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i.com Homepage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Nobel PEACE Prize Winners 


노벨 평화상 수상자

Marshall, George C.

마셜

Marshall, George C., in full GEORGE CATLETT MARSHALL (b. Dec. 31, 1880, Uniontown, Pa., U.S.--d. Oct. 16, 1959, Washington, D.C.), general of the army and U.S. Army chief of staff during World War II (1939-45) and later U.S. secretary of state (1947-49) and of defense (1950-51). The European Recovery Program he proposed in 1947 became known as the Marshall Plan. He received the Nobel Prize for Peace in 1953.

Marshall was descended on both sides of his family from settlers who had been in Virginia since the 17th century. His father, a prosperous coke and coal merchant during his younger son's boyhood, was in financial difficulties when George entered the Virginia Military Institute, Lexington, in 1897.

After a poor beginning at the institute, Marshall's record steadily improved, and he soon showed proficiency in military subjects. Once he had decided on a military career, he concentrated on leadership, ending his last year at the institute as first captain of the corps of cadets.

Marshall finished college in 1901. Immediately after receiving his commission as second lieutenant of infantry in February 1902, he married Elizabeth Carter Coles of Lexington and embarked for 18 months' service in the Philippines. Marshall early developed the rigid self-discipline, the habits of study, and the attributes of command that eventually brought him to the top of his profession. Men who served under him spoke of his quiet self-confidence, his lack of flamboyance, his talent for presenting his case to both soldiers and civilians, and his ability to make his subordinates want to do their best.

Somewhat aloof in manner, he seemed to some acquaintances cold by nature, but he had a fierce temper held under careful control and a great affection and warmth for those close to him. Happily married for 25 years to his first wife until her death in 1927, he remarried three years later, taking as his second wife a widow, Katherine Tupper Brown, whose three children gave him the family he had hitherto lacked.

After his first service in the Philippines (1902-03), he advanced steadily through the ranks, ultimately becoming general of the army in December 1944. In World War I he served as chief of operations of the 1st Division, first to go to France in 1917, and then as the chief of operations of the 1st Army during the Meuse-Argonne offensive in 1918. After the war he served for five years as aide to General John J. Pershing (1919-24) and for five years as assistant commandant in charge of instruction at the infantry school, Fort Benning, Georgia (1927-33), where he strongly influenced army doctrine as well as many officers who were to become outstanding commanders in World War II.

He was sworn in as chief of staff of the U.S. Army on Sept. 1, 1939, the day World War II began with Germany's invasion of Poland. For the next six years, Marshall directed the raising of new divisions, the training of troops, the development of new weapons and equipment, and the selection of top commanders. When he entered office, the United States forces consisted of fewer than 200,000 officers and men. Under his direction it expanded in less than four years to a well-trained and well-equipped force of 8,300,000. Marshall raised and equipped the largest ground and air force i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 feat that earned him the appellation of "the organizer of victory" from the wartime British prime minister, Winston Churchill. As the chief representative of the U.S. chiefs of staff at the international conferences at Casablanca, Washington, Quebec, Cairo, and Tehran, Marshall led the fight for an Allied drive on German forces across the English Channel, in opposition to the so-called Mediterranean strategy of the British.

A few days after Marshall resigned as chief of staff on Nov. 21, 1945, President Harry Truman persuaded him to attempt, as his special representative, to mediate the Chinese Civil War. Though his efforts were unsuccessful, in January 1947 he was appointed secretary of state. In June of that year he proposed a European Recovery Program, which, known as the Marshall Plan, played a decisive role in the reconstruction of war-torn Europe. Also significant during his secretaryship were the provision of aid to Greece and Turkey, the recognition of Israel, and the initial discussions that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Marshall left his position because of ill health in 1949. Then, in 1950, when he was nearly 70, President Truman called him to the post of secretary of defense, in which he helped prepare the armed forces for the Korean War by increasing troop strength and matériel production and by raising morale.

After 1951 General Marshall remained on the active-duty list as the highest ranking general of the army, available for consultation by the government. In 1953 he was awarded the Nobel Prize for Peace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s to the economic rehabilitation of Europe after World War II and his efforts to promote world peace and understanding. He died at Walter Reed General Hospital, Washington, D.C., in 1959. (F.C.P.)

마셜 [George C(atlett) Marshall]

1880. 12. 31 미국 펜실베이니아 유니온타운~1959. 10. 16 워싱턴 D. C.

