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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el PEACE Prize Winners 


노벨 평화상 수상자

Lafontaine, Henri-Marie

라퐁텐

Lafontaine, Henri-Marie (b. April 22, 1854, Brussels--d. May 14, 1943, Brussels), Belgian international lawyer and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Peace Bureau (1907-43) who received the Nobel Peace Prize in 1913.

Lafontaine studied law at Brussels University. He was admitted to the bar in 1877 and established a reputation as an authority on international law. In 1893 he became professor of international law at the Université Nouvelle in Brussels and two years later was elected to the Belgian Senate as a member of the Socialist Party. He served as vice chairman of the Senate from 1919 to 1932.

Lafontaine took an early interest in the International Peace Bureau, founded in 1882, and was influential in the Bureau's efforts to bring about The Hague Peace Conferences of 1899 and 1907. He was a member of the Belgian delegation to the Paris Peace Conference in 1919 and to the League of Nations Assembly (1920-21). In other efforts to foster world peace, he founded the Centre Intellectuel Mondial (later merged into the League of Nations Institute for Intellectual Co-operation) and proposed such organizations as a world school and university, a world parliament, and an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Lafontaine was the author of a number of legal handbooks and a documentary history of international arbitration. He was also founder of the review La Vie Internationale.

라퐁텐 (Henri-Marie Lafontaine).

1854. 4. 22 벨기에 브뤼셀~1943. 5. 14 브뤼셀.

벨기에의 국제변호사.

국제평화국 국장(1907~43)으로서 191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브뤼셀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877년부터 법조계에 몸담아 국제법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893년 누벨대학교의 국제법 교수가 되었고 2년 후에는 사회당원으로서 상원에 진출했다. 1919~32년 상원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일찍부터 국제평화국에 관심을 가졌던 라퐁텐은 평화국과 협력해 2차례의 만국평화회의(1899, 1907)를 성사시켰다. 벨기에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파리 평화회의(1919)와 국제연맹 총회(1920~21)에 참석했으며 세계지성인 센터(나중에 국제연맹 지성인 협력기구로 흡수됨), 세계학교 및 세계대학, 세계의회, 국제사법재판소 등의 설립을 제안했다. 문서기록에 기초한 국제중재사와 수많은 법률개설서의 저자로서 〈세계인의 삶 La Vie Internationale〉을 간행하기도 했다.

 

만국평화회의

만국평화회의 (萬國平和會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창으로 개최된,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국제회의.

제1차 회의는 1899년 26개국이 참가했고, 제2차 회의는 1907년 4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군비축소와 평화유지 문제를 협의했으나 군비축소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유독 가스 및 특수 탄환의 사용금지 선언 등을 조인했고, 국제중재재판소 설치에 합의했다. 특히 제2차 회의 때에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이준(李儁)·이상설(李相)·이위종(李瑋鍾) 3명의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 등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폭로하고, 국제여론의 도움을 얻어 조약을 파기시키려 했다. 회담 개최 며칠 전 헤이그에 도착한 3명은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며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평화회의 참가를 요구하는 한편 을사조약의 파기를 회의의 정식 의제로 상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측 대표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의 방해 공작으로 네덜란드 정부와 평화회의 의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넬리도프는 을사조약이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은 이상 이 문제에 대한 거론이 불가능하다며, 회의 참가까지도 거절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물러나게 하고 순종을 세웠으며,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구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박차를 가했다.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사법재판소 (國際司法裁判所).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국제연합(UN)의 주된 사법기관.

제2차 세계대전 후 상설국제사법재판소를 계승한 것으로 국제연합헌장 제9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연합의 주사법기관이다. 동 재판소는 부속 정관(定款)에 따라 기능을 수행하며, 동 정관은 상설국제사법재판소 정관을 기초로 하며 본 헌장과 불가분의 일체가 된다."

