give him drink. But by the world's teaching man, by violence and threats, obliges others to continue to feed him and his family. By Christ's teaching man is equally protected, nourished, and supplied with drink by others; but in order that others should continue to guard, to feed, and to give him drink, he does not bring force to bear on anyone, but tries himself to serve others and to be useful to all men as he can, and thereby he becomes necessary to all. Worldly people will always wish to cease to feed one who is unnecessary to them and who compels them by force to feed him, and at the first opportunity they not only cease to feed him, but kill him as un­necessary. But all men, always, evil as they may be, will carefully feed and safeguard one who works for them.

정말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살든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든지 아니면 세상의 가르침에 따르든지- 오직 다른 사람들의 노동 덕택에 살아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 보호해주며, 그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를 보호해주고 먹여주며 먹을 것을 주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가르침에 의해서 사람은, 폭력과 협박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자기 가족을 계속해서 부양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똑같이 보호받고, 양분을 얻고, 마실 것을 공급받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보호해주고, 먹여주며, 마실 것을 주어야 하지만,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 노력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되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불필요한 사람에게 먹여주는 것을 중단하기를 원하다, 그리고 기회가 닿자마자 그들을 부양할 것을 중단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하여 그들을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자신들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부양하고 보호해줄 것이다.

In which way then is it safer, more reasonable, and more joyous to live: according to the world's teaching or according to Christ's?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안전하고, 합리적이며, 그리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쪽일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쪽일까?

   
       
   

 ] 위로 ] 서문 ] I. 복음 교훈의 열쇠 ] II. 무저항의 명령 ] III.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 IV.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 VI. 다섯 가지 계명 ] VII. 거짓 교리 ] VIII. 삶의 길 ] IX. 신앙과 행위 ] [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 XI. 죽은 교회 ] XII. 신앙이란 무엇인가? ] Notes ] Maude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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