미국의 육군 장군.

제2차 세계대전중에 미국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고 그후 국무장관(1947~49)과 국방장관(1950~51)을 지냈다. 1947년 그가 제안한 유럽 부흥계획은 마셜 플랜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셜은 친가나 외가나 모두 17세기부터 대대로 버지니아에서 살아온 토박이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셜의 소년시절에는 코크스와 석탄 판매상으로 수입이 좋았지만, 1897년 그가 렉싱턴에 있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의 성적은 입학 초기에는 신통하지 않았지만 꾸준히 향상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종신군인으로 진로를 결정한 이후 리더십을 기르는 데 노력한 결과 군사학교의 마지막 해를 사관후보생단의 1등 반장으로 마쳤다. 1901년에 졸업했으며 1902년 2월 보병 소위로 임관된 직후 렉싱턴 출신 엘리자베스 카터 콜스와 결혼하고 필리핀에서의 18개월 복무를 시작했다. 마셜이 후에 육군 참모총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엄격한 자기 훈련, 공부하는 습관, 지도자의 자질을 길렀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은근한 자신감, 요란스럽지 않은 태도, 군인에게나 민간인에게나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는 재능, 부하들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는 마셜의 능력을 칭송했다. 태도가 다소 도도하여 일부 사람들에게는 천성이 차갑게 보이기도 했지만, 치밀한 자기관리에 의해 억제된 불 같은 격렬함이 있었고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이해심도 컸다. 25년 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의 반려자였던 첫 아내가 죽은 지 3년 후인 1930년에 재혼했다. 2번째 아내는 미망인인 캐서린 터퍼 브라운이었고 그녀의 세 아이가 그때까지 그에게 없었던 자녀가 되어주었다.

필리핀에서 처음 복무한(1902~03) 후 그는 꾸준히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1944년 12월에 육군 원수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제1사단의 작전참모장으로 1917년 처음으로 프랑스에 갔고, 1918년에는 제1군의 작전참모장으로 뫼즈아르곤 공격에 참가했다. 전후에는 존 J. 퍼싱 장군의 부관(1919~24)으로 5년간, 그리고 조지아 주 포트베닝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부교장(1927~33)으로 5년간 근무했다. 이 보병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의 탁월한 지휘관들이 된 많은 장교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날인 1939년 9월 1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그후 6년 동안 새로운 사단의 편성, 부대의 훈련, 새로운 무기와 장비의 개발, 최고 지휘관의 선발 등을 지휘했다. 취임 당시 20만 명 미만의 미군은 그의 지휘를 받아 4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잘 훈련되고 좋은 장비를 갖춘 830만 명의 대군으로 팽창되었다. 그는 카사블랑카·워싱턴·퀘벡·카이로·테헤란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미군 참모장들의 수석대표로 참석했으며, 영국의 지중해 전략에 반대하고 독일군에 대한 연합군의 영국해협을 통한 공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11월 21일에 참모총장직을 사임했으나 며칠 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설득으로 대통령의 특별 대리인으로 중국 내전의 중재역을 맡았다. 그의 중재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1947년 1월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에 마셜 플랜으로 알려진 유럽 부흥계획을 제안했는데, 이 계획은 전쟁으로 피폐된 유럽의 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원조의 제공, 이스라엘의 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을 위한 예비회담 등도 국무장관 재직시 이룩한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그는 2년 후 건강상의 이유로 장관직을 떠났다. 그후 1950년 70세가 가까웠을 때 트루먼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국방장관이 되어, 미군의 6·25전쟁 파병 준비를 도와 부대의 전투력과 군비생산을 증대하고 사기를 높이는 데 힘썼다. 1951년 이후 그는 정부의 자문에 언제라도 응할 수 있는 육군 최고위급 장군으로서 현역 명단에 남았다. 1953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경제재건을 위해 공헌한 것과 세계평화와 이해의 증진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59년 워싱턴 D.C.의 월터리드 종합병원에서 죽었다.

F. C. Pogue 글

BIBLIOGRAPHY.