제93조는 국제연합 가맹국은 동 정관의 자동 당사국이 되며, 비가맹국은 국제연합총회가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사안별로 결정하는 조건으로 당사국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소는 15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데, 전원 국적이 달라야 하며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선출한다. 재판관들은 종신제는 아니지만, 9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할 수 있다. 재판소는 헤이그에 있지만 필요한 경우 다른 곳에서도 개정(開廷)할 수 있다. 최초의 개정은 1946년 4월과 5월 헤이그에서 있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계속성을 가지는 조직체이다. 정관은 재판관들의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서는 상시 개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또한 자치조직체로서 소장 및 차장을 선출하고 서기를 임명하며, 필요한 직원과 사무요원들의 임명에 대해 규정한다. 재판소장과 재판소 서기는 헤이그에 거주해야 한다. 국가간의 분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재판소의 기능이므로, 오직 국가만이 법원에 제소(提訴)되는 사안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이 재판소는 정관의 모든 당사국과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한 조건(이 조건은 어떤 경우에도 당사국들을 법원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아서는 안됨)에 따르는 다른 국가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정관의 초안이 작성되고 있을 때 약소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국가들에서 강한 반발이 나왔다. 그들은 정관 초안이 재판소에 의무적 재판(권)을 부여하여 어느 나라든 다른 나라의 동의 없이 그 나라에 대해 제소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견해의 반대자들은 일부 국가는 아직 의무 재판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그들에게 이를 강제하고자 할 경우 그들이 정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상설재판소 정관 제36조에 있는 선택조항을 받아들이는 안을 지지했다. 이 안이 합의되어 동 제36조가 대부분 그대로 새 정관의 제36조가 되었다. 동 제36조의 규정에 따라 정관 당사자들은 언제든지 국제연합의 사무총장에게 의무적 관할을 수락한다는 선언서를 제출할 수 있으며, 40여 개국이 그렇게 하였다. 선언은 무조건적일 수도 있고, 다른 나라도 같은 선언을 해야 한다는 조부일 수도 있으며, 시한부일 수도 있다. 동 제36조의 다른 조항에서는 현행 상설재판에 구정관(舊定款)에 따라 재판권을 부여하기로 한 선언은 신정관(新定款)의 당사자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설재판소의 의무 재판권에 대한 수락 선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재판소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영어이다. 당사국은 2개 중 어느 것이나 사용할 수 있다. 한 언어로 제출된 서면답변(書面答辯)과 구두변론(口頭辯論)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거나 통역된다. 판결과 의견은 프랑스어와 영어 2가지로 한다. 제소는 당사자 쌍방이 맺은 특별합의를 재판소에 통지하거나 당사자 일방이 단독으로 서기에게 서면신청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절차는 서면과 구두로 구성된다.

재판소는 필요한 경우 증언을 청취하고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보고하도록 위촉할 수 있다. 이 두 절차가 코르푸 해협 사건(1949, 영국 대 알바니아)에서 행해졌다. 재판소는 프리비히어 사원 사건(1962, 캄보디아 대 타이)에서도 전문가들과 당사국들이 출정시킨 증인들의 말을 청취했다. 남서아프리카 사건(1966, 에티오피아·라이베리아 대 남아프리카)에서 재판소는 재판소가 직접 현지시찰을 해야 한다는 남아프리카의 주장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재판소의 심의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판결은 다수결로 하며 공개법정에서 낭독한다. 가부동수(可否同數)의 경우 재판소장이 결정투표권을 가지며, 남서아프리카 사건에서 가부가 7 대 7로 나뉘었을 때 이를 적용하여 판결했다. 판결에 대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재판관은 개별의견을 제출할 수 있으며 만장일치가 되는 판결은 거의 없다. 판결은 최종적이며 상소할 수 없다.

법원의 판결을 어떻게 집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주 제기된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국제기구회의에서 이 정관이 검토될 때 일부 대표가 골치를 앓은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다. 그들의 소망에 따라 헌장 제94조에 국제연합의 각 가맹국은 "자국(自國)이 당사자인 어떠한 사건에 있어서도……재판소의…… 판결에 따르기로" 하는 약속이 삽입되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조항도 포함되었다. "만약 사건의 일방 당사국이 재판소가 내린 판결에 따라 자국이 부담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타방의 당사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할 수 있다. 이사회는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권고를 하거나 판결의 집행에 필요한 조치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 또는 그 전신인 상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된 사건의 당사자가 재판소의 판결을 이행하지 않은 사례는 한 번뿐이다. 코르푸 해협 사건에서 알바니아는 재판소가 손해배상액으로 영국에 지급하라고 한 84만 3,947파운드를 지불하지 않았다.

정관 제65조에 따라 재판소는 국제연합헌장에 의해 또는 동 헌장에 따라 그러한 요청을 할 자격이 부여되는 모든 단체의 요청에 기하여 여하한 법률문제에 관하여도 권고적 의견을 말할 권한이 있다. 헌장 제96조는 총회나 안전보장이사회가 그러한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또한 국제연합의 기타 기관이나 전문기관도 총회의 승인을 받아 이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러한 요청은 문제의 정확한 진술을 포함하는 서면요청을 통해 이를 조명할 모든 문서들을 첨부하여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국제사법재판 소송절차는 계쟁사건(係爭事件)에서의 절차와 다소 유사한 면이 있다. 서면 또는 구두의 진술을 제출하는 국가나 기관은 지정된 시간 안에 타방이 제출한 진술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허용된다. 권고적 의견은 판결처럼 공개법정에서 발표된다.

千錠烈 옮김

한편 한국도 1991년 9월 17일 국제연합에 가입함에 따라 국제연합헌장 제93조 1항의 규정에 의해 국제사법재판소 당사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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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1/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