The authorized biography of General Marshall is a projected four- or five-volume work by Forrest C. Pogue of which three volumes, Education of a General, 1880-1939 (1963), Ordeal and Hope, 1939-42 (1966), and Organizer of Victory, 1943-45 (1973), have appeared. Robert H. Ferrell, George C(1966), a volume in the "American Secretaries of State Series," written without access to unpublished State Department files, is a valuable summary of the period. John Robinson Beal, Marshall (1970), contains excerpts of the diary of an American news adviser to Chiang Kai-shek during the Marshall mission. H.L. Stimson and McGeorge Bundy, On Active Service in Peace and War (1947), draws heavily on Stimson's manuscript diary for the period 1941-45 in relation to Marshall. His papers are held in the George C. Marshall Library, Lexington, Va.

Marshall Plan

마셜 플랜

마셜 플랜 (Marshall Plan)

정식 이름은 유럽 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미국의 후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서·남 유럽의 경제를 재건하여, 민주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안정된 조건을 만들고자 세운 계획(1928~52).

미국은 전후의 빈곤·실업·혼란으로 인해 서구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C. 마셜은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유럽의 자립계획에 미국이 재정지원을 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 계획의 입안에는 국무성·육군성·해군성의 3성 조정위원회(SWNCC)와 조지 케난이 주재하는 국무성 정책 기획본부, W. 크렌던 국무차관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계획은 유럽 여러 나라의 주도적인 역할을 존중하는 형태로 제창되었기 때문에, 1947년 6월말 영·프·소 외상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소련은 이 계획을 반대했다. 결국 7월에 유럽 경제협력위원회(CEEC)에 참가한 16개국(후에 서독과 스페인이 가입하여 18개국으로 늘어남)의 대표가 유럽경제재건안을 제출했고, 미국 의회는 그 안을 기초로 해서 유럽 부흥계획을 승인했다. 초기에는 소련의 군사점령하에 있는 나라들까지 포함하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원조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되어 그리스-터키 군사원조가 요청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마셜 플랜도 냉전의 전개와 관계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트루먼 선언에 의해 명확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마셜 플랜은 반소·반공 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서구제국의 경제부흥과 경제통합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따라서 소련은 처음부터 이 계획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이에 따라 소련 영향권에 속하는 동유럽 국가들도 이 계획에서 곧 탈퇴했다.

마셜 플랜을 위해 특별히 설립된 '경제협력국'(ECA)은 폴 G. 호프만의 지휘 아래 이후 4년간 약 12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산업 및 농업 생산을 회복시키고 재정을 안정시켰으며 무역 신장을 도왔다. 원조의 대부분은 직접보조금의 형태였으며 나머지는 대부 형식으로 제공되었다. 이에 참가한 16개국은 상호 이해관계 조정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경제협력위원회'(Committee of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CEEC)를 조직하고 4개년부흥계획을 제출했다. 이 위원회는 이후 상설기구인 ' 유럽 경제협력기구'(Organisation for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OEEC)로 대체되었으며 이때 서독도 참가하게 되었다. 이 계획이 종료된 1952년 중반까지 총 120억 달에 달하는 원조금은 대부분 영국·프랑스·이탈리아·서독·네덜란드(원조액순)에 제공되었으며 서구 여러 나라의 무역적자와 달러 부족을 해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952년부터는 상호안전보장(Mutual Security Act/MSA)에 기반하여 원조가 계속되었다. OEEC로부터는 1950~52년에 유럽 결제동맹(European Payment Union/EPU) 및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ECSC), 1958~59년에는 유럽 자유무역연합(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EFTA)이 생겨났다. OEEC 자체는 1961년 9월에 기존 18개국에 미국과 캐나다가 가입하여 20개국 회원국으로 구성된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OECD)로 발전하여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4개년계획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몇몇 서유럽 국가들은 이 기간 동안에 국민총생산이 15~25%까지 증가했고, 화학·기계·철강 등의 산업 분야가 아주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에 의한 원조액의 약 70%는 유럽 여러 나라가 미국의 잉여농산물과 그 생산품을 수입하는 데 쓰여졌으므로 결과적으로 미국의 수출시장을 확대시켰고 서구 여러 나라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증가시킨 일면도 있다. 또한 1949년 이후 원조의 대부분이 군사원조의 색채를 띠기 시작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성립시키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어쨌든 마셜 플랜에 의한 경제원조가 크게 성공하자 이에 고무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이 계획을 확대해 1949년부터 '포인트 포 프로그램'(Point Four Program)을 세우고 전세계에 걸쳐 저개발국들에게 원조하기 시작했다.

   



 
 
 

 게시판  검색  자료실  사이트맵  예수와나?

 
 

Jesusi.com Homepage



This page was last modified 2001/09